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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뉴에이지 :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 
뉴에이지는 개인이 자기 내면의 신성함-하나님 의식 혹은 대아와 같이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한다. 

* 서양과 동양의 만남
- 서양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동양은 일원론적인 기초를 뉴에이지에 제공한다. 이원론 대신 범신론 혹은 만유내재신론을 주장한다. 
- 뉴에이지 운동은 계몽주의 시대가 옹호했던 돠뇌적이고 직선적인 형태의 논리인 이성(logos)에 의존하는 대신, 영지(gnosis)를 추구한다. 영지는 신비적이고 직관적인 지식 형태를 일컫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이다. 
뉴에이지의 핵심적인 특징
1) 과학적 자연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한다. 정신, 영혼,  하나님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뉴에이지 세계관은 물질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격하시키거나, 유일한 참된 실재인 신성한 힘 안으로 편입시켜 버린다. 
2) 뉴에이지와 과학적 자연주의는 무지를 진리와 구원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물로 본다, 둘 다 깨달음을 추구한다. 거러나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은, 역사적 계몽주의 시대의 이성이 자연주의적 세계관 안에서 자유를 얻는 열쇠라는 것이다. 이성은 과거의 초현실주의의 미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한다. 그러나 뉴에이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영지는 이원론의 족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3) 집단 윤리에 댈해서는 거의 근본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지지하고, 이와 동시에 개인적 도덕에 대해서는 자유방임적인 견해를 주장한다. 
- 현대 기독교에 광범위하게 미친 세 가지 뉴에이지 영향 : 개인주의/주관주의, 반지성주의, 물질 영역의 경시

* 뉴에이지 사상의 긍정적 측면
1) 뉴에이지는 영적 차원을 인정하고 우선권을 부여한다. 
2) 뉴에이지는 제도 종교의 일반적인 문제점을 일깨워 준다. 
3) 뉴에이지가 진리의 수문장으로서 계몽주의적 합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옳다. 

* 뉴에이지의 잠재적 문제점
1) 뉴에이지는 편협한 유물론을 편협한 영성주의로 단순히 대체한다. 
2) 뉴에이지 운동은 자기 구원을 목표로 삼는다. 
3) 뉴에이지는 자신이 내세우는 사회적 과제에 대해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4) 뉴에이지는 비합리성으로 치닫는다. 

* 결론
기독교와 뉴에이지 사상이 사용하는 언어와 실천방식이 상당히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뉴에이지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기독교적인 전통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다. 또한 기독교의 기초와 목적(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이 뉴에이지의 기초와 목적(우리는 신이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8장.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 나의 부족이 곧 나의 세계관이다. 
세상이 급변하면서 전통적인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던 집단들이 등장하여 지배적인 사회 권력 내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거나 저항해왔다. 이 모든 것들이 문화의 위치와 문화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주제, 어휘들이 있다. 바로 다문화주의, 소수집단 우대정책, 포스트모더니즘, 해방신학, 문화상대주의, 후기제국주의, 노인 차별, 메타내러티브, 소국분할화, 정체성 정치학, 해체주의, 문화 전쟁…)
이런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결속하기 위해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고 싶어한다. 

* 용광로에서 다문화주의와 포스트모던 부족주의까지
19-20세기 초 미국은 용광로처럼 다양한 민족성을 가진 이들이 평범한 미국인이 되어 갔다. 하지만 이후 문화적 정체성 상실에 대한 우려와 사회로부터의 배척으로 인해 용광로라는 겨념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결과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다문화주의는 차이점을 녹여서 없애는 대신 보다 폭넓은 통일성 안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했다(모자이크 모델).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와 진리가 정치와 권력에 관한 말이라고 주장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신을 근대주의에 반대하거나, 근대주의를 초월하거나, 근대주의 이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근대성은 근본적으로 절대적 확실성,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각 개인의 편견을 버리고 적절한 조사방법을 사용한다면 이런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근대주의의 목표-보편성, 확실성, 절대적 진리, 개인주의, 공정한 중립성, 합리성, 과학에 대한 신뢰, 정복-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리오타르는 “나는 포스트모던을 메타내러티브에 대한 불신이라고 정의한다”고 말했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와 힘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실제적이고 선하고 참된것으로 여기는 것을 해석할 때 사회적 위치가 차지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백인이고 그리스도인인 미국인 같이 유력한 부족은 성경의 출애굽 이야기를 죄의 노예상태에서 구원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처럼 자신을 약자로 여기는 부족은 출애굽 이야기를 그들에게 아직 다가오지 않은 희망찬 비전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출애굽 이야기를 죄라는 비물질적인 힘으로부터 영적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한다. 
- 비교불가능성 : 표면적으로 동일해 보이는 것들이 다른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 성경의 이야기가 원저자가 원래 의도했던 내용과 상관없이 그것을 읽는 독자가 처한 사회적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의 긍정적 측면
1)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우리가 공감을 개발하도록 도와준다. 
2) 부족주의는 그리스도인이 낯선 권력 개념에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3) 부족주의는 그리스도인이 죄의 제도적인 측면을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4) 문화는 질서 있는 생활방식을 제공한다. 

