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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For rhe himself is our peace, swho has made us both one and has broken down tin his flesh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15 by abolishing the law of commandments expressed in uordinances, that he might create in himself one vnew man in place of the two, so making peace, 16 and might wreconcile us both to God in one body through the cross, thereby killing the hostility. 17 And he came and xpreached peace to you who were yfar off and peace to those who were znear. 18 For athrough him we both have baccess in cone Spirit to the Father.
r Ps. 72:7; Mic. 5:5; Zech. 9:10; [Col. 3:15]; See Luke 2:14
s See Gal. 3:28
t Col. 1:21, 22; [Rom. 7:4]
u Col. 2:14, 20
v See Rom. 6:4
w Col. 1:20–22; [1 Cor. 12:13]
x Isa. 57:19
y ver. 13
z Deut. 4:7; Ps. 148:14
a [John 14:6]
b ch. 3:12; [John 10:7, 9]; See Rom. 5:2
c ch. 4:4; 1 Cor. 12:13; [John 4: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2:14–18.
앞서 13절에서 이야기한 내용,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줬다’라는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오늘의 본문이다. 13절에서 너희가 이제 14절부터 우리로 바뀐다. 그리고 계속해서 17절에 너희, 18절에 우리로 표현된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은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평화를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To say Christ—that is to speak of peace. To speak of peace—that is to speak of Chris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9.
14절)
중간에 막힌 담, 분리하는 벽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 뜰, 이방인의 뜰에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그들이 이 벽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가 적혀 있다. 구약의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 지성소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고 대제사장의 경우라도 죄를 지으면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 상징적으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로 둘을 하나로 만들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스스로 화평이실 뿐만 아니라 화평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수직적인 화평(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과 수평적인 화평(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수평적인 화평은 단지 적대감의 부재가 아니라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14, 15, 17절에 화평(에이레네)가 4번 등장한다. 본문속에서 화평은 연합, 나뉨과 적대감을 없애는 것, 접근과 화해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는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고 그리스도는 화평을 선포하셨다. 바울은 가능한한 그리스도와 화평을 연결시킨다. 그는 화평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고 그것의 유용성을 선포하시고 그분안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바울신학의 여러 중요 주제들은 화평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이다.
평화는 종말론적인 보상이다.
평화는 구원과 동등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 왕국은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화평은 인간 관계의 목표이다.
화평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기초이다.
성령의 열매는 화평이다.
평강은 우리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지킨다.
화평은 단순히 적대감의 중단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과 하나님과의 삶에 대한 포괄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사용의 배경이 되는 것이 구약에 사용된 샬롬의 의미이다. 이는 온전함, 육체적인 안녕, 풍요, 안전, 좋은 관계 그리고 고결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윗은 심지어 그의 전쟁에서 샬롬을 묻는다. 샬롬은 단지 분쟁이 부재한 상태보다 더 긍정적이다. 그것은 그래야만하는 삶의 방식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안에서만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양한 본문에서 샬롬은 공의, 정의, 구원과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 된다. 여호와는 화평이시다. 여호와는 평화의 언약을 그의 백성들과 맺고 평화를 가져올 것을 약속하신다. 평화는 미래에 대한 위대한 예언들에게 보여지는 바대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시다.
본문 14-18절 속에서 평화는 뜻밖에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건설적인 행위로 묘사된다. 나뉨과 적대감은 파괴되어야만 하고 연합과 평화는 확립되어야 한다. 화평과 화해는 수평적, 수직적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야 한다. 일차적인 초점은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수평적인 평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14절의 그 둘은 11-12절에서 언급된 두 부류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는 표현은 수직적인 차원을 묘사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합니다.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적대감은 16절에 “그들의 적대감, 원수된 것을 죽이라”는 표현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새로운 존재로 참가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 양쪽 모두를 한 몸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십니다.
17절에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는 그리스도의 선포는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전한 내용을 말하며 문자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문구는 바울이 그 자신과 다른 선포자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로 보았는지를 보여준다.
Peace dominates this section both explicitly (vv. 14, 15, 17 [twice]) and implicitly (unity, destruction of division and hostility, access, and reconciliation). Christ is our peace, makes peace, and proclaims peace. Paul seeks to connect Christ and peace as comprehensively as possible. He is the one who makes peace possible, who announces its availability, and in whom peace is enjoyed. This theology of peace is both a Christological and a soteriological statement.
The word for peace (eirene) occurs forty-three times in Paul’s letters, eight of which are in Ephesians (1:2; 2:14–17; 4:3; 6:15, 23). Peace is a central and fundamental component of Paul’s theology. Virtually every topic of doctrinal significance is brought into relation to peace. In addition to occurrences in greetings and blessings, note the following:
God is a God of peace (Rom. 15:33; 16:20; 1 Cor. 14:33; 2 Cor. 13:11; 1 Thess. 5:23).
