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리즘은 전 세계 인류를 하나님께서 나누셨던 언어를 하나의 언어, 즉 데이터로 번역하고자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알고리즘은 제2의 바벨탑으로 작동한다. 이 탑의 문화 속에서 인간은 독특한 개성을 상실하고 사용자 아이디로 표시되는 데이터로 전락한다. 교회는 이 제2의 바벨탑인 알고리즘 속에서 탈출해야 한다. 효율과 속도를 강조하는 사회속에서 때로는 느림과 비효율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가벼운 영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영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을 지키고, 함께 모여 진실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함으로 몸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는 시도와 노력들이 필요하겠다.
프롤로그
알고리즘은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고 정렬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세 계에 대한 인식,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삶에 필요한 선택, 심지어 신앙의 형식까지 재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질서이며, 새로운 신god이다.(14)
악은 거대하고 흉측한 괴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 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출현한다. 거대한 구조는 그 속에 속해 있는 인간을 수동적이고 비반성적인 상태로 몰아가며, 지적 무기력 상태에 빠진 인간은 쉽게 악의 방향으로 기울어진다.(15)
알고리즘이 설계하고 전파하는 죄의 구조는 인간의 클릭, 검색, 소비, 시선의 흔적 속에서 생산된다. 알고리즘은 인간에게 효율적인 편의성을 제공하면서 그 거대한 시스템 안에 인간을 편입시킨다. 사용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이 설계한 몇 가지 옵션 중에서 선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알고리즘이 오히려 사용자를 길들이고 있는 셈이다.(16)
제1장. 알고리즘, 보이지 않는 목자
1. 보이지 않는 목자
알고리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알고리즘은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과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변경함으로써 사용자를 거대한 소비사회의 부품으로 환원한다. 알고리즘은 개인의 선택 과정에 개입하여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제품을 집어들도록 만들며, 알고리즘이 전시한 콘텐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유혹한다. 이런 선택이 자율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달콤한 사탕을 제공하면서 알고리즘의 세계 밖으로의 탈주를 저지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리즘 속에 갇혀 있다! 알고리즘은 모든 곳에 있고 우리의 모든 것 알고 있다.(30)
2. 내가 선택하기 전에 예지하는 코드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에 대해 예언했지만, 알고리즘의 코드는 당신의 선택을 예측한다.
예언이 하늘로부터 왔다면, 예측은 데이터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것처럼 알고리즘은 인간의 행동 패턴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본래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피어나는 신뢰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이유는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당신보다 더 당신을 잘 안다고 해도, 그 알고리즘은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의 예측은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미래 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했던 선택을 반복하도록 만든다.(38)
3. 요약된 세계, 생각하지 않는 신앙
근대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인간’이 주도한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알고리즘이 생각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알고리즘은 전체의 서사를 파괴하고 분절한 정보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정보로 만든다.
요약된 세계가 인간의 인식과 지성의 구조에 미치는 가장 심각한 영향은 사고의 위임' 현상이다. 생각은 더 이상 개 인의 내면에서 발화되거나 성경 텍스트를 통해 일어나지 않고, 알고리즘이 제시한 틀 속에서 작동한다. 사유는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기능이 되고,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된 존재'로서만 남게 된다. 인간의 선택이 알고리즘이 작동하기 위한 요소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약된 세계가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이다.(44)
4. 탐욕을 가속화하는 신속성
디지털 시대의 에덴동산 중앙에는 효율성과 신속성이라는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인터넷(월드 와이드 웹), 스마트폰 기술로 인한 초연결사회, 2022년 11월 30일 ChatGPT의 등장.
