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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ut since we were torn away from you, brothers, for a short time, xin person not in heart, we endeavored the more eagerly and with great desire yto see you face to face, 18 because we wanted to come to you—I, Paul, again and again—but Satan zhindered us. 19 For what is our hope or ajoy or crown of boasting bbefore our Lord Jesus at his ccoming? Is it not you? 20 For you are our glory and joy.
x 1 Cor. 5:3; Col. 2:5
y ch. 3:10
z Rom. 15:22; [Rom. 1:13]
a See Phil. 4:1
b 1 Cor. 15:31; [2 Thess. 1:4]; See 2 Cor. 1:14
c ch. 3:13; 4:15; 5:23; Matt. 24:3; 1 Cor. 15:23; 2 Thess. 2:1, 8; James 5:7, 8; 2 Pet. 1:16; 3:4, 12; 1 John 2:2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2:17–20.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2:17–20.
 
 
앞선 2장 1-16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했던 당시의 내용을 회고하고 있는 내용이다. 자신이 어떤 사역 자세를 가지고 사역했는지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과 고난에 대한 자세를 회고하며 감사하고 있고 복음을 대적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다. 이제 17-20절 본문은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를 재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실패했는지와 그들을 향해 얼마나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핍박으로 인해 비자발적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그곳을 여러번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갈 수 없어서 디모데를 대신 보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영접한 이들이 핍박으로인해 힘든 시기를 보낼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17절) 본문에 ‘떠난 것은’이라는 표현은 ‘아포르파니조’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형으로 ‘아포르파니스텐테스’가 사용되었다. 이는 ‘고아로 만들다, 분리되다’의 의미이다. 부로모부터 영구히 분리되는 것으로 여기서 ‘고아, orphan’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바울은 지속적으로 가족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7절에서는 유모로, 11장에서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자신이 떠남으로인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고아와 같은 상태가 됨으로 자신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난 것이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원하지 않는 이별로 인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2:17 orphaned. Paul continues his family metaphors (see vv. 7, 11 and notes) by comparing himself to a child who has been orphaned from his parents—so deep were his feelings of anguish over being separated from his Thessalonian converts.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3.
 
‘힘썼노라’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스푸다조’는 ‘서두르다, 열망하다’라는 의미이다. 힘쓰다라는 의미로 엡 4:3, 딤후 2:15에서 사용되었고, 서두르다라는 의미로 딤후 4:9, 21; 딛 3:12에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라고 말하고 있다. ‘열정으로’라는 표현은 ‘폴레 아피뒤미아’로 ‘폴레’는 ‘큰, 위대한’이라는 의미이고 ‘에피뒤미아’는 ‘강렬한 욕망’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죄악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정욕, 성적 욕망, 탐심을 나타내는 부적적인 의미인데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탈피하여 거의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열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빌 1:23) 이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얼굴은 있으나 마음을 떠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얼굴’을 
‘프로소폰’으로 히브리어로는 ‘파네’인데 이는 존재, 얼굴’을 의미한다. 살후 1:9에서는 ‘주의 얼굴’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마음’은 ‘카르디아’로 ‘심장, 내부기능’이라는 의미로 사람의 생각, 의지, 감정,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양심) 지식의 좌소의 의미이다. 히브리어로는 ‘레브’로 예수님께서도 이 표현을 많이 사용하셨다. 마 5:8; 6:21, 15:18
 
세상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도들간의 사랑은 이러한 통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성도간의 사랑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사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기에 함께 할 때에는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떨어져 있더라고 서로를 생각하며 복을 빌고 중보의 기도를 올려드려야 한다. 
 
18절)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바울의 대적자들은 데살로니가에서 도망간 바울이 성도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라고 비방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바울은 변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대자를의 거짓말과 달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바울 만큼은 여러번 가고자 애썼음을 힘주어 강조한다. 나라는 표현은 바울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방문을 막은 것은 사탄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여기서 ‘막았도다’는 ‘에네콥센’으로 이는 중간에 끼어 들어서 방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롬 15:22) 이는 당시 도주하는 적군의 진로를 중간에 차단하는 것을 가리키는 군사 용어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단이 어떻게 바울을 막았을까? 본문이 이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몇가지 추정해 볼 수 있다. 
