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해볼 질문 : 건전한 육체적 욕구와 죄된 육체적 욕망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자기 사랑이란, 그리스도안에 있기 전의 모습들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육체적인 욕망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 그리스도 밖의 상태로 유혹하고, 성령의 욕망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답게 살도록 인도합니다.
부인해야할 것 : 육체의 욕망
쾌락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쾌락을 사용해야할 범위를 넘어갈 때 그것은 육체의 욕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 성, 식욕, 수면욕
- 돈,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버는 것, 못해서 문제지 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성경의 가치관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돈을 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스며들어 있는 세상의 가치관과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치관을 잘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가 부인해야할 육체의 욕망중에 나쁜 습관이 있는데 이는 게으름입니다. 또한 부인해야할 정신적 습관으로는 열등의식과 남을 탓하는 버릇, 경쟁적 성향, 과거의 상처나 기억에 붙들려 지내는 것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실패한 경험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실패가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숨길 일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부인하지 않으면 이러한 것들이 평생 우리를 쫓아다니며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코끼리는 힘이 엄청나게 좋아서 6.5톤이나되는 무거운 물건을 끌어당길 수가 있다고 합니다. 왠만한 밧줄들은 다 끊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이 코끼리를 어렸을때 부터 줄에 묶어 놓으면 장성해서도 그 줄을 끊지 못합니다. 몸집이 커져서 6.5톤이나 끌 수 있는 코끼리가 되었는데도 어릴 때부터 밧줄에 묶여 있었기에 그 줄을 끊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이런 육체적인 욕망들, 우리의 발목을 잡아 우리로 일어서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만들던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를 묶고 있던 밧줄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긍정해야 할 것 : 성령님
이제 반대로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할 것은 바로 성령께서 인도해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NKRV)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방법은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But I say, walk by the Spirit, and you will not gratify the desires of the flesh.” (갈라디아서 5:16, ESV)
ESV는 본문의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는 표현을 walk by the spirit라고 표현합니다. 성령과 함께 걸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 구절은 성령님과 함께 손을 잡고 한 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같이 걸어가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나이가 60, 70이 넘은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낭만적인 감정만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을 부인하면서 성령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일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성령과 동행하게 됩니다.
2.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
* 생각해볼 질문 : 성령님과 함께 걷는 것은 구체적으로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삶, 즉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법을 배우고 누리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십니다.
요한복음 14:16 (NKRV)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이라고 노래하고 기도하는 것이 성령님의 내주를 경험하게 해주십시오라면 맞지만 마치 성령이 떠나계신데 우리가운데 불러오는 것으로 여긴다면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영접한 순간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번째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6:13 (NKRV)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인도하면 결혼, 직업, 학업, 돈 버는 것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축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령의 인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개인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도 하지만, 성령께서 주로 하시는 일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분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내용이 바로 진리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그 진리를 따라가다보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NKRV)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성령의 내주하심 가운데 살아가다보면 얼굴 표정만이 아니라 성품이 달라지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그사람 신앙은 좋은데 성격이 이상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상하면 신앙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면 우리의 성격도 당연히 좋아져야 합니다.
네번째로 성령은 우리에게 비전을 허락하십니다.
사도행전 2:17 (NKRV)
17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본문은 요엘서 2:28절의 인용으로 성령이 부어질 때 모든 이들에게 예언과 환상과 꿈을 주십니다. 이는 모두 비전과 관련된 표현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 인생을 통해서 또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 하는 꿈을 꾸게 됩니다. 비전이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추구하다가 죽으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할 만한 그 무엇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살아다가 죽고 싶다는 비전이 있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향해 주시는 그런 비전을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섯째로 성령은 그런 꿈, 비전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2:13 (NKRV)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비전을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섯째로 성령님은 우리 각 개인에게 다양한 은사를 허락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2:4–7 (NKRV)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은사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의 이익,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 개역개정에는 7절에서 단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표현하지만 새번역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이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더 합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성령께서 우리가운데 내주하시면 이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우리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전을 가지게 되고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고 또 그런 것을 함께 이룰 수 있는 은사가 주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모두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이를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5:18 (NKRV)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사람들은 간혹 성령의 충만을 능력이나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성령님은 물질이 아니라 인격이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과 아주 인격적으로 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데이트를 하며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충만합니다. 이처럼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이로 충만해집니다. 잠잘때도, 일어나서도 그와 그녀를 생각합니다. 그 사람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이 사랑이 더욱 성숙에 이르게 되면 두 사람이 늘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져서 그 관계를 누리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따를 때 아름다운 결과가 있는 반면에 성령을 따르지 않을 때 좋지 않은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 첫번재는 성령의 근심입니다.
에베소서 4:30 (NKRV)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가 자꾸 딴 생각을 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른다면 인격이신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부부 관계나 부모 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계속해서 자신이 무시되고 자신이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근심하고 슬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욱 심각해지면 성령이 소멸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 (NKRV)
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여기서 소멸된다는 단어는 영어로 extinguish입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이 없어진 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점점 줄어들어서 슬퍼하시다가 침묵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슬퍼하고 계시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면 소멸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위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빨리 회개하고 자신의 영적인 회복을 위해서 특별한 시간을 갖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성령님과 성경
*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이 예수를 알기 전에 익숙하던 생각과 내면의 소리에 대해서 성령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셨지만 성령께서 우리 속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지, 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몰라서 성령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20세기에 새롭게 부각된 성령님
성령은 지난 2000년 동안 계속 역사하셨지만 사람들은 성령님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다가 최근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면서 성령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은 지나치게 은사에 집중하여 인격이신 성령님을 어떤 에너지와 같은 비인격적인 존재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성령님은 인격이시며 우리 속에 오셔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면 성령님은 매우 슬퍼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인격적으로 일하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로 이끌기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끄는 두가지의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성령이십니다. 첫번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그분의 가치관을 알아가지 못하면 우리 속에 준동하는 여러가지 생각과 마음이 그분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을 통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알았다면 이제 주관적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성령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성령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짓 우상도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다양한 은사를 주셨는데 예언이나 방언, 통역이나 병고침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은사를 더 높은 차원의 은사라고 생각하고 주방에서 섬기는 것이나 손대접, 긍휼의 은사는 별볼인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성령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오해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성령을 더 깊이 알아가고 체험하려면 성경은 조금 더 깊이 묵상하고 깨닫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영어로 canon, 캐논, 잣대라는 의미인데 이를 기준으로 우리의 행위나 체험이 옳은지 틀린지를 가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10-10-10 훈련을 먼저 시작하십시오. 아침에 10분 성경을 묵상하고, 낮에 10분 성경을 읽고, 저녁에 10분 기도하는 훈련을 먼저 시작하십시오. 이 훈련은 아주 기초적인 출발선으로 나아가 20-20-20 훈련으로, 더 나아가 30-30-30 훈련으로 깊이를 더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암송을 하거나 좋은 설교를 듣는 것도 추천합니다.(유투브)
4.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새 생활
* 생각해볼 질문 :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산다고 할 때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가지 축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라면, 다른 한가지 축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번째로 기도 중에 침묵과 묵상이 필요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대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안됩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처음에는 침묵하다보면 딴 생각과 잡생각이 가득하겠지만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상상하십시오. 성경을 묵상하는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을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의 시간이 없다가 느닷없이 하나님께 어느 직장에 가야할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마치 갑자기 복채 내고 ‘올해 결혼할까요 말까요?’라고 묻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평상시에 ‘하나님, 오늘 어떻게 살까요?’라고 질문하십시오.
두번째로 일상에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순간순간 민감하게 깨어서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연인 사이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서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함께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부들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일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아이를 키울 때, 직장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이들과 갈등 상황이 생길 때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된 욕망이 스물스물 올라올 때 우리는 성령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모야, 오늘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갑자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면 ‘너 어떻게 알고 전화했니?’라는 반응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저의 연락이 그 사람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동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를 도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 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경험이 쌓이게 되면 우리의 신앙 생활에 활력이, 생기가 생깁니다.
세번째로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일은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꾸준히 운동해서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것, 회복되는 것,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성령님을 따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인생이 바뀌는 사람들을 그 속에 계신 성령님을 따라가기에 놀라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네번째로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은 우리가 성령의 전에 속한 존재임을 보여주십니다.
에베소서 2:22 (NKRV)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인 교회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따라 살 때 성령님은 특별한 영역에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깨진 세상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4:18–19 (NKRV)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님이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임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밝힙니다. 가난한 자들, 포로된 자들, 눈먼 자들, 억눌린 자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실 때, 성령님은 끊임없이 깨진 세상을 바라보게하심으로 자기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넘어서게 하십니다. 나로부터 눈을 들어 이웃을, 세상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특별히 이세상의 하나님의 통치가 부재한 상황을 안타까와하며 이를 바로잡도록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습니다.
-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특별한 작품입니다.
-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특권’을 받았고, 기도와 예배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특권을 얻었음에도 우리들은 ‘나’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죄와 열등감으로 인해서 고민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마 16장 24절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4 (NKRV)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를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비하, 자기 멸시, 심하게는 자기 학대에 빠져 있습니다. 자존감이 매우 낮고 죄의식에 빠져 있으며 자신은 늘 죄를 짓고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아주 강한,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된 자기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다시한번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10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3절입니다.
에베소서 2:1–3 (NKRV)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본문은 예수님을 알기 전의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없을 때는 마치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인생을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나의 삶의 주도권을 쥔 것이 아니라 세상 풍조, 공중의 권세 잡은자, 그 가운데 역사하는 영, 육신의 정욕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이 나의 삶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고 쓰는 일, 직장을 찾는 일, 연애하고 결혼하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둥바둥대며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정말이지 삶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에베소서 2:4–6 (NKRV)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나 이 세상을 좇아 살아가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함께 일으키셨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일으키셨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동사의 시제는 모두 부정과거 능동태로 모두 과거에 일어나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금 강조하면 본문은 우리들을 부활시키실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시키셨고, 하늘에 앉히실 것이 아니라 하늘에 앉히셨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표로 나타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우리(1-3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4-6절)
영적 상태
허물과 죄로 죽었던(1절)
그와 함께 살리셨고(5절)
삶의 주도권
세상 풍파,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삶(2-3절)
그와 함께 일으키셨고(6절)
우리의 신분
진노의 자식(3절)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힘(6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능력이 우리 속에서 이미 역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며,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놀라운 영적 축복이 자기 사랑의 기초입니다. 구원은 그저 죽어서 천당가는 것이 아니라 이 놀라운 영적인 축복을 지금 나의 삶에 자리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 믿음 : 자신에게 이루어진 축복 받아들이기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어던 가난한 학생이 장학증서를 받았습니다. 이 장학증서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장학금과 생활비 일체를 제공해주겠다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이 장학증서를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새학기 등록은 어떻게 하나? 용돈이 없어서 너무 배고프다”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장학증서, 선물을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2:8–9 (NKRV)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8절 본문은 이 놀라운 선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미 그분의 뜻안에서 사랑으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리스도 안에 속하고 그 속에서 완전한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게 이미 새 생명을 얻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인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전에 그리스도와 관계 없을 때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나, 하나님이 특별한 존재로 만드신 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받아들여진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한 욕망과 부정적인 욕망을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은 건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 음식물을 주셨기에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먹어야 할 것 까지 뺏앗아 먹는다던지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먹는 것을 부정적인 욕망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부인해야 할 것과 사랑해야 할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와 관계 없었던 때 우리를 지배하던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주신 건강한 욕구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특별한 가치를 누려야 합니다
이처럼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에게 부여하신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가면서 예수를 알기전에 물들어 있던 잘못된 습관을 벗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3.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님
* 우리는 ‘아직도 제가 덜 죽어서요’라는 말을 자주 하고 듣습니다. 이런 말이 어떤 면에서 잘못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제가 덜 죽어서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이 말은 ‘아직도 제가 덜 죽어서 자꾸 죄를 짓네요. 제가 더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어쩌겠어요’라는 뜻입니다. 일부 맞는 면도 있지만 틀린 면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미국 사람이 될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끼? 영어를 열심히 공부가고 밥대신에 빵을 먹고, 젓가락 대신에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면 미국 사람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민권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영어가 좀 서툴러도, 젓가락을 사용해도 미국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독교는 타력 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수양을 통해서,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자격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고,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다보니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해간다고 말합니다. 갈 2: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NKRV)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이민국을 통과할 때 매번 긴장합니다. Immigration office를 통과할 때 몇번 끌려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조사를 받고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 시민들은 다른 줄에 서서 들어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자신을 많이 죽여서 좀 괜찮아 보여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변화된 존재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직 온전히 그리스도인답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신분을 갖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16 (NKRV)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이렇게 신분이 바뀐것과 동시에 보혜사 성령의 내주하심과 함께 합니다. 보혜사는 ‘변호해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변호해주시고 도와주셨던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변호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을 달라지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24 (NKRV)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본문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불리움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인데 그것의 의미가 바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그리스도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우리를 지배했던 정욕과 탐심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본문의 육체는 body가 아니라 self, sinful nature로 죄된 성품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이 표현을 잘못 이해해서 건강한 식욕, 숙면욕, 성욕과 같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한 욕구까지도 나쁜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육체를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인해야할 육체는 바로 우리의 죄된 본성인 것입니다.
