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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at the proper time manifested in his word3 ithrough the preaching jwith which I have been entrusted kby the command of God our Savior;
To Titus, lmy true child in ma common faith:
nGrace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Savior.
h See 1 Tim. 2:6
3 Or manifested his word
i [Rom. 10:14]
j See 1 Tim. 1:11
k 1 Tim. 1:1
l See 3 John 4
m Jude 3; See 2 Pet. 1:1
n See 1 Tim.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딛 1:3–4.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딛 1:3–4.
 
3절) ‘때에’로 번역된 ‘카이로스’는 앞서 2절에서 사용된 ‘크로노스’, 즉 연대기적인 시간이 아닌 ‘결정적 시점, 적시, 기회’를 의미한다. 이는 어떤 특정한 일이 발생하는 결정적 시기로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존재하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때’는 구속사의 흐름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때, 사건을 의미한다. 갈 4:4에 ‘때가 차매’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곳에서의 때가 카이로스가 아닌 크로노스로 표현되었지만 예수님의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연대기적 크로노스가 다 찬 때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즉 하나님이 때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구원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전도’, 즉 ‘케리그마’이다. 이 표현은 ‘이미 일어났거나 다가올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담은 사자로서의 공적 선포,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과 관련된 메시지’를 의미한다(마 11:1; 막 1:38-39; 3:14). 즉 전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도 케리그마에 해당한다. 
‘나타내셨으니’로 번역된 ‘에파네로센’은 ‘파네로오’의 부정 과거형이다. ‘파네로오’는 ‘알게하다, 나타내다, 현현하다, 즉 감추여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백하게 눈에 보이게 하다’라는 의미이다.(막 4:22; 요 2:11; 고후 2:14; 엡 5:13; 계 2:18) 주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을 말할 때 쓰였다.(딤후 1:1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가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것인데 이것이 부정 과거 동사로 벌써 이러한 나타남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 나타남의 방법이 바로 전도, 케리그마이다. 
 
 
 
일반적으로 바울은 그의 서신 도입부에 ‘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우리 구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유다서와 바울의 목회 서신에서만 등장하는 표현으로 성부 하나님(딛 2:10; 3:4; 딤전 1:1; 2:3)을 가리키기도 하고 성자 하나님(딛 1:4; 3:6; 딤후 1:10; 유 1:25)을 가리킨다. 본 3절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명하신 대로’로 번역된 ‘카트 에피타겐’으로 이것의 원형은 ‘에피타게’인데 ‘명령, 지령, 계명, 권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이 표현이 명령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는 명령을 내린 자의 권위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바울 사도에게 맡기신 명령이 신적 권위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맡기신 것이라’로 번역된 ‘에피스튜덴’은 ‘믿다, 신뢰하다, 확신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피스튜오’의 수동태 부정 과거형이다. 따라서 ‘에피스튜덴 에고’는 ‘나는 신뢰를 받았다, 위탁을 받았다’라는 뜻인데 이를 능동태로 바꾸면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바울을 신뢰하사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동사 ‘피스튜오’는 ‘믿다, 신뢰하다’라는 의미와 위탁받은 상태 즉 ‘자신이 관리하도록 맡겨진 어떤 것의 수령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πιστεύω (pisteuō), 동사. 믿다, 맡기다. 미래 능동태. πιστεύσω; 부정과거 능동태. Ἐπίστευσα; 완료 능동태. πεπίστευκα; 부정과거 수동태. ἐπιστεύθην; 완료 중간태. πεπίστευμαι. 히브리어 등가: אמן 1 (36), שׁמע (1).
동사 용법
1. 예수를 신뢰하다 — 복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를 신뢰하는 것
요 3:16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
요 5:44 πῶς δύνασθε ὑμεῖς πιστεῦσαι, δόξαν παρʼ ἀλλήλων
살후 1:10 καὶ θαυμασθῆναι ἐν πᾶσιν τοῖς πιστεύσασιν,
벧전 1:8 πιστεύοντες δὲ
벧전 2:7 τοῖς πιστεύουσιν·
2. 믿다 (받아들이다) — 사실로 받다; 진실로 받아 들이다. 의미상 반의어: 믿지 않다. 관련 주제: 자신감; 대담함; 믿음; 신뢰; 기독교; 개종자; 믿음.
막 16:13 οὐδὲ ἐκείνοις ἐπίστευσαν.
요 5:47 εἰ δὲ τοῖς ἐκείνου γράμμασιν οὐ πιστεύετε,
약 2:19 σὺ πιστεύεις ὅτι εἷς ἐστιν ὁ θεός;
요일 5:1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ὅτι Ἰησοῦς ἐστιν ὁ
요일 5:10 ὅτι οὐ πεπίστευκεν εἰς τὴν μαρτυρίαν ἣν
3. 맡기다 — 누군가의 돌봄이나 보호에 들어가게 하다. 관련 주제: 보증금; 위임하다.
눅 16:11 τίς ὑμῖν πιστεύσει;
요 2:24 αὐτὸς δὲ Ἰησοῦς οὐκ ἐπίστευεν αὑτὸν αὐτοῖς
4. 믿다 (신뢰) — 믿음을 갖다; 어떤 것을 신뢰하다 의미상 반의어: 불신하다. 관련 주제: 자신감; 대담함; 믿음; 신뢰; 기독교; 개종자; 믿음.
막 16:16 ὁ πιστεύσας καὶ βαπτισθεὶς
요 3:12 καὶ οὐ πιστεύετε, πῶς
약 2:23 Ἐπίστευσεν δὲ Ἀβραὰμ τῷ θεῷ,
요일 3:23 ἵνα πιστεύσωμεν τῷ ὀνόματι τοῦ υἱοῦ αὐτοῦ
요일 5:10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τὸν υἱὸν τοῦ θεοῦ
5. 위탁 받은 (상태) — 자신이 관리하도록 맡겨진 어떤 것의 수령인이 되다. 관련 주제: 보증금; 위임하다.
롬 3:2 ὅτι ἐπιστεύθησαν τὰ λόγια τοῦ θεοῦ.
고전 9:17 εἰ δὲ ἄκων, οἰκονομίαν πεπίστευμαι.
갈 2:7 πεπίστευ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ῆς ἀκροβυστίας καθὼς Πέτρος
살전 2:4 καθὼς δεδοκιμάσμεθα ὑπὸ τοῦ θεοῦ πιστευθῆναι τὸ
딛 1:3 ὃ ἐπιστεύθην ἐγὼ κατʼ ἐπιταγὴν τοῦ σωτῆρος
6. 믿다 (수용하다) — 사실로 수용하거나 그렇게 되다; 사실이라고 받다. 관련 주제: 자신감; 대담함; 믿음; 신뢰; 기독교; 개종자; 믿음.
살후 1:10 ὅτι ἐπιστεύθη τὸ μαρτύριον ἡμῶν ἐφʼ ὑμᾶς,
딤전 3:16 ἐπιστεύθη ἐν κόσμῳ,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완료 능동태. 완료 능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완료 중간태. 완료 중간태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1:3 Paul now moves from eternity past to the manifestation in time and history of God’s promise. φανερόω (PE* 3x: also in 1 Tim. 3:16; 2 Tim. 1:10; here ἐφανέρωσεν) means “reveal, make known, show.” Here what is revealed is τὸν λόγον αὐτοῦ, God’s message. There is a slight but understandable shift from the “eternal life” promised by God, referred to in the preceding verse, to “his word” here. According to 2 Tim. 1:10 (eternal) life is brought to light through Christ’s work. But since eternal life is unseen and still in the future for believers, God makes known the truth about eternal life in what is called here τὸν λόγον αὐτοῦ, which in the analogous passage 2 Tim. 1:10 is said to take place διὰ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It would appear, therefore, that “his word” here should be understood as the gospel message (cf. the same correlation in Eph. 1:13; Phil. 1:12, 14; Col. 1:5).
This manifestation was made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which may be rendered “at the proper time” (see comments on 1 Tim. 2:6; 6:15). God has determined the time of the manifestation (cf. Gal. 4:4; Rom. 5:6; see Lock).
Paul adds to τὸν λόγον αὐτοῦ the words ἐν κηρύγματι, “in proclamation” or “in preaching,” thus, as elsewhere, carefully linking the essence of the gospel message to the apostolic communication of that message (cf. the closely analogous passages 2 Tim. 1:10–11; Rom. 16:25ff.). He says thereby not only that God has manifested the content of the gospel message but also that he has done so in and through the apostolic proclamation (ἐν with the dative to express manner or means).
Paul was “entrusted” with this task of “proclamation” (cf. 2 Tim. 1:10–11). Here he adds ἐγώ, “I,” for emphasis, since he always remains amazed that he, who had been the gospel’s arch-opponent, should be entrusted by God’s wondrous grace with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5 of 7x in the PE* ἐγώ is used of this event: here; 1 Tim. 1:11, 15; 2:7; 2 Tim. 1:11; the other 2 are related to Paul’s activity as an apostle: Tit. 1:5; 2 Tim. 4:6). A passive form of πιστεύω with the meaning “be entrusted with something” occurs 6x in Paul and nearly always refers to his being entrusted with the gospel and its proclamation (1 Cor. 9:17; Gal. 2:7; 1 Thes. 2:4; 1 Tim. 1:11; here; the one exception is Rom. 3:2).
κατʼ ἐπιταγήν (see 1 Tim. 1:1) is used here with the meaning “in accordance with the command,” which BAGD suggest is equivalent to “by command.” Paul wants to make plain that his being entrusted with the gospel, i.e., his apostleship (see 1 Tim. 1:1), did not originate from humans (see Gal. 1:1, 11, 12) but is an “order” or “injunction” from God himself. Thus Paul refers in several of his salutations to this action of God, using ἐπιταγή (here and 1 Timothy) or θέλημα (1 and 2 Corinthians, Ephesians, Colossians, and 2 Timothy) with θεοῦ, or by directly repudiating any human agency (Galatians).
Here and in 1 Tim. 1:1 (see the comments on that verse) Paul adds to θεοῦ the designation τοῦ σωτῆρος ἡμῶν, “our Savior.” He may do so because the readers of these two letters needed to be reminded that the one who has entrusted Paul with the gospel is indeed their Savior, so that this awareness might shape their thinking and acting as it shapes his (note where Paul refers to God as “Savior” in these two letters: 2:10, 13; 3:4; 1 Tim. 2:3; 4:10; “God our Savior” occurs nowhere else in his letters).
By thus referring to the “proclamation” with which he was “entrusted,” i.e., to his own ministry, Paul returns to the purpose of his apostleship and thus concludes this portion of the salutation by giving further emphasis to that purpose. This clear statement of Paul’s authoritative apostleship and its purpose of furthering the spiritual health and well-being of God’s people provides for Titus the basis for communicating and carrying out Paul’s sometimes forceful demands in this letter. Titus knows all these things, but by writing them to him Paul is making them very clear to those on Crete to whom Paul is ministering by means of this letter.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PE Pastoral Epistles
* all occurrences of the word or phrase in Paul or in the Pastoral Epistles are cited
BAGD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tr. W. F. Arndt and F. W. Gingrich. 2nd ed. rev. and augmented by F. W. Gingrich and F. W. Danker from Bauer’s 5th ed. (1958), Chicago, 1979.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285–286.
 