1) 행 17:9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쫓겨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게되면 야손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2)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극심하게 핍박하여서(행 17:13) 바울이 되돌아가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3) 바울의 고질적인 가지인 병(눈병 혹은 간질)이 재발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사탄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사타나스’로 히브리어 ‘사탄’의 음역이다. 이는 ‘대적자, 고소자’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를 인격적이고 악한 영적 존재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려는 목적을 가진 존재들로 주로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시험하는 자, 마귀, 벨리알, 뱀, 악한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Satan. From the Hebrew meaning “accuser,” it is the term Paul uses most often to refer to a personal, evil, spiritual being whose purposes are opposed to God and his people (2 Thess 2:9; Rom 16:20; 1 Cor 5:5; 7:5; 2 Cor 2:11; 11:14; 12:7; 1 Tim 1:20; 5:15). Paul elsewhere refers to this figure as “the tempter” (3:5), “the devil” (Eph 4:27; 6:11; 1 Tim 3:6–7; 2 Tim. 2:26), “Belial” (2 Cor 6:15), “the serpent” (2 Cor 11:3), and “the evil one” (2 Thess 3:3; Eph 6:16).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3.
 
사탄히브리어 단어 שָׂטָן(싸탄)은 반대하다, 방해하다, 고소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헬라어 용어(σατάν, 사탄)은 문자적으로 “대적”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사탄은 호칭 또는 이름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שָׂטָן(싸탄)은 70인역에서 디아볼로스로 번역된다.
히브리 성경에서의 “사탄”의 용례
구약에서 사탄이란 단어는 명사와 동사 둘 다로 사용된다. 동사로 사용될 때는 “대적으로서 반대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예, 시 38:20; 71:13; 109:4, 20, 29; 슥 3:1). 명사로 사용될 때는 인간 대적에게 적용된다(예, 삼상 29:4; 삼하 19:22; 왕상 5:4; 11:14, 23, 25). 구약의 네 책에서 이 용어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붙는다(민 22:22, 32; 욥 1:6, 7, 8; 슥 3:1; 대상 21:1).
인간 대적에 적용되는 “사탄”
“사탄”이란 단어는 구약의 여러 지점에서 인간 반대자를 지명하기 위한 명사로 등장한다. 이럴 때 영어 성경에서는 그것을 “대적” 또는 “원수”로 번역한다. 예를 들면, 솔로몬 왕은 자신이 성전을 지으려 했을 때 그것을 방해할 어떤 “사탄” 즉 “대적”도 없었던 것에 대해 말한다(왕상 5:4). 이 용어는 다윗 왕이 아비새를 반대자 또는 대적으로 말할 때도 사용된다(삼하 19:22).
초자연적 존재와 관련되는 “사탄”
구약에서 “사탄”이란 단어는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발람과 그의 나귀가 여행하는 길을 막고 있는 여호와의 천사가 “사탄”이라 일컬어지는 민수기 본문이 그런 경우다(민 22:22). 이 천사는 “사탄”이 아니라 발람을 “반대하는” 것이다.
        욥기.욥기에는 하나님의 허락 아래 욥의 신실함을 시험했던 초자연적인 “사탄”의 존재가 나온다(욥 1:6). 이 문맥에서 저자는 그 명사(“사탄”) 앞에 정관사(“그”)를 놓아서 그 용어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호칭 또는 직책임을 보여 준다. 이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천상 회의의 일원인 천사로 나오며, 그의 특별한 임무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일들을 조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정의 “그 사탄”은 스스로를 저항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고소하는 존재로 드러냈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여호와의 질문에 “그 사탄”은 자신이 땅을 두루 돌아 다녀왔다고 답한다(욥 1:7). 이것은 “사탄”으로서 행하는 것이 신에게 부여받은 임무였음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Tate, “Satan,” 462). 이 문맥에서 여호와가 “그 사탄”을 책망하시지 않는 것은 흥미롭다. 오히려 “그 사탄”은 단순히 욥의 종교적 진실성에 회의적일 수 있는 자로 제시된다(Tate, “Satan,” 463).