인간이 즉각적 보상과 지연된 보상 사이에 대부분 즉각적 보상을 선호하는 현상, 시간 할인(temporal discounting) 혹은 현재 편향(present bias)
전통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충족 사이에는 시간적 간극이 항상 존재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획하고, 저축하고, 기다려야 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욕망을 유예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갓난아기 때는 배가 고프면 자신의 필요가 총족될 때까지 무조건 소리 내어 운다. 하지만 '맘마'라는 단어를 배우게 되고, 엄마로부터 '기다려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요청이 유예되는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이는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이러한 유예의 경험을 퇴행시킨다. 알고리즘은 신속하게 우리의 욕망이 발생하는 순간 충족을 위해 작동한다. 그 신속성이 우리에게 편리함으로 각인되는 것이다.(48)
따라서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신속성'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느리게 살거나 충동 소비를 조절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구조를 바꾸는 영적인 싸움의 문제다. 지연된 만족을 선택하는 것, 즉각적인 충족의 유혹을 거부하고 가치 있는 일에 자원을 투여하는 것, 욕망의 휴지기를 가지는 것 등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훈련의 문제다. 안식일은 자기 자신을 위한 욕망의 휴지기이며, 탐욕의 가속화를 낮추는 제동장치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금 당장'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시간으로 향해야 한다.(51)
5. 필터 버블 속 신앙, 에코 챔버 속에 갇힌 그리스도인
우리는 어쩌면, 익숙한 목소리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필터 버블'(fiter bubble)은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클릭'과 '좋아요'를 기반으로 자신과 다른 관점의 정보를 차단하고, 사용자의 관점이 한 방향으로 지속되도록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 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 양극화 현상이나 혐오와 배제의 확산은 이러한 단방향적 사고의 결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개념이 바로 '에코 챔버'(echo chamber)다. 이는 사용자가 자신이 가진 기존의 신념을 증폭시키 는 환경 속에 갇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에코 챔버는 본래 동굴의 음향효과를 설명하는 용어였지만, 최근에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반대 의견 없이 기존의 관점만 순환하는 현상을 의미한다.(52)
알고리즘은 이성적 판단을 유보시키고, 사용자의 분노, 연민, 두려움 같은 1차원적 (감정적) 반응을 토대로 유사한 정서를 가진 다른 사용자를 빠르게 연결한다. 이항 대립적 사고를 기반으로 나를 포함하여 같은 의견을 가진 동조자들을 '올바름'으로 포장하고, 나와 다른 의견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배제의 논리가 작동한다.
심지어 이 굳건한 믿음의 방 안에는 하나님의 자리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강렬한 자기 확신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조차 이 확신을 뒤흔들 수 없다. 이미 정해진 사고의 틀로만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틀 밖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은 포착되지 않는다. 이런 인간의 특성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 이라고 평가하신다. 자기 확신에 차 있으면서 비반성적이고, 동시에 다른 의견에 대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교회 공동체의 리더가 될 때, 그 공동체는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54)
예수의 복음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그들의 교조적인 주장으로 인해 '닫힌 확신' 가운데 살아가던 백성들의 시선을 시스템 밖으로 향하도록 인도하는 것이었다. 복음은 낯선 자리, 예측 불가능한 경로, 계산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예수가 만났던 사람들은 세리, 사마리아 사람, 창녀, 장애인, 이방인과 같이 안정된 제도권 밖에 존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분의 복음은 언제나 닫힌 방에서 울리는 목소리로부터 이탈하는 사건이었다.(56)
6. 도대체 알고리즘과 믿음이 무슨 관계인가?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사용자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예측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무엇을 보고 들을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구매할지, 어떤 뉴스를 볼지, 어떤 컬러를 좋아하는지, 어떤 브랜드를 선호하는지, 음악 취향은 어떤지 그리고 심지어 사용자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까지 빅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알고리즘은 이런 방대한 양의 정보를 바탕으로 사용자에게 최대의 효율성을 제공한다.(57)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은 단지 인간의 선택을 돕는 수준을 넘어, '인식의 방식' 그 자체를 형성한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시선을 일정한 방향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관심의 범위 를 좁힌다. 사용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듣고 싶은 말만 들려주면서 특정한 인식 체계와 방향성이 구조화되도록 유도한다. 알고리즘은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기초하여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거나 신앙에 유익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택된 일부 세계만이 신앙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드는 폐쇄적인 시스템이다.(59)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제공되는 '신앙 콘텐츠'라는 구호 아래 깊은 사유와 묵상과 같은 여백은 즉각 제거된다. 알고리즘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단축시킨다는 명목으로 성경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지난한 해석의 느린 시간의 여백을 간단한 문장으로 치환한다. 이 과정에서 진리는 감각적이지만 가벼운 정보로 대체된다. 그렇다. 알고리즘은 진리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지점이 알고리즘이 가진 효율성이 우리의 믿음에 미치는 심각한 해악이다.(60)
침묵과 여백, 기다림의 시간은 효율성의 관점에서는 낭비에 불과하다.(62)
알고리즘은 제자를 팬으로 환원하는 자동화 시스템이다.(64)
제2장 디지털 시대의 일곱 가지 죄악
1. 교만 : 나는 틀리지 않았다.
