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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운명 본능(The Destiny Instinct)

운명 본능은 타고난 특성이 사람, 국가, 종교, 문화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무언가가 지금의 그 상태인 것은 피할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이유 때문이며, 그래서 그것은 늘 그 상태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이 살아온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이러한 환경이 끊임없이 지속되리라 생각하는 것이 훌륭한 생존 전략이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시대에 대한 지식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지 않고 불변의 것으로 보는 이런 본능은 사회의 모든 혁신적인 변화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프리카는 항상 무기력하고 절대 유럽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생각, 또한 이슬람 사회는 기독교 사회와 근본부터 다르다는 생각이 운명 본능의 흔한 예이다. 이 종교 또는 저 종교는, 그리고 이 대륙은, 저 문화는, 그 국가는 전통적인 불변의 ‘가치’가 있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또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겉모습만 다를 뿐 근본은 같다. 

 

문화, 국가, 종교, 국민은 바위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탈바꿈한다. 

 

아프리카는 계속 가난할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극빈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척박한 토양과 무력충돌 때문이다. 4단계 국가의 성장율에 비해 2단계에 속하는 국가들의 성장율이 더 높다. 옛 서양에 기반을 둔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경우, 중간 소득 소비자 시장이 역사상 가장 크게 확장된 아프리카와 아시아 시장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종교와 여성 1인당 출생아 수의 관계는 곧잘 과장된다. 사실은 소득과 여성 1인당 출생아 수가 훨씬 관계가 깊다. 물방울 도표에 의하면 종교에 관계없이 소득이 높을수록 자녀 수가 적다. 

 

 

 

성에 대한 가치, 낙태나 피임에 대한 인식은 변화한다. 

극빈층 탈출과 여성 교육 그리고 피임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자녀의 수를 줄이고 유아 사망율을 낮추었다. 

오늘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나타나는 가치는 과거 유럽이나 스웨덴에서 볼 수 있던 가부장적 가치이며 이는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라질 가치이다. 불변의 가치가 결코 아니다. 

 

운명 본능을 어떻게 억제할까?

1) 더딘 변화는 불변이 아니다. 

사소하고 더뎌 보이는 변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축적된다. 연간 1%성장이면 70년, 2%면 35년, 3%면 24년 뒤 2배 성장이 된다. 

2) 지식을 업데이트할 준비를 하라. 

수학이나 물리학같은 자연과학이나 예술은 지식을 한번 배우면 계속 유효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에서는 아무리 기초 지식이라도 빠르게 변하므로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한다. 운명 본능을 억제하려면 늘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면서 지식을 신선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3) 할아버지와 이야기해보라. 

4) 문화가 변한 사례를 수집하라. 

1996년 미국은 27%의 소수만 동성혼을 지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72%가 지지한다. 

스웨덴을 사회주의 국가로 보지만 지금은 영리 목적의 학교를 허가해 경쟁과 이윤추구를 허용하고 있다. 

 

사실충실성

국민, 국가, 종교, 문화를 포함해 많은 것이 변화가 느린 탓에 늘 똑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하고 느린 변화라도 조금씩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점진적 개선을 추적하라. 지식을 업데이트하라. 할아버지와 이야기해보라. 문화가 변한 사례를 수집하라. 

 

 

 

8장. 단일 관점 본능(The Single Perspective Instinct)

 

누굴 믿을 수 있을까?

내발 사진이 나에 대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내 모습 전체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단일 관점 본능

단일한 원인, 단일한 해결책을 선호하는 이런 성향이 ‘단일 관점 본능’이다. 

- 자유 시장, 평등이라는 하나의 관점, 개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지만 이는 허점이 존재한다. 

 

전문직 : 전문가와 활동가

전문가들의 한계 : 그들이 자기 분야에서만 전문가이다. 수치가 밝다든가, 교육 수준이 높다든가, 심지어 노벨상을 받았다든가 해서 똑똑한 것과 세계적 사실에 대한 지식 수준이 높은 것과는 무관하다. 

활동가들의 한계 : 그들은 전문가이지만 전문가가 아니다. 그들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자신이 몰두하는 문제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인권, 동물 보호, 여성 교육, 기후 인식, 재난 구조등의 상황에 대해 경고함으로 경각심을 높이는 결과를 이루어냈지만 이에 따른 진전의 성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망치와 못 

‘아이한테 망치를 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가치있는 전문성을 지닌 사람은 그 전문성을 활용할 곳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전문가는 더러 어렵게 얻은 지식과 기술을 본래의 활용 영역을 넘어선 곳에도 적용할 방법을 고민한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은 수에 집착하고, 기후 활동가는 틈만 나면 태양 에너지를 강조한다. 의사는 예방이 더 나을 법한 경우에도 치료를 장려한다. 

 

1) 수치는 단일한 해결책이 못 된다. : 수치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수치만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다. 

2) 치료는 단일한 해결책이 못 된다. : 특정 질병(결핵)을 뿌리뽑기위해 싸우기 보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기초 보건 서비스를 제공하고 점차 개선해나가는 편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가난한 산모의 목숨을 구하는 가장 값진 방법은 지역 간호사에게 제왕절개 수술법을 가르치거나 심각한 출혈이나 감염에 더 좋은 치료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병원까지 갈 수 있는 운송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학습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더 많은 교과서와 더 많은 교사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기를 제대로 공급해 학생들이 해가 진 뒤에도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념

원대한 생각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이 강하고 우리가 꿈꾸는 사회를 건설하게 한다. 하지만 이념은 전문가나 활동가처럼 한 가지 생각이나 한 가지 해결책에 매몰되게 하고, 그러다 보면 더욱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 쿠바 : 빈곤한 나라 중 가장 건강한 나라 vs 건강한 나라 중 가장 빈곤한 나라

- 미국 : 부유한 나라 중 가장 허약한 나라, 미국의 1인당 의료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지만 기대수명은 40위에 해당한다. 

쿠바의 공산 체제하에서 국가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견해도, 미국의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견해도 한계가 있다. 

3) 민주주의도 단일한 해결책이 못 된다. : 한국의 경제 성장(1-3단계로의 전환시기가 군부 독재 시기였다.)

 

국가는 정부 없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지만,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사실 충실성

단일 관점이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봐야 한다. 망치가 아닌 연장 통을 준비하라. 

- 생각을 점검하라

- 제한된 전문성 :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겸손하라. 

- 망치와 못 : 망치 외에 다른 도구를 사용하라. 

- 수치를 보되, 수치만 봐서는 안된다. 

- 단순한 생각과 단순한 해결책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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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공포 본능(The Fear Instinct)

공포에 떨면 상황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응급실에서 공군 비행사-러시아/전쟁/간질/피 vs 스웨덴/평시/추위/컬러 앰플)

- 교회가 공포 본능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야기는 바로 극적으로 들리는 정보이다. 세상의 소음을 막아주는 필터가 있다고 가정할 때 이 필터를 통과하는 주제들은 주로 ‘지진, 전쟁, 난민, 질병, 화재, 홍수, 상어 공격, 테러와 같은 드문 사건’들이다. 이러한 극적인 사건들 중에 공포 본능이 가장 강력하다. 

 

이러 두려움은 진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 신체 손상, 감금, 독(오염)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생존율이 높아졌다.

납치나 테러, 항공기 사고등의 사건 사고는 주목을 받는다. 이런 위험한 세계라는 이미지는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방송을 타지만, 실제 세계는 다른 어느 때보다 덜 폭력적이고 안전하다. 

 

실제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자는 과거 100년전에 비해 25% 수준이다. 그렇다고 자연 재해가 과거보다 줄어서가 아니라 전 세계가 더이상 1단계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는 소득 수준을 가리지 않고 닥치지만 피해 정도는 매우 다르다. 부유할 수록 철저히 대비한다. 

 

2015년 네팔의 지진으로 9000명이 사망할 때, 같은 기간 전세계에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설사를 하다가 죽어간 죽은 아이 역시 9000명에 이른다. 하지만 카메라는 네팔에 뜨고 내리는 헬기에 주목하지 이웃의 대변 섞인 물을 마시고 죽어가는 이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2016년 4000만대의 항공기중 치명적 사고를 당한 항공기는 10대에 불과하다. 전체 항공기의 0.000025%이다. 

 

오늘날 여전히 전쟁과 갈등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시기를 살고 있다.  

 

1986년 전세계에 핵탄두가 64000개가 있었다. 지금은 15000개이다.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1600명이 사망했는데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방사능 자체가 아니라 방사능에 대한 공포때문이었다. 

 

DDT로 인한 피해로 먹이사슬이 붕괴되었다.(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그런데 이런 화학물질에 대한 공포증이 확산되어 데이터에 근거한 주장에 귀기울이는 능력이 마비되었다.(생리대 발암물질 97% 검출-안전기준 이하, 독감백신 상온 노출)

 

세계 곳곳에서 환경은 더 나빠지고 있다. 그러나 극적인 지진이 설사보다 언론의 관심을 더 많이 받듯, 죽어가는 해저나 시급한 어류 남획 문제처럼 더 해롭지만 덜 극적인 환경 악화보다 사소하지만 공포를 자아내는 화학물질 오염이 언론의 관심을 더 받는다. 

