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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wer of Babel

11 Now the whole earth had one language and the same words. And as people migrated from the east, they found a plain in zthe land of Shinar and settled there. And they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make bricks, and burn them thoroughly.” And they had brick for stone, aand bitumen for mortar. Then they said, “Come, let us build ourselves a city and a tower bwith its top in the heavens, and let us make a name for ourselves, lest we be dispersed over the face of the whole earth.” And cthe Lord came down to see the city and the tower, which the children of man had built. And the Lord said, “Behold, they are one people, and they have all one language, and this is only the beginning of what they will do. And nothing that they propose to do will now be impossible for them. Come, dlet us go down and there confuse their language, so that they may not understand one another’s speech.” So ethe Lord dispersed them from there over the face of all the earth, and they left off building the city. Therefore its name was called fBabel, because there the Lord confused1 the language of all the earth. And from there the Lord dispersed them over the face of all the earth.

z ch. 10:10; 14:1, 9; Isa. 11:11; Dan. 1:2; Zech. 5:11

a ch. 14:10; Ex. 2:3

b Deut. 1:28

c ch. 18:21

d ch. 1:26; [Ps. 2:4]

e ch. 10:25, 32; Luke 1:51

f ch. 10:10

1 Babel sounds like the Hebrew for confuse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11:1–9.

 

지구라트(Ziggurat)

 

 

본문의 바벨 사건을 소개하는 1-9절에 온 땅(온 지면)이라는 표현이 5번이나 반복된다. 

 

1절) 11장은 바벨탑의 사건을 시작하면서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10장의  5, 20, 31절의 내용을 통해서 이미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들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본문은 언어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당시 언어가 하나였다라고 본다면 창세기의 바벨탑과 관련된 기록이 연대기적인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바벨이라는 명칭이 앞선 10:25절의 벨렉(나뉨)이라는 이름에서 나온것이라고 한다면 바벨의 사건은 창 10장의 어느 중간에 위치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아직 민족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인류가 존재했다. 

 

2-4절) 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서 함께 모여 공동체, 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구운 벽돌을 가지고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라고 했다. 이는 탑을 높게 쌓아서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을때 에덴 동편에 나 있는 에덴의 출입구를 그룹 천사와 화염검으로 막으셨다(3:24). 또한 이후 가인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되어 간 곳이 에덴 동쪽(4:16)이었다. 이제 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이 옮겨 간 곳도 역시 동방의 시날평지였다. 본문의 시날 평지는 에덴 동산의 발원으로 알려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비옥한 이 땅에서 사람들은 함께 모여 정착하게 되었고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성읍과 탑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고자 다시 말하면 도시를 이루어 살기 위해서 건축물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내면에 하나님과 같아 지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을 읽을 수 있다. 도시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좁은 지역에 함께 모여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원이 부족해지고 이로 인해 범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새로운 기술, 벽돌 제작과 건축 기술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탑을 쌓음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본 바벨탑 사건과 앞선 창 1-10장의 주제를 비교해볼 수 있다. 

 

 

바벨론 성은 건축한 것은 가인과 니므롯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가인의 성 건축과 바벨론 성 건축은 중요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11) 바벨 성과 탑을 쌓은 목적은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직후 피조물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재창조의 축복을 주었다. 땅에 충만하려면 당연히 곳곳으로 흩어져야만 된다. 그렇다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왜 흩어지지 않으려 했을까? 홍수 이후 사람들은 이 재창조의 축복을 재앙으로 이해했을까? 그래서 이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을까? 축복을 저주로 오해했다기 보다는, 이들은 가인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성을 쌓는 목적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성을 쌓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창세기 4:12에서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저주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4:17에서 가인은 에덴 동편 즉 메소포타미아 또는 시날 지역에 성을 쌓고 그 성에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벨 성을 쌓은 사람들의 대의와 아주 유사하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은 벌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축복에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이들은 가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는 재창조 명령을 거부하고 니므롯의 이름의 의미처럼 하나님께 반역하려 한 것이다.