* 포스트모던 부족주의의 잠재적 문제점
1)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문화결정론을 가정한다. 
- 문화적 차이가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가 아주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2)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부족들을 상대화시키는 반면 내부족을 절대화시킨다. 
3)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또 다른 권력 싸움으로 변질된다. 
4)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피해의식을 가진 문화를 만들어 낸다. 
5) 포스트모던 부족주의는 문화적으로 환원주의적이다. 

* 결론
근대주의는 흔히 진리의 수호자라고 자체하며 자신의 지배문화에 다른 문화를 동화시키기 위해서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기독교의 대응은 모든 문화적 차이를 없애 버리는 근대주의의 노력이나 부족을 절대화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정반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문화적 수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 자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계시록 7장의 환상(어린양의 보좌앞에 모든 민족이 예배하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이 특정한 국가, 부족, 언어 집단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하나님을 향해 경배를 드릴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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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time is it? Understanding the religious-worldview spirits of our age
- Postmodernity, economic modernity and consumerism
(Michael Goheen)







현대의 숨겨진 신조 : 우리가 신이 되어서는 안되는가? 
- 베이컨 : 

지식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두가지 서구적 모더니스트들의 신조
1) 인간이 세계본성과 삶의 의미를 정의 할 수 있다
2) 과학적 이성으로 세계의 문제를 풀고 자유와 번영과 정의와 진리의 새로운 세계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18세기 서구의 변화
- 18세기까지 유럽 사회의 핵심은 기독교였다. 기독교라는 말 속에 단순히 종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텐덤에 역사적 기독교, 휴머니즘, 독일 사람들이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이세가지가 가장 강력한 세계관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18세기가 지나면서 이 주도권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유럽전체를  shaping 했던 힘이었다. 가운데서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이후에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제는 이성적인 인본주의가 유럽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시대를 가리켜 계몽시대라고 부른다. 현재 모든 서구 사람들은 계몽주의라는 정신아래서 교육을 받았다. 18세기가 서구 문화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다. 많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생각을 해왔다. 이것은 굉장히 종교적인 의미이다. 지금 우리가 빛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 빛이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ㅏㄷ. 이성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빛이 오니까 세계를 구성하게 되었고 구세주가 되었다. 과학적인 이성이 이 세상의 빛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도 깨달은 자다라고 말했다. 고다마 싯타르타가 4가지 비밀을 깨달았을때 세상을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 모든 종교마다 세상의 빛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라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곳 세상의 빛이다라고 복음서에서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계몽주의시대에 와서 과학적 이성이 빛이 된 것이다.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적인 헌신을 하는 것이다. 

*  Passion of the western mind : 서구사회는 믿음(기독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을 발견했는데 과학과 인간속에서. 많은 서구인들이 종교적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세속적이다라고 생각한다. 리차드 타나스는 휴머니즘 자체가 종교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학의 힘으로 인간 스스로의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 섭리 : 하나님이 밀고가시는 역사, 그런데
1)진보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어거스틴 이후 서구는 역사를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것으로 이해했다. 어거스틴에게 진보는 성경의 이야기를 따르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에서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진보가 되었다. 계몽주의의 중요한 학자중의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서구의 계몽시대에선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부수어 버리고 사람의 도성을 건축했다. 인간 스스로가 우리를 구원할수 있고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악과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2) 과학과 이성에 의해서 진보가 가능하다. : 이성이라는 것이 디시플린으로 만들어진 것이 과학이다.
3) 이러한 과학에서 기술이라는 것이 나왔다. 19세기에 와서 과학과 기술이 합쳐지게 되었다. 아주 중요한 책(린 화이트),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기술이 빠른속도로 달려가는데 그것을 밀어주는 추진력이 과학이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이었다. 그래서 과학에 기초한 기술이 인간의 세상을 더욱 좋게 만들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과학적 이성은 큰 힘을 가진다. 우리의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고 이전에 하나님이 다스리던 왕국은 저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성적인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 버렸다. 이제 과거의 경제적 환행들은 뒤로 보내고 이성적인 경제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다가고 했다. 교회 교육은 옛것이 되어 버렸다. 학교 교육의 강화, 가장 중심적인 신념은 우리의 이성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죄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 세계관이다. 
- 진보라는 것은 우리의 이성을 기술적인 사회적인 이슈에 이성을 적용할때 일어났다. 