 

테러 

테러가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4단계에서는 줄고 있다. 하지만 위키피디아에는 서양에서 일어난 테러는 모두 기록한 반면 그 밖의 지역에서 일어난 테러 사망 사고는 25%만 기록해 놓았다. 미국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술을 마신 사람 손에 사망할 위험은 테러리스트 손에 사망할 위험보다 거의 50배나 높다. 하지만 4단계 나라에서 극적인 테러 사건을 언론의 대대적인 관심을 받는 반면 음주 피해자는 대부분 외면당한다. 

 

'공포'와 '위험'은 엄연히 다르다. 무서운 것은 위험해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한 것에 진짜 위험 요소가 있다. 진짜 위험한 것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에 지나치게 주목하면, 즉 공포에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힘을 엉뚱한 곳에 써버릴 수 있다. 

 

사실충실성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반드시 가장 위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폭력, 감금, 오염을 두려워하는 자연스러운 본능 탓에 우리는 그 위험성을 체계적으로 과대평가한다. 공포 본능을 억제하려면 위험성을 계산하라. 

우리의 주목 필터가 작동하면 세계는 실제보다 더 무서워보인다. 하지만 어떤 대상의 위험성은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 아니라 실제 위험과 그것에 노출되는 정도를 합쳐 결정된다. 두려움을 느끼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때 공포가 진정될 때까지 가급적 결정을 유보하라. 

 

 

5장. 크기 본능(The Size Instinct)

의료 자원을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용해야 하는가?(정맥 주사)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 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자원이 무한하지 않는 한 지금 가용한 것을 가장 좋은 것에 사용해야 한다. 

 

사람들은 비율을 왜곡해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비율을 왜곡하는 것, 크기를 오판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자선단체와 언론이 자극적으로 보이는 숫자를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과 함께 끊임없이 보여주다보니 사람들은 왜곡된 시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다른 모든 비율과 발전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 그러면서 일부 비율은 체계적으로 과대평가하기도 한다. 

 

1, 2단계의 나라에서 아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사나 병실의 확충이 아니라 지역 간호사, 산파, 교육받은 부모등이 예방조치를 위하는 것이다. 따라서 병원을 확충하는 것보다 초등학교, 간호교육, 예방접종에 투자해야 한다. 

 

크기 본능을 어떻게 억제할까?

1) 수를 비교하라

- 2016년 죽은 아기들의 숫자 420만명, 그러나 2015년은 440만명, 2014년은 450만명, 1950년에는 1440만명이었다. 

- 베트남 전쟁비 : 대미항전 20년, 프랑스 200년, 중국과의 전쟁 2000년

- 가정내 살인 사건 vs 스웨덴에서의 곰의 공격, 1300배의 빈도로 가정내 살인이 많지만 언론은 곰의 공격에 주목한다.

- 결핵과 신종플루 : 2009년 신종플루로 사망한 사람은 31명, 구글 관련 기사는 25만 건, 사망자 1인당 기사가 8176건이었다. / 같은 기간내 결핵 사망자 63000여명, 결핵 관련 기사는 사망자 1인당 0.1건이었다. 신종플루가 82000배 더 주목을 받았다. 

2) 80/20 법칙

- 우리에게 나열된 문제중에 더 중요한 80%를 고려한다. 세계의 에너지원(석유, 석탄, 가스가 87%애 해당)

- 현재 세계 인구 70억의 분포는 아메리카:유럽:아프리카:아시아=1:1:1:4이다. 2100년에는 이 비율이 1:1:4:5로 예상된다. 경제적 영향력 면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3) 수를 나눠보라.

- 1950년 신생아는 9700만명이고 사망한 아이는 1440만명으로 아동 사망율은 15%에 해당한다. 2016년 신생아수는 1억 4100만명이고 죽은 아이는 420만명이다. 아동 사망율은 3%이다. 

- 중극, 인도, 신흥 경제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 총합을 인구로 나눠야.. 

- 밖은 위험해(우리가 사는 이 곳보다 밖은 너무 광대하다.)

 

사실충실성

숫자의 크기가 인상적으로 보이지만 그 수를 관련 있는 다른 수와 비교하거나 나눴을 때 정반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비교하라, 80/20, 나눠라(1인당 수치)

 

 

6장. 일반화 본능(The Generalization Instinct)

- 쥐 요리와 애벌레 후식

 

사람들은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매우 다른 사물이나 사람, 국가를 같은 범주로 묶을 수도 있고 같은 범주에 속한 모든 대상을 다 비슷하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또한 매우 드문 단 하나의 사례를 가지고 그것이 속한 범주 전체를 속단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인정한 문제 있는 일반화를 고정관념이라고 한다. 간극 본능은 세상을 ‘우리’와 ‘저들’로 나누고 일반화 본능은 우리가 저들을 다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한다. 

-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고정관념을 자극

 

사업계획을 전략적으로 세우는 사람이라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래의 고객을 찾아야 한다.(생리대 사용)

 

여행은 단순한 일반화의 범주화를 극복하는 좋은 방법이다. 

- 병원 시설의 차이, 엘레베이터의 안전 장치

 

일반화 본능을 어떻게 억제할까?

1) 더 나은 범주를 찾아라 : 달러 스트리트

모든 집을 소득에 따라 가장 가난한 집은 가장 왼쪽에, 가장 부유한 집은 오른쪽에 배치한다고 할때, 국가는 달라도 소득 수준이 같으면 삶이 놀랍도록 닮았고, 국가는 같아도 소득수준이 다르면 삶의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소는 종교나 문화, 국가가 아니라 소득이다. 

2) 내 범주에 의문을 품어라. 

⓵ 내부의 차이점과 집단간 유사점 찾아보기

- 2단계에서 물을 끓이는 방법

-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에볼라가 자동차로 100시간 떨어진 케냐의 관광산업에 타격을 줌

- 지역 차별(어떤 지역, 어떤 나라 출신이라고 한정하려는 범주화의 위험), 좌파 vs 우파

⓶ 다수에 주의하라

다수는 절반이 넘는 다는 의미로 51%일수도 있고 99%일수도 있다. 

⓷ 예외 사례에 주의하라

안전하지 않은 화학물질 하나를 기준으로 모든 화학물질이 안전하지 않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안전한 화학물질도 존재하기에. 

⓸ 나는 평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라. 

4단계 삶의 경험을 다른 모든 단계에 일반화할 때는 조심하라. 튀니지의 짓다가 만 집을 보고 튀니지 사람들은 게으르거나 되는대로 산다고 결론내릴 수 없다. 저축하는 대신 벽돌을 사서 천천히 올린다.

- 선교지에서 나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현지인들을 판단하지 말라

⓹ 하나의 집단을 다른 집단으로 일반화할 때 주의하라.

부상당한 군인들의 경우 엎드려 있는 경우가 더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영아들의 경우는 다르다. 

 

사실충실성

일반화는 막을 수 없어서, 억지로 막으려하기보다 엉터리 일반화(성급한 일반화)를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범주에 의문을 제기하라. 

집단내 차이점, 집단간 유사점, 집단간 차이점을 찾아보라. 다수에 주의하라. 생생한 사례에 주의하라.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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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부정 본능(The Negativity Instinct)

우리들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주목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세계는 점점 나빠진다’는 거대 오해를 가진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좋지 않은 일에 대한 소식을 듣기는 쉽지만 좋은 일을 알기란 어렵다. 무수히 많은 것이 개선되고 있지만, 결코 보도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세계 발전을 보여주는 기본 사실들이 워낙 알려지지 않았다.

 

 

 

줄어드는 나쁜 것 16가지

 

늘어나는 좋은 것 16가지

 

 

좋은것 보다 나쁜 것에 더 주목하는 이유는 첫째로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며 셋째로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인을 ‘가능성 옹호론자’라고 한다. 이는 이유없이 희망을 갖거나 이유 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부정본능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황이 나쁘지만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둘째는 나쁜 뉴스를 예상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변화는 훨씬 흔하지만 그 소식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부정 본능을 억제하려면 나쁜 소식을 예상하라. 

1) 나아지지만 나쁘다. 현 수준과 변화의 방향을 구별하라. 

2) 좋은 소식은 뉴스가 안된다. 

3) 점진적 개선은 뉴스가 안된다. 

4) 뉴스에 많이 나온다고 해서 고통이 더 큰 것은 아니다. 

5) 장밋빛 과거를 조심하라. 

 

 

3장. 직선 본능(The Straight Line Instinct)

직선 본능은 그래프에서 일정한 추세를 따라가던 선이 어느 지점에서 끝났을때 그 끝을 진행방향의 추세 그대로 연장해 상상하는 것을 말한다. 

- 세계 인구, 아이의 성장 그래프, 

 

인구가 크게 늘어나는 이유는 아이들이 더 태어나거나 노인의 수명이 길어진 것이 주된 이유가 아니라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30억 늘어남으로써 도표를 채우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죽어서 균형을 이루었다면 이제 살아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유아 사망율)

 

인구 성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하게 증명된 방법은 극빈층을 없애고, 교육과 피임을 비롯해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직선 본능을 억제하려면 세상에는 다양한 곡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 직선

 

2) S자 곡선

 

3) 미끄럼틀 곡선

 

4) 낙타 혹 곡선

 

5) 2배 증가 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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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풀니스(한스 로슬링, 김영사)

 

 

 

머리말

서커스 : 칼을 삼키는 사람

 

세계에 대한 이해,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편협한지 왜곡되었는지 알아보자. 