        스가랴서.스가랴서에서는 “사탄”이란 용어가 법정의 정황에 적용되면서 욥기와 비슷한 장면이 제시된다(슥 3:1). 스가랴 3장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다. “그 사탄” 그를 고소하기 위해 거기 있다. 욥기에서처럼 “그 사탄”은 적대적이거나 악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사람들의 진실성 여부를 살피는 검사 역할을 하면서 단순히 여호수아를 기소하는 것처럼 보인다(Boring, Revelation, 165). “그 사탄”은 여호수아가 제사장직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묻는 것일 수 있다(Tate, “Satan,” 463).
스가랴 3장 본문에서 “그 사탄”이 여호와께 적대적인지 아니면 그가 단순히 여호와의 정책들에 도전하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모호함이 있다. 스가랴 3:2에는 “책망하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두 번 사용된다. 이 책망은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이며 “그 사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책망은 “그 사탄”에 대한 여호와의 일반적인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그 사탄”에 의해 초래된 상황이 여호와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Tate, “Satan,” 464). 마빈 테이트(Marvin Tate)는 “책망하다”라는 동사의 사용만으로는 이 장면에서 “그 사탄”을 하나님의 주적인 마귀로 확정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Tate, “Satan,” 464). 이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테이트는 잠언(잠 17:10)에서 “책망”이란 명사가 하나님께 호의적인 사람과 관련해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한다(Tate, “Satan,” 464).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책망이란 단어는 강한 저주 또는 하나님의 분노 표현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Klein, Zechariah, 136). 이런 이유로 유진 메릴(Eugene Merrill)은 스가랴서의 “그 사탄”을 성경 전체에 걸쳐 알려져 있는 하나님의 최대의 적으로 식별한다(Merrill, Haggai, 133).
        역대기상.역대기상은 “사탄”이란 단어가 초자연적인 존재의 어떤 유형과 연결되는 또 다른 예에 해당한다(대상 21:1. 비교, 삼하 24:1). 이 본문은 여호와가 “사탄” 또는 다른 신적 대리인의 수단을 통해 다윗을 선동하셨음을 전하는 것일 수 있다. 이전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본문은 마귀로 이해되는 사탄적 존재를 의도하거나 후대의 문헌에서 하나님의 주요 대적으로 제시되는 사탄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직책 또는 기능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유진 보링(Eugene Boring)은 구약 어디에서도 사탄을 후대 문헌이나 신약 문헌에서 제시되는 “악의 화신”으로 제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Boring, Revelation, 164). 하지만 히브리 성경에서 제시되는 “사탄”을 더 적대적인 역할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예, Noll, Angels of Light, 103–104).
히브리 성경에서의 사탄의 반란
두 구약 본문(사 14:12–15와 겔 28:11–19)이 사탄의 반란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의 연대가 BC 1세기 또는 AD 1세기로 추정되는) 아담과 이브의 생애에서는 계명성의 추락이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추락으로 해석된다(아담과 이브의 생애 12-15장. 참고, 에녹2서 29:4–5). 천사들은 별에 비유된다(삿 5:20; 욥 38:7; 에녹1서 104:1; 모세의 유언 10:9). 이 전통에 따르면 사탄은 하나님이 쫓아내셨던 첫 피조물들에 속해 있었다.
제2성전기 문헌에서의 사탄적 존재
모세 승천기(10:1)와 희년서(2:23–29)는 “사탄”이란 용어가 고유명사로 사용된 가장 초기의 증거들일 것이다.
하나님의 최고 대적으로서의 사탄
 BC 2세기와 3세기의 글들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최대의 적인 것이 분명한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의 반대자일 뿐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에서 사탄은 죽음의 현상들과 관계되기도 한다(솔로몬의 지혜 2:24).
악한 영들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다양한 명칭들이 제2성전기 문헌들에서 등장한다(참고, 제2성전기의 사탄). 그 이름들에는 벨리알, 마스테마, 사타나일, 사탄이 포함된다(갓의 유언 4:7; 베냐민의 유언 7:1; 르우벤의 유언 4:7; 시므온의 유언 5:3; 아셀의 유언 3:2; 희년서 11:5; 에녹2서 31:6). 사탄이 악과 죄의 창시자로 여겨지면서 여러 본문에서 그의 파멸이 기대되고 표현되었다(레위의 유언 18:12; 유다의 유언 25:3).