4. 우리 속에서 경험하는 두가지 욕망
* 생각해볼 질문 :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 때 가장 큰 방해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된 신분을 주장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속에서는 신분의 변화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상태의 변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갈등의 상황이 계속됩니다 우리 속에 성령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육신을 입고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17 (NKRV)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속에는 이렇게 두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육체가 바라는 것과 성령이 바라는 것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간동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기에 이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지만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내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갈 5장 19-21절은 육체의 욕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갈라디아서 5:19–21 (NKRV)
19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욕심은 도덕적인 죄, 관계의 죄, 생활방식에 있어서의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성령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4 (NKRV)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속에 이 두가지의 욕망중에 어떤 욕망이 더 살아 꿈틀대고 있습니까? 이것은 결국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갈등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령의 욕망을 좇아서 갈등을 해결할 것인지, 육체의 욕망을 좇아서 갈등을 해결할 것인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기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래다녔어도 성령을 좇아 행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는데 여전히 인간적인 모습이 불쑥 불쑥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우리 속에 거룩한 모습과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거스르는 것으로 배우고 연습하지 않으면,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이란 그리스도 안에 속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답게, 그리스도께 속한 자답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존재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이란 우리 속에 일어나는 두가지 욕망중에서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욕망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술 작품을 알면 들여다보고 감상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이렇듯 무엇이든지 알면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 진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가? 그림에 대해, 음악에 대해 모르면 그것을 누릴 수 없다.
1)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또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아가면서 그분에 대해서 감탄하는 것, 그분께 몰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8–9 (NKRV)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본문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그분과 보내며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시는 현장에도 함께 있었고 그분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는 현장에도, 그분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했고 승천하신 예수님도 뵈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초대 교인들이 예수님을 본 일이 없는데도 그분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표현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초월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고, 그분을 생각하면 너무나 영광스러운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 차는 그런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미술 작품을 모르는 사람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데려다 놓으면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미술관 보다 공원의 벤치, 멋진 카페가 더욱 좋습니다. 하지만 정말 미술 작품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루브르 박물관에 보내준다면 최고의 영광이고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예배는 고역이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배는 말할수 없는 영광이자 즐거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2) 예배가 어떻게 가능한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요한1서 3:1, NKRV)
가기 싫은데 억지로 가서 앉아 있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에 대한 감격의 표현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죄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푸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해주셨습니다. 그 감격과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에게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달이 빛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지만 태양이 빛을 비추면 달이 그 빛을 반사함으로 밟게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그분께 비추는 것이 바로 예배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고 놀라운 사랑앞에 감격하며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예배속에 감격이 없다면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3) 예배의 중요한 두 기둥
우리가 하나님앞에 진정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두가지 중요한 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4, NKRV)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분을 예배할 때 우리는 영과 진리로(worship in spirit and truth)로 예배 해야 합니다. 영이란 하나님을 경험하고 누리고 느끼는 주관적인 부분이라면 진리는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진실들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객관적 진리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면서 그 내용을 실제로 체험하고 경험하는 영적인 부분도 동시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예배 드릴 때 진리파와 영파로 나뉘어집니다. 진리파는 진리만 이야기하고 영적 체험은 없는 경우입니다. 내용에 충실한 교리주의자들인데 뜨거움이 없습니다. 영파는 내용을 살펴보면 성경적이지도 않고 자기 주관적인 내용들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면서 신비로운 느낌이나 체험을 강조합니다. 열정과 뜨거움은 있는데 내용이 없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불붙은 논리’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지성이 필요합니다.
4) 예배의 축복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NKRV)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그분앞에 나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십니까? 군대에서 사단장앞에서 신고할 때 신임 장교들도 긴장을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두렵고 떨림으로 하지만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품에 안길 때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시고 인격적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쳐서 진이 빠져있을 때에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새힘을 얻게 됩니다. 한국 교회가 정말 회복해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배 입니다.
2. 세 가지 형태의 예배
*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은 언제, 어디서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아가고 경탄하고 그분께 몰입하는 예배의 세가지 형티
1) 개인의 찬미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브리서 13:15, NKRV)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개인 차원의 예배가 풍성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순간 순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혼자 노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단순한 노래, 악보 없이도 할 수 있는 노래를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불러 보십시오. 반드시 곡조가 있는 노래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앞에 개인적으로 아뢰고 고백하는 나의 이야기가 찬송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식후연초 불로장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들이 하는 말입니다. 식후에 한 대, 쉬는 시간에 한 대, 커피 한 잔을 마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대신에 ‘찬양 한 대’, ‘찬양 한 잔’을 해야 합니다. 일하다가 쉬는 쉬간에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듯이 옥상에 올라가서 찬양을 한 곡 부르고 내려오면 어떨 까요?
2) 공동체적인 예배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로새서 3:16, NKRV)
이 말씀을 공동체적으로 드리는 예배의 세가지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먼저는 하향적인 차원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수평적인 차원으로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상향적인 차원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동체적인 예배는 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오고, 우리끼리 서로 권고하고 가르치며, 우리에게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노래와 찬양이 있습니다. 개인이 홀로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그분을 예배할 때 더욱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공동체적인 예배는 문화에 따라 그 형태가 다양한데 간단하게 구분해보면 예전적 예배, 은사주의적 예배, 관상적 예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예전적 예배는 순서가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예배 스타일로 가톨릭이나 정교, 전통 장로교의 예배 스타일입니다. 은사주의적 예배는 오순절 계통이나 아프리카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로 예배 내내 일어나서 찬양하며 매우 열광적으로 예배합니다. 관상예배는 침묵하며 묵상하는 예배입니다. 이중에 어떤 예배 형태가 가장 좋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개인이 선호하는 형식이 있을 수 있지만 공동체는 이 다양한 방식을 함께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삶으로 드리는 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NKRV)
우리가 드릴 정말로 합당한 예배는 바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 입니다. 다른 말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커피를 내리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고객과 상담을 하면서 나에게 주신 재능을 활용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드려질 때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3.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
*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은 기도를 몇 분 정도 합니까?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금세 지나갑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조금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녀로서 이야기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1) 기도의 자세와 축복
빌립보서 4:6–7 (NKRV)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7절에는 기도가 어떤 축복을 가져다주는지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의지하고 모든 것을 위탁하고 기도하면 ‘그대로 응답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기도하면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다스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킴으로 그분의 뜻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고 튜닝하는 것입니다.
2) 기도에 대한 오해들
⓵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낸다고 생각,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여김으로 정성을 다한다. 에베소 사람들이 ‘크다 아데미여’라고 외치며 기도했고 바알 선지자들은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며 기도했다. 이렇게 노력하면 정성을 봐서 응답을 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⓶ 보험성 기도, 기도를 미리미리 해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생각.
⓷ 하나님을 가르치며 교육하는 기도, ‘하나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까 당신이 이렇게 응답하셔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⓸ 비인격적인 기도, 하나님과 쌍방향의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뒤돌아서는 기도이다. 마치 뭔가 문제가 있다고 교장선생님 방에 신입 교사가 들어가서 한참을 소리치며 뭔가를 이야기하고 나서 이제 교장선생님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듣지 않고 '이제 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하고 나가버리는 것이다. 기도에는 반드시 듣는 시간이 필요하다.
3) 기도 누리기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에 의지해서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를기뻐하십니다. 이러한 건강한 기도는 사실 우리의 상황을 바꾸고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우리의 마음을 바꿉니다. 이런 인격적인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남을 의식해서 현학적인 단어나 표현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4. 사랑으로 드리는 순종
* 당신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따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
우리는 에배와 기도로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또다른 특징은 바로 순종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NKRV)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예배나 찬양 시간에 입술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다면 그 다음에는 목숨 걸고 우리의 원수 까지 사랑해야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섬겨야 하고, 우리 주위의 소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예배는 열심히 드리고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고 희생하는 일에 매우 인색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런 이들은 영적 어린아이들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2) 순종의 방해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NKRV)
예수님께서 자신의 라이벌로 인정하신 존재, 대상이 있는데 바로 재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물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돈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돈으로 존경도 사고 건강도 사고 교육도 사고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상식으로 통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진정한 가치와 기쁨, 안전을 가져다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돈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인 사람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돈을 버느라고 가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시간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결국 돈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에 내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임을 기억하고 이를 주장해야 합니다.
3) 10-10-10의 습관
하루에 10분씩 세 번 하나님을 만나는 습관을 가지라. 아침에 일어나서 10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루 일과 중에 10분을 하나님께 드리고, 잠자리에 들기전에 10분을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가 왜 이런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까? 예배와 기도,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보이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지 사랑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더 얻어낼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희생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을 누리면 됩니다.
2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 Christ)
세번째 만남 하나님 알아가기
1. 그리스도 안에 속하기 전의 우리
* 생각해볼 질문 :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을 생각할 때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정말 많습니다.(최근 어린 아이를 죽인 부모들의 이야기) 잘 먹고, 잘 입고, 안전하게 교육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이중에 가장 큰 특권은 부모와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부모는 단지 돈을 많이 벌어다주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생각과 감정과 꿈을 나누고 아픔과 슬픔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부모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렇게 원래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관계보다 친밀하고 안전하고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해주는 그런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관계를 거부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셔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앞선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했다면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누릴 수 있는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몰랐던 예전의 우리 모습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복음 3:36, NKRV)
“1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1–3, NKRV)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를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것을 조금 더 풀어서 우리가 아들을 따르지 않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주 권세 잡은 자들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고 또 그들 가운데서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우리의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 행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도록 지음받았는데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과거, 현재, 미래적인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으로 우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며 받고 있고 받게 될 것입니다. 중력을 무시하면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중력을 무시하고 어깨에 보자기를 매달고 나는 슈퍼맨이다. 나는 중력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라고 외치며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상입니다. 심하면 불구 혹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이런 물리 법칙 만이 아니라 인생의 법칙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은 화를 낼 수는 있지만 해지기 전에 풀라라고 말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에베소서 4:26, NKRV)
이 성경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분을 품고 살면 그 화가 우리를 망가뜨리고 그 때문에 병이 생깁니다. 사람들을 대하고 관계를 맺을 때 진실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 입니다. 그런데 거짓을 일 삼으면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신뢰할 수 없는 인격이 됩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사야 59:2, NKRV)
위 본문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갈라졌다라고 말합니다. 위 본문 을 새번역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 사이의 관계가 깨져 있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내가 남편에게서 얼굴을 돌립니다. 그리고 남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무언가 말을 하는데 아내가 애써 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냉랭한 분위기가 가정을 압도합니다.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시선을 돌리시고 우리의 말을,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인생속에 하나님으로 채워야하는 부분들속에서 소외와 공허함을 느끼고 이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아내와의 관계가 냉랭해져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나, 거리의 여자들을 만나거나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그분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워서 이 공허와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서 성공을 추구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이성으로, 취미 생활로 이를 채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3) 구원의 기쁨을 기억하려면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이유는 과거에 자기가 어떤 존재였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였는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 생각해 볼 질문 :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사실로 인해 당신에게 가장 기쁨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과의 화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10–11, NKRV)
앞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라고 했다면 본문은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는데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수 상태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은 이러한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을때 너무나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 담대하게 지성소로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8–19, NKRV)
구약에서는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지성소로 들어가 시은좌에 피를 뿌리며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도 그곳에 들어갈 때 몸에 줄을 매달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자들입니까? 진노의 자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로 죽을 수 밖에 없던 존재들인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이제 우리가 지성소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두려움 없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1서 4:18, NKRV)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는 온전한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완전히 용납했다. 너는 내 자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네까짓게 무슨 그리스도인이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고 말도 안돼, 그렇게 살면서 성경 공부는 왜하는 거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참소에 무릎 꿇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회개해야만 죄가 없어지는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 목록을 만들어서 용서를 구합니다. 99가지를 기록하고 아뢰었는데 한가지를 놓쳐서 문제가 생기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마치 빨래를 하듯 용서를 구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용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용서의 효력은 우리의 회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시달려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회개가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후회와 비슷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후회는 ‘내가 왜 이랬을까? 한심해’라며 신세 한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하나님을 향해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 젖 뗀 아이처럼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편 131:2, NKRV)
본문에서 젖 뗀 아이란 젖을 다 먹고 난 다음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갓난 아이가 아니라 젖을 떼고 이유식을 먹는 아이, 이제 더이상 젖을 먹지 않는 아이를 말합니다. 젖을 먹는 아이들은 엄마 품에 잘 안겨 있다가도 배가 고프면 필사적으로 웁니다. 아이들은 ‘이제 나를 굴겨 죽이려는구나’라는 마음으로 운다고 합니다. 하지만 젖을 떼면 이제 엄마를 의지할 줄 압니다. 엄마와 충분한 애착관계가 생겨서 엄마 품에 안겨서 안정감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상태가 바로 젖 뗀 아이와 같이 안정감을 누리는 상태, 죄책감이나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한탄하며 울부짖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하는 보고 : 성경
* 생각해볼 질문 : 성경 읽기의 가장 큰 유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머니 품에서 무엇을 배울까요? 제일 먼저 어머니, 아버지를 알아갑니다. 자녀로서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부모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니님께서는 당신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셨습니다.