대부분의 문제의 정답 비율이 침팬지 수준도 되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세계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교육 수준이 높고 세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더 높은 비율의 오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심각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기까지 했다. 이는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 입안자나 정치인, 사업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거꾸로 인식한다면 조직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무지를 뿌리 뽑으려면 사람들의 지식을 업그레이드 해야한다.(윈도우 업데이트)

 

사람들이 잘못된 대답을 하는 이유는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추측하고, 학습할 때 끊임없이 그리고 직관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참고한다. 그래서 세계관이 잘못되면 체계적으로 잘못된 추측을 하게 되고 이것은 잘못된 결정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뇌는 본능적으로 즉각적인 위험을 회피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뇌가 극적인 것에 열광하는 성향이 있고 그래서 세상을 오해하고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보다 내가 속한 세상을 사실에 근거해서 보지 못하고 극단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실충실성과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대체 혹은 업데이트 해야 한다. 

 

 

1장 간극 본능(The Gap Instinct)

 

아동 사망율(5세이전에 사망하는 아동의 1000명당 비율)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화되었는지를 통계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라는 2개의 엉터리 상자에 나눠 담음으로 세상의 모든 비율을 완전히 왜곡시킨다. 

 

오해에 사로잡힌 사람을 설득할 때는 그의 의견을 데이터와 비교하는 방법이 매우 유용하다. 

 

우리는 많은 부분 과거의 데이터(1960-70년대)에 갇혀 있다. 

 

사람들은 저소득 국가의 삶을 실제보다 훨씬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 저소득 국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소득 수준에 따른 네단계 명명법

 

 

 

 

간극 본능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오해는 왜 그토록 바뀌기 어려운 것인가?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도 극적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두 집단으로 나누려는 본능인데,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실체 없는 간극뿐이다. 우리는 이분법을 좋아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영웅과 악인,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세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양측으로 나누는 것은 간단하고 직관적일 뿐 아니라 충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극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별다른 생각 없이 항상 그런 구분을 한다. 

 

간극 본능을 어떻게 억제할까? 다수를 보라. 

1) 평균 비교를 조심하라. 분산을 살펴보라. 

 

2) 극단 비교를 조심하라. 극단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에 위치한다. 

3)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은 모든 것을 다 똑같게 보게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루 1달러를 버는 사람과 4달러, 16달러는 버는 사람은 그차이가 심하다. 하루 100달러 버는 사람이 보기에는 모두 가난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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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만남.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청사진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균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향기 없는 그리스도인

보통 신앙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는 기도 응답을 비롯해서 영적 체험을 많이 한 사람들이고 둘째는 특별히 많은 훈련을 받고 많이 배웠기 때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분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매력, 향기, 성령의 열매이다. 교회생활에서는 활력이 넘치지만 세상의 삶의 현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이유는 세가지이다.

⓵ 균형잡힌 시각의 결여 :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균형에서 온다. 

⓶ 건강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드셨기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공동체에 속해 있을때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다. 건강한 공동체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시각과 건전한 생각을 가졌어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⓷ 균형잡힌 시각도 있고 건강한 공동체에 속해 있는 데도 잘 성장하지 않는 경우는 성령님과 하나님나라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다시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영적 사실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깨진 관계들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은혜가 바로 하나님나라 복음입니다. 

 

첫번째, 두번째 만남 :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인 나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의미,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일을 다루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 속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영적인 사실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세뇌나 자기 확신이 아니고,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일, 지금 하고 계신 일, 하시겠다라고 약속하신 일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번째, 네번째 만남 :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게 되었는가? 우리가 옛날에는 진노의 자식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상속자,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면 그분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하기도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다섯번째, 여섯번째 만남 : 그리스도를 의지한 자기 사랑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받고 누리게된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존재가 된 우리들안에는 이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부딪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건강한 자기부인과 성령충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의 기본적인 욕망이나 마음속에 있는 자연스러운 것들까지 다 미워하고 학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옛 사람에 속한 것들,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것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면서 성령님의 내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기 시작하면 성품면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령님이 우리의 삶에 비전을 주시고 그 비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교회 공동체를 섬길 수 있는 은사를 허락하십니다. 이런 선순환의 싸이클이 이어지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면 신비하고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셨던 하나님의 형상, 그 아들의 형상이 회복되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곱번째, 여덟번째 만남 :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나서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은 우리가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 삶의 실재여서 우리가 공동체서 속하여 우리에게 주신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자매를 정말 사랑하게 됩니다. 형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냅니다. 그 형제사랑의 원리는 희생하는 사랑, 진실한 사랑(투명한 사랑), 구체적인 사랑, 중심이 있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면 서로 순종하게 되고 서로 섬깁니다. 진정한 성숙은 섬김의 도에서 나옵니다. 

 

아홉번째, 열번째 만남 :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살이 

우리는 세상속에 있지만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라는 존재로 세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선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 복음전도 입니다. 전도란 지옥갈 사람에게 천국 티켓을 나눠주거나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여 사람들이 그분의 다스림 아래로 돌아 오게 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 복음 전도라면 이러한 다스림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도록 애쓰는 것이 세상 경영이다. 

세상 경영의 중요한 원리 : 정의와 사랑

세상 경영의 중요한 방법 : 노동

 

열한번째, 열두번째 만남 :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기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으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 그분의 형상에 이르는 것,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온전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빋음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고 이렇게 우리의 인격과 삶을 바꾸는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2. 하나님나라의 계보를 잇는 공동체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삶, 또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멋진 삶을 위한 청사진을 다시 생각해볼 때 가장 기대가 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청사진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곧장 건물이 지어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해야할 구체적인 그림이 마음속에 있다고 해서 순식간에 성장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청사진을 가졌으니 그에 따라 기초를 놓고 평생에 걸쳐 모든 영역에서 조금씩 세워나가야 합니다. 

 

1) 건강한 공동체

에베소서 4:13 (NKRV)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의 지향점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22 (NKRV)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1:1 (NKRV)

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자신이 완전함에 이르렀기 때문에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를 본받고 있고 이 일에서 조금 앞서 있으니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하나님을 먼저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앞서서 걸어가고 믿음이 어린 자들이 그들을 따라갑니다. 이렇게 좋은 모델,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2) 하나님나라 복음 공동체의 궁극적인 목적

에베소서 2:7 (NKRV)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단지 우리 세대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오는 모든 세대가 알고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디모데후서 2:2 (NKRV)

2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바울이 ‘내게 들은 바’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복음 전수란 단지 내용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고 누렸을때 다른 사람에게 전수 할 수 있습니다. 이 전수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자는 다름 아닌 복음 전수자입니다. 복음을 전수하면 할 수록 이 복음이 자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3. 하나님나라 백성을 이끄시는 성령님

* 생각해볼 질문 : 기독교 역사에는 신앙생활을 히기에 결코 쉽지 않은 여건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복음이 전수된 것을 어떻게 섦명할 수 있을까요? 

 

1)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 

초대교회의 여건 : 지금 처럼 기록된 성경이 없었고, 예수에 대한 이야기조차 잘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교회 전통도, 교육 프로그램도 없었다. 유대교의 핍박과 로마제국의 박해가운데 있었지만 그 초대교회를 성령님께서 붙들고 계셨다. 성령님이 계셨기에 팔리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나 군소 종교에 불과했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통치를 뒤집을 수 있었다. 이는 사회학적으로, 종교 사회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기독교는 여건이 좋아서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여견이 척박할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합니다. 

요한복음 14:16 (NKRV)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6:13 (NKRV)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에베소서 1:13–14 (NKRV)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2) 교회 공동체의 영이신 성령님

성령님은 하나님나라가 온전히 임할때까지 그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 공동체인 교회를 이끌어가십니다. 단지 그리스도인 개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끄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에베소서 2:22 (NKRV)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는 단순한 조직이나 단체를 넘어서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게 될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함께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23 (NKRV)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의 충만함을 이루어갑니다. 비어있고 깨어진 이 세상의 빈 부분을 채우고 고치는 역할을 바로 교회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움직입니다. 그렇게 이 교회를 이끄시며, 이 고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며 지어져가서 종국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에베소서 4:30 (NKRV)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오늘날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허약한 이유는 우리가 따라야 할 성령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그날 까지 인쳐주신 성령께서 우리 개인과 우리 공동체를 이끄시도록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성령님께 순복해야 합니다. 

 

4.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삶

*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날을 생각하면 무엇일 떠오릅니까? 

 

로마서 8:22–26 (NKRV)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1) 그리스도인의 소망

성경은 첫 열매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속량하여 주시는 날을 고대하면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만물과 함께 몸이 완전한 속량을 얻을 때까지 신음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축복은 이렇게 신음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불완전한 몸조차 완전해지는 그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견딜 수 있습니다. 

