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스탠리 하우어워스, 윌리엄 윌리몬)
1장. 현대세계_바른 질문 배우기
-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1963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폭스 극장이 주일에 문을 엶
- 그리스도인은 저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질줄 아는 모험적인 교회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1) 올바른 신학적 질문들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와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변증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 슐라이어마허의 과제 : 기독교에 도전하는 교양있는 비판자들에게 신앙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제시하고자 했음
- 틸리히의 견해 : 당신이 어떤 것을 믿고 있는 한 무엇을 믿느냐는 문제될 것이 없다.
- 진짜 기독교에 해당하는 어떤 핵심이 존재하기에 고대 근동지역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버려도 그대로 유지되는 추상적인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번역의 신학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한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기본적인 관념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운동에 참여하고 한 백성이 되라는 초청을 받는다.(27)
- 콘스탄티누스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충성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의 정치적인 구조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케하는 지적인 이론들을 만들것을 요구함으로 우리 자신이 아니라 복음을 바꿀것을 요구하였다.(28)
- 성경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갖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믿을 것이 무엇이냐에 있다.
- 틸리히는 조직신학을 새롭게 개조해 더 낫게 만드는 것이 신학적인 과제라고 생각한 반면 바르트는 더 나은 새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보았다.(31)
- 신학의 과제는 예수를 현대적인 범주들로 번역하는 해석적인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그분을 향하도록 변혁하는 것이다. 신학자의 업무는 이 세앙이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복음의 기준에 합당하도록 만드는 것이다.(31)
2) 새로운 이해인가 새로운 삶인가
- 교회안에서도 끔찍스러운 악이 좀더 나은 선을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옹호되었다.(원자폭탄 투하, 대규모의 낙태)
- 교회를 급진적이고 영원히 새로운 형태로 지켜 나가는 힘은 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논쟁거리들과 관련해 좌파와 하나되게 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예수를 교회가 아는 데서 온다.(37)
- 바르트는 복음을 세상속의 현실 체제에 맞추기를 거부하고 교회를 복음에 맞추려고 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틸리히보다 더 새롭고 더 급진적이다. 바르트에게서 우리는 신학 연구의 목적이 이치에 맞는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해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것, 즉 복음의 놀라운 주장들에 비추어 삶을 재형성하는데 있다는 신약성경의 주장을 재발견한다. 우리는 타협이 아니라 회심을 통해서 이런 지식을 얻는다.(38)
2장. 새 세계와 기독교 정치
1) 종교와 정치의 혼합
라인홀드 니버는 공적 교회관을 강하게 옹호하였다.
17세기 종교 전쟁이 끝난후 이들의 관심은 민족국가로 이어진다. 이제 국가를 위해서 싸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불신앙의 정치
- 불신앙이나 무신론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다.
Q. 문화위의 그리스도와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사이의 어느 지점들로 해석(문화의 그리스도는??)
- “그리스도와 문화”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데 방해가 된 책도 없다라고 결론 내림(56) 그리스도와 문화는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니버가 사용한 범주들의 구조자체에 문제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대해 전부가 되거나 무책임하게 분파이기를 고집할것을 선택하라고 가르친다(59)
- 교회만이 세상에 알려 줄 수 있는 그런 정치적인 대안을 들고 교회가 세상과 만나게 될 때 이것을 분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공동의 삶을 통해 증언하고 보여줄 수 잇는 교회가 사라지는 곳에서 국가는 가장 악독한 부족주의로 변질되어 버린다.(61)
3) 사회 전략인 교회
- 교회는 사회 전략을 갖지 않는다. 교회 자체가 사회 전략이다.
- 요더의 유형론 : 행동주의 교회(activist church), 회심주의 교회(conversionist church), 고백 교회(confessing church)
행동주의 교회 : 교회를 개혁하는 일 보다는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회심주의 교회 : 사회 구조를 뜯어 고친다고 해도 인간의 죄의 결과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고백 교회(십자가의 교회) : 자신의 주된 정치적 사명이 개인의 정신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으로 하여금 만물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효율성이 아니라 신실함)
3장. 구원은 모험이다.
