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로버트 뱅크스, IVP)




“초대교회를 꿈꾸게 했던 비서, 가정 교회를 넘어 교회의 본질을 꿰뚫는 필독서”

매우 거창한 소개의 글을 보고 이책을 구입했지만 선뜻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내심 좋은 자료, 학적인 글일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다가 지난주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학적인 글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이야기식으로 풀어나간 글이었다. 물론 초대교회의 역사적 자료를 기초로 고증을 거친 글임에 틀림없다. 

이 글의 주인공은 푸블리우스, 풀 네임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아미키우스 루푸스이다. 이 사람이 친구의 초대로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참석한 가정예배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 짧은 이야기속에는 교회가 추구해야할 다양한 가치들이 담겨있다.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 아이와 어른, 성만찬과 세례, 식사와 성찬, 논쟁과 조정...
만약 우리들이 초대교회의 예배에 초청을 받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초대교회의 자료들을 기초로 초대교회의 예배를 지금 21세기에 구현한다면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일까? 
이러한 교회를, 예배를 은혜롭게 받아들일까 아니면 이단적이라고 비난할까? 

우리는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구호로 초대교회를 부르짖는다. 이 책에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이 모습이 지금 우리의 교회안에 구현될때 우리는 과연 그것을 제대로 수용하고 용납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를 이단이라고 치부해버리지는 않을까?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모호하다. 성경의 어느 시대인지? 성경은 한권의 책이지만 매우 다양한 가치를 담고 있기에 그중에 어느것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이책의 저자처럼 1세기 초대교회의 모습을 꿈꾼다. 이 책 안에 녹아져 있는 예배, 기도, 성찬, 대화, 은사, 복음을 우리도 살아내고 이야기하고 싶다. 


728x90




"흔들리고 의심하며 믿음의 여정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의 부제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단지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아직 믿음의 여정에 들어서 있지는 않지만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프롤로그중에 이런 말을 한다. “과연 의심이 전제되지 않는 믿음이 존재할까요?..... 의심은 상승을 위한 불편함이지만 무관심은 하락을 위한 방조이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들리는 수많은 신앙 대화, 상징, 예식과 같은 종교적 익숙함을 자기 믿음의 근거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우리네 교회는 의심을 믿음의 반대말로 여기며 의심하는 것을 불신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무언가 질문이 올라올때도 억지로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저자는 적극적으로 의심하고 질문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서 누구나 한번쯤 했을 법한 여러 질문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본 책을 통해서 제시한다. 

고통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목사가 에쿠스를 타도 될까?
십일조 띵까면 암 걸릴까?
하나님은 네가 뭘 선택하든 별로 관심 없으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그는 이야기한다. 물론 어떤 명확한 해법을 제시한다기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신선한 견해들, 때로는 성경적인 풍성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기도 하고 저자 개인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감탄하며 때로는 너무나 좋은 표현들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위의 질문들에 대해서 저자가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을 일독하기를 추천한다. 


728x90

 

복학왕의 사회학(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이 책은 기안84의 ‘복학왕’이라는 웹툰의 사회학적인 접근이다. 
저자 최종렬은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지금까지 서울이나 수도권의 대학생들의 삶에 대한 도전이나 그들에 대한 정의가 지방대생들과는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심층 인터뷰를 통해 질적 조사를 실시한다. 
여기서의 표본은 대구 경북지역의 대학으로 재학생 6명, 졸업생 17명, 지방대생의 부모 6명으로 총 29명으로 진행되었다. 
 