 

2) 소망으로 사는 삶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 놀라운 생명이 온전하게 드러날 날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요한1서 3:2–3 (NKRV)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는 그 날에 그분이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아져서 그분과 마주하게 될 것을 소망합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합니다. 자기 중심성의 본질인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서 주님을 만나뵙기에 부족함이 없게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준비합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죄성을 벗어나 예수를 닮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생을 살다가 우리는 결국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 (NKRV)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나라의 백성,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그 변화된 모습에 걸맞게 성숙해갈 뿐 아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무슨 일을 하든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 개인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상 경영에 참여합니다. 이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선한 일을 도모합니다. 어떻게 우리 공동체가 우리 지역, 우리 주변에서 선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물을 회복하고 치유하고 계시는 일에 참여하는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 22:20 (NKRV)

20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구절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주님이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성도들은 ‘어서 오십시오. 이 깨지고 고통스런 세상에 어서 오셔서 온전한 회복을 주십시오. 사랑이 없어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해주십시오. 주님 어서 오셔서, 완전한 회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3) 우리의 구체적인 목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기다리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구체적으로 닮아가기 위해 힘씁니다. 

마지막 과제

⓵ 구체적인 인생 목적

⓶ 앞으로 3개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에서 할 수 있는 일 기록

 

4) 하나님나라 복음의 제자를 향하여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결코 매력적인 일,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값싼 은혜로 이해한 기존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품으신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자라신만큼 우리도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랑과 정의를 흘려보내는 전초기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지 놓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만물을 회복하는 주체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의 제자로 사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온전히 자기를 완성하고, 다음 세대에 진정한 영적 모범이 되며, 많은 찾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디딤돌이 되어 세상에서 끊임없이 선한 일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는 우리 공동체가 행할 선한 일을 찾아 힘쓰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선포하며,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만물을 치유하고 회복하시는 메시아의 사역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입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기초를 든든히 세웠으니 그 위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는 지난 12주 동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네 가지 영역에서 균형있고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배웠으니, 듣고 마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배운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행함으로 우리 인생에서 이 놀라운 진리가 참된 진리로 드러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나고 교회 공동체들이 살아나고 그리하여 우리 한국 교회가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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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기

열한번째 만남.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1. 인생의 목적을 어디서 찾을까

* 생각해볼 질문 :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의 목적을 찾았고,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사람, 책, 사건 등)은 무엇이었습니까? 

 

인생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누구를 만나는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디서 살 것인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인생의 목적을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 쾌락, 재미, 성공, 가족, 건강, 세상의 정의 등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생의 목적을 찾는데 가장 존귀하고 믿을만하고 중요한 원천은 단연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고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의 목적

마태복음 5:48 (NKRV)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들도 온전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이 요구에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처럼 완전하라는 요구도 말이 안되는데 하나님처럼 온전해라, 완전해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과장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도 비슷한 요구를 합니다. 

 

에베소서 5:1 (NKRV)

1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바울은 우리가 사랑을 받는 자녀라면 그 자녀의 모습에 걸맞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는 모습이 되려는 소망을 가지고, 실제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3:10 (NKRV)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과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속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원래 진노의 자식이었는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그분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지위를 하나님과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갖고 성공하여 돈 벌고 즐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분을 버리고 떠난 인간들을 다시 그분께로 돌아오도록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 다음 우리의 신분을 바꾸시고 그 신분에 걸맞는 자질을 갖도록 계속해서 변화시키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비로소 우리를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것, 축구 선수가 되는 것, 돈 많이 버는 것처럼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대답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doing(행함)의 종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being(존재)의 종교입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사가 될 수도 있고, 축구 선수, 사업가, 의사, 유투버, 가정주부, 목사나 선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모범 되신 예수님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서서 그 본을 찾을 수 있겠습이까? 

누가복음 2:52 (NKRV)

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유년시절을 어떻게 보내셨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아기 때부터 얼굴에 후광이 비추이고 성자처럼 근엄하게 말하고 행동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로 근엄하게 “배고프다. 우유를 좀 가져다 주거라 혹은 마리아야 내 기저귀를 좀 갈아라”라고 말했을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아기들처럼 그냥 우셨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지혜는 정신적인 성장, 키는 육체적 성장, 하나님에게 사랑 받았다는 것은 영적인 성장,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사회적인 성장을 말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핀 풍성한 삶의 기초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혜와 키’는 나 자신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도 사랑스러워가셨습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에게는 깊은 사랑을,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칭찬을, 꾸짖음이 필요한 자에게는 가차없는 질책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온전한 성숙에 이르도록 자라가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공동체의 관계와 세상과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도 점점 더 사랑스러워가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1) 예수님께서는 균형있게 성장하셨습니다.  2) 또한 예수님은 모든 성장과정을 거치셨습니다. 키가 갑자기 확 크고 어느날 갑자기 영적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멋진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어느 영역에서 성장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이 성장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잊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불을 받아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드러나는 일을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교사라면 예수님같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음악가라면 하나님을 닮은 음악가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가라면 예수님 같은 정치가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인이라면 예수님을 닮은 직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같은 예술가, 예수님같은 목사와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우리의 삶과 인격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2.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목표, 즉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고 싶은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에베소서 4:13 (NKRV)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 그리스도인의 성장

- 우리의 성장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입니다. 

- 성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입니다. 

- 성장하는 방법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이시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우리의 삶속에 받아들일 때 우리가 성장하고 우리의 삶이 변화를 일으키게 되며 주변 사람들이 궁금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닮아가고 그분의 생명력이 우리 속에서 일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일조 좀 많이 한다고, 장로나 집사 집분이 있다고, 봉사를 많이 하거나 성경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다고 어깨에 힘을 주거나 반대로 남들과 비교하여 그렇지 못하기에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모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가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수고한 것에 칭찬을 받지 못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안에 돌아다니는 귀신중에 제일 문제가 되는 귀신이 ‘섭섭귀신’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원망이 되고 결국 시험에 들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는 궁극적이고 고귀한 목적을 잃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면 일상에서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기도, 성경읽기, 봉사 같은 소위 교회 생활에서 예수님을 닮아가겠지만 이런 것들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처럼 성장한다고 할 때 우리가 꼭 생각해야할 부분은 예수님도 성전에서 성장하신 것이 아니라 먼지 풀풀 날리는 삶의 정황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입니다. 목수인 아버지 요셉에게 일을 배우고, 얼마후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동생들을 돌보며 실제 삶의 터전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종교생활, 영적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기도하고 큐티훈련을 하는 좁은 의미의 제자훈련에 집중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석하고 헌금도 열심히 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우리의 일상, 바로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 이루어집니다. 배우자와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 내가 일하는 직장에서, 공부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2) 우리의 간절한 소원

시편 42:1–2 (NKRV)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목말라 본 적이 있으십니까? 간절히 냉수 한모금을 원했던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마름 속에서 주님을 갈망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우리의 목마름이 강할 수록 우리는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의 얼굴을 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한다’ 혹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라고 말합니다. 

 

요한1서 3:2–3 (NKRV)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는 마지막 때에 그분이 나타나시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놀라운 신분으로 변화되었다면 그분이 오실 때 그와 같이 되리라는 소망을 갖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3. 가장 중요한 성장 원리 : 믿음

* 생각해볼 질문 : 이제 성장 목표는 분명해졌지만, 우리가 어떻게 그런 성장에 이를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닮는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종교 영역에서 헌신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장하신 곳, 나아가 사역하며 살아가신 곳은 성전이 아니라 삶의 현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 믿음의 원리

참된 제자로 성장해가는 진정한 제자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초기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전 과정에서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하고 계신 일, 앞으로 하실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⓵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

로마서 3:24–25 (NKRV)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화목제로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⓶ 믿음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림

로마서 5:1–2 (NKRV)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본문에서는 두번에 걸쳐서 ‘믿음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이 은혜에 들어감을 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마음것 예배하며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본문은 이 자리를 은혜의 자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생살이가 어려울 때가 참 많습니다. 어떤 대는 힘든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사방으로 에워싸임을 당한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는 자신의 부족함에서 그 원인을 찾고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냉철하게 살피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 우리를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시고 완전히 받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자들이 서 있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롬 3:23)’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5:2)’ 상태로 바뀌었습니다. 

 

⓷ 믿음으로 살아감

로마서 1:17 (NKRV)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을 새번역에서는 ‘이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슨 일이, 나 자신과의 관계와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나아가 세상과의 관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거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의 근거가 바로 믿음으로, ‘네 그렇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7 (NKRV)

7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시대는 특별히 나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어서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따라서 진리도 재단합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설교나 강의를 들을 때도 뭔가 느낌이 오는 것이 있어야 좋은 강의,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느낌이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경우에도 진리는 선포됩니다. 우리는 느끼는대로 따라가지 않고 믿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2) 믿음의 특징 : 행함

데살로니가전서 1:3 (NKRV)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세가지 특징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간단히 표현했는데 믿음에는 역사가, 사랑에는 수고가, 소망에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인내가 없으면 소망이 아닙니다. 수고 없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믿음에는 행함, 역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는 행함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한다고 말하지만 바울이나 야고보나 모두 살아있는,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정말 제대로 믿는다면 행함은 따라 옵니다. 우리는 진리-믿음-행함-변화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리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믿음 :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인격적 수용

행함 : 우리가 믿는 내용이 삶에 나타남

변화 :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변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 우월하게 느낄 수도 있고 열등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의 실제적인 반응은 마음의 평안으로 나타납니다. 