4절) 바울은 1-3절에서 자신의 사도적 소명에 대해서 기술한다. 즉 이 서신의 발신자된 바울이 누구이며 어떻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나서 이제 본 4절에서는 이 편지의 수신자가 디도임을 밝히고 그에게 축도를 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내용은 딤전 1:2와 딤후 1:2의 축도와 유사하다. 
 
디모데전서 1:2
2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1:2
2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디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졌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같은’으로 번역된 ‘코이넨’의 원형 ‘코이노스’는 ‘일반적인, 공통의, 공유의’라는 의미와 ‘속된, 부정한, 불결한’이란 뜻도 가진다.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로 바울의 믿음과 공통적인 믿음을 가졌음을 밝히는 것이다. 바울의 영적 아들인 디도도 역시 바울과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를 향해 ‘참 아들’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디모데와 오네시모에게도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딤전 1:2; 몬 1:10) 여기 사용된 ‘나의 참’이라는 표현인 ‘그네시오스’는 ‘서출이 아닌, 적법하게 태어난, 진짜의’란 의미의 형용사이다. 디도와 디모데는 바울이 직접 낳은 아들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울이 직접 전도하여 신앙으로 양육한 자이며 바울이 매우 신뢰하고 있는 믿음의 동역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갈 2:3; 고후 2:13; 8:23; 12:18)
디도는 같은 믿음을 따라 바울의 참 아들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서 그레데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디도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왜냐하면 디도는 바울의 참된 영적인 아들로 다른 거짓 선생이나 대적자들과는 다르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한 바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이기에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디도의 권위 또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디도는 사도행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서신에 자주 등장하며 고린도후서에서는 8번이나 등장한다.(고후 2:13; 7:6, 13, 14; 8:6, 16, 23; 12:18; 갈 2:1, 2, 3; 딤후 4:10) 그는 헬라인으로 이고니온에서 바울에 의해 회심한 것으로 추정되며 바울에 의해 그레데 지역의 목회자로 위임되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후 본격적인 전도자로 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바나바와 디도와 동행했었다.(갈 2:1) 이 디도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둘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고(고후 7:6, 7, 13) 바울이 편지 전달 및 헌금 모금을 위해 고린도에 사람을 보내려 할 때 자원하는 등 바울에게 힘이 되어준 동역자였다.(고후 8:16, 17) 이로 보아 바울은 디도를 매우 사랑하고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3절에서도 우리 구주, 4절에서도 우리 구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처럼 디도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는 구주로 세 번(1:3, 2:10, 3:4, 딤전 1:1 및 주석, 2:3, 4:10 및 주석 참조), 예수님 역시 구주로 세 번(1:4, 2:13, 3:6, 딤후 1:10 참조) 불린다. 하나이신 하나님(신 6:4)만이 유일한 구원자(사 43:11, 45:21)라는 구약의 확신을 고려할 때, 바울은 아들을 성부와 같은 신성한 존재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Savior. In the book of Titus, God the Father is called Savior three times (here; 2:10; 3:4; see also 1 Tim 1:1 and note; 2:3; 4:10 and note), with Jesus also called Savior three times (here; 2:13; 3:6; see 2 Tim 1:10). Given the OT conviction that God, who is one (Deut 6:4), is the only Savior (Isa 43:11; 45:21), Paul is likely viewing the Son as divine like the Father.
OT Old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87.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앞서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힌 후에 바울은 이제 디도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여러 서신들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함께 언급한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엡 1:1; 살후 1:2). 성부는 근원이시며 성자는 대행자이시다. 
유다서 25
25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의 서신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밀접하게 연합되어서 양자 모두 동일한 일을 수행하신다. 본 인사말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는 명령을 하시고, 구원자의 역할을 행하시고 축복을 선언하신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를 구한다. 
카리스(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당신의 구원 사역을 한 단어로 요약하는 것으로 구원이 무가치한 죄인에게 베풀어진 값없는 선물임을 강조한다. 이는 바울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으로, 신약에서 154회 사용되는데 100번이 바울서신에서 등장한다. 원래 이 표현은 종교적 함의가 없는 표현이었는데 구약에서 ‘헨’, 호의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인데 바울은 이것을 사용하면서 구약의 ‘헨’보다는 ‘헤세드’(언약적 신실함)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에이레네(평강)은 전쟁의 중지,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하는데 구약에서는 ‘샬롬’으로 표현되어서 적대행위의 외적인 부재와 이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총체적 의미의 안녕을 묘사하는 것이다.
 
1:4 Here Paul indicates to whom (dative) he is writing this letter. Paul’s designation of Τίτος (see Recipients: Titus in the Introduction) as his “true child according to a common faith” is nearly the same as his designation of Timothy in 1 Tim. 1:2 (see the comments on that verse). Here, however, he uses κατά in place of ἐν and adds κοινήν. κατά is merely a stylistic variation. Paul may use κοινός, “common,” to remind Titus, the churches on Crete, and the false teachers “of the circumcision” (1:10; cf. v. 14) that he regards the uncircumcised Titus and himself, a Jew, as sharing the same faith (see Introduction, p. 9; cf. Gal. 2:3–4; 3:7–9, 14, 28–29). Titus, no less than circumcised Timothy, is Paul’s spiritual child in this shared faith.
The greeting “Grace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Savior” so well articulated for Paul the essence of what Christians need, from whom they receive it, and in what capacity the members of the Godhead, who is this source, stand to Christians that he places it, with only minor differences, in the salutation of every letter (see the comments on 1 Tim. 1:2). In 1 and 2 Timothy he adds ἔλεος, “mercy” (for the textual variants in Titus, including those that add ἔλεος, see UBSGNT; TCGNT). Here alone he calls Christ σωτήρ, “Savior,” rather than κύριος, “Lord.” It is as if he anticipates the two crucial theological arguments that undergird his ethical exhortations in chapters 2 and 3, in both of which Christ as Savior is at the center (2:13; 3:6) as the one through whom God’s grace has come to save us and to instruct and enable us in living godly (2:11ff.) and peaceful (3:1ff.) lives.
UBSGNT K. Aland, M. Black, C. M. Martini, B. M. Metzger, and A. Wikgren, The Greek New Testament (United Bible Societies). 3rd ed. corrected, Stuttgart, 1983.
TCGNT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1971.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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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서론  (0) 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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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aul, Silvanus, and Timothy,
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in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a For ver. 1, 2, see 1 Thess. 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1:1–2.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1:1–2.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첫번째 서신에 이어 기록된 두번째 편지이다. 전서와 동일하게 후서에서도 세명의 발신자가 동일하게 등장한다. 
바울은 전서를 기록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했는데 그 때에도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함께 동행했다.(행 18:1, 5) 첫번째 서신 이후 불과 2-3개월 이후에 본 서신이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전히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바로잡고자 후서를 기럭하였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에 대한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단의 무리들로 인해서 많은 이들이 혼란에 빠졌고 그들중에는 재림이 임박했으니 일할 필요가 없다며 무위도식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소식으로 인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울은 기도하며 본 서신을 써서 보낸 것이다. 
 
1절) 실제로 원문에는 편지하노니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발신자 :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
수신자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데살로니가에 있다. 하지만 교회는 건물이 아니기에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를 1절을 통해서 보자면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우리 교회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 나의 주인되신, 반석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에만이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2절) 한글 번역에는 ‘헤몬, our’가 번역되지 않았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그를 믿는 백성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이다.(롬 8:14)  
당시 1세기에는 로마의 황제를 주, ‘큐리오스’라고 칭하며 숭배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며 그분의 뜻을 순종하겠다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은혜와 평강을 구한다.  
은혜(카리스) :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 자녀로 여기시며 용서와 같은 선물을 주시려는 마음,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호의
평강(에이레네, 샬롬) : 전쟁의 중단 또는 부재 하지만 바울은 사람 사이 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 즉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완전한 웰빙을 의미한다. 온전히 카리스, 은혜를 받고 누리는 이가 내면에 누리는 내적인 평화를 지칭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평강은 불가능하다. 죄로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던 이들에게 진정한 샬롬, 에이레네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안에서 인간은 죄로 가득찬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된다.(롬 5:1)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참회록에서 이와 관련해 ‘하나님이여,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영적으로 항상 갈증을 느껴 스스로 터진 웅덩이를 파는 데 몰두하던 자들도(렘 2:13)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에이레네’를 경험하게 되면 더이상 자신을 위해 터진 웅덩이를 파지 않고 하나님을 통해 완전한 부요함을 누리게 된다.(요 7:35) 바울은 이와 같은 축복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와 동일한 문안인사로 후서를 시작하고 있다. 
 