교만은 라틴어로 ‘수페르비아’로 자신을 실제 상태보다 더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세계에서의 교만은 눈을 높게 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디지털 교만은 전형적으로 ‘나는 정확하게 알고있다’, ‘그래서 너의 의견은 틀렸다’는 형태를 띤다. 자기가 보는 세계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독선적인 태도는 혐오와 배제를 양산한다.(확증 편향)
단순히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는다'가 더 문제다. 이는 자기중심성을 강화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과 더불어 자신의 욕망이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까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의견에 대한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다. 성숙한 인격의 의미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공존할 수 있는 열린 태도를 말 한다.(70)
2. 시기 질투 :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시기는 자세히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인비디아’에서 왔다.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을 의미하는대, 타인의 고통이나 실패를 통해 상대적인 우월감이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73)
미시간 대학교 심리학과 굣인 에단 크로스는 페이스북 사용 시간의 증가와 우울감, 자기 비하, 삶의 만족도 저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타인의 삶'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보여주고 싶은 삶을 보게 된다. 사람들에게 전시된 삶은 성공, 행복, 성취에 대한 이미지만을 과도하게 재생산한다.(74)
소셜 미디어는 타인의 삶을 실제보다 화려하게 확대하고, 자신의 삶은 실제보다 초라하게 축소한다. 이 비교의 구조 속에서 시기와 질투, 허영이 일어난다.
3. 분노 : 혐오와 배제의 일상화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분노를 유발하는 콘텐츠를 활용해 더 많은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한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에게 쉽게 화를 내는 방법을 학습시킨다. 그리고 분노의 표현을 공개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장 을 마련해 준다. 이를 통해 혐오하는 습관을 내면화하고 배제의 언어를 일상적 표현으로 자리 잡도록 만든다.(81)
특정 집단에 대한 조롱, 정치적 반대 의견에 대한 모욕, 종교, 젠더, 인종 등에 대한 혐오 발언은 이제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다. 사람들은 익명성이 주는 자유로움과 군중 심리의 결합으로 인해 혼자서는 하지 못했을 말과 행동을 쉽게 실행한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책임 의식의 상실과 윤리의식의 붕괴로 이어진다. 가장 위험한 형태의 분노는 종교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거룩한 분노’, 혹은 '의로운 분노'라는 정당성을 부여받는 순간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분노는 가장 위험한 형태의 폭력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대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선 것과 같은 태도로 상대방을 적대시하며,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잔혹한 폭력을 행사한다.(84)
4. 나태 : 마지막 날, 우리의 클릭 수가 증언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시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시간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시간을 사용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이 관리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 다. 우리가 시간을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생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영적 방향성의 문제다.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시간의 우선권은 일에 있고, 자기 계발과 취미 생활에 있다. 우선순위의 질서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시간에 대해서는 인색하거나 게으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디지털 시대의 '시간 낭비'를 단순히 쉬는 시간 혹은 비효율적인 습관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이것은 영혼의 무기력이며, 하나님을 향한 운동성이 멈춘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91)
소셜 미디어 피드는 우리의 육체적 감각을 끊임없이 자극하지만, 반대로 영혼의 감각은 점점 무뎌지게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덜 생각하고, 덜 느끼며, 덜 기도하게 된다. 피드 속의 '좋아요'와 '알림'은 도파민의 짧은 쾌감을 주지만, 이러한 만족은 지속 시간이 짧다. 그래서 그 만족감을 더 늘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만 한다. 디지털 공간은 인간의 내면을 점점 더 산만함의 구조 속에 가두어, 하나님을 향한 침묵의 시간을 빼앗는다.
