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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And we urge you, brothers, admonish pthe idle,3 qencourage the fainthearted, rhelp the weak, sbe patient with them all. 15 See that tno one repays anyone evil for evil, but always useek to do good to one another and to everyone.
p 2 Thess. 3:6, 7, 11
3 Or disorderly, or undisciplined
q Isa. 35:4; [Heb. 12:12]
r Acts 20:35; See Rom. 15:1
s See 1 Cor. 13:4
t 1 Pet. 3:9; See Rom. 12:17
u [Rom. 12:9]; See Gal. 6: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14–15.
 
데살로니가전서 5:14–15
14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14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본문의 게으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탁투스’로 이 원형인 ‘아탁토스’는 부정접두사 ‘아’와 ‘배열하다, 배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탓소’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원어의 의미는 '대열을 벗어난, 이탈한’이라는 의미로 행군중 대열에서 이탈하여 낙오한 병사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이들이 대열에서 벗어난 것은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규율에 대한 반항과 게으름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무질서한, 규율이 없는’의 의미의 형용사형으로 신약성경에서 해당 본문에서만 한번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표현이 부사로 사용된 곳은 2곳(살후 3:6. 11)이다.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규율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전통을 따르지 않고 게을러 일하기를 싫어하고 문제를 만들기만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런 이들을 권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권계하며’라고 번역된 ‘누데테이테’는 ‘누테테오’의 현재 명령형이다. 앞서 12절에서 리더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권하는’일이었는데 이와 같은 표현이다.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마음이 약한’으로 번역된 ‘올리곱쉬코스’는 ‘규모가 작은’을 의미하는 ‘올리고스’와 ‘영혼, 마음’을 뜻하는 ‘프쉬케’의 합성어로 ‘마음이 작은, 용기없는 심약한’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의 반대말은 ‘메갈롭쉬코스’로 ‘기가 센, 자기 충족적인, 확신이 넘치는’의 의미를 가진다. 이들이 마음이 약한 이유는 박해(살전 3:3-4)나 주의 재림때에 죽은 자들에 대한 생각때문(4:13~5:11)이었다. 결국 이러한 박해나 재림에 대한 온전한 소망없음으로 인해서 마음이 약해진 이들을 격려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박해나 재림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다. 주님의 부활을 목도하기전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모두가 순교의 길을 갔다. 바울도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이전에 추구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전히 헌신했다.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이를 온전히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문의 격려하다라는 표현은 ‘파라뮈데오마이’로 위로하고 확신의 말로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을 의미한다.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힘이 없는’으로 번역된 ‘아스데논’의 원형은 ‘아스데네스’로 부정어 ‘아’와 ‘힘셈’아리는 의미를 지닌 ‘스데노스’의 합성어로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 연약한 모든 것을 일컫는 말이다. 본문에서는 단지 육체적으로 힘이 없는 상태라기 보다는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로 여러가지 어려움과 유혹에 넘어지기 쉬운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 없는 자들은 외부의 충격에 쉽게 넘어지게 된다.(노약자) 이런 이들을 붙들어주라는 것이다. 
‘붙들어 주며’에 해당하는 ‘안테케스데’의 원형’안테코’는 ‘헌신하다, 참석하다, 지키다, 붙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마 6:24; 눅 16:13; 딛 1:9)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가 작동한다.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압제하고 빼앗는 것이 당연한 세상가운데서 교회는 이에 대한 대안 문화로서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롬 5:6) 그렇게 주님께서는 본을 보이셨고 이 본을 따르며 실천하며 사는 공동체로 당신의 교회를 세우셨다.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오래 참으라’로 번역된 ‘마크로뒤메이테’의 원형 ‘마크로뒤메오’는 불행과 고생과 같은 어려운 상황중에도 끈기 있고 용기 있게 참는 것, 복수할 일에 대해서도 온화하게 참아주는 것(마 18:28, 벧후 3:9)을 의미한다. 특히 멸망받을 죄인에 대해서 속히 진노하여 징계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낼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은 힘이 없어서나 죄를 미워하지 않으시거나 징계하실줄 몰라서가 아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그들로 하여금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고전 13:4에서 말하는대로 사랑의 속성은 바로 ‘오래 참음’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아 우리들을 향해서도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공동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내가 불편해 하는 더욱 나아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이들에 대해서도 사랑으로써 참아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서 그 영혼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오래참음으로 옷을 입는 것은 필수적이다.(골 3:12) 
 
5:14 The introductory formula “we exhort you, brothers [and sisters]” marks v. 14 as introducing a new topic. The formula is reproduced from v. 12 except that the synonymous term παρακαλοῦμεν is substituted for ἐρωτῶμεν. With Findlay (124) and others, it is tempting to see v. 14 as addressed to the leaders of the community because νουθετεῖν (“to admonish”) was used in v. 12 of the leadership function and in this verse Paul instructs those who are addressed to “admonish.” Against this is the fact that nothing in the text itself hints that any particular group is being spoken to (cf. Best, 229). As Holmberg (Paul and Power, 117f.) recognizes, although the whole church is addressed in v. 14 (cf. 4:18; 5:11), Paul does differentiate functions within the community, as 5:12f. and 1 Cor. 16:15f. show, and therefore some were more responsible than others for the sorts of actions Paul calls for in v. 14.
First Paul urges his readers: νουθετεῖτε τοὺς ἀτάκτους (“admonish the idle”). ἀτάκτους has two possible meanings, either of which is appropriate to the context. The original denotation of the word concerned undisciplined or disorderly actions or persons, but in papyri from the Hellenistic period it is used of idle or lazy individuals as well. If we accept the Pauline authorship of 2 Thessalonians, then the latter meaning is the more likely here. The verb ἠτακτήσαμεν (“we were not idle”) occurs in 2 Thes. 3:7 and the adverb ἀτάκτως appears in 3:6 and 11. While both meanings might fit for 2 Thes. 3:6, in 3:7 and 11 the concern is clearly idle behavior, and it can be assumed that the same is true of 3:6 as well. When this is coupled with the reminder in 1 Thes. 4:11 that the Thessalonians should work with their own hands, a strong case appears for understanding ἀτάκτους in 1 Thes. 5:14 as those who were idle or lazy. Nevertheless, the close connection between laziness and disorderly behavior should not be ignored. In 4:11 not only does Paul call for people to work with their hands, but he also exhorts them to aspire to live quietly and mind their own business. The same point applies in 2 Thes. 3:11, where Paul says, “For we hear some among you are living idly, not working, but being busybodies.” He goes on to order such people to work quietly (μετὰ ἡσυχίας), an obvious verbal link with the exhortation in 1 Thes. 4:11 “to aspire to live quietly” (φιλοτιμεῖσθαι ἡσυχάζειν).
The connection between the exhortation to admonish the idle in v. 14 and 2 Thes. 3:6–15 has significance in another important way. The instruction to admonish the idle in 1 Thes. 5:14 reads like a reminder to do something the community has previously been instructed to do (see 4:11). In 2 Thes. 3:10f., on the other hand, it looks as though Paul has only just heard of the problem of the idle, and in fact it would appear that the emerging problem of indolence was one of the main reasons why 2 Thessalonians was written in the first place. The apparent relation between 2 Thes. 3:6–15, which treats the problem of the idle as a new one, and 1 Thes. 5:14, which treats it as an existing problem, favors my view that 2 Thessalonians was written before 1 Thessalonians.
Paul also urges his readers in v. 14: παραμυθεῖσθε τοὺς ὀλιγοψύχους (“encourage the faint-hearted”). The verb παραμυθεῖσθε can be used in the general sense of “to encourage” (cf. 2:12) or in the more specific sense of “to console” or “to comfort” in the face of death or a tragic event. The adjective ὀλιγοψύχους is rather indefinite in meaning and could apply to worry, fear, or discouragement, according to Best (230). Paul could have in mind those who were shaken by the persecutions experienced by the community (cf. 2:14) or those who had doubts and anxiety regarding various aspects of the parousia (cf. 4:13–5:10). Obviously, Paul was concerned for any who struggled with worry or doubt regarding their new faith, or feared rejection or persecution because of it. Such people, Paul recognized, needed encouragement from the stronger and more confident members of the community to enable them to persevere.
The same sort of imprecision also characterizes the next exhortation. Paul summons his readers to a third task: ἀντέχεσθε τῶν ἀσθενῶν (“help the weak”). Best (230f.) suggests that “the weak” are to be understood as Christians who sought guidelines on how to indicate their rejection of paganism. He bases his view on such texts as 1 Corinthians 8 and 10 and Rom. 14:1–15:6. Marshall (151) argues that Paul has in mind those who are susceptible to temptation and sin, on the strength of passages like Rom. 4:19; 5:6; 8:3, 26; 1 Cor. 2:3; and 2 Cor. 12:5, 9f. Linguistically it could also refer to the physically weak or to the economically needy. This latter deserves some consideration since προϊσταμένους (“those who care for”) from v. 12 might allude to caring for the needy. Perhaps Paul left these exhortations intentionally vague knowing that his readers would recognize whom he was speaking about and then try to meet whatever their particular needs were, a view Best (231f.) appears to have some sympathy for. If this is what Paul was attempting to do, he sought to give the whole community a sense of pastoral responsibility.
The final charge, μακροθυμεῖτε πρὸς πάντας (“be patient toward everyone”), is probably intended to enjoin patience on those who admonish, encourage, and help fellow Christians. Patience is an important virtue for the Christian according to Paul (Gal. 5:22) and is in fact a manifestation of love (1 Cor. 13:4). The need for patience in dealing with the sorts of people Paul has in mind in v. 14 is obvious since such people often become irritating and burdensome to those who seek to care for them.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6–198.
 
15절)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갚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아포도’의 원형 ‘아포디도미’는 ‘~로부터, ~때문에’라는 의미의 전치사 ‘아포’와 ‘주다’라는 뜻의 동사 ‘디도미’의 합성어로 받은 만큼 충분하게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는 어떤 받을 자격이 있는 바에 따라 보상하거나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나에게 해를 끼치고 악을 행했을때 그것에 보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동일 보복의 원리에 해당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를 승화시키셔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주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 위해서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하셨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동족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2:14) 그래서 인간적인 복수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복수에 대한 금지를 명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악은 ‘카코스’로 도덕적으로 부당한 행동을 의미하며, 선은 ‘아가토스’로 도덕적 탁월함이나 우수성을 의미한다.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이제 마지막 여섯번째 권면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라 더욱 나아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따르라’로 번역된 ‘디오케테’는 사냥개가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과 같이 필사적으로 추구하라는 의미이다. 그냥 '착하게 살라’ 정도가 아니라 악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대적하는 이들을 향해서 선한 것으로 갚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유대교 전통은 선민 사상에 입각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구분하는 입장에 서있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선을 행하라는 명령이 그들에게는 불편해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는 끊임없이 이 부분을 강조한다. 
 
5:15 A tendency exists among commentators to link the negative and positive statements of this verse with the general injunction at the end of v. 14 calling for patience toward everyone (cf. Frame, 198f.; Best, 233; Marshall, 152). This is unnecessary. Paul is merely presenting a series of exhortations loosely connected by the fact that they prescribe (or in v. 15a, proscribe) certain types of conduct among members of the community. These exhortations are intended to encourage the cohesion of the community. Only within a stable community could the plausibility of people’s faith and commitment be maintained. As Berger (Social Reality, 55) has pointed out, “The reality of the Christian world depends upon the presence of social structures within which this reality is taken for granted.…” By his exhortations in 1 Thessalonians Paul sought to shape the Christian community into a stable environment in order to ensure that Christianity would remain real to his converts.
In v. 15 the exhortation takes the form of an aphorism with general applicability for regulating relations both inside and outside the community, as εἰς ἀλλήλους καὶ εἰς πάντας (“toward one another and toward everyone”) at the end of the verse demonstrates. The whole sentence, ὁρᾶτε μή τις κακὸν ἀντὶ κακοῦ τινι ἀποδῷ, ἀλλὰ πάντοτε τὸ ἀγαθὸν διώκετε [καὶ] εἰς ἀλλήλους καὶ εἰς πάντας (“See that no one returns evil for evil, but always pursue what is good toward one another and toward everyone”), contains several unusual features. First, it is the only instance of Paul using ὁρᾶτε (“see”) as a parenetic verb. Second, a shift occurs from second person ὁρᾶτε to the indefinite pronoun τις, the subject of the negated aorist subjunctive verb ἀποδῷ (“returns”), which itself has the force of an imperative. The indefiniteness of the subject in the negative statement after the definiteness of the second person plural ὁρᾶτε and the shift back to the second person plural in the second half of the verse suggest that Paul is quoting an aphorism.
The proscription of retaliation has its roots in the sapiential tradition of Judaism that rejected the lex talionis of Israelite religion (cf. Pr. 20:22; Sir. 28:1–7). But Paul does not merely forbid any form of retaliation, he goes on by way of contrast to say, “but pursue what is good toward one another and everyone.” This further imperative gives the impression that Paul believed in and inculcated an unqualified selflessness on the part of Christians. Such an impression stands in tension with other statements in Paul where an underlying motive is mentioned that undermines the high moral tone of v. 15b. In Rom. 12:17–21 Paul expresses the same thought as in 1 Thes. 5:15 when he urges: “Repay no one evil for evil, but have regard for what is noble in the eyes of everyone.” He then motivates this on the grounds that God’s wrath will exact retribution in the judgment so that it is unnecessary for Christians to avenge themselves in the here and now. The same idea of God’s judgment as revenge is to be found in 2 Thes. 1:6, where Paul declares that God will afflict in turn those who afflict the Thessalonians at the time of the judgment.
While Christianity was a tremendous force for what we today would call the humanizing of its world and the humanizing of relations between people, its roots in the apocalyptic tradition of Judaism also carried with it the seeds of a “loveless Christianity” toward those who were outsiders. Paul himself, whether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reflects that tension, and when 1 Thes. 5:15 is read alongside 2:14–16 and 2 Thessalonians 1 it is clear that the tension existed in his teaching to the Thessalonians. Nevertheless, in 1 Thes. 5:15 the apostle demands an unqualified concern on the part of all his readers for the well-being of both those within and outside the community without offering either negative or positive motivation. For this reason it seems likely that Paul is reiterating here what he had previously taught the Thessalonians. Whatever may have been his explicit motivation, the underlying motives probably reflect his desire to foster solidarity in the community and to encourage the sort of behavior toward those outside that might lead to their conversion and inclusion in it, even among those who had been responsible for afflicting the community at an earlier stag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8–199.
 
형제들을 위한 권면
1)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
2)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라.
3)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라. 
4)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5)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6) 항상 선을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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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We ask you, brothers, mto respect those who labor among you and nare over you in the Lord and admonish you, 13 and to esteem them very highly in love because of their work. oBe at peace among yourselves.
m 1 Cor. 16:18; Phil. 2:29
n 1 Cor. 16:16; Heb. 13:17
o See Mark 9:5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12–13.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12–13.
 
12-22절까지 바울은 종말의식을 가진 성도들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할지를 권면하고 있다. 먼저 12-13절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요청한다. 
 
12절) 다시금 바울은 ‘아델포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구하고 있다. ‘우리가 구한다’라는 표현은 ‘에로토멘’으로 원형 ‘에로타오’는 ‘묻다, 요청하다, 요구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현재 직설법 1인칭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위압적이거나 강제적인 명령이 아니라 부드러운 요청조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요청하는 두가지 내용은 ‘너희가 알고’,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알라’, 본문은 세 개의 현재분사가 등위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이들이 바로 교회의 지도자들, 리더들인데 이들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동일한 부류의 사람인 것이다. 수고하는 사람, 다스리는 사람, 권하는 사람이 각각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의 리더, 지도자들로 이들이 마땅히 감당해야하는 역할들이었다. 
Rather, as in v. 12, Paul calls on the community to recognize as their leaders precisely those people who functioned in such a way as to toil for them, to protect and care for them physically and materially, and to direct them ethically.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3.
 
아마도 이 리더들은 바울이 직접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이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불과 3주에서 2-3달 정도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했기에 이후 바울이 핍박을 피해 떠난 이후에 교회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세워진 리더들이었을 것이다. 신생 교회였는데 당시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한 문제가 교회안에 있었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리더들이 역할을 했지만, 이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에 바울이 지금 성도들을 향해서 이런 요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12-13절을 통해서 말하는 리더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수고하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코피온타스’의 원형 ‘코피아오’는 원래 ‘피곤한 노동을 하거나 극도로 지치게 노동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실제로 리더들은 지시하고 뒷짐을 지고 있지 않았고 지치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두번째는 다스리는 것이다. ‘프로이스타메누스’의 원형 ‘프로이스테미’는 ‘앞에’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와 ‘서다, 세우다’라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로 ‘앞장서다, 진두에 서다’라는 뜻을 가진다. 
세번째는 권하는 것이다. ‘누쎄툰타스’의 원형 ‘누쎄테오’는 ‘마음, 정신’을 의미하는 ‘누스’와 ‘놓다, 두다’를 의미하는 ‘티테미’의 합성어로 ‘마음속에 놓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에서 훈계하다(행 20:31)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지도자, 리더는 수고하고 다스리며(솔선수범하고) 권하는 자들이다. 
 
‘너희가 알고’, 알다라는 표현은 ‘오이다’인데 이는 ‘알다, 깨닫다’라는 의미로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가지는 것,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ESV는 이를 acknowledge로, NIV는 respect로 번역했다. 단순히 리더들이 얼마나 수고하며 섬기는 지를 지적으로 알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실제로 그들의 수고를 눈으로 보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고 이를 알기에 그들을 존경하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부모의 수고를 알아주라’라고 말할 때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지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존경하라는 의미이다. 
 