Christ is the Lord of peace who gives peace (2 Thess. 3:16).
The gospel is a gospel of peace (Eph. 6:15).
The mindset of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Rom. 8:6),
Peace is an eschatological reward (Rom. 2:10),
Peace is equivalent to salvation and describes relation to God (Rom. 5:1),
The kingdom is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Rom. 14:17),
Peace is the goal for human relations (Rom. 14:19; Eph. 4:3; 2 Tim. 2:22).
Peace is the foundation for problem solving (1 Cor. 7:15; 14:33).
The fruit of the Spirit is peace (Gal. 5:17).
Peace guards our hearts (Phil. 4:7) and rules in them (Col. 3:15).
With such varied use it is not surprising that Paul summarizes the gospel by saying, “He [Christ] is our peace.” Peace is not merely the cessation of hostility; it is a comprehensive term for salvation and life with God. The background to this use is the Old Testament concept of shalom, which covers wholeness, physical well-being, prosperity, security, good relations, and integrity.23 David even asks about the shalom of his war (2 Sam. 11:7; niv, “how the war was going”)! Shalom is much more positive than merely the absence of conflict. It refers to the way life should be and is a gift of God that is received only in his presence. In various texts shalom is equated with righteousness, justice, salvation, and the reign of God.24 Yahweh is peace (Judg. 6:24), makes a covenant of peace with his people, and promises one who will bring peace.25 Peace is what God wills for his people, as can be seen in the great prophecies about the future.26
In 2:14–18 peace is unexpectedly both a destructive and a constructive act. Division and hostility had to be destroyed, and unity and peace established. Peace and reconciliation (v. 16) take place on both horizontal and vertical levels. Most of the focus initially is placed on the horizontal peace established between Jews and Gentiles. “The two” (v. 14) refers to the two parties mentioned in verses 11–12, the Jews and the Gentiles,27 and the mention of the law (v. 15) and of Gentiles being included with God’s people (v. 19) is further confirmation. In Christ, Jews and Gentiles are made into one new being.
At the same time, “he himself is our peace” describes the vertical dimension. We have peace with God (Rom. 5:1). Hostility between humanity and God is at least implied here and may be explicit in 2:16 with the words “put to death their hostility”28 (if this does not refer again to the hostility between Jews and Gentiles; see Rom. 5:8–10). Christ not only joins Jews and Gentiles into a new being, but he ushers both of them in one body into God’s presence.
Christ’s preaching of “peace to you who were far away and peace to those who were near” (v. 17) refers to the preaching done by the apostles and missionaries to Gentiles and Jews respectively, not literal preaching by Jesus. But this phrase does show how much Paul viewed himself and other proclaimers as representatives of Christ. “Preached peace” is adopted from Isaiah 52:7 (cf. also Zech. 9:10).29
23 As examples, see Genesis 37:14 (niv, “well”); Psalm 38:3 (niv, “health”); 73:3 (niv, “prosperity”); Leviticus 26:6; Judges 4:17 (niv, “friendly relations”); Zechariah 8:16 (niv, “sound” judgment). For good discussions of peace see Ulrich Mauser, The Gospel of Peace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92); Perry B. Yoder, Shalom: The Bible’s Word for Salvation, Justice, and Peace (Newton, Kans.: Faith and Life, 1987).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24 See Leviticus 26:3–23; Psalm 34:14; 37:37–40; 85:10; 119:165; Isaiah 32:16–17; 52:7 (to which allusion is made in Eph. 2:17).
25 See Numbers 6:26; 25:12; Isaiah 54:10; Ezekiel 34:25; 37:26; Malachi 2:5; for the promise of one who will bring peace, see Isaiah 9:1–7; 11:1–9; Micah 5:2–5; Zechariah 9:9–10.
26 Such as Isaiah 2:2–4; 11:1–9; Jeremiah 29:11 (niv, “prosper”).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peace in the New Testament is no less important. Not surprisingly, the first word of the risen Christ to his disciples in the Gospel of John is “peace.”
27 That the neuter is used for “the two” (rather than the masculine as in 2:16 and 18) is no proof that reference was originally to two parts of the cosmos (contra Lincoln, Ephesians, 128–29). The neuter and the mixing of genders often occur in reference to people (note, e.g., John 1:11; 6:39–40; 1 Cor. 1:27–28).
28 Literally, “having killed the hostility in himself.” The phrase means that the killing takes place in his own being, not that the hostility is his.
29 Koshi Usami, Somatic Comprehension of Unity: The Church in Ephesus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83), 53–55, suggests that Paul intentionally avoided the pronoun “we” in verse 17, in order not to express an attitude of superiority.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9–131.
