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6장. 하나님의 해결책과 나의 응답

 

우리는 지난 시간 세상이 깨진 이유와 죄의 본질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죄로 가득찬 세상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심리적, 정서적, 육체적인 어려움,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의의 문제로 인한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로부터 인류와 사회 공동체의 문제 속에서 살아가며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깨어진 이 세상속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겟습니다. 

 

1. 하나님의 해결책

앞서 말한대로 우리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존재의 중심이신데 그 분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고 내가 그 자리에 앉아서 주인되려고 하는 자기 중심성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개인과 사회와 인류전체가 심각한 문제 속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담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성육신 하심으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을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하신 일 첫번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심.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신이시므로 인간과 다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와 소통하셨습니다. 바로 성경의 복음서는 그 예수님의 이야기로 충만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인간이 되시고, 우리와 함께 거니시고, 우리의 생사고락을 경험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남녀노소, 온갖 병자들, 평범한 농부와 어부들, 사회의 저명인사와 부자와 거지, 창녀와 매국노,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셔서 모든 이들은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깊은 연민과 사랑으로, 해학과 눈물로, 촌철살인의 깨우침과 무서운 경책으로 이들을 대하셨습니다. 

이 모든 대화와 가르침, 이적을 행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하신 일 두번째,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

자신의 인격과 삶, 사역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깨진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회복은 예수님이 예고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놀랍게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의 기록중에 30-40%가 그분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고하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반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은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중요한 미션이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배반학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서 주인 행세하는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예수님 자신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야 했을까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실컷 나 중심으로 살다가 갑자기 ‘아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다시 내 주인이 되어주세요’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각한 죄를 지었는데 ‘아 그것 없던 걸로 해주세요’라고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성품중에 정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정의의 입장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어놓고 용서를 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신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참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2. 인격적 반응과 그에 따르는 축복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인간사회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적인 선택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이야기를 복음, 기쁜 소식(gospel, good news), 좋은 소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성경을 통해서, 교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에게 유효해지기 위해서는 이것을 나의 이야기로 인격적으로 반응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바쳐서 너희를 사랑했다. 내 사랑을 받아주겠니?’라고 물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대는 단지 우리를 사랑해서 초대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에 대한 정의로운 대가를 자신이 지불하셨으니, 이제는 우리에게서 정의로운 분노를 거두시고, 우리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너희 잘못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내가 다 책임졌으니, 너희는 이제 자유롭게 나에게 반응해라. 내 사랑을 받아들여 나의 선한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첫번째, 무조건적인 사랑

거대한 우주 속의 우리, 빅뱅 이론, 무한한 우주 속에서 우리 인간을 택하신 하나님

 

태양 앞에서 모든 빛이 상대화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적인 존재가 나를 사랑하시고 가치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의 배경, 학력, 외모, 능력, 연봉, 직장, 건강 그 무엇으로도 평가받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가는 내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내면에 들어와서 그것을 누릴 수록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두번째, 궁극적인 삶의 목적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기 시작하면 당연히 우리 안에는 새로운 의욕과 동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아픈 세상에서, 이 깨진 세상에서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하다 죽을까? 무엇을 해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동참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온 세상 구원 계획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3.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속에 함께 동참하는 여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격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우리를 이 여정에 끌어들이지 않으십니다. 

1)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 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

- 죄, 자기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

 

2) 죄인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모든 죄책을 대신 져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책임을 지시고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3) 이제 하나님께 돌아서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는 것,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가운데 내주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4.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반응

1) 기뻐합니다.(rejoice)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기에, 그 놀라운 기쁜 소식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2) 재헌신합니다.(recommit) 

우리들은 과거에 하나님을 정말 받아들이고 그분을 주인으로 여기고 따라가면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떤 시점에,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되어 세상의 성공을 좇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다시금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재헌신하는 것입니다. 

 

3) 영접합니다.(receive) 

영접이란 지금가지 나눈 모든 이야기를 내면에 온전히 심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래 계획, 그리고 깨진 세상과 그 원인인 죄, 하나님이 주신 해결 방법에 진실로 동의해서 마음의 주인 자리에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거듭났다’, ‘중생했다’라고 표현삽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정말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왜 죄인인지 깨달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을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새로운 삶의 살겠다고 무릎 꿇은 적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일생일대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4) 좀더 탐구합니다.(research)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깨진 세상, 하나님의 해결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하나님께 인생을 드리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아직도 고민이 좀더 필요한 것 같다고,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질문과 탐구는 귀한 일입니다. 억지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탐구하고나서 믿겠다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믿지 않겠다는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평생 동안 읽고 공부해야 할 책입니다.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는 성경의 방대한 이야기를 축약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앞에서 결단하기 위해서 들어야 할 이야기는 모두 이미 들었습니다. 정말 결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탐구를 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초청에 진지하게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5) 거절입니다.(reject)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인격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강제로 줄 수 없습니다. 받는 쪽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해야 사랑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그 거절의 책임은 당연히 내가 져야 합니다. 