창세기 2–3장의 뱀과 사탄
히브리 성경에는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뱀이 사탄이었다는 증거나 사탄이 지휘하는 생물이었다는 증거조차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솔로몬의 지혜(약 BC 220년—AD 50년)는 둘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초기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솔로몬의 지혜 2:24). 사탄과 뱀의 연결은 아담과 이브의 생애(33장)와 에녹2서(31장)에서도 입증된다. 두 본문 모두 이브를 미혹한 것이 마귀였다고 언급한다.
신약에서의 사탄
신약은 사탄이 하나님의 최고 대적으로 발전하는 그림을 보여 준다. 신약의 문헌들 이전이나 동시대에 기록된 성경 밖 작품들은 이 발전과 평행을 이룬다. 신약에서 “마귀”라는 단어는 32회, 사탄은 33회, 벨리알은 1회(고후 6:15), 바알세불은 7회 사용된다.
예수와 사탄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의 반대자일 뿐 아니라 예수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기도 한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간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그분의 아들이라 선언하신 직후의 일이고 따라서 사탄은 이 선언에 도전하는 것이다(마 3:17; 4:1–11). 예수는 구약 성경에 의존해서 사탄의 시험들을 극복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동산에서의 하와의 불순종과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 모두를 상징적으로 무효화한다.
신약에는 마귀에게 고통받은 것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불구로 만드는 영”을 가졌던 여자를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자로 묘사한다(눅 13:11, 16). 13:16의 사탄이 13:11의 영과 똑같은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간” 것으로 묘사된다(요 13:27). 이것이 완전한 “소유”를 가리키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능동적인 적으로서의 마귀의 존재를 반영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예수의 비유에서는 악한 자가 길가에 떨어진 씨를 낚아챈다(마 13:19; 막 4:15). 다른 말로 하면, 마귀가 하는 일들 중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무시하게 하는 일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마귀를 따르는 자들이나 마귀의 자녀들이라 일컬어진다(요 8:44; 행 13:10; 계 2:9; 3:9; 요일 3:8).
패배했으나 아직 위험한 존재인 사탄
신약에서 사탄은 종종 패배한 적으로 여겨진다(마 13:36–43; 롬 16:20; 히 2:14–15; 요일 3:8; 계 20:2). 전투는 이미 치러졌고 승리했다(계 12:7–10). 그러나 동시에 신약은 그가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 공격적인 세력이라고 주장한다(살후 3:3; 약 4:7; 계 2:24).
사탄의 이름들과 호칭들
신약에서 사탄에게 붙여지는 다양한 호칭들과 이름들은 마귀의 특징을 나타내는 폭넓은 표현을 제공한다. 그는 용(계 20:2), 뱀(계 12:9), 악한 자(요 17:15; 엡 6:16), 시험하는 자(마 4:3; 살전 3:5)로 분류되고, 사자처럼 두루 다닌다(벧전 5:8). 바울에 따르면 그는 공중 왕국의 통치자, 즉 마귀 영역의 지도자다(엡 2:2). 바울 시대의 사람들은 영들이 천상과 지상 사이에 위치한 공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Arnold, Ephesians, 60). 여러 경우에 사탄은 “집의 주인” 또는 “높음의 주인”을 의미할 수 있는 “바알세불”로 불린다(예, 마 12:27; 눅 11:18). “공중의 왕국”이라는 문구와 마찬가지로 바알세불은 사탄이 마귀들을 지도하는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탄의 기원
신약의 일부 본문은 사탄을 세상의 시초에 하늘에서 있었던 전쟁 중에 떨어진 것으로 묘사한다. 즉,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하늘에서 내쫓았다(계 12:7). 요한일서는 마귀를 “처음부터 범죄한” 자로 묘사한다(요일 3:8). “처음부터”란 문구는 창세기 기사에 대한 언급일 수 있으며, 마귀를 뱀과 연결시킨다. 신약은 사탄의 떨어짐이 교만 때문이었음을 보여 준다(딤전 3:6). 예수는 그가 처음부터 살인자였다고 말했다(요 8:44).