'나는 오늘,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소셜 미디어 속의 무한한 피드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 속에서만 인간은 진정한 시간의 주인이 된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낭비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리듬의 일부다. 마지막 날, 우리의 클릭이 증언하지 않도록 오늘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다시 드려야 한다.(93)
5. 탐욕 : 알고리즘이 이끄는 소비의 푸른 초장
현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광고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압도적인 양의 광고는 은밀하게 인간의 정체성을 ‘소비자’로 재조직한다.
알고리즘은 매 순간 당신에게 '소비자’가 되라고 속삭인다. 다른 소비자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면서 열광적인 소비에 헌신한다. 그리고 이 쇼핑몰의 입구에는 편안하고 가성비 넘치는 쇼핑을 안내하는 목자 알고리즘이 서 있다. 하비 콕스는 이 세상에 있는 종교들 중에서 시장 라는 종교야말로 가장 강력한데, 그 이유는 그것이 종교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97)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사탄의 전략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소비자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해 드려져야 하는 관심과 헌신을 구매 가능한 제품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서비스로 치환하는 것이다. 싸그 결과 소비자화 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한 보물은 쌓아두지 않을지 몰라도, 다음 달 결제해야 할 카드값은 쌓아 간다. 알고리즘이 인도하는 푸른 초장위에서 풀을 뜯으며 소비자로 전락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 대신 브랜드가 제시하는 행복의 이미지를 따라간다.(100)
6. 탐식 : 시선을 잡아먹는 허영심
오마카세를 먹는 행위는 개별적 행위 경험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삶의 수준을 누리고 있다'는 허영적이고 전시적인 메시지와 함께 소셜 미디어 에 업로드된다. 이전의 탐식이 맛과 양의 문제였다면, 오늘날의 탐식은 이것을 이미지와 상징의 문제로 전환시킨다.(104)
오늘날 '탐식'은 환경문제와도 연결된다. 과잉 생산되는 음식들로 인한 쓰레기, 패스트푸드, 일회용품 문제 등은 모두 탐식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고, 필요 이상으로 먹고 마시며, 필요하지 않으면 아낌없이 버린다. 이는 창조 세계에 대한 청지기적 책임을 방기하고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윤리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더 많이 쌓아두었던 만나는 결국 썩어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06)
7. 음욕 : 신체 소비 사회
'음욕'은 가장 강력하고 원초적이며, 이로 인해 가장 쉽게 산업화되는 욕망이다. 과거에는 '은밀한 욕망'으로 여겨졌지만, 디지털 문화 속에서 음욕은 훨씬 더 넓고 복잡한 구조로 변모 했다. 이제 음욕은 성적 충동을 넘어 타인을 소비하는 방식, 자신의 육체를 이미지화 하는 방식, 육체를 상품으로 거래하는 방식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욕망 시스템'으로 작동한다.(108)
미셸 푸코는 권력이 더 이상 몸을 억압하거나 금지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전 시대의 권력이 인간의 몸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규율하고 감시했다면, 오늘날의 권력은 미시적인 차원에서 규율한다. 성은 인간의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담론을 생산하는 장이기 때문에 정치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마른 몸과 아름다움, 건강함, 정상성을 매칭 하고 살찐 몸과 추함, 위험, 비정상성을 이항 대립적으로 배치하여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감시하고 규율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 빠르게 올라오는 몸의 이미지'는 다이어트와 성형 산업에 유래 없는 호황을 야기한다.(110)