1) 성경 : 하나님에 대한 최고급 지식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는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1600여년에 걸쳐서 수십명의 저자가 기록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2, NKRV)
구약에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여러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면 이제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성경 :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서 4:12, NKRV)
당시 예리한 양날의 검은 최고의 무기였습니다. 오늘 날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서 강력한 레이저 빔과 같다’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쪼개고 우리 속의 문제를 분석하고 우리의 동기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해부하고 우리를 치료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우리가 낱낱이 해부되고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4. 말씀으로 자녀의 특권 누리기
* 생각해볼 질문 : 성경을 읽고 묵상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성경의 네 가지 기능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NKRV)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는 것
성경 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고, 잘못 갈 때는 책망하고, 바르게 교정하고, 다시 의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바꿔주고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바꿔줍니다. 성경은 먼저 우리의 존재(being), 성품을 바꾸어주고 이어 행위와 삶(doing)을 바꾸어 줍니다.
2) 성경을 누릴 수 있는 방법
⓵ 듣기 : 설교자의 말씀이 자신을 해부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들어야 한다.
⓶ 읽기 : 적어도 자신의 나이 만큼 읽어라, 통독도 좋지만 먼저 짧은, 좋아하는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어라.
⓷ 암송 : 머리로만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우리의 심령과 마음에 새기라.
⓸ 연구 : 말씀을 더욱 자세하고 정교하게 듣는 것이다.
⓹ 묵상 : 읽거나 들은 내용을 마음 속에 품는 것, 우리 각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3) 의무가 아닌 특권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 여러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기쁨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세계, 인간,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배우게 된다. 성경을 꾸준히 읽고 누리를 법을 배워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첫 번째 특권, 곧 하나님을 알아가는 축복을 누리자.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난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생기가 넘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도리어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처음엔 다 그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봐.”라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당연해지는 것은 온전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1)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누가복음 8:5–15 (NKRV)
5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에 모두 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중에 가장 중요한 것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비유는 주님께서 그 비유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것으로 11절에서 분명하게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씨가 뿌려져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 열매는 바로 12절에 의하면 믿어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뿌려지는 씨앗을 통해서 사람들이 이를 제대로 받아들여 구원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원의 내용은 앞서 살펴본대로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만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온전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 네 가지 밭
⓵ 길가 :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마귀가 그것을 빼앗아 감, 교만하거나 딴 생각에 빠져 있을 수도 있고 배후의 영적 세력이 믿지 못하게 함
⓶ 돌짝밭 :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잠시 믿다가 시련을 당하면 배반하게 됨,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⓷ 가시덤불 :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으로 인해 온전히 결실치 못함, 믿음 생활을 하지만 근심과 유혹에 넘어짐
⓸ 좋은 땅 :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함, 그러기 위해서 첫번째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두번째로 굳게 지켜야 한다. 굳게 지키고 간직하는 것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과 비교된다. 어려움 속에서 돌짝밭은 뿌리가 없음으로 날리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 말씀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세번째로 인내로 견뎌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가시 덤불과 같은 유혹과 염려가 엄습할 때 우리는 견뎌내야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돌짝밭과 가시덤불은 풍성한 삶을 통해 열매맺는 삶을 저해하는 방해물입니다. 우리들의 삶가운데 닥쳐오는 어려움과 역경, 유혹과 염려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뿌리를 깊이 내려 굳게 지키고 인내로 견뎌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 은혜와 믿음
* 생각해볼 질문 : ‘믿음이 좋다’,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것을 굳게 간직하며 견디는 것이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 (NKRV)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개역성경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영어번역이나 새번역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더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믿음일까요?은혜일까요?
1) 은혜
은혜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면서 감동을 받고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것도 은혜이긴 합니다. 하지만 은혜중의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반역하여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은혜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믿음
어떤 분들은 엡 2:8의 ‘이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문법적으로 볼 때 믿음, 은혜는 둘 다 여성 명사인데 반하여 본문의 ‘이것’은 중성 대명사로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엡 2:5은 이렇게 말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에베소서 2:5, NKRV)
범죄로 죽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고 사신 것이 은혜입니다. 믿음이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요약하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네’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기 어렵기 때문에 애써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자세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격적인지, 절대적인지를 모르기 때문에안다면 그렇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낚시배에서 낚시를 하다가 갑작스런 파도에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허우적 거리고 있는데 배에 있던 선장이 밧줄에 튜브를 달아서 던져 주었습니다. 그것을 붙잡고 가까스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던져준 밧줄이 은혜라면 그것을 덥석 잡은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있는지 안다면 밧줄을 잡는 그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정확하게 밧줄을 던져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심으로 구원의 밧줄을 우리에게 정확하게 던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다면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3.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 생각해볼 질문 : ‘미신’이나 이단의 믿음과 기독교의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우리는 앞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으들이고 그것을 품고 굳게 간직하고 인내로 지키는 것이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은혜를 감사로 받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성경에서 믿음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좀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 믿어야 할 두 가지
히 11:6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정의해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NKRV)
본문은 우리에게 두가지를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이 계신 것, 두번째는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계관은 전제의 문제입니다. 유신론은 신을 믿고 무신론은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유신론은 신이 있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무신론은 신이 없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두번째로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고 받고 싶은 것을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 돈, 승진, 공부 등등등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상이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주시고 싶어하시는 구원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이 바로 복중의 복이고 상중의 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인격적으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2) 잘못된 믿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잘못된 믿음이 여럿 있습니다. 미신은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맹신은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광신은 자기 멋대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확신입니다. 확신이란 사실에 근거해서 믿는 것, 진리에 근거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해서 암에 걸렸다고 생각합니다. 엄마의 믿음이 부족해서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고 대학에 떨여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대학에 떨어지면 부모들은 얼굴을 못들고 다니고 남편이 사업이 잘 안풀리면 아내들은 얼굴을 못들고 다닙니다. 강하게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을 복을 주셔서 살 잘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을 척결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지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을 강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샤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에서는 특히 이런 성향이 강합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강하게 믿으면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그것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믿음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나가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과 새벽에 정화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지성으로 빌면 그렇게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두통이 심합니다. 어떤 약을 먹어야 합니까? 두통이 있으면 두통약을 먹어야 한다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소화제를 먹으면서 이걸 먹으면 두통이 나을꺼야라고 굳게 믿고 소화제를 먹습니다. 바른 사실위에서 바른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강하게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한 믿음을 보시고 원래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걷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내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는데 건강 대신에 질병을, 사업의 성공 대신에 실패를, 결혼 대신에 오랜 독신 생활을, 가족의 치유 대신에 죽음을 주시면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불평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분노를 품거나 하나님을 떠나버리고도 했습니다. 바로 잘못된 믿음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우리의 신심으로 하나님을 움직여 내 뜻을 이루어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고 이해하고 믿음으로써 내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되고 성숙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정말 중요한데 그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4. 믿음으로 사는 삶의 원리
* 생각해 볼 질문 :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들은 살면서 갑자기 우울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너무 외롭고 울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무관심하신 것 같아. 오늘은 하나님이 날 떠나신것 같아’ 이런 마음이 들때 그 느낌을 따라 울적해져 낙심하는 것이 보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느껴지는 외로움과 울적함, 하나님께서 날 떠나신 것같다라는 느낌은 인정하되 그 느낌에 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느낌에 굴복해서 폭음을 하거나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든다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내가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빠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지만 이런 우리를 위해 대신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됩니다. 비교의식에 휩싸여서 눈을 붙이지 못하며 자신을 자책하며 실패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 지금 그 일이 진행중이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어느 순간 문득 결국 '사람은 혼자야, 다 필요없어. 기껏 마음을 털어놨더니 내 진심도 몰라주고 이게 무슨 진실한 공동체야. 순 엉터리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한 가족으로 부르셨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되게 하셨음을 믿고 하나님이 우리를 성장시켜주실 것이다’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시각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2) 믿음과 느낌의 문제
Fact(사실)-Faith(믿음)-Feeling(느낌)
기관차가 중요하고 석탄차, 객차의 순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다 무너집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실제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를 통해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체험이 이 기차를 이끌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은혜를 받는 순간 어떤 사람은 주황색 빛을, 흰 빛을, 눈물을 흘리는 사람, 따뜻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험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사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믿을 때 느낌, 체험이 따라오게 됩니다.
3) 믿음의 의미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을 그분 앞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주장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낙심하는 마음이 생길 때 이렇게 사실에 근거하여 주장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NKRV)
“기모야. 왜 낙심하니? 힘내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는데 낙심하지 말고 견뎌봐.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꺼야’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축복을 꺼내 쓰는 것입니다. 말씀을 주장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약속의 공동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라고 느껴질 때,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믿음의 공동체 안의 신뢰하는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자신의 어려움과 아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NKRV)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아주 풍성한 삶, 이 땅에서 매우 매력적이고 균형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세가지 이유
1) 예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2)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고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3) 균형있는 삶을 잃었기 때문에
'풍성한 삶의 기초'를 실패하는 일곱 가지 비책
1) 내용을 대충 빨리 읽으십시오.
2) 대답은 ‘예’, ‘아니오’로만 하고 만남을 짧게 하십시오.
3) 과제물과 성구 암송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4) 급하고 바쁜 일이 있을 때는 한 번쯤 쉬십시오.
5) 이끄미와 따르미는 ‘나눔’ 시간 외에 굳이 만나거나 연락하지 마십시오.
6)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그냥 강의만 듣고 이야기만 하십시오.
7) 노련한 이끈미라면 여러 명과 해야 훈련이 더욱 풍성해진다고 생각하십시오.
1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나(New Creation in Christ)
첫번째 만남.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축복
1.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은 언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까?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 가짜 대학생 행세(졸업장을 얻지 못함), 가짜 그리스도인(구원을 받지 못함)-교회의 문화만을 누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회의에 빠지고, 기독교와 기독교 문화에는 익숙하지만 실제로 생명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모태 신앙-못해 신앙)
1) 출발점에 대한 오해 : 모태신앙, 영접 기도, 세례, 구원의 확신(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면서 구원의 내용은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
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⓵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과 나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나의 주인이시다. -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⓶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고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 우리는 죄인이다.(롬 3:23) 죄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거부하고 내 인생이 내것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다.
⓷ 죄인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가 지불해야할 대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지불하게 하셨다. -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
- 자신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악한 세상에서 악에 물들어 살아가는,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그 심판을 대신 짊어지신 것이다. 내가 죽어야할 자리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성찰해야 그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감격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 영접이란 ‘제가 죽을 목숨인데 당신이 생명을 걸고 나를 살려주셨으니 이제부터 제가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을 좇아다니면서 내 생명을 살려주신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살겠습니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첫번째 진리를 거부한 것이 죄이다. 이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하셨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제 다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했다라고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NKRV)
2.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이들의 고백
* 생각해볼 질문 : 스스로를 자신있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사도 바울의 고백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로마서 14:7–9, NKRV)
그리스도인은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주님을 위해서 산다라는 말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아내를 위하여, 아내의 것)
2)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의 삶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다’라는 고백의 진정성은 인생의 모든 선택의 순간에 나타난다. 직장, 이성교제, 결혼, 자녀 양육, 주택 구입…(마음의 회심과 지갑의 회심)
3) 완벽과 진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완전하지 못하다.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했음에도 사탄은 우리의 완벽하지 못한 부분, 부족한 부분, 덜 성숙한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야’라고 참소한다. 훈련소에 갓 입소한 훈련병과 특전사 모두 군인이다. 지금 나의 신앙의 모습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이를 배우고 노력함으로 성숙함을 추구해 가야 한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남아있지 말고 자라가야 한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1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당신이 누리게 된 좋은 것들은 무엇입니까?
- 집안에 거액의 돈을 숨겨두고 죽은 노인, 엄청난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세가지 축복
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12, 롬 8:1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NKRV)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15, NKRV)
우리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인 것을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가 주인 행세를 하여 죄에 팔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세상과 죄, 욕심과 정욕에 종이 되어 있는 우리를 값을 지불하고 되사오셨습니다. 우리의 가격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적혀 있습니다.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 1:13–14, NKRV)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죄사함을 받았다.
2)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다.
우리는 사실 별볼일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더이상 평범한 존재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NKRV)
우리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별볼일 없는 나뭇가지였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2:10, NKRV)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 포이에마, 걸작품(masterpiece)이다. 우리는 자신을 불량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속에 지우고 싶은 상처와 아픔이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하실 때 인간이 절대 빚을 수 없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깨진 인생, 회복하기 힘들어 보이는 인생을 하나님이 만지실때 그 인생이 특별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사도 바울을 만지신 하나님)
4.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 2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면서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까? 언제, 왜 그런 생각이 듭니까?