οἶδα (oida), 동사. 알다, 깨닫다. 미래 능동태. εἰδήσει; 부정과거 능동태. εἴδον; 완료 능동태. οἶδα. 히브리어 등가: ידע (107). 아람어 등가: אֲנָה (1).
동사 용법
1. 알다 (인지) — 어떤 사실이나 특별한 정보의 조각에 대해 인식하거나 깨닫다; 무엇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다. 의미상 반의어: 알지 않다. 관련 주제: 경험; 지식의 나무; 지식; 영지주의.
살전 1:4 εἰδότες, ἀδελφοὶ ἠγαπημένοι ὑπὸ θεοῦ, τὴν ἐκλογὴν
살전 2:1 Αὐτοὶ γὰρ οἴδατε,
살전 4:2 οἴδατε γὰρ
약 1:19 Ἴστε, ἀδελφοί μου ἀγαπητοί. ἔστω δὲ πᾶς
유 5 εἰδότας ὑμᾶς ἅπαξ πάντα,
2. 알다 (경험적으로) — 알다 또는 무엇에 대해 지식을 가지다; 보통 관찰이나 감각을 통해 획득한 것으로서. 관련 주제: 경험; 지식의 나무; 지식; 영지주의.
막 14:71|| Οὐκ οἶδα τὸν ἄνθρωπον τοῦτον ὃν λέγετε.
요 8:19 Οὔτε ἐμὲ οἴδατε οὔτε τὸν πατέρα μου·
요 8:55 ἐγὼ δὲ οἶδα αὐτόν·
고후 12:2 οἶδα ἄνθρωπον ἐν Χριστῷ πρὸ ἐτῶν δεκατεσσάρων—
살전 4:5 τὰ μὴ εἰδότα τὸν θεόν,
3. 기억하다 — 주의 깊게 생각하거나 고려하다. 의미상 반의어: 잊다 (억제). 관련 주제: 마음; 기억하다.
고전 1:16 λοιπὸν οὐκ οἶδα εἴ τινα ἄλλον ἐβάπτισα.
4. 알다 (알아 차림) — ~에 대한 성격이나 특징을 알다. 관련 주제: 경험; 지식의 나무; 지식; 영지주의.
막 10:38|| Οὐκ οἴδατε τί αἰτεῖσθε·
요 4:10 Εἰ ᾔδεις τὴν δωρεὰν τοῦ θεοῦ καὶ
요 13:7 Ὃ ἐγὼ ποιῶ σὺ οὐκ οἶδας ἄρτι,
요 16:18 οὐκ οἴδαμεν τί λαλεῖ.
요 20:9 οὐδέπω γὰρ ᾔδεισαν τὴν γραφὴν ὅτι δεῖ
5. 어떻게 할지 알다 — 어떤 일을 하거나 수행할 방법을 알다.
마 27:65 ὑπάγετε ἀσφαλίσασθε ὡς οἴδατε.
살전 4:4 εἰδέναι ἕκαστον ὑμῶν τὸ ἑαυτοῦ σκεῦος κτᾶσθαι
딤전 3:5 προστῆναι οὐκ οἶδεν, πῶς
6. 인정하다 — 권리대로 (어떤 사람)을 받아들임.
막 2:10|| ἵνα δὲ εἰδῆτε ὅτι ἐξουσίαν ἔχει ὁ
살전 5:12 Ἐρωτῶμεν δὲ ὑμᾶς, ἀδελφοί, εἰδέναι τοὺς κοπιῶντας
7. (언어)를 이해하다 — 언어의 의미가 통하다.
고전 14:16 οὐκ οἶδεν·
유 10 ὅσα μὲν οὐκ οἴδασιν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완료 능동태. 완료 능동태
||  || 눅 22:60 || 마 26:74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마 20:22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눅 5:24 || 마 9:6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we ask. See note on 4:1. acknowledge. Not merely recognize them as leaders but honor and respect them (v. 13). those who work hard … who care for … who admonish. Describes not three groups but one—congregational leaders, likely elders (Acts 14:23), who have at least three distinct functions. The verb used to describe the second function (Greek proistēmi) conveys both the notion of authority (“to rule”) and concern (“to care for”). This linking of exercising authority and providing care is a characteristic feature of leadership in the NT: the one who leads is to be like the one who serves (Luke 22:26).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NT New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7.
 
Though Paul does not explicitly call for obedience to those who toil at Thessalonica, the request that certain people be recognized in the community probably implies such obedience. Paul seems to have in mind the need for the community to acknowledge as leaders certain of its members because they carry out important functions in its life. On the basis of our knowledge of Stephanas and his role as patron of the church at Corinth, it may be assumed that the leaders at Thessalonica were those who had sufficient status and wealth to act as patrons to the community. Such a non-egalitarian form of leadership should not surprise us as this is precisely the way leadership in the Diaspora synagogues emerged and it reflects the hierarchical character of Greco-Roman society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4.
 
13절)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는 실제로 교회안의 리더들이 성도들 가운데서 수고하는 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리더들을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러더들이 교회안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수고이기 때문이다. 
‘사랑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본문은 ‘카이’라는 등위 접속사로 연결되는데 이는 12절의 ‘구하노니’에 연결되는 표현이다. 바울은 형제들이 ‘알고’, ‘귀히 여기’기를 원했다.  ‘여기며’라고 번역된 ‘헤게이스다이’의 원형 ‘헤게오마이
는 ‘지도하다, 다스리다, ~라고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고 대단하게’라는 의미를 지닌 ‘휘페렉페릿수’라는 부사와 더불어 사용되어서 ‘할 수 있는 만큼 최고의 대우로 존중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최고의 존중을 보이라는 권면이다. 이렇게 존중하는데 이를 ‘사랑안에서, 엔 아가페’ 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너희끼리 화목하라’라고 말한다. ‘너희끼리’로 번역된 ‘엔 헤아우토이스’는 ‘너희 자신들 안에서, 너희들 가운데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인가? 앞선 권면의 내용과 연장선 상에서 본다면 성도들과 리더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리더들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어린 성도들을 향해서 그들의 수고를 알고 귀히 여길 것을 충고하면서 서로 화목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화목하라’는 표현은 ‘에이레뉴에테’로 ‘에이레뉴오’의 현재 능동태 명령법 표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하고 힘써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교회가 화목하지 못하고 나뉘고 분쟁한다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전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한 성령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며 화목을 위하여,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The verb ἡγεῖσθαι creates problems for the interpreter. The context seems to require the sense “to esteem,” but this meaning is nowhere else attested for the word (see Rigaux, 579f.). Another possibility is to take it with ἐν ἀγάπῃ, resulting in the sense “to consider in love” or simply “to love” (see Findlay, 122f.). The usual arguments offered against this possibility are that “in love” is too distant in the grammatical structure from the infinitive to be taken with it and that the infinitive does not require a qualifying prepositional phrase. A third view is that the adverb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gives the infinitive the meaning “esteem” because “to consider exceedingly highly” is paraphrastic for this sense. Although there are no other known instances of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being used with ἡγεῖσθαι in this way, other adverbial modifiers are used in a similar way (see Hdt. 2.115 and Thucydides, Hist. 2.89). For this reason I prefer this third explanation, but whichever is chosen the meaning remains more or less the same.
In the phrase διὰ τὸ ἔργον αὐτῶν (“on account of their work”) Paul explains why the Thessalonians should respect those described in the three participles of v. 12: their work is done for the sake of the community and its members. Therefore Paul urges that they be treated with the deference due to them.
Hdt. Herodotus
Hist.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Thucydide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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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you bare not in darkness, brothers, for that day to surprise you like a thief. For you are all cchildren2 of light, children of the day. We are not of the night or of the darkness. So then dlet us not sleep, as others do, but let us ekeep awake and fbe sober. For those who sleep, sleep at night, and those who get drunk, gare drunk at night. But since we belong to the day, let us be sober, hhaving put on the breastplate of ifaith and love, and for a helmet the hope of salvation. For God has not destined us for jwrath, but kto obtain salvation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10 lwho died for us so that whether we are awake or asleep we might live with him. 11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and build one another up, just as you are doing.
b 1 John 2:8
c See Luke 16:8
2 Or sons; twice in this verse
d [Mark 13:36]; See Rom. 13:11–13
e See Matt. 24:42
f See 1 Pet. 1:13
g [Acts 2:15; 2 Pet. 2:13]
h Isa. 59:17; Eph. 6:14, 17
i [Eph. 6:23]
j See ch. 1:10
k 2 Thess. 2:13, 14; [Heb. 10:39]
l Rom. 14:9; [2 Tim. 2: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4–11.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4–11.
 
앞서 1-3절에서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것이다. 그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평안과 안전을 외치지만 결코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4-5절에서 형제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다르다. 
 
4절) 본문의 ‘형제들아’는 ‘아델포스’로 실제로 남성형 복수 명사의 형대로 사용되지만 여러 번역본에서 ‘brothers and sisters’로 번역하고 있다. 실제로 남성 성도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앞선 1-3절에 등장하는 그들, 평안과 안전을 외치는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갑작스런 심판이 도둑같이 임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어둠에 속하지 않았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어둠과 빛, 밤과 낮을 대비시키는 것은 묵시문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여러 특성을 대비시키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어둠’은 ‘스코토스’로 ‘어둠(빛의 부재), 죄악’을 의미한다. 이처럼 어둠에 속했다라는 것은 죄가운데 거한다는 것으로 불순종과 자기중심성을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반대로 어둠에 있지 않음의 상태는 이후 5절이 말하는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 주의 날(2절)이 도둑같이 임하겠지만 어둠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못한다. 
 
σκότος -ους, ὁ; (skotos), 명사. 흑암, 어둠. 히브리어 등가: חֹ֫שֶׁךְ (61). 아람어 등가: חֲשׁוֹךְ (1).
명사 용법
1. 어둠 — 빛 또는 조명의 부재. 관련 주제: 어둠; 어둠; 어둠; 무두질.
마 6:23 τὸ σκότος
막 15:33|| Καὶ γενομένης ὥρας ἕκτης σκότος ἐγένετο ἐφʼ
고후 4:6 Ἐκ σκότους
엡 5:8 ἦτε γάρ ποτε σκότος,
유 13 ὁ ζόφος τοῦ σκότους
2. 악의 영역 ⇔ 어둠 — 악, 죄악됨,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무지가 지배하는 영역. 빛이 없는 곳으로 이해된다.
엡 5:11 ἀκάρποις τοῦ σκότους, μᾶλλον
엡 6:12 τοῦ σκότους τούτου,
살전 5:4 ὑμεῖς δέ, ἀδελφοί, οὐκ ἐστὲ ἐν σκότει,
벧전 2:9 ὅπως τὰς ἀρετὰς ἐξαγγείλητε τοῦ ἐκ σκότους
요일 1:6 ἐν τῷ σκότει
3. 어둠 (근원) — 어둠의(혹은 어둠을 초래하는) 원천으로 사용되는 모든 개체. 관련 주제: 어둠.
마 6:23 ἐν σοὶ σκότος ἐστίν,
눅 11:35 ἐν σοὶ σκότος ἐστίν.
요 3:19 μᾶλλον τὸ σκότος
여러 용어 명사 용법
1. 음침한 어둠. — 빛이 없는 것으로 특징되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 관련 주제: 어둠.
벧후 2:17 ὁ ζόφος τοῦ σκότους
유 13 ὁ ζόφος τοῦ σκότους
명사. 명사
||  || 눅 23:44 || 마 27:45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The words οὐκ ἐστὲ ἐν σκότει (“you are not in darkness”) also take up the thought of the previous verse and imply a contrast between Paul’s readers and those who live ἐν σκότει (“in darkness”) outside their group. The phrase “in darkness” can have two possible senses here. (1) It may mean that those spoken of in the previous verse are distant from and even opposed to God. The use of language regarding light to symbolize God and darkness to symbolize alienation from and opposition to God goes back to the OT (cf. Job 22:9–11; Pss. 27:1; 74:20; 82:5; 112:4; Is. 2:5; 9:2; 60:19f.; Pr. 4:18f.). It also played a significant role at Qumran (cf. 1QS 3:13–4:26; 1QM). Paul himself uses the imagery of light and darkness in a similar fashion on several occasions (cf. Rom. 13:12; 2 Cor. 4:6; 6:14; 11:14; Col. 1:12f.). (2) Paul may be using the phrase “in darkness” figuratively of ignorance (cf. Rom. 1:21; 2:19; 1 Cor. 4:5). This understanding would go well with the following result clause ἵνα ἡ ἡμέρα ὑμᾶς ὡς κλέπτης καταλάβῃ (“so that the day [of the Lord] does not overtake you as a thief”). Understood in this way v. 4 emphasizes that Christians differ from outsiders in that they are aware of the imminence of the day of the Lord, while the day will overtake those who are ignorant about its coming like a thief. On the other hand, the light and darkness antithesis of v. 5 suggests that Paul has in mind darkness as that which is alien and opposed to God. If we accept this interpretation the second possibility mentioned above is implicit in any case since those who live in the darkness of their pagan ways also live in ignorance of the coming day of judgmen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1.
 
5절) ‘너희는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5절 본문은 4절의 근거를 이야기한다. 형제들에게 심판이 도적같이 임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유대 문헌과 신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역에 속한 이들에 대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눅 16:8; 요 12:36; 골 1:13) 
‘낮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사용한 독특한 표현으로 빛과 낮의 개념을 연결시키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의 아들’이라는 특정한 표현을 통해서 어떤 특별한 특성을 가진 이들이라는 의미를 표현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낮, 빛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이 형제들을 빛, 낮의 아들-자녀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요 8:12, 9:5)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빛의 아들들로 낮체 속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다. 
The combination of “son of” used in a figurative sense with a descriptive or possessive genitive is a Hebraism (see BDF §162.6; Turner, Syntax, 207f.) reflective of a patriarchal society. It occurs regularly in the OT (e.g., 1 Sa. 2:12; Ps. 89:22; Is. 14:12; 19:11; 49:15; 61:5; 62:8—note that some of these are rendered very differently from the original Hebrew in modern English translations), and is also found in the NT (cf. Mk. 3:17; Mt. 9:15 [Greek]; Lk. 10:6; 16:8; Jn. 17:12; Eph. 2:2). The precise formulation “sons of light” (τοὺς υἱοὺς τοῦ φωτός) appears in Lk. 16:8 (cf. Jn. 12:36). But it is best known for its frequent usage in the Qumran documents, where the sons of light, that is,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who share in eschatological salvation available only in the community, are opposed by the sons of darkness, that is, anyone outside the community (cf. 1QS 1:9–10; 3:13, 24–25; 1QM 1:1, 3).
BDF F. Blass and A. Debrunner,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and rev. Robert W. Funk.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61.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2.
 
일반적으로 ‘낮’이라는 표현은 ‘헤메라’인데 이는 '날, 기간, 낮’의 의미를 지니는데 본문에서는 의와 선이 지배하는 영역, 특별히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들의 영역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마찬가지로 ‘빛’ 해당하는 ‘포스’도 하나님의 의로우심, 선하심, 지식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영역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빛과 낮의 아들들의 중요한 특성은 바로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둠은 빛의 부재의 상태이다. 따라서 빛이 존재하면 어둠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6-7절) 바울은 빛의 아들들에게 어둠의 아들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한다. 이는 잔다는 것은 도덕적,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여 방심하여 다가올 그날을 의식하고 준비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랑을 맞이하는 처녀들처럼 깨어서 맞이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본문에서 ‘자다’라고 표현된 ‘카테우도’는 ‘잠들다, 죽다, 깨있지 않다,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어 7절은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을 밤에 취하라고 말한다. 
앞서 6절에서 깨어서 정신을 차리는 상태와 자고 취하는 상태가 대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녀들의 차이이다. 
 
8절) 다시금 바울은 낮에 속한 이들에게 갑옷을 취할 것을 명한다. 성도들은 낮에 속하여 어둠과 싸우는 전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사 59:17절의 비유를 사용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갑옷을 취하라고 말한다. 
이사야 59:17
17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우리 그리스도인, 성도들은 주의 날에 영의 갑옷을 입고 영적 전투에 참여하고 주님과 함께 설 것을 요구받는다.(롬 13:12; 고후 6:7; 엡 6:10-17)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명한다. 앞서 바울은 이미 1:3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이야기한바있다.(고전 13:13) 
데살로니가전서 1:3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The imagery originates from Isa 59:17, which portrays God as a warrior wearing armor. Paul uses this military image to describe a variety of virtues with which Christians should arm themselves in their spiritual battle (cf. Rom 13:12; 2 Cor 6:7; Eph 6:10–17). The three virtues that he exhorts the Thessalonians to put on consist of the familiar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see note on 1:3).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6.
 
θώραξ (“breastplate”) and περικεφαλαία (“helmet”) as a combination almost certainly go back to Is. 59:17, where God is said to “put on righteousness as a breastplate and a helmet of salvation.” This is probably why Paul does not add a third item of armor to his formulation even though he uses the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which would have fit more neatly with three items of armor (cf. Eph. 6:14–17, which develops the theme of Is. 59:17 more explicitly as other items of equipment are added to the original two; each item is then correlated with a particular Christian virtue or concept). Paul has only used Is. 59:17 as a point of departure, applying an image used exclusively of God in that text to himself and his readers. He does so by modifying the characteristics associated with the two pieces of armor to conform to the Christian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The original connection of salvation with the helmet of God in Is. 59:17 may have suggested to Paul the possibility of using the imagery of armor in this context in the first place.
The expression “hope of salvation”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in understanding Paul’s views regarding salvation at the time that he wrote the letter. He believed that salvation for the Christian still lay in the future when Christ would come from heaven for his people (cf. 1:3; 4:16f.; 5:9f.), and therefore it was the object of Christian hope in the present. This sense of expectancy is considerably diminished in some of the later letters of the Pauline corpus, for example in Ephesians, where salvation has already been achieved, and thus a strongly realized eschatology is present (see Eph. 2:1–10). The striking difference between the “hope of salvation” in 1 Thes. 5:8 (cf. Rom. 13:11) and the “realized” salvation of Ephesians 2 is one of the principal reasons why many scholars find the Pauline authorship of Ephesians a major difficulty.
Paul has introduced the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into the parenetic section of 1 Thessalonians to remind his readers of the need to maintain these Christian virtues. Maximum preparedness is required of the readers because the time of their salvation is potentially close at hand.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6.
 
9절) 원어는 ‘호티’라는 원인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이것의 의미는 ‘왜냐하면’으로 이는 앞선 6-8절의 내용을 받고 있다. 특히 8절 하반절의 ‘구원의 소망의 투구’와 연결시키면 그 의미는 더욱 정확하다. 
바울은 9절의 본문을 통해서 주의 날에 대한 두려움에 있는 이들을 향해서 다시금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우리에게 심판, 진노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함임을 말씀하신다. 
주의 날은 어둠의 자녀들에게는 심판, 진노로 임하지만 빛의 자녀들에게는 영생, 구원, 기쁨의 날이 될 것이다. 
한글 번역에서는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세우심과 이르게하심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티테미’로 영어로는 ‘destine, appoint’로 번역한 것으로 ‘권위를 가지고 설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The contrast in v. 9 between wrath and salvation is significant. The wrath of Go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thought of Paul and the Thessalonians, as 2:16 and especially 1:10 show (cf. Rom. 1:18; 2:5; 5:9). The idea derives from the OT, where the day of the Lord is presented as a time when the wrath of God will be manifested against all disobedience (Zp. 1:15; 2:2; Joel 1:15; Ob. 15). The reference to the wrath of God in v. 9 had a double function for the original readers. On the one hand it defined Christian identity negatively in terms of those not destined to wrath. On the other hand it served to comfort and reassure the readers of the letter that their efforts at vigilance and ethical propriety would not go unrewarded. God had appointed them “for obtaining salvation.” This phrase picks up σωτηρία (“salvation”) from the previous verse, where it specifies the content of Christian hope. Here it indicates that their hope will be realized because this is their divinely appointed destiny. Paul does not specify the content of salvation in v. 9 except negatively as the avoidance of divine wrath and later in v. 10 as continued existence with Christ beyond the day of judgmen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7.
 