 
1:1–2 The first difference between the salutation of 2 Thessalonians and that of the other letter addressed to the church at Thessalonica is to be found in the qualification of God as πατρὶ ἡμῶν (“our father”). The appellation of God as “our father” is common in the salutations of Paul’s letters and in fact is only lacking in 1 Thessalonians (cf. Rom. 1:7; 1 Cor. 1:3; 2 Cor. 1:2; Gal. 1:3; Phil. 1:2; Col. 1:2; Phm. 3). It reflects Paul’s conception of Christians as forming the family of God in a metaphorical sense and is to be seen alongside those texts where believers are called the children of God (cf. Rom. 8:14–23; Gal. 3:26; 4:4–7).
The greeting of this letter is fuller than that in 1 Thessalonians. But it corresponds to those of every other letter of Paul except Colossians (and possibly Galatians, depending on how the textual evidence is assessed), if ἡμῶν (“our”) in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is part of the original text. The textual evidence is divided fairly evenly on this. Both the presence and the absence of the “our” are explicable in terms of normal rules of textual criticism. A copyist might have added it to conform to the standard greeting of the Pauline letters or omitted it for stylistic reasons since the same wording occurred in the preceding verse. Therefore the precise formula of the original text cannot be decided on with certainty. In any case this is not a significant factor since God has been described already as “our father” in the previous verse.
Trilling (35), who maintains that Paul did not write 2 Thessalonians, claims that the prescript itself provides evidence for his position. He argues that the prescripts of 2 Thessalonians and 1 Thessalonians are more alike than those of any other two Pauline letters and that certain peculiarities of 1 Thessalonians have been preserved in 2 Thessalonians. The unusual features include the naming of three senders (two of whom play no further part in the letter), the naming of the addressees as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not “the church in Thessalonica,” the direct connection of the recipients with God and Christ, and the absence of Paul’s apostolic title. All this for him is a sign of inauthenticity as it reflects borrowing from the first letter in an attempt to create the impression of authenticity. He also believes that the expanded greeting in 2 Thessalonians (v. 2) is awkward because of the mention of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in v. 1. According to Trilling this may show an awareness of the standard greeting of later Pauline letters.
These arguments are questionable. The unusual details of 1 Thes. 1:1 might equally be used to argue for the inauthenticity of the whole of 1 Thessalonians. Moreover, the supposedly striking differences are not as striking as Trilling thinks. In both 1 Cor. 1:1 and Phil. 1:1 Paul associates others with himself in the writing of those letters. In the case of the former, Sosthenes, who is a co-sender with Paul, plays no further role in the letter, and in the case of the latter, Paul does not refer to his apostolic title, perhaps out of deference to his inclusion of Timothy as an sender of the letter. If Paul could address 1 Thessalonians to “the church of the Thessalonians,” there is no reason why he could not have done it a second time. With regard to the supposedly expanded greeting of v. 2, it is just as possible that the greeting of 1 Thessalonians should be viewed as attenuated over against the normal one employed by Paul in 2 Thes. 1:2 and most of his other letters. To the extent that the repetition of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is otiose and awkward in the prescript it would have been so as much for an imitator as for Paul himself, and so this proves very little.
Trilling’s treatment of the prescript must be rejected as an unconvincing attempt at substantiating his thesis regarding the inauthentic nature of 2 Thessalonians. If 2 Thessalonians is inauthentic, the prescript does not provide serious evidence for the thesi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1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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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Silvanus, and Timothy,
To the church of the bThessalonians in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cGrace to you and peace.
a Acts 15:22; 2 Cor. 1:19; 2 Thess. 1:1; 1 Pet. 5:12
b See Acts 17:1
c Rom.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1:1.
 
데살로니가전서 1:1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일반적으로 당시 서신은 인사말, 본문, 결론의 구조를 가진다. 
인사말도 세가지의 기본적인 요소로 구성되는데 첫번째 발신자의 이름 두번째 수신자와 세번째 형식적 인사말이다. 
 
바울이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동역자로 함께 소개하고 있는 이유
If in fact Paul is the real author of 1 Thessalonians, why has he included the names of his fellow workers Silvanus and Timothy in the salutation? Two answers may be given. In the first place, Silvanus and Timothy shared in the missionary work at Thessalonica, and therefore as Paul’s colleagues they had a stake in the development of the church there. Their inclusion as co-senders of the letter thus strengthens the authority of the document by implying unanimity among Paul and his coworkers regarding the situation of the Thessalonians. Doty (Letters, 30) has suggested a second reason. In Hellenistic letters the carrier who was to deliver the letter was often mentioned in order to link him with the writer and thereby “guarantee that what he had to say in interpreting the letter was authorized by the writer.” Since Paul used various colleagues in this way, including Timothy, this may help explain the inclusion of Silvanus and Timothy in the prescript if one or both of them was to deliver the letter (see 3:1–5 on the use of Timothy as an emissary and substitute for Paul’s apostolic parousia or presenc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8.
 
1:1 Opening. Paul makes no mention of his apostolic status, perhaps because there are no false teachers challenging it within the Thessalonian church. Silvanus and Timothy were coworkers with Paul during his second missionary journey. Silvanus, or Silas, was a Judean Christian (Acts 15:22) who joined Paul after he separated from Barnabas (Acts 15:39–40). Timothy, of Lystra in south Galatia, was a son of a Jewish mother and Greek father and became partners with Paul when Paul passed through his hometown early on his second journey (see Acts 16:1–4; Introduction to 1 Timothy). Timothy had just returned from a visit to the Thessalonian church (1 Thess. 3:6), and his report is Paul’s major source of information as he writes. While Silas and Timothy are included as co-senders, Paul was clearly the main author (see 2:18; 3:5; 5:27). in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Believers enjoy a mysterious union with both the Father and the Son and hence are supremely secure and safe from spiritual harm. Grace … and peace. See note on Rom. 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5.
 
특별히 살전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바울의 사도의 지위에 대해서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서신서에서는 바울의 사도성이나 지위, 책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첨언된 반면에 데살로니가서의 경우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이는 그만큼 데살로니가 교인들과의 관계가 안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처음 쓴 서신이기에 그만큼 도전도 적었고 이에 대한 준비도 적었을 것이다. 
In most of his letters Paul begins by identifying himself as an apostle (Rom. 1:1; 1 Cor. 1:1; 2 Cor. 1:1; Gal. 1:1) or as the slave or prisoner of Christ (Phil. 1:1; Phm. 1). The absence of such a self-identification in 1 Thessalonians (and 2 Thessalonians) is therefore noticeable but can perhaps be explained in terms of the situation. In the case of Romans, 1 and 2 Corinthians, and Galatians, Paul’s status and authority were to some degree in question. In the case of Philippians and Philemon the self-description was intended to evoke respect and possibly sympathy from the recipients. Nothing in 1 Thessalonians indicates that Paul’s authority or status was in doubt among his readers, and Paul’s personal situation was certainly not as precarious at the time of writing as it was when Philippians and Philemon were written.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8.
 
- 실루아노 : 실라는 바나바와 헤어진 뒤 바울에게 합류한 유대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실루아노(고후 17:1-9)가 라틴식 이름이라면 실라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행 15:22절에는 실라와 유다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로 소개되고 있다. 실라와 유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안디옥 교회에 대한 사도들의 결정을 담은 서신을 전달하도록 임명된 인물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요한 마가가 2차 선교여행에서 동행할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헤어지고 난뒤에 실라가 바울의 선교팀에 동참하게 된다. 바울은 실라가 앞서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은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선교활동을 위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원을 확실히 하기 모교회와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행 16:37에서 바울은 실라와 자신을 로마 사람으로 묘사한다. 
Acts tells us several other things about Silas that may help explain his role with Paul. After the Jerusalem conference recorded in Acts 15, Silas and a man named Barsabbas, both “leading men among the brothers” at Jerusalem (v. 22), were sent with a letter to the Gentile converts in Antioch, Syria, and Cilicia specifying certain moral and ritual purity practices that the Gentile Christians were to adhere to (vv. 22–34). According to 15:36–41, when Paul and Barnabas fell out over whether John Mark should accompany them on a second missionary journey, Paul took Silas with him. While we are unable to confirm these details from Paul’s own letters, it is not beyond the realm of possibility that Paul took Silvanus along precisely because he was a representative of the mother church in Jerusalem. By doing so he perhaps hoped to ensure the support of Jerusalem for his missionary activity and to emphasize the unity of his work with the mother church.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8–69.
 
사도행전 15:36–41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사도행전 15:22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 디모데 :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초기에 그의 고향을 지나갈 때 동역자가 되었다. 디모데는 남부 루스드라 출신으로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특히 디모데는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를 제외하고 바울 서신의 공동 저자로 이름하고 있다.(고전 1:1; 빌 1:1; 골 1:1, 살전 1:1; 살후 1:1; 몬 1) 뿐만 아니라 디모데전후서의 수신자이다. 
- The name Τιμόθεος occurs in all the letters of the Pauline corpus except Galatians and Ephesians. In six letters Timothy is named as Paul’s co-writer (1 Cor. 1:1; Phil. 1:1; Col. 1:1; 1 Thes. 1:1; 2 Thes. 1:1; Phm. 1). 1 Cor. 4:17 and 16:10; Phil. 2:19–23; and 1 Thes. 3:1–6 make it clear that Timothy served as Paul’s special assistant and emissary to the churches when Paul was unable to be presen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9.
 