3)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다.
고아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에베소서 2:19, NKRV)
본문은 우리를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부른다.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서로 보살피고 사랑하는 특권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린도전서 12:27, NKRV)
우리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다. 가족이 사랑하고 보살피는 관계라면 그리스도의 몸은 유기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1–22, NKRV)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미워하실꺼야, 내가 잘못하는 것을 책망하시고 심판하려고 하실꺼야’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야’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난 별볼일 없는 존재야. 내 삶에 뭐 볼게 있나?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러?’라고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가족 공동체에 속했다’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는 혼자야. 난 외로워. 아무도 내 옆에 없어’라고 믿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이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고 꾀죄죄하고 매력 없는 사람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일을 알고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매우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는 방법을 배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2. 선교적 트라이앵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신 곳에서 세상을 향해 복이 되어야 한다.
선교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게 하는 것’인데 이때 예배란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3. 아브라함에서 이스라엘이 나뉘기까지
1) 창세기 :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2) 출애굽기 : 모세의 영도하에 애굽을 탈출하는 이야기
출애굽기 19:5–6 (NKRV)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전쟁, 사사시대를 지나 왕정(사울-다윗-솔로몬),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4. 부르심의 목적을 잊은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불순종
예레미야 21:7 (NKRV)
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다시 흘려보내기를 원하셨다. 즉 그들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지고, 예배받길 원하신 것이다.
2장. 예수님이 읽으신 다니엘서
누가가 전한 복음을 살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상당히 긴 시간동안 성경말씀을 풀어주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예수님이 읽으신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한다. 눅 24장 46-47절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 선교에 관한 내용이다.
누가복음 24:46–48 (NKRV)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1. 다니엘서의 핵심 주제, 선교
구약에는 선교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놀랄 정도로 많다.
사 19:19-25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가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마 24:15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서에 기록된 부분을 언급하셨다.
2. 이방의 빛이 되어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
제자들은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인가라고 질문한다.(요 9:1-2) 당시의 세계관으로는 당연한 질문인데 예수님은 다른 대답을 하신다.(요 9:3-4)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이는 사 42:6-7에 분명하게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의 빛이 되어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는 것’이다.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는 요 9장의 사건에서 정작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제자들인 것이다.
3.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시면서(막 7:24-30) 의도적으로 이 헬라여인을 도발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헬라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자신은 유대인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드러내셨다.
마 8:5-13에서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해서도 사역하셨다.(마 4:23-24 : 갈릴리, 수리아)
모든 성도는 두번 거듭나야 한다. 첫번째 거듭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고 두번재 거듭나는 것은 그 구원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선교에 눈뜨지 못한다면 성경을 선교적으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3장. 네 제국과 이스라엘의 역사
1. 바빌로니아(바벨론) 제국
- 함무라비 법전,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1세, 느부갓네살 2세때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옴, 바벨론은 벨사자르(벨사살) 왕 때에 피르시아(바사)의 키루스(고레스) 2세에 의해 멸망한다.
2. 페르시아(바사) 제국
키루스(고레스) 2세는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 신앙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성전 제사를 허락한다.
고레스와 캄비아스 2세가 죽은 혼란을 틈타 다리우스(다리오) 1세가 반란을 진압하고 왕이 된다. 이후 그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1세(에스더서)가 통치한다. 이후 아닥사스다라고 불리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아들 다리우스가 페르시아 왕으로 즉위할 무렵 알렉산더 대왕이 쳐들어오게 된다.
3. 그리스(헬라) 제국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과 크세르크세스 왕 때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들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알렉산더 대왕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로스 3세가 그리스 전역을 석권하고 헬레니즘 시대를 이룬다. 자신이 지배하는 곳에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다니엘서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나라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분열된 네 왕국 가운데 프톨레마이오스라는 남왕국과 셀레우코스라는 북왕국이다.
4. 로마 제국
로마는 주전 260년, 216년의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쥐게 된다. 주전 50년경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등장한다. 카이사르가 갑자기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목되어 이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으며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다. 이후 팍스 로마나를 누리게 된다.
4장. 두 가지 언어로 기록된 책
당시 히브리어는 이스라엘 민족만 사용하는 언어인 반면 아람어는 바벨론을 포함하여 시리아 등 근동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국제 언어였다. 따라서 다니엘서 가운데 2-7장의 이야기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을 벗어나 더 광범위한 독자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아람어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교차대구법(chiasmus)
어떤 일을 서술할 때 짝을 이루는 표현을 순차적으로 하지 않고 순서를 바꾸어 교차가 이루어지게 배치하는 것이다.
2. 다니엘서의 배열
다니엘서 2장과 7장의 주제는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이다. 다니엘 3장과 6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직면하게될 고난이다. 그리고 다니엘 4장과 5장의 주제는 ‘세상’의 왕들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작동되고 있는 원리를 보여준다.
5장. 비자발적으로 간 이방 땅_다니엘 1장
1. 다니엘 1장, 예언대로
당시 유다는 정세판단을 잘못하여 바벨론에 멸망하게 된다.
2. 비자발적으로 간 선교 모델
선교의 네가지 모델
1) 자발적으로 간 모델 : 아브라함, 바울
2) 비자발적으로 간 모델 : 요셉, 나아만 장군 집의 여자 종, 다니엘과 세 친구
3) 자발적으로 온 모델 : 시바의 여왕,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
4) 비자발적으로 온 모델 :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들
3.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바벨론 제국에 패전국의 포로로 잡혀온 젊은이들. 히브리 이름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이고 바벨론 이름은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였다.
이들은 왕의 음식을 거절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4. 고립과 동화
동화(assimilation)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현지인들과 완전히 같아지는 것이고 고립(isolation)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현지인들과 거리를 두는 경우를 말한다. 완전한 동화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고 완전한 고립은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존재적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선교지의 문화나 윤리를 따르는 것이 혹시라도 기독교적인 기준을 떨어뜨리지는 않을 지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선교사도 육신을 가진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동화와 고립의 중간 영역에서 살아야 한다.
2부. 하나님 나라의 비밀
6장. 깊고 은밀한 일_다니엘 2장
다니엘 2장은 아람어로 기록된 부분의 시작인 동시에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알려 주시려는 그분의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이다.
1. 다니엘 2장, 강력한 광물로 상징되는 네 나라
2. 돌 하나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
뜨인 돌이 신상을 부서뜨리고 점점 커져 산을 이루었다.
성경에 이처럼 가치없는 돌에 비유된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다.
이 나라에 대한 해석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킬 것이다.
영원히 설 것이다.
3. 목숨을 내놓을 만큼 중한 것(something to die for)
다니엘과 친구들은 '깊고 은밀한 일'을 깨달음으로 무엇을 위해서 죽어야 할 지를 알게되었다.
7장. 열방에 알리라_다니엘 3장
다니엘서 2장은 다니엘은 중앙 정부의 고위 관리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지방 관리가 된 것으로 끝맺는다.
1. 다니엘 3장
‘깊고 은밀한 일’을 깨달은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 금 신상을 만들어 거기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굴에 던져 넣을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린다.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고 이에 느부갓네살 왕은 노하여 평소보다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여 그들을 던져넣었지만 신들의 아들같은 존재가 그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을 보호해준다.
2. 다니엘서의 구조_선교적 상황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던 민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 선교다. 이처럼 선교를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는 ‘선교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선교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세상 가운데 선교적 존재로 있어야 한다.
선교적 상황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으로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게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이다.
3. 모든 백성과 모든 민족과 모든 언어로
다니엘의 3장의 선교적 관심사는 다니엘의 세 친구가 담대한 믿음으로 풀무 불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낳은 결과이다. 느부갓네살 왕은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한다.
다니엘 4:1–3 (NKRV)
1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조서를 내리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큰 평강이 있을지어다
2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3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위대함을 알리기를 원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이 선포된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이후 단 4, 5, 6장에서도 등장하고 이후 행 2장과 계시록 7장에도 등장한다.
4. 담대함의 근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나 성경을 해석해주심으로 마음이 뜨거워짐으로 증인의 삶을 살게 된 것처럼 ‘깊고 은밀한 일’을 깨달은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용기,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다.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풀무불에서 신들의 아들로 표현된 영적 존재가 세 친구를 불 속에서 끄집어 내준 것은 아니다. 사람의 모습을 한 존재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한 이 젊은이들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있어 주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언제나 순탄한 길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과 언제나 함께하겠다는 최고의 선물을 주셨다.
8장. 누가 참 하나님인가_다니엘 4장
1. 다니엘 4장-이상한 꿈
느부갓네살 왕은 꿈속에서 아주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가 자랐고 어느날 어떤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잘랐다. 이 꿈을 다니엘이 해석한다. 이 나무는 느부갓네살로 하나님이 그를 치셔서 얼마동안 짐승처럼 살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니엘은 왕에게 불길한 꿈이지만 솔직하게 이를 해몽하고 왕에게 직언을 한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
왕의 꿈을 해석하는 다니엘의 태도는 매우 진실하다. 그는 왕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왕에게 애정어린 충고까지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이 비록 악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일지라도 사랑과 진실로 대해야 한다. 그것만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만 아니라 세상도 동일하게 살아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교적’ 태도다.
3. 세상이라는 시스템의 작동 원리
자만심은 모든 인간안에 있는 ‘세상이라는 시스템의 작동 원리’다. 그 시스템의 작동 원리는 언제나 자신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더 높아지고, 더 커지고, 더 강해지라는 것이다.
세상의 시스템 속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높아지고 더 높아져서 결국 하나님의 자리까지 가려고 한다.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로 들어가고, 결국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4. 에덴동산에서의 실패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는 세상의 시스템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나타났다.
인간만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천사도 있었다.(사 14:12-15)
5. 되풀이되는 인간의 자만
느부갓네살 왕의 일화는 모든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침범하는 것을 경계할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다.
사도행전 12장의 헤롯의 죽음도 비슷하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받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9장.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_다니엘 5장
1. 다니엘 5장
벨사살 왕은 왕궁에 1000명의 귀인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 이 때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져온 금잔으로 술을 마신다. 이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라고 기록한다. 다니엘은 이를 ‘내가 저울로 왕을 달아보니 모자라더라 그러므로 나라를 나누어 다른 왕에게 줄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2. 벨사살 왕의 교만
세상은 세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시스템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강요한다. 벨사살 왕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자랑했다. 연회에서 하나님의 기물들을 술잔으로 사용하며 하나님을 조롱할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메네는 ‘세어 보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메나’이고, 데겔은 ‘무게를 잰다’는 의미의 동사 ‘데칼’로, 그리고 ‘바르신’은 ‘둘로 쪼개진다’는 의미의 동사 ‘페라스’로 해석했다.
3. 다니엘의 충고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안에서 살지만 비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지도, 그렇다고 세상에 완전히 동화되지도 않는 매우 어정쩡한 중간 지대에 살아야 한다. 중간 지대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사는 것이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다.
출애굽기 19:6 (NKRV)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베드로전서 2:9 (NKRV)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4. 사람이 모르는 것
벨사살 왕은 연회를 베풀면서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 허풍을 떨었다. 그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앞에 회개해야 했다. 결국 그날 밤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날 자신을 데려가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까불면 결국 망한다.
10장. 가만히 계시지 않는 하나님_다니엘 6장
1. 다니엘 6장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의 이야기
다니엘은 바사왕 다리오에 의해 세 명의 총리가운데 한 명으로 발탁된다.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서 왕의 금령을 내려 한 달동안 왕이외에 어떤 신에게도 경배하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에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신다.
2. 고레스의 정책
키루스 2세로 알려진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앙과 제례 의식도 허가했다.
3. 돌아가지 않는 다니엘
다니엘은 바벨론에 이어 바사에서도 고위직에 있었지만 모함을 당하며 어려움을 당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증거하기 위해 세상 안에 살아야 한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온 것은 비자발적이었지만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니엘은 자발적으로 남기로 했다.
4. 전에 하던 대로
단 1장에서 ‘뜻을 세우고’에 주목했다면 6장에서는 ‘전에 하던 대로’에 주목해야 한다. 습관이 결심보다 중요하다.
5. 하나님의 살아계심
가장 연약한 인간의 방법이야말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장 강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는다.
11장. 영원한 나라_다니엘 7장
1. 다니엘 7장
다니엘은 네짐승의 환상을 본다.
네 짐승은 세상에 일어날 네 왕을 의미하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나라를 얻게 되는데 그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2. 장차 올 네 나라
3. 환상과 해석
4.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 세상
첫째 다니엘 7장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단 7:9-10)
둘째 다니엘 7장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단 7:13-14)
본문의 인자 같은 이를 예수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볼 수도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리요,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비유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메석 도상에서 주님을 만날 때(행 9:4-5)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왜 교회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시지 않고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셋째 다니엘 7장은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다에서 올라온 네 마리 짐승은 바로 세상을 대표한다.