10절) 9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셨는데 그 방법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빛의 자녀들은 깨어 있든지 자든지, 다른 말로 하면 살던지 죽던지 모두 주님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이는 주님의 재림때에 살아 있는 자들이나 죽었던 자들이 모두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The terms employed by Paul to make this point, γρηγορῶμεν (“we are awake”) and καθεύδωμεν (“we sleep”), are drawn from the more immediate context of 5:6f., but there they have a very different meaning than they do here. In vv. 6f. they are used antithetically to differentiate those who are Christians and therefore keep alert for the coming of their Lord from those who are outside the community and are therefore oblivious to the approach of God’s judgment. In v. 10 the distinction between those who are asleep and those who are awake does not pertain to preparedness for salvation. That Paul has reapplied the terminology of vv. 6f. to the problem discussed in 4:13–17 concerning “those who sleep” (κοιμᾶν in 4:13–17 is a synonym of καθεύδειν here) and “those who remain” (γρηγορῶμεν here corresponds to οἱ περιλειπόμενοι in 4:15–17) is confirmed by ἅμα σὺν αὐτῷ ζήσωμεν (“we shall live together with him”), which repeats the idea contained in the words σὺν κυρίῳ ἐσόμεθα (“we will be with the Lord”) in 4:17. By thus referring back to 4:13–17 Paul pulls the eschatological parenesis of the letter together and ends it on a powerful note of hope for future salvation for both the living and the dead in Christ based on his redemptive death (cf. Holtz, 182f.).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8–189.
 
11절) ‘그러므로’, ‘디오’, 빛의 자녀들은 깨어 있든지 자든지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기에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가는 것 같이 하라고 권면한다.
지금 재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삶의 일상이 깨어진 이들, 그런 불안함 가운데 있는 자들을 향해서 걱정하지 말고 지금 자신의 살던 일상을 그대로 살아갈 것을 명한다. 그 삶을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이야기한 ‘데살로니가 현상’이다. 데살로니가 성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상속에 도시속의 교회로 살아내야할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일상성을 유지하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6–8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환난 가운데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서 주를 볻받는 자가 되고 또한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삶인 것이다. 
 
Paul concludes his parenesis regarding the parousia of Christ and the need for readiness by urging his readers to exhort and build up one another in faith. The conjunction διό is inferential, but v. 11 is certainly not a necessary or even obviously logical inference from what immediately precedes it. Paul’s thought appears to return to his earlier assertion tha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as a thief in the night, and therefore Christians must be constantly vigilant and behave as people belonging to God. It is from this that Paul’s inference springs.
παρακαλεῖτε ἀλλήλους (“exhort one another”) repeats the wording of the summary in 4:18, though here the emphasis of the verb is more on mutual exhortation or encouragement than on comfort as in 4:18. This interpretation is evinced by the words καὶ οἰκοδομεῖτε εἷς τὸν ἕνα (“and strengthen one another”), which clarifies and amplifies the exhortative connotation given to παρακαλεῖτε. Metaphorical use of οἰκοδομεῖν (“strengthen” or “build up”) can be traced back to the LXX, especially to Jeremiah, where the prophet promises that God will “build up” Israel (Je. 24:6; 31[38]:4; 33[40]:7; 42[49]:10) and even Israel’s neighbors if they call upon God (Je. 12:16). But Jeremiah also views his own role as one of rebuilding the community after the destruction of the evil nation (Je. 1:10). The idea of building up either the community or the individuals who form it is found frequently in 1 and 2 Corinthians, where both the verb and its cognate noun οἰκοδομή (“edification” or “instruction”) function to express this idea. In 2 Cor. 10:8; 12:19; and 13:10 Paul describes his own apostolic role as one of building up the Corinthians rather than tearing them down. The connection with the call of Jeremiah seems unmistakable (cf. Je. 1:10). But the apostle also speaks of the need for members of the community to build one another up (1 Cor. 8:1; 14:4, 17). Paul reveals the close relationship exhortation and building up or edification have in his mind in 1 Cor. 14:3, where he uses οἰκοδομή with παράκλησις (“exhortation” or “encouragement”), the cognate noun of παρακαλεῖν, to describe the function of prophecy within the life of the community (see O. Michel, TDNT V, 136–147 for a helpful treatment).
Paul’s particular concern in 1 Thes. 5:11 lies with the mutual responsibility of members of the community to aid one another in inculcating and carrying out the ethical demands of the faith and in communicating the theological concepts supporting those demands. In the context of this verse the most obvious theological structure undergirding the ethical requirements of the faith is the promise/threat of the parousia of Christ. Christ’s coming will be a glorious public manifestation of the Lord for his obedient followers, but the day of judgment for unbelievers and the disobedient. Thus the eschatological instruction of Paul served to encourage acceptable behavior among his converts with its promise/threat.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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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concerning wthe times and the seasons, brothers,1 xyou have no need to have anything written to you. For you yourselves are fully aware that y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like a thief in the night. While people are saying, “There is peace and security,” then zsudden destruction will come upon them aas labor pains come upon a pregnant woman, and they will not escape
w Dan. 2:21; Acts 1:7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4, 12, 14, 25, 26, 27

 

x ch. 4:9
y [2 Thess. 2:2]; See Matt. 24:43; Luke 17:24
z Luke 21:34; [Ps. 35:8; Luke 17:26–30; 2 Thess. 1:9]
a See Isa. 13: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1–3.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1–3.
 
5장 1-11절은 주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특히 1-3절은 돌연히 임하는 주의 재림으로 인해 어둠에 속한 자들에게 갑자기 심판이 임할 것을 다루고 4-5절에서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은 도둑같이 임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 이어 6-11절에서는 이러한 주의 날이 임함으로 인해 성도들은 더욱 각성하여 깨어 근신하며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1절) '때와 시기’, 이 종말론적 사건이 언제 발생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이 많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행 1:7)
사도행전 1:7
7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때와 시기’를 표현하는 헬라어는 ‘톤 크로논 카이 톤 카이론’이다. 이는 시간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두가지 표현이다. ‘크로논’의 원형 ‘크로노스’는 연대기적 시간을 나타내고, ‘카이론’의 원형 ‘카이로스’는 결정적으로 적합한 때를 의미한다. 본 절에서는 이 단어들이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종말의 날이 어느 한 사건을 통해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건들이 방생하면서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아무런 징조나 암시 없이 갑작스럽게 재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 24장과 같이 여러가지 징조와 사건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에 속한 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주의 재림을 도둑같이 맞게 될 것이고 빛에 속한 자들은 재림을 준비하며 맞게 될 것이다.
 
 
‘쓸 것이 없음은’, 이 표현은 앞서 4:9에도 나왔던 것으로 직역하면 ‘우리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이다. 쓸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이미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에 주의 재림 시기와 관련하여 여러가지로 가르쳤음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재림에 대한 지식,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과도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었다. 
 
2절)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주의 날을 상세히 알고 있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세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의 날’은 ‘헤메라 퀴리우’로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날’이라는 다른 표현으로도 사용되는 말이다.(빌 1:10; 2:16)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날’로 표현된다. 이 날은 악인 이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주를 사랑하는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이 심판과 구원의 사건이 주님의 재림의 날에 동시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밤에 도둑같이 임한다는 것은 이것이 시간적으로 어두운 밤에 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측하지 못하는 시기에 올 것이며 이것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마 24:44; 계 16:15) 유대인들은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가 한밤중에 찾아온 것을 알고 있었고 메시아도 이렇게 밤에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The phrase day of the Lord is common in the OT Prophets (see note on Amos 5:18–20). It refers to the great and terrible day when Yahweh will intervene to punish the disobedient (e.g., Isa. 13:6–16; Joel 1:13–15; 2:1–11; Obad. 15–20; Mal. 4:5) and to save the faithful (e.g., Isa. 27:2–13; Jer. 30:8–9; Joel 2:31–32; Obad. 21). In Paul’s letters it is equated with the second coming. like a thief in the night. Throughout the NT, the thief simile suggests unexpectedness and unwelcomeness (Matt. 24:43–44; Luke 12:39–40; 2 Pet. 3:10; Rev. 3:3; 16:15). The negative aspect is clearly present in 1 Thess. 5:4, and there is no reason to think that it is absent here. However, although some have wondered whether Paul is threatening the Thessalonians with the prospect of final judgment, it seems more likely, in view of vv. 4 and 9, that he is actually reassuring believers who are insecure, perhaps as a result of the recent deaths in their midst. people. That is, unbelievers. peace and security. Possibly an allusion to imperial Roman propaganda or (perhaps more likely) to Jer. 6:14 (or Jer. 8:11), where similar language is used of a delusional sense of immunity from divine wrath. labor pains. An analogy referring to the judgment and destruction on the day of the Lord. Cf. Isa. 13:8; Jer. 6:2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10.
 
3절)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주체인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어둠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멸망할 땅에 살면서 평안과 안전을 외치는 이유는 자신들의 추구가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근대에 이르러 유토피아를 이룰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평안과 안전은 거짓이다.(렘 6:14; 8:11) 이는 신기루에 불과한 것으로 잠시의 편안함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영원한 평안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여,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존재이므로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결코 평안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평안’을 의미하는 ‘에이레네’는 인간이 내적으로 느끼는 안정감이요, ‘안전’을 의미하는 ‘아스팔레이아’는 외적인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통해서 느끼는 확고한 안정감을 말한다. 사람들은 주의 재림의 징조들, 처처의 기근과 지진, 전쟁과 울부짖음을 들으면서도 거짓 평안과 안전을 믿음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갑자기’로 번역된 ‘아이프니디오스’는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의 의미이다. 이글에게 갑자기 임하는 것은 멸망이다. 이런 멸망의 순간이 불신자들에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매우 고통스럽게 그리고 피할 수 없게 임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예증하기 위해서 여자의 해산 고통의 비유를 들고 있다. 
‘해산의 고통’으로 번역된 ‘오딘’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한다. 
이는 위 표에서 보는 것처럼 신약에서 4번 등장하여 재난과 고통으로 번역되었다.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임한다는 것은 주의 재립이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순간에 고통스럽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여인의 해산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리니’는 ‘아우토이스 에피스타타이’인데 여기에서 이르리니로 번역된 ‘에피스타타이’의 원형 ‘에피스테미’는 ‘~위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피’와 ‘두다, 놓다’를 의미하는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로 문자적인 의미는 ‘위에 놓다’라는 의미이다. 위에서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멸망이 어둠에 속한 자들 머리 위로 떨어지며 잉태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갑자기 임하는 것처럼 멸망의 심판은 어둠에 속한 자들 위에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다. 
 
‘곂코 피하지 못하리라’ 임신한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어둠에 속한 자들은 종말의 날 주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본문의 피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엑퓌고신’의 원형 ‘엑퓨고’는 ‘밖으로’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크’와 ‘도망치다’를 의미하는 동사 ‘퓨고’의 합성오로 ‘~에서 밖으로 달아나다’(행 19:16), 달아남으로써 어려움을 모면하다(롬 2:3)의 의미이다. 이 표현은 미래적 의미를 가짐에도 너무나 확실하여 기정 사실과 다름이 없을 때 사용하는 격언적 부정 과거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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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But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ose who are asleep, gthat you may not grieve as others do hwho have no hope. 14 For isince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even so, through Jesus, God will bring with him jthose who have fallen asleep. 15 For this we declare to you kby a word from the Lord,4 that l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until mthe coming of the Lord, will not precede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16 For nthe Lord himself will descend ofrom heaven pwith a cry of command, with the voice of qan archangel, and r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of God. And s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17 Then 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will be tcaught up together with them u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vwe will always be with the Lord. 18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with these words.
g [Lev. 19:28; Deut. 14:1; 2 Sam. 12:20–23; Mark 5:39]
h Eph. 2:12
i 1 Cor. 15:13; [2 Cor. 4:14; Rev. 1:18]
j 1 Cor. 15:18
k See 1 Kgs. 13:17
4 Or by the word of the Lord
l 1 Cor. 15:51
m See ch. 2:19
n See Matt. 16:27
o 2 Thess. 1:7
p [Joel 2:11]
q Jude 9
r Matt. 24:31; 1 Cor. 15:52
s 1 Cor. 15:23; [2 Thess. 2:1; Rev. 14:13]
t See 2 Cor. 12:2
u [Dan. 7:13; Acts 1:9; Rev. 11:12]
v See John 12:2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4:13–18.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1)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1) 또는 자는 자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4:13–18.
 
바울은 앞서 1-12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한 성도의 삶의 태도를 말했다. 이제 13-18절은 주의 강림과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다룬다. 본서에서 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시 이미 죽은 성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논란과 임박한 재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상생활을 소홀히 하는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짧게 이러한 주제를 언급했었다.(1:3, 10; 2:12, 19; 3:13)
 
13절)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죽음의 문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바울이 이런 가르침을 전할 새가 없이 급하게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에 대해서 소망없는 이들과 같이 슬퍼했다.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망없이 슬퍼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다. 당시 고대 그리스의 시인 데오크리투스는 당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리스-로마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절망감을 ‘희망은 산자를 위한 것이다. 죽은 자는 희망이 없다’라고 묘사했다. 
no hope. The ancient Greek poet Theocritus concisely captures the widespread sense of hopelessness in the Greco-Roman world concerning life after death: “Hopes are for the living; the dead have no hope” (Idyll 4.42).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5.
 
‘자는 자들’에 해당하는 표현은 ‘톤 코이모메논’인데 이는 ‘잠을 자다’라는 의미의 ‘코이마오’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 표현은 신약에 19번 등장하는데 원래 의미인 '잠을 자다'라는 의미로는 5번, ‘죽다'라는 비유적 의미로는 14번이나 사용되었다. 실제 히브리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은 것을 흔히 잠자는 것으로 묘사했다.(창 47:30; 신 31:16; 왕상 2:10)
 
본문에서 죽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라고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너희가 알기를 우리가 원한다’라는 표현을 강조하기 위한 이중 부정의 표현이다. 
 
‘소망 없는 다른 이’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지 않은 비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엘피스’ 즉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과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의 삶은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소망이 없는 이들에게 가까운 이들의 죽음은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14절) ‘우리가 믿을진대’라는 표현은 ‘에이 가르 피스튜오멘’이다. 이는 조건 접속사 ‘에이(if)’와 ‘피스튜오’의 직설법 동사’피스튜오멘’으로 ‘만약에 믿는다면’이란 의미가 아니라 ‘실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그렇다면’이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부활, 그분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연합한 성도들역시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고전 15:22)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더이상 죽음은 주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코어, 핵심이다. 주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은 여타 다른 죄있는 인간과 다를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야, 구속주임을 나타내셨고 이로 인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되셨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는 한글 표현은 오역에 가깝다. ‘안에서’라고 번역된 ‘디아’라는 전치사는 ‘~통하여, ~때문에, ~로 말미암아’의 의미를 지닌다. 한글 성경은 이를 ‘안에서’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를 통하여 자는 자들을’ 혹은 ‘자는 자들을 예수를 통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전자의 의미로 번역한다면 ‘예수를 통하여, 예수를 말미암아 죽은 자들’은 순교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 ‘죽은 자들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데리고 오시리라’오 번역된 ‘악세이’는 원형인 ‘아고’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인도하다, 붙잡아 함께 인도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하늘에서부터 성도들을 데리고 땅으로 오신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 ‘악세이’가 가정법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직설법 미래형으로 쓰인 것은 장차 이 일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분의 오심, ‘파루시아’의 때에 주님과 함께 죽은 자들이 함께 온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15절) 바울은 이 부활과 재림에 대한 교훈이 자신의 사색이나 유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이를 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주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기록된 복음서의 말씀중에 본절과 같은 내용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이 기간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해들은 것일 수 있다. 또한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은 말씀을 근거로 이 본절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행 16:6; 18:9; 22:18; 고전 7:10, 40) 
 
‘강림’은 ‘파루시안’으로 이 원형 ‘파루시아’는 왕이나 황제가 지방의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를 위해서 환영행사가 있었고 황제가 내리는 상에 대한 시상식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파루시아는 그 도시에 큰 영광이요 기쁨이 되었다.(2:19; 3:13)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는 바울과 그의 일행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비롯한 당시 살고 있던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앞서다’의 의미로 번역된 ‘프다소멘’은 원형인 ‘프다노’인데 앞서 2:16에서 ‘임하다, 도착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었는데 본절에서는 ‘앞서다, 앞지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5절에서 바울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주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은 보지 못하고 산자들만 재림을 맞이 할 것이라고 혹은 재림시의 순서를 강조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관심사는 부활 순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산자나 죽은 자나 예수의 재림시에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재림에 대한 잘못된 신앙, 소망없는 자들을 향해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Lord’s word. The second reason for hope is grounded in Jesus’ words, which may refer to a saying of Jesus not recorded in the Gospels (John 21:25), a paraphrase of Jesus’ end-time teaching (Matt 24; Mark 13), a general summary of Jesus’ teaching, or a teaching revealed to Paul on the Damascus road or elsewhere. Paul is giving not merely his opinion but an authoritative teaching of the Lord Jesus himself. Jesus’ words emphasize that living believers “will certainly not precede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All believers—the deceased-but-now-resurrected ones (1 Thess 4:14, 16) and the living-but-now-transformed ones (1 Cor 15:51–52)—will share equally in the glorious “coming of the Lord.” Paul employs yet again (1 Thess 2:19; 3:13) a term (Greek parousia) commonly used to describe the coming of an emperor, general or other dignitary into a city with great pomp and celebration (see v. 17 and note).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5–2156.
 