 

5. 기독교의 기본진리

1) 하나님이 나와 세상을 만드셨고 나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2)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내몰아 버리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옳은 대로 살아가 심각한 문제에 빠졌고, 이렇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이 중심이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3) 이 죄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시고 이 죄의 대가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4)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진실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는데,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게 돌아선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인데 이 이후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조적적인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Rejoice, recommit, receive, research, reject 5R중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동참하시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여 이 깨지고 상처받은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깊은 다스림과 보살핌 가운데 성장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 나눔 질문

1. 당신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삶의 주인은 누구였으며, 어떠한 삶의 여정을 걸어왔습니까?

 

2. 당신은 다섯가지 반응(Rejoice, recommit, receive, research, reject)중 어떤 반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반응에 따르는 인격적 결단을 내리고, 인도자와 함께 나누십시오. 

728x90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athe Son of God.1 
bAs it is written in Isaiah the prophet,2
c“Behold, I send my messenger before your face,
who will prepare your way,
d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e‘Prepare3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막 1:1–3.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분명하게 이것이 예수의 이야기임을 밝히며 그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메시야(그리스도)이심을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힌다. 그리고 그분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임을 힘주어 선포하면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본문의 등장인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 듣고 있는 이들은 이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분명하게 그분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마가의 선포를 듣고 있는 것이다. 
- The “gospel” is an important subject in Mark. The word euangelion appears seven times (also 1:14–15; 8:35; 10:29; 13:10; and 14:9. Cf. also 16:15) versus only four times in Matthew and none in Luke and John (but Matthew has the cognate verb once and Luke ten times). By his frequent use of the term, Mark emphasized the freshness and even revolutionary character of the message of Jesus. This message offered hope to the neglected and oppressed.
The name “Jesus” is the Greek equivalent of the Hebrew “Joshua” (both words have been anglicized), which means Yahweh (or simply God) saves. As a common name in the first century, it was shared by two or three other persons who are mentioned in the New Testament: Barabbas (Matt 27:16–17, NRSV, NEB), Jesus Justus (Col 4:11), and Joshua (Acts 7:45; Heb 4:8, KJV; see explanation above). Josephus referred to about twenty different persons who had the name. Mark used it eighty times without stressing the theological significance of the name.
The Greek word “Christ” is the equivalent of the Hebrew “Messiah” (again both are anglicized) and is actually translated “Messiah” in some passages by the NRSV, NEB, REB, and GNB. Both mean the anointed one, i.e., a person commissioned by God for a special task. In the Old Testament priests (Exod 29:7, 21), prophets (1 Kgs 19:16), and kings (1 Sam 10:1) were anointed for special tasks. Mark did not describe Jesus as a priest, and he said very little explicitly about him as a prophet (cf. 6:4, 15; 8:28); but in 15:2, 9, 12, 18, 26, 32 he described him as the king of the Jews/Israel. In the first century some Jews looked forward to an anointed king who, they hoped, would restore the kingdom of David and consummate the age. The term “Christ” or “Messiah” was originally a title, but by Mark’s day it was on the way to becoming a proper name (cf. 9:41). The word appears only seven times in Mark (here; 8:29; 9:41; 12:35; 13:21; 14:61; 15:32; also 1:34 as a variant reading), probably reflecting accurately the reluctance of Jesus to employ it or to accept it when used by others because of its nationalistic connotations. The only instance where Jesus used it with reference to himself is 9:41 and there in an oblique way. For Mark and his readers/hearers Jesus was the one above all others who was anointed by God for the greatest task of all times. Evidently at his baptism (1:9–11) Jesus was formally anointed for his special mission.
The words “the Son of God” are omitted by one of the earliest and best Greek manuscripts, two other manuscripts of medium quality, two versions (translations) of medium value, and some nine early Christian writers who quote the verse. The textual evidence, however, heavily favors authenticity, and the omission may have been accidental due to six consecutive words in the Greek text having the same ending. Elsewhere Mark used the title at 3:11 and 5:7 in the confession of evil spirits and in 15:39 in the climactic confession of the centurion. To these ought to be added “Son of the Blessed One” in the question of the high priest in 14:61 and “Son” alone in the very important divine attestations of 1:11; 9:7.
Still further allusions to Jesus as Son occur in 12:6; 13:32. Although the demons confessed Jesus as Son of God in Mark, the disciples never did. Jesus did not explicitly refer to himself as Son, but the idea is implicit in 12:6; 13:32. Although not frequently used, the title comes at crucial points in the narrative and obviously is an important one, perhaps the most important one. That the title appears near the beginning and end of the Gospel, bracketing the entire book so as to emphasize this truth to the readers/hearers, is especially significant. Although used of angels (Job 1:6), the nation Israel (Hos 11:1), and Davidic kings (2 Sam 7:14) in the Old Testament and of rulers, deliverers, and healers in the Greco-Roman world, Mark doubtless used it to refer to the unique relationship of Jesus to the only true God.
The very first sentence therefore evidences that Mark’s Gospel is more than a narrative of events. It is also a theology, primarily a Christology. Although the characters in the story struggle with Jesus’ identity, the readers/hearers know from the beginning that he is the promised Messiah and the very Son of God.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38–39.