네마리 짐승과 비교하면 ‘인자 같은 이’로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은 연약해 보이기 짝이 없다. 그러니 그런 짐승들이 있는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성도들의 삶은 고난과 어려움을 전제로 한다.
5. 고난에도 끝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심판의 날은 한 때요, 두 때요, 네 때요, 여덜 때요 하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때와 두 때가 지나간 후 갑자기 반 때로 끝이 나버릴 것이다. 이것이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파트 3. 종말에 관한 비밀
다니엘 1-6장은 역사적 상황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 형태로 기록했지만 다니엘 7장부터는 환상만이 계속 펼쳐진다.
12장. 종말의 트라이앵글_다니엘 7장
다니엘 2-7장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밀을 모든 민족에게 알려주려는 소책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다니엘 7장은 그 소책자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장인 동시에 7-12장에 등장하는 네 가지 환상의 시작이기도 한다.
1. 종말의 트라이앵글
2.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
다니엘 7장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3. 두번 오시는 메시아
누가복음 4장과 이사야 61장의 비교.
4. 종말과 선교
2000년이 지나도록 주님은 아직도 다시 오지 않으셨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종말 기간이야말로 성령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선교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5. 정한 때_한 때, 두 때, 반 때
다니엘 7장과 계시록 13장의 비교
3년 반, 마흔 두달, 1260일
6. 교만한 뿔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오는 시점에 나타날 예표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3장. 교만한 뿔_다니엘 8장
아람어로 기로괸 부분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공개된 내용이라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는 의미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일부러 감춘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다니엘 8장
다니엘을 벨사살 왕 제 삼 년에 다시 환상을 본다. 강가에 두 뿔가진 숫 양이 서 있었는데 한 뿔이 다른 뿔보다 길었다. 이후 한 숫 염소가 서쪽에서 나타나 숫 양을 이겼다.
다니엘일 본 두 뿔가진 숫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며, 털이 많은 숫염소는 헬라왕이다.
2. 숫양_키루스 대왕
두 뿔가진 숫양은 메대와 바사제국이고 서쪽에서 나타난 숫염소는 헬라제국으로 언급하고 있다.
메대는 바사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더 큰 나라였지만 작은 나라인 바사, 페르시아에 흡수되었다. 메대를 흡수한 페르시아 왕이 키루스(고레스) 대왕이다.
키루스 대왕은 열린 태도를 가지고 제국을 통치했다. 바벨론 제국은 다른 민족들의 문화와 종교를 허용하지 않고 바벨론 종교를 강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사의 고레스 대왕은 유대인들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건설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제국 내의 여러 종교를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숫염소인 그리스, 헬라가 일어나 숫양을 멸망시킨다.
3. 숫염소_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이 내전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을때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일어나 도시국가를 지배하면서 페르시아를 공격한다. 필리포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이된 인물이 그의 아들로 단 8장에서 ‘온 지면에 두루 다니되 땅에 닿지 않는 숫염소’로 표현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4. 두 왕국과 예루살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이 점령한 곳은 어디서나 헬라어를 사용하도록 했고 이는 이후 복음전파의 중요한 무대를 마련하게 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 갑자기 33세의 나이에 죽게되고 헬라 제국은 4개로 분할된다.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 리시마코스 왕조이다.
5.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이집트를 기반으로 한 왕국으로 다니엘서에서 ‘남방 왕국’으로 지칭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는 알렉산드리아로 그리스 문화와 교역의 주요 중심지였다.
6. 셀레우코스 왕국
헬레니즘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피지배계층의 문화를 탄압하고 그리스화를 강요했다.
7.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이스라엘은 처음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편입되었었지만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3세의 정복 야욕으로 점령당한다. 안티오코스 4세는 자신을 제우스의 현현이라는 의미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고 불렀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의 광기를 조롱하기 위해 미쳤다는 의미의 ‘에피마네스’라 불렀다.
8. 적그리스도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4세는 주전 167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의 신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에 항거해 유다 마카베오가 무력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였다.
9. 일어나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다니엘은 환상때문에 여러날 누워 앓아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일어나 왕의 일을 다시 보았다. 다니엘 6장에는 그의 마음이 ‘민첩했다’라고 또한 '허물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그 직장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계속 증거하고 있었다.
14장. 일흔 이레_다니엘 9장
1. 다니엘 9장
다리오왕이 통치를 시작한 첫 해에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읽다가 예루살렘이 70년동안 황폐해지고 마침내 그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고 금식하며 기도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다니엘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을 묵상하며 읽었다는 사실은 매우 신선하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하셨듯이 환상이나 천사들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이미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해 전해주신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3. 선지자적 비관주의
선지자들은 대부분 비관주의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며 그 잘못이 가져다줄 결과가 무엇인지를 미리 내다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
유대인들이 고레스 칙령으로 희망을 안고 예루살렘을 돌아가 힘써 성전을 건축하고 일상의 삶을 회복한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사나운 나라 왕이 쳐들어와서 다시 성전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미래를 보게된 것이다.
주전 164년 마카베오 항전의 결과 유대교에는 다양한 분파가 등장한다. 조상들의 유전을 포함하여 율법의 일점일획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하며 외식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성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고수하려는 기득권층의 사두개파 사람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이 한 것처럼 무력 투쟁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젤롯당(열심당) 사람들, 이도저도 싫어서 사람들을 떠나 광야로 들어가 은둔한 에세네파 사람들 모두 하나님이 진정으로 바란 모습이 아니었다.
4. 기도의 능력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5. 기도의 사람
다니엘 1장에서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가 살게 된 적국에서 어떻게 지내야할 지를 구했다.
다니엘 2장에 등장하는 ‘깊고 은밀한 일’도 그의 능력이 아니라 기도로 알게 된 것이다.
다니엘 6장은 더 구체적으로 다니엘이 매일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 9장은 다니엘에 무려 세 이레에 걸쳐 기도하는데 그 기도로 말미암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데이비드 웰스는 기도를 ‘현상에 대한 반역(rebelling against the status quo)”라고 말했다.
종말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제목은 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
6. 일흔 이레
70*7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이레가 7일이나 7주, 7개월 혹은 7년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7. 안티오코스 4세적 관점
주전 167년에 성전을 훼손한 안티오코스 4세의 만행을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린 일’의 근거로 보는 것이다.
8. 그리스도적 관점
단 9장 25절에서 말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는 의미이다.
9. 사건 중립적 관점
본문의 ‘일흔 이레’를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과 역관시키지 않는 것이다. 안티오코스 4세적 관점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 앞으로 전개될 종말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리스도적 관점도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종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종말과 관련해서 본다면 설명에 한계가 있다.
15장. 큰 은총을 받은 사람_다니엘 10장
1. 다니엘 10장
다니엘은 힛데겔 강가에서 큰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된다. 이에 세 이레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세마포 옷을 입은 한 사람을 보게 된다. 이 환상을 보는 동안 다니엘을 두렵고 힘이 빠져 깊이 잠들었는데 어떤 영적 존재가 나타나 다니엘을 위로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부르며 강건하라고 권한다.
2. 환상을 보는 사람들
환상을 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하고 경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적 자신감이 충만하여 주위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든다. 하지만 다니엘은 환상을 봄으로 매우 지치고 힘들어 한다. 앞으로 벌어질 어려움을 미리 보기 때문이다.
- 이사야(사 6:1-7)
- 사도 바울(고후 12:1-7)
다니엘이 본 환상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을 자신의 종교적 메달처럼 자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상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3. 큰 은총을 받은 사람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은 그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호칭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겠다고 하셨고, 그들을 강건하게 하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다.
3. 영적인 눈
엘리사처럼, 그리고 다니엘처럼 영적인 눈이 열려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16장. 남왕국과 북왕국_다니엘 11장
1. 다니엘 11장
다니엘 11장에서 천사는 장차 일어날 사건을 매우 자세히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강력하던 헬라 왕 알렉산드로스 이후에 벌어지는 남왕국과 북왕국 사이의 전쟁과 관련되어 있다.
2. 역사적 사건들
다니엘 11장 2절에 ‘이제 내가 참된 것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을 개역 개정에서는 단순하게 ‘참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 부분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3.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등장
다니엘 11장 21-35절은 안티오코스 4세라는 한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4. 이후에 나타날 인물
5. 상징적 인물_적 그리스도
다니엘 11장에 등장하는 이 뻔뻔스러운 왕은 역사속에 등장하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슬람 군주들, 칭기스칸과 그 후예, 나폴레옹, 히틀러
하지만 역사의 그 누구도 성경이 말하는 완성된 적그리스도가 아니었으며, 아직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끝은 아니다. 종말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종말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17장. 자기 일에 충실하며_다니엘 12장
1. 다니엘 12장
하나님은 종말의 시간을 맞이하는 하나님 백성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보여주신다.
2. 전쟁과 고난
다니엘서의 마지막 환상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장차 올 고난을 견뎌야 한다고 전한다.
3. 부활의 소망
다니엘 12:2–3 (NKRV)
2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4. 자신의 일에 충실하라
5. 인내가 필요한 시간
종말이 되면 세상의 왕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정된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서는 심판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하지만 그 종말의 시간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는 선교의 시간이기도 하다.
종말에 닥칠 어려움은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려움은 끝난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그 기간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주님이 곧 오신다. 그리고 고난의 기간은 마침내 끝날 것이다.
6. 여러운 해석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부분이 많다. 모호한 것들을 알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면서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신명기 29:29 (NKRV)
29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4부. 드러난 비밀
18장. 여명을 기다리며
1. 이스라엘 땅으로의 귀환
1차 귀환 주전 538년 키루스(고레스)왕의 칙령
2차 귀환 주전 458년 에스라 귀환-신앙 부흥 운동
3차 귀환 주전 444년 느헤미야 귀환
2. 그리스와 유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대인들과 평화롭게 지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이스라엘 북쪽은 셀레우코스 왕국이, 남쪽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들어선다. 셀레루코스의 안티오코스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옹국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스라엘의 지배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서 셀레우코스 왕국으로 넘어간다.
이후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 전쟁에서 패배하며 배상금을 갚기 위해서 신전을 약탈한다. 그의 아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교를 핍박한다.
3. 마카베오의 항전
마카베오는 안티오코스 4세에 의해 훼손된 성전을 다시 세우고 정화하여 하나님께 봉헌한다. 이것이 요 10장 22절의 수전절로 하누카라고도 한다.
주전 142년 유다는 셀레우코스 왕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다. 이후 요한 힐카누스가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실질적인 통치를 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하스모니안 왕조'라고 부른다.
4. 로마와 유대
로마 제국이 보기에 유대는 시리아에 붙어 있는 작은 나라로 직접 총독을 파견하지 않았는데 이후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을 다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로마는 유대지역을 위한 총독을 따로 파견한다.
안티파터의 둘째 아들 헤롯은 유대지역의 분봉왕이 되어 로마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헤롯 성전을 짓는다.
5. 유대교의 네 가지 분파
첫째 사두개파 : 주로 하스모니안 가문을 중심으로한 제사장 가문으로 기득권층, 모세오경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장로들의 전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째 바리새파 : 하나님의 율법에 관심이 많았다. 천사나 부활을 믿었다.
셋째 에세네파 : 종말 신앙을 강조하며 산이나 광야로 도피해 들어가 공동체 생활을 했다.
넷째 젤롯당 : 로마정부에 대항하여 군사적 저항을 하는 그룹
이 네 그룹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적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교적 삶이란 세상과의 괴리가 없어야 하는데 이들은 모두 세상과 분리되어 성전 중심, 율법주의, 현실 도피, 무력 투쟁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목적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유대인들이 겪은 어둠과 혼돈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가까이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장. 하나님 나라의 시작
1. 헬라와 로마가 만들어 놓은 무대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이 유대인들에게 여러면에서 고통을 안겨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헬라와 로마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 의해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기 위한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⓵ 헬라 제국과 로마 제국 안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헬라어
⓶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
⓷ 놀랍게 발달된 도로망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⓸ 로마 제국 안의 안전 보자 : ‘팍스 로마나’
⓹ 유대인 디아스포라인들 : 가는 곳마다 회당을 세우고 모여 살았다.
2.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다니엘 2장에 나오는 사람 손으로 만들이 않은 공숭에 떠 있는 돌멩이 같았지만 그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산을 이루고 지난 2000년 동안 세게 속에서 없어지지 않는 나라로 서게 되었다.
3. 세례요한의 외침
- 오리라한 엘리야
4. 나사렛 예수
5.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선생님의 말씀만을 믿고 예루살렘에 왔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생명을 바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살겠다고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20장. 명예인가 멍에인가
행 6장에 나오는 ‘히브리파’는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헬라파’는 헬라어를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1. 헬라파 유대인의 역할
선교란 한 문화 안에 있던 복음을 문화를 넘어 다른 문화로 전달하는 타문화 사역이다. 따라서 한 문화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기 전에 타문화 사역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한계를 아셨다. 타문화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언어를 할 줄 알고 타문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2. 성전과 하나님
초대교회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유대주의에 함몰되어 다니엘이 본 것과 같은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즉 그 깊고 은밀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헬라인들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복원된 성소가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의 가치를 폄하하는 스데반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사람들을 스데반을 데리고 나가 돌로 쳐서 죽였다.