 
사도행전 16:1–3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디모데는 유일하게 바울이 직접 할례를 행한 인물로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을 이어받아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영적 아들이 되었다. 
디모데후서 1:5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했다가 방금 되돌아왔고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전해준 인물이었다. 
 
“Silas” (the name consistently used in Acts) is a variant of the longer “Silvanus” (the name used in the rest of the NT, including the Greek text here).3 This Silvanus likely was the same person as the Silas mentioned in Acts who was a trusted leader of the church in Jerusalem (Acts 15:22, 27). He, along with Judas (also called Barsabbas), carried a letter to the Gentile church in Antioch from the Jerusalem church. Both men also were prophets, and they ministered to the church at Antioch (15:32, 34).4 Paul later chose the same man as his companion on the second missionary journey (Acts 15:40). The need to select a missionary companion other than Barnabas resulted from the disagreement between Paul and Barnabas over John Mark. The choice of Silas to fill this role probably was motivated both by his gifts (Acts 15:32) and by the esteem in which he was held by the Jerusalem church. His participation in the Gentile mission might well have given the mission credibility in Jewish circles, where Paul was considered theologically suspect. The narrative of the mission to Greece presents Silas as an equal to Paul but Paul as the main spokesman of the team (Acts 16:19, 25, 29; 17:4, 10, 14–15; 18:5). In addition to these references in Acts, Paul named Silvanus in 1 Thess 1:1; 2 Thess 1:1; and 2 Cor 1:19 as a coworker in the mission in Greece.5
Timothy is a prominent character both in Acts and in the Pauline corpus. He was a resident of Lystra and a member of the church there of whom the believers “spoke well.” As the son of a Jewish-Christian mother and a Greek father (probably a non-Christian), he had not been circumcised (Acts 16:1–3). After being recruited and circumcised by Paul, Timothy remained an associate of the apostle during his evangelization of Greece (Acts 17:14–15; 18:5) and his ministry in Ephesus (Acts 19:22; 20:4). He is named in six Pauline letters as a coworker (1 Corinthians; Philippians; Colossians; 1 Thessalonians; 2 Thessalonians; Philemon). Several times he served as a special emissary from the apostle (1 Cor 4:17; 16:10; Phil 2:19; 1 Thess 3:2, 6).6 In the several letters where he is mentioned, Timothy is accorded the respect of a faithful fellow worker in the gospel and at the same time lauded as a beloved son in the faith to Paul (Rom 16:21; 1 Cor 4:17; Phil 1:1; 2:19–23). He also is the named recipient of two letters.7
3 Silvanus (Σιλουανὸς) may be the Latinized form of the Greek name Silas (Σιλᾶς). Considering that the first mention of the man places him in Jerusalem as a representative of the Jewish Christian church, both names may well have been derived from a Semitic original. See BAGD, s.v. “Σιλουανὸς” and “Σιλᾶς.”
4 V. 34 contains a variant reading explaining that Silas decided to stay in Antioch. The variant is a scribal addition inserted to explain Silas’s presence in Antioch later in the narrative (15:40). See B.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UBS, 1971), 439.
5 Also see B. N. Kaye, “Acts’ Portrait of Silas,” NovT 21 (1980): 13–26.
6 See R. W. Funk, “The Apostolic Parousia: Form and Significance,” in Christian History and Interpretation: Studies Presented to John Knox, ed. W. R. Farmer et 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249–68, for a discussion of the tasks and authority that characterized such apostolic emissaries.
7 See T. D. Lea and H. P. Griffin, Jr., 1, 2 Timothy, Titus (Nashville: Broadman, 1993), 19–53, for a general introduction to matters related to the authorship and the recipient(s) of 1, 2 Timothy.
 D. Michael Martin, 1, 2 Thessalonians, vol. 3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48–49.
 
바울은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 도시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교회를 향해 썼다. 교회(에클레시아)는 어떤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함께 모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는 표현은 데살로니가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원래 이 단어는 총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행 19:32, 39)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무리를 뜻하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이 말의 동의어인 회당(시나고게)는 유대인의 모임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The letter is addressed to the church (ekklēsia). Ekklēsia was not a distinctively Christian word. It means “assembly” and was used of a variety of assemblies in the first-century world—social, political, or religious. Acts 19:32, 39, for instance, identifies as an ekklēsia the gathering of citizens in Ephesus to protest the work of Paul and the church. Ekklēsia is also a synonym for “synagogue” (synagōgē) and was occasionally used of Jewish assemblies in the Septuagint. The early Christian assemblies could have described themselves as ekklēsiai to distinguish their Christian assemblies from the Jewish synagōgai. It seems more likely, however, that ekklēsia was chosen as a word that was both understandable to the Gentile population and at the same time general enough so as not to prejudice the uninformed hearer regarding the character of the assembly.8 In other words, it was not so much separation from the synagogue as access to the Gentile world that made the term ekklēsia useful as a self-designation. Considering the degree of anti-Semitism in the first century Greco-Roman world, it would have been much easier for an inquirer to attend an ekklēsia than a synagōgē.
8 For a more detailed discussion see K. L. Schmidt, TDNT, s.v. “kaleō … ekklēsia.”
 D. Michael Martin, 1, 2 Thessalonians, vol. 3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49–50.
 
 
데살로니가의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의 교회 라 불리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 라고 불린다. 이 것은 바울 서신에서는 드문 표현이다. 바울 서 신에 서 “하나님 안에 있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자랑함( 롬 2 : 17 : 5 : 1 1 ) 이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짐 ( 엡 3 : 9 : 골 3 : 3) 이란 용례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또는 ‘ 주 안에서”는 바울이 사용하는 특징적인 표현이 다. 특히 이 말은 “연합”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또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 다. 만일 이 러한 의미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라는 구절의 의미라면, ‘하나님 아버지 . . . ( 안에 있는) "도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할것이다. 이 것은 바울 서신 의 특징적인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베스트(Best, 62) 는 전치사 ‘ 안에"(낭/1 - 엔) 를 분명히 도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기 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은 기독교 공동체” 라고 해석했다(WBC 62)
 
은혜와 평강
Paul wishes his readers grace and peace, as he does in all his letters. the context does not narrow the meaning of these words, which should therefore be taken in their widest sense. There is a considerable overlap of meaning between them. Grace here means, not physical gracefulness and not a specific favor, but God’s willingness to look upon Christians as his people, and to give them good gifts, such as forgiveness. In secular Greek peace meant the cessation or absence of war, just as it usually does in modern English. Paul, however, uses the term to mean a right and harmonious relationship among men or between men and God, a total well—being which God himself gives. TEV FrCL GeCL NEB, like older translations, retain the traditional nouns, grace and peace.
TEV Today’s English Version
FrCL French common language translation
GeCL German common language translation
NEB New English Bible
 Paul Ellingworth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6), 3.
 
은혜(카리스) :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 자녀로 여기시며 용서와 같은 선물을 주시려는 마음
평강(에이레네, 샬롬) : 전쟁의 중단 또는 부재 하지만 바울은 사람 사이 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 즉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완전한 웰빙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당시 ‘카이레인’이라는 표현이 헬라식의 편지의 서두에 인사말로 쓰였는데 이는 지금으로는 '친애하는(Dear)’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카리스’라는 신학적 표현으로 바꾸었다. 이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신학적인,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낸 것이다. 
In a play on words that produces a uniquely Pauline and distinctively Christian construction, the Greek salutation (chairein) “be glad” or “greeting” (which was stylized at the beginning of Hellenistic letters and had as little content in the first century as “Dear …” has for writers today) was replaced by (charis) “grace.” The Jewish greeting (shalom) “peace” is added in Greek (eirēnē). The combined effect turns a perfunctory “hello” into a theologically meaningful salutation. “Grace” would remind the reader of the goodness of a God who gives blessings even to those who are undeserving and particularly of the preeminent work of undeserved benevolence—the giving of his Son.12 “Peace” reflects the Hebrew wish for wellness and wholeness and ties the grace of the Christ to the foundation of the God of the Jews, the one true God.13
12 See H. Conzelmann, “χαίρω,” TDNT (which contains also a discussion of the Heb. equivalents of charis by W. Zimmerli); C. L. Mitton, “Grace,” IDB, and Holladay, “Grace in the Old Testament.”
13 See W. Foerster, “Εἰρήνη,” TDNT. Included in this article is a brief treatment of shalom by G. von Rad.
 D. Michael Martin, 1, 2 Thessalonians, vol. 3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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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ting

Paul, aan apostle of Christ Jesus bby the will of God,

To the saints who are in Ephesus, and care faithful1 in Christ Jesus:

d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a See 2 Cor. 1:1

b See 1 Cor. 1:1

c Col. 1:2

1 Some manuscripts saints who are also faithful (omitting in Ephesus)

d See Rom.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1–2.