 
 

 

저자는 지방대생의 최고의 가치는 가족의 행복이며 이러한 가치는 성찰적 겸연쩍음이라는 방식으로 추구된다고 말한다. 성찰적 겸연쩍음이란 공부를 해도 잘 되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겸연쩍어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서 자기 계발에 나서지 않으며 주변의 습속을 따른다. 나아가 알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한데 이는 자기 계발보다는 자기보존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소위 수도권안에 위치한 대학의 학생들을 만나보면 똑똑하다. 그리고 계산이 빠르다. 자기 계발을 위해서 노력하고 자신의 시간을 안배하여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금 나쁜 말로 표현하면 이기적이고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데 지방의 학생들을 만나보면 조금 다르다. 그들은 착해 보인다. 재빠르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전체를 위하려는 모습이 강하다. 그런데 실상은 이들의 이면에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고 상처받고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착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개의 단어로 이 책의 주제를 뽑아 보자면 “가족의 행복”, “성찰적 겸연쩍음”, 습속의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대로 이 책은 지방의 대학교의 재학생, 졸업생, 부모들을 대상으로한 인터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질문은 이들의 우짖는 소리가 청년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연구가 가능했다면 같은 방식으로 수도권 대학을, 서울에 거주하는 청년으로 지방의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들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지금까지 나온 웹툰 ‘복학왕’을 모두 보았다. 어떤 부분은 너무 과장된 것 아닌가라고 여거지기도 하고 어떤 에피소드는 판타지에 가까운 내용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웹툰이 모든 청년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일부의 청년들의 고민과 일상을 담아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성찰적 겸연쩍음과 습속의 왕국에 함몰되어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의지를 잃어버린 청년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728x90
한국교회, 인문주의에서 답을 찾다(배덕만-대장간)


이 책은 지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서 한 기독교 역사학회에서 배덕만 교수가 진행한 기조 강의의 내용이다. 
먼저 그 주제가 ‘헬조선과 개독교 시대에 읽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역사’인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 사회의 현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면 다시금 500년전 종교개혁과 같은 개혁, 부흥을 다시금 맞이할 수 있을까 라는 바램을 담은 책이다. 

헬조선은 '지옥(hell)같은 조선’이라는 의미인데 한국의 청년들이 우리 나라를 자조적으로 부르는 명칭이다. 이것과 아울러서 3포, 5포, 7포, N포 세대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미래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젊은이들, 최근의 땅콩 회항이나 갑질 논란속에서 보듯이 흙수저, 금수저 논란등이 이 시대를 부르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개독교라는 호칭을 얻었는데 이는 이 땅의 소망이 되어야 하는 교회가 이 시대 지탄의 대상이 되고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현실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의 양심이 되고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돈과 섹스와 권력의 문제에 얽혀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 속에서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으로 한국 교회안에 팽배한 혼합주의, 현실과의 타협, 신학의 실종을 이유로 들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적 영성의 회복, 종교 본연의 초월적 가치 추구,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한국 교회의 생태계를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종교개혁의 배경이 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한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도와 라틴어 텍스트를 복원하는 운동이었는데 고전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왜곡된 인간의 위치를 회복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고전 연구는 인쇄술의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인문주의운동의 선구자로 에라스무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네델란드 로테르담에서 사제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고전어를 공부하여 고대 문헌을 교정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성경과 고전, 교부들의 작품을 발굴해서 편집, 주석하는데 생을 바쳤다. 에라스무스는 이런 작업을 통해 텍스트의 오류를 바로잡고 본래의 순수한 진리를 복원하여 자기 시대의 타락을 막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65) 이러한 일환으로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고 새로운 라틴어 번역을 소개했으며 ‘불가타’의 오역을 지적했다. 또한 시대를 풍자한 ‘우신예찬’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전적 부패를 강조했던 루터와는 달리 인간의 창조성과 존엄성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67) 에라스무스는 자신이 신약성경을 출판했던 일차적 이유를 “시골 사람이 쟁기 끝에서, 방직하는 사람들이 베틀에서, 여행하는 사람이 자기의 여행 중에 성경을 노래하는 것을, 심지어 여자들도 성경 본문을 읽게 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식과 믿음, 자유와 경건, 개인과 교회가 조화와 평화를 이루는 세상이 이성과 교육을 통해 건설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믿음은 카톨릭과 종교개혁의 진영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고전어, 성경, 그리고 교부들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차이점으로는 인문주의자들은 교리에 관심이 적었던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참다운 교리를 확립하는데 일차적 관심을 두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순수한 신앙과 도덕적 실천에서 찾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그런 것보다 성경에 근거한 참다운 교리를 우선시 했다. 또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에 비해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훨씬 더 낙관적, 긍정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루어와 에라스무스 사이에서 한사람을 선택해야 했을때 그들은 에라스무스 대신 루터를 선택했다.(74-6)