3. 안디옥에서 생긴 일
스데반의 죽음이후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드디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퀴리오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교도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다.(상징 빼앗기) 성령이 충만한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이 다른 곳에 복음을 증거하도록 파송한다.
4. 헬라인과 유대인의 갈등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도로 많은 헬라인들이 복음에 반응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헬라인들의 구원을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5. 헬라인에게는 헬라식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공회를 열어서 많은 변론을 행한다. 행 15:7의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유대의 전통을 ‘멍에’로 여겼다. 이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와 율법은 그들의 ‘명예’였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와 백성들도, 혁명을 통해서 율법을 지키기 원했던 마카베오의 일행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들이 가장 명예롭게 여기던 할례와 율법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것에 방해가 되기에 ‘멍에’라고 한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이방인들의 회심을 보면서 그리스도외에 어떤 것도 덧붙여서는 안된다고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이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도 예루살렘 회의 결과를 정리한다.(행 15:25-29) ‘성령과 우리는’
이처럼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결정으로 복음은 아무런 거침이 없이 로마 제국 내 이방인들 사이에서 신속하게 증거되기 시작했다. 이제 복음은 유대 문화라는 끈을 끊어버리고 헬라인들에게 자유롭게 증거된 것이다.
21장. 마음이 뜨거워지다.
1.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로마의 통치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속량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강렬한 희망을 가지고 살았다. 마카베오나 요한 힐카누스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여지없이 짓밟혔다. 그 와중에 ‘예수’라는 청년은 많은 이적과 가르침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셨다.
눅 24장에 이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는 소망을 잃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2.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이 두제자에게 낯선 이가 나타나셔서 구약의 말씀을 나누시며 그분의 죽음이 성경에 기록된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다.
바벨론 제국, 바사 제국, 헬라 제국, 로마 제국이 끝나고 공중에서 날아온 돌맹이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
3. 제자들의 변화
⓵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⓶ 마음이 뜨거워졌다.
⓷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⓸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자신들을 멸망시킨 그 강력한 나라가 결국 망하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은 절망 가운데 있던 다니엘과 세 친구로 하여금 새롭게 눈뜨게 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고, 고난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 머물며,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심어 준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다니엘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다니엘서를 선교적으로 읽도록 돕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선교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하는 것(doing)에는 익숙하지만 선교적 체질이 되는 것(being)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 것(doing)은 체질이나 됨됨이(being)에서 나온다.
1부. 경쟁보다는 건전한 협력을_후원선교사의 관리 문제
지역교회들은 선교 단체를 동반자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 같다, 1부에서는 지역 교회가 선교를 어떻게 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다루었다.
1장. 체증이 내려가다
* 선교사의 책무
1) 사역적 책무 : 선교사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사역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와 감독을 받아 가면서 사역하는 것
- 필드 사역(field assignment)와 본국 사역(home assignment)
- 선교사들이 쉼이 필요한 이유 ; 건강 체크, 정기적인 재적응 훈련, 부모님과의 관계, 자녀들의 정체성 문제, 현지 사역의 위임
- 평가 : 다음 사역을 더 잘하기 위해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
- 안식년(furlough)과 본국 사역 : 장소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사역을 한다는 의미이다. 후원자 개발, 사역 소개
- 휴직(leave of absence), 병가(compassionate leave of absence), 학업을 위한 휴직(study leave of absence)
2) 재정적 책무 : 선교 후원금이 어떻게 들어오고 그 후원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관리 감독을 받는 것
- 사역자는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재정적 책무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사역자가 쓰는 돈에 대해서 묻지 말라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다.
- 요리사 자격증이 없이도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 하지만 요리사라는 자격이 주어지면 일반 사람과는 다른 책무를 가지게 된다.
* 선교사의 사역적, 재정적 책무의 중요성 : 선교사는 사역지에서 사역할 때 반드시 책무를 이행한다.
2장. 안디옥 교회의 두 모델_교회와 선교단체의 협력관계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의 일로 인한 환난을 피해 흩어진 자들이 헬라인들에게 익숙한 ‘주(큐리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복음을 전했다. 이는 상징 빼앗기(symbol theft)이다. 상징 빼앗기란 선교사들이 이교도 지역에 들어가 그 지역 사람들이 이미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종교적 용어를 차용해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 사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안디옥 교회에는 바나바와 바울을 보냈다.
1) 소달리티(선교 구조) : 복음 확산을 위해서 활동하는 구조로 운동성을 추구
2) 모달리티(목회 구조) : 목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교회로 회중 구조를 가지고 있어 안정과 성장을 추구
선교가 잘 이루어졌을 때는 지역교회와 선교단체가 함께 선교할 때 였다.
선교는 교회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때부터 교회와 선교단체가 함께 협력해왔다.
선교사가 선교단체를 통해 선교지에 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선교 단체와의 관계가 공고해야 책무를 물을 수 있다.
* 쏘달리티와 모들리티, 혹은 선교 구조와 목회 구조의 협력,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선교 구조와 목회 구조가 시너지 효과를 낼 때 선교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3장. 킬링필드를 방문하다_필드구조에 대한 이해
단기 선교사 : 1년에서 3년 이내
초단기 선교사 : 1개월이상 1년 미만의 사역을 하는 선교사
선교사의 언어 레벨 : 장기 선교사의 경우 레벨3(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수준), 단기 선교사는 레벨2(업무 지시를 받고 지시를 내리고 할 수 있는 수준), 레벨1(생존 언어 수준)
- 국제 팀으로 사역하는 것의 장점 : 문화적 차이로 어려움이 발생하지만 그것이 서로의 경험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 현지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문화와 언어를 초월해 일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라는 메시지를 실감하게 된다.
선교사 자녀 MK(Missionary Kids), 제3 문화아이(Third Culture Kids), 학교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교사 자녀들의 정체성 문제이다.
현지 필드의 역할 : 위기 상황 관리(의료 문제), 사역을 위한 준비, 언어와 문화에 대한 훈련, 출구 전략을 제시, 필드에서의 실제적인 관리와 돌봄
* 필드구조의 중요성 : 필드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사역적, 재정적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필드 구조가 확립되어야 한다.
4장. 또 하나의 숙제_신임 선교사 허입 문제
* 선교사 선발 프로세스(Screening or Filtering)
1) 홈에서의 확인(Home clearance)
후보자의 됨됨이와 소명을 확인하는 과정 : 허입 서류, 추천서, 이사들과의 인터뷰
2) 필드에서의 환영(Field welcome)
현지 교회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사역을 함으로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는 사역이 되도록 한다.
3) 재정 확인(Financial clearance)
4) 의료 확인(Medical clearance)
고칠 수 있다면 치료한 후에 선교지로 가는 것이 좋고 그렇지 않다면 현지에서 관리가 가능한가를 확인,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 건강(심리 검사)
선교사 허입 과정의 중요성 : 선교사의 선발 과정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5장. 1박 2일_선교 위원회의 운영
* 지역교회와 선교 단체가 협력해야할 분야
1) 선교사 선발
2) 선교사 훈련
3) 기도와 돌봄
4) 본국 사역 선교사 관리
5) 동원
매뉴얼에 들어갈 내용
매뉴얼의 작성 목적
파송 선교사 선발 절차
후원 선교사 책무 관리
선교 위원회 구성
본국 사역 선교사 규정
* 지역교회와 선교단체의 건강한 협력
1) 지역교회와 선교단체 사이에 신뢰를 쌓아야 한다.
2)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
3) 서로의 단점을 탓하지 말고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고 장점에 집중한다.
지역 교회와 선교 단체의 건강한 협력관계 : 지역교회가 할 수 있는 일과 선교 단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2부. 열매보다는 건강한 나무를
6장. 코치의 도움 - 선교적 교회 로드맵
- 선교적 교회란 단순희 선교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체질이 선교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목적 자체가 선교이다.
* 선교적 교회를 위한 로드맵
무엇을 하는 것과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선교를 하는 교회는 선교를 교회 부흥의 수단 혹은 목회의 한가지 프로그램 전도로 생각한다면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목적자체가 선교이다.
* 코치의 역할
교회의 선교적 상황을 평가
* 목표를 설정할 때 필요한 질문들
1) 무엇을 줄일 것인지
2) 무엇을 그만 둘 것인지
3) 무엇을 새롭게 할 것인지
4) 무엇을 더 할 것인지
* 선교적 교회로 가기 위한 로드맵 : 선교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교적 체질이 되는 것이다. 지역 교회가 선교적 체질이 되기 위해서는 코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7장.종족 무지_미국 방문
예전의 선교는 제3세계로 가는 선교였다면 이제는 우리 주변에 제3세계의 이민자들이 들어와 있다.
성경 일부에 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선교를 말하고 있다.
* 종족 무지 : 가까이에 있는 다문화 사람들이 바로 선교의 대상이다.
8장.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_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 여지껏 우리가 했던 선교는 마치 우리가 축구를 하기 보다는 선수들이 하는 축구를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었다. 더이상 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축구를 하자!
- 선교적인 삶을 살게 되면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 우리 주변에 이미 깊숙히 들어와 있는 타문화권의 사람들이 보이게 된다.
* 내 눈앞에 펼쳐진 추수할 밭, 하나님은 타문화 사람들을 우리 이웃으로 허락하셨다.
9장. 위대한 일의 작은 시작_선교는 모든 성도를 향한 부르심
선교적 교회를 꿈꾸는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교에 참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들음
사도행전에 나타난 두가지 선교모델
1) 풀뿌리 선교 모델 : 어떤 타이틀도 갖지 않음, 자비량,
2) 바-바(바나바와 바울) 모델 :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후원 필요
LAMP(Language Acquisition Made Practical)
언어 구사 수준
1) 레벨 0 : 관광객 수준
2) 레벨 1 : 생존할 수 있는 수준(물건구입, 교통수단 활용)
3) 레벨 2 : 일반적인 직장생활 가능 수준(기본적 대화, 전화 가능)
4) 레벨 3 : 자신의 전문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수준
5) 레벨 4 : 현지인 전문가가 구사하는 언어로 토론이 가능한 수준
6) 레벨 5 :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
* 선교는 겸손을 전제로 한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어린아이로 오셔서 인간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신 것처럼 선교사도 타문화에서 어린아이처럼 배워야 한다.
10장. 관점이 변하다_퍼스펙티브스 교육
1) 성경적 관점
모든 성경이 선교를 말하고 있다. 선교란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도록 돕는 것이다.
창세기 12:1–3 (NKRV)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시편 67:3–5 (NKRV)
3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4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5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이사야 19:19–20 (NKRV)
19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출애굽기 19:5–6 (NKRV)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마태복음 4:15–16 (NKRV)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2) 역사적 관점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특별 무대를 마련하셨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의 세상
⓵ 도로망
⓶ 언어 : 헬라어
⓷ 안전한 여행 : 로마의 평화
⓸ 유대인 디아스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 유대교에 관심이 있는 헬라인이 개종하지 않은 채 회당에 와서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예배한 이들.
로마제국안에 야만인들(용병)들이 들어오고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선교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복음을 들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가기도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우리에게 보내기도 하신다.
- 중세 시대의 선교 : 카톨릭 수도사들에 의한 선교, 미션(mission)
- 모라비안 교도
- 해안선 시대 : 윌리엄 캐리(영국에서 인도로)
- 내지 시대 : 허드슨 테일러(중국 내지 선교회)
- 종족 선교 시대 : 카메룬 타운젠드(성경번역-위클리프 선교회)
3) 문화적 관점
선교란 타문화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인데 타문화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타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아야 한다.
- 세계관에 대한 이해
- 문화 충격
- 자문화 중심주의
-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려면 발신자가 수신자의 문화 코드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선교에서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라고 한다.
혼합주의란 이전 종교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겉으로만 기독교의 형태를 띠는 것이다. 반면 상황화란 겉은 현지 문화의 용어나 형태를 취함으로 현지인들에게 쉽게 접근하지만 내면의 세계관이 그리스도로 변화된 것을 말한다.
4) 전략적 관점
- 총체적 복음, 교회 개척 운동
- 토끼 같은 교회 vs 코끼리 같은 교회
- 선교사는 비계목과 같은 존재들이다.(허드슨 테일러)
* 우리 하나님은 선교하시는 하나님,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다.
3부. 지식보다는 작은 실천을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적 삶을 살아내야 한다. 선교적 삶을 사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다.
11장. 동방 박사들이 서쪽으로 간 이유_선교적 설교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에게 왔다는 것이 주는 교훈
1) 동방 박사는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들이다.
2) 성경 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
3) 성경의 주제는 주님의 복음이 온 세계에 증거되는 것이다.
* 선교적 설교의 감동, 동방 박사들이 서쪽으로 온 이유는 유대인들이 동쪽으로 가지 않아서!
