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9 gKnow this, my beloved brothers: let every person hbe quick to hear, islow to speak, jslow to anger; 20 for the anger of man does not produce the righteousness of God. 21 Therefore kput away all filthiness and rampant wickedness and receive with lmeekness the implanted word, mwhich is able to save your souls.

22 But be ndoers of the word, and not hearers only, deceiving yourselves. 23 For if anyone is a hearer of the word and not a doer, he is like a man who looks intently at his natural face in a mirror. 24 For he looks at himself and goes away and at once forgets what he was like. 25 But the one who looks into the perfect law, othe law of liberty, and perseveres, being no hearer who forgets but a doer who acts, phe will be blessed in his doing.

26 If anyone thinks he is religious qand does not bridle his tongue but deceives his heart, this person’s rreligion is worthless. 27 Religion that is pure and undefiled before God the Father is this: sto visit torphans and widows in their affliction, and uto keep oneself vunstained from the world.

g 1 John 2:21

h [Eccles. 5:1, 2]

i Prov. 10:19; 17:27

j See Prov. 14:29

k Col. 3:8

l ch. 3:13

m 1 Cor. 15:2; Eph. 1:13

n Rom. 2:13; [ch. 2:14–20; Matt. 7:21, 24–27; Luke 8:21; John 13:17]

o ch. 2:12; [Gal. 2:4; 5:1, 13; 1 Pet. 2:16; 2 Pet. 2:19]; See John 8:32

p Ps. 1:1, 2; Luke 11:28

q ch. 3:2, 3; Ps. 39:1; [ch. 3:6; Ps. 34:13; 141:3]

r Acts 26:5

s Matt. 25:36

t Job 31:17, 18; Isa. 1:17, 23

u 1 Tim. 5:22; 1 John 5:18

v 2 Pet. 3: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19–27.

 

19-20절) 성급한 말과 통제되지 않은 분노에 대해서 경고하기전에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그들을 호칭한다. 야고보서 전체를 통해서 야고보는 새로운 주제로 전환하면서 ‘내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야고보는 혀를 잘못 놀리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잠언에서는 말의 중요성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잠 10:19, 개정)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1:12, 개정)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 15:1, 개정)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7:28, 개정)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이 반대로 한다는 것이다. 듣는 것이 부족하고 말은 심사숙고하지 못하고 성급히 하며 성내기에 급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난폭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사람이 성내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내고 분노하는 것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정당한 분노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이 성내는 것 말하자면 성급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이기적은 분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다. 그래서 그의 백성에게 그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기를 요구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선포되는 바울 법적이거나 변론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구약과 예수님이 사용하신 용법에 더 가깝다.

God is holy and righteous, requiring that his people emulate his righteous character (e.g., Lev. 19:2; Matt. 5:48; 1 Pet. 1:16). “Righteousness” here is not Pauline legal or forensic righteousness proclaimed in God’s court of law (e.g., see notes on Rom. 3:20; 5:10) but is closer to the usage of the OT (Isa. 61:3) and Jesus (Matt. 3:15; 5:6, 10, 20; 6:1, 33; 21:32), in the sense of conducting one’s life by the will of God, according to his standard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2.

 

  • 여기에서 하나님의 의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의 의를 해석하는 세 가지 주요한 견해가 있다. 첫째, 이 말은 속격인 테우(theou, ‘하나님의’)를 주격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의로운 지위(신분)’를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의’ 이해는 바울서신에서 잘 입증되며(특히 빌 3:9), 야고보는 2:14–26에서 ‘의’라는 명사와 동족어인 ‘의롭게 하다’는 동사를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의’라는 단어를 ‘정의’(justice, NEB 참조)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의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신 심판의 수단이기 때문에 사람의 성냄이 어느 정도 허용된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셈이다(이 경우에 속격 테우는 아마도 소유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 이해는 70인역에서 흔히 발견될 뿐만 아니라, ‘의를 이룬다’(행한다)는 말이 히브리서 11:33에서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었다(RSV). 셋째, 속격 테우를 목적격의 속격으로 해석하여, ‘의’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로운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다. 의를 ‘행한다’(포이에오, poieō) 또는 ‘이룬다’(에르가조마이, ergazomai)는 말은 성경 헬라어에서 늘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에르가조마이의 경우 시 15:2; 행 10:35; 히 11:33를 보라). 이들 중에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데, 특히 야고보가 ‘의’를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앞에서 말한 첫째 견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유일한 용례가 창 15:6의 인용구 안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의를 행한다’는 말은 2:9의 ‘죄를 행한다’는 말과 정면으로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경솔하고 조절되지 않는 분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신 행위기준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죄이다. 아마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70인역에서 ‘행하다’(에르가조마이)와 ‘의’가 유일하게 함께 나오는 시편 15:2은 말(언어)의 죄와 연관된다.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17–118.

