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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Heals a Man Born Blind
As he passed by, he saw a man blind from birth. And his disciples asked him, c“Rabbi, dwho sinned, ethis man or fhis parents, that he was born blind?” Jesus answered, “It was not that this man sinned, or his parents, but gthat the works of God might be displayed in him. We must hwork the works of him who sent me iwhile it is day; night is coming, when no one can work. As long as I am in the world, jI am the light of the world.” Having said these things, khe spit on the ground and made mud with the saliva. lThen he anointed the man’s eyes with the mud and said to him, “Go, wash in mthe pool of Siloam” (which means Sent). So he went and washed and ncame back seeing.
The neighbors and those who had seen him before as a beggar were saying, o“Is this not the man who used to sit and beg?” Some said, “It is he.” Others said, “No, but he is like him.” He kept saying, “I am the man.” 10 So they said to him, “Then how were your eyes opened?” 11 He answered, p“The man called Jesus made mud and anointed my eyes and said to me, ‘Go to Siloam and wash.’ So I went and washed and received my sight.” 12 They said to him, “Where is he?” He said, “I do not know.”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01), 요 9:1–12.

2절) 구약의 가르침 속에서 사람들은 고통이 죄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우리의 고통이 항상 개인적인 죄의 결과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The disciples’ question reflects the assumption, customary in ancient Judaism, that suffering could be traced to sin. The underlying concern—well-intentioned, but misguided—was not to charge God with perpetrating evil on innocent people (cf. Ex. 20:5; Num. 14:18; Deut. 5:9). Yet the NT makes clear that suffering is not always a direct result of a person’s sin (e.g., Luke 13:2–3a; 2 Cor. 12:7; Gal. 4:13; and Jesus’ crucifixion; see also John 12:28, 37–41; 17:1, 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041.

3절)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이 임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아비의 죄가 자녀에게 전가되느냐는 것은 오래된 난제이다. 성경에도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고통을 사용하실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In the present case it might be argued that since the blindness was from birth, the blame would seemingly fall on the parents, but failing that solution, the blame would fall on the person’s prenatal state. Based on the text of the struggle between Esau and Jacob in Rebekah’s womb (Gen 25:22–23), the rabbis argued that Esau sinned in the womb (cf. Ps 58:3; contrast Paul’s argument in Rom 9:11 and the perspective of God’s role concerning a child in Jer 1:5).215 Jesus, however, refused to accept the disciples’ alternative of blame and in fact shifted the base system of the discussion from blame to the grace of God in the face of human need. The story line thus signals that in this pericope Jesus was going to use the man’s tragedy to reveal the works (erga) of God (9:3).
215 For a rabbinic perspective on a child’s responsibility see Gen. Rab. 63.6.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313.

5절) 예수님의 I am 메세지.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 8:12 참조)

6-7절)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는 주님, 이런 행동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소경의 눈을 뜨게하는데 진흙이나 그분의 침에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분의 이적을 세상에 알리고 계시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벌거벗거나, 인분으로 떡을 굽거나,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회개의 메시지나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때 그들의 특별한 행동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이처럼 소경이 진흙은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을 향해 눈을 씻으러 걸어가는 도중에 수많은 사람이 그 기괴한 장면을 보고 이것이 무슨일인가? 누가 이일을 하였는가를 물었을 것이다. 바로 주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선포하시고 바로 날때부터 장님된 이에게 세상의 빛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침을 사용하셔서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장면이 둘이 등장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손을 대시거나, 침을 뱉는 행동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이 전달되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기적은 창세기에서 인간을 창조하실때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장면은 연상케 한다. 
Two spittle miracles are recorded in Mark (the healing of the deaf man who also had a speech problem in 7:32–35 and the healing of the blind man at Bethsaida in 8:22–25), but there are no spittle miracles in Matthew or Luke. In both cases from Mark, as in this case from John, spittle seems to be a kind of vehicle Jesus used to perform the miracle. Like his touch (cf. Mark 5:31; 5:41), Jesus’ spittle seems to be an aspect of his person that carried his power. In the present case the mixing of Jesus’ spittle (ptysma) with dirt is somewhat reminiscent of God’s breath mixing with dirt of the earth in the miracle of human creation (Gen 2:7).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314.
주님께서 이 소경으로 하여금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셨고 이에 순종했을때 그의 눈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내용을 들을때 우리는 구약의 요단강에서 몸을 씻은 나아만(왕하 5:10-14)을 떠올린다. 치유하시는 분의 명령과 이에 순종할때 놀라운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라는 의미로 예수님의 사명과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제자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보내셨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그 사명을 성취하게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다. 

실로암 못의 중요성
The intersection of the Pool of Siloam with the Festival of Tabernacles should also not be overlooked here because the water drawn for the water ceremony in the temple was carried in procession from this very same pool. The Pool of Siloam was a strategic place of well-being for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because after Hezekiah dug the water tunnel from the Spring of Gihon to the Pool of Siloam, the Jerusalemites had a continual source of life-sustaining water within the walls of the city during times of siege.
 Gerald L. Borchert, John 1–11, vol. 25A,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6), 315.

8-12절) 이 사건 이후에 이웃 사람들과 무리들이 몇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첫번째 저 사람이 이전에 구걸하던 자인가? 그가 걸인이었던 것이 맞다면 어떻게 눈이 떠졌는가? 그리고 걸인을 치료해준 예수라는 인물은 어디에 있는가?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던 소경이 눈을 뜨고 있는 것에 대해서 놀라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놀라서 질문 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고침을 받은 그 소경이 분명하게 대답한다. “내가 바로 그 걸인이었던 사람이다."
두번째 질문은 첫번째와 연결되어 당연히 나올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자신이 경험한 대로 진술한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서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했고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에 대해서 그는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진짜 알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후의 내용의 전개로 볼 때 예수님이 어려운 곤경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 낮과 밤 요한은 계속해서 두가지 상반된 이미지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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