2-3절) 마가는 이 복음의 시작을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라고 말한다. 이 예언은 사 40:3; 말 3:1에 이미 선포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자(천사)를 먼조 보내 준비한다라는 이 표현은 이미 출 23:20에 이미 선포된 내용을 말라기에서 3:1; 4:5-6에 기록한 내용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였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버린다.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돌아와 회복될 것을 예언한다. 하지만 이 유다의 회복은 잠시, 주전 63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서 다시 정복당하고 만다. 이러한 시대에 마가복음은 시작된다. 무자비한 헤롯에 의해서 새로운 성전이 건축중인 때였다. 
이렇게 또다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때에 이사야와 말라기 선지자의 메시지가 선포되며 그분의 도래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 This reference to Isaiah, however, is not as simple and straightforward as it might first appear. In fact, the first part of Mark 1:2 does not come from Isaiah at all but from the Greek version of Exodus 23:20, where God promises to send an angelic messenger ahead of the twelve tribes to prepare the way for their entry into the Promised Land. Much later at the close of the prophetic era in Malachi 3:1 these words were used again to predict the appearance of another messenger whose task is to announce the coming of the Lord. And the last words of the book of Malachi (4:5–6) reveal that this messenger will be none other than Elijah, who did not die but was taken to be with God. In between the conquest of the Promised Land and the end of the prophetic era is the promise of Isaiah 40:3, quoted here in part in Mark 1:3, about a messenger who heralds the return of the Jewish exiles from Babylon.
These opening verses depict in broad strokes the entire sweep of Israel’s history after the exodus. The messenger of Exodus 23:20 had come, and over a period of two hundred years the people of Israel had gained control of the land. They lost the land in a series of wars with Assyria and Babylon in the sixth, seventh and eighth centuries b.c. In 587 b.c. Jerusalem was completely destroyed, and Babylon became the new cultural center for the people of Judah. The messenger of Isaiah 40 had prophesied that the exiles would return from Babylon, that Jerusalem would be restored and that God would once again become the king and protector of Judah. This prophecy was one of several that encouraged the hope that God would restore the sovereignty of the royal house and extend the borders of Judah to the boundaries of the kingdom of David. In 538 b.c. the first exiles returned to Jerusalem, but the people of Judah did not regain their independence until 140 b.c. They lost it again in 63 b.c., when Jerusalem surrendered to Roman General Pompey. Yet by the end of that century the work of rebuilding Jerusalem was complete except for the construction of a new temple on the scale of the one Solomon had built.
As Mark’s Gospel opens, a grand, new temple funded by the ruthless Herod the Great was still under construction. The people of Judah were once again subject to a foreign power, and the temple was being built from the fortune of a king whose only passion was power. The great promise of the messenger of Isaiah 40 had yet to be realized, and the messenger of Malachi 3:1 had not appeared in any sense.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29–30.

결국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구약의 엘리야로 대표되는 세례요한이다. 그의 선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길을 곧게 하라”였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향한 복음, 구원의 메시지는 구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선포된 것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가 임한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