 

1절)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자신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매우 강조했다. 자신의 사역에로의 부름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오직 신적인 부르심에 의하였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전 9:16-17, 개정)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바울은 위의 본문처럼 자신의 의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사도라는 표현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주님의 부활을 본 사람, 교회에서 선교 사역으로 보냄을 받은 자, 좀더 넓은 의미에서 대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도는 자신의 사도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더 강력하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른 어떤 서신에서보다 많이 등장한다. 그 관심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들을 향한 그의 사역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가 사도가 되기를 원하셔서 바울이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An apostle of Christ. Paul’s identification of himself as an apostle appointed by God is his customary way of beginning his letters. (Cf. the exact parallels in 2 Cor. 1:1; Col. 1:1; 2 Tim. 1:1.) Often Paul had to defend his legitimacy as an apostle, but here the tone is merely descriptive. The term apostle carried several connotations in the early church, all of which were true of Paul. It referred to someone who had seen the risen Christ (1 Cor. 9:1), to those sent out by the church with a missionary task, or more broadly to anyone who functioned as an agent or representative. This self-description emphasizes the authority with which Paul wrote. If he was an apostle because of the will of God, what he wrote must be seen as communication from God.

The will of God is an important theme in Ephesians, appearing more frequently here than in any other letter. The concern is not about Christians finding the will of God; rather, the emphasis is on God’s purpose with his actions for humanity. The point here is that Paul was an apostle because God wanted him to b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7.

 

어떤 이들은 이 서신이 회람서신으로 원문에는 에베소라는 명칭이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도시에 가느냐에 따라서 그 부분에 그 도시의 이름을 넣어서 읽었다고 한다.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본문에서 성도라고 표현된 단어는 ‘하기오스’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람, 거룩한 자, 구별된 자라는 의미이다. 본문의 의미는 특별히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로 지명받은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되어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The identification of the recipients as “saints” (lit., “the holy ones”) is Paul’s usual description of Christians. “Saints” is not a helpful translation, for this English word usually refers to extraordinarily pious people. Paul’s first intent was not that these people lived especially holy lives—he described the Corinthian Christians the same way (1 Cor. 1:2), and yet he had no illusions about the sanctity of their lives. Rather, his primary concern was to emphasize that just as he had been appointed by God to be an apostle, they too had been separated to God (separation is the key idea in the word “holy”). Paul’s addressees were holy because God had set them apart to be his people. The focus is entirely on God’s action and the reference is to God’s saving work.1

1 See 1 Corinthians 6:11, where “sanctified” is the verb form of the word “holy.” In the Old Testament both Israelites and angels were sometimes called “holy ones.” Such language was adapted to describe God’s people in the New Testamen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에베소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이다. 성도로서의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문화속에, 사회속에서 살아내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이것에 대한 답을 갖출 필요가 있다. 

This sense of “geography” is important.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fact that Christians live in two places at the same time? Paul’s readers lived both in the region of Ephesus and in Christ. What was the significance for this locale that they were in Christ and what was the significance for Christ that they were in this locale? Each Christian must personalize that question in deciding how to live. We can neither avoid the place where we live nor betray the Christ in whom we live. The rest of Ephesians does not focus on the responsibility of the readers to their locale except in the most general way. Most of the attention will be on the significance of being in Christ for salvation and for life in the Christian community. Both are important, but in applying the text we need to extend the theology. We must also put into practice the significance of being in Christ for relations outside the Christian community.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42.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임하는 것이다. 

 

본문의 인사말을 서신의 전형을 모두 담고 있다.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인사말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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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nd Timothy, servants1of Christ Jesus, 
To all the asaints in Christ Jesus who are at Philippi, with the boverseers2and cdeacons:3
d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1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see Preface
a2 Cor. 1:1; Col. 1:2
bSee Acts 20:28
2Or bishops; Greek episkopoi
c1 Tim. 3:8, 12
3Or servants, or ministers; Greek diakonoi
dRom. 1:7; 1 Cor. 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1:1–2.

이 편지를 바울과 디모데가 쓴다라고 서문은 밝힌다. 물론 바울이 직접 썼을 수도 있고 바울의 말을 디모데가 받아 적는 형태였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디모데 자신이 빌립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빌 2:19-22)

1-2절) 바울과 디모데의 인사말
본문은 바울 서신의 전형적인 인사말에 해당한다. 수신자들(빌립보에 사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을 밝히고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구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특징중에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밝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살전, 후, 빌, 몬 이 4서신에서는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서언에 밝히지 않는다. 다른 서신서들에서는 대부분 자신이 사도임을 힘주어 강조하는데 반해서 본문에서는 자신과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임을 밝힌다. 이는 그가 처음 개척한 이 빌립보 교회에서는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도전이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서신들의 경우와 달리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바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돕고 후원했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강조하고 이를 설득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섬김을 이야기한다. 
감독은 장로들로 회중을 영적으로 돌보는 책임을 맡은 이들을 말하고 집사들은 실제적인 섬김의 일을 맡은 이들을 의미한다. 
Paul, along with Timothy, gives the standard early Christian greeting of graceand peace. Paul does not identify himself as an apostle but designates Timothy and himself as servants. The emphasis on service anticipates the rest of the letter, and this emphasis is seen especially in what is said of the humiliation of Christ Jesus (2:5–11). It is uncertain what level of formal church governance is implied by overseers and deacons. The former are presumably elders, who would be charged with spiritual oversight of the congregation (cf. Acts 14:23 [with note]; 20:17, 28; 1 Tim. 3:1–7; Titus 1:5–9; James 5:14; 1 Pet. 5:1–4), while the latter would be entrusted with matters of practical service (cf. Acts 6:1–7; 1 Tim. 3:8–1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0.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성도(saint, God’s holy people)라고 부른다. 이런 호칭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명칭이었는데 지금 바울이 이방의 회중들을 향해서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God’s holy people.As people who belong to God and are incorporated into his service, they are set apart from the world for him. The OT uses the phrase “holy people” of Israel (e.g., Exod 22:31), so it is striking that Paul can freely apply it to what was probably a predominantly Gentile congregation in Philippi. As Paul emphasizes in ch. 3, those who believe in Christ and are incorporated into him now share in the privileges God bestowed on Israel in the OT. holy.Christ’s death has made Christians holy (Eph 5:25–26).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ch. chapter
OT Old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5.

본문에서 성도들을 묘사하면서 이중적인 신자의 장소를 사용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며 동시에 빌립보에 사는 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느냐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서울에 산다. 동시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면 우리들도 성도가 되는 것이다. 당시 빌립보의 지리적인 위치나 배경과 비교해볼때 로마의 식민지에서 바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표현은 큰 의미가 있다. 

종의 의미
Second, the identification itself, “ ‘slaves’ [douloi]20of Christ Jesus,” anticipates a significant motif of the letter. While “servant,” found in most English translations,21is an acceptable rendering, it also causes the English reader to lose something of its force. For the (basically Gentile) readers of this letter, this word would have only meant “slave.” Indeed, douloiwere so common in Greco-Roman society that no one would have thought it to refer other than to those owned by, and subservient to, the master of a household.22To be sure, the institution of slavery in antiquity23was a far cry from the racial slavery that blighted American society—and the English society that made it possible by the slave trade. Even so, the slave in the Roman Empire was not a free person, but “belonged to” another. Thus, whatever else, the word carries connotations of humility and servitude.
20Altogether this word group appears 59 times in the Pauline corpus: δοῦλος, “slave” (30x); συνδοῦλος, “fellow-slave” (2x); δουλέυω, “to perform the duties of a slave, to serve” (17x); δουλεία, “slavery” (4x); δουλόω, “to enslave” (6x). On the meaning of this word in Paul see, inter alia, K. H. Rengstorf, TDNT2.261–80; H.-G. Link and R. Tuente, NIDNTT, 3.589–98; A. Weiser, EDNT, 1.349–52; Sass, “Bedeutung.”
21Cf. KJV, AV, RSV, NRSV, NIV, GNB, NEB, NAB, JB. Weymouth and the NASB have “bondservants”; Confraternity has “bondsmen.” The latter are attempts to find a middle way between the rather totally negative connotations of “slave,” conditioned as it is by slavery in American history, and the less than servitude connotations in the word “servant.” The latter, to be distinguished from a slave, was designated by the word διάκονος, which appears in the next phrase where it is translated “deacons.” But because the word “slave” often carries the connotation of “servility,” which δοῦλος never does in Paul (so also Vincent, 2), it fares little better than “servant” as an adequate translation into English. Cf. Michael, 2–3.
22Cf. Bruce, 26, who dismisses altogether the possibility of a second connotation (as suggested below).
23Their slavery, which originated with captives from war, became primarily a socioeconomic phenomenon. For overviews of Greco-Roman slavery, see S. S. Bartchy, ABD, 6.65–73, and E. Ferguson, Backgrounds, 56–59; see their bibliographies for more detailed studies.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62–63.