* 근대 
인본주의-자율적 이성
autonomous = self + law(스스로가 만든 법), 자율적 이성-기술과 조직-새로운 세상
인본주의가 자율적 이성을 고용하고 과학이라는 discipline을 활용, 물질계는 기술을 가지고 인간 세상은 이성적 조직(정치, 경제, 교육, 사회)을 가지고 지배했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 그런데 이 계몽주의의 이상에 기독교 용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나라, 낙원(paradise)를 사용했다. 이제 인간이 만든 낙원이 올것이다라고 했다. 오랜 진보를 통해서 낙원이 올 것이라고 여겼다. 서구의 식민 제국들이 이것을 받아들였다. 지난 100년동안 유럽중심의 세계관이 퍼져나갔다. 오늘날 전 세계의 도시들을 이 세계관이 밀고나가고 있다. 서구의 교육, 정치제도, 경제의 문화가 퍼져나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서구적인 것들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묻지 않는다. 이러한 인본주의는 종교적인 세계관과 충돌하고 있다. 
- 예화 : 서울,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가장 우선순위는 교육이다. 진보를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 교육이라고 여기고 있다. 교육의 중요성을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 18세기 동안에 유럽전체가 계몽주의에 의해서 지배될때 그이전 17세기동안 출판된 교육에 대한 책보다 18세기에 나온 책이 더욱 많았다. / 기독교인들도 여기에 많은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상숭배적인 요소가 있다. 이성, 과학, 인간의 능력에 대한 우상숭배가 있다. 더나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다는 우상숭배가 있다. 
- 18-19세기로 가보자. 좀더 견고한 형태로 만드러 지게 된다. 존 헌터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라는 사상과 가치는 지적인 체제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모든 영역에 가장 강력하게 박혀 있다.” 지금까지 세계관이 머리속에만 있었는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공립학교를 만들었다. 모든 정치제도, 경제제도를 만들었다. 헌터는 자본주의 시스템, 민주주의 시스템, 교육에 있어서 대학이라는 시스템, 문화적으로는 미디어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러한 4가지 중에 물론 좋은 것이 많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 예) 나는 아이들을 홈스쿨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라고 말했다. 곳곳에 많은 학교들이 있는데, 이 학교라는 시스템이 19세기이후에 이러한 세계관에 의해서 시작된 제도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교회과 가정이 교육을 제공했다. 오늘날 모든 학교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여러 세계관을 배우고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헌터는 19세기 계몽주의가 지나면서 여러 시스템 속으로 제도화되어서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역사가들은 혁명의 시대였다라고 말한다. 

* 혁명의 시대(19-20세기초)
- 세계관은 어떤 신념들의 셋으로만 남아있지 않는다. 반드시 세상을 만들어 간다. 
- 19세기에는 계몽주의 믿음을 따라서 사회가 만들어졌다. 
- 혁명은 그 이전의 것을 모두 내버리는 것이다. 과학과 이성과 기술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 민주혁명, 미국 혁명, 공산주의혁명 / 한때 미국이 기독교 국가였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도 기독교 국가였던 적이 ㅇ벗다. 계몽주의 신념위에 세워진 첫번째 국가이다. 독립혁명이 바로 그 결과이다. 그리고 나서 25년정도 지나서 미국의 대각성운동(1790)이 일어났다. 이때 10%밖에 교회를 가지 않았다. 굉장히 계몽화된 사회였다. 이 계몽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든 것이다. 
- 하웃츠바르트 : 종교개혁이 서구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가(자본주의와 진보) “계몽주의의 비전이 진실이라면 새로운 사회를 세우는 것은 지루하고 일회성적인 일이 아니라 절실한 필요와 고도의 윤리적 명제가 된다. 그런 경우 실락원으로 가는 좁은 길은 사회적 혁명의 길일 수 있다."
- 이때 기독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실 이 문제때문에 세계관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타나스 : “초기의 기독교 신앙은 타락과 구속이 인간에게만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교리는 종교 개혁 이후에 이미 퇴조하고 있었고 지금은 통째로 사라졌다. 구원의 과정이라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만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 종교개혁까지만 해도 복음이라는 것은 가장 넓은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머니즘은 복음의 포괄성을 점점 좁혀서 종교를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문제로 환원시켰다. 이제는 넓은 영역의 정치, 경제, 교육, 미디어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 카이퍼는 인본주의의 힘이 전 유럽을 휩쓸고지나갈때 이것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깨달았다. 인본주의가 교회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점점 기도교 신앙은 축소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다시 원래의 의미로 확장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해서 기독교 세계관운동이 시작되었다. 삶의 전 영역에 영향력이 미쳐져야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타나스와 카이퍼는 이를 깨달았다. 
- 뉴비긴의 다원주의사회에의 복음,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가치의 문제에만 관련있는 것으로 좁혀 놓았다. 