교회는 인간에 대한 인문주의적 가치에 주목하며, 이 지옥같은 현실을 향해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라고, 인간을 상품이 아니라 생명체, 인격체로 존중하라고 선언해야 한다. 성경이 인간의 죄성과 한계를 언급한다고 해서 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성경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을 균형있게 조명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강력히 선포하기 때문이다. 

‘개독교’ 현상은 중세 말의 타락한 가톨릭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죽음의 공포를 토대로 연옥교리와 면죄부 판매를 정당화 했고, 교황이 황제와 세속의 권력을 다투며, 교회가 종교적 목적을 앞세워 십자군을 동원했다. 재정적 탐욕에 의해 성직이 매매되며, 성직자들에 의해 사생아들이 무수히 양산되었고, 재물-치유-출산을 목적으로 뮤물과 성지순례가 성행했다. 이를 위해 신학자들이 성경과 무관한 교리를 만들고 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야말로 성경과 상관없는 종교가 된 것이다. 500여년전의 카톨릭 시대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 해법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교리와 관행 위에 성경을 두는 것이다. 성경 앞에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이교적 세속적 요소를 제거하고, 교회안에서 주인 행세 하는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진지하고 정직한, 그리고 철저한 연구와 묵상을 수행하고 이를 가르쳐야 한다. 

저자는 기독교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을 그리고 이시대 한국교회를 연관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 헬조선, 개독교라는 단어를 극복할 것을 이시대 교회에 요청하고 있다. 앞서 1-4부는 5부를 선포하기 위한 서론이라고 여겨진다. 5부의 각 주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장. ‘헬조선’을 향해 인간의 가치를 선포하라
2장. 근원으로, 성경으로 돌아가라
3장. 단절된 세상과 소통하라
4장. 신학자여, 저항하는 지식인으로 발언하라

앞서 말한 것처럼 저자는 이 내용을 역사 신학회의 기조 연설로 준비했기에 마지막 부분에 신학자들을 향해서 저항하는 지식인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는 학문을 하는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역자, 목회자들을 향해 요청되는 메시지일 것이다. 

저자는 이책의 말미 5부 4장 “신학자여, 저항하는 지식인으로 발언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문주의자들은 대학과 교회를 지배하던 스콜라주의를 당당하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교회의 전통이란 미명하에 성경적 진리를 억압, 왜곡하던 당대의 교회를 향해 개혁의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과 초대교회를 토대로, 성직자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용감하게 지적하며 저항했다. 이를 위해 대학의 강단이나 교회의 고위직에 연연하지 않고, 당시에 빠르게 발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쇄소를 중심으로 학문과 지성을 통해 시대와 싸웠다. (중략) 그야말로, 인문주의자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비판적 지식인, 행동하는 지성, 저항하는 인텔리겐치아였던 것이다. 반면, 현재 한국의 신학자들은 철저하게 교권에 종속되어 있다. 교파와 신학의 차이를 떠나, 대부분의 교단신학교는 교단의 통제 아래 놓여 있으며, 학문의 자유나 교수의 신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교단의 전통적 입장에 대한 일체의 비판적 성찰이 불가능하며 신학적 실험도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또한 신학자들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지면서 다수의 신진 학자들이 신학교에서 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다양한 명목의 비정규직 신분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학교 내의 갑을 관계도 극복하기 어렵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지내며 한국교회를 위해서 외친 저자의 외침은 이시대 신학자들과 사역자들을 향한 사자후처럼 들린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린 시대에,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를 꿈꾸지만 현실에서는 ‘상식이 기적이 되어 버린 교회’속에서, 개독교라는 비판을 달게 받으며 우리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개혁을 외치고 이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