사회가 강요하는 미적 규범에 균열을 내고 신체를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발언의 주체로 복권하는 것이 필요하다. 알고리즘에 의해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신체 이미지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몸의 감각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된 '이상적인 몸'에 대한 강박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의 몸을 평가의 대상이 아닌 사랑과 돌봄의 대상으로 대하는 실천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는 나의 몸은 있는 모습 그대로 귀하고 아름답다. 어린 시절에 생긴 흉터, 듬성듬성 생겨난 탈모, 깊어진 팔자 주름은 매력으로 환산될 수 없는 신체의 흔적들로 결핍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과 조건을 증언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시간의 지층이 인간의 몸에 남긴 흔적은 그 자체로 아름 답고 위대하다.(112)
제3장 디지털 시대의 신학
1. 0과 1로 번역되는 영혼
디지털 기술로 0과 1로 구성된 내세의 삶이 실제로 구현 가능해진다면, 인간의 삶과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청된다. 신학은 다가오는 시대에 대해 질문하고 답변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116)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두뇌에 저장된 전기적 신호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디지털 형태로 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제된 자기 자신을 네트워크나 클라우드 서버에 업로드 하면, 디지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천국은 하늘 위가 아닌 클라우드 서버 속에 존재하며, 인간의 영혼은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데이터 센터에 저장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데이터로 번역되어 서버에 저장된다는 생각은 단순한 공상과학적인 상상이 아니라, 이미 실재의 경계 안으로 진입한 신학적 사건이다. 생명과 의식이 만일 전기적 신호의 조합이라면, 그것을 기술적으로 복제하고 이전하는 일은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 반드시 일어나게 될 미래다. 자신의 영혼을 완벽하게 지키는 일은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백업과 네트워크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데이터로 재창조하는 셈이다. 만일 이런 세계가 도래한다면, 구원은 초월을 향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네트워크에 '동기화'synchronization하는 행위로 변모될 것이다.(117)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고자 하는 시도는 인간의 신비와 존엄을 부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분석 가능한 변수들의 합이 아니며, 저장 가능한 전자기적인 신호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실패하면서 성장하는 존재이며,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존재다. 인간의 영혼은 0과 1로 완전히 번역될 수 없으며, 번역되어서도 안 된다. 디지털 천국의 비전은 구원의 본질을 왜곡하는 거짓 약속이다. 그 구원은 서버에 전기가 공급되는 한도 내에서만 영원한 약속이기 때문이다.(121)
2. 디지털 교리 전쟁
사람들은 알고리즘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만드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다양한 편견과 관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단계적 수식 프로그램인 알고리즘은 세부적인 코드에 따라 구체적인 가정과 선택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 개발자의 판단과 사회적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122)
과거의 논쟁이 성경적 토대와 신학적 근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의 교리 논쟁은 ‘좋아요’와 ‘조회 수’에 딸 결정된다.
이전 시대에는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대규모 레거시 미디어를 활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선전을 위해 방대한 출판이나 방송 인프라를 요구하지 않는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러닝머신 과정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헌신적인 소수 집단이 필요할 뿐이다.(126)
3. 하이브리드 예배 신학 : 육체 없는 예배는 가능한가?
