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aYou adulterous people!3 Do you not know that friendship with the world is enmity with God? bTherefore whoever wishes to be a friend of the world makes himself an enemy of God. 5 Or do you suppose it is to no purpose that the Scripture says, “He yearns jealously over the spirit cthat he has made to dwell in us”? 6 But dhe gives more grace. Therefore it says, e“God opposes the proud but dgives grace to the humble.” 7 Submit yourselves therefore to God. fResist the devil, and he will flee from you. 8 gDraw near to God, and he will draw near to you. hCleanse your hands, you sinners, and ipurify your hearts, jyou double-minded. 9 kBe wretched and mourn and weep. Let your laughter be turned to mourning and your joy to gloom. 10 lHumble yourselves before the Lord, and he will exalt you.
a Isa. 54:5; Jer. 2:2
3 Or You adulteresses!
b John 15:19; 1 John 2:15; [Matt. 6:24]
c 1 Cor. 6:19; 2 Cor. 6:16
d Isa. 54:7, 8; See Matt. 13:12
e 1 Pet. 5:5; Cited from Prov. 3:34 (Gk.)
d Isa. 54:7, 8; See Matt. 13:12
f 1 Pet. 5:8, 9; [Eph. 4:27; 6:11]
g 2 Chr. 15:2; Lam. 3:57; Zech. 1:3; Mal. 3:7; [Luke 15:20]
h Isa. 1:16
i Jer. 4:14
j ch. 1:8
k [Matt. 5:4]
l ver. 6; Isa. 57:15; [Luke 1:52]; See Matt. 23: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4:4–10.
4절) 본문은 간음한 여인들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사용해왔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원하시지만 우리들은 세상과 벗되어서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본문은 간음한 여인들로 여성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사 54:5-6)
The form of the Greek word this translates is feminine. Picking up widespread OT imagery, James compares God’s people to God’s bride or spouse (e.g., Isa 54:5–6) and, as often in the OT, rebukes them for unfaithfulness (e.g., Hos 2:5–7; see also Isa 57:3; Jer 3:20; Ezek 16:38; 23:45).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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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은혜로 선택하여 그들과 계약 관계를 맺으셨다. 이러한 관계는 흔히 결혼 이미지로 묘사된다(사 54:1–6; 렘 2:2). 그런데 이 관계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로 위태로워질 때, 그 상태에 ‘간음’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된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한다(렘 3:20). 이러한 간음의 주제는 호세아에서 가장 통렬하게 표현된다. 호세아가 부정한 여인과 결혼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상황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은 음행을 저질렀고(호 2:5), 다른 ‘사랑하는 자’ 바알과 다른 거짓 신을 따라가기 위해 그의 첫 번째 남편인 하나님을 버렸다(호 2:7).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약속하신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내 남편이라 부를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20)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도 이런 이미지를 받아들여 자신을 거부하는 자들을 향해 ‘음란한 세대’로 부르셨다(마 12:39; 16:4).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구약의 전승은 늘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아내’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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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야고보가 ‘간음하는 여인’이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독자들을 하나님의 신실하지 못한 백성으로 책망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세상과의 벗됨을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영적인 간음’을 저질러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버린 셈이다.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볼 때, 이런 태도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적대감 뿐 아니라,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적대감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계약을 깬 당사자들을 심판하셔야만 한다. 물론 야고보의 독자들이 하나님을 명백하게 부인하고 그 대신에 의도적으로 세상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기’와 ‘경쟁심’, 그리고 ‘통제되지 못한 정욕’은 결국 ‘땅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을 추구하는 태도(3:15)이기에, 그와 같은 행위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은 어떤 라이벌도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세상의 특성에 따라 행동할 때 야고보는 바로 그 점에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따른 행위라고 지적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세속적인 행위의 궁극적인 결과를 끌어냄으로써 독자들의 양심을 찔러 회개하도록 촉구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이고 다투기 좋아하는 행위가 실제로 심각한 문제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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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14–215.
5절) 우리가 세상과 벗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역사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니라 세상을 사랑할 때 성령은 우리 속에서 시기하시고 아파하신다. 이 시기와 아픔은 사랑에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모든 경배와 찬양, 사랑을 받기 원하시기에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질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보트로 지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우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셨다. 프로그램화된 경배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받기 원하시는 것이다.
본문의 시기하는 주체에 대해서 NIV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기도 한다.
6절)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말씀하신다.
God’s grace will be extended to those who are humble before him; cf. Prov. 3:34 (cf. also James 4:10; 1 Pet. 5:5). God opposes means he resists and sends judgment, for the proud have chosen the praise and the methods of the world and are acting as God’s enemies (James 4: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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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이 겸손이 잠언 3:34에서 끌어온 인용문의 참 뜻이고, 7–10절에 나오는 권면의 주도적인 모티브가 된다. 은혜라는 하나님의 선물은 기꺼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받을 수 있다. 반면에 교만한 자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배척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꿰뚫는 주제이다(시 18:27; 34:18; 51:17; 72:4; 138:6; 사 61:1; 습 3:11–12 참조). ‘교만’(휘페레파니아, hyperēphania)이 종종 시기와 연관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야고보는 3:13–4:3에서 책망한 이기적이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을 여기에서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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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19–220.