16절) 본절은 ‘호티’(for)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는데 이는 15절의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와 연결되는 단락으로 첫번째가 15절 하반절이고 이것이 두번째 단락이다. 
원문은 ‘호티 아우토스 호 퀴리오스’로 친히라는 ‘아우토스’는 ‘큐리오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주께서 친히’이다. 한글 번역은 이를 분리시켜 번역했다. 즉 재림의 날에 이 땅에 오시는 분은 천사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신 것이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호령’으로 번역된 ‘켈류스마티’의 원형 ‘켈류스마’는 ‘외침, 명령, 호령’의 의미로 권위있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사냥꾼이 사냥개에게 내리는 명령, 선장이 노잡이에게 내리는 명령,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의미한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장의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아르캉겔루’는 ‘천사장의 음성’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르캉겔루의 원형 ‘아르캉겔로스’는 ‘우두머리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르코’와 ‘천사’를 의미하는 ‘앙겔로스’의 합성어로 ‘우두머리 천사’를 뜻한다. 그런데 이 표현에만 관사가 없다. 유대 전통에는 원래 천사장이 일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가엘,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사리엘, 가브리엘, 레미엘 등이다. 이중에 신약에 언급된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뿐이다. 
‘하나님의 나팔’에 해당하는 ‘살핑기 데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팔을 부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나팔’이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릴 때(출 19:13, 16, 19), 새로운 해가 시작됨을 알릴 때(레 23:24), 앗수르와 애굽에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성산에 돌아옴을 알릴 때)사 27:13), 심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릴 때(욜 2:1) 나팔을 불었다. 여기에서는 주님의 재림으로 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기 위해서 백성을 모으시기 위해서 나팔을 사용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는 ‘카타베세타이 아프 우라누’이다. ‘우라누’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라기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처소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하늘로부터, 그 자리로부터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강림하다로 번역된 ‘카나베세타이’는 앞서 등장하느 ‘파루시아’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이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시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다.(행 1:1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미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교정해주기 위한 것이다. 
‘일어나고’로 번역된 ‘아나스테손타이’의 원형 ‘아니스테미’는 흔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막 9:31; 눅 18:33; 요 11:23; 행 13:34) 이때 죽은 자는 죽은, 부패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고전 15:42-44, 52-54) 이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능력이다.
 
17절) 죽은 자의 부활이후에 산자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휴거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끌어올려’로 번역된 ‘하르파게소메다’는 ‘하르파조’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형이다. ‘하르파조’는 어떤 것을 갑자기 잡아 채는 것, 강탈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마 11:12; 요 6:15; 10:12; 행 8:39; 고후 12:2) 여기에는 돌연성과 강제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즉 당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사도바울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고후 12:2, 4) 
 
ἁρπάζω (harpazō), 동사. 끌고가다, 빼앗다. 미래 능동태. ἅρπα; 부정과거 능동태. ἥρπασα; 완료 능동태. ἥρπακα; 부정과거 능동태. ἡρπάγην; 완료 중간태. ἥρπαγμαι. 히브리어 등가: גזל (13), טרף (3).
동사 용법
1. 약탈하다 — 물건을 훔치거나 전리품으로 취하다, 자주 전쟁의 일환으로. 관련 주제: 도둑질; 부정한 이득; 약탈; 약탈자; 약탈자 무리; 망쳐놓다; 침입자.
마 12:29|| καὶ τὰ σκεύη αὐτοῦ ἁρπάσαι,
2. 뺏으려하다 — 재빠르고 강하게 움켜쥐다; 종종 빼앗기 위해. 관련 주제: 파악하다.
요 6:15 ὅτι μέλλουσιν ἔρχεσθαι καὶ ἁρπάζειν αὐτὸν ἵνα
요 10:28 καὶ οὐχ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행 8:39 πνεῦμα κυρίου ἥρπασεν τὸν
고후 12:2 ἁρπαγέντα τὸν τοιοῦτον ἕως τρίτου οὐρανοῦ.
유 23 ἐκ πυρὸς ἁρπάζοντες,
3. 강도 짓을 하다 — 어떤 것을 강제로 또는 주인의 합의 없이 빼앗다;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에 대하여. 관련 주제: 도둑; 강도질.
마 13:19|| καὶ ἁρπάζει τὸ ἐσπαρμένον ἐν τῇ καρδίᾳ
4. 좋지 않은 상황에서 빼낸 (상태) — 급하거나 간절하게 잡아 채다; 자주 건져 내기 위해. 관련 주제: 파악하다.
고후 12:4 ὅτι ἡρπάγη εἰς τὸν παράδεισον
살전 4:17 σὺν αὐτοῖς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계 12:5 καὶ ἡρπάσθη τὸ τέκνον αὐτῆς πρὸς τὸν
5. 주장하다 ⇔ 빼앗다 — 주장하다, 어떤 것을 거칠고 강하게 움켜 쥐는 것으로 이해하여.
마 11:12|| καὶ βιασταὶ ἁρπάζουσιν αὐτήν.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17절) ‘끌어 올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파르조’는 ‘갑자기 귀거나 잡다, 낚아채다, 데려가다’의 의미로 강제로 갑자가 위로 들어 올린다는 의미이다.(요 6:15, 행 8:39)
 
 
 caught up. The only explicit reference in the Bible to the “rapture” (from the Latin translation of the Greek verb used here). Paul envisions the church being “raptured,” joined to Christ at his return. together with them. Paul’s concern is not to predict but to pastor, as he stresses (the word order in Greek is emphatic) yet again that both living and deceased believers in Thessalonica will participate equally in Christ’s glorious return. meet. Greek apantēsis; refers to a delegation party meeting an arriving dignitary outside of town to bestow honor on that visitor by escorting him back to their city. This practice of sending a delegation party to meet and escort an important visitor on the final leg of their journey is found in the only two other NT occurrences of this Greek term (Matt 25:6; Acts 28:15). Paul’s word choice, therefore, implies that the church, once it has been “raptured” to Christ in the air, escorts him to earth.
NT New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6.
 
성도들이 휴거되어 끌어 올려질 곳은 ‘구름 속’이다. 이는 성도들이 물방울이 응결된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월적 실재에 대한 비유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휴거되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영광의 충만함 속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이 영광으로 충만한 이유는 바로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휴거된 성도들이 주를 영접하게 되는 장소는 ‘공중’이다. 이는 ‘아에르’로 지구상의 대기권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 표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이 권세를 잡고 있는 곳이다.(엡 2:2) 그렇다면 재림의 날에는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여 그 힘을 잃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주께서 휴거된 성도들은 마귀의 본거지에서 만나기로 하셨다는 의미로 악한 세력을 향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영접하다’라는 표현은 ‘아판테시스’인데 이는  한 도시의 주민들이 귀빈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며 인사하고 영접하러 나온 뒤 그 도시까지 동행하는, 에스코트하는 의미로 대단히 중요한 고위 관리에 대한 주민들의 환영 연회에 대해서 사용된 단어이다.(마 25:6, 행 18:15) 이 말은 성도들이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이동하는 방향은 그리스도의 이동방향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은 아래 방향으로 땅을 향해 움직인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 25장에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처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되었다.(마 25:6) 이는 휴거된 성도들이 주님과의 혼인 잔치를 위해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를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휴거되어 주를 영접한 성도들이 누리게될 축복은 바로 주와 함께 함이다. 마 28:20의 약속의 말씀은 주님의 재림으로 성취된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주를 보게 될 것이다(고전 13:12) 성도에게 죽음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재림까지의 시간이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영원과 비교하여 본다면 이는 경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4:16–17 cry of command … voice of an archangel … trumpet of God. The three noises summon the dead to wake from their slumber. The only “archangel” identified in the Bible is Michael (Jude 9). Trumpets in the OT proclaimed the Lord’s presence (Ex. 19:16; 1 Chron. 16:6; Ps. 47:5; Joel 2:1; Zech. 9:14); in Jewish tradition, the “trumpet” was associated with battle, the day of the Lord, and the resurrection (cf. 1 Cor. 15:52). first … Then. Dead Christians rise from their graves to the realm of the living, and then the living and the dead together are caught up from the earth into the air to   p 2310  meet Christ. The Greek for “caught up” (harpazō, “to grab or seize suddenly, to snatch, take away”) gives a sense of being forcibly and suddenly lifted upward (see John 6:15; Acts 8:39). together with. The dead Christians would suffer no disadvantage (cf. “we who are alive … will not precede,” 1 Thess. 4:15). clouds. Probably not earthly rain clouds but the clouds of glory that surround the presence of God (cf. Ex. 13:21; 33:9–10; 40:38; Num. 12:5; 1 Kings 8:10–11; Ps. 97:2; Dan. 7:13; Matt. 17:5; Mark 13:26; Acts 1:9; Rev. 14:14). to meet. The Greek term apantēsis is often used of an important dignitary’s reception by the inhabitants of a city, who come out to greet and welcome their honored guest with fanfare and celebration, then accompany him into the city (cf. Matt. 25:6; Acts 28:15; a related term hypantēsis is used in Matt. 25:1; John 12:13). It may indicate that the subsequent movement of the saints after meeting Christ “in the air” conforms to Christ’s direction, thus in a downward motion toward the earth. However, some interpreters caution that the vivid symbolism of apocalyptic language must be kept in mind to avoid over-interpretation of the apocalyptic details. in the air. The sk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9–2310.
 
18절) 바울이 주의 강림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야기한 이유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본문의 ‘이러한 말’은 앞선 13-17절을 말한다. 
본문의 위로하다라는 단어는 ‘파라칼레오’로 1절에서 ‘권면하다’와 동일하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이들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죽은 성도들에 대한 재림에 대한 믿음, 확신이 없음으로 죽은 자들로 인해 슬퍼하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새로운 몸으로 부활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이 사실을 서로 말하여 권면하라는 것이다.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이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는 믿음의 동지들이 필요하다. 이 여정을 위해서는 지도와 안내자와 이에 대한 확신과 동행하는 동지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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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concerning vbrotherly love wyou have no need for anyone to write to you, for you yourselves have been xtaught by God yto love one another, 10 for that indeed is what zyou are doing to all the brothers throughout Macedonia. But we urge you, brothers, to ado this more and more, 11 and to aspire bto live quietly, and cto mind your own affairs, and dto work with your hands, as we instructed you, 12 so that you may ewalk properly before foutsiders and be dependent on no one.
v See Heb. 13:1
w ch. 5:1
x John 6:45; [1 John 2:27]
y See John 13:34
z ch. 1:7
a See ch. 3:12
b Prov. 17:14; 20:3; 25:8; 2 Thess. 3:12
c 2 Thess. 3:11; 1 Pet. 4:15
d [Acts 18:3]; See Eph. 4:28
e Rom. 13:13; [Col. 4:5]
f See Mark 4: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4:9–12.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욱 그렇게 행하고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2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4:9–12.
 
데살로니가전서 4:9–12
9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10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합니다.
11그리고 우리가 여러분에게 명령한 대로,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12그리하여 여러분은 바깥 사람을 대하여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9절) 9절 본문은 ‘페리’라는 전치사로 시작된다. 이는 ‘~에 관하여는’이라는 의미로 이제 새로운 내용이 시작될 것임을 보여준다. 
‘형제 사랑’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필라델피아스’로 이것의 원형은 ‘필라델피아’로 친구간의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와 형제를 뜻하는 ‘아델포스’의 합성어로 ‘형제애’를 의미한다. ‘아델포스’는 ‘자궁’을 뜻하는 ‘델푸스’와 연합을 이루는 의미의 ‘A, alpha’의 합성어로 ‘같은 자궁에서 나온’이라는 의미로 형제를 의미한다. 
The term ἀδελφός was orig. an adj. meaning “from the same womb” (δελφύς, “womb,” with the prefixed alpha as a marker of unity or connection), and it can be applied to things that are sim. in character (e.g., ἀδελφοῖς νόμοις, “kindred laws,” Plato Laws 683a).
orig. origin, original(ly)
adj. adjectival
sim. similar(ly)
e.g. exempli gratia (for example)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149.
이 형제애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보다는 제한적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성도간에 사랑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런 형제간의 사랑의 모습을 통해 세상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게 된다.(요 13:34-35)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이라는 표현은 이미 그런 주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실천하고 있다는 최고의 칭찬이다.(5:1, 고후 9:1)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본문의 하나님의 가르치심이라는 표현은 ‘데오디닥토이’이다. 이는 하나님을 뜻하는 ‘데오스’와 가르치다를 뜻하는 ‘디다스코’의 합성어이다.(요 6:45) 이 하나님의 가르침은 사도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의 사랑으로는 불완전하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배워서 이를 형제 사랑에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가페적 사랑이 무엇인지 또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세상은 각자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만 성도들은 함게 모여 형제의 필요를 살피고 이를 채우는 삶을 살았다. 이에 대해 칼빈은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 바울은 종이에쓸 필요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love for one another. Paul shifts the topic to brotherly and sisterly love (vv. 9–12). taught by God. Paul alludes to how Isaiah describes the Messianic age as a time when God will live so intimately among his people through his Spirit that they will no longer need human teachers but will be “taught by the Lord” (Isa 54:13; cf. Isa 2:3; Jer 31:33–34; Mic 4:1–3; John 6:45; 1 John 2:27). Paul once again (see notes on 1:1, 4) takes “new covenant” language originally describing Israel and applies it to the predominantly Gentile church of Thessalonica.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5.
 
The reason that Paul had no need to write instructions about brotherly and sisterly love to his readers was that God was teaching them to love one another: αὐτοὶ γὰρ ὑμεῖς θεοδίδακτοί ἐστε εἰς τὸ ἀγαπᾶν ἀλλήλους (“you yourselves are taught by God to love one another”). γάρ indicates that v. 9b gives the reason for or basis of the statement in v. 9a. The subject of the subordinate clause, αὐτοὶ ὑμεῖς (“you yourselves”), in v. 9b is emphatic.
θεοδίδακτος (“taught by God”) appears to be a Pauline coinage since there are no known instances of the term prior to Paul, and outside Christian circles there are virtually none after him (Koester, “I Thessalonians,” 40.n.14). The LXX text of Is. 54:13 juxtaposes the words διδακτοὺς θεοῦ (“taught of God”) and is quoted in Jn. 6:45. Although it would be impossible to demonstrate that Paul thought of Is. 54:13 as he coined the word, the theme of the passage is not without interest. Isaiah 54 is an OT eschatological text that looks forward to an age of salvation when the children of Zion will be taught by the Lord God, who will reign over them (cf. Pss. Sol. 17:32 LXX). For Paul the age of salvation had begun with Christ’s resurrection from the dead, and therefore he may have equated this with the age of salvation described in Isaiah 54. For Christians to be taught by God was then a sign of their participation in the age of salvation. Whether Paul had a specific experience in mind or simply referred to his converts’ general Christian experience is at first glance not altogether clear.
The purpose of God’s teaching the Thessalonians is expressed in the infinitive phrase εἰς τὸ ἀγαπᾶν ἀλλήλους (“to love one another”). This well known biblical theme can be traced back to the command in Lv. 19:18,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and was an important theme in Jesus’ teaching (Mk. 12:29–32). As was suggested above (see the discussion of 3:12), Paul’s emphasis on mutual love for fellow Christians was intended to create a new sense of identity and commitment among people who had no basis for a mutual relation prior to their conversion to Christ. Perhaps, then, in this verse the apostle has in mind the fact that, because his readers do indeed love as their brothers and sisters those who formerly were not even acquaintances, this can only mean that God has led them or taught them to do so. In other words, Paul begins with the fact of his converts’ love for one another and concludes that its existence can only be explained by virtue of their having “learned” to do so from God. By putting the matter in this way Paul actually introduced the highest possible warrant for mutual love among the Thessalonians, namely, that it was God-ordained. Thus the expression “you yourselves are taught by God” has the same function as the words “this is the will of God” in 4:3.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60–161.
 
10절) 본문의 ‘행하도다’라는 표현은 ‘포이에이테’로 직설법 현재 시제이다. 계속과 반복 및 습관적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들이 사랑함에 있어서 늘 한결같은 태도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이 행한 이것은 앞서 ‘형제 사랑, 필라델피아’일 수도 있고 ‘사랑, 아가페’일 수도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형제 사랑의 대상은 데살로니가 교회안의 성도들을 넘어서서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들’이었다. 이는 ‘엔 홀레 데 마케도니아’로 전치사 ‘엔’은 영역의 내부를 나타내고, ‘홀레’는 한 부분도 빠짐없이 모든 부분에 사랑이 미친 것을 나타낸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의 수도로 그 지역의 주위에는 빌립보, 베뢰아 교회가 있었다. 이들의 사랑은 공동체 내부를 넘어서 외부를 향해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 진술은 앞서 1:7을 통해 언급한 바 ‘데살로니가 현상’의 키 포인트이다. 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 더 나아가 그 소문이 각처에 퍼졌다. 
데살로니가는 육로나 해로에 있어서 매우 접근이 용이한 교통의 요지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 과정에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지나는 이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길 것을 명하고 있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행하고 있었다. 
 
한글 성경에서는 ‘형제들아 권하노니’앞에 접속사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너희들이 계속적으로 사랑을 행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너희들에게 권면한다’라는 뉘앙스이다. 
‘많이 하고’로 번역된 ‘피릿슈에인’의 원형’패릿슈오’는 앞서 3:12, 4:1에서도 사용된 동사로 차고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잘 하고 있고 하지만 그 자리에 멈추지 말고 더욱 잘 할 것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마가편’,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At a more practical level it meant that Christians traveling between cities could obtain hospitality from their brothers and sisters in places where they knew no one. This is exactly what Paul asks of the Roman Christians for Phoebe, a sister and servant of the church at Cenchreae in Achaia (Rom. 16:1f.). In all probability then the Thessalonians had demonstrated their love for thei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in Macedonia by providing hospitality for them when they visited Thessalonica, a major port and commercial center as well as the seat of Roman administration for the province.
The second part of v. 10 could be taken with what follows, suggesting that a new theme is being introduced. On the whole, however, it seems more likely that when Paul says παρακαλοῦμεν δὲ ὑμᾶς, ἀδελφοί, περισσεύειν μᾶλλον (“and we exhort you to abound [in love] more and more”), he is referring back to their love for the family of God. Nevertheless, the infinitive περισσεύειν (“to abound”) is the first in a series of four infinitive constructions dependent upon the main verb παρακαλοῦμεν (“we exhort”). This clearly indicates that what follows in vv. 10b–11 continues the theme of familial love begun in vv. 9–10a.
According to v. 10b, the recipients of the letter already demonstrate their love by the way in which they act toward one another as genuine brothers and sisters. Paul urges them to increase their feelings and expressions of love for their brothers and sisters, since Christian love should never become complacent, as though a certain level of love were sufficient to please God.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61–162.
 