바벨 성과 탑을 쌓은 사람들이 이름을 내려 한 것은 노아 홍수 이전의 가인과 네피림의 행위와 비교할 수 있다. 노아 홍수를 초래한 네피림들이 추구했던 것 중에 하나도 이름이었다. 창세기 6:4은 그들은 가리켜 고대의 유명한 자, 또는 고대로부터 이름의 사람들(메올람 안세이 하셈, מֵעוֹלָ֖ם אַנְשֵׁ֥י הַשֵּֽׁם׃)이라고 했다. 가인과 네피림처럼 홍수 이후 사람들은 탑을 쌓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 하였다. 이들이 굳이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도록 쌓으려 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뱀의 유혹을 받아 엘로힘처럼 선악을 아는 위치에 오르려는 욕심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이들은 바벨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12) 그래서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과 나란히 세우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이런 행동은 창세기 4:26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셋과 그의 후손들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였다. 이처럼 바벨 성과 탑을 쌓는 사람들은 에덴의 뱀과 가인과 네피림과 그리고 니므롯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고 이들과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즉 이들은 가인의 길을 걷는 뱀의 후손들이었다.

11) Mathews, Genesis 1–11:26, 478–479.

12) Gordon Wenham, Genesis 1–15, 239–240. Mathews, Genesis 1–11:26, 481–482. 고대 지구랏은 신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상징 적인역할은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발견된지구랏의이름들에서도확인할수있다. ‘Temple of the Foundation of Heaven and Earth’ (Babylon), ‘Temple of the Wielder of the 7 Decrees of Heaven and Earth’ (Borsippa), ‘Temple of the Stairway to Pure Heaven’ (Sippar), ‘Temple of the Foundation of Heaven and Earth’ (Dilbat), ‘Temple which Links Heaven and Earth’ (Larsa). John H. Walton, “The Mesopotamian Background of the Tower of Babel Account and its Implications,”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5 (1995): 155–17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37–339.

 

5-9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기 위해서 내려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가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이기에 이같은 일을 시작하였고 이대로 두면 이후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들은 온 지몉에서 흩으셨기에 그들이 그 도시 건설하는 것을 멈췄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온땅의 언어를 혼란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5절의 ‘사람들’은 원래 ‘베네 하아담’ 사람의 아들들이다. 앞서 ‘베네 엘로힘’ 하나님의 아들들(6:2), ‘베노트 하아담’ 사람의 딸들(6:2)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제 아담이 자손들이 성읍과 탑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성읍과 탑을 쌓는 행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언어가 같아서였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들이 짓고자 했던 성읍과 탑은 실제로 어떤 형태였을까? 역사적으로 기원전 4000년경 말에 가마에 구운 벽돌을 사용해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또한 역청을 주성분으로 하는 회반죽을 이용해서 벽돌을 쌓았고 이는 내구성과 방수 기능을 제공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도시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화 초기 단계에 사람들은 성읍에 살지 않았고 신전이나 공공시설들이 성읍에 위치했다. 이러한 건축물은 신전 복합체(temple complex)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바로 지구라트(ziggurat)로 피라미드 구조의 건축물로 중앙에 신들의 거처가 존재하는 구조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도시화나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시도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인 단회적인 시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그냥 두었을 때 이러한 불순종의 행위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 때문에 이들을 흩으신 것이다. 인간의 악한 경향성은 성경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창 6:5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게획

창 8:21 사람의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창 11:6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

 

창세기 11:5–9은 창세기 11:1–4에 사용된 표현들을 교차대구법과 반복법을 통해 강조한다. 매튜가 분류한 표는 이를 아주 잘 보여 준다.14)

A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1절)

   B 거기(2절)

      C 서로(3절)

         D 자! 벽돌을 만들자(3절)

              E 자! 우리를 위해 쌓자(4절)

                      F 성과 대를 쌓아(4절)

                             G 여호와께서 강림하셨더라(5절)

                      F’ 성과 대를(5절)

              E’ 인생들의 쌓는(5절)

          D’ 자! 우리가 혼잡케 하자(7절)

    C’ 서로(7절)

   B’ 거기서(8절)

A’ 온 땅의 언어를(9절)

대구 구조를 통하여 두 가지 효과를 가져 온다. 첫째는 유사한 단어와 표현을 통해 인간의 바벨론 건축과 하나님의 흩음을 극적으로 연결시킨다. 둘째는 유사한 단어와 표현을 대칭시킴으로 인간들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뜻하는 바가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5절의 여호와의 강림은 바벨론 건축에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5절에서 하나님은 바벨 성과 탑을 쌓는 것을 보기 위해 강림하였고, 7절에서는 그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한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좌인 하늘까지 탑을 쌓아 올리려 했지만, 그 탑은 하나님이 보기 위해 내려와서 봐야 할 정도로 연약한 인간의 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의 강림과 함께 인간들이 바벨론 건축을 통해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 한 시도는 좌절된다.

14) Mathews, Genesis 1–11:26, 468. J. P. Fokkelman, Narrative Art in Genesis: Specimens of Stylistic and Structural Analysis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4), 22–2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41–342.