* 경제적인 면
하웃츠바르트는 경제적인 면을 가장 강조하였다. 
- 18세기 : 아담 스미스는 인본주의 정신을 경제문제에 적용했다. 국부론(1776)에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경제를 어떻게 바꿀지를 제시했다. 궁극적인 목적은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유해지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의 방식이 바로 합리적인 생산의 공정을 이루고 자유시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가 이것을 허락한 것이다. 
- 19세기 : 산업혁명, 아담스미스의 비전이 이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새로운 공장, 생산라인, 과학적인 기술의 발전, 사실 산업혁명은 물건을 만드는데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것이 지배적인 세계관이 되었다. 
- 20세기 : 그로 인해 오늘날 소비주의, 경제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이 이상이 19세기에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 데이비드 웰스 : 자본주의는 제조와 생산, 그리고 소비를 위한 사회적 구조를 재편하였다. 그것은 우리 세계의 형태를 바꾸었다. 그리고 기술은 자본주의 과정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모든 삶을 합리화 시켰다. 
- 하웃츠바르트 : 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문화의 스타일이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나 사회의 궁극적 의미를 조망할 것인지와 같은 종교적인 질문에 관련된다. (모든 문화의 스타일은 종교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 우리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한 계몽주의 이상때문에 지금도 더 많은 물품을 생산해서 부유하게 사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것이 깊은 종교적 확신(계몽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웃츠바르트는 서구사회의 사고를 완전히 형성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육, 기술, 과학이 물질적인 번영을 위해서 맞추어져 있다. 

* 서구계몽주의사회 이후의 궁극적 의미
- 많은 것을 소비하는 것이 인간 삶의 의미라는 것이다. 
- 수단 : 시장, 경제 구조, 기술

* 사회의 경제 구조
- 여왕벌의 예화 : 모든 일벌들의 한가지 유일한 목적이 여왕벌로 하여금 알을 낳게 하는 것이다. 하웃츠바르트는 현대 인간 사회가 이와 같다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종교적인 이유가 있다. 단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는데 물질적인 부유함과 경험의 소비로 환원되어 버린다. 
- 여왕벌의 과업은 알을 낳는 것인데 이 모든 구조와 기능이 이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현재 우리의 / 무엇이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종교적인 세계관적인 힘인가? 21세기를 형성하는 종교적이고 세계관적인 힘들 세가지. 
- 포스트모더니티 : 점점 계몽주의의 믿음에 대한 도전
- 경제적 현대화와 세계화 : 오늘날 계몽주의 정신이 오늘날 경제를 만들어 냈다. 이것이 세계화 되었다. 모더니티와 세계화는 부딪힌다. 
- 소비주의 : 이 두 발전의 열매(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

* 한편 : 현대 인본주의의 실패와 붕괴
- 모더니즘이 환경을 파괴했다.
- 가난의 증가(소수는 부유해지지만 다수가 가난해졌다.) 빈부격차가 넓어지고 있다. 부유한 10억의 사람들이 가난한 10억의 사람보다 30배(1960)에서 90배 잘 산다. 
- 핵위협 : 기술의 위협, 기술로 진보를 했는데 그것때문이 인간이 전멸할 위협에 놓여있다. 
- 경제적인 문제들 : 매일 신문의 경제적 이슈들
- 심리적, 사회적 문제 : 포스트모던심리학자가 모더니즘이 가져온 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했다. 이 전체 문제중에 두가지만 실제이다. / 신체에 대한 관심, 오늘날 완전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심리학자가 말하기를 오늘날 기술이 발전하면서 생긴 문제이다. 가정의 해체, 사회범죄의 증가, 이러한 문제들이 모더니즘으로부터 왔다는것이다. 
- 데이비드 하비 : 20세기는 죽음의 수용소와 암살단, 군국주의, 양차 세계대전,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전멸의 위협,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을 통해 (이전에 그런쪽으로 기울고 있던) 낙관주의를 확실하게 부셔버렸다. / 계몽주의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서 좋은 세계가 올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이러한 약속이 모두 붕괴된 것이다. 
- 더 나쁜 것은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그 스스로를 대적해서 인간 해방이라는 미명으로 인간해방에 대한 요구를 전 우주적인 업악체제로 변화시키려는 유혹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계몽주의 프로젝트를 송두리째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이것이 바로 후기 현대주의 철학사상의 핵심인데-사람들이 있다. / 계몽주의와 기대와 소망은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맞다. 