11절) 바울은 자기의 일에 충실하며 성실하게 일할 것을 권면한다. 이는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안에 재림과 관련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서 생업을 포기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잘못된 시한부 종말론은 일상의 삶을 파괴한다. 
본문은 ‘카이’라는 등위 접속사로 시작되는데 10절의 더 많이 하고라는 부정사와 더불어 ‘권하노니’라는 동사에 걸리는 문장이다. 바울이 10절을 통해서 권하는 내용은 
첫번째, ‘조용히’에 해당되는 ‘헤쉬카제인’으로 이는 ‘헤쉬카조’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형이다. 이는 ‘고요하다, 잠잠하다’의 의미로 조용한 생활을 하는 것, 이리 저리 동요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지키며 평온함을 유지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두번째, ‘자기 일을 하라’는 표현은 ‘프랏세인 타 이디아’이다. 여기서 ‘이디아’는 ‘자기에게 속한, 자신만의’라는 의미이고 ‘프랏세인’의 원형은 ‘프랏소’인데 이는 ‘행하다, 실천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에서 ‘프락시스, 행위, 기능’이 또한 ‘프라그마, 일 사건 행위’라는 표현이 유래되었다. 이는 당시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일상을 무시한 이들이 있었던 사실과 더불어서 당시 교회의 구성원이 아닌 몇몇 형제들이 교회 운영권에 간섭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종말 신앙으로 인해 일상이 파괴된 이들이나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을 간섭하여 교회 헌금을 유용하려는 이들에 대해서 ‘자기 일에만 전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 ‘너희 손으로 일하라’에서 일하다라는 표현은 ‘에르가제스타이’로 원형은 ‘에르가조마이’인데 이는 ‘일하다, 활동하다, 성취하다, 행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는 ‘필요에 따라 정신적, 육체적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발휘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원문에는 ‘이디아이스’, ‘자신의’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너희 자신의 손으로 일하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당시 헬라의 노동관점에서 보면 손으로 일하는 것은 노예들이나 하는 것으로 자유민들은 이를 천박한 것으로 여겼다. 바울은 그런 세계관을 깨뜨리고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일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 세가지의 내용을 힘쓰라고 권면한다. ‘필로티메오마이’는 ‘좋아하다,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필로스’와 ‘명예’를 의미하는 ‘티메’의 합성어로 ‘명예를 좋아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명예심의 동기로부터 어떤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열망하다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Most recent commentators favor a different view. 2 Thes. 3:6–13 reveals that some of Paul’s converts were refusing to work to earn their own keep. This is then connected with the eschatological expectation of the community, to suggest that some had stopped working because they believed that the coming of Jesus was so near at hand that there was no reason to work (cf. Frame, 159f.; Rigaux, 519–521; Best, 175f.; Bruce, 90f.). Against this view, however, is the fact that Paul does not himself make this connection in any explicit way. It also leaves unanswered the relation between the exhortations to familial love and to the quiet, self-sufficient life. A clearer picture of the situation at Thessalonica will emerge if we pay attention to the insights of Hock and Malherbe.
The first exhortation in v. 11 (the second in the series begun in v. 10) consists of two infinitival phrases. Paul exhorts the Thessalonians φιλοτιμεῖ σθαι ἡσυχάζειν καὶ πράσσειν τὰ ἴδια (“to aspire to live quietly and to tend to your own affairs”). The expressions “to live quietly” and “to tend to one’s own affairs” go together and have unmistakable political connotations (Hock, Social Context, 46f.). To say, as Frame (161) does, that they could not have this public sense in our text because the Christians were not philosophers but workers ignores one of the vital pieces of data in the letter. When Paul’s readers had converted to Christianity, as has previously been observed, a public outcry arose and resulted in oppressive measures against them (cf. 1:6; 2:14; 3:3f.). Whether willingly or unwillingly, they had come into public view and had suffered for their faith. Thus Paul’s exhortation to them “to aspire to live quietly and to mind your own affairs” was an eminently practical piece of advice. He hoped that by maintaining a low profile they would avoid further trouble for themselves. The likelihood of this suggestion receives support from v. 12, as we shall se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62–163.
 
12절) 본절은 앞선 11절 권면의 목적에 해당된다. 
그 첫째 목적은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기 위해서이다. 외인으로 번역된 ‘투스 엑소’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비그리스도인을 지칭한다. 
‘단정히’로 번역된 ‘유스크모노스’는 ‘좋은’을 의미하는 ‘유’와 ‘모양’을 의미하는 ‘스케마’의 합성어로 ‘적절하게, 품위있게, 모양새 있게’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단정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외모, 옷 매무새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주시하면서 비난거리를 찾는 이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도록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갈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행하다’라는 표현은 ‘페리파테터’로 원형은 ‘페리파테오’이다. 이는 ‘주위’라는 의미의 ‘페리’와 ‘걷다’라는 의미의 ‘파테오’의 합성어이다. 주위를 걷는 것이라는 의미로 특정한 방식으로 살거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번째 목적은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물질적으로 아무도 궁핍하지 않도록 살기 위해서 힘써서 자기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11절의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않으면 궁핍함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다른 형제에게 의존하게 된다. 
 
The purpose of the ethical exhortation of the previous two verses is twofold according to v. 12. The second purpose, ἵνα … μηδενὸς χρείαν ἔχητε (“that you have need of nothing”—or “no one” if μηδενός is taken as masculine rather than neuter) is linked most closely with the requirement that the readers “work with their own hands.” By doing this they would provide for themselves sufficiently well to avoid needing material assistance from their fellow Christians. It is improbable that idle Christians would find any support outside the church. Therefore it seems reasonable to see ἵνα περιπατῆτε εὐσχημόνως πρὸς τοὺς ἔξω (“that you live becomingly toward outsiders”) as providing the purpose of “aspiring to a quiet life” and “minding their own affairs.” Paul’s hope was that no new wave of oppression would break out in Thessalonica if his converts acted with circumspection toward their non-Christian neighbors (τοὺς ἔξω), thereby giving them no reason to react against the Christians. The phrase “those outside” derives from the fact that Paul had erected a group boundary for his converts and wished to preserve it in order to maintain their sense of identity and separation from the pagan society of which they had formerly been a part (cf. 1 Cor. 5:12f. and Col. 4:5; see Meeks, First Urban Christians, 84–107 on group boundaries in Pauline Christianity).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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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ly, then, brothers,1 we ask and urge you in the Lord Jesus, that as you dreceived from us ehow you ought to walk and fto please God, just as you are doing, that you gdo so more and more. For hyou know what instructions we gave you through the Lord Jesu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your sanctification:2 jthat you abstain from sexual immorality; that each one of you know how to control his own kbody3 in holiness and lhonor, not in mthe passion of lust nlike the Gentiles owho do not know God; that no one transgress and pwrong his brother in this matter, because the Lord is qan avenger in all these things, as we told you beforehand and solemnly warned you. For rGod has not called us for simpurity, but in holiness. Therefore twhoever disregards this, disregards not man but God, uwho gives his Holy Spirit to you.
1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10, 13
d Phil. 4:9; Col. 2:6
e See Eph. 4:1
f See Col. 1:10
g See ch. 3:12
h [1 Cor. 11:2]
i Rom. 6:19, 22; 1 Cor. 1:30; 2 Thess. 2:13; 1 Tim. 2:15; Heb. 12:14; 1 Pet. 1:2
2 Or your holiness
j See 1 Cor. 6:18
k 1 Pet. 3:7; [2 Cor. 4:7]
3 Or how to take a wife for himself; Greek how to possess his own vessel
l [Rom. 1:24]
m See Rom. 1:26
n Eph. 4:17
o Ps. 79:6; Jer. 9:3; 10:25; See Gal. 4:8
p 1 Cor. 6:8
q Rom. 13:4; [Rom. 12:19; Heb. 13:4]
r ver. 3; See 1 Pet. 1:15
s ch. 2:3
t [ch. 2:13]; See Luke 10:16
u 1 John 3:24; 4: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4:1–8.
 
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1)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1) 헬, 자기몸을절제할줄알고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4:1–8.
 
데살로니가전서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칭찬이라면 4-5장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에 대한 교훈과 권면이라고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피차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불신의 문화가운데 데살로니가라는 도시 속에서 본이 되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를 취해서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하여금 성적인 부분에서 정결한 삶을 살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일부 신자들에게 올바른 종말에 대한 신앙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4장은 1-2절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3-8절에서는 성적 행위에 있어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 9-12에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이들에 대한 형제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1세기 헬라 사회의 남성들에게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아래 사진은 1세기 데살로니가의 매춘업소 옆에 위치한 목욕탕 유적지이다. 이러한 시설이 버젓이 도시에 위치해 있었고 남성들은 부부관계 안에서만 성적 관계를 가져야한다는 가르침은 매우 낯선 것이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성적 쾌락을 위해서 정부를 두거나 창녀들가 일상적으로 성적 관계를 가졌다. 이방 종교들은 성결을 강조하기보다 도리어 풍요를 간구하는 제의식의 일환으로 종교적 매춘을 조장하기도 했다. 실제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여명의 매춘을 위한 여사제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1세기 헬라 문화의 배경속에서 회심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음란이 아니라 거룩함임을 분명하게 선언하며 성도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같이 색욕을 따라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4:1–12 Pleasing God in Sexual Conduct and Love for Others. After opening with a general appeal to increase conduct that is pleasing to God (4:1–2), Paul addresses the specific issues of holiness in sexual conduct (4:3–8) and love for others within the church community (4:9–12).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4.
 
 
아래 사진은 1세기 데살로니가 도시안에 있던 매춘굴 옆에 위치한 목욕탕이다. 바울은 이방 도시안에 살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라(살전 4:5)"라고 명령한다. 생각보다 이들에게 색욕을 따르는 삶을 가까이에 있었다.
 
1절) ‘종말로 형제들아’, ‘로이폰 운 아델포이’를 직역하면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형제들아’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운’은 본장의 앞부분 전체를 받으면서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삶을 강조하기 위한 바울의 표현이다. ‘형제들아’라는 표현은 신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표현이다. 
 Paul’s direct address of his readers through the term ἀδελφοί (“brothers [and sisters]”), along with the expression λοιπὸν οὖν (“finally therefore”), marks what follows as a new section (cf. 2:1; 5:1, 13). Paul’s use of ἀδελφοί here is important from a theological and sociological point of view. It reflects the new metaphorical relationship entered into by Christians with one another. Although use of ἀδελφοί was not unknown in clubs and pagan cults, Paul undoubtedly borrowed it from his Jewish background. It was used both in the OT (e.g., Ex. 2:11; Dt. 3:18) and in intertestamental writings like 2 Macc. 1:1, where it occurs in the address of a letter. Quite apart from the background of the term, however, it was an important linguistic tool, an organizing metaphor (see Petersen, Rediscovering Paul, 206) that portrays the community as a family. It served to link together people who often had no previous contact with one another (see Meeks, First Urban Christians, 87–89). The use of familial language was probably justified by the symbolic understanding of God as the father of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see the comments on 3:11, above). As the metaphorical children of the one father Christians were themselves brothers and sisters who were to behave toward one another as family members. Such metaphorical language clearly aided in creating community cohesion among people who had no prior social involvement or commitment to one another (cf. Meeks, Moral World, 129 and the comments on 3:12, abov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47–148.
 
‘구하고 권면하노니’라는 표현은 ‘에로토멘’과 ‘파라칼루멘’이라는 단어로 이는 모두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 동사이다. 이는 바울과 동일하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표현이다. 
‘주 에수 안에서’는 ‘엔 퀴리오 이에수’로 ‘엔’은 ~안에라는 의미인데 공간의 의미를 갖지만 본문처럼 인격체와 함께 사용될 경우 그의 영향권 아래 있는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요 10:38)  이러한 경우에 ‘엔’은 ‘~의 권위를 힘입어’라는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 ‘행하여’는 ‘페리파테인’으로 원형은 ‘페리파테오’로 원래 의미는 ‘주변을 거닐다’라는 뜻이다.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행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일 때 나는 나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배웠으니’는 ‘파렐라베테’로 원형은 ‘파랄람바노’이다. 이는 ‘데려오다, 받다, 취하다, 영접하다’의 의미로 권위있는 전통을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The words καθὼς παρελάβετε παρʼ ἡμῶν τὸ πῶς δεῖ ὑμᾶς περιπατεῖν καὶ ἀρέσκειν θεῷ (“just as you received from us how it is necessary for you to behave and to please God”) refer to the ethical norms and patterns inculcated by Paul (the verb παραλαμβάνω is often a technical term for the reception of authoritative tradition) among the Thessalonians at the time of their conversion to Christ. These norms and patterns were based on traditional OT and Jewish behavioral codes and practices as well as on some drawn from Hellenistic philosophies (Holmberg, Paul and Power, 71). Taken together they constituted the distinctive Christian way of life that Paul required of his converts, as the words “how it is necessary for you to behave and to please God” indicate. The patterns of conduct Paul enjoined on his converts were intended to separate them from the pagan social world out of which they had come and to facilitate harmony and a common identity among the members of the newly formed community (see Meeks, First Urban Christians, 97–103). The second καθώς clause, καθὼς καὶ παριπατεῖτε (“just as also you do behave”), stresses that Paul wished his readers to continue doing what they were already doing in their Christian live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48–149.
‘너희가 행하는 바라’라는 표현은 ‘페리파테이테’로 ‘페리파테오’의 현재 직설법 시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지금도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1:3, 3:5-7) 
‘많이 힘쓰라’라는 표현인 ‘페릿슈에테’는 앞서 3:12의 ‘넘치게 하사’로 번역된 단어와 원형이 같다. 이 원형인 ‘패릿슈오’는 차고 넘치도록 풍성한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고후 8:2, 빌 4:12) 
live. One of Paul’s favorite words to describe the Christian life (32 occurrences). please God. The notion of pleasing God as the goal of human conduct stems from the OT (Num 23:27; 1 Kgs 14:13; Job 34:9; Pss 19:14; 69:31; Prov 15:26; 16:7; Mal 3:4) and is another of Paul’s favorite terms for right behavior (1 Thess 2:4, 15; Rom 8:8; 1 Cor 7:32–34; 2 Cor 5:9; Gal 1:10; Eph 6:6; Col 1:10; 3:22). as in fact you are living … do this more and more. Although the Thessalonians have made progress in living a God-pleasing Christian life, Paul desires even further growth. we ask you and urge you. Paul resorts to “commanding” his readers only if the situation is serious and requires it (2 Thess 3:6). Normally, he employs softer, more user-friendly language of “asking” or “urging” (here; 4:10b; 5:12, 14; 2 Thess 2:1; Rom 12:1–2; 15:30–32; 16:17; 1 Cor 1:10; 4:16; 16:15–16; 2 Cor 10:1–2; Phil 4:2 [twice]; Phlm 9–12 [twice]). Yet even then (as here) he speaks in an authoritative manner (“in the Lord Jesus”) that indicates his appeal must be obeyed (see note on v. 2).
OT Old Testament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4.
 
2절) ‘우리가 준 것을’은 ‘에도카멘’은 부정 과거이며, ‘너희가 아느니라’는 ‘오이다테’로 현재 완료이다. 즉 바울이 그들에게 명령을 준것은 과거의 일이며,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아는 것은 과거에 알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알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 명령이 새로운 것이 아님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다. 
‘명령’은 ‘파랑겔리아스’는 장교가 자기 부하들의 행진을 지도할 때 내리는 구령과 같이 반드시 이행해야할 권위있는 명령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명령의 권위가 주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다 
instructions (Gk. parangelia). Originally a military word, it usually denotes authoritative command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8.
 
He wants his readers to remember τίνας παραγγελίας ἐδώκαμεν ὑμῖν (“what commands/instructions we gave to you”) because these were the organizing principles for their Christian lives. The noun παραγγελία occurs only in this verse in the undisputed Pauline letters, but the verb παραγγέλλειν appears several times (1 Cor. 7:10; 11:17; 1 Thes. 4:11; 2 Thes. 3:4, 6, 12). The passages in which Paul uses either the verb or the noun “have the character of authoritative apostolic ordinances, behind which stands the full authorisation of Christ Himself” (O. Schmitz, TDNT V, 764). This is particularly clear here, as the phrase διὰ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through the Lord Jesus”) reveals. Although the prepositional phrase has been interpreted in various ways (see Best, 157f. and Marshall, 105f.), διά with the genitive of the person frequently indicates the originator of an action. Here it probably goes with the verbal idea implicit in the noun παραγγελία, referring thereby to the authoritative instructions that Paul had given to the Thessalonians. Thus the thought, but not the grammar, is very similar to 1 Cor. 7:10, where Paul writes, “To those who are married I command (παραγγέλλω), not I but the Lord.…” Paul may have given the instructions or commands, but they were from Christ and therefore carried the authority of Christ as Lord (cf. Frame, 144).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49.
 
3절)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텔레마’인데 이는 ‘뜻, 의지, 소원’을 의미하는데 특히 다른 대안보다 한 가지를 선호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텔레마 투 데우’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의미한다. 
‘거룩함이라’는 ‘하기아스모스’라는 명사로 드려짐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성결을 의미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로 세상과 구별된 성결한 자이며, 삶 속에서 성결을 이루어 가야할 자이다. 
‘음란을 버리고’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너희를 음란으로부터 스스로 삼가고’라는 의미이다. ‘버리고’로 번역된 ‘아페케스다이’는 ‘아페코마이’의 중간태로서 동사의 동작의 결과에 주어도 참여함을 나타낸다. ‘음란’으로 번역된 ‘포르네이아’는 모든 형태의 성적 방종을 가리키는 단어로 음행으로 번역된다. 
당시 헬라 문화속에서는 성욕을 절제한다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혼 관계 외에 다른 여성, 미소년, 창기들과 성관계를 맺고 살아갔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면서 성결한 삶, 음행을 버리는 삶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기에 음란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죄가 된다.
음란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먼저 유대인에게 이러한 모든 형태의 음란에 참여하는 것은 모든 성적 부도덕과 더러움으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며, 비 유대인들은 이러한 성적 부도덕이 우상숭배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믿음때문이다. 이러한 바울의 요구는 헬라 문화속에 차별성을 던져주었다. 매우 고결한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πορνεία -ας, ἡ; (porneia), 명사. 음란, 성적 부도덕. 히브리어 등가: תַּזְנוּת (14), זְנוּנִים (9), זֹנָה (4), זְנוּת (4).
명사 용법
1. 성적 부도덕 — 도덕적으로 부적당한 성적 행동; 특히 매춘과 관련하여. 관련 주제: 음탕; 부도덕.
마 5:32 παρεκτὸς λόγου πορνείας ποιεῖ
마 19:9 μὴ ἐπὶ πορνείᾳ καὶ
고전 5:1 Ὅλως ἀκούεται ἐν ὑμῖν πορνεία, καὶ τοιαύτη
골 3:5 πορνείαν, ἀκαθαρσίαν, πάθος, ἐπιθυμίαν κακήν, καὶ τὴν
살전 4:3 ἀπέχεσθαι ὑμᾶς ἀπὸ τῆς πορνείας, εἰδέναι ἕκαστον
명사. 명사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that you abstain from sexual immorality. For former pagans, the lure of sexual sins was strong (see 1 Corinthians 5–6). By using the Greek term porneia (which referred to adultery, fornication, or other sexual immorality), Paul forbids any sexual activity outside the bounds of heterosexual marriage (see Eph. 5:3; 1 Pet. 1:15–2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8.
 