 

11장의 하나님의 강림은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의 강림을 생각나게 한다. 에덴이 강림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징벌하셨던 것처럼 이제 창 11:5-9에서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성과 탑을 쌓으려는 인간들에 대한 징벌을 행하신다. 하지만 에덴에서는 가죽옷의 은혜를 베푸셨지만 바벨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본문 7절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혼자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으로 논의하고 행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위 하나님은 지금 인간의 범죄를 함께 보시고 이를 어떻게 할지를 함께 고민하시고 함께 내려오셔서 이들의 언어를 흩으심으로 하나님께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도시화는 흩어짐을 막고 있는데 당시의 산업적인 특성속에서 볼때 하나님이 문화 명령을 탁월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흩어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서로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됨으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탑, 지구라트는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었는데 바벨탑을 건설한 이들은 어쩌면 이 바벨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뭔가를 요구하시는 분으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신다. 

 

창세기 3–11장은 에덴 추방, 가인의 살인, 노아 홍수, 바벨 성과 탑이라는 네 개의 큰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사건들에서 인간은 범죄하고 그에 대해 하나님은 징벌을 내린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은 추방을 당하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된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를 통해 멸망 당하고 수명이 짧아지는 벌을 받는다. 바벨 사건에서 사람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인간은 온 지면에 흩어지는 벌을 받게 된다. 이런 징벌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시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과 가죽 옷을 지어 입히는 은혜를 베풀었고, 동생을 살해한 가인이 죽음을 두려워할 때 표를 주어 죽임을 면하게 해 준다. 노아 홍수에서는 피조 세계가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다시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언약의 약속을 준다. 그러나 바벨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바벨 사건 때문에 온 땅에 흩어진 인류에게 왜 은혜를 베풀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벨론 건축자들에게 내린 징벌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어 성 쌓기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바벨론 건축자들은 탑을 쌓아 이름을 내려고 하였지만, 9절에서 그 이름은 바벨이라고 불리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바벨을 ‘신들의 문들’이란 의미로 불렀다. 하지만 창세기 11:9은 바벨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를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혼잡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바랄’(בָּלַ֥ל)이다. ‘바랄’(בָּלַ֥ל)과 ‘바벨’(בָּבֶל)은 유사한 발음을 가지며, 이를 통해 바벨탑 시도를 조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바벨론 건축자들을 지면에 흩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축복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에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벨론 건축자들에게 이것은 큰 좌절감을 가져다 준 재앙이었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43–344.

 

The Tower of Babel. This episode is significantly more important than its length suggests. It presents a unified humanity using all its resources to establish a city that is the antithesis of what God intended when he created the world. The tower is a symbol of human autonomy, and the city builders see themselves as determining and establishing their own destiny without any reference to the Lord. (The tower story may also be a polemic against Mesopotamian mythology. Eridu Genesis, a fragmentary text found at Ur, Nippur, and Nineveh, describes the goddess Nintur’s calling for humanity to build cities and to congregate in one place. Her desire, according to this text, is that humans be sedentary and not nomadic. Yahweh demands just the opposite, so that the earth would become populat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9.

당시의 신화속에서는 여신 닌투르가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지역에 정착할 것을 요구하였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반대로 흩어짐으로 이 땅에 사람들이 가득하게 될 것을 바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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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ision of a Woman in a Basket
hThen the angel who talked with me came forward and said to me, i“Lift your eyes and see what this is that is going out.” And I said, “What is it?” He said, “This is jthe basket3 that is going out.” And he said, “This is their iniquity4 in all the land.” And behold, the leaden cover was lifted, and there was a woman sitting in the basket! And he said, “This is Wickedness.” And he thrust her back into the basket, and thrust down jthe leaden weight on its opening.
Then I lifted my eyes and saw, and behold, two women coming forward! kThe wind was in their wings. They had wings like the wings of a stork, and they lifted up the basket between earth and heaven. 10 Then I said to the angel who talked with me, “Where are they taking the basket?” 11 He said to me, “To the lland of Shinar, to build a house for it. And when this is prepared, they will set the basket down there on its bas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5:5–11.

일곱번째 비전은 죄악이 제하여지는 것을 상징한다. 
Vision Seven: The Flying Ephah—Wickedness Removed. This vision symbolically describes iniquity’s being removed from the land and taken off to Shinar.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57.