* 현대 이야기들을 믿지 말라(리요따르)
-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말하자면, 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은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라고 정의한다. / 진보에 대한 신념, 신앙을 믿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이 더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 도전
1) 진보의 낙관에 대해 도전한다. : 이제 인간만이 절대적으로 옳다, 더나은 세계로 갈것이라는
2) 인간 이성 중심에 대한 도전 : 합리주의적인 휴머니즘에 대한 도전, 이성이 결국 인간을 진보하게 했는데 더이상 포스트모던에서는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3) 지식의 객관성에 대한 도전 : 대학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큰 포스트모던 그림중의 한부분이다. 우리가 모더니티에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신뢰할만한 진리에 이를수 있다라고 말했다. 
4) 모던에 의해 만들어진 부정에 대한 도전
5) 자연주의적인 세속주의에 대한 도전

* 인간의 비이성적 측면들 :
몸, 감정, 감각, 잠재의식, 욕구와 열정, 종교심, 상상력, 직관이나 본능
- 하나님의 형상중에 이성은 한 가지일 뿐이다. 이러한 인간의 요소들이 모두 모여서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을 모든 것을 누르고 왕좌에 앉혔을때 그 이성만을 신뢰하고 나머지를 믿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 가? 이성만 중요하고 나머지는 열등하게게 되는 것이다. 창조세계중에 한 부분을 높여서 우상을 만들게 되면 나머지 피조세계의 부분들은 멸시하게 된다. 이것은 꽉누른 스프링과 같다. 힘이 없어지면 튀어오르게 된다. 계속 누르게 될때 튀어오르게 된다. 포스트모던세계에서는 이성이 아닌 다른 것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30-40년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I think that  ) 나는 이렇게 느낀다라고 말한다. 더이상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 동성애 문제 : 1) 생각보다 느낌상으로, 더이상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 20세기가 지나면서 지식의 객관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성이 중립적인가? 지식에 영향을 미치는 주관적 요소
- 개인적 : 느낌, 상상력, 잠재의식, 성, 계급, 인종
- 사회적 : 전통(가다머), 공동체, 언어(비트켄슈타인), 문화, 역사, 믿음
포스트모던 학자들은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 모던이 만들어낸 부정
- 소수자에 대한 부정 : 가난, 여성, 계급, 소수민족, 게이, 다른 종교 / 좋고 나쁨이 아니라 그것때문에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 제3세계에 문화에 대한 부정 : 경제적인 식민주의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부분도 문제가 된다. 포스트모던은 본성상 다문화적이다. / 상대주의자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다. 
- 가난한자에 대한(백인, 중산층, 남자)
- 환경에 대한 

* 모더니즘 세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존재한다고 가시적 세계로 환원했다. 과학적으로 관찰가능하고 폐쇄된 인과관계안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초월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영어표현중에 Nonsense라는 말이 있다. 초월적인 세계는 난센스이다. 
- 포스트모던시대에는 종교적인 잡동사니 영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 종교적인 다원주의(모든 것이 옳다.) 뉴에이지, 점성술, 영지주의, 동방정교나 원주민 영성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보라는 큰 이야기를 더이상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 이성을 통해 진리에 이를수 있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는다. / 진리가 없던지 이성외에 다른 것으로 다다를 수 있다고 믿음
- 독점적인 진리주장에 대해서 의심한다. / 예수는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다라고 선포하면 포스트모더니스들은 의심의 눈길로 바라본다. 
-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 진리는 다양한 버전이 있다고 여긴다. 다원주의를 
- 인간 이야기에서 부저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다. 

* 모스트모던에 대한  간략한 평가
- 두가지 방법이 있다. 인정해 주는 것과 비판하는 것
인정
- 모더니즘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회복하는 기능 : 1) 인간은 비이성적인 양상이 있다. 2) 여러요소들이 지식에 영향을 미친다.(중립적인 지식은 없다. 카이퍼가 세계관을 옹호한 이유이다.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지식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상대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앙적인 헌신이 우리의 지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의 진리는 신뢰할 만하다.) 3) 다양성과 복수성에 대한 선함(모더니즘에서는 모든 것을 획일화하였다. 포스트모던에서는 다양성, 다면성을 인정했다. 많은 곳을 여행해서 다양한 민족들을 만나 좋은점과 나쁜점을 본다. 비서구인들이 서구적 세계관의 문제점을 지적해주기 바란다.