 

21절)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의 마음은 항상 무언가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새로와지기 위해서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그릇의 크기를 키우거나 혹은 무언가를 덜어내는, 버리는 과정이 선행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듣고 받아도 의미없이 버려지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한다. 

(롬 13:12, 개정)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엡 4:22, 개정)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골 3:8, 개정)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본문의 심어진 말씀은 신 30:14과 렘 31:33을 떠올리게 한다. 

(신 30:14, 개정)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렘 31:33, 개정)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새 언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렇게 우리에게 심겨진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수 있다. 여기서의 구원은 점진적 성화와 마지막 날에 있을 구원 사역의 완성을 가리킨다. 

Put away all filthiness pictures the stripping off of dirty clothes (cf. Rom. 13:12; Eph. 4:22; Col. 3:8) based on a desire to have nothing to do with the dirt (here, moral evil) ever again. In place of filthy behavior, the implanted word must take root in God’s people. This idea of God planting his revealed truth reflects Deut. 30:14 (“the word is very near you. It is in your mouth and in your heart”) and especially the new covenant of Jer. 31:33 (“I will put my law within them, and I will write it on their hearts”). Save your souls refers here to progressive sanctification and ultimately the completion of God’s saving work on the last da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2.

 

22-25절) 행함이 없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반면에 행함으로 귀결되는 말씀을 들음은 축복이다.

(롬 2:13, 개정)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자기기만의 죄를 짓게 된다. 복음이 본래 구원하는 능력과 순종에 대한 요청을 모두 포함한다면 한쪽으로만 관계를 맺는 사람은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고 야고보가 밝힌 이유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 공부에 참여하거나 성경을 읽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들음이 순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실제(참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앎)의 어머니이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22–123.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이후에 그 모습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이처럼 행하는 이는 그 행하는 일로 복을 받을 것이다. 

 

25절을 번역함에 있어서 한글 성경은 간직하다, 유지하다라는 표현이 생략되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간직하는 자는 듣고 잊는 자가 아니요 행하는 자니 그는 그의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들여다보고 간직하는, 유지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바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묵상하고 되뇌이고 간직함으로 행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약 1:25, 새번역)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⑦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 ⑦'행한 일로'로 번역할 수도 있음』

 

말씀, 진리의 복음을 듣고도 아무것도 행하지 않을 수 있다. 본문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의미하는데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롬 7:12) 하지만 그 율법 자체로는 죄로 가득한 인간으로하여금 그 율법에 순종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을 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율법은 복음의 말씀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과 함께 갈때 자유의 법이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을 쳐다보고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혹은 옷에 티가 묻었는데도 이를 떼어내지 않고 돌아갈 수도 있고 이를 자세히 살펴보아서 티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In James, the “law” and the “word” are two different ways of describing the same reality. Earlier, the “word of truth” (1:18) is the gospel of Christ, and the “law” here refers to the OT law as it has been interpreted and fulfilled in Christ. Though the OT law was “holy and righteous and good” (Rom. 7:12), it had no power by itself to enable sinful people to conform to it. Thus, the OT law did not liberate God’s people but enslaved them, as Paul taught (Gal. 3:10–4:7; cf. Rom. 2:1–3:20; 5:20; 6:14–15; 7:1–25). But the law is one of “liberty” when it comes along with the word of the gospel and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to change hearts. See also note on James 2:1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3.

 

  • 본문을 볼 때, 24절의 ‘잊어버리는 것’과 25절의 ‘간직하다’(remaining) 간의 대조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개역개정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율법을 들여다 본다’는 말 뒤 원문에는 ‘간직하다’라는 말이 있다-역자 주). 이러한 강조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와 대조되는 25절 끝 부분에 다시 나타난다. 이는 야고보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효력이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임을 설명하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은 고작 머리를 빗으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정도 밖에는 말씀으로부터 어떤 지속적인 효력을 얻지 못한다. 이와 달리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간직하는’(파라메이나스, parameinas) 자인데, 이 말은 말씀을 계속 행한다는 뜻이거나(NIV) 또는 계속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GNB)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말씀을 행하는 자는 행동을 통해서 말씀이 자신의 삶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도록 한다는 것이다.

  •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 GNB Good News Bible: Today’s English Version, 1976.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24.

 

26-27절) 야고보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첫번째로 자기의 혀를 재갈 물려서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이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기에 듣고 행하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고아와 과부(딤전 5:3-16, 신 10:18, 사 1:17, 렘 7:5-7)로 대변되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 

세번째로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야고보는 여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야할 참된 예배, 경건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야고보는 종교가 무엇인지 전반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언급하는 것이 빠진 종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들려지지 않으면 행해질 수없다. 하지만 여기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들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행함은 소홀히 여기는 태도이다. 

 

야고보는 말씀을 듣고 이를 행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초대교회가 그러 했던 것처럼 지금의 교회도 듣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듣되 그것을 간직하며 실천하지 않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경건한 삶이 무엇인지 알지만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 않고 주변의 고통당하는 자들을 외면하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들이 아닌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