7-8절)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너희를 피할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러면 너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 죄인 들아 너의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잠 3:34)
마귀를 대적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단은 패배하고 우리를 피할 수 밖에 없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마치 ‘호가호위’하듯이 주님의 성령이 우리안에 내주하셔서 함께 하시기에 마귀가 우리를 피하고 도망하게 될 것이다. 손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제례의식을 위해서 정결예식을 행하는 것을 표현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그분을 따르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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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음을 품은 자는 야고보가 앞에서 의심하고 불안정한 믿음의 소유자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헬라어 딥쉬코스(dipsychos, ‘two-souled’)를 번역한 말이다(1:6–8). 현재의 문맥에서 그 용어는 ‘세상의 벗’(4절)이 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성’(doubleness)을 강하게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오는 시대와 현 시대 사이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세상’을 허용해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사람은 곧 충성심이 나뉘고 ‘두 마음을 품어’ 영적으로 정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야고보의 독자들은 이 세상의 전형적인 특성에 속하는 시기와 이기심을 보이고(3:15 참조), 자기들이 듣고 말한 것을 행하지 않으며(1:19–26), 혀를 ‘이중적’으로 사용하고(3:9–10), 서로에게 언어 폭력을 감행함으로써(4:1–2), 이처럼 두 마음을 품는 죄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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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외적인 행위(손을 깨끗이 하라)와 내적인 행위(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에 대한 철저한 회개이다. ‘깨끗하게 하고’, ‘성결하게 하다’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기물을 관장하는 제사장의 성결과 연관된 규정에서 유래하며, 후에 윤리적 성결에도 적용되었다. 또한 행위와 동기를 의미하는 손과 마음이 나란히 등장하는 것도 구약성경에서 유래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서 설 사람들에게 ‘깨끗한 손’과 ‘성결한 마음’을 요구한다(시 24:3–4). 야고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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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8절 하반부의 언어가 제사장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면, 9절의 진지한 명령은 예언자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져 올 대 재난을 서술하기 위해 애통의 언어를 자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 애통의 언어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죄로부터 회개할 것을 요청할 때도 사용하였다. 이를테면, 요엘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경고하면서 하나님을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2:12)고 자기 백성을 초청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야고보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애통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 또한 주의 강림이 가깝다는 것을 확신하였기에(5:8), 독자들에게 참된 회개의 표시로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을 요구한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그것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경건한 슬픔’이다(고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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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는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모든 웃음과 기쁨을 배제하려는 그런 무뚝뚝한 사람(killjoy)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웃음’은 종종 죄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의 냉소적인 웃음을 말한다(전 7:6; 집회서 27:13). 그 웃음은 다가 올 세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사람의 표시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화 있을 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b) 라고 경고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덮칠 때 사람이 해야 할 애통과 슬픔을 지금 여기에서 하게 되면 그 때는 그것을 피할 수 있다. 또한 예수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마 5:4)이라고도 말했다. 교회 밖에 있든 교회 안에 있든, 피상적인 기쁨과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을 외면한 채,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 라는 쾌락주의 철학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헌신된 그리스도인조차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로운 성품을 과신한 나머지 죄에 대해 안일한 태도로 미끄러질 수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이 야고보가 철저한 회개를 요청하는 그 대상에 포함된다. 그러한 회개만이 참된 기독교의 기쁨, 즉 죄 용서의 깨달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그 기쁨을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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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22–224.
9절) 죄의 문제 앞에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말한다. 웃음을 애통으로,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 것을 명령한다. 이는 애통과 근심이 목적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얼마나 우리가 민감해야 하는지,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죄를 정결케 하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절) 본문은 6절을 다시금 반복, 강조하고 있다. 주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를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높이신다라는 것이다.
Returning to the theme emphasized in v. 6, it is the humble whom God will exalt (cf. Matt. 23:12 par.; Luke 1:52; 14:11; 18:14; 1 Pet. 5:6). But as long as people exalt themselves, God will not exalt them.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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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적 가난을 인식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며, 우리의 모든 삶에서 그 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겸손의 모범적인 예는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리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세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간절히 긍휼을 구할 뿐이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는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다음과 같이 요약하신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는 말씀(마 23:12; 눅 14:11)과 더불어 주 앞에서 낮추라는 이 말씀은 초기 교회에서 인기 있는 모토로 받아들여졌다(고후 11:7; 벧전 5:6). 이 말씀은 영적 생명력과 승리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통해서 온다는 근본적으로 중요한 원칙을 알려준다. 우리의 능력이나 지위 또는 돈에 의지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시도는 오로지 실패와 심판을 가져올 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 앞부분에서 이와 유사한 권면을 제공하였는데, 거기에서 그는 ‘낮은’ 가난한 그리스도인에게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격려하고,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기의 ‘낮음’을 자랑하라고 경고했다(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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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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