 

 

4. 믿음으로 훈련하기 

* 생각해볼 질문 : 믿음으로 살아가려 할 때 가장 큰 방해거리는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4:9 (NKRV)

9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는 우리가 배운 것을 받아들여서 연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이 평강, 평화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조화로운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연습하고 훈련하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그대로 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제2의 천성이 될때까지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를 알기 전에 우리를 지배하였던 육신의 정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직장에서 누군가와 갈등관계에서 말싸움을 해서 이겼다고 합시다. 만약 하나님이 상대방의 억울함을 들으시고 ‘그래 네가 정말 억울하구나’라고 하시면 그것은 절대로 내가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인간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이를 안다면 우리는 예배를 드릴때 좀 더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뵙는데 늦을 수 없습니다. 자다 일어난 상태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2) 영적 지도자의 역할

이렇게 믿음으로 연습하고 훈련하는 과정에서 중간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직접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중간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는 ‘나도 하나님을 본받으려고 힘쓰고 있으니 넌 나를 따라오면 하나님을 본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수입의 십일조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사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으로 이제 더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가르치는 원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우리는 청지기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적으로, 기계적으로 1/10을 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제생활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십일조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 시위(demonstration)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용한 양식을 책임지신다고 했는데 입에 풀칠도 못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굉장히 불편하실 것입니다.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시면서 이 사람을 돕기위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훈련은 우리의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바뀐다고 모든 것이 일시에 바뀌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우리의 인격과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습관의 집합체, 덩어리입니다. 이 습관 동어리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하였다면 결국 우리 속에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점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온전하게 하는 성경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의 기초위에 서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성경에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7 (NKRV)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살마이 되고 선한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읽고 익혀야 합니다. 성경을 자꾸 읽다보면, 자꾸 그 기초위어 서려고 노력하다보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 습관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 성경읽기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하고 거룩하여지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계시된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배우고 이를 익혀나가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질문하고, 진리위에 서고 이를 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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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 만남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세상 경영

 

1. 세상 경영의 원리 : 정의와 사랑

* 생각해볼 질문 :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의 원래 계획

창세기 1:27–28 (NKRV)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주신 문화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에 만드신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다음 그 세상을 직접 다스리고 통치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권한과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구별하는 요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므로 그 권한과 능력을 행사하도록 요구 받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처음 한 일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 이름하나 짓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인데 수많은 동물들을 그 특성에 맞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놀라운 창의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을 때’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로 인해서 인간은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훼손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인간들에게 동산의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를 아담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실패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그 왜곡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는 바로 정의와 사랑입니다. 

 

2)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 : 정의와 사랑

우리는 문화명령속에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표현을 접합니다. 이 단어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정복이라는 단어는 전쟁을, 다스림이라는 표현은 억압과 통제를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우리의 역사는 일제통치와 군부독재를 경험했기에 인권탄압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성경의 다스림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시편 89:14 (NKRV)

14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시편 89:14 (NKSV)

14정의와 공정이 주님의 보좌를 받들고, 사랑과 신실이 주님을 시중들며 앞장서 갑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묘사하는데 의와 공의는 주님의 보좌의 기초이고 인자와 신실함, 사랑과 신실은 그 보좌 앞에서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보좌는 정의로 세워져 있고 그 앞에서 사랑이 시중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정리하면 ‘사랑과 정의’이 두가지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기본 원리입니다. 이 두가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 둘을 동시에 조화롭게 발휘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원칙을 따지고 그래서 차갑고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뭔가 지적을 받을 것 같고 그래서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깝게 지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반면 사랑을 중시하는 사람은 주변의 사람을 넉넉히 품어주기는 하지만 원칙이 없는 것 같고 우유부단합니다. 중심이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잘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정의와 사랑을 완벽하게 조화롭게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도 사랑으로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바로 사랑과 정의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조화로움이 완벽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정의의 칼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십자가는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주인노릇하며 살아간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대신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최고의 정의와 최고의 사랑이 크로스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세상을 다스려라라고 말할 때는 인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세상을 착취하고 마음대로 힘을 남용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잠재력이 최선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사랑과 정의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가지고 가정, 교회,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2. 정의와 사랑으로 살아가기

* 생각해볼 질문 :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의 원리로 살아가기 힘든 영역은 어떤 영역입니까? 

 

하나님의 세상 경영원리는 ‘사랑과 정의’로 명확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원리를 우리의 삶에, 일상속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 직장 갑질, 젠더 문제, 정치와 사회 영역, 군대 문제, 영화, 남북 문제, 미국-일본과의 관계

 

이렇게 우리의 일상이 복잡하고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단선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두권의 책으로, 내가한 경험을 절대화하며 세상만사를 균형있게 이해하고 평가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세상을 다스릴 자로서 사랑과 정의를 어떻게 적용하며 살아야할 지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1) 억울한 자들의 피할 요새

시편 9:8–12 (NKRV)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주님은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정직으로 모든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이 책은 정의에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저자는 정의를 바라보는 세가지 기준으로 행복, 자유, 미덕을 설정하여 공리주의, 자유주의와 관련된 윤리적 갈등 사례들을 보여주며 후에 본인의 입장인 공동체주의를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철학자의 주장은 논외로 하고 성경이 주장하는 정의는 무엇인지 조금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본문 9절에서 여호와는 압제당하는 자, 다른 말로 억울한 자들이 피할 요새가 되시고 환난 당한 자, 고난을 당할 때 피할 요새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정의가 살아 있었다면 억울함이나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이들의 피할 산성, 요새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억울해 하는 사람들,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주목하시고 이들을 돕기 원하십니다. 

힘을 가진 이들이 정의를 외칠 때 억울한 이들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 힘이 무엇이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신이 가진 힘으로 정의를 굽게하고 정의를 부인할 때 억울한 자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기억한다면 내가 가진 힘을 남용할 수 없고, 억울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소망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단지 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것을 넘어서서 온 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십니다. 

 

2)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아모스 5:24 (NKRV)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에 온전히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에서 정의가 물처럼 흐르고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정의와 공의의 문제는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회사에서 누가봐도 옳지 않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는데 다른 이들이 모두 묵인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으로, 공의와 사랑의 원리를 따른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실제로 문제제기를 했을때 발생할 불이익이나 피해나 따돌림으로 인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뱀지비순’의 원리가 필요합니다. 그냥 순진하게 ‘전 그렇게 못해요’라고 말하는 대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융통성 없게 표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원칙, 기준이 흔들릴 수는 없습니다. 문제 제기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지혜롭게 표현한다고 해도 불이익을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때 우리는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노예해방을 주도한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의 정치가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되려고 했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치의 영역속으로 부르셨음을 깨닫고 영국의 잘못된 인습과 제도를 개혁하기로 다짐합니다. 1787년 28세의 젊은 하원의원 윌버포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의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자신이 볼때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노예 제도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엄청난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잡아서 이를 수출하는 것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거둬들였습니다. 이전까지는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바라보니 이 노예제도가 성경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 그는 수십년간 150번 이상의 대의회 연설과 법안 제출과정을 통해서 56년만인 1833년 노예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영국의 양심이라고 불리웠고 그를 통해서 영국이, 세계가 노예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릅니다. 

 

3)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

야고보서 4:17–5:4 (NKRV)

17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1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4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누군가가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소리칠 때, 하나님이 그 소리에 ‘그래 네가 억울할 것이 맞다’라고 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관계된 사람이 억울하다고 이야기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억울함이 정당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 정의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죄인 것입니다.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지금 갑질을 하고 있지 않은지, 누군가를 억울하게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4)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원리를 적용해야하겠습니까? 

⓵ 일이나 직업

때로는 직업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직업이 있다. 포주를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 의사, 교사로서 어떤 공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⓶ 우리가 속한 직장이나 지역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직장이나 식당같은 곳에서 부하 직원이나 종사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

⓷ 사회에서 특별히 소외된 사람들

동성애자들에 대한 태도, ‘저는 동성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지만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은 반드시 보호받아야 합니다.’

이런 성적소수자나 장애인들을 대하는 태도, 님비 현상

⓸ 사회의 불의한 구조와 시스템

강도와 강간사건이 일어나는 마을이나 거래에서 그 피해자들만을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치안을 강화하고, 방범 등이나 CCTV를 설치하고 순찰을 강화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구조와 시스템을 보완하고 개혁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⓹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자연과 생태계

물과 전기 절약, 쓰레기 분리수거및 자원의 재활용 /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 재앙이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끼고 돌보는 삶의 방식에 힘써야 한다. 

⓺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나 세계의 불의와 불공정 문제

남북 통일을 위한 지원, 통일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노력, 새터민들에 대한 관심

인종 갈등과 소수자를에 대한 폭력과 수탈, 이를 통한 생산품을 거부하는 운동

 

이러한 구체적인 삶의 노력을 통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3. 세상 경영의 방법 : 노동

* 당신은 어떤 목표와 마음가짐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일-공부든, 직장일이든, 집안일이들-하고 있습니까? 