본문에서 막힌 담, 나누는 벽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육체
영지주의 본문에서 언급된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적 장벽
율법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을 나누는 성전의 장벽(행 21:28-29)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의 뜰과 유대인의 뜰에는 요세프스와 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라틴어와 헬라어로 이 벽을 넘어가면 죽음을 당한다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행 21:28-29에 바울이 드로비모를 데리고 들어갔다라고 고소한 내용이 등장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단지 물리적인 성전의 장벽만을 의미하는 것은 너무 좁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15절) 법조문과 율법의 역할은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들과 이스라엘을 나누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으로 대변되는 옛 언약을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새언약으로 대치하셨다.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세 율법은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장벽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새 언약의 신자들이 모세의 율법하에 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법아래에 있다라는 것이다.
신약의 바울서신에 이 화평(에이레네)라는 단어가 43번 등장하는데 이 에베소서에 8번이 사용된다. 이처럼 화평(평안, 평강)은 바울 신학의 중심적, 기초적인 구성요소이다.
Christ sets aside the old covenant with its Mosaic law and replaces it with a new covenant for all believers. Consequently, the Mosaic law cannot serve as a barrier between Jewish and Gentile believers. Although new covenant believers are not under the Mosaic law, they are under “Christ’s law” (1 Cor 9:21; cf. Matt 5:17; Rom 3:31; Gal 6:2).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3.
본문에서 율법을 폐하셨다라는 표현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이나 도덕적인 지침을 파괴했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폐한 것은 바로 이방인을 제외시키는 규정으로서의 일련의 율법을 폐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애써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거나 제사, 음식법을 강요함으로 그들이 유대인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바울은 이러한 것을 폐한 것이다. 본문에서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안에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장벽 철폐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이루어졌다. 11절에서 ‘육체로는’이 문제의 핵심이었는데 이제 14절에서 ‘자기의 육체로’이것을 허셨다. 이는 바로 그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 적대감을 없애셨다. 갈 3:13절은 이렇게 말한다.
(갈 3:13, 개정)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스스로 제사장으로서 또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다.
14-16절에서 화목하게 함은 파괴적이며 건설적인 행동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이 둘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4가지 표현을 사용한다. ‘자기 육체로’, ‘자기 안에서’, ‘한 몸으로’, ‘십자가로’
이처럼 그리스도는 적대감을 제하시고 파괴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셨다. 이는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됨, 연합은 이 서신의 주요 주제이다. 14-18절에서 4번의 확언이 이루어진다.
둘로 하나를 만듬(14절)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음(15절)
이 한 몸안에서 그들 둘을 화해시킴(16절)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음(18절)
화목, 화해는 ‘아포카탈라쏘’라는 단어이다. 신약에서 각각의 화해에 관한 단락의 초점은 서로 다르다. 롬 5:10-11에서는 하나님과 죄인간의 화해에 초점을 맞춘다. 고전 5:18-21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우리(세상)를 화목케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다. 골 1:20-21에서 하나님은 자신과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화목케하신다. 엡 2:16에서는 두가지의 화해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화해이다. 하나님은 화목케하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화목케되어지는 존재들이다.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가 화목케하신다. 이 일의 주도권은 항상 하나님께 있다. 십자가는 사람들과 그분 자신과 화목케하기위한 하나님의 행동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노하심에도 그분은 사랑하시고 관계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이 화목의 결과는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나아감의 의미는 왕께 나아감이나 성전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역할을 감당하고 계신다.
Reconciliation. This passage is one of the few that discuss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which focuses on the restoration of broken relations. In the New Testament this language appears only in Paul’s letters, and then only infrequently.46 The verb to “reconcile” (apokatallasso) does not occur prior to Paul’s use, and in the New Testament appears elsewhere only in Colossians 1:20 and 22.47 In each reconciliation passage the focus is different. Romans 5:10–11 focuses on reconciliation between God and sinners who are enemies. In 2 Corinthians 5:18–21 God reconciles us/the world to himself and gives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In Colossians 1:20–21 God reconciles to himself all things on earth and in heaven. In Ephesians 2:16 a double reconciliation occurs—that between God and humanity and that between Jews and Gentiles.
In New Testament texts, God is always the one who does the reconciling. Human beings are reconciled; God (or Christ) reconciles. The initiative always lies with God. The cross is God’s act to reconcile people to himself, not an act by which he is reconciled. Even when people are hostile to God and God is angry, he loves and works to restore relations.
46 See Romans 5:10–11; 11:15; 2 Corinthians 5:18–21; Ephesians 2:16; Colossians 1:20–22. Still, Ralph Martin considers it the center of Paul’s theology. See “Center of Paul’s Theology,”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eds. Gerald F. Hawthorne and Ralph P. Martin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1993), 92–95; see also his Reconciliation: A Study of Paul’s Theology (Atlanta: John Knox, 1981); Peter Stuhlmacher, “Jesus as Reconciler, Reflections on the Problem of Portraying Jesus Within the Framework of a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conciliation, Law, and Righteousness, 1–15.
47 Paul may have coined the word; other Pauline texts use the verb katallasso and the noun katallag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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