감독들과 집사들
Overseers.49The origin of the word episkoposas a title for one form of leadership in the NT church is shrouded in mystery, and therefore an object of scholarly debate; but there can be little question that in Pauline usage, as with all his designations of church leaders, it first of all denotes a “function,” rather than an “office.”50The first clue to understanding lies with the verb from which it is derived, whose primary meaning is to “visit” in the sense of “looking after” or “caring for” someone.51Thus in the speech in Acts 20:28 Paul is reported to urge the Ephesian elders to “give heed to … the flock, among whom[not ‘over whom’] the Holy Spirit has placed you as episkopoi, so as to shepherd God’s church.”52While one need not doubt the titular implications of this usage, the accent is on function. And in 1 Timothy 3 and Titus 1, although the concern is with character qualifications, even there they are described as those who “care for God’s church” (1 Tim 3:5). The nature of this designation, together with the fact that it occurs in first position,53makes it reasonably certain that those who bore this title held the primary leadership roles in the local church. They were probably responsible for “caring for the people” in most senses of that term, including administration, hospitality, and pastoral care.
Deacons. This is the more difficult term, because Paul uses it in so many different ways. The word itself (diakonos)means “servant,” and this is its most common usage in Paul. He uses it of Christ (Rom 15:8), of government officials (Rom 13:4), of himself (1 Cor 3:5; 2 Cor 3:6), and of his co-workers (1 Thess 3:2; Col 1:7). In each of these cases, as with “overseer,” it is primarily a “functional” term, designating someone who serves others. But in Rom 16:1 Paul uses diakonosto refer to Phoebe in a way that seems very close to a title as well, which is certainly the case here—and in 1 Tim 3:8. From our distance it is nearly impossible to know either what their function was or how they are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overseers,” although it is almost certain that they are. If the functional sense of these terms is also the clue to their titular use, then the “overseers” are probably those who give general oversight to the congregation, while the “deacons” are distinguished by their actual deeds of service.54
49Gk. ἐπίσκοποι, found here and in 1 Tim 3:2 and Tit 1:7 in Paul; cf. Luke’s version of Paul’s “speech” in Acts 20:28. Because of the inherent interest both in the term itself and in early church leadership in general, there is a considerable literature on this term. Among many other items, one should note H. W. Beyer, TDNT, 2.606–22; L. Coenen, NIDNTT, 1.188–92 (further bibliography, 200–201); Lohse, “Entstehung”; J. Rohde, EDNT, 2.35–36; Porter, “ἐπίσκοπος”; Stalder, “Episkopos,” plus the items noted above (n. 43). For an earlier view, still worth reading, see the excursus in Lightfoot, 181–269.
50So esp. in the LXX, where it is altogether a “functional” term. See, e.g., Num 4:16 (ἐπίσκοπος; Eleazar, who was “in charge of” the oil); Num 31:14 (those in charge of the army are called “the ἐπίσκοποι of the forces”); Jdgs 9:28 (Zebul, Abimelech’s “deputy” [v. 28], is the ἐπίσκοπος of the city). In some more recent literature a septuagintal background has been called into question, finding it instead in Greek usage for governmental supervisors or officials in societies; see Reumann, “Contributions,” 449–50 (following E. Dassmann, “Hausgemeinde,” and G. Schöllgen, “Hausgemeinden”). This may well be so, especially since it would have been a convenient term to adopt; but the emphasis is all the more on function rather than on title as such.
51In Greek literature the noun and verb are frequently used to refer to a “god,” whose primary function would be to “care for” people. This usage occurs of Christ in 1 Pet 2:25; cf. 1 Clem 59:3 (of God).
52Lightfoot, 95–99, followed by many others, argued that πρεσβύτεροι (“elders”) and ἐπίσκοποι (“overseers”) are interchangeable terms. While that is true to a degree—they are almost certainly not coterminous—more likely, on the basis of the evidence in the Pastoral Epistles, “elder” is the broader term that included all people in leadership, including “deacons” (see Fee, 1 Timothy, 78).
53Both here and in 1 Timothy. This is further confirmed by the fact that by the second c. it had become the primary title for local, apparently area-wide, leaders. The translation “bishop” derives from this latter usage and should never be used, since it has altogether misleading implications for this plural, which refers to local leaders of some sort.
54All of this acutely raises the question of translation, so as not to mislead. Do we use “titles” (such as “deacon” has become in English) or “functional” equivalents, such as “helpers” (as GNB)? The latter would seem preferable, although it is also bland, considering the “servant” implications of the word.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68–69.

은혜와 평강(카리스와 에이레네)를 비는 것은 바울의 전형적인 인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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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a prisoner for Christ Jesus, and bTimothy our brother, 
To Philemon our beloved fellow worker and Apphia our sister and cArchippus our dfellow soldier, and ethe church in your house: 
f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aver. 9; See Eph. 3:1
bSee 1 Thess. 3:2
cCol. 4:17
dPhil. 2:25
eSee Rom. 16:5
fSee Rom.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몬 1–3.

본문은 서신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저자와 편지를 받는 수신자, 청중에 대한 인사말로 본문을 시작하고 있다. 

1절) 저자 :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 바울은 자신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고 소개한다. 바울은 이 짧은 한장의 서신에 세 번 반복해서 갇힌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9, 13, 23절) 
다른 서신서에서는 일반적으로 바울 자신의 사도성을 언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표현했는데 본문에서는 단지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문이 여러 수신자, 빌레몬의 집에 모인 교회를 향해서 쓴 것이지만 빌레몬이 주 수신자이고 이미 바울의 사역을 이해하고 함께 동역하는 관계였기에 그의 사도성을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도리어 자신이 갇혀 있지만 그들을 향해서 은혜와 평강을 구하며 빌레몬에게도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화해와 용서를 요청하기 위해서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 그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여있는 자라는 정체성이 더 강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앞에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님께는 ‘구주’, 베드로는 ‘반석’, 바울은 '갇힌 자’로 표현했다. 
  • The use of prisonerwithout the article is unusual and may suggest that Paul uses it as part of his proper name, which regularly is given without an article (Harris 1991:244). Since added names suggest the nature of a person’s calling (Jesus is “Savior,” Peter is “Rock”), Paul may well identify himself as Christ’s prisoner to indicate the very substance of his missionary task and its costs. Further, he may be implying that the costliness of Christian ministry is the result of the revolutionary content of his message, thereby preparing Philemon for the revolutionary character of Paul’s request of him. Paul’s message bears witness to a new social order, and for that reason he finds himself in jail. This prepares us, then, for a radical word concerning the relations between a Roman slave and his owner.
  • While Paul’s imprisonment represents his missionary identity, it is Jesus for whom Paul is imprisoned. The response Paul strongly desires from Philemon springs from his orientation toward discipleship: because of Christ Jesus, Philemon should respond favorably toward Onesimus, even though it may be costly and at odds with the surrounding social order.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1.


수신자 : 빌레몬., 바울은 그를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묘사한다. 사랑을 받는 자라는 표현은 ‘아가페토스’로 특별히 사랑을 받는 자라는 의미이다. 다른 바울의 서신에서 이 단어는 신자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그는 동역자로 바울이 그를 자신의 사역, 이방 선교를 위한 사역에 함께 하는 이로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런 태도를 보여준것이 이후에 오네시모를 향해서 바울이 요청하는 자세일 것이다. 
  • Perhaps Philemon is named first because he is the patron of the household church that meets in his home and not because Paul’s request will be directed primarily to him. Yet Paul’s affectionate greeting of him as dear friend and fellow workersuggests a more significant intent. Actually, “dear friend” translates a single word, agapētos,“beloved one.” Elsewhere in his writings Paul uses this as a term of affection for believers (Rom 1:7) and congregations (Phil 2:12). Paul further refers to Philemon as a fellow worker,which identifies him as one among others (see v. 24) who worked with Paul in the Gentile mission.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1.

2절) 이어지는 수신자로 압비아와 아킵보가 등장한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압비아는 자매로, 아킵보는 우리와 함께 병사된 자라고 표현하고 나아가서 빌레몬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일 것으로 본다. 
아킵보는 앞서 골 4:17에 등장한다. 바울은 그를 함께 병사된 자로 평가한다. 이로 볼때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여러 핍박과 어려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가운데서도 신실하게 바울을 지지하고 함께 한 것으로 여겨진다. 
  • Certainly, however, Philemon is not Paul’s only addressee. Two other names are mentioned, Apphia our sisterand Archippus, along with the church that meets in [Philemon’s] home.The exact identities of Apphia and Archippus are unknown. Most scholars speculate that Apphia is Philemon’s wife; her name is Phrygian, she is a Christian sister,known to Paul, and Paul places her name alongside Philemon’s in the address (Lightfoot 1876:306–8). Probably this Archippus is the one mentioned in Colossians 4:17, where Paul’s cryptic exhortation suggests that he has fallen prey to the Colossian “philosophy” (see commentary on Col 4:17). The reference to him here as a fellow soldiertells a different story. According to O’Brien, the term Paul uses to address Archippus designates him as one who has “played an important part in assisting Paul in his missionary labors, and has faithfully stood at his side through persecution and trial—perhaps even imprisonment” (O’Brien 1983:273).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1.

병사의 이미지는 훈련, 헌신,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을 보여준다.(빌 2:25) 본문이 실제의 군인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사된, 헌신된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네 집에 있는 교회 : 당시의 초대 교회에는 특별히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구성원중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집을 모임의 공간으로 제공했다. 

3절) 은혜와 평강 : 빌레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오는 평강을 경험했다. 은혜는 죄의 용서를 가져오고 평강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화해를 가져온다.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와 평강의 기원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레벨로 놓고 있다. 나아가 바울은 벨레몬에게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와 화해를 자신에게 잘못을 행한 다른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확장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 Grace and peace.Philemon has experienced grace from God through Jesus Christ, and peace has come through Christ’s death (Rom 5:1; Eph 2:14–17). Grace brings the forgiveness of sin, and peace brings reconciliation with God and others (see note on Gal 1:3). Paul places Jesus Christ on the same level with God the Father as the source of grace and peace, and Paul expects Philemon to extend the same grace and reconciliation he has received from Christ to a fellow Christian who has wronged him.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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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whom jwe have received grace and kapostleship lto bring about the obedience of faith for the sake of his name mamong all the nations, including you who are ncalled to belong to Jesus Christ,
To all those in Rome who are loved by God and called to be saints:
o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Ro 1:5–7.