12장. 마음이 뜨거워지다._ 선교적 성경읽기
누가복음 24:32 (NKRV)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저자는 문화와 선교와 관련된 중요한 주제들을 자신이 경험한 여러 예화들과 이야기들을 통해서 풀어나간다. 영광스러운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문화적 간극을 극복하고 전달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타문화 사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서 대단히 중요한 문화와 선교에 대한 개념들을 대단히 재미있게 배우게 될 것이다.
한국, 미국, 영국 청년들의 아침식사(빵과 잼)
- 영국에서는 다른 사람이 먹으라고 권하는 것을 먹는 것이 가장 예의바른 행동이다. 영국 청년에게 잼을 제 마음대로 가져다가 먹는 한국 청년은 강도 같이 보이고, 그것을 달라고 해서 먹는 미국 청년은 거지같이 보일 것이다.
- 이들은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교지에 왔는데 빵에 잼을 발라 먹는 것때문에 아침부터 서로 마음이 상해 있다.
1부. 타문화 상황
1장. 선교와 문화
선교의 정의 : 타문화에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 선교란 지리적으로 다른 나라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내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문화의 정의 : 한 사회가 가지는 특유의 학습된 행동 양식과 개념과 산물들이 서로 통합된 체계이다.
한국 문화, 우리의 문화가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기서는 어떻게 하나요?’라고 질문해야 한다.
- 고맥락적 커뮤니케이션이란 메시지의 의미가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되어 전달되는 것을 말하고 저맥락적 커뮤니케이션이란 의사소통을 하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상황적 맥락과 상관없이 메시지 그대로의 의미만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 인도네시아의 ‘바사바시’ : 예의상 하는 말이나 행동
- 민족 감정을 조심하라 :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 한국과 일본
3장. 문화적 차이2
자기문화 중심주의란 타문화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룰에 따라 문화적 판단을 하는 것을 말한다.
-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손으로 밥을 먹는 것
- 화장실에서 큰 일을 마치고 휴지를 사용하는 것과 물, 손을 사용하는 것
- 성급한 판단(아이의 잘못, 대신 자신이 잘못했다고 거짓말) 문화적 차이
초문화적 기준 : 선교사가 자신의 관점에서 타문화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모든 문화는 오로지 성경적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성경도 성경이 기록된 당시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문화를 초월해서 말할려고하는 원리를 찾아내어 그 원리로 다른 문화를 판단하는 기준을 삼아야 한다.
- 인도에서 부인을 생매장하는 풍습(자국에서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이 생명을 귀히 여기시기에)
- 새벽기오(한국에서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도 새벽미명에 기도하셨기에)
4장. 문화 충격과 극복
문화 스트레스 : 비교적 짧은 체류기간에 경험하는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격(먹다 남은 음료수, 누룽지, 발룻, 두리안 )
문화 충격 : 장기 체류시 경험하는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격
- 문화 충격을 느낄 때 나타나는 증상들 : 향수, 분리, 피곤함, 과식, 분노, 회피, 질병, 현지에 대한 적대감
* 문화 충격 지수
문화 충격의 극복
첫째는 현지 문화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지인의 문화를 따라 해 보는 것이다.
역문화 충격(reverse culture shock)
선교지에서 오랜시간을 보내고 본국에 돌아올 때 다시 문화 충격을 겪는다. 선교사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교통, 물가, 학교의 식사문화)
2부. 타문화에서의 메시지
관광을 위해서 타문화에 간다면 특정 행동 양식이나 가치 정도만 이해해도 무난할 것이다. 하지만 선교를 위해서 타문화에 간다면 행동 양식이나 가치 수준을 넘어서는 더 깊은 차원의 문화 이해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문화에 가는 이유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타문화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전달자가 수신자의 문화 코드를 배워서 수신자에게 익숙한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이것을 선교적으로 말하면 ‘상황화’라고 한다.
문화는 언제나 가치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외부인으로서 현지의 문화를 배운 선교사는 성경이 말하는 초문화적인 진리에 비추어 현지 문화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중에서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변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5장. 초대 교회와 선교
사도행전에 나타난 다섯 그룹
⓵ 유대인, ⓶ 유대인 디아스포라, ⓷ 유대인 개종자(proselyte), 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arer), ⓹ 헬라인(Greek)
- 상징 빼앗기(symbol theft) : 이교도가 사용하던 종교적 용어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져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사용하는 것
행 8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성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고, 행 11장에서 바나바는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를 증거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선이해가 있었다면 헬라인들에게는 ‘큐리오스’라는 개념을 동원해 주 예수를 전한 것이다.
안디옥 교회
다른 옷을 입은 복음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감옥에서 만난 간수에게는 ‘주 예수’(행 16:30-31)를 전한 반면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다.(행 17:1-3)
바나바와 바울도 헬라인들이 유대의 문화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고 선포했다. 사도들의 목표는 예수를 믿는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인 채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6장. 상황화 1
1) 의사소통의 원리
⓵ 발신자(sender) :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
⓶ 수신자(receiver) : 메시지를 받는 사람
⓷ 메시지(message) :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전하려는 내용, 영광스러운 복음
⓸ 매체(media) :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수단
- 사랑을 표현하는 1학년 남자아이
- 예수님은 제자들과 목욕을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두리안도 함께 드셨을 것이다.
2) 역동적 등가(Dynamic equivalent) : 똑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비슷한 의미의 단어로 대체하는 것
- 나는 생명의 빵, 떡, 예수님을 간에 영접하라, 목구멍에 영접
3) 상징 빼앗기(symbol theft) : 복음을 전할 때 이교도의 종교적 용어를 폐기하고 낯선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익숙한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변화시키라는 것
-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단어 대신에 이교도인 헬라인들이 사용하던 ‘주, 큐리오스’라는 단어를 사용
- 번역 가능성(translatability) : 문화를 넘어서도 그 진리가 변질되지 않고 전해질 수 있다는 것, 이슬람교는 번역가능성이 없다.(아랍어 코란만을 인정)
- 몽골에서 ‘유르텅칭 에젱’이라는 단어 대신에 ‘보르항’이라는 단어를 사용
4) 구속적 유사 : 각 민족마다 복음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민족의 고유한 이야기
- 화해의 아이(인도네시아 이리안자야)
5) 복음 증거의 장애 : 벽과 협곡
복음이 외국에서 온것으로 보이거나 외국 문화의 옷을 입은 복음이 현지 민족의 미풍양속을 깨는 것처럼 보일때 복음을 증거하는데 장애가 발생한다.
벽은 선교사가 타문화에 복음을 전할 때 넘어야 하는 장애로 선교사는 복음을 현지의 문화 코드에 맞게 전해야 한다. 협곡은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아들인 현지 그리스도인이 기독교를 이해하고 현지의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를 말한다. 성경에서 벽을 넘은 이야기는 행 11장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의 헬라인에게 ‘주 예수’를 전한 것이라면 협곡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행 15장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열린 회의일 것이다.
- 교회를 찾아간 하산(이슬람 신자) : 교회 건물의 십자가(십자군), 아무도 신을 벗지 않고 들어감, 의자에 앉아 있는 신자들, 남녀가 섞여 앉아 있는 모습, 강단에 장식된 꽃들, 최신 음악의 곡조들 이러한 것들이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누국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협곡이 될 수 있다.
5) 상황화의 목표
마치 처음부터 자신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기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선교사는 원리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부채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다.’(톰 신부), 현지의 불
7장. 상황화 2
1) 혼합주의(syncretism) : 기독교의 모양을 띠고 있지만 내용은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 선교지의 성탄절, 산타클로스
- 도둑을 찾기 위해서 점쟁이에게 찾아가보라고 조언해주는 신학생
- 기독교 예식으로 결혼식을 치르면서 궁합을 보는 그리스도인
- 혼합주의적인 기도
2) 혼합주의에 대한 오해(C1~C6까지의 스펙트럼)
- 메시아를 믿는 유대인(Messianic Jews)
- 이슬람 상황화 과정에서 어떻게 혼합주의를 피할 것인가?
⓵ 예수님의 유일성을 확인한다
⓶ 인질(복음서), 토라, 자브르(다윗의 시편)에 대한 공부를 계속한다.
⓷ 다른 C5신자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다.
⓸ 신비주의나 해로운 민속 이슬람의 관습에서 탈피한다.
⓹ 이슬람 신학을 재검토한다.
- 세례와 성찬, 문화적으로 상황화된 공동체와 세계적 교회 공동체 사이에 최소한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코드를 유지한다.
3) 토착화의 노력들
- 도풍사 이야기(칼 라이헬트, 노르웨이 출신 루터교 선교사) : 기독교 진리를 불교의 세계관으로 설명
- 유교 안의 상황화 : 조선 후기 이벽(천, 인, 성의 유교의 기본 개념으로 진리를 표현)
4) 메시지의 본질 찾기
- 예수님의 세족식 이야기의 핵심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겸손하게 섬기라는 것이다.(교회의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 설겆이, 화장실 청소, 주차 봉사를 하는 것)
- 베트남 유학생들 중에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은 세족식 포스터를 보고 발 마사지는 베트남 사람들이 하게 두어야 하는것 아니냐라고 생각했다.
8장. 문화 변혁
1) 선교의 목표는 현지 사람들에게 전달된 복음으로 인해 그들의 문화 안에 문화 변혁이 일어나는 것이다.
- 변화를 받아(be transformed, transformation, 변태) 형태가 완전히 변하지만 한 생명의 주기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
2) 변혁을 위한 선교사의 역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사람들 속에서 갈등과 투쟁이 일어난다.
- 시간 관념, 보상을 통한 점진적인 변화(빵과 콜라)
선교사가 현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삶 속에서 가치와 세계관이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도록 돕는 일이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되 여기까지 돌보지 않는다면 현지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도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처럼 보일뿐 결국은 예수를 믿기 전과 동일하게 행동할 것이다. 선교지에서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선교지에서 우리의 목표는 현지인 한 사람 안에서 시작된 세계관의 변화가 그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어 진정한 변혁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것이다.
개종은 짧은 시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회심의 과정은 결코 짧지 않다.
3부. 타문화에서의 메신저
성경에서 타문화 선교의 원형은 예수님이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는 어린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 성육신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9장. 성육신의 원리
선교사는 천사표가 아니다. 선교지에 처음 간 선교사가 겪는 어려움
선교지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본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학문, 지위, 경험, 능력을 내려놓고 가는 것이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 : 우리 주님도 아기로 오셔서 인간의 룰을 배워가는 과정을 겪으셨다.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연약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선교지에 간 선교사가 선교지 사라들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 연약해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 감동을 줄 수 있다.
10장. 선교사의 역할
과거 선교사는 제국주의의 힘을 등에 입고 선교지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늘날 선교사는 선교지에 필요한 사람으로 가야 한다.
만남의 모델에서 선교사는 가르치는 자라면 참여의 모델에서 선교사는 배우는 자이다.
사역지에 대한 보고를 하는 경우에 불필요하게 부정적인 내용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선교사는 기도편지를 작성할 때 선교지의 사람들이나 선교지를 나쁘게 말하거나, 없는 사실을 말하거나 부분적으로만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선교사는 자신이 속한 교회와 자신을 파송한 본국에서,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현지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때 가장 높은 안정감을 갖는다.
11장. 동일시
동일시란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현지인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현지 사람처럼 입고, 먹고, 말하며 살아야 한다.
동일시는 단순히 선교지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문화의 행동양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생활 수준에 맞게 사는 것까지 포함된다.
선교사가 현지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현지인들에게 인사이더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Stay long’(오래 있어라)
본딩이란 생물학의 용어로 새끼가 어미와 유착관계를 가지면서 독립된 개체로 성장해 가는 초기 과정을 말한다.
⓵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몇 주만이라도 현지인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라.
⓶ 가능하면 20킬로그램의 짐만 가지고 가라. 이는 현지에서 필요한 물건 대부분을 조달하라는 뜻이다.
⓷ 대중교통을 이용하라.
⓸ 현실 상황에서 현지어를 배워라. 선교지에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성육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12장. 선교사의 출구 전략
출구 전략(Exit strategy) : 선교사가 현지에서 사역을 마치고 현지인들에게 사역의 주도권을 넘겨 주고 떠나는 것.
선교의 안락사 : 현지 목회자 아래 잘 훈련된 회중이 있어서 목회 사역을 그들 손에 넘겨줄 수 있고, 현지 목회자를 감독하는 일도 점차 줄어들어 더 이상 감독이 필요하지 않아서 제반 사역이 선교사역으로 확립된 토착신앙 공동체로 넘어갈 때 일어나는 현상
삼자 정책(Three self policy)
⓵ 자립(self-supporting) : 현지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것
⓶ 자치(self-governing) : 현지 교회가 교회 운영의 결정을 스스로 해 나가는 것
⓷ 자전(self-propagating) : 현지 교회 스스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
⓸ 자신학하(self-theologizing) : 자신학화란 신학의 상황화라고 할 수 있다. 외국에서 형성된 신학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자신들의 상황에서 필요한 신학을 형성해 나가는 것
선교사의 역할 변화
- 경건한 리더십이란 주관하지 않고 돕는 것이다. 진정한 지도력이란 지도하는 사람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지도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허드슨 테일러) 231
건강한 출구 전략을 위한 고려사항
⓵ 선교사의 역할 : 처음부터 조연으로 한정
⓶ 지속 전략의 중요성 : 선교사는 현지 사역과 관련해서 단계별로 진입, 유지, 출구, 지속 전략을 생각해야 한다.