 

1) 일하는 인간을 만드신 일하시는 하나님

시편 104:19–23 (NKRV)

19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20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

21젊은 사자들은 그들의 먹이를 쫓아 부르짖으며 그들의 먹이를 하나님께 구하다가

22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들의 굴 속에 눕고

23사람은 나와서 일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해와 달을 통해서 낮과 밤을 만드셨는데 밤에는 동물들이 나와서 일하고 낮이 되어 그 동물들이 들어가고 나면 인간들이 나와서 해가 질 때까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실 때 일하셨고,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왜 사람을 고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만큼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와 사상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고대 사상에서 노동은 천민들에게 요구되었고 지식인이나 귀족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노동이 신성하다고 이야기합니다. 

⓵ 가사노동 : 가정의 공동체적 삶 유지

⓶ 농사 : 먹거리 제공

⓷ 교사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은 신성합니다. 나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아가기 위해서 지금까지 다룬 ‘풍성한 삶의 기초’를 더 충실히 다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하고, 공동체적 삶의 원리들을 알아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며 살려고 애쓰다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점점 더 선명하게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2) 타락한 세상에서의 노동

창세기 3:17–19 (NKRV)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그분의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노동은 저주가 되었고 땀흘리고 수고해야만 그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고를 한다고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노동은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도 노동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의 노동은 고통스럽고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이 성화되어서 그 본연의 모습이 회복될 것입니다. 

 

 

4. 노동하며 살아가기

* 생각해볼 질문 : 하나님은 무엇때문에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빌립보서 2:13 (NKRV)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의 노동에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노력하다보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다양한 소원을 두신다는 것은 이 깨진 세상,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 벽돌공 이야기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생각하며 그 원리인 정의와 사랑속에서 일을 할 때 그것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걸레질을 할 때도, 음악을 연주할 때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커피를 내릴 때도, 물건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도 모든 일에 의미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때의 자세

골로새서 3:22–23 (NKRV)

22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자세는 바로 성실과 탁월함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할 때 프로의식을 가지고 성실함으로 일해야 합니다. 또한 그저 열심히만이 아니라 잘해야 합니다. 세상의 탁월성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오는 우월성이지만 성경의 탁월성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온전히 발현하는 것입니다. 

 

3)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

이렇게 성실과 탁월함으로 일을 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고린도전서 10:31 (NKRV)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마태복음 5:16 (NKRV)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옷을 입고 푯말을 들고 다닌다고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과 착한 행실을 통해서, 무슨일을 하든지 그 가운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심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참 좋다라고 느낄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교회 밖에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안에서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교회안에서는 배우고 익힌 다음 실제로 그 내용을 실천으로 옮기는 곳은 우리의 삶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실 때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릴 것을 믿고 지금 이곳에서 그러한 다스림의 원리를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은 날마다 내가하는 일이 하나님앞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스스로 믿고 확인해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모든 것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는 행동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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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세상살이(Living in the world with Christ)

 

아홉번째 만남. 하나님의 다스림을 드러내는 복음 전도

 

1. 하나님나라의 시민

* 생각해볼 질문 : '신앙생활은 교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시간의 가장 많은 부분을 보내는 곳이 어디 입니까?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직장, 학교, 가정일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모든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1) 우리의 신분 : 하나님나라의 시민

우리는 세상속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2:19 (NKRV)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시민’이라고 말하는데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시민은 당연히 하나님나라 시민입니다. 우리는 원래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우리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안에 속하게 됨으로써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시민이란 어떤 도시나 나라에 속하여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시민이 되면 그 나라의 규율, 가치관,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하고 법적인 의무(국방, 납세, 교육, 근로)를 이행해야 합니다. 또한 도시와 국가는 그 시민을 보호합니다. 이는 시민이 가지고 있는 책임이자 권리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책임져주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2) 이땅에 사는 하나님나라 시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게 됨으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민권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소속이기에 이세상에서 일종의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⓵ 이미와 아직

빌립보서 3:20–21 (NKRV)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외국에 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때에 우리의 몸을 영광스럽게 변화시켜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⓶ 참고 견디는 것

외국, 프랑스 파리에서 한달살기. 이렇게 한달 사는 것은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나그네로서의 삶은 한달 살기나 관광온 삶이 아니라 치열한 삶인 경우가 많습니다. 

디모데후서 2:12 (NKRV)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분명히 영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우리에게 이 땅의 세계관과 가치관, 삶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이 땅의 세계관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 삶의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영원히 거할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가 이 당에서 잠시 체류하는 삶을 특징짓는 단어가 바로 참고 견디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고 견디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따르기때문에 오는 갈등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을 따라서 그들과 경쟁하며 살아가면서 생기는 갈등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한 고난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 하나님나라에 속한 우리는 이 세상과는 다른 세계관, 가치관, 삶의 방식, 다른 삶의 목적을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 땅의 가치관과는 부딪힐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⓷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요한복음 15:19 (NKRV)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세상과 자신을 상반되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세상에서 예수님이 택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드셨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 나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 그리스도인이기때문에 묵묵히 선의를 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의 태도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바보같고 속는 것 같습니다. 내가 속이거나 싫은 소리 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있어야만 영광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보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세상에서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우리는 부대낄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참고 견디는 것이 하나님나라 시민의 트레이드마크입니다. 

 

2. 새로운 시민권과 그 사명

* 생각해볼 질문 : 하나님나라의 시민에게는 놀라운 특권과 함께 사명도 있을 텐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일까요?

베드로전서 2:9–10 (NKRV)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의 상태

벧전 2장 9절은 하나님을 알기 전 우리의 상태를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어두운데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셔서 빛으로, 하나님의 다스림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2) 변화된 지위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가운데 빛으로 불로내신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위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족속(a chosen people)이 되었고

황과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이 되었고

거룩한 민족(a holy nation)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a people belong to God), 하나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보물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놀라운 지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귀국하여 LA항구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배에 루스벨트 대통령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항구에는 대통령을 반기는 수많은 환영인파가 있었지만 이 선교사를 환영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순간 좌절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평생을 바쳐 수고하고 이제 내 나라로 돌아왔는데 나를 반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그런데 선교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저 사람은 저 사람의 나라에 돌아왔지만 너는 아직 네 나라에 돌아오지 않았단다.’ 

 

3) 변화의 목적

이러한 변화된 지위를 허락하신 목적을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분의 통치아래 들어가서 신분이 바뀐 우리는 우리가 누리게 된 새로운 지위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요즘은 SNS나 유투브 광고가 대세입니다. 그런데 이 광고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뒷광고입니다. 기업이나 식당에서 뒷돈을 받고 광고하는 것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내돈내산’ 광고를 가장 좋아합니다. 내돈으로 사서 사용하는 것인데 그것의 가성비가 너무 좋아서 사람들에게 광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점도 마찬가지 입니다. 광고를 아무리 많이 해도 음식이 맛이 없으면 더이상 가지 않습니다. 먹어보고 너무 맛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합니다. ‘그 집 꼬막정식 끝내준다.’, ‘그 집 김치찌게 정말 맛있다’, ‘그 집 커피 정말 좋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어 그래?’하고 그 식당, 카페를 찾아갑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새로운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선포해봤자 큰 반응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시민으로서의 변화된 나의 삶을 건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균형잡힌 생각을 가지고 건강한 자존감으로 살아가는 것,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에 점점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주변의 사람들은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궁금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되면 저런 삶을 살 수 있구나,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구원을 누린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대단한 변화이며 축복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이러한 축복을 나눌 수 밖에 없습니다. 

 

3. 하나님의 다스림을 누리며 알리기

* 생각해볼 질문 :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 살 때 경험한 여러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과 갈등을 일으키고 이 가정에서 우리는 참고 견뎌야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승진하려고 물불 안가리고 다른 사람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이중 계약서를 쓰고 편법으로 세금을 누락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축복

그렇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를때 축복을 받아서 모두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을 따를 때 세상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를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언제 우리가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그분께 나의 삶을 맡길 때, 내려 놓을 때 그분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고 구별해야할 것은 내려놓는 것과 내팽겨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팽겨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책임을 등한시하는 것이지만 내려놓는 것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평겨치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지만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십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길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런 평안을 누렸습니다. 

사도행전 7:55–60 (NKRV)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 하나님 우편에 주님이 서신것을 보았습니다. 6장 15절은 스데반이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돈, 결혼, 가정, 자녀문제, 장래에 대해서 평안이 없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아래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된 존재임을 진정으로 믿고, 자신이 속한 나라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하나님 그분의 다스림 아래 내려놓고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삶의 여정입니다. 

 

2) 축복을 알리는 일 : 먼저 거룩해지기

이런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면 이제 이런 놀라운 축복, 하나님의 다스림 밑에 있는 축복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첫번재 의무입니다. 

베드로전서 3:15–16 (NKRV)

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온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진보가 이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갈 때 점진적으로, 분명한 변화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희망을 흘리는 일

이렇게 거룩함을 추구할 때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묻게 될 것입니다. 전도가 잘 안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삶이 거룩하지 않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모신다고 하면서 우리의 삶에 능력이 보이지 않고 찌질해보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부러워하겠습니까? 

