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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하나님에 의한 것인지 우연인지에 대한 블레셋의 시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한것으로 판명이 난다. 젖나는 소 둘로 수레를 끌게했음에도 이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죄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간 것이다.
이를 본 벧세메스 사람들은 궤로 인해 기뻐하며 수레의 나무를 패고, 수레를 끌고온 암소를 잡아서 번제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때는 반드시 숫소로(레 1:3) 드려야만 했음에도 이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15절)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궤를 큰 돌위에 올려두어 사람들에게 전시한 것이다. 이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중요한 성물로 감히 바라보고나 만질수 없는 것임을 알고도 그렇게 행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 우리의 본성,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다른이들에게 눈으로 보여주고 싶은 우리의 교만함, 인정의 욕구들. 겸손을 가장한 우리의 교만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수 있는 것이다.
19절) 고핫자손만이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 자손들중 제사장들을 제외하고는 궤를 만지거나 바라볼수 없었다.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도 쳐다봐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지금 벧세메스 사람들이 궤가 돌아온것에 도취되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고 이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 이 궤를 쳐다봐서 많은 이들이 심판을 당한 이야기는 창 9:23에 나오는 아비의 벗음을 본 함의 행동과 비슷하다. 마땅히 보아서는 안되는 것을 봄으로 심판을 당한 함의 이야기와 궤를 바라본 벧세메스 사람들의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
- 그런데 문제는 죽은 사람들의 숫자이다. 마소라 사본과 70인역에서는 하나님께서 5만 70명을 치셨다라고 나오는데 이 숫자가 그당시 고대 소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숫자와 비교할때 너무 큰 숫자이기에 NIV에서는 70인으로 축소하고 있다. 결국 이 숫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블레셋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4:10에서 블레셋은 3만을 죽였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도전은 5만을 죽일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삶은 오직 율법과 그분의 선자자들에 대한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만 가능하다.
- the Beth Shemeshites behaved like the Philistines: instead of mourning penitently for their sins, they “mourned because of the heavy blow the Lord had dealt them” (v. 19; cf. 5:12) and then came up with a plan to remove the ark from their territory (cf.m 5:8–9; 6:2). Thus they demonstrated the magnitude of their spiritual darkness and so confirmed the Lord’s righteous judgments against them.
- 그런데 문제는 이 벧세메스 사람들의 행동이 블레셋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회개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신 것을 애곡했고(19절, 5:12) 자신들의 영역에서 궤를 옮길것을 계획했다.(5:8-9, 6:2) 결국 기럇여아림 사람들을 불러서 궤를 옮겨갈 것을 청한다.
하나님을 알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때 우리도 쉽게 벧세메스의 사람처럼 실수를 하고 하나님을 이용하고 조종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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