5-6절) 천사가 나아와 눈을 들어 네게 나아오는 것을 보라고 말한다. 스가랴는 이것이 무엇인지 묻고 천사는 네게 나아오는 것이 곡식을 측량하는 에바(뒤주)라고 말하며 이것이 온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6절 본문에서 말하는 죄악이라는 단어는 마소라 사본에서는 그들의 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The interpreting angel expands his explanation, adding the Hebrew phrase zōʾt ʿênām bĕkol—hāʾāreṣ (NIV “This is the iniquity of the people”).396 However, the Masoretic Text actually reads the Hebrew word ʿênām, which means “their eye,” a problematic word indeed for the sense of the context.397 Little wonder that the versions struggled with the meaning of the word, resulting in variant readings. This difficulty has engendered a variety of suggested solutions.
396 בְּכָל־הָאָרֶנעֵינָמזֹאת.
397
עֵינָם. HALOT, 817–20.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5.
(슥 5:5-6, 새번역)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앞으로 나와서, 나에게 고개를 들고서, 가까이 오는 물체를 주의해 보라고 말하였다. [6] 그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물으니, 그는, 가까이 오는 그것이 곡식을 넣는 ㉠뒤주라고 일러주면서, 그것은 온 땅에 가득한 죄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 ㉠히, '에바’』
에바는 건조한 곡식을 측량하는 부피의 단위로 4.5-10갤런, 15-40리터에 해당되는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에바는 하나님 백성의 죄의 분량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착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아모스서에 나오는 것처럼 에바를 사용하여 저울을 속이고 되와 같은 도량형을 속임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암 8:5)
암 8:5, 개정)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암 8:5, 새번역) 『기껏 한다는 말이, "㉢초하루 축제가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 ㉢또는 '새 달' 축제 ㉣히, '에바' ㉤히, '세겔'』

결국 천사가 보여주는 것은 뒤주에 가득 담긴 악이었다. 

7-8절) 이 뒤주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는데 납뚜겅으로 닫혀 있었다. 덮개가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보인다. 천사는 이 여인이 악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여인을 악으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 히브리어로 악(라아)이 여성형이기 때문에 악을 의인화 했다는 견해와 악이 우상숭배를 뜻하는 것으로 행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여인으로 묘사했다는 견해, 그리고 구약에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음란한 여인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악한 이스라엘을 뜻한다는 견해가 있다. 본문에서 악이라고 할때 정관사가 사용되는데 특정한 악으로, 하와가 유혹을 받아 범한 그 악과 동일한 악이다. 즉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다른 사람을 속임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악을 범한 것이다. 본문의 에바의 덮개가 납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것이 용기안에 아주 안전하게 보관된다는 의미이다. 
The angel elected not to identify the one who lifted the lid on the basket. Neither did Zechariah clarify the significance that the lid was made of lead.406 The only observation one can make with reasonable confidence is that such a heavy lid indicates that the contents of the basket must remain securely within the basket.407 Sin and its resulting uncleanness must be separated from God’s people.
406 Early Christian interpreters such as Gregory of Nyssa, Ambrose, and Origen identified the leaden lid with sin. See Gregory of Nyssa, De Virginitate, 18.395 (Gregorii Nysseni Opera 8/1:322); Ambrose, Epistolarum, 2.758.D (PL 16:921); and Origen, Homélies sur l’Exode, 6.4 (SC 321:180).
407 Meyers and Meyers, Zechariah 1–8, 29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6–177.
The angel explained that this woman symbolizes wickedness (hārišʿāh).408 The scene is reminiscent of Rev 17:3–5, which pictures an evil woman with “Babylon the Great” written on her forehead. Students of chap. 5 have long asked why the passage personifies wickedness with a woman. The question becomes more acute today in light of heightened gender-related issues. The silence of chap. 5 has not diminished the number of solutions offered.
Jeremias suggests that Zechariah’s choice of a woman to epitomize wickedness relates to the role of the Babylonian goddess Inanna, the “Queen of Heaven.”409 This view sees the symbolism of the woman in the seventh vision as a polemic against Mesopotamian idolatry, interpreting the woman as the Babylonian deity whom God will forcibly remove from Judah and return to Shinar. Alternatively, Mason attempts to relate the woman with the unclean menstruating woman in Ezek 36:17, although Zech 5 fails to provide any literary or linguistic support for this conclusion.410 Another inadequate notion maintains that ever since the fall of man and woman (Gen 3) the woman bore responsibility for the introduction of evil.411 This view, however, does not do justice to the high view in which the Old Testament holds women412 or of the responsibility all bear for sinning against the Lord.413

408 הָרִשְׁעָה. HALOT, 1295–96.
409 Sweeney, Twelve Prophets, 620–23; ABD, 5:586–88.
410 R. Mason, Haggai, Zechariah, and Malachi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58.
411 Petersen, Zechariah 1–8, 257–58.
412 Love contends that the subjugation of the woman by imprisoning her and forcibly returning her to the basket amounts to little more than misogyny and violence against women (The Evasive Text, 209–10). However, Love’s reader-response hermeneutic misrepresents both the significance of the seventh vision and the Old Testament’s view of women.
413 Nor does it accord with Paul’s theology of Adam’s sin in Rom 5:14 and 1 Cor 15:22.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7.