예배는 본질적으로 '개인적 결과'가 아니라 '공동체적 과정'이며, '몸의 사건'이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몸'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실천의 가장 뚜렷한 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다. 그분은 인간 세상에 접속하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오셨다. 그분은 인간의 시간 속에 '말씀'으로 오셨지만,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오셨다. 구속의 사건은 인간의 '몸'을 배제한 영혼만의 구원을 의미 하지 않으며, 그 구속의 사건을 체현하는 것이 바로 몸의 사건으로서의 예배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구속 행위의 절정을 기념하기 위해 그분의 몸을 기념하는 성찬을 그분이 오시는 날까지 수행하라고 말씀하신다.(128)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오로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는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예배는 공동체적 몸의 경험을 약화시킨다. 성령의 교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은 디지털 신호로 치환되고, 성령의 운행하심은 와이파이의 안정성과 스크린의 화질 문제만으로도 방해를 받는다. 디지털 플랫폼이 제공하는 예배는 물리적 공간의 제약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 편리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접속의 환상'만을 제공한 채, 디지털 세계 속에서 흩어져 버린다. 예배는 같은 시간대에 접속한 사람들이 느끼는 '동시성’만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실재적 공동체성 안에서 경험되는 현존이다. 공동체성 안에 실재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몸'이다.(131)
4. 설교인가 컨텐츠인가?
"들을 귀 있 는 자는 들으라"는 예수님의 권고는 '노이즈 캔슬링'(noise canceling) 기능이 탑재된 고성능 무선 이어폰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의지적으로 실천하라는 촉구다.(136)
5. 접속으로 이루어지는 예배
전통적인 공동체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라면, 접속 공동체는 ‘세이터의 동시성’위에서 작동하는 관계다.(141)
접속은 기술에 불과하지만, 관계는 은혜의 통로다. 접속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참된 관계는 성령의 운행하심과 교통하심의 기반 위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참여와 접속의 양극단에서 자기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145)
6. 온라인 헌금 : 구원의 증거인가, 거래의 기록인가?
온라인 헌금은 신앙적 상징체계를 해체하며, 신체의 이동과 감각을 삭제한다. 헌금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증언이 아니라 거래 기록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온라인 헌금의 편의성이 신앙적 깊이를 대체해 버린다. 이 과정에서 신앙적 결단을 촉발하는 내적 긴장감은 사라지고, 습관화된 경건만이 남는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사건성이 희미해진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에 있어서 '몸'의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예배로 받으시는 분이시지, 마음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148)
헌금은 단순한 금전의 이동이 아니다. 내 삶의 목적이 단순히 물질적 자원을 벌어들이는 것에 초점에 맞춰져 있지 않다는 증거와 고백이다.(149)
7. 플랫폼 처치 : 플랫폼이 된 교회
교회는 본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다. 하지만 플랫폼 세계에서는 이 만남조차 데이터의 형태로 치환된다. 성도 의 영적인 고민, 기도 제목, 신앙의 여정, 교육 과정, 봉사 활동 등, 이 모든 것이 교회 시스템에 저장된 프로필 정보의 일부분으로 구조화된다. 그 결과 목회는 한 사람의 고유한 인격을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를 관리하는 형태로 변화된다. 누가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했는지, 성도는 교회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성장하고 있는지, 누가 얼마나 헌금했는지, 출석률의 추이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등이 목회의 핵심 지표가 된다. 바로 이 순간, 공동체는 플랫폼적 사고에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다.(154)
신앙이 혼자 소비하는 콤텐츠가 되는 순간, 교회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제4장 블랜디드 교회
1. 블랜디드 교회가 온다
온라인 모임이 오프라인 모임을 대체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온라인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오프라인의 장점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델이 요구된다. 이러한 모델을 구상하는 데 있어서 두 핵심 과제는 디지털 세계의 문법인 익명성과 접속성을 기반으로 하는 '약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복음의 핵심인 ‘상호 책임성'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과 육체적 현존으로서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161)
접속 → 참여 → 관계 → 헌신(블랜디드 처치 참여 발전 모형)
2. 목회자와 크리에에터 사이의 정체성
물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법이 위협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이제 교회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연결될 수 있으며, 복음을 전혀 접하지 못하던 이들과도 접촉할 수 있다. 문제는 플랫폼을 사용하는 '방식'과 '철학'이다. 즉 알고리즘의 문법을 따라가는 플랫폼의 속성을 반성적으로 이해하면서 주어진 소명에 따라 사용하느냐 혹은 플랫폼에 종속되어 자기 자신을 부각하는가 하는 문제다.(166)
3. 상호성의 회복을 위한 권징
권징은 공동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성경적 원리에 따라 구성원의 신앙과 윤리를 점검하고 권면하며, 필요에 따라 징계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실천이다.