5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모든 민족 가운데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한다.
본문의 믿어 순종하게 한다라는 이 의미는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순종으로 새시대를 오게하는 방식이다. 순종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이지(순종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은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신실한 삶, 즉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이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순종은 구별되지만 따로 떨어지지 않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개념이다. 우리는 그분을 주로 인정하지 않고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는 그분에 대한 기본적인 헌신에 따른 결과이다.
-Paul may mean that faith is the form that obedience takes in the new era (in other words, “the obedience that is faith”; see 10:16, where Paul says that not all the Israelites “accepted” [translating the same Greek word for “obeyed”] the gospel). But he probably means that faith in Christ naturally leads to a life of dedicated faithfulness to Christ, of obedience to Christ. For Paul, “faith” and “obedience,” while always to be distinguished, are inseparable, two sides of the same coin. One cannot have faith in Christ Jesus without acknowledging him as Lord, with all the consequences that follow from that basic commit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291.

믿음은 일련의 전제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도록 요구하는 그분,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항복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적 믿음은 윤리적 교훈을 모아놓은 것에 부드럽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적극적인 헌신이다. 순종이야말로 어떤 사람의 신앙에 대한 진정한 척도이다. 바울의 소원은 모든 세계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모든 나라들이 행동을 변화시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었다. 변화된 삶을 떠난 곳에 진정한 믿음은 없다.
- Faith is not intellectual assent to a series of propositions but surrender to the one who asks us to trust him. To surrender is to obey. Biblical faith is not some mild assent to a collection of ethical maxims but an active commitment of one’s life. Obedience is the true measure   p 63  of a person’s faith. E. Best comments that “faith and obedience go inextricably together. Only in obedience is there faith, for faith is not emotional feeling or intellectual acceptance but active response to a person.”14 Paul’s desire was to take the gospel to the entire world and see the nations turn to God in a faith that changes conduct. Any other response would be inadequate. Apart from a changed life there is no real faith.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62–63.

복음은 선교의 모든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이 바울의 사역의 도구(그분으로 말미암아)와 수신자(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것을 보여주는 두 전치사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 선포의 수단이자 중심입니다. 바울의 복적은 그분의 이름을 존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 The gospel is all about mission. Paul rejoices in the ministry to the Gentiles that Christ has graciously given him. The verse (in the Greek text) is framed by two prepositional phrases showing that Christ the Lord is both the instrument (through him) and the recipient (for his name’s sake) of Paul’s ministry. The Lord is the means and the focus of the gospel proclamation. Paul’s goal is to honor and glorify the name of Christ. He gave Paul two things, grace and apostleship, which should be combined to indicate that Paul’s apostolic commission as apostle to the Gentiles (Acts 9:15; 22:21; Rom 11:13; 15:16; Gal 2:8–9) was an undeserved gift of grace from Christ. Paul was always amazed that God had chosen him, the worst of sinners (1 Tim 1:15–16), to be his chosen instrument. That call was first to all the Gentiles. That this could mean “nations” and include the Jews is exemplified in Romans 1:16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and Paul’s constant practice on his missionary journeys of beginning in the synagogues and then going to the Gentiles (so Stott 1994:51). But the term itself more often refers to Paul’s Gentile ministry, and that is likely here (so Cranfield 1975:67; Moo 1996:53).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2–33.

믿어 순종하게 한다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가? 이를 목적소유격으로 보아 믿음에 순종, 형용사적 소유격으로 보아서 믿는 신앙, 출처의 소유격으로 믿음에서 오는 순종, 동격 소유격으로 순종 곧 믿음으로 다양하게 해석가능하다. 뒤의 두가지가 유력한데 순종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오는 믿음의 자연적인 결과이며 믿음은 항상 순종을 가져옵니다. 이 두가지, 믿음과 순종은 그리스와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상호 교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순종은 로마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를 신약의 교회, 지금 현대의 교회에 가죠온다면 복음전도(신앙)과 제자훈련(순종)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둘중 한측면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방치한다면 이는 균형을 잃은 것이고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aul’s purpose is to bring them to the obedience of faith, a phrase that could mean “obedience to the faith” (objective genitive), “believing faith” (adjectival genitive), “the obedience that comes from faith” (genitive of source) or “the obedience that is faith” (genitive of apposition). While the first is unlikely (there is no article with faith), Dunn (1988a:17–18) is probably correct in saying that the latter two are probably both part of the meaning here. Obedience is the natural result of a faith relationship with Christ, and faith always produces obedience. They are interchangeable aspects of a proper relationship with Christ (similarly, see Garlington 1990b:209–13, arguing that the adjectival use preserves this deliberate ambiguity). Obedience also occurs in Romans 5:19; 6:12, 16, 17; 10:16; 15:18; and 16:19, 20, and is a central theme in any enumeration of the responsibilities of the Christian life. This phrase would also define the task of every church today—evangelism (faith) and discipleship (obedience) as inseparable aspects of a true New Testament church. To center upon one aspect and neglect the other is to be unbalanced and unbiblical.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

- From the time of his conversion (see Acts 9:15), the Lord made clear that Paul’s primary mission was to bring Gentiles to faith in Jesus. But rather than referring simply to “faith,” Paul uses an expanded phrase, which literally translates “the obedience of faith.” The niv, following many commentators, takes “faith” (pistis) as the basis for the obedience: commitment to Christ in faith leads to obedience in life.4
But pistis can also identify the obedience that Paul has in mind: “the obedience that is faith.” Paul sometimes describes faith in terms of obedience, as when he speaks of people “obeying” the gospel (Rom. 10:16 nrsv).5

Douglas J. Moo, Rom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2000), 37–38.

6절)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바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의 교인들을 향한 호칭이다.
바울은 편지의 첫머리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규정했다. 또한 본문에 로마의 교인들도 그분에게 부르심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라 강력하고 효과있게 그분을 위하여 개개인을 요구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주님의 종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그분이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그분의 처분대로 우리자신이 사용되도록 우리를 드려야 합니다.
- Paul began his letter by identifying himself as a servant of Christ Jesus who had been “called to be an apostle” (v. 1). Then he told the believers in Rome that they too had been called17 (v. 6). They were “called to belong to Jesus Christ.” God’s call is not an invitation but a powerful and effective reaching out to claim individuals for himself.18 To accept Christ as Savior is to give up all rights to oneself. Christians belong to Christ. Paul the apostle was the servant of the Lord. We who believe have placed ourselves at Christ’s disposal to be used as he sees fit.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63.
 
7절)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본문의 성도는 헬라어로 '하기오스'라는 단어로 하나님의 사람, 거룩한 사람, 성도라는 의미이다. 이 거룩한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에서는 이 성도라는 표현이 단순히 삶의 방식에서 특별히 거룩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다라고 부른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 Greek hagioi, meaning “holy ones” or “saints.” holy. The OT uses this term to describe the Israelites, who were “set apart” to be God’s own people (e.g., Lev 20:24, 26). The NT often uses this word and related words to denote, not people who are particularly holy in their lifestyle (this is why “saints” can be a misleading English translation), but all those people whom God has called to belong to him (v. 6). Status, not behavior, is in view (see “Holiness,” p. 2676).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291–2292.

바울은 6절에서 언급된 너희, 로마의 신자들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묘사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에게 미치지만 오직 믿음으로 그 사랑에 응답한 이들만이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바로 그러한 이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은혜와 평강은 사도가 주로 사용하는 인사말이다. 진정한 평화는 우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은혜는 우리가 받는 것이고 평강은 우리를 대신한 하나님의 행동의 결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축복의 결합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영적인 축복을 수여하시는 분으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분의 완전한 호칭은 그의 신성성에 있어서 주로, 지상에서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고 구속적인 역할로서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니은 멀리 떨어진 신으로 묘사되지 않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 묘사됩니다. 이는 앞서 하나니므이 사랑하심을 받은이라는 표현에서 지지됩니다. 하나님은 오직 진정한 아버지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은 사랑으로 구별된 가족의 일원입니다.
- Paul addressed his letter to the Christian believers in the city of Rome.19 They are described in Greek by two verbal adjectives: they   p 64  were “loved” by God and “called”20 to be saints. God loves the entire human race (John 3:16), but those who respond to him in faith are loved in a special way. They have experienced the love of God and become new creations (2 Cor 5:17). They are called to be holy.21 The ultimate purpose of God’s calling is that redeemed humanity becomes like him in holiness. That single goal directs the life and conduct of every true believer.
The salutation “grace and peace” combines a Christianized form of the Greek and Hebrew greetings.22 Grace and peace are intricately related.23 Real peace comes only as a result of the grace of God. Grace is what we receive; peace is what we experience as a result of the activity of God on our behalf. This combination of spiritual blessings comes from “God our Father” and from the “Lord Jesus Christ.” The Son takes his place with the Father as the giver of spiritual blessings.24 His full title marks out his deity (“Lord”), his life on earth (“Jesus”), and his redemptive role (“Christ”). God is not portrayed as a remote deity but as the Father of those who believe. This supports the earlier statement in v. 7 that believers are “loved by God.” He loves us as only a true father can love. We are members of a family distinguished by love.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63–64.

바울에게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주신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바울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함에 이르게 하는 사역을 맡은 것이다. 이 많은 이방인중에서 로마의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인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 인사말을 마치면서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로마에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고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를 받을 자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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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n aapostle—bnot from men nor through man, but cthrough Jesus Christ and God the Father, dwho raised him from the dead— and all ethe brothers1 who are with me,
To fthe churches of Galatia:
gGrace to you and peace h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iwho gave himself for our sins to deliver us from the present jevil age, according to the will of kour God and Father, to whom be the glory forever and ever. Ame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갈 1:1–5.

