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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While he was still speaking, there came from qthe ruler’s house some who said, “Your daughter is dead. Why rtrouble sthe Teacher any further?” 36 But overhearing5 what they said, Jesus said to qthe ruler of the synagogue, “Do not fear, only believe.” 37 And he allowed no one to follow him except tPeter and James and uJohn the brother of James. 38 They came to the house of the ruler of the synagogue, and Jesus6 saw a commotion, people weeping and wailing loudly. 39 And when he had entered, he said to them, v“Why are you making a commotion and weeping? The child is not dead but wsleeping.” 40 And they laughed at him. But he xput them all outside and took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and those who were with him and went in where the child was. 41 yTaking her by the hand he said to her, “Talitha cumi,” which means, “Little girl, I say to you, zarise.” 42 And immediately the girl got up and began walking (for she was twelve years of age), and they were immediately overcome with amazement. 43 And ahe strictly charged them that no one should know this, and told them to give her something to eat.
q ver. 22
r Luke 7:6
s See John 11:28
5 Or ignoring; some manuscripts hearing
q [See ver. 35 above]
t ch. 9:2; 14:33
u ch. 3:17
6 Greek he
v [Acts 20:10]
w John 11:4, 11
x Acts 9:40
y See ch. 1:31
z Luke 7:14, 22; [Matt. 11:5; John 11:43]
a ch. 9:9; See Matt. 8: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막 5:35–43.

35절) 예수님께서 앞서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그녀에게 평안히 갈 것을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했다. “당신의 딸이 이미 죽었는데 어째서 예수를 괴롭게 하십니까?” 이것은 헛수고 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야이로의 딸을 만나러 가시는 도중에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다. 이 과정을 여러 사람들이 보았고 야이로 또한 이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딸의 회복과 구원을 원하고 있었는데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는 주님을 보시면서, 그녀의 병을 고치셨을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주님을 보며 희망과 기대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 무리들이 나아와 자신의 딸이 죽었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처음 야이로가 찾아왔을때 아직 아이가 죽은 상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님이 가시는 도중에 아이가 죽었고 그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이 과정속에서 에수님께서 회당장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앞선 이적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러한 상황속에서 믿는 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안내하고 있다. 

36절) 이를 우연히 들으신 주님께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소망없는 상황가운데서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이를 믿을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는 소망이 없고 상황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The first verb can mean either “ignoring” (NIV, RSV), “paid no attention to” (GNB), or “overhearing” (NRSV, NEB, REB, NASB). The question arises whether Jesus rejected the report as false or whether he urged the ruler to believe despite his daughter’s death. The matter is tied up with the meaning of the verb “to sleep” in v. 39. If it is a euphemism for death, Jesus was not telling the ruler to believe that his daughter had not died (v. 36). The best explanation is that Jesus overheard what the messengers said and accepted the reality of the child’s death but that he refused to accept the finality of death. Though he did not tell the ruler how the crisis would end, Jesus urged him to believe that all would end well. In any event the necessity of faith is emphasized. Mark’s account demonstrates the power of Jesus in hopeless situations.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94.

37절) 베드로야 야고보와 요한은 제자들중에 좀더 주님께서 아끼시고 가까이 두셨던 제자로 특별한 순간에 이들만을 가까이 두셨었다. 
Peter, James, and John constitute the so-called “inner circle” of the disciples (also at 9:2; 14:33; with the addition of Andrew at 13:3). Jesus’ desire for privacy is connected with other miracles (7:33; 8:23).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94.

38절) 회당장의 집은 이미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서 소동하며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고 있었다. 당시에 장례식에는 이처럼 곡하는 이들을 고용했다. 가장 가난한 이들조차 적어도 2명이상의 피리부는 자들과 한명이상의 곡하는 이들을 고용했다. 이 회당장은 이처럼 가난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더 많은 이들을 불렀을 것이다. 

39절) 예수님께서는 이 소동하며 곡하는 이들을 향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소녀에 대해서 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깊은 잠, 코마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성경은 죽은 것에 대해서 잔다라고 완곡하게 표현한다.(요 11:11-14; 고전 15:51; 살전 4;13-15) 이처럼 소녀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예표이다. 
The verb “to sleep” could refer to literal sleep or, in this case, the deep sleep of a coma. In such case the child was not dead, and the miracle consisted of bringing her out of the coma—no small feat in itself! The verb is also used metaphorically to refer to death (e.g., John 11:11–14; 1 Cor 15:51; 1 Thess 4:13–15), and that is almost certainly the meaning here. The family and friends were unlikely to mistake a coma for death. Furthermore the verbs translated “get up” in v. 41 and “stood up” in v. 42 are often used with reference to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of Christians. Almost certainly Mark wanted his readers/hearers to see in the resurrection of the girl a preview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ian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94.

40-42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곡하는 이들은 믿지 못하고 비웃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믿지 못하는 이들을 다 내보내시고나서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아이에게로 나아가셨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셨다. 이는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의미이다. 지금 이 말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의식법에 의하면 시체를 만지면 더럽혀진다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께는 적용될 수 없었다. 도리어 예수님이 시체에 손을 대시자 그 시체가 살아난 것이다. 마가는 특별히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팔레시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아람어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였다. 예수님의 대부분의 가르침과 설교는 아람어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이것이 성경으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헬라의 필사가들이 마가복음에 나오는 아람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가는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Touching a corpse made Jesus ritually unclean, but this was of no consequence to him. Mark and the oral tradition before him valued and preserved the Aramaic words Jesus used on this momentous occasion. Four instances of this are in Mark (also 7:34; 14:36; 15:34), more than in any other Gospel and something that may indicate the primitiveness of Mark. Since the return from the Babylonian exile, Aramaic had been the language of the common people in Palestine. Jesus probably did most of his preaching and teaching in Aramaic. Therefore most if not all of his words in the Greek Gospels are a translation, and this fact is part of the reason the Gospels quote Jesus differently. Because Aramaic was not understood by Greek-speaking copyists of Mark’s Gospel, the textual witnesses vary in their reading at this point. Mark interpreted the Aramaic by using a Greek word that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is used in connection with the resurrection of Jesus and Christians (as is also the word “live” in v. 23). The resurrection of the girl is therefore a preview of the resurrection of believer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95.

43절)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난 이 사건에 대해서 함구하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이 이적의 목적이 자신이 환호와 갈채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이 소녀가 실제로 살아난 것을 보여주며 주님은 이렇게 실제적인 필요를 보시고 이를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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