뭔가 매력적인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하물며 취미생활로 달리기나 피트니스를 한다고 합시다. 뭔가 건강해지고 튼튼해진것같은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이 찾아와서 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며 기쁜 신앙생활을 하다고해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바로 ‘네가 믿는 하나님 나도 믿고 싶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툭툭 건드리면서 ‘야 기독교인들 다 똑같아, 너 또 교회가냐? 교회가 밥먹여 주냐?, 내가 교회를 보니 이런 저런 문제가 있더라’라며 긁어댑니다. 이럴 때 화를 내거나 회피하지 말고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 정말 이제 사람들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우리 삶이 달라지고 변한 것,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먼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마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기에 직업, 결연, 교육, 종교, 놀이 공동체가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격이 거기에 투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에서는 교회 얼굴, 학교에서는 학교 얼굴, 직장에서는 직장얼굴이 다 따로 있습니다. 말그대로 멀티 페르소나, 부캐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도 일관된, 통합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우리의 통합된, 일관된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4. 대답을 준비하는 삶

* 생각해볼 질문 : 전도를 하려 할 때 가장 마음에 걸리고 힘든 부분은 무엇입니까? 

 

말한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변화되어가고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흘러갈 때, 사람들은 우리 삶에 호기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이제 진지하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한번 믿어봐, 교회 다녀봐’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답이 아니라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1) 우리가 준비할 것들

벧전 3장 16절은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과 선한 양심’으로 대답하라고 권합니다. 온유함은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관점으로 상대방의 처지가 되어주는 마음자세입니다. 두려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선한 양심은 자신을 향한 것입니다. 자신도 잘 모르는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말고 솔직하게, 진실하게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간증과 전도를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간증은 예수 믿기 전, 예수님과의 만남, 예수를 믿은 다음의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예수 믿으면 좋아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했다면 이제 예수 믿으면 무엇이 좋은지를 좀더 솔직하게 개인적인 내용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 전도는 말그대로 복음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중요한 내용은 이미 앞서 다룬 바 있습니다. 

첫번재는 하나님이 세상과 당신을 만드셨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인간이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네번째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뼈대에 살을 붙여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개인의 증거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 교회

요한복음 17:21 (NKRV)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공동체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믿게 됩니다. 가장 좋은 복음 전도는 예수님을 정말 믿고 있는 공동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려주고, 나를 그렇게 변하게 해준 공동체를 소개해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복음전도입니다. 

오늘날 복음전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우리 개개인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 공동체, 교회가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창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으니, 그 창문이 너무 더러워서 세상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해라. 그렇게 정말 사랑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을 세상 사람들이 믿게 된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 교회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은 대로 살아가는 것을 함께 보여줄 수 있기 바랍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삶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면, 다시 말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면,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거룩해집니다.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사람들을 궁금해합니다. 이들에게 그 대답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복음 전도자 한 사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수 많은 사람이 소망을 품고, 이런 저런 사랑을 보여주고, 그를 위해서 기도한 것의 결실이 회심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특권은 바로 하나님나라의 좋은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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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번째 만남. 섬김의 도를 실현하는 공동체

 

1. 공동체적 삶의 원리 : 섬김의 도

*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가장 중요한 특징을 들라면 무엇을 들고 싶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쉽지만, 그 사랑을 실생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은 결단과 학습과 훈련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일에만 성장해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그리스도인 공동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는 교인 수가 얼마나 되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고,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고, 얼마나 가난한 자를 섬기느냐보다 사랑의 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달려 있습니다. 

 

1)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성경의 매우 중요한 원리는 3장 16절에 담겨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NKRV)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3:16 (NKRV)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한복음 3:16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면, 요한일서 3:16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 사랑을 알게 되었으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혹 요한복음 3:16만 있고 요한일서 3:16은 없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있는듯한데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없는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믿고 외우면서 요한일서 3:16은 삶에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고 외우는 요한복음 3:16은 어쩌면 가짜일지 모릅니다. 

 

2) 섬김의 도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된 사람들은 어떤 원리,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마태복음 20:25–28 (NKRV)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본문 앞에서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불러놓고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도’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리더십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건강한 권위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유익을 따라, 자기 욕심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마구 임의로 리더십을 사용하고, 자기가 가진 권세를 마구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경이로운 소문, 충진시의 시장, 태신건설

세상 공동체는 피라미드 구조로 갑과 을의 관계로 구성되어 피라미드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속에서는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위치한 약자들을 을의 을이 되어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2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반대, 거꾸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맨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져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가장 많은 낮아져서 섬기신 분은 바로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공동체, 교회는 세상의 원리가 작동하는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구조입니다. 자신의 힘과 권위, 지식, 능력, 경험, 재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런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2. 서로 복종하는 삶

* 생각해볼 질문 : 지도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듭니까? 

 

1) 겸손의 순종

베드로전서 5:5 (NKRV)

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 사도는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에서 나이가 많은 이들, 곧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에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공동체의 리더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권위는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안수를 받았기에 자동적으로 그러한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이것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한에서 그 권위는 작동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양극단을 보입니다. 한쪽 극단은 유교적인 전통과 샤머니즘이 결합되어 목사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목사에게 도전하면 벌받는다라고 가르치고, 목사가 비상식적인 요구를 해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합니다. 목사의 가르침이나 요구가 문제가 있어 보일때는 자신의 지식이 부족하여서 오해할 수 있으니 쉽게 판단하기 보다 겸손히 질문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겸손히 질문해야 합니다. 다른 극단은 모두가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기에 목사나 성도나 아무 차이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교회지도자들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각자의 영적 성숙도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에 따라 그 권위가 다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자신의 소견이 옳은대로 큰소리를 내고 무조건 1인 1표를 주장하며 다수결을 따라가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이상적인 의사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충분히 소통한 결과 한 방향으로 이야기가 모아질 때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대로 모든 사안이 그렇게 이상적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결정을 유보해야할 수도 있고, 충분히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한 후에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소수의 의견을 리더가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리더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고 결정 할 때, 모든 공동체 구성원은 여기에 함께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2) 서로 복종하라. 

에베소서 5:21 (NKRV)

21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데 ‘피차 복종하라’는 이 가르침 이후에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의 관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원리로 이 원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속에서 이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혁명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시 남편과 부모, 주인이 아주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아내와 자식들과 종들을 함부로 대했고, 이것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시대속에서 반문화(counter-culture)를 제시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피차 복종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처럼 남녀가 평등화된 사회에서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포기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각자의 취향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믿고 또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즐기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기에 서로에게 속박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정을 이루고 배우자에게 피차 복종할 수 있습니까? 이 공동체의 최고의 권위가 바로 주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동일하신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우리는 그 권위 아래서 피차 복종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교회 공동체는 세상과는 다른 대안 공동입니다. 섬김의 도, 서로 복종하는 길을 선택하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의 방식이 그대로 작동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도 직분이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이 큰 소리를 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섬기는 사람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하는 사람들이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3. 용서와 용납

* 생각해 볼 질문 : 어떤 사람을 섬기고 사랑했지만 오히려 오해를 받고 거절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요한복음 13:34–35 (NKRV)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는 네 가지 원리, 희생하는 사랑, 진실한 사랑, 구체적인 사랑, 중심있는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공동체에서는 건강한 권위를 인정하고 리더는 희생하고 섬기며 결과적으로 서로 복종함으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 계명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서로’라는 말을 너무 넓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서로라는 말이 옆집 사람들, 옆 자리 김 선생님, 마트의 이 사장님등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넓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 이 본문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 공동체를 향해서 이 말씀을 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먼저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실 때 백 명, 천 명, 만 명을 사랑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주신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해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허락된 사람을 사랑하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람은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찾지만 마찬가지의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움을 겪는것이 불편하기에 모든 사람, 모든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기로 합니다. 불특정 다수를 사랑한다고 하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우리 주변의 손에 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책임감을 느끼며 사랑해야 합니다. 

 

2) 공동체를 세우는 첫 번째 기둥 : 용서

그런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어느정도 멀리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랍니다. 상대방의 약좀과 상대방이 나에게 잘못하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18:20-35에서 용서의 비유,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본문의 용서의 가르침은 마 18:20의 말씀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18:20 (NKRV)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베드로가 묻습니다. 형제가, 앞에 내용에 이어서 말한다면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몇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묻습니다. 일곱번이면 됩니까라고 묻자 주님께서 일곱번에 일흔 번이라도 참아라라고 말씀하시고 일만 달란트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치 품삯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6000데나리온, 한 달란트는 거의 20년 연봉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입니다. 그런데 그것인 일만 달란트이니까 20만년 연봉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1년 연봉을 5천만원이라고 계산하면 10조원에 해당되는 막대한 금액입니다. 

그렇기에 일만달란트를 왕에게 탕감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면제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이 백 데나리온, 1-2천만원의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압제한 것에 대해서 왕이 분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절하고 배반한 것은 일만달란트에 해당하는 빚입니다. 그 빚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는 어렵습니다. 나에게 거짓말이나 가벼운 잘못을 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자존심을 깨뜨리고, 나의 인격을 무시하고, 나에게 물리적인 큰 피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용서하는것 뿐만 아니라 용서받는 것도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3) 공동체를 세우는 두번째 기둥 : 용납

골로새서 3:13 (NKRV)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탕감해주는 것, 우리에게 저지를 죄를 없애주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납은 우리와 다른 면, 상대방이 가진 부족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한 것처럼 용납하기 위해서는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님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 마음의 그릇이 작은 사람은 용납을 잘 하지 못합니다. 자기 스타일만을 고집하며 나와 다름을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면서 우리의 그릇이 점점 커지면 나와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부부와 가족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서로 너무 달라서 고통스럽습니다. 결혼전에는 매력을 느낀 부분이 이제 나를 힘들게 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람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름을 용납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이 용납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 나의 기준과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지 말고, 상처 받지 말고 용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서와 용납이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용납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참아주시고 받아주셨습니다. 