4절)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는 각주에’ 자기 몸을 절제할 줄 알고’라고 표시되어 있다. 본문에 아내라고 번역된 ‘스큐오스’는  문자적으로 ‘그릇, 용기’의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딤후 2:21)이라는 의미와 영혼이 내재하는 몸이라는 의미(고후 4:7)를 지닌다. 하지만 본절 이외에 신약 성경에서 아내의 의미로 사용된 곳은 없다. 사람의 몸이 영혼을 담거나 사람이 그릇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해 그 뜻대로 사용하신다는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본문과 비슷한 의미로는 벧전 3:7에서 사용되었다. 
베드로전서 3:7
7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위 본문에서 ‘스큐오스’는 ‘아내’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영어 주석에서 sex로 번역된 스큐오스(skeuos)는 종종 “그릇, 항아리, 용기”를 의미하나, 또한 신약성경 안에서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이 사용하시도록 의도된 “그릇”으로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행 9:15; 고후 4:7; 딤후 2:21). 여성이 “더 약한 그릇”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남성 역시 “그릇”으로 간주됨을 암시하기에, 여기에는 경멸적인 뉘앙스가 전혀 없다. 그 용어는 모든 사람, 곧 남성들과 여성들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를 회상시키며, 또한 인간의 연약성,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무도 상기시킨다.
두 어구, “여성”과 “더 연약한 그릇”이, “귀히 여기라”보다는 “함께 거하라”라는 명령에 연관된다는 이해도 가능하다는 주장도 주목되어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질 수 있다. “지식을 따라, 더 약한 그릇이요 여성적인 특징을 지닌, 너희 아내와 함께 거하라”(참조, NASB, TEV). 문법적 근거만으로는 이러한 읽기와 RSV의 읽기(그리고 NIV, AV) 사이를 결정하기는 가능하지 않다. 문맥상의 주장에 따라서도 한쪽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NASB New American Standard Bible, 1963.
TEV Today’s English Version, 1976 (= Good News Bible).
RSV Reviesd Standard Version: New Testament, 21971; Old Testament, 1592; Common Bible, 1973.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ew Testament, 21978; Old Testamnet, 1978.
AV Authorized Version (King James), 1611.
 왕인성識, “역자 서문,” in 베드로전서, ed. 진규선, trans. 왕인성, 초판., vol. 17,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22.
 
영어 번역본중 RSV만 ‘wife’로 번역했고 KJV은 ‘his vessel’, NASB와 NKJV은 ‘his own vessel’, NIV는 ‘control your own body’, ESV는 ‘his own body’로 번역했다.  이처럼 ‘슈큐오스’를 아내로 해석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면 이후 ‘대하다’라고 번역된 ‘크타스타이’의 원형은 ‘크타오마이’로 ‘가지다, 얻다, 손에 넣다’라는 의미로 ‘아내를 취하다’의 의미가 좀더 자연스럽다. 이는 당시 문화속에서 여인, 아내를 성적인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기의 몸을 통제할 줄 알고’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본문을 아내를 취하는 것으로 보던지 자기 자신의 몸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던지 자신의 몸을 정욕에 방임하지 않고 스스로 통제하여 결혼의 관계안에서 자신에게 주신 아내와 관계를 가진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결국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통제하여 아내만을 취하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는 ‘엔 하기아스모 카이 티메’인데 도덕적 성결로서의 거룩을 의미하는 ‘하기아스모스’와 객관적으로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에 부여하는 영예와 존경을 의미하는 ‘티메’의 표현이다. 
 
The meaning of σκεῦος has been in question since the patristic period. Some like Theodore of Mopsuestia and Augustine understood it to mean “wife” with the resultant translation, “that each one of you know how to take a wife for yourself in holiness and honor” (cf. RSV). Others like Tertullian and John Chrysostom believed that it denoted “body,” which led them to interpret the clause as “that each one of you know how to keep your own body in holiness and honor” (cf. NEB; NIV). (For patristic references see C. Maurer, TDNT VII, 365 nn. 48f.)
That σκεῦος means “wife” has been argued in the twentieth century by such scholars as Frame (149f.), Maurer (op. cit., 365–367), Best (161–164), Friedrich (237f.), and Holtz (157f.). This view rests on the figurative use in Rabbinic writings of Hebrew kelı̂, which corresponds to Greek σκεῦος, of women and, as Maurer (361f.) has shown, euphemistically of sexual intercourse with a woman with verbs like “use” and “make.” Maurer also maintains that Paul probably translated the technical Hebrew expression from the OT bāʿal ʾišâ, meaning “possess a woman sexually,” by the Greek phrase κτᾶσθαι γυναῖκα and then simply substituted σκεῦος for γυνή. This implies that the wife is merely a sexual object who is possessed by her husband.
Quite apart from the low view of women that it predicates of Paul, this interpretation presents several problems. The Thessalonians did not know Hebrew and therefore Paul could not rely on them to make the kind of connections made by Maurer and others in arriving at this interpretation. Moreover, it leaves unexplained why Paul used an ambiguous and even obscure expression when he could have made his point with the normal Greek word for woman/wife, γυνή. Maurer’s appeal to 1 Pet. 3:7, where ὡς ἀσθενεστέρῳ σκεύει τῷ γυναικείῳ (“the woman as the weaker vessel”) occurs, actually works against his understanding, as σκεῦος there refers to the woman’s body. It also implies that men are also “vessels,” so that σκεῦος is not synonymous with “wife” in 1 Pet. 3:7 at all. A final point against the interpretation of σκεῦος as “wife” is that this understanding does not suit the context in 1 Thes. 4:3b and 5, where illicit and undesirable sexual behavior is proscribed. A command to keep or possess a wife in holiness and honor (Maurer, op. cit., 366 and Best, 162 argue that κτᾶσθαι has a durative force here rather than its normal sense of “to acquire” or “to gain”) would seem to have little to do with concern about illicit sex (v. 3b) or uncontrolled sexual desire (v. 5).
Given the problems attached to understanding v. 4 as referring to the proper attitude of husbands toward their wives, it seems better to understand σκεῦος as connoting the human body in its sexual aspect, that is, as a euphemism for the genitalia. This view has been maintained by such contemporary scholars as Rigaux (504–506), Morris (123f.), Marxsen (60f.), Bruce (83), and Marshall (108f.) and is the most natural interpretation of σκεῦος. σκεῦος meant not only “vessel” but also “tool” or “implement” and is used of the human body in 2 Cor. 4:7 and 1 Pet. 3:7. It was also a recognized euphemism for the genital organs in Greek (see LSJ, 1607). It is perhaps worth noting that the Hebrew root kelı̂ is used of the male sexual organ in 1 Sa. 21:5f., where the Septuagint (1 Kgdms. 21:5f.) translates it with σκεῦος, although this distorts the meaning of the original Hebrew, perhaps intentionally.
κτᾶσθαι probably has the sense “to gain control or mastery” here, and even though the pronouns are masculine the instruction to gain mastery over the desires associated with the genital organs would apply equally to women. Thus Paul exhorts the members of the Thessalonian Christian community to avoid sexual immorality of any sort (v. 3b) and to exercise control over their own sexual drives ἐν ἁγιασμῷ καὶ τιμῇ (“in holiness and honor”).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NEB New English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LSJ H. G. Liddell and R. Scott, A Greek-English Lexicon, revised and augmented by H. S. Jones and R. McKenzie. Oxford: Clarendon Press, 1968.
1 Kgdms. 1, 2, 3, 4 Kingdom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52–153.
 
5절) 본문에 ‘색욕’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데이 에피뒤미아스’이다. 파데이의 원형 ‘파도스’는 고대 헬라 문헌에서는 감정을 의미하지만 신약에서는 수동적 의미에서의 정적 정욕이며 본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육적 욕망으로 묘사된다.(롬 1:26, 골 3:5) ‘에피뒤미아’는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적극적인 악한 욕망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표현을 이중으로 사용함으로 인간 본성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제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의 특성은 색욕을 좇는 삶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보이셨다(롬 1:19). 하지만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되 우상을 섬겼다. 이에 하나님께서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심으로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다.(롬 1:24)
 
The thought of v. 4 is continued in this verse by a negative observation concerning the Gentiles or, as they must be understood in this text, non-Christian and non-Jewish people: μὴ ἐν πάθει ἐπιθυμίας καθάπερ καὶ τὰ ἔθνη τὰ εἰδότα τὸν θεόν (“not in the passion of desire like pagans who do not know God”). Both πάθος (“passion”) and ἐπιθυμία (“desire”) can have pejorative connotations. For example, in Gal. 5:24 Paul speaks of those who belong to Christ as having crucified the flesh with its passions (τοῖς παθήμασιν) and desires (ταῖς ἐπιθυμίαις; cf. Col. 3:5). Although this may refer to something broader than sexual passions and desires, it undoubtedly includes them. In 1 Thes. 4:5 the context demands an allusion to unwholesome sexual passion driven by a desire for what is forbidden.
Such behavior was from the Jewish standpoint typical of pagan existence and connected with Gentile idolatry (see comments on 4:3). Paul takes up this stereotypical representation from Jewish literature with “like pagans who do not know God,” attributing the sexual immorality of the pagans to their ignorance of God (cf. Rom. 1:24–27). He does this to provide a clearly negative contrast to the proper Christian sexual conduct set forth in v. 4. At the same time it emphasizes the separation of Christians from their pagan neighbors.
This verse is of interest for another reason unrelated to its principal thought. From the Jewish point of view humanity was divided into two groups: Jews and Gentiles (τὰ ἔθνη). Here Paul differentiates between his converts at Thessalonica and the pagan Gentiles. While he could refer to Gentiles as offspring of Abraham by virtue of their faith (cf. Gal. 3:6–9, 28f.), he nowhere speaks of them as “Jews,” since this was an ethnic distinction. By the time of Ignatius of Antioch early in the second century Christians were speaking of three races instead of two: Jews, Gentiles, and Christians. Already this distinction is implied here with Paul’s distinction between his converts at Thessalonica and the Gentiles. The majority of the Christians at Thessalonica had come from the ranks of the Gentiles, but their conversion gave them a new identity. They had not, however, become Jews, and therefore they represented a distinctively new grouping of humanity from Paul’s perspective (cf. Gal. 3:28; Col. 3:11).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53–154.
 
6절) ‘이 일에’는 ‘토 프라그마티’로 ‘프라그마’는 ‘행위, 사실, 사건’의 의미로 ‘논의 되고 있는 문제, 소송’를 의미한다. ‘토’는 ‘this’에 해당되는 의미로 지금 논의 중인 문제, 즉 음란과 색욕을 좇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분수를 넘어서 해한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분수를 넘다’로 번역된 ‘휘페르바이네인’의 원형 ‘휘페르바이노’는 ‘~을 넘어서, ~이상의’의 ‘휘페르’와 ‘걷다’라는 의미의 ‘바이노’의 합성어로 ‘금지되어 있는 선을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 한번 사용된다. 여기서 넘어가서는 안되는 선은 혼인 관계로 즉 혼인 관계를 넘어서서 타인의 아내를 취함으로 형제를 해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타인의 아내를 넘보고 이를 취하는 것은 그 형제에게 막대한 해를 끼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Several factors militate against this interpretation. In the first place the τὸ μή construction is uncertain in meaning (Frame, 151f.). That a new subject is being introduced seems unlikely since a transition to business ethics would be abrupt in the context, and v. 7 seems to refer to sexual aberrations, the theme of vv. 3–5. The prepositional phrase ἐν τῷ πράγματι cannot be taken to mean “in business affairs,” as Beauvery and Holtz suggest, because the noun has never been shown to have a peculiarly commercial connotation (Frame, 153; C. Maurer, TDNT VI, 639) and the singular form of τῷ πράγματι does not suit a general reference. The most natural meaning of ἐν τῷ πράγματι is “in this matter,” referring back to the theme of sexual immorality introduced in v. 3. If this interpretation is correct it confirms the view that τὸ μή is resumptive in force.
The argument that the infinitives ὑπερβαίνειν and πλεονεκτεῖν best fit a commercial context is also specious. The former denotes an overstepping of something or, figuratively, transgression of some law or command, and therefore lacks any specific commercial connotations. The latter refers to desire to claim more than one’s fair share or to taking advantage of someone. While this could have an economic connotation, it need not, since it is equally possible to take advantage of someone or to “desire” what one has no right to in sexual matters. That v. 6a does not make any sense in connection with the marriage relation discussed in v. 4 is based on a faulty interpretation. In all probability v. 4 refers to premarital and extramarital sexual affairs, not to a husband’s attitude toward his own wife, as was shown above.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54–155.
 
‘신원하여 주다’라는 표현은 ‘엑디코스’로 ‘~로 부터’의 ‘에크’와 ‘공의, 형벌’의 ‘디케’의 합성어로 ‘공의에 입각하여 처벌하는 것, 원수 갚는 자’라는 의미이다. 주님께서는 형제를 해하는 일에 대해서 주께서 공의에 입각하여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시 94:1) 해함을 당한 형제가 힘이 없고, 공권력이 이 일에 대해서 처벌하지 않는다고 해도 주께서는 이를 기억하고 보복하실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 ‘프로에이파멘'의 원형 ‘프로에이폰’는 ‘미리 이전에 말하다, 공개적으로 명백히 말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증언한’은 ‘디에마르티라메다’로 ‘사실을 먼저 확인하여 엄숙하게 무언가를 주장하다’라는 의미이다. 본절의 내용을 통해서 바울의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인 거룩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강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절) 7절은 ‘가르’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이는 ‘왜냐하면, for’에 해당되는 표현인데 이는 3-6절 전체를 받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음란과, 색욕 같은 성적 범죄에 자신을 드려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성도들을 부르신 목적을 분명하게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부르심은’에 해당하는 ‘에칼레센’은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칼레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능동적으로 부르셨다는 의미이다. 부도덕하고 각종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몇몇을 구별하여 불러내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 바로 ‘에클레시아’ 교회이다. 교회는 밖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카다르시아’가 아니라 ‘하기오스모스’를 위하여 부르셨다. 부정이 아니라 거룩을 위하여 부르셨다. 
called. When the Thessalonians embraced Paul’s gospel, they were responding to God’s effectual call (see note on Rom. 8:30; cf. note on 1 Thess. 1:4). That call did not have as its goal impurity but rather a life of holines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9.
 
The negative view of their call, expressed in the words “God did not call us to uncleanness,” is contrasted with a positive understanding in the words ἀλλʼ ἐν ἁγιασμῷ (“in holiness”). The change to the preposition ἐν serves to stress the contrast between the negative understanding of the call and its positive dimension. ἐν can be used in place of εἰς with the verb καλεῖν (“to call”; see 1 Cor. 7:15), but as Turner (Syntax, 263) notes, this may well be a pregnant construction of Paul’s that should be interpreted similarly to the “in Christ” formula. If this is correct, the meaning is that the Thessalonians were called “into the sphere where God’s sanctification takes place.” This picks up the theme of 4:3. The emphasis, however, is not on the readers’ need to strive for sanctification but rather on the fact that Christian existence is to be lived in the sphere of God’s holines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57.
 
8절) 본문에서 사용된 그러므로는 ‘토이가로운’으로 신약에 두번 사용된다.(히 12:1) 이는 ‘토이가르’의 강조형으로 앞선 것으로부터의 논리적 추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The unusual particle τοιγαροῦν (“for that very reason”) occurs in the NT only here and in Heb. 12:1. It is a strengthened form of τοιγάρ indicating a logical inference from what has preceded: if God has called Christians to live in holiness (ἁγιασμός), it follows that to live in sexual debauchery (ἀκαθαρσία) constitutes a rejection of God’s call.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57.
 
 ‘저버리는’의 의미인 ‘아데테오’는 본래 어떤 법규정이나 언약 등의 효력을 폐지하고 무효로 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갈 3:15, 히 10:28) 그러나 일반적으로 ‘거절하다, 무시하다’의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무엇을 저버렸다는 것인가?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성적 방종을 버리고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바울의 교훈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서 명하신 이 명령을 저버리는 사람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와 바울이 가르친 엄격한 교훈을 잊어버리고 성윤리에 대한 좀더 너그러운, 자유로운 태도를 취할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법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유혹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이 명령이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지속적으로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명하신 이 성적 윤리를 어기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전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The main clause of v. 8, τοιγαροῦν ὁ ἀθετῶν οὐκ ἄνθρωπον ἀθετεῖ ἀλλʼ τὸν θεόν (“for that very reason the one who rejects [these things] does not reject humanity but God”) is a negative statement closely related to a tradition found in somewhat different forms several places in the Gospels (see Mk. 9:37 par.; Mt. 10:40; Lk. 10:16; Jn. 12:44; 13:20). Its antecedents occur in the OT, as 1 Sa. 8:7 shows. The closest of the Gospel parallels is Lk. 10:16: ὁ ἀκούων ὑμῶν ἐμοῦ ἀκούει, καὶ ὁ ἀθετῶν ὑμᾶς ἐμὲ ἀθετεῖ (“the one hearing you hears me, the one rejecting you rejects me”). Whether Paul knew this particular form of the tradition and modeled v. 8 on it cannot be determined because he might well have based his saying on the principle that lies behind Lk. 10:16 without knowing Jesus’ saying.
The principle involved concerns the Jewish idea of the šālı̂aḥ, who was the appointed representative of another. According to the rules of conduct associated with šālı̂aḥs, the representative of a person could act in his place with full legal rights. To receive or to reject such a representative was to receive or reject the sender. (For studies on the šālı̂aḥ principle see K. H. Rengstorf, TDNT I, 413–420; Borgen, “God’s Agent”; Barrett, “Shaliaḥ”). This is particularly relevant because the idea of apostleship in early Christianity had its roots in the šālı̂aḥ tradition of Jewish thought (Rengstorf, 421).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57–158.
 