1-2절) 사람들로부터나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서 사도된 바울은 나와 함께한 모든 형제들과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바울은 지금 서신서를 시작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서신 양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발신자와 수신자, 인사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1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의 사도됨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매우 강조해서 밝히고 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던 거짓 선생들을 의식해서 그의 사도됨이 사람들을 통해서 온것 아니라 신적인 부름으로 부터 온 것임을 명확히 한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자’라는 의미로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았는지를 명확히 밝히고 아는 것이 중요하다. 
This indicates Paul’s authority as one commissioned by God (“apostle,” lit., “one who is sent”) and entrusted with the sacred deposit of the gospel. On apostleship, see notes on Matt. 10:2; Acts 1:20; Rom. 1:1. Paul’s apostleship is especially important in Galatians because the false teachers have evidently raised questions about whether he should really be called an apostle (Gal. 2:7–9). not from men nor through man. Paul stresses both here and in 1:11–12, 16–17, 19 that he received the gospel directly from the Lord, not secondhand.
lit. literall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45.

- The title apostle designated one who was given authority to represent another. This title was used in the early church in a broad sense to designate missionary leaders (see Acts 14:14). The title was also used in a narrow sense for those who had been given unique authority from Christ to be his representatives and the founders of the church (see Acts 1:21–26). In Galatians 1 Paul claims the title for himself in the narrow sense.
 G. Walter Hansen, Galati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갈 1:1.

Paul called himself “an apostle.” This was his favorite term of self-designation and occurs in the salutation of eight of the twelve New Testament letters that bear his name. He also referred to himself as a prisoner (in Philemon) or a slave (Philippians, Romans, Titus) of Jesus Christ. Indeed, he also claimed the title “servant of Christ” in Galatians as well but not until 1:10. The second word in the epistle is apostolos—an indication that Paul’s apostolic office and his right to bear its name would figure prominently in the Galatian letter.
The word “apostle” had a rich and varied history prior to its assuming a New Testament meaning.4 As the noun form of the verb apostellein, meaning “to send” or “to dispatch,” an apostle is literally an envoy or ambassador, one who has been sent in the service of another. In classical Greek the term was actually used of a naval expedition, perhaps deriving from the apo prefix, indicating “to send away from,” that is, to send off on a long and arduous mission.

4 See the classic discussion in E. deW. Burt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ICC (Edinburgh: T & T Clark, 1921), 363–84. Also helpful is J. B. Lightfoot’s earlier treatment, “The Name and Office of an Apostle,” in his Saint Paul’s Epistle to the Galatians (1890; reprint, London: Macmillan, 1986), 92–101. Cf. also K. H. Rengstorf, “Απόστολος,” TDNT 1.407–45.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78.

1절에서 사도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사람과 예수그리스도의 차별성, 다름을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합, 즉 한분이심을 이야기한다. 

신약에서 교회는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먼저는 모든 세대와 지역의 구속받은 무리들로 시공간속에 확장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 또한 세례를 받은 지역 교회의 일원으로 정규적으로 예배와 증거를 위해서 모이는 이들을 의미한다. 
The word “church” is used in two senses in the New Testament. Sometimes it refers to the whole company of all the redeemed of all ages and places, the body of Christ extended throughout time as well as space. Thus Paul spoke to the Ephesian elders of “the church of God, which he bought with his own blood” (Acts 20:28). To the same believers Paul wrote this doxology: “To [God] be glory in the church and in Christ Jesus throughout all generations, for ever and ever!” (Eph 3:21). More often, however, the word “church” is used as it is here in Galatians to refer to local congregations of baptized believers who regularly meet for worship and witness.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83.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는 성경 전체에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인데 바울은 이것이 누구로부터 오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Each of Paul’s letters begins with a reference to “grace and peace.” Chrysostom relates these two words to the special situation in which the Galatians found themselves: “For since they were in danger of falling from grace, he prays that they may recover it again, and since they had become at war with God, he beseeches God to restore them to the same peace.”12
As a matter of fact, “grace and peace” are a succinct summary of the entire Christian message. Grace (charis) is closely related to the common Greek word for “hello” (chaire).13 For Paul, grace was virtually synonymous with Jesus Christ since he nowhere conceived of it as an impersonal force or quantity. Grace is God’s unmerited goodwill freely given and decisively effective in the saving work of Jesus Christ. Peace (eirenē; cf. Heb. šālôm), on the other hand, denotes a state of wholeness and freedom that the grace of God brings. Both concepts are deeply rooted in the Old Testament Scriptures and are beautifully brought together in the Aaronic blessing in Num 6:24–26, “The Lord bless you and keep you; the Lord make his face shine up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the Lord turn his face toward you and give you peace.”
This double blessing is attributed to a single source—the one God who knows himself as Father, Son, and Holy Spirit. While Paul’s trinitarian thinking would only become explicit in chaps. 3 and 4, the soteriological focus of the greeting already presupposes the regenerating ministry of the Holy Spirit (cf.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4:6). Here grace and peace are said to b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Just as in 1:1 the Father and Son were linked together by a single preposition (dia), so too in 1:3 Paul used another solitary preposition (apo) to convey the equality and deity of both divine persons. The true deity of Christ is seen in the fact that he is associated indissolubly with the Father in all the mighty acts of salvation.14

12 Chrysostom, “Homilies on Galatians,” 4.
13 H. Conzelmann, “Χάρις,” TDNT 9.393–96.
14 Cf. Luther’s comment: “The true deity of Christ is proved by this conclusion: Paul attributes to him the ability to grant the very same things that the Father does—grace, peace of conscience, the forgiveness of sins, life, and victory over sin, death, the devil, and hell. This would be illegitimate, in fact, sacrilegious, if Christ were not true God. For no one grants peace unless he himself has it in his hands” (LW 26. 31).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85.

4-5절)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악된 이 세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그에게 영원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의 죄를 위해서 그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 본문은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그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고는 해결 될 수 없는 죄의 심각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도 한다. 죄악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유효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Just as Paul already had referred to the resurrection in v. 1, so here he brought into view the suffering and death of Christ on the cross, “who gave himself for our sins.” The NEB translates the expression “who sacrificed himself for our sins.” This recalls Jesus’ own description of his mission in Mark 10:45,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Behind this language stands the image of the Suffering Servant in Isa 53 who bore our iniquities and carried our sorrows through being smitten and crushed by God’s righteous judgment. Paul here emphasized the voluntary character of Jesus’ self-offering, “He gave himself.” This theme is further developed in the kenotic hymn in Phil 2:5–11, “He made himself nothing … he humbled himself and became obedient to death—even death on a cross!” Jesus’ death was not a fortuitous accident. He willingly submitted himself to the divine purpose of his Father, saying “Here I am, I have come to do your will” (Heb 10:9).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86.

본문은 계속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의 희생의 구속이 개인에 한정된 구원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 이 악한 세대가운데 우리를 건지신다고 말하는데 이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말한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개인적인 구원의 영역으로 한정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축소시키는 행위이다. 
Christ “gave himself for our sins,” Paul said, “to rescue [or deliver] us from the present evil age.” Here Paul described what Jesus’ death accomplished not only in terms of our personal salvation but also in regard to God’s redemptive purpose in the wider historical and cosmic arenas. Interpreters of Galatians have been divided over whether Paul’s concern in this book was strictly for the salvation of individuals through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apart from dependence on human works or whether its focus was more communal and eschatological, that is, concerned with how Gentile believers could be included within the community of Israel’s Messiah, an issue with important implications for understanding salvation history and the divine consummation of all things.17 The former view, that Galatians is about individual salvation and justification by faith, was given classic expression by Martin Luther in the Reformation and has found modern champions in such diverse interpreters as R. Bultmann, H. Hübner, and J. Stott. The latter view, that Galatians is about a first-century problem with corporate and eschatological implications, has been advanced by a host of recent scholars including J. Munck, K. Stendahl, and E. P. Sanders. However, by juxtaposing so closely in Gal 1:4 the personal and historical dimensions of salvation, Paul indicated the inherent unity between these two dimensions of Christ’s work.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nd justifies us by faith should not be reduced to a subjective, existentialist interpretation. As Paul will argue at length in Galatians, what God has done in Christ is directly related to his covenant promises to Israel as well as to the final salvation of all the redeemed.
17 See the helpful survey of “Galatian debates” by J. M. G. Barclay, Obeying the Truth: A Study of Paul’s Ethics in Galatians (Edinburgh: T & T Clark, 1988), 1–8. Two other helpful reviews of this voluminous literature are F. Thielman, From Plight to Solution (Leiden: Brill, 1989), 1–27, and S. Westerholm, Israel’s Law and the Church’s Faith: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Grand Rapids: Eerdmans, 1988), 1–101.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87.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이미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장래도 포함하는 것으로 말한다. 주님이 자신을 주신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고 그 사건이 현재 악한 세대(갈라디아 교회 당시)에 속한 이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이 세악한 세대를 위해서도 유효한 것이다. 우리는 계속되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것이다. 

Christ has rescued us from this present evil age through justifying us by faith and pouring out his Spirit in our lives. This is an accomplished fact, and we must not be drawn back into “a yoke of slavery” (Gal 5:1). But while Christ has rescued us from this evil age, he has not taken us out of it. Thus our liberty must not degenerate into license nor the gift of the Spirit be abused by selfish carnal behavior (Gal 5:16–26).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88.
Christ has rescued us from this present evil age through justifying us by faith and pouring out his Spirit in our lives. This is an accomplished fact, and we must not be drawn back into “a yoke of slavery” (Gal 5:1). But while Christ has rescued us from this evil age, he has not taken us out of it. Thus our liberty must not degenerate into license nor the gift of the Spirit be abused by selfish carnal behavior (Gal 5:16–26).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88.

We study the Bible and the great doctrines of the Christian faith not out of vain curiosity, nor merely to increase our intellectual acumen and historical knowledge but rather that we might come more fully to love and enjoy the gracious God who delights in our praise. As Calvin put it so well, “So glorious is this redemption that it should ravish us with wonder.”20
20 Calvin, CNTC 11.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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