- 오늘날 교회는 불신앙의 사회속에서 나그네된 거류민으로 살고 모험을 감행하는 식민지로 존재한다.(71)
-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한곳에 정착하고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울타리를 치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전투태세)
1) 다시 길을 떠나며
- 구원이란 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이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자녀는 낳는 주된 목적은 우리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88)
- 항상성 요구,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주도하게 만들고 자신의 능력만 의지해 이루어 냈을 때보다 훨씬 놀라운 삶을 살게 해준 것은 바로 메시아와 메시아의 공동체였다.(96)
2) 명분을 지닌 백성
- 평화의 백성 :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이야기의 일부로 보도록 초청받는다.
4장. 식민지의 삶_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되는 교회
- 여러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교회적 지침을 세우고 정부에 그 견해를 지원해줄것을 요청하는 방식
- 기독교 윤리는 우리가 믿는 것, 곧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이루어진 것을 기준으로 볼때만 타당하다.(107)
1) 너희는….한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 산상설교는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고 있다.(115)
- 공동체로 있을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만이 참된 곳일 수가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우리의 삶은 교회 안에서 더 나아진다.(116)
2) 기독교 윤리는 곧 사회 윤리다.
- 모든 기독교 윤리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니며 정치적인 출발점, 곧 교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볼때 우리의 윤리는 곧 사회 윤리다. 우리의 모든 윤리적 응답은 바로 여기, 교회에서 시작된다.(123)
-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우리가 제시해야할 가장 창조적인 사회 전략은 바로 교회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세상의 방식과는 철저히 다르며 도 약속으로 충만하기에 그 방식과 모순되기까지 한 새로운 표징을 이 세상속에 드러내는 데 있다.(바르트, 125)
3) 눈으로 보는 것 그대로
- 산상수훈은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산상수훈의 방식은 우리가 따라야할 새롭고 훨씬 엄정한 규칙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을 보여주는 그림이다.(129)
4) 세상의 끝
- 산상설교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따라야 할 길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나라의 선포는 지극히 종말론적이다.
- 산상설교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일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해주는 새로운 개념을 우리에게 열어준다. 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바로 교회다.
5장. 평범한 사람들_기독교 윤리
1) 오묘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
- 윤리란 행함(doing)의 문제이기전에 먼저 봄(seeing)의 방식이다.
- 사람이 언어를 배우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 속하고, 손윗사람을 살펴보고, 그들을 흉내내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교회가 윤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사람들을 이끌어 기독교적인 삶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인물과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148)
2) 탁월한 모범이 되는 성도들
- 기독교 윤리는 산상설교와 같은 성경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신 에수께 우리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독특한 공동체에서 생겨난다.
3) 사례를 통해 다져지는 신앙
- 기독교 윤리가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 다른 평범한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이다.
6장. 모범적인 교회_기쁨으로 진리 말하기
1) 목회 훈련
QQ- 탁아소를 세우는 것이 과연 이들을 돕는 일인가? 더 나은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별장, 2대의 자동차, 더 넓은 집) 맞벌이를 해야하기에 탁아소가 필요한 것이라면?? 반면에 제3세계나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어떠한가?(글래디스의 지적)
- 사실 우리는 사람을 도우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도록 부름받은 것이다.(185)
- 글래디스는 우리를 사로잡아 버린 세계관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적이며 교회적이고 사회적인 근본 문제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그 근본문제란 교회가 교회로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물어야할 물음으로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신념을 따라 사는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188)
2) 성공적인 목회
- 성서 해석은 지적인 문제이기에 앞서 정치적이고 교회적인 문제다. / 교회는 성서와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리이다.(197)
-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거짓말을 물질주의와 짝을 이룬다. 루터는 안전을 최고의 우상으로 보았다. 이시대는 목회자인 베드로로 하여금 그 부부의 잘못을 호되게 지적하기보다 부드럽게 대하고 이해해줄 것을 요구한다.(204) / 베드로가 굳게 믿었던 것은 복음과 그 위에 세워진 공동체는 우리처럼 평범하고 이기적이며 물질주의에 빠진 사람들조차도 변화시켜서 성도들을 닮아 가도록 만들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205)
- 톰과 수 부부, 낸시 목사의 이야기 : 이혼을 고려하라고 권유하기에 앞서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에 앞서서 과연 교회가 그들을 진정으로 돕고 있는가?