뒤주가 열리자 마자 뒤주 안의 여인이 탈출을 시도하고 천사는 그 여인을 뒤주안으로 몰아넣었다.
As soon as the lid of the basket rose, the woman hiding within attempted to escape. Dramatically, the angel forced the woman back into the basket giving her no additional opportunity to escape and spread her evil about the land.420 The verb wayyašlēk (NIV “he pushed”) suggests that the woman struggled with the angel, even though he prevailed.421 The woman appears so threatening in this vision that she must remain in strict confinement under the powerful guard of the Lord’s angels.
420 Barker, “Zechariah,” 634.
421
וַיַּשְׁלֵךְ. HALOT, 1527–29. The verb often has forceful or violent connotations.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79.

9-11절) 학의 날개와 같은 날개를 가진 두 여인이 뒤주를 천지사이에 들고 있다가 이를 시날땅(바벨론)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처소(성전)을 지어 이동시킨다. 이 두여인에 대해서 헬라와 로마를 가리킨다고도 하고 하나님의 사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에바를 옮긴 땅이 바벨론의 옛 이름인 시날땅, 앗수르인은 이 땅을 수메르라고 불렀다. 이 당은 니므롯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의 왕국, 바벨탑을 쌓았던 곳이기도하다.(창 10:10-11) 또한 이스라엘이 유배갔던 곳이며 반역의 땅의 대명사였다.(계 17:3-5) 귀신과 영들이 거하는 처소이기도 했다.(계 18:2) 결국 에바가 이곳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악이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곳에서 제거하여 이스라엘을 정결케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금 스가랴는 이스라엘에서 악이 제거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 The wind in their wings (9) could equally be translated ‘the spirit …’ (cf. 6:5). This would indicate that the cleansing was the work of God’s Spirit. The Hebrew for stork is from the same root as ‘stead-fast love’, and this may be why these particular birds feature here: the cleansing is a sign of grace.
 G. Michael Butterworth, “Zechariah,” in New Bible Commentary: 21st Century Edition, ed. D. A. Carson et al., 4th ed. (Leicester, Englan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872.
The two flying women took the basket to Babylon, although the Hebrew text designates the country as “Shinar,” an ancient name for Babylon (Gen 10:10). Zechariah’s use of the name Shinar evokes the memory of the tower of Babel episode that was also set in the plain of Shinar (Gen 11:1–9). The tower of Babel story epitomizes the hubris of mankind and its desire to worship itself, not the Creator of heaven and earth. Further, those who recently returned to Jerusalem had seen great evil in Babylon. Now, the former exiles saw some of the evil that they brought back with them to Judah purged from their land and returned to Babylon. The ignoble Babylon would be an appropriate place to send the basket full of wickedness because of its association with evil and its indelible identification as the place where God sent his sinful people into exile.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80.

The transport of the woman in the basket to Babylon, symbolically removing Israel’s sin from the land, bears striking parallels to the Azazel rite in Lev 16. Better known as the “scapegoat,” the Azazel also bore the nation’s impurities, figuratively taking them outside the camp.
From Genesis through Revelation, Babylon represented the epitome of a high-handed, rebellious people (Gen 11:1–9). The Old Testament often prophesied against Babylon. For instance, Isaiah’s oracle against her represents one of the more prominent curses against ancient Shinar (see Isa 13:1–14:23). Babylon opposed God consistently, just as she regularly opposed the Lord’s people with equal fervor. This opposition comes to its biblical and eschatological culmination in the book of Revelation, where John pronounces this curse against her: “Fallen! Fallen is Babylon the Great, which made all the nations drink the maddening wine of her adulteries” (Rev 14:8). Revelation 17:5 continues the thought: “mystery—babylon the great—the mother of prostitutes—and of the abominations of the earth.” Finally, John foretells Babylon’s ultimate doom: “Woe! Woe, O great city, O Babylon, city of power! In one hour your doom has come!” (18:10).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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