 

 

4. 은사로 공동체 세우기

* 생각해볼 질문 : 정말 좋은 공동체를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공동체에는 어떤 특성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여 공동체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용서하고 용납할 뿐만 아닐 자신의 은사를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전 12:3-13절은 공동체의 은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13 (NKRV)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3절은 공동체의 대 전제를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는 다양성과 하나됨이 존재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잘 섬깁니다. 누구는 병고치는 은사를, 누구는 손대접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서로 다른 은사를 모두 한 성령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룰 주신 목적은 바로 7절로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 성령으로부터 다양한 은사를 받음으로 한 공동체를 섬기고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신다면 공동체안에서 다양한 일을 섬겨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가지 섬김의 일들을 통해서 나도 잘하고,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이 바로 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은사를 통해서 교회를 섬길 때 기쁠게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음식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그렇게 음식을 준비할려면 엄청나게 고민하고 시간도 들고 노력이 필요할텐데 그분은 너무 쉽게 그 음식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분들이 너무나 맛있다고 좋아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손대접, 섬김의 은사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누군가 자기와 이야기를 하면 자신 앞에서 울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에게는 공감하는 은사, 긍휼의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제를 분석하고 해답을 주기위해서 노력하지만 그 분은 공감해주고 상대방의 마음을 만져주는 것입니다. 

 

2) 꿈을 이루어가는 공동체

베드로전서 2:9 (NKRV)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공동체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가 변화된 자들, 곧 택함을 받은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새로운 정체감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자기 은사로 섬기고, 그래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누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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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일곱번째 만남. 형제 사랑을 살아내는 공동체

 

1.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공동체

생각해볼 질문 : ‘기독교인이 되면 꼭 교회를 다녀야 해?’라거나 ‘교회를 다니더라도 혼자 좀 조용히 다니면 안돼?’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게 된 나

에베소서 2:4–7 (NKRV)

4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의 주제는 ‘우리’이다. 우리가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아서, 지금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2:10 (NKRV)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10절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이 작품이라는 표현, ‘포이에마’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다. 우리가 함께 어우러져서 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작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의미

⓵ 하나님의 가족

에베소서 2:19 (NKRV)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본문의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표현이 바로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외인이였고 나그네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우애하고 서로 아끼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살며 사랑하고 우애하고 서로 아끼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⓶ 그리스도의 몸

에베소서 2:16 (NKRV)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서로 넘을 수 없는 막힌 담을 그분이 허심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한 몸된 우리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는 존재들입니다. 몸과 고깃덩어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 구성 성분은 같습니다. 하지만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지만 고깃덩어리는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머리되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까? 

 

⓷ 성령의 전

에베소서 2:21–22 (NKRV)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성전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 공사를 하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려야 합니다. 여러 구성 요소들이 순서에 맞게 연결될 때 아름다운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에서 우리가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족이지만 우리 안에 위선과 부족함이 존재합니다. 더 사랑이 넘치고 안전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아직 어리고 약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전이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온전히 드러나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기

* 생각해볼 질문 :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하나님의 가족이요 성령의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데, 많은 교회나 공동체의 모습이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교회안의 어떤 의견 차이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최근 교회는 집단 감염의 온상, 목회자의 성적 타락, 재정의 잘못된 집행등으로 세상의 근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갈등과 아픔이 두려워서 교회를 너무 가까이하지도 않고 멀리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지불하셨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인 교회를 깨뜨리려는 여러 시도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려는 이들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실제 공동체

첫번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두번째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 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족이 되었다는, 한 몸이 되었다는, 함께 지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식하며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를 그저 건물로 인식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배 드리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가나안 성도들은 가시적인 교회 무용론을 펼칩니다. 우주적인 교회에 속해 있기에 지역 교회에 속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교회들은 가시적인 지역 교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그저 건물이나 예배드리는 곳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나님의 꿈을 꾸며 자라가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예배하는 하나님의 공동체 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이땅의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인간적인 지위와 계산, 개인의 취향이나 혈연이나 지연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분모, 하나님 아버지, 그분을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2) 힘써 지키라

이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됨입니다. 

에베소서 4:3 (NKRV)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경은 우리가 이미 하나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가 되자’가 아니라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서로 다른 면만을 바라볼 때 공동체는 상처받고 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다른 면을 다양성으로 바라보게 될 때 이 다름은 축복이 됩니다. 한 공동체 안에는 꼼꼼한 사람도 필요하고, 진취적인 사람도 필요합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도 필요한 반면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이 다름은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가 되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다름이 어우러지게 됩니다. 조율되지 않은, 튜닝되지 않은 피아노나 기타를 쳐보거나 그 연주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너무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 피아노를 조율할 때 중간의 A음에 맞추어서 튜닝을 합니다. 그렇게 잘 조율된 악기의 연주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서로 다른 음들이 화음에 맞춰서 어우러질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의 목소리, 욕망을 조율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평안의 매는 줄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풍성한 삶의 기초’에는 계속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기초로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졌으므로,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알아가며 사랑하는 특별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므로, 이제 나를 부인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에 완전히 속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공동체적으로 하나되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성한 삶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 생각해볼 질문 : 우리에게는 특별히 사랑하기가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 수 있을 까요? 

그리스도의 다스림안에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바로 형제 사랑입니다. 

 

1) 사랑은 그리스도인 됨의 증거다. 

요한1서 3:14–16 (NKRV)

14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본문에서 말하는대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갔습니다. 옮겨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옮겨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가 구원받은 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구원이라는 추상적인 진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확증된다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이며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에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존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먼지만도 못한, 바이러스보다 못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먼지끼리, 바이러스끼리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2) 나뉠 수 없는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요한1서 4:19–21 (NKRV)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입증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이것은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4.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

*생각해볼 질문 :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사랑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성경은 이 사랑의 비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에 전문가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데에 탁월성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서로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사랑에 대해서 끊임없이 말하고 가르치지만 실제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을 세상 문화에서 배웁니다. 드라마나 영화속의 어그러진 사랑을 보면서 사랑을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일서 3장 16-19, 23-24절을 통해서 형제 사랑의 성경적 원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1서 3:16–19, 23-24 (NKRV)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3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1) 희생하는 사랑(16절) 

첫번째는 목숨을 버리는 사랑, 즉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것을 내어줍니다. 자기 것을 허비합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느낌이 오는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자기희생이 빠져버린 그런 느낌은 단순한 에로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 희생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폭력이나 배우자의 외도를 참는 것이 희생이 아닙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서 더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이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2) 진실한 사랑(18절) 

두번째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 진실하다는 것은 투명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다른 숨은 목적을 가지고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또한 자신의 관심과 자기 유익을 위해서가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숨김없이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이 투명성은 아닙니다. 이 투명성에는 반드시 성숙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겉과 속이 다를 필요가 없는 성숙함이 있을 때 진정으로 투명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교인들이 모두 그 말의 진위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느라고 분주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목사의 뜻을 분별하기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곤란합니다. 사랑은 진실되고 투명해야 합니다. 

 

3) 구체적인 사랑(17-18절) 

세번째는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공동체 안의 형제의 문제를 보고 구체적으로 돕지 않고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체성을 띠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듣고 기도해줄께라고 이야기 했다면 진짜 기도해야 합니다. 힘들게 지내는 분을 보면서 ‘식사 잘 하시고, 건강 잘 챙기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 한 번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이런 이야기만 하는 것이야 말로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만나서 함께 밥 한 끼 함께 하면 됩니다. 만나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안수현이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기독 의사로 33살의 나이에 유행성출혈열로 사망했습니다. 이 의사는 자신이 수입의 1/3을 환자들이나 자신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이나 음반, 설교 테이프등을 구입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이 안수현 의사의 장례식에 3000명이 넘는 조문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우리들도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을 표현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중심이 있는 사랑(23-24절) 

네번째는 중심이 있는 사랑입니다. 23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 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지 측은지심에서 출발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난 다음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직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억지로 사랑하는 것 위선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로부터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그것을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투명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분 말씀의 진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투명하셨으며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고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랑이었습니다. 중심이 분명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온전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을 본받아 형제 사랑을 힘써야 할 것입니다. 

 

5) 사랑을 훈련하고 배우라

이 사랑은 느낌을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결단으로 시작하고, 인내로 유지하며, 지혜로 성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바른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아니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잘못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가정에서 배운 사랑을 교회와 사회에서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많은 가정에서 이런 사랑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왜곡된 사랑, 때로는열등감과 분노를 가르칩니다. 가정에서 이러한 사랑을 못 배웠다면 교회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렇게 배운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가졌습니다. 아주 성숙한 사람들만이 모인 것이 아니라 각양각색의 사람들, 절대로 예수 아니면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서로 삐죽삐죽하고 모난 가지들이 성령의 띠로 하나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다가 지치거나, 사랑하다가 실망하거나, 사랑하다가 상처받거나, 사랑하다가 시험들었다고 공동체를 떠나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해야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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