존 칼빈은 교회의 3대 표지가 ‘말씀의 선포, 성례의 바른 집행, 권징의 시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권징이 사라진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 공공성의 기능을 잃고 개인적인 것에 매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대중들의 취향과 생각에 알맞은 콘텐츠뿐이다. 이런 경향이 심화될수록 회개, 돌이킴, 거룩한 삶에 대한 요구는 점차 사라지게 되고, 긍정과 격려, 위로의 메시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마치 사람들의 선호도에 따라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것처럼, 목회자도 사람들의 선호도를 따라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는 단순히 설교의 내용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킨다.(171)
권징을 남발해서는 안 되지만, 반대로 성도들이 떠날까 염려되어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도 권징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 또한 권징이 특정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나 배제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회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 만일 권징이 사랑의 행위라는 점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거룩한 삶을 위한 권징은 교회 공동체를 건전하게 만드는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175)
4. 프로슈머 : 복음을 전하는 적극적 제자도
프로슈머는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동시에 생산에 참 여하는 사용자를 가리킨다.(176)
교회의 측면에서 프로슈머를 본다면, 전통적인 관점의 변화가 요구된다. 교회는 이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공동 창작자'로 바라보아야 한다. 프로슈머는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교회를 선전하기 위한 '신앙 콘텐츠 제작자'가 아니다. 교회 공동체의 핵심적 가치와 공동의 신앙고백을 따라 복음을 미디어 언어로 번역하는 해석자이자, 공동체를 세우는 중재자, 신학의 언어를 일상 언어로 재구성하는 크리에이터다. 프로슈머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복음 전파와 선교 사명을 '이야기'라는 형태로 바꾸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꾼인 것이다. 블렌디드 처치는 교회가 중심이 되어 구조와 체제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 스스로 이런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자기 노출'이 아닌 '복음 증언'의 원리가 바르게 작동되도록 균형점을 찾아주는 지속적인 멘토링과 훈련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몇가지 실천적 과제는 다음과 같다.(179)
- 공동체적 분별력: 신앙의 표현을 존중하면서도 신학적 오류나 왜곡은 상호성 관점에서 조율하기
- 신학적 기초 교육: 성경 해석의 기본 원리, 기독교 기초 교리, 이단 분별 등
- 플랫폼 리터러시: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해와 선교적 활용을 위한 관점의 필요
5. 경계를 넘어서는 비추천 공동체
알고리즘의 최적화는 배제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나와 다른 의견, 다른 신앙적 전통,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알고리즘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알고리즘은 나와 연결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추천해 줌으로써, 네트워크상에서 무한한 연결과 확장을 공언했던 캐치프레이즈는 사라지고 실제로는 더 좁아진 세계를 만나게 된다.
경계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지 만, 경계 밖의 비추천 대상에 대해서는 엄청난 공격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를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는 ‘밖으로'를 의미하는 접두어 ‘에크’와 '불러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클레오'의 합성어로 자기 자신이 경계를 넘어 구별된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경계를 넘어 이질적인 타자를 수용하는 공동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리, 창녀, 이방인, 병자 등 당시 사회에서 전혀 '추천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사람들과 함께 하셨듯이 교회는 '비추천 공동체'와 함께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알고리즘이 추천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동질성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182)
6. 제3의 장소로서의 교회
가정과 직장을 제외하고 제3의 공간은 증립적이고 비공식적이며 놀이와 즐거움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제3의 장소로서의 교회는 사용자의 필요나 요구에 의해 프로그램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함께 있음’의 비생산적인 가치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가진 고유한 가치는 ‘느림의 미학’에 있다.