비판
- 새로운 형태의 우상숭배 : 1) 다원주의 : 다원주의와 다원성(복수성)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해서 차이자체를 축하한다. 2) 상대주의 : 이것과 관련된 것이 상대주의이다. 완전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극단적인 양극화가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포스트모던 사회의 선교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모던 휴머니즘의 승리 
- 우상숭배는 피조세계의 다양한 면에 있는데 한면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모더니즘에도 양면이 있다.
성공적인 면 :
1) 부의 증가 성장한것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비행기타는 것을 생각하기 힘들었다. 
2) 자유, 정의, 안정의 정도 : 사법시스템(절반의 진리)
3) 과학적, 기술적 발전 : 40년전 프로젝터 없었다.  OHP, 의학의 발달, 시대가 주는 진정한 선물들, 모더니즘의 성공과 실패를 보면서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나가는 면이 있다. 
- 경제적인 성장의 면이 20-21세기에 중요한 문제이다.(크리스토퍼 라쉬-진보의 이론) 많은 진보를 열거하면서 모든 진보는 실패하고 한가지만 남았다. 더 도덕적이고 더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2차대전을 보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의적인 세상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시대 너무나도 많은 부정의가 있다. 진리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주의가 번성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만 성공했다. 그것은 기술적 진보와 경제적 부요함이다. “우리가 진보적인 이데올로기의 내적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곳은 아담스미스와 바로 그 전임자들에게서이다.” 그당시 기술이 경제적 진보의 초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진보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 “진보라는 개념은 욕구가 무한히 팽창하고 편리함에 대한 일반적 기준이 꾸준히 상승하리라는 것, 그리고 대중이 풍요의 문화에 통합되리라는 것을 가정하지 않고는 지적인 비판을 견뎌낼 수 없다.”(라쉬)  우리가 진보에 대해서 비판적인데 그래도 소수이 사람들은 경제적인 부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셀폰이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드나? 셀폰을 가지고 있는한 모더니즘 세계관이 주는 것에 대해서 예스라고 하는 것이다. 부모세대보다 얼마나 더 편안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아마 세계관의 문제가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진보는 그렇지 않은데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되는 데서는 진보가 제대로 작동한다. 지난 어떤 때보다 결혼이 깨어지고 있다. 
- “진보의 사상이 20세기의 혹독함에서 생존해 온 것은 오직 이런 형태이다. 보다 사치스런 형태의 진보주의 믿음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그러나 (진보주의의) 자유주의적 형태는 20세기 사건들로 인해 성공적으로 경영되었던 낙관론에 대한 쇼크에 놀라울만큼 잘 대항해 왔다.”(라쉬)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보라는 개념에 보디 블로를 날렸다. 그래서 진보가 쓰러졌다. 한가지 진보만 제외하고, 그 진보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고 혹독한 비판을 견뎌냈다. 이것이 바로 기술적 경제적 진보이다. 아주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게 저항하며 무너지지 않았다. 그 진보가 바로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 경제적 세계화
- 경제적 모던 세계관은 첫번째 통합시키는 힘이다.  통합된 형태로
- 전세계 모든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 서울도 깊이 경제적 번영, 진보의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영어를 왜 배우려고 하는가? / 글로벌을 배우려고 어느 곳에서는 영어를 배우려고 한다.
- 세계적 경제체계나 시장
- 비대칭적인 세계화, 한쪽의 부가 창출되면 나머지 한쪽은 가난에 빠진다. 
- 빈부의 격차가 늘어난다. 
- 글로벌한 세계화에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곳이 바로 서구 사회이다. 
- 열매의 나눔이 불평등하다. 전세계의 1/5의 인구가 1/2의 소비를 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열매를 누린다. 
라이트와 뉴비긴이 이점이 가장 심각한 도전이라고 말한다. 

* 경제 세계화의 지배
- 흑인해방운동의 박물관 : 흑인노예들의 역사 박물관, 백인들이 어떻게 흑인들을 학대했는가? 뉴비긴과 함께 갔다. “어떻게 기도교인들이 흑인들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역사적인 악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이게 악인줄 몰랐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200년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를 보면서 말할 악은 무엇인가? 그당시 백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어떠한가? / 우리의 후손들이 묻게될 질문중에 어떻게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인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만히 있었는가 라고 묻지 ㅇ낳을까하고 뉴비긴이 말했다.
- (리차드 바캄) : 우리 세계의 현실은 거대 담론의 끝이 아니고 점점 증가하는 경제적 세계화이다. 이것은 새로운 제국주의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계화는 진보의 옛 개념에서 성장해 나왔지만 진보를 경제성장으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인간의 능력이나 자율성에 대한 같은 헌신을 하고 있다. 
- 과학에 대한 헌신
- 기술에 대한 헌신
- 과학을 통해서 사회(경제, 정치, 교육)가 형성되는 것에 대한 헌신
- 진보와 성장에 대한 헌신
- 버캄은 경제적인 목적을 섬기는 것이 첫째가 되었다. 
- 세금을 내면 90%가 

본인이 10대일때보다 경제가 지배적인 사회가 된 것을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것을 평가할 것인가? 비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제공하는 것 조차도 감사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비기독교인들로부터 조차도 감사의 조건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감사의 소스가 어디에서 오든지 관계없이…, 동시에 우리를 싸고 있는 사회속에서 우리가 알게모르게 지은 우상숭배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 서울의 지하철(신국원 교수와) 서 있는데 저 모두 한 곳을 보고 있다.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하다. 물론 기술의 편리함에 감사해야하지만 기술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기술과 경제문제로 모든것이 환원되면 문제가 많다. / 감사와 비판을 모두 가져야 한다. 

