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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belief of the People
When Jesus had said these things, he departed and hid himself from them.
37 Though he had done so many signs before them, they still did not believe in him, 38 oso that the word spoken by the prophet Isaiah might be fulfilled:
p“Lord, who has believed what he heard from us,
and to whom has the arm of the Lord been revealed?”
39 Therefore they qcould not believe. For again Isaiah said,
40 r“He has blinded their eyes
and shardened their heart,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turn,
and I would heal them.”
41 Isaiah said these things because the saw his glory and uspoke of him. 42 Nevertheless, vmany even of the authorities believed in him, but wfor fear of the Pharisees they did not xconfess it, so that they would not be xput out of the synagogue; 43 yfor they loved the glory that comes from man more than the glory that comes from Go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12:36–43.

37절) 많은 이적을 주님께서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이것은 요한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38-40절)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다라고 답변한다. 여기서 인용한 이사야서의 본문은 사 53:1과 6:10이다.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결국 여기서 질문은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있다. 하나님께서 믿게 허락하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출애굽당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물론 본문속에 바로가 주체적으로 완악해졌다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the issue of the hardening of Pharaoh’s heart, including the apparent conflicting passages of Exod 4:21 (where God is said to have hardened Pharaoh’s heart) and 8:15, 32 (where Pharaoh is said to have hardened his heart).
 Gerald L. Borchert, John 12–21, vol. 25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2), 64.
이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로 환원된다. 주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선포하실때 이를 많은 유대인들이 들었다. 이 말씀을 들은 이들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었고 어떤 이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러한 결과가 하나님의 주권속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자유의지로 언제든지 변경 가능하다고 볼 것인지?? 대답하기 쉽지 않다. 여하튼 주님의 일하심과 영광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Building a kind of proof text from verses in Isaiah 6 and 53 after the manner of Paul’s earlier and larger construct in Rom 3:10–18, the   p 64  Johannine evangelist formulated his rationale concerning the problem of Jewish unbelief. It was not a simple answer. But like other difficult questions that perplex the mind, the answer for John lay hidden in the mysterious nature of God.83 For example, Jesus never really supplied the answer to the disciples’ perplexing question of theodicy as it applied to the blind man (9:2), but he dealt with the blind man’s problem. Pondering the answer here may not be satisfying to the human-oriented mind-set because it seems on the surface to blame God. After all the hina at 12:38, usually translated by the vague “to” or “to fulfill” in many English translations, certainly seems to carry the purposive or telic sense of “in order that,” despite attempts to argue result or some other solution that would seek to avoid blaming God for the problem.84
83 For a controversial view of the issues related to God and the problem of evil see E. F. Tupper, A Scandalous Providence (Macon, Ga.: Mercer, 1995), in which he argues for limits on God’s activity.
84 See, for example, J. Painter, “Eschatological Faith in the Gospel of John,” Reconciliation and Hope (Exeter: Paternoster, 1974), esp. at pp. 46–47.
 Gerald L. Borchert, John 12–21, vol. 25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2), 63–64.

41절)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의 배경은 이사야서 6장이다. 이사야가 성전 가득한 영광을 보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을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사 6:8-13, 개정)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42-43절) 관원중에도 예수를 믿는자가 많았지만 바리새인들의 출교의 압박때문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결국 경계선에 있는 신자들의 경우에 이러한 출교의 압박, 자신의 명성의 실추, 경제적인 문제, 공동체로부터의 분리등 다양한 실질적인 어려움이 존재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제자됨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값은 결코 작지 않다. 

결국 이 시대에도 이 문제는 동일하게 작용한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긴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가? 내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는 과연 무엇을 더욱 가치롭게 말하고 있는가? 이시대의 가치관도 결국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신앙을 가리고, 우리의 선택을 방해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주님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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