안식일은 단순히 휴식하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새겨진 리듬이다.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낭비에 불과하다. 7일을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사람에게 하루를 쉬라는 명령은 생산성을 포기하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안식일은 우리가 생산의 주체가 아님을 인정하는 시간이다. 자기 자신을 계발하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무제한적 생산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안식일에 모든 것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날이다. 알고리즘은 속도와 효율성으로 생산성을 평가하지만, 안식일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귀하다고 선언한다.(188)
제3의 장소로서의 교회 공동체는 '속도 사회'의 효율성이라는 악마로부터 벗어나 여백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평안과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인간은 수동적으로 끌려가야 하는 효율과 성과의 체제에서 벗어나 함께 사유하고, 고통을 나누며, 기다림을 마땅히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재구성된다.(189)
7. 디지털 시대의 윤리, 공공선을 위한 교회
알고리즘의 구조는 사회 전반에서 작동하면서 인간의 불안, 욕망, 분노를 자본의 논리로 조직한다. 이 거대한 체계는 사용자 개개인을 왜곡시키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정의를 재편한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공적 영역에서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디지털 시대의 신학이 가진 윤리적 과제다. 알고리즘은 결코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설계되었고, 그것을 설계하는 주체는 거대한 독점 자본이다. 구글, 메타, 아마존, 오픈에이아이 등 거대 독점 자본의 목표는 알고리즘 내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때로는 분노를 증폭 시키고, 음모론을 유포하며,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이 과정에서 알고리즘은 체계적으로 소수자의 목소리를 소거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 교회는 공공선을 위해 디지털 구조 개혁을 요구하는 윤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알고리즘의 투명성, 데이터와 관련된 인권 문제, 플랫폼 기업의 책임성, 공정한 접근성, 정보의 편향성 제거 등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는 기독교적 공의의 실천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94)
8. 아날로그 저항 운동을 벌여야 하는가?
예배는 디지털로 중계되고, 설교는 콘텐츠가 되며, 공동체는 접속의 형태로 흩어지고, 헌금은 화면 터치로 완료된다. 이 모든 것의 기초에는 기술이 제공하는 효율성과 신속성, 편의성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전능한 알고리즘은 디지털 세계로부터 우리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채찍과 당근으로 우리를 길들인다.(196)
자크 엘륄은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도구적 의미의 기술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 구조를 결정짓는 시스템으로 수렴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기술은 이미 현대사회의 새로운 신화가 되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를 구성해 나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인간은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삶의 깊이는 점점 얕아 지고, 타인과의 관계는 느슨해진다. 신앙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빠르게 소비되는 설교, 즉각적인 기도 응답을 기대하는 영성, 짧은 묵상 클립에 빠진 그리스도인, 이 모든 것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이 지니고 있었던 침묵, 기다림, 반복과 같은 신앙의 리듬을 파괴하거나 무용한 것으로 만든다.(197)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이유는 기술이 너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술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효율성 속에서 인간은 생각을, 고통을, 기다림을, 질문을 잃어버리게 된다. 디지털 세계 속 인간은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데이터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다. 기계적 알고리즘은 인간을 효율과 속도의 틀에 가두고 그 틀 안에서 의미를 생산하도록 강제한다. 효율과 속도의 악마로부터 벗어나 여백으로 나아가는 것에서부터 저항은 시작될 수 있다.(199)
에필로그
구글, 메타, 아마존과 같은 거대한 플랫폼은 이미 수십억명의 사용자들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통제하는 플랫폼 주권을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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