* 간략한 평가
- 좋은 점 : 서구문화의 유용성(인권, 과학, 기술, 민주주의)
- 나쁜 점 : 경제문제로 인한 우상숭배, 기술력으로 인한 환경의 파괴와 빈부격차에 대해 비판적이야 한다. 우리가 항상 기독교인으로서 우상숭배는 좋은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한 부분을 강조할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선한 피조세계속에서 이 부분이 우상숭배가 되면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과학이나 기술과 같은 것들은 세계관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계를 왜곡시키게 된다. 
- (버캄) “ 그것은 가난한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가? 환경을 파괴하지는 않는가? 그것이 경제적인 번영만큼 중요한 다른 가치들을 파괴하지 않는가? 분명한 것은 경제적으로 세계화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과 환경을 파괴하는데 명백한 책임이 있다.” 

* 홈 스쿨링 : 부모의 가치관과 아이들의 가치관이 충돌한다. 그렇기에 어려서부터 세계관적인 삶을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5살때부터 가난에 대해서 나누었다. 이런 것들을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보는 시각과 같이 아이가 볼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 기술에 대한 관점, 기술은 선한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지만 가정에 들여올때 주의해야 한다. 이것을 들여올때 얻는것과 잃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가족들이 함께 이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떻게 인터넷을 지혜롭게 사용할 것인가? 이런 룰을 만드는 것, 집에 들어와서 인터넷에 매달리지 않고 먼저 해야할 것을 정한다. 인터넷 서핑은 중독적이다. 쉽게 실제세계와의 연결이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유용한 도구가 안되고 빠져버리게 된다. / 대부분의 물건들을 중고상점에서 구입한다. 티비를 볼때 아이들 프로그램만 정해놓았다. 아이들이 티비를 볼때 아이들을 소비자로 만들기 위해서 광고를 한다. 3살때 일인데, 광고가 나올때마다 저 광고가 누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가? 광고를 보고서 비판적인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일을 아이들과 함께 한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피닉스 아리조나에서 목회 : 아주 창의적으로 소비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문제를 다룰지를 고민하는 목회자가 있었다. 항상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왔다. 그 상상력에 놀랐다. 블랙 프라이데이에 절대로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악마적인 소비주의에 대항하여 기도), 매주 금요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가서 만나는 사람에게 무엇을 도와줄지를 묻는다. 추수감사절 전에 하나는 자기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누어 주었다. 3년전에 소말리아에 테러단체가 있었다. 그때 소말리아 사람들이 피닉스에 살고 있었다. 많은 미국 사람들이 그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테러그룹들이 미국에 있는 소말리아 사람중에 리쿠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말리아 사람들과 가까이 친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런 식의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교회 공동체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첫번째 수요일 저녁에 관심있는 토픽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소비주의, 예술, 운동…)

* 소비주의 사회
- 소비주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쪽에 뿌리를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우리 삶에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삶의 의미의 빈자리에 상품과 새로운 경험을 집어 넣었다. 
- 그와같은 것을 채울 수 있는 많음 물건이 세계화를 통해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모더니즘의 열매)
- 소비주의야말로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가장 큰 우상숭배적인 스피릿이다. 


* 스티븐 마일스 : “소비주의는 현대 생활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종교와의 유사점도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소비주의는 거의 틀림없이 20세기 후반의 종교이다."

*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것
- (웰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 “만들고.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을 구조화 시켰다."
-  the story of stuff :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이 일어났을까? 이것은 그냥 우연히 생긴것이 아니라 디자인 된것이다.” / 소비주의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19세기 산업혁명을 지나면서 엄청난 상품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이전에 테이블을 만들면 하루에 1개도 만들기 어려웠다. 하지만 산업혁명이후에 어셈블리 레인을 통해서 10명이 100개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러다보니 점점 상품이 많아지는 것이다. 경제적인 관점으로 생산이 많아지는 것인데 소비와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 생산과 소비의 갭이 증가했다. 과거에는 신발 두켤레면 충분했다(작업화, 교회갈때 신는 신발). 이제는 신발을 사게해야하는 것이다. 
- 지나치게 생산적인 우리 경제는 소비를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만들도록 요구한다. 상품을 구입하고 사용하는 것을 제사의식으로 전화시키고 우리의 영적 만족감, 자아 충족감을 소비에서 추구하도록 요구한다.(신발 생산, 자동차 생산-차를 파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파는 것이다.)

* 우리는 소비하고, 소모하고, 닳게 하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폐기할 물건들을 점점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타고 살도록… 그것을 점점 더 비싸게 소비하게 해야 한다.