⓷ 위험을 감수함 : 선교사 자신이 배운 신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지도자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자신들의 사고를 통해 신학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실수할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⓸ 상황에 맞는 출구 전략 : 한국인 선교사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
“선교는 일시적이다. 하지만 예배는 영원하다.”(존 파이퍼)
“선교사는 일시적이다. 하지만 현지 그리스도인은 영원하다.”
부록. LAMP(Language Acquisition Made Practical) 프로그램에 대해서
세계 선교의 역사는 위대한 몇몇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드러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한국 교회의 선교가 선교 헌신자를 발굴해서 파송하는 것에서 이제 선교 현장의 상황과 요구에 적합한 인물들을 배출하고 보내야 할 것이다.
"직업은 결코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또 다른 부르심의 현장이다.”
들어가면서
동원사역이란 하나님이 세상에 어떤 일을 하고 계시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지 사람들에게 알
리고 이에 동참하도록 촉구하는 일이다.
책의 구성
1부 : 직업 선교사가 왜 필요한지와 그 배경
2부 : 직업과 관련한 선교의 다섯 가지 타입
3부 : 직업과 관련해서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 서술
1부 : 직업을 통한 선교는 왜 필요한가? / Why
1장. 직업인을 필요로 하는 선교 상황
1. 잇사갈 지파의 두령처럼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역대상 12:32, NKRV)
시세란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말한다.
많은 선교지가 선교사에게는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2. 세상의 변화
1) 로마제국의 기독교 전파 : 도로의 건설과 정비, 코이네 헬라어의 보급, 로마제국의 안전
2) 500년 전의 기독교 전파 : 복음 전도를 위한 길을 여는 데는 상인들이 선교사들보다 언제나 앞서 나갔다.
3) 21세기 상황 : 윌리엄 캐리로 시작된 개신교 선교의 위대한 세기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 여행의 안전등과 같은 상황에 기인한다.
3. 도전
1) 창의적 접근 지역 : 10/40창, 앞으로 선교는 선교지 사람들이 초청하지 않는데도 선교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의 필요를 채워주며 들어가야 한다.
2) 개방적 지역에서의 어려움 : 다원주의 사회의 세속 정부들은 종교적인 갈등이 자국의 안정을 해친다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종교 행위에 대해서 강경한 조치를 서슴지 않고 있다.
3) 경제적 이슈 : 선교사의 생활비와 사역비의 증가
4)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4. 기회
1)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진입할 수 있다. : 10/40창은 선교사에게는 닫혀 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여전히 열려있다.
2) 경제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다. : 이슬람, 공산 국가,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
5.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2장. 사도행전에 나타난 두 개의 선교 모델
1. 최초의 선교사에 대한 오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1–3, NKRV)
선교사 : 미씨오(missio), 보내심을 받다, missionary / 헬라어(아포스톨로스)
바울과 바나바를 최초의 선교사로 보는 것은 오해이다. 흩어진 유대인들도 타문화 사역을 한 사람들이다.
2. 풀뿌리 선교 모델
1) 흩어진 사람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8:1, NKRV)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사도행전 8:4–5, NKRV)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사도행전 11:19–20, NKRV)
안디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헬라 지역의 신들에게 붙이는 경칭(주, 큐리오스)을 사용해서 증거했다.
2) 안디옥으로 파송된 바나바
바나바는 헬라 문명의 본고장인 구브로, 즉 오늘날의 키프로스 섬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사도행전 11:22–23, NKRV)
사울은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 디아스포라로서 인디옥 교회에 있는 이방인들을 섬기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
3) 바울의 타문화 사역과의 비교
4) 바울-바나바 모델
3장. 애매한 부분에 대한 정리
1. 혼란스러운 용어들
1) 선교(Mission) : 선교란 타문화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교민 목회 vs 외국인 노동자 사역)
2) 선교사(Missionary) : 선교사란 재정적-사역적 책무를 이행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재정적 책무란 후원이나 직업을 통해 얻은 모든 수입을 보고하고 적절한 감독을 받는 것을 말한다. 사역적 책무는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임의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자에게 적절한 감독을 받는 것을 말한다.
3) 선교지(Mission Field) : 선교지를 선교를 하려는 선교사가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장소를 말한다.
- 창의적 접근 지역(Creative Access Nation), 개방적 접근 지역(Open Access Nation)
4) 전문인 선교사(Professional Missionary) : 전문인 선교사란 전문직을 사용하여 선교지로 가는 사람을 말한다.
- 일반기술을 가지고도 선교지에 들어갈 수 있지만 현지인들과 경쟁관계에 있다. 전문인에게는 전문가로서의 진정성이 요구된다.
5) 텐트 메이커(Tent Maker) : 텐트 메이커란 어떤 형태로든 직업을 가지고 선교지에 가는 선교사를 일컫는 말이다. 행 18장의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동업(장막 만드는 일)
6) 자비량 선교사(Self supporting missionary) : 자비량 선교사라는 말은 재정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말로 직업을 가진 선교사가 자신의 직업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으로 생활비와 사역비를 모두 충당하여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후원받지 않아도 되는 경우를 말한다.
2. 직업과 선교의 다섯가지 타입
1) 정체성의 문제
2) 직업 선교에 대한 혼란
3) 다섯 가지 타입
2부. 직업과 관련된 다섯가지 타입의 선교란 무엇인가? / What
4장. 직업을 가진 선교사_2타입
창의적 접근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선교사 비자가 아닌 다른 형태의 비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직업을 선택하게 된 경우이다.(실크 사업을 선택한 목사, 농촌을 자유롭게 방문)
1. 선교사는 비밀 스파이
2타입으로 직업을 가진다고 할때 그것이 단순한 눈가림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진 직업이어야 한다. 진정성은 3중적 진정성을 말한다. 첫째는 파송한 교회를 포함한 그리스도인 그룹을 향한 진정성이다. 둘째는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섬기는 현지인들을 향한 진정성이다. 셋째는 세상에 있는 일반 사람들을 향한 진정성이다.
2. 선교사의 사역적 재정적 책무
1) 선교사의 의미
‘한번 선교사는 영원한 선교사인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진 칭호와 그 칭호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3) 선교사의 사역적 책무(Ministry Accountability) : 선교사의 고유 사역이 제대로 이행되는지를 확인하는 의무
4) 선교사의 재정적 책무(Financial accountability) : 선교사의 모든 지출과 수입 모두 감독 대상이 되어 투명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5장. 선교사가 된 직업인_3타입
1. 선교사가 된 직업인이란
3타입은 전문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선교사로 선교지에 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선교 단체의 회원이 되어 사역적 책무와 재정적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현지 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가 필요하고 언어도 유창하게 해야 한다. 후원을 필요로 하며, 만약 직업을 통해서 얻은 수입이 있다면 선교부에 보고해야 한다.
1) 3타입 vs 2타입
2타입은 자신을 선교사라고 생각한다. 한편 3타입은 원래 직업인이었다. 따라서 3타입은 2타입과 달리 선교사와 직업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갖는다.
2) 3타입 vs 4타입
3타입과 비교해 볼때 4타입은 현지 언어를 썩 잘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3타입의 선교사들은 1-2년의 언어 연수 기간을 가진다.)
사역적 재정적 책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어고 자유도 만끽하려는 이기적인 동기가 있는지 주의해야 한다.(선교사 병원 할인, 선교사 학교 할인
2. 전문인 선교사의 딜레마
3타입은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그들은 선교사에 해당하면서 완전한 직업인이어야 한다.
- 총장의 꾸지람 & 아내의 질문
6장. 해외에 있는 직업인_4타입
1. 요리사만 요리하나
요리는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요리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누구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선교사라는 명칭을 아무에게나 부여한다면 매우 많은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4타입은 선교라는 목표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타문화권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이유로 타문화권에 정착하게 된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2. 선교 역사 속의 풀뿌리 선교
풀뿌리 유형은 모라비안교도들이나 바젤 선교회 등의 모습에 잘 나타나있다.
상인들이 자신의 믿음을 전파했을 때의 이점
1) 비자가 필요없다.
2) 상인들은 현지인들에게 위협적인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3) 상인들은 현지 사람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4) 파송이라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5) 상황에 따라서 전략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6) 후원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3. 현대의 풀뿌리 선교의 예들
1) 홍성철 목사(태국의 우버난과 난타차이)
2) 말레이시아 주재원의 부인(집에 초청하여 복음 전함)
3) 네비게이토 벨기에 연구소에서 베트남, 세르비아 학생들을 양육
4) 이란의 한국계 은행 직원에게 복음 증거
5) 필리핀 여성 가정부들
4. 한인 교회의 선교적 동원
선교사로 현지에 간 목사님이 그곳에 개척하여 한인교회를 세웠다고 하자. 만약 자신만이 선교사라고 생각하고 성도들에게 선교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놀라운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선교지에 있는 한인 교회들만 선교에 동원되어도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다.
7장. 국내에 있는 직업인_5타입
1. 국내에서 직업인이 할 수 있는 선교
많은 사람이 선교는 해외에서 하는 것이고 전도는 국내에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교와 전도의 차이는 해외냐 국내냐가 아니다. 선교는 타문화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타문화 선교를 할 수 있다, 5타입은 해외에 나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머물련서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다.
2. 문앞으로 다가온 선교지
1) 이민의 시대
예전에는 타문화라고 하면 당연히 해외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놀랍게 발전한 덕에 세상은 그야말로 지구촌이 되었다.
이미 한국에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있다. 이들은 자신을 약자라고 여긴다. 이들은 자신들이 본국에 있는 한국 선교사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보다 국내에서 한국인이 베푸는 호의에 더 쉽게 마음을 연다.
2)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풀뿌리 선교 이야기
외국인 근로자 전도에 헌신한 전 집사님 이야기
3. 단기 선교 여행의 기회들
무슬림 지역에 단기 선교 사역을 위해서는 현지의 교회와 협력해야 하고, 같은 지역을 가면서 현지인들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교회들이 치밀한 계획이나 분명한 목적, 후속 조치 없이 단기 선교를 하는 것은 되도록 지양해야 한다.
어려운 곳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장기 선교사들이 있는 곳에 가려는 단기 선교 여행팀은 그곳 장기 선교사들의 반대가 있다면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한다.
3부. 직업 선교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How
“대양을 가로질러 선교지로 간다고 해서 선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본국에서 선교사가 아니라면 대양을 건너 선교지로 간다고 해도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허드슨 테일러)
8장. 직업과 증거의 네 가지 타입
1. WW의 네 가지 타입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한 카톨릭 교회와 달리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는 하나님이 성직자를 부르신 것과 동일하게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믿었다.
일(work)과 증거(witness)의 관계
2. WW1 타입 : 행동으로만 하는 증거
-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지역에서 능력있는 간호사(전문인), 그리스도인 영어교사를 원한 공산 간부를 교육하는 대학 총장
3. WW2 타입 : 말과 행동으로 하는 증거
⓵ 일상적 대화를 하는 단계
⓶ 영적인 대화를 하는 단계
⓷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단계
⓸ 결단을 촉구하는 단계
4. WW3 타입 : 말과 행동을 넘어서는 증거
확대된 사역, 더 조직적인 사역 예를 들면 전도를 위한 성경공부 반을 조직한다든지, 제자훈련 그룹을 운영한다든지, 양육을 위한 그룹을 만든다든지, 셀 그룹을 운영하는 것이다.
-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직장에, 학교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5. WW4 타입 : 장벽을 넘어서 하는 증거
9-10장. 직업 선교사로서의 나의 여정1-2
11장. 선교를 하는 직업인의 자질
1. 전염성있는 그리스도인
전염성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 전도 폭발 세미나(설렁탕, 깍두기 폭발 세미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거나 말을 잘 하거나 탁월한 전도기술을 전수받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2. 타문화 사역에 대한 인식
“선교란 타문화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코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화적 코드에 맞추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
3. 지상명령에 대한 헌신
- 정말 가치있는 것에 헌신하고 있는가?
4. 시장 영성
흩어진 사람들은 시장 영성을 가지고 살았다. 시장 영성이란 방 안에서 조용히 명상만 하는 형태의 영성이 아니라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시장에서 필요한 영성이다.
5. 영원한 정체성_제자의 삶
선교사는 신분이라기보다는 직위이다. 그러나 제자는 우리 신분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주권자이셔서 원하는 대로 하실 권리가 있으시다. 그리고 당신을 다루시는 일 가운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수천가지 있어도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으실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이 온전히 그분의 종이 되겠다고 할때 질투하시는 사랑으로 당신을 감싸 안으신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아무 갈등 없이 하고 있는 말이나 행동을 당신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신다.”(허드슨 테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