3) 하나님을 섬김
7장. 힘과 진리_목회를 가능케 해주는 미덕
1)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핍박받는 초대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고난을 요구하지 않는 윤리는 진정한 윤리가 아니다.(230)
2) 담대하게 복음의 목회 선언하기
- 교회의 정치는 진리로 충만하고 또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243)
3) 목회를 위한 능력
- 신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이 실제 목회에 얼마나 연관이 있는가? 역사적 비평적 성서 해석들, 성서 원어에 대한 지식들
- 목회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행사하는 권위의 출처에 관해 명료할 필요가 있다.(252)
- 비극적이게도 우리중 많은 이들이 성서 없이 설교하고 교회없이 성서를 해석하려 애쓰고 있다.(253)
- 설교의 성패는 전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본래성을 회복하는데 달려 있다.(254)
- 만일 목회자들이 자기네 교인들에게 열정적인 모험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들은 실패자다. / 갱신은 고립되고 영웅적인 사상가들이 아니라 앞에서 예로 들었던 그런 사람들의 평범한 행동을 통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258)
4) 하나님의 능력으로
- 진리로 충만할 때 힘이 나온다. 종됨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분께 순종하는 한에서는 힘이 된다. / 진정한 과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가 부여한 말씀과 성례전을 베푸는 놀라운 권세를 어떻게 도덕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이 되느냐이다.
- 목회자의 활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신가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만일 목회자가 이 점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계속해서 변덕이나 부리고 속이는 짓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월터 브루그만, 263)
-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씨름할 과제는 기독교적인 신념들을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즉 그 누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신념으로 형성된 나그네 된 거류민의 식민지를 세우는 것이다.(265)
Q. 이땅을 식민지로 이해하는 저자의 이해가 합당한가?
해설.
현재의 교회는 교회와 국가의 기형적 통합을 성취한 콘스탄틴주의, 이성과 신앙의 통전성을 해체한 계몽주의,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개인들의 사상누각으로 변질시킨 개인주의의 포로가 되어있다. 이러한 진단의 처방이 바로 하늘나라의 식민지로서 교회의 자기 정체성 회복이다.
- 이땅에 거하고 있지만 이땅에 정착해 안주하지 않으며, 이땅의 현실에 영향을 받고 있으나 이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이땅의 타락에 저항하지만 하늘의 진리로 혁명을 꿈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해법이다.
1) 모험 공동체다.
2) 이야기 공동체다.
3) 종말론적 공동체다.
4) 혁명 공동체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치 광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포하는 것, 개인주의를 찬미하는 문화적 주류를 향해 공동체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 자본주의를 신으로 섬기는 맘몬의 신전에서 십자가로 우상을 파괴하는 것, 실용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맹신하는 세상을 향해 평화와 용서를 설교하는 것, 폴력의 전차에 올라타 세계를 향해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비폭력의 깃발을 흔드는 것, 그리고 종교를 국가의 부속기관으로 임명해 충성을 요구하는 콘스탄틴주의를 향해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장엄하고 거룩한 혁명인 것이다.(276)
-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세상의 이념과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 십자가 공동체로서 자신의 본질을 재발견해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는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먼 여행을 과감히 떠나는 나그네로서의 비전을 되찾아야 한다. 불신앙의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인간적 구애의 손길을 뻗치는 대신, 하늘의 비전을 소유한 백성으로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담력을 길러야 한다.(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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