* 소비를 삶의 방식으로 만드는 것(2가지)
- 계속해서 소비가 삶의 방식이라고 반복해서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로드티 크랩(악마는 비자를)
1) 어떤 것이 못쓰게 되는데 살때부터 얼마지나면 못쓰게 되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잘 부서지도록(커피 메이커, 잔이 부서지면 바꾸도록 디자인 되어 있다./ 진공청소기)
2) 못쓰게 되었구나라고 느끼도록, 생각하돌록 : 멀쩡하게 입고 있는데 이 옷이 나를 쿨하게 만들지 못한다라고 여기게 만든다. 신발도 닳지 않았는데 안좋아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현재 가지고 있는 물건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라고 여기게 만든다. 전화기사는데 사람들이 줄을 설때 전화기가 작동하지 않기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 광고
- 북미주의 사람들은 하루에 3000번정도 노출된다고 한다. 
-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 낸다. / 어제까지만해도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필요한지도 몰랐다. 그런데 광고가 이것을 사면 내 인생이 달라질것 같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비행기 광고책을 보고나자 속이 메스꺼웠고, 새롭게 필요한 2가지가 생겼다.)
- 불만족을 만들어 낸다.(컴퓨터, 핸드폰의 기능 / 미를 판매)
- 좋은 삶을 파는 것이다. (자동차와 맥주 : 이것을 사면 네 삶이 멋져진다라고 계속 강조한다.)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사와서 비판을 해오라고 했다. 누구를 바보로 만드는 것인가? 

* 롬 1:18-32과 소비 문화
- 사도바울은 로마의 우상숭배문화와 인간의 죄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김” 삶의 중심에 하나님외에 우상을 두는 것이다. 서구적인 삶에서는 삶의 중심에 여러가지 다른 것을 가져다놓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내버려 두심”을 세번 반복한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문화가 어떻게 이야기하던지 나가가야 한다. 오늘 서구사회는 부를 추구하기를 원하면 내어버려두신다. 그것에 좋은점도 있지만 멸망의 길인 것이다. 

* 소비주의
- 종교개혁전통에서 이즘을 붙이면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비자는 창조세계의 선한 것이지만 이것이 소비주의가 되면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성은 선한 것이지만 이성주의는 좋지 않다. 
- 소비는 좋은 것이다. : 피조물을 보시고 좋았더라,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즐길만한 많은 것을 소나기처럼 많이 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 문제 : 상품과 경험을 소비하도록 우상에 선점됨(젊을수록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 익숙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소비가 들어오는 것이다. 호모 컨슈머-소비하기 위한 존재가 됨) / 문화의 중심속에 경제적 성장과 소비가 들어옴
- 유대인의 전통속에 거룩하게 된 소비를 배울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감사하고 점점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 필요한 것은 반소비적인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들의 선한 청지기가 되는 것, 우리가 자원들을 책임있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우리가 구매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선물에 대해 어떻게 청지기가 될 것인가? 이것을 즐기면서 이것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 12살딸에게 코트를 사주었는데 이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 옷을 입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좋은 것을 누리지 말라고 금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소비사회를 살아가는데에 대한 묵상
1) 우상숭배적인 삶이다. 
- “다름아니라 경제주의의 문화는 삶 전체를 망라한다는 허위, 행복과 성취를 가져올 수 있다는 허위를 가진 유사종교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경제주의가 인간을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우상이라고 비판적으로 선언해야 한다."
2) 공동체적인 소비주의는 파괴적이다. / 소비주의는 파괴적이다. (가난한 자에게, 환경에 대해, 부유한 자에게도(시간 부족, 비용의 발생, 빚의 증가, 염려, 심리적 문제, 교육, 가족, 성생활, 스포츠), 경건한 성품에 대해서(담욕적, 질투, 이기적, 피상적, 만족못함, 감사못함의 문제들이 생김)) / 가톨릭 신학자들은 소비주의 자체가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성품을 파괴한다. 
3) 소비주의 세계관은 교회조차도 길들인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을 따르는 법) 
- 기독교인들이 실제 믿음을 살아내는데 있어 예수의 복음보다도 국가와 문화의 복음들에 더 헌신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을 빈약하게 하고 길들이는 것이 중심문제다.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 예수의 복음이 소비의 복음보다 뛰어나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포드 자동차 회사(소비주의가 복음이다라고 했다.)
- 동일하게 복음에 기초한 인간의 삶의 의미를 포괄적이고 강력한 세계관 이야기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 성경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 성경과 복음을 알고/ 이시대의 이야기를 알고/ 구속적 긴장을 개발하고/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자세/ 다음 세대를 훈련 / 공동체적 삶 / 깊은 영성

* 소비자 문화 안의 대조 공동체
- 도무지 만족할줄 모르는 세상을 살면서 만족하는 공동체
- 즉흥적인 만족을 구하는 세상에서 인내심있고 절제하는 공동체
- 점점 폭력적이고 거칠고 성적인 소비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가진 공동체
- 불만족한 세상에서 기쁘과 감사할줄 아는 공동체
- 개인적인 자율성과 실현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살마들에 대한 책임과 상호성을 강조하는 공동체
-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타적으로 다른이들에게 나눌줄 아는 공동체
- 겉만 치장하는 세상에서 내면의 성품을 추구하는 공동체 
- 많은 것을 낭비하는 세상에서 충성된 청지기로 사는 공동체
- 생태학적인 부정의가 넘치는 세상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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