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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Do not speak evil against one another, brothers.4 The one who speaks against a brother or njudges his brother, speaks evil against the law and judges the law. But if you judge the law, you are not a doer of the law but a judge. 12 There is only oone lawgiver and pjudge, he who is able to save and qto destroy. But rwho are you to judge your neighbor?

m 2 Cor. 12:20; 1 Pet. 2:1; [ch. 5:9]

4 Or brothers and sisters

n See Matt. 7:1

o Isa. 33:22

p ch. 5:9

q Matt. 10:28

r Rom. 14: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4:11–12.

 

야고보는 다시금 말의 잘못된 사용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11절) 본문에서 비방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타랄레오’라는 단어이다. 이는 ~에 대해 거슬러 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카타라는 접두사와 랄레오라는 동사로 이루어져있는데 ‘카타’는 ~에 대항하는, 반대하는 의미이고 ‘랄레오’는 말하다라는 동사이다. 바로 반대하여 말하는 것이 비방이다. 

James restates the basic problem behind the issues discussed in 3:1–4:10: the misuse of the tongue to speak evil or to slander others. Speaking ill of others is the result of all the arrogant boasting (3:5), jealousy (vv. 14, 16), self-centered desires (4:1, 3), and pride (v. 6) that James is warning against. Such slanderous conduct is decried in both the OT (Lev. 19:16; Ps. 50:20; Jer. 6:28) and NT (Rom. 1:30; 2 Cor. 12:20; 1 Pet. 2:1). judges the law. The “law” likely refers to these OT laws against slander, particularly Lev. 19:16, which leads to 19:18,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which James calls “the royal law” (James 2:8). Yet it also includes in a broader sense Jesus’ kingdom laws regarding love for neighbor (Matt. 22:39) and for one another (John 13:34–35; 15:12, 17). Those who inappropriately judge others (Matt. 7:1–5; Rom. 2:1; 1 Cor. 4:5) break God’s law and show contempt for Go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7.

 

한 마디로 [비방]이란 본인이 없는 곳에서 “ 비난하고- 모략중상하고- 헌담하고- 욕하고- 악담하면서- 과거를 들추어 망신을 시키고- 모든 잘못을 상대방 탓으로 돌리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하여 낙인찍히게 만들고- 그 사람의 은밀한 죄를 폭로시키면서 매장시켜 버리는 행위 ”를 말한다다. 이러한 행위는 보복심리에서- 저주와 미움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무서운 죄이다다. 바울은 이를 사형에 해당한 죄라고 규정했다(롬1:29-32).

 

하지만 본인을 훈계하기 위해서- 본인을 깨우쳐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죄를 짓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서 – 직접 본인에게 말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향해서 비방이라는 죄를 지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나 불순종의 삶을 살다간 인생선배들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듣는다. 선지자들이나 설교자들은 그들의 선한 행위와 그 결과- 그들의 악한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서- 수없이 설교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향해서 비방했다고 정죄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설교 그 자체가 영혼을 구원하려는 선한 목적에서 출발한 영적 충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방은 다르다. 비방은 이웃을 격리시키고- 화목을 거부하면서- 이웃에 대한 미움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진심으로 구원해 보려는 그 마음에서부터 출발한 [비방]이란 있을 수 없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랑은 할찌라도 절대로 비방은 하지 않는다. 비방은 [미운감정]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살인죄에 해당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판단하다라는 단어는 ‘크리노’이다.  [판단]은 법정적 개념의 단어로 이를 표현하는 두개의 단어가 있다. άνακρινω(아나크리노)와- κρίνω(크리노)입니다. ακρινω(아나크리노)는 “ 자세히 조사하다. 심문하다. 묻다(행12:19. 고전2:15)”로 죄를 [조사과정]을 의미하여- κρίνω(크리노)는 “ 구별하다. (사법상으로) 결정하다. 함축적으로 ---에 의해 언도하다. 벌하다. 복수하다. 결말짓다. 정죄하다. 판결하다. 간주하다. 판단하다. 정하다. 심문하다. 선고하다 ”로 [조사결과]를 의미한다. 

 

고전4:5-6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άνακρινω(아나크리노)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κρίνω-크리노)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2:1-5그러므로 남을 판단(κρίνω-크리노)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κρίνω-크리노)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κρίνω-크리노)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κρίνω-크리노)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κρίνω-크리노)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κρίνω-크리노)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κρίνω-크리노)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본문에서 말하는 [판단]이란 [평가]가 아니라 재판장 위치에서 – 하나님 위치에 서서 결정적인 [정죄]를 말하는 것이다인간은 단지 율법의 준행자일 뿐이며 그 율법을 기준으로 재판하는 자(재판장)의 위치는 아니라는 것이다율법은 자기를 돌아보는 척도(신앙과 행위의 기준)일 뿐이며남을 비판, 판단하기 위한 척도가 아니라는 말이다그러므로 “ 저 사람은 이 구절에 해당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벌을 받아야 한다 라는 결정적인 말을 우리들은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바로 형제들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다. 죄인된 인간이 율법을 수여하신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이다. 

 

12절) 그래서 야고보는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고 있다. 바로 율법을 제정하시고 이를 판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우리들이 그 자리에 서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요 큰 죄이다. 하나님은 능히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기에 그분만이 판단의 주체가 되실 수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동료 성도를 ‘판단하는 것’(judging)이 어떻게 이 율법을 판단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가? 야고보가 ‘율법을 판단하는 것’과 ‘율법을 행하는 것’을 서로 대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율법의 불이행이 곧 율법의 권위에 대한 암묵적인 부인과 연관된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견해가 아무리 고상하고 옳다하더라도 실지로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실제로는 그것을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만방에 알리는 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된 기독교가 순종이란 척도에 의해서만 그 실제가 드러난다고 하는 야고보의 의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비방하는 행위는 비단 ‘율법을 판단하는 일’과 연관되기 때문에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이웃을 판단하는 일’과도 결부되기 때문에 잘못된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판적인 판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요구에 불순종하는 태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권리를 교만하게 남용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그의 피조물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입법자요, 재판관이시기 때문이다(마 10:28 참조).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경우, 실제로는 우리 자신이 이미 그들의 영성과 운명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 여기에서 야고보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가져야 할 건전하고 필요한 분별력 자체를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한 믿음의 기준을 명백하게 어기는 사람들을 내쫓거나, 공동체 구성원 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공동체의 권리를 금하지도 않는다(고전 5장과 6장). 다만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는 비판적인 말에 있다. 바울이 어떤 제의적 율법을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상대방의 믿음을 의심하고 있었던 로마의 교인들을 책망한 것도 바로 이런 형태의 판단 때문이었다(롬 14:1–13; 특히 3–4절 그리고 10–13절 참조). 이와 같은 상황이 야고보가 권면한 상황과 유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독하고 이기적인 마음(3:13–18)이 교회의 어떤 문제에 대해 다툼과 논쟁을 일으켰을 것이고(4:1–2), 이러한 논쟁 과정 속에서 늘 그렇듯이 서로에 대한 저주(3:10)와 각종 비방(4:11–12)을 포함한 통제되지 않은 말들(3:1–12)이 오고 갔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들은 세속적인 정신의 표현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3:15; 4:1, 4), 관용과 양순함과 화평의 특성을 지닌 ‘위로부터 난 지혜’로 대체되어야 한다(3:17). 이처럼 세상과 벗된 태도는 자기 백성의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질투와 결코 양립할 수 없다(4:4–5).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 된 교만을 버리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돌아서서 은혜를 베푸신다(4:6–1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2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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