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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what you love: Why everybody worships something
우리의 정체성을 묻는 가장 적절한 질문은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는가?”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사랑하는 것을 원하고 욕망하고 그것을 예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답하지 못한다. 왜 생각과 원함이 다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랑이 습관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사랑을 미덕(virtue)라고 하고 미덕은 좋은 도덕적 습관이다. 미덕과 도덕법은 다르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미덕과 법은 반비례 관계가 있다. 덕스러운 사람은 외적 법이 덜 필요한 반면 악한 사람은 법이 더 필요하다. 아이가 어릴때 법과 외부적 규올로 훈련시키는데 이것의 목적은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에게 선에 대한 감각을 내면화 하는 것이다.
사랑이 습관이라면 나는 어떻게 사랑을 배우는가? 고대 철학자와 인지과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적으로 습득한 습관이 우리 의식 아래에 형성되어 있고 그것이 우리를 규정한다. 우리의 첫 번째 지향은 이지적이 아니라 본능적이다. 우리가 습관으로 주입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행동 양식을 형성한다. 우리의 사랑과 원함(want, desire)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우리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유인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비전을 형성한다. 원하고 사랑하는 ‘습관’은 무의식에 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습득하는 습관이 무의식일 뿐만 아니라 습관을 의식하는 과정도 무의식이라는 점이다. 당신의 습관들뿐만 아니라 습관화되는 과정 자체가 무의식적이다.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가운데 무엇을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
우리의 굶주린 마음은 무엇인가 예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피조물이라는 말은 곧 우리 자신을 무엇인가에 내어 주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마음의 습관은 우리가 자신을 내어주는 의식과 행동, 일상에 의해 형성, 조준, 습득된다.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도 모든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을 헌신한다.(devoting) 당신이 헌신하는 바로 그것 또한 당신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실천과 루틴은 예전이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예전은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게 만들고, 사랑하게 하는 실천들이다. 예전들은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은 언제나 종교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지루하고 일상적인 것이다. 그 안에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와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논리적 사고의 결과로 무엇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무의식적인 동기로 소비한다.(예 : 아이폰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을때 인터페이스를 통해 바라보는 내용자체가 아니라 이 아이폰과 관계하고 작동하는 관계 양상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 지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할지 예배할지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누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많은 예전들은 사실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한다. 계속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물건들(물질, 우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강요한다. 400년 전에 파스칼은 말했다.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분주하게 만들고 있다. 인류의 불행은 오직 한 가지로부터 발생하는데, 그가 한 방에서 조용히 머무를 능력이 부재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지루함은 궁극적인 것을 직면하기 때문에 분주함을 향한다. 우리는 자신을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기독교 예전들은 인간의 망가진 상황에 정직하다. 생각한 것과 추구하는 것의 괴리에 대해 정직하다. 기독교의 참회, 고백의 예전은 나를 야단치는게 아니라 나를 용납하는 창조주 앞에 정직해질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면에서 은혜가 핵심이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
만약 기독교가 진리이고 어거스틴이 옳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지어진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할 대상을 미친 듯 찾지만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런 절망 가운데 있지만,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시도들 뒤에 우리는 누군가의 메아리를 듣는다.
결국 제임스 스미스는 기존의 세계관의 패러다임, 지성의 전통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욕망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갈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전통이라기 보다는 저자는 어거스틴이 제시한 전통이라고 말한다. 결국 해아래 새 것은 없고, 과거의 전통속에 이 시대를 새롭게할 무언가를 찾아내야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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