6-8절) 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적인 행위와 관련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시기와 삼위일체와 관련이 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심으로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주께서 신원하시기에’(6절), 2) 하나님의 과거의 선택 행위,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부르신 하나님’(7절), 3) 성령의 현재 역사하심, ‘거룩한 삶을 살도록 믿는 자에게 능력을 주심’(8절) 
Paul gives three reasons why believers must live a holy life with regard to their sexual conduct, and each reason involves a different time period and person of the Trinity: (1) the future coming of the Lord Jesus Christ to “punish all those who commit such sins” (v. 6); (2) the past electing action of God, who “calls us … to live a holy life” (v. 7); and (3) the present working of the Holy Spirit, whom “God gives” to empower believers to live a holy life (v. 8).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4.
 
 
HOLINESS
Andrew David Naselli
Holiness is woven through the Bible’s storyline. The holy God created holy people who became unholy. He later selected Israel as his holy people, but they repeatedly failed to be holy. Jesus, who embodies holiness, made his people holy, so Christians are holy and must strive to live in a holy manner, however imperfectly, until God consummates his plan to make his people holy.
HOLINESS PERSONIFIED: GOD
Many people equate holiness with taboos. The Bible equates it fundamentally with God.
What Is Holiness?
“Holiness” is commonly defined as being separate or set apart. God is holy in that he is set apart from everything that is not God, and God’s people must be holy by being set apart from sin. So holiness, according to this definition, is separateness that entails moral purity. But that does not sufficiently describe the essence of holiness or distinguish different senses in which people and things can be holy. There is a sense in which only God is holy and another sense in which others can be holy.
God Is Holy
In its most focused usage, “holy” is an adjective uniquely associated with God. “Holy, holy, holy is the Lord Almighty” (Isa 6:3; cf. Rev 4:8). Surely this loses something if rendered “Separate, separate, separate” or “Moral, moral, moral.” Saying “God is holy” is like saying “God is uniquely God” or “God alone is God”: the word “holy” in such a context becomes almost an adjective for God. That God swears by his holiness (Ps 89:35; Amos 4:2) is equivalent to saying that he swears “by himself” (Amos 6:8). God is supremely and exclusively God. He has no rivals. As uniquely excellent, he is his own category: “There is no one holy like the Lord; there is no one besides you” (1 Sam 2:2; cf. Exod 15:11; Ps 77:13; Isa 40:25). The Bible calls God “the Holy One” over 50 times and calls the Spirit of God “the Holy Spirit” over 90 times.
People and Objects Are Holy in Relation to God
God alone is innately holy (Rev 15:4). His name is holy (Isa 57:15). Yet the use of the word “holy” stretches out in widening circles to apply to people and things. If human beings or things are holy, they are holy only derivatively—not because they are divine or moral but because God restricts them for his special use. In a broad sense, everything belongs to God, but in a more narrow sense, some things and people belong exclusively to God in a special way. For example, heaven—God’s dwelling place—is holy (Deut 26:15), and God refers to angels as his “holy ones” (Ps 89:5–7) and “the holy angels” (Mark 8:38).
HOLINESS LOST: HUMANS
Adam and Eve were the crown of God’s good creation, and they walked with God in the sanctuary of Eden. But the sinless couple sinned and lost their holiness, so God expelled them from his presence (Gen 1–3; Eccl 7:29). (See “Creation,” p. 2330, and “Sin,” p. 2332.) The story of the Bible is, from one perspective, about how God is working to restore to an even greater degree the holiness that our first parents forfeited.
HOLINESS ESTABLISHED AND PRACTICED: ISRAEL
God later selected Israel to become his holy people as he dwelt among them. The OT calls God “the Holy One of Israel” over 30 times.
Israel Was Holy
Following the exodus of God’s people from Egypt, Israel became a holy nation because God was uniquely present with them. Israel was God’s special people: “You are a people holy to the Lord your God. The Lord your God has chosen you out of all the peoples on the face of the earth to be his people, his treasured possession” (Deut 7:6; cf. Exod 19:4–6; Deut 14:2).
In the OT, holiness is usually associated with God’s special presence in theophanies (see note on Deut 4:24) or at Israel’s tabernacle and temple. God’s holiness radiated outward from the Most Holy Place, making everything associated with it holy: the building and courtyard (Lev 16:15–16; Ps 79:1); the furniture and utensils (Exod 30:26–29; Num 4:14–15); the priests and their clothing (Exod 29:21; Lev 21:6–8); the sacrifices, offerings, and tithed crops (Lev 27:30; Num 18:17); and the oil, incense, and censers (Exod 30:25, 34–37; Num 16:37). (See “Priest,” p. 2342, and “Sacrifice,” p. 2344.)
Israel Was Responsible to Be Holy
God commanded Israel, “You are to be my holy people” (Exod 22:31). “Be holy, because I am holy” (Lev 11:44–45; cf. Lev 19:2; 20:7; 21:8). “You are to be holy to me because I, the Lord, am holy, and I have set you apart from the nations to be my own” (Lev 20:26).
Israel was responsible to regard God as holy (Isa 8:13) by obeying his commands regarding rituals and morality (Num 15:40; Deut 28:9; cf. Num 20:12). They were to keep God’s Sabbaths holy (Exod 20:8–11), and the priests were to “distinguish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between the unclean and the clean” (Lev 10:10). Uncleanness, which is linked to imperfection and death, is the opposite of holiness, which is linked to wholeness and life. God’s instructions about cleanness and uncleanness covered all spheres of life, including diet, purification after childbirth, skin diseases, infections, and bodily discharges, and they reminded the people of their holy calling (Lev 11–15).
But because Israel continually profaned their holy God, who judges unholy people (2 Kgs 17:7–23; 2 Chr 36:15–16), God graciously met the need of sinful humans with a holy Savior.
HOLINESS EMBODIED AND ACCOMPLISHED: JESUS
Jesus Is Holy
“Who can stand in the presence of the Lord, this holy God?” (1 Sam 6:20). Only one can stand on his own merits: Jesus. He is “holy and true” (Rev 3:7; 6:10). Jesus is the one whom “the Father set apart as his very own” (John 10:36). The angel Gabriel announced to Mary, “The holy one to be born will be called the Son of God” (Luke 1:35). An unclean demon recognized Jesus as “the Holy One of God” (Luke 4:34). Jesus made unclean people clean by touching them, and he never became unclean because he is inherently holy. Peter called Jesus “the Holy One of God” (John 6:69), “the Holy and Righteous One” (Acts 3:14), and God’s “holy servant” (Acts 4:27, 30).
Jesus Makes People Holy
Jesus is both the Holy One and “the one who makes people holy” (Heb 2:11). He is “our righteousness, holiness and redemption” (1 Cor 1:30). His perfect life and sacrificial death satisfied God’s holy wrath against sinners: “We have been made holy through the sacrifice of the body of Jesus Christ once for all” (Heb 10:10).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to make the people holy through his own blood” (Heb 13:12).
To serve in God’s presence, OT priests were made holy by a consecration ritual involving atonement, purification, and eating a special meal. These same elements also underlie the Passover ritual, by which God consecrated Israel as a holy nation. This pattern continues in the NT: Jesus brings about a new exodus that consecrates believers as holy. God is uniquely present with the church, composed of both Jewish and Gentile Christians, because it is “a holy temple in the Lord” (Eph 2:21; cf. 1 Cor 3:17). God has chosen Christians to be “a holy priesthood”; they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God’s special possession” (1 Pet 2:5, 9). (See “Exile and Exodus,” p. 2347, and “Temple,” p. 2340.)
HOLINESS APPLIED AND PRACTICED: CHRISTIANS
Many theologians sharply distinguish justification from sanctification. (“Sanctify” means to make holy.) Justification is the instantaneous, completed act in which God declares a believing sinner to be righteous, and sanctification is the progressive, incomplete, lifelong maturing process in which a Christian is gradually made more holy. Those are valid and important systematic categories, but the latter category can confuse people because the NT letters present three tenses of sanctification: past, present, and future. A Christian can say, “I am sanctified. I am being sanctified. And I will be sanctified.”
Past. Definitive or positional sanctification occurs when God sets people apart for himself at the moment they become Christians.
Present. Progressive sanctification is what many Christians today refer to as sanctification (see above).
Future. Ultimate sanctification corresponds to glorification. This happens when God sets his people apart from sin’s presence and possibility.
Christians Are Holy
When the Bible refers to Christians as “holy” or “sanctified,” it usually refers, not to progressive sanctification, but to definitive or positional sanctification (e.g., Rom 1:7; Eph 1:1; 5:3; Col 1:2, 12; 3:12; 2 Thess 1:10; Heb 2:11; Jude 3; Rev 13:7). In this sense, every Christian is a saint; every Christian is holy; every Christian is sanctified. For example, Paul addresses the church at Corinth as “those sanctified in Christ Jesus and called to be his holy people” (1 Cor 1:2; cf. 1 Cor 6:11). They were already “sanctified” even though they were failing to be holy in several areas.
Christians Are Responsible to Be Holy
God commands Christians,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for it is written: ‘Be holy, because I am holy’ ” (1 Pet 1:15–16, quoting Lev 11:44–45). Christians must worship God by offering thei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pleasing to God” (Rom 12:1). Since Christians belong exclusively to God, they must reflect God’s moral character with “holy and godly lives” (2 Pet 3:11; cf. Rom 6:19, 22; 2 Cor 7:1). “It is God’s will that you should be sanctified: that you should avoid sexual immorality; that each of you should learn to control your own body in a way that is holy and honorable … For God did not call us to be impure, but to live a holy life” (1 Thess 4:3–4, 7). “Make every effort to live in peace with everyone and to be holy; without holiness
 
 Andrew David Naselli, “Holiness,”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364–2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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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Now may wour God and Father himself, and our Lord Jesus, xdirect our way to you, 12 and may the Lord ymake you increase and abound in love zfor one another and for all, as we do for you, 13 so that he may aestablish your hearts blameless in holiness before wour God and Father, at b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with all his saints.
w See Gal. 1:4
x 2 Thess. 3:5
y ch. 4:1, 10; Phil. 1:9; 2 Thess. 1:3
z ch. 4:9; 5:15
a James 5:8
w [See ver. 11 above]
b See ch. 2:19
c Zech. 14:5; Jude 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3:11–13.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3:11–13.
 
11-13절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중보기도이다. 
The wish-prayer in 1 Thes. 3:11–13 contains three petitions that serve to draw the first main section of the letter to a conclusion. They reiterate: (1) Paul’s desire to visit the Thessalonians (v. 11; cf. 2:17–3:10, esp. 2:17f.; 3:6, 10); (2) his hope that their Christian love would increase and abound as his love for them abounds (v. 12; cf. 2:1–12, where Paul gives his own behavior as a model for his converts, and 3:6); and (3) his concern that they should persevere until the parousia or coming of Christ (v. 13; cf. 3:1–5). The implicit parenetic character of the last two petitions serves as a transition to the main parenetic section of the letter by introducing the themes of that section: holiness or Christian ethical behavior (4:1–12; 5:13–22) and the parousia (4:13–5:11).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40.
 
 
11절)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는 자신들의 길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똑바로 나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본문에서 주어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이다. 그런데 동사로 사용된 ‘갈 수 있게하다’라는 표현은 ‘카튜뒤나이’로 ‘카튜디노’의 부정과거 능동태 기원법 3인칭 단수의 표현이다. 엄밀하게 보면 주어는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로 사용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어의 처음 단어는 ‘아우토스’로 ‘himself, 친히’라는 표현이 하나님 아버지에만 사용된다. 이는 바울이 기본적인 문법을 모르고 글을 썼다기 보다는 오히려 문법에 맞지 않는 파격적인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두 신격을 하나로, 단수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두 신격이 동일 본질을 가진다는 삼위일체의 신비스러운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러한 파격 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카튜뒤나이’는 ‘카튀디노’의 부정과거 기원법 동사이다. 이는 ‘똑바르게 하다(make straight), 인도하다(guide)’라는 의미이다. 특히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평탄하게 인도한다는 개념이 담겨 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3번(눅 1:79, 살후 3:5) 사용되었다. 인도하시는 주체는 모두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의 길을 평탄하게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려준다. 하여 이표현이 직행하다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데살로니가 교회까지 가는 길에 있을 수 있는 수 많은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평탄하게 갈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이다. 앞서 2:18에서 본것처럼 사탄은 여러 장애물들로 바울의 여정을 막은 바 있다. 
잠언 16:9
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Paul employs the optative mood (κατευθύναι) in his prayer to indicate his wish, as was common in the period (cf. 3:12; 5:23; 2 Thes. 2:17; 3:5, 16; Rom. 15:5, 13). Some have argued that the singular form of the verb with the twin subjects God and Christ has important theological significance, demonstrating that Paul held to the oneness of God and the Lord Jesus (Neil, 71) or the full deity of Jesus (Morris, 111). Hewett (“1 Thessalonians 3:13,” 54), following A. T. Robertson, has shown that compound subjects occur regularly with singular verbs in the NT (see, e.g., Jas. 5:3; Mt. 5:18; Mk. 4:41) without this sort of implication. He quite correctly maintains that the articles occurring with each of the subjects (ὁ θεός … ὁ κύριος) indicate that God and the Lord Jesus were viewed as two separate personalities by Paul. The singular verb, however, reveals that Paul understood them as having a close relation. Thus although 1 Thes. 3:11 does not constitute evidence for a trinitarian theology in Paul, the basis for it was already being laid in the earliest Church through the identification of Jesus as the son of God who ruled in the place of God (see 1 Cor. 15:23–28; Phil. 2:6–11) and of the Spirit as the agent of God and Christ (Rom. 8:9–11).
κατευθύναι with the words τὴν ὁδὸν ἡμῶν πρὸς ὑμᾶς refers to Paul’s desire for God either to direct his way to the Thessalonians in the sense of leading him to return to them or to smooth his way in the sense of overcoming whatever obstacles might prevent him from returning (cf. 2:18). This prayer petition thus serves to reiterate Paul’s deep desire to revisit the Thessalonians in order to further strengthen their faith, and thereby it draws to a conclusion the main theme of Paul’s apostolic parousia in the second part of the narratio (2:17–3:10). This desire was only fulfilled much later when Paul returned to Corinth from Ephesus via Macedonia (cf. 1 Cor. 16:5; 2 Cor. 2:13; Acts 19:21; 20:1f.).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41–142.
 
12절) 본절의 주어도 주님(큐리오스)이시다. 바울은 주님께 우리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또한 모든 사람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한다. 
본문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다. 먼저 주님이 그 사랑을 보여주셨고, 바울의 일행이 이것의 본을 보였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그 본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가페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타적 사랑으로(고전 13:5) 유모가 자기 자녀를 양육하는 것처럼(2:7),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줄 정도로(2:8), 아비가 자녀를 권면하듯(2:11) 사랑하였다. 이제 데살로나가 성도들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피차간에 또한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을 요청한다. '피차 간’아로 번역된 ‘에이스 알렐루스’는 ‘서로 서로를 향하여’라는 의미이다. 이는 성도들간의 사랑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에 대한’이라는 표현은 ‘에이스 판타스’로 ‘모든 사람을 향하여’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 적대자들까지도 포함된다. 이것이야말로 ‘데살로니가 현상’의 핵심이다. 복음을 듣고 본을 받고 성도들의 본이 되고 모든 이들의 본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인 것이다. 본문에 사용된 ‘에이스’라는 전치사는 방향을 의미한다. 즉 다른 성도들을 향하여, 모든 사람을 향하여 사랑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특히 ‘에이스’ 전치사는 역동적 운동의 개념이 있는데 땀흘리는 수고가 뒷받침되는 사랑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어 본문에서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라는 표현에서는 두개의 기원법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더욱 많아’는 ‘플레오나사이’이고 ‘넘치게 하사’는 ‘페릿슈사이’이다. ‘플레오나조’는 사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풍성한 것을 의미하며(고후 4:15, 8:15), 페릿슈오도 같은 의미인데(요 6:13, 고후 1:5. 8:2) 후자가 더욱 강력한 의미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같은 의미의 동사를 사용하면서 점층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페릿슈오’의 히브리어 표현은 ‘카바드’이다. 이는 ‘풍부하다, 무겁다, 영광스럽다’라는 의미이다. 
 
3:12 Paul’s second petition is directed specifically to “the Lord,” whom we must understand as “the Lord Jesus” from the previous verse. Paul expresses his wish-prayer for his converts with the words ὑμᾶς δὲ ὁ κύριος πλεονάσαι καὶ περισσεύσαι τῇ ἀγάπῃ εἰς ἀλλήλους καὶ εἰς πάντας (“and may the Lord cause you to increase and abound in love for one another and for everyone”). The two optative verbs πλεονάσαι and περισσεύσαι are synonyms and lend an emphatic tone to Paul’s desire that the love of the Thessalonians should be richly increased. While the apostle can pray for this to happen, he also enjoins his readers to strive for greater love in 4:9f. This reveals an awareness on his part that Christians are responsible for their own behavior in cooperation with God who works through his Spirit in their live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42.
 
 
13절) 마음을 굳건하게 하다는 의미는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견고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마음’으로 표현된 ‘카르디아’는 심장, 사람의 생각, 마음, 의지, 감정,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식의 좌소를 의미한다. 히브리어로는 ‘레브’이다. 
 
‘굳건하게 하다’라는 표현은 ‘스테릭사이’로 원형은 ‘스테리조’이다. 이는 ‘세우다, 강화하다’라는 의미로 확고한 결심이나 결의로 더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주님께서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처럼 이 세상의 일상의 삶뿐만 아니라 종말의 날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강림하실’을 의미하는 ‘파루시아’는 ‘어떤 장소에 도착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신약에서는 주님의 오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신다. 
'그의 모든 성도들’은 ‘판톤 톤 하기온 아우투’인데 여기서 ‘하기온’은 ‘하기오스’의 복수형으로 거룩한 자들, 성도들을 의미한다. 이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 본문의 의미대로라면 주님이 강림하실 때 그분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온다는 것이다. 
 