사탄에 대한 초대 교부들의 관점
초대 교부들은 교회를 향한 사탄의 공격에 대해 논했다. 교부들은 마귀가 교회를 죄와 불화로 이끌기 위해 활발히 활동한다고 이해했다(클레멘트1서 51:1).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빛과 어둠 사이의 이원적인 전투를 실제적인 것으로 봤고, 그래서 마귀를 “어둠의 주”라 칭했다(바나바 서신 20:1).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감독했던 주교 이그나티우스 데오포루스는 누구든지 주교의 허락 없이 행하는 자는 마귀의 종이라고 주장했다(To the Smyrnaeans 9:1).
이단들은 사탄의 추종자로 불렸다(Polycarp, To the Philippians 7:1). 거짓 가르침의 존재는 선과 악의 우주적 싸움의 일부였다.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는 이단들을 사탄 군대의 구성원들과 관련시켰다(Heresies 1.25). 이것이 결국 거룩한 전쟁, 십자군, 이단 및 비그리스도인 박해를 정당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Russell, Satan, 87).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AD 185–254년경)은 이사야 14:12–15를 누가복음 10:18에 나오는 사탄의 떨어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관련시킨다(Principiis 1.5.5와 4.1.22). 기독교 저자 터툴리안(AD 197–220년경)은 사탄의 죄의 배경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도출하고, 사탄의 최후를 에스겔서에 기록된 두로 왕의 몰락과 연관시켰다(겔 28:11–19; Marcus 2:10).
추가 연구를 위한 선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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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d Seal, “사탄,”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19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소망’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들로 인해서 장차 마지막 날에 얻게될 영광이 있기 때문이요 ‘기쁨’이라고 한 것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자기가 복음을 전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흠과 티 없이 서게 되는 것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울의 자랑이자 영광 그 자체 이기 때문이다. 
‘면류관’이라고 번역된 ‘스테파노스’는 ‘주변을 두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스테포’에서 유래한 명사로 ‘머리를 에워 씌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왕이나 고귀한 지위를 지닌 자에게 씌워지는 관이나(삼하 12:30; 대상 20:2)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씌워지는 월계관을 가리키는 단어였다(고전 9:25). 이것은 최고의 영애를 상징한다. 원형 경기장이나 올림픽에서 승리한 우승자에게 월계관이 씌워지고 금메달이 수여될 때 그 영광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것이기에 그 영광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어서 이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이외에도 의의 면류관(딤후 4:8),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 9:25)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야고보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베드로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강림'이라는 표현은 ‘파루시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약의 여러시대에 강림하신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또한 왕이나 황제 등 위대한 인물이 어떤 도시를 방문하거나 도착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황제의 방문을 위해 주민들은 여러가지를 준비한다. 그리고 황제가 방문하면 도시에 새로운 신기원이 도래하게 된다. AD 124년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도시에 하드리안 황제가 방문함으로 그 지역에 신기원이 도래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분의 방문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이 표현이 7번(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2:8, 2:9)이나 사용되었다. 주님께서 영광가운데 다시 오실 때 모든 무릎을 그 아래 꿇게 하실 것이다.(빌 2:10)
 
우리는 마땅히 마지막 때, 주님의 재림시에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때 영벌과 영생으로 나뉘어지게 될 것이다. 바울은 종말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었고 그 때에 너희가 나의 소망이요 기쁨, 소망의 면류관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서 모든 것은 불타 없어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3:10–15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20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 복음 전하는 이들에게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본문에 ‘이요’라고 번역된 ‘에스테’는 현재형 동사로 19절에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뿐 아니라 서신을 쓰고 있는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들에게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자랑, 기쁨은 무엇인가? 얼마나 큰 교회를 건축하고, 얼마나 많은 재정을 집행하고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이 아니라 바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바르게 살아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로 서가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것에 잇대어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노력하는 삶의 모습이야말로 목회자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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