13절에서 바울은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기원하고 있다. 주 예수의 강림시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의 거룩함은 ‘하기오쉬네’로 ‘거룩, 성결’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위엄이나 도덕적 순결로서의 거룩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 
 
The connection between vv. 11 and 12 implies that the apostle elevated love to the level of the highest norm in Christian behavior in very much the same sense that Jesus did for his followers in the great diad on love, in which the whole of the law was expressed in terms of the commands to love God and one’s neighbor (Mt. 22:29–34). In Rom. 13:8 Paul instructs the Christians at Rome, “Owe no one anything except to love one another; for the one who loves the other has fulfilled the law.” Similarly he writes to the Galatians, “For the whole law has been fulfilled in the one comma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 (Gal. 5:14). (Both Rom. 13:8 and Gal. 5:14 probably allude to the Jesus tradition. See Käsemann, Romans, 361.)
These texts explain why the apostle can link his wish that his readers “increase and abound in love for one another” to the establishment of their hearts as “blameless in holiness before God.” To love one’s fellow Christians in particular, in the sense of behaving in a loving manner (see 1 Corinthians 13 for the type of behavior envisaged), fulfilled the ultimate ethical norm against which Christians were to be judged. Therefore to love as Paul desired his converts to love would result in their living sanctified lives, placing them beyond any opprobrium at the judgment.
καρδία (“heart”) here, as in 2:4, refers to the thinking, willing, and feeling dimension of human existence, in modern terms the human personality. ἀμέμπτους in the context connotes a condition of blamelessness in which the individual is found to have done nothing deserving condemnation by God, who tests and tries the hearts of people (cf. 2:4). Although ἁγιωσύνη (“holiness”) is almost synonymous with ἀμέμπτους in this verse (cf. 2 Cor. 7:1), its different semantic field adds an important connotation. Holiness is one of the primary characteristics of God in the biblical tradition (cf. Pss. 71:22; 89:18; Is. 1:4; Je. 50:9; Ezk. 39:7; 1 Pet. 1:15f.; Jn. 17:11; Rev. 4:8; see K. G. Kuhn and O. Procksch, TDNT I, 89–101). Therefore, if the Thessalonians are to be established “without blame in holiness,” this implies their moral conformity to the very character of God. That this was of fundamental importance for Paul can be seen in 4:3, where sanctification or holiness (ἁγιασμός) is said to be the will of God for the Thessalonians.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44.
 
결국 성도들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주님의 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의 삶을 거룩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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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swhat thanksgiving can we return to God for you, for all the joy that we feel for your sake before our God, 10 as we pray most earnestly tnight and day uthat we may see you face to face and vsupply what is lacking in your faith?
s [ch. 1:2]
t 2 Tim. 1:3
u ch. 2:17; [Rom. 1:10]
v See 2 Cor. 13: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3:9–10.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3:9–10.
 
바울은 디모데로부터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이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9절) ‘우리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은 ‘엠프로스덴 투 데우 헤몬’이다. 여기서 ‘엠프로스덴’은 ‘면전에서’라는 의미로 신전의식을 의미한다. ‘In front of God’, 하나님 앞에서의 정신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바울의 기쁨은 개인의 감정적인 것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인 것이다. 복음이 전해졌고 이 복음을 듣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은 믿음으로 서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 바로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다라는 인식과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표현은 ‘너희로 말미암아’이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 본인의 수고와 노력을 강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말미암은 소식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라고 질문한다. 이는 수사의문문으로 받은만큼 완전히 보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의미이다. 
시편 116:12
12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기자의 이러한 고백은 주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답할까’라고 표현된 단어는 ‘안타포두나이’로 원형은 ‘안타포디도미’이다. 이는 되돌려주어야 할 것을 있는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눅 14:14) 감사함으로 보답할까(유카리스티안 안타포두나이)는 감사하다(유카리스테인)라는 셈족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γάρ links vv. 9f. to what precedes it as an inference in the form of a question (τίνα γὰρ εὐχαριστίαν δυνάμεθα τῷ θεῷ ἀνταποδοῦναι περὶ ὑμῶν, “for what thanksgiving are we able to return to God concerning you?”). Two things are implicit in this question. First, Paul was profoundly thankful for the continuing faithfulness of the Thessalonians. Frame (134) suggests that ἀνταποδοῦναι (“return”), which may be used either in a negative sense (cf. 2 Thes. 1:6; Rom. 12:19) or in a positive sense, as it is here (cf. Rom. 11:35), is stronger than ἀποδιδόναι. Following Milligan he argues that it has the nuance of “complete return.” With τίνα (“what”) it suggests that Paul felt unable to give sufficient thanks to God for the tremendous sense of relief and joy he experienced at hearing the good news concerning his converts at Thessalonica. Second, that Paul wished to give thanks to God for the Thessalonians suggests that the apostle had a powerful awareness of God’s working in and among his converts to enable them to remain true to their new beliefs and behavior patterns as Christians.
While the phrase περὶ ὑμῶν (“concerning you”) shows that Paul’s feeling of thankfulness was based on his readers’ steadfastness in the gospel, the phrase ἐπὶ πάσῃ τῇ χαρᾷ ᾗ χαίρομεν διʼ ὑμᾶς (“for all the joy with which we rejoice on account of you”) designates the immediate cause of his desire to give thanks to God. Best (144) claims that ἐπὶ πάσῃ τῇ χαρᾷ (“for all the joy”) was intended as a deliberate balancing of ἐπὶ πάσῃ τῇ ἀνάγκῃ καὶ θλίψει (“in all our distress and tribulation”) in v. 7. For this reason he translates ἐπί in both cases as “in.” Apparently Best understands ἐπί in v. 9 in the sense of “manner,” so that the prepositional phrase explains the manner of Paul’s thanksgiving. This, however, obscures the fact that εὐχαριστίαν ἀνταποδοῦναι (“to return thanksgiving”) is the semantic equivalent of εὐχαριστεῖν (“to give thanks”) and therefore that ἐπί is dependent on it and expresses the basis for the action contained in the verbal idea “to return thanksgiving.” For this reason ἐπί should be translated by a preposition like “for” or even “on account of” to indicate Paul’s motivation for rendering thanks, which is the tremendous joy he experienced because of the Thessalonians’ continuing faith. The reason for this joy and the ensuing thanksgiving can be seen if we look back at 2:19f., where Paul tells the readers that they are his “glory and joy” before the Lord Jesus at his coming, but this of course depended upon their remaining faithful. Thus when Paul discovered that they had continued in their commitment to Christ as Lord it was a source of tremendous joy for him, as well as a source of encouragement (3:7), and led to his desire to express in an adequate way his sense of thankfulness to God. The fact that “the joy with which we rejoiced” was ἔμπροσθεν τοῦ θεοῦ (“before God”) implies that his rejoicing was done in the context of prayer.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37–138.
 
10절) 바울은 주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11-13절에 나온다. 
‘주야로’는 ‘뉙토스 카이 헤메라스’로 문자적으로는 ‘밤 그리고 낮’이지만 이는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간구하다’는 표현은 ‘데오메노이’로 ‘데오마이’의 현재 분사 용법으로 특별한 시간의 제약 없이 계속하여 기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심히’로 번역된 ‘휘페렉페릿수’는 ‘휘페르’(뛰어넘어, beyond), ‘에크’(밖으로, out of), ‘페릿소스’(보통이 아니게, extraordinally)의 합성어로 ‘보통을 훨씬 초월하여 엄청나게’라는 의미하다. 이는 최고의 강조 표현으로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간절히 간구하는 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심히 간구하는 목적은 두가지이다. 첫째는 그들의 얼굴을 보기 원해서이며 둘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그들에게 나아가 얼굴과 얼굴을 보며 만나기를 원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사탄의 방해로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의 소식을 듣고 감사하며 그들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채워주려고 하고 있다. 
‘부족한 것을’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타’는 ‘휘스테레마’의 복수형으로 ‘어떤 상태에 미치지 못하여 부족한 것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안에 굳게 서있다(8절)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성화의 과정속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상태이다. 믿음이 견고하여 궁핍과 환난 가운데 분투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계속해서 믿음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믿음의 성장과정, 성화의 과정가운데 있는 것이다. 
‘보충하다’라는 표현은 ‘카타르티사이’로 ‘카타르티조’의 부정과거 능동태 표현이다. 카타르티조는 ‘준비하다, 완성하다, 복구하다, 바로잡다’의 의리보 본문에서는 부족한 부분을 채움으로 온전케 한다라는 의미이다.(마 4:21, 히 11:3, 벧전 5:10) 데살로니가 인들은 여전히 믿음의 부족함이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마도 이후에 4-5장에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무엇인지, 주님의 재림과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3:10 Although Timothy’s report about the Thessalonians’ faith and love was very positive, he also shared with Paul some areas of concern. So Paul prays that God will allow him to return to the church and “supply what is lacking.” Since Satan prevents Paul from going back (2:18) and doing this in person, the apostle does it instead by means of a letter: the second half of this letter (4:1–5:22) takes up those matters where their faith is “lacking.”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4.
 
Paul indicates the constancy of his prayer requests for the Thessalonians in the words νυκτὸς καὶ ἡμέρας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δεόμενοι (“night and day praying earnestly”). The unusual adverb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communicates the intensity of Paul’s prayer as well as the intensity of the desire that lies behind his prayer request. As Bruce (68) notes, “Paul is fond of compounds expressing superlativeness” (cf. ὑπερπερισσεύειν in Rom. 5:20; 2 Cor. 7:4; ὑπεραυξάνειν in 2 Thes. 1:3;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in 1 Thes. 5:13; ὑπερλίαν in 2 Cor. 11:5; 12:11, etc.).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δεόμενοι literally means something like “making requests quite beyond all measure.”
Paul mentions two things concerning which he petitioned God. First, he reports to his readers that he prayed εἰς τὸ ἰδεῖν ὑμῶν τὸ πρόσωπον (“to see you face to face”). He had already told them that he desired to do this (2:17f.; 3:7), and by mentioning it here as a part of his regular prayer life he reiterates his genuine commitment to return to the Thessalonians. This seems to reflect very clearly the occasion of the letter. Paul seeks to keep open the possibility of his own return to Thessalonica while reassuring his readers of his continuing concern for them.
Second, he explains why he wished to return. Because his departure from the Thessalonians was apparently abrupt, he tells his converts that he wants to return καταρτίσαι τὰ ὑστερήματα τῆς πίστεως ὑμῶν (“to complete the deficiencies of your faith”). Paul has in mind the opportunities that a visit would afford for giving his converts further personal instruction and exhortation, the very thing that his letters were intended to do in his absence (cf. Lyons, Pauline Autobiography, 218). The neuter plural τὰ ὑστερήματα (“deficiencies”) when taken with the genitive τῆς πίστεως ὑμῶν (“of your faith”) indicates a concern not for a lack of faith on the part of his readers but for the need to deepen their understanding and encourage their Christian behavior. Timothy had been sent to begin this task (3:2), but Paul informs his readers that he still wishes to come to them and personally continue their instruction in the faith. Paul shows here a profound awareness of the need to continue the process of resocializing the Thessalonians into the Christian way of life (see comments on 2:11f.). Although he desired to do this in person, his letter to the Thessalonians was intended to serve as a substitute for his presence, just as Timothy had substituted for him when he had visited them. In the light of this, we may understand 4:1–5:22 as an attempt by Paul to make good the deficiencies in his converts’ understanding of their new faith and its requirements with respect to their ethical conduct. Thus 3:10 helps to prepare for the parenetic material in chaps. 4–5.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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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mnow that Timothy has come to us from you, and has brought us the good news of nyour faith and love and reported othat you always remember us kindly and plong to see us, as we long to see you— for this reason, brothers,2 in all our distress and affliction qwe have been comforted about you through your faith. For now we live, if you rare standing fast in the Lord.
m Acts 18:5; [2 Cor. 7:6, 9]
n See ch. 1:3
o [1 Cor. 11:2]
p See Phil. 1:8
2 Or brothers and sisters
q 2 Cor. 1:4
r See 1 Cor. 16: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3:6–8.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3:6–8.
 
 
6절) 개역은 ‘지금은’으로 시작하지만 원문은 ‘그러나 지금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는 이전에 보냈던 디모데가 돌아온 것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염려가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이동한 후에 이루어졌다.(행 18:1-8)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마게도냐에서 실라를 만나서 함께 바울에게로 온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18:5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본문의 ‘지금은’이라고 변역된 ‘아르티’는 ‘지금, 바로, 즉시’에 해당되는 의미인데 바울은 디모데가 도착하자마자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바울에게 전하였다. 본문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는 ‘유앙겔리사메누’로 ‘유앙겔리조’의 부정과거 중간태 분사이다. 이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 것인데 바울이 디모데로부터 들은 소식이 얼마나 그에게 큰 기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디모데가 전해 준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처럼 바울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1:3)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었는데 믿음은 환난 중에서도 변치 않고 견고히 서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며, 사랑은 그 믿음에 기초하여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수고와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6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이 표현은 직역하면 ‘너는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 일행이 가져다준 복음으로 인해 외적으로 핍박에 직면하고, 또한 악의에 찬 적대자들로부터 바울 일행에 대한 비방과 모함을 줄곧 들어왔지만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굳게 서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 일행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 일행은 그들을 간절히 보고자 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자 하고 성도들도 목회자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이러한 관계는 바로 온전한 복음 위에서 가능하다. 
 
3:6 The words ἄρτι δὲ ἐλθόντος Τιμοθέου πρὸς ἡμᾶς ἀφʼ ὑμῶν (“and now that Timothy has returned to us from you”) suggest that 1 Thessalonians was composed almost immediately after Timothy had returned to Paul. Certainly Paul wished to communicate this impression to the Thessalonians as a demonstration both of his concern and the warm affection that he felt for them. Whether Silvanus was with Paul when Timothy came back is uncertain. πρὸς ἡμᾶς (“to us”) implies that he was, but as on several other occasions the first person plural may be no more than a so-called epistolary plural. Acts 18:5 seems to suggest that Timothy, as well as Silvanus, had been in Macedonia and that they rejoined Paul together in Corinth, but Paul neither indicates where he was at the time nor where Silvanus was, unless the plural is a genuine plural.
From Paul’s perspective the important thing was that when Timothy returned he was able to report that the Thessalonians were coping and even progressing in their faith. Curiously Paul employs the participle εὐαγγελισαμένου (“proclaiming good news”) to describe Timothy’s report. While the verb originally denoted any announcement of good news and may have no more than this meaning here, the very choice of the word probably was intended by Paul as a play on the word used by himself and other early Christians as the word par excellence for communication of the Christian message (1 Cor. 15:1f.; Gal. 1:8, 11, 16). Marshall (94), who follows Masson (41) and Best (139f.), reads too much into the word when he claims that it may denote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in the normal technical sense here. He has succumbed to the ever present temptation to “over-theologize” a word.
The good news Timothy announced to Paul concerned at least two facts. First, the Thessalonians had not wavered in their new beliefs and behavior patterns. This seems to be the idea conveyed by the report concerning τὴν πίστιν καὶ τὴν ἀγάπην (“the faith and love”) of the Thessalonians. πίστις should probably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ir confidence in God, which was severely tested by their suffering. Paul was relieved to hear that their new beliefs had not been shaken with a concomitant turning away from the Christian religion. At the same time Paul was undoubtedly pleased to learn that their Christian conduct, which he characterizes as “love,” had endured. In Paul’s understanding, love was not a mere human emotion but revealed itself in action (Rom. 13:9–10). As he says elsewhere, “What has power or meaning in Christ Jesus is faith working through love” (Gal. 5:6). For Paul belief in God and his saving purposes should lead to a response of active love manifested particularly in the way Christians behave toward one another (see 1 Thes. 4:9). It is this understanding of faith and love that probably lies behind what Paul says in 3:6.
Second, the Thessalonians held Paul in high regard and longed to see him, as the words ἔχετε μνείαν ἡμῶν ἀγαθὴν πάντοτε (“you always think of us affectionately”) reveal. The apostle gives the impression that he was especially pleased to learn the Thessalonians had a “kind or affectionate remembrance” (μνείαν ἀγαθήν) of him and his colleagues. This perhaps implies that he was concerned about how the Thessalonians viewed him after his departure. Several possibilities exist for the basis of his concern. It might have resulted from the manner in which he left, especially if he had been forced to leave unexpectedly. Acts 17:5–10 portrays his and Silvanus’s departure as so hasty that they were unable to prepare the community properly for it. Another possibility is that the Thessalonians might have resented the situation of oppression in which they found themselves when they discovered that the supposed good news Paul had announced to them was in reality “bad news” in that it led directly to their suffering (Bruce, 66). A third possibility is that Paul feared the Thessalonians would be disappointed in him and perhaps even reject him for not having himself returned to them already. 2:17f. provides strong support for this understanding since in those verses, as we have seen, Paul insists that he had longed to see them and had even planned to visit them on several occasions, only to be prevented from doing so by the arch-enemy, Satan. This looks like an apology for his failure to return and may imply apprehension over the reaction of the Thessalonians in this matter. For this reason Paul was pleased to learn of their continuing affection and their desire to see him again. Paul responded to their desire to see him (ἐπιποθοῦντες ἡμᾶς ἰδεῖν) by indicating through the elliptical expression καθάπερ καὶ ἡμεῖς ὑμᾶς (“just as we also you”) that his readers’ desire was reciprocated by his own desire to see them. Such reciprocity in affection was intended to demonstrate Paul’s true friendship with his readers. In effect Paul here reiterates what he said in 2:17. Along with the verses that follow it prepares for Paul’s exhortation in chaps. 4–5 through its philophronetic impac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33–134.
 
7절) 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핍박과 시험 가운데서도 믿음에 굳게 섰다. 목휘자로서, 영적 부모로서 이러한 모습만큼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로를 받았노라’에 해당하는 ‘파라클레데멘’은 ‘파라칼레오’의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 표현이다. 이는 ‘옆으로 부르다’라는 의미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믿음에 굳게 선 그들의 모습이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던 바울 일행에게 위로가 된 것이다. 위로의 말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더욱 의미있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내는 모습이야말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위로를 주고, 받고 있는가? 
 
본문의 ‘궁핍’은 ‘아낭케’로 ‘재난, 압박’을 의미하는데 허리띠를 꽉 졸라매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제적 결핍을 의미한다. ‘환난’으로 번역된 ‘들립세이’는 ‘들립시스’로 포도즙틀로 포도를 짜듯이 ‘부서질 정도의 압박’을 의미한다. 바울의 전도 사역은 이러한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고린도후서 6:4–5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린도후서 11:23–27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8절) 바울은 그들이 주안에 굳게 서있다라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리라’로 번역된 ‘조멘’은 ‘자오’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구원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염려와 불안 가운데서 기쁨과 안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정서적 의미이다. 
‘굳게 선’에 해당하는 ‘스테케테’는 ‘스테코’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는 서서 그 위치를, 마음을 유지함으로 중심을 지킨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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