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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As the sun was going down, a pdeep sleep fell on Abram. And behold, dreadful and great darkness fell upon him. 13 Then the Lord said to Abram, “Know for certain qthat your offspring will be sojourners in a land that is not theirs and will be servants there, and rthey will be afflicted for sfour hundred years. 14 But tI will bring judgment on the nation that they serve, and afterward uthey shall come out with great possessions. 15 As for you, you shall go to your fathers in peace; vyou shall be buried in a good old age. 16 And they shall come back here in the fourth generation, for wthe iniquity of the Amorites xis not yet complete.”

17 When the sun had gone down and it was dark, behold, a smoking fire pot and a flaming torch passed between these pieces. 18 On that day the Lord made a covenant with Abram, saying, y“To your offspring I give3 this land, from zthe river of Egypt 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19 the land of the Kenites, the Kenizzites, the Kadmonites, 20 the Hittites, the Perizzites, the Rephaim, 21 the Amorites, the Canaanites, the Girgashites and the Jebusites.”

p ch. 2:21

q Acts 7:6, 7

r Ex. 1:11, 12; 3:7

s Acts 7:6; [Ex. 12:40, 41; Gal. 3:17]

t Ex. 6:6

u Ex. 12:36; Ps. 105:37

v ch. 25:8

w 1 Kgs. 21:26; Amos 2:9

x [Dan. 8:23; Matt. 23:32; 1 Thess. 2:16]

y ch. 12:7; 13:15; 24:7; 26:4; Num. 34:2; Deut. 34:4; Neh. 9:8

3 Or have given

z Ex. 23:31; Deut. 1:7; Josh. 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15:12–21.

 

 

앞서 아브람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들을 준비해 놓았다. 새를 제외하고 다른 제물들은 반으로 쪼개 놓은 상태였고 솔개가 사체에 내리를 것을 쫓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15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아브람은 자손을 주실 것은 의심없이 믿었지만 땅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심을 보이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자손을 주시는 것은 그의 생애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만 땅을 얻게 되는 것은 그의 사후의 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보증 요구에 언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12절) 해 질 때에.. 깊은 어둠의 상황일 수록 빛은 강력하다. 이후에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로 나타나시는 것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서 큰 흑암의 상태가 준비된 것이다. 이 언약을 이룰 때 아브람이 맨 정신이었는지 아니면 꿈을 꾼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아브람은 하루 종일 하나님을 기다리며 제물을 준비하며 솔개들을 쫓느라고 피곤했을 것이고 그래서 깊은 잠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계시를 주실 때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잠을 주신다.(사 29:10; 욥 4:13; 단 8:18; 10:9)

 

13-16절)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다. ‘너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이방(애굽)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너의 자손을 괴롭힐 것이다. 이후에 내가 그들이 섬기는 나라(애굽)을 심판할 것이고 너의 자손은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장사될 것이고 너의 자손은 4대만에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인데 왜냐하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똑똑히 알라, 확실히 알라는 말씀은 앞선 8절,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는 아브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본절은 아브라함 이후 모세를 통해서 시행될 출애굽을 이야기하고 있다. 창세기의 이후 내용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기근을 피해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고 40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행 7:6)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나올 때 큰 재물을 이루고 나오게 된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민족 가운데 하나로 창 10장에서 언급된 함의 자손 가운데 하나이다. (10:16) 아브라함의 사망후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아모리 족속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아직은 그들의 행위의 악함이 가득차지 않았고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 오랜 기간을 기달려야만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사람의 죄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나님은 한 민족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다른 민족을 이유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민족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시는 통치자이시다. 결국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사람들의 죄가 가득 차서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 16절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앞선 표현대로라면 400년에 해당한다. 본문의 세대라고 표현된 히브리어는 ‘도르’는 정해진 기간이 아닌 어떤 기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기에 4대면 120년을 의미하지만 특정한 기간이 아니기에 여기서 한 세대를 100년이라고 보면 400년이라고 할 수 있다. 

Hebrew dôr (“generation”) denotes a span of time, but not necessarily the same fixed number of years. The adult male population in Israel was counted at the age of twenty (e.g., Exod 38:26; Lev 27:3; Num 1:3; 14:29; 26:2; Ezra 3:8), yet forty years amounts to the wilderness “generation” (e.g., Num 32:13; 2 Kgs 10:30; 15:12; Ps 95:10).281 The reference to “four hundred years” (v. 13) suggests that “generation” should also equate to a hundred years. This is supported by Abram’s first generation (Isaac) who was born after a hundred years (21:5). “Fourth generation,” however, may be only a stereotypical expression, conveying the idea of completeness; the duration of a father’s life would not normally extend to four generations. The influence of a parent affected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 (e.g., Exod 20:5; Num 14:18), and four generations established a ruling dynasty (2 Kgs 10:30; 15:12).

281 D. N. Freedman and J. Lundbom, “דּוֹר dôr,” TDOT 3.174.

 K. A. Mathews, Genesis 11:27–50:26, vol. 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2005), 174–175.

 

דּוֹר (dôr II), generation(s) (#1887).

OT 1. Albright (BASOR 163:50–51) provided the most convincing explanation of the development of the meaning of דּוֹר when he explained it on the basis of older dahru>dâru>dôw, properly, “lap in a race, cycle of time, lifetime.” In the HB the word occurs 166×, 92× by itself and 37× (or 74×) in the double expression דּוֹר וָדוֹר “forever,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The pl. of the word is masc. in form 3× (Ps 72:5; 102:25; Isa 51:8) and fem. in form 48×. דּוֹר appears most often in the Psalms (59×).

Gen 15:16 suggests that in an earlier time a generation was roughly equivalent to a century. Only when the iniquity of the Amorites had reached its full measure (i.e., four generations from Abraham) would Abraham’s descendants possess the land promised to him. Such a postponement highlights Joshua’s invasion of Canaan four “generations” later as an act of justice rather than of aggression.

2. Subsequently דּוֹר was interpreted as a period of approximately forty years. Thus the whole book of Numbers is structured around the deeds and eventual death of the first generation that came out of Egypt (Num 1:1–25:18) and the prospects for the survival of the second generation (Num 26:1ff.). (Numbers)

3. On four occasions Yahweh made a covenant that spanned generations: with Noah (Gen 9:12); with Abraham (17:7, 9); with Israel (Deut 7:9); with David (Ps 89:4 [5]). It is not necessary for Yahweh to make a covenant with each new generation. This may explain why the word “covenant” never appears in the OT in the plural. Such transgenerational covenants emphasize the gracious, faithful commitment of Yahweh to his own (בְּרִית, #1382).

4. The reverse side of the above are the reminders in the OT that each generation needs to expedite faithfully its religious obligations. Appropriate celebrations were to be observed by “the generations to come” (Exod 12:17, 42; 16:32; 32:13, 16; Lev 23:14, 21, 31, 41); the same applied to covenant requirements (Gen 17:12; Num 35:29). Neither the celebrations nor the obedience of one generation sufficed for another generation. That each generation engaged in the observance of the same festivals, with little modification or adaptation, provided both continuity between the generations and minimized the possibility of a later generation forgetting its roots and the source of its vitality.

See Descendant, offspring,

BASOR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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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 Hebrew Bible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930–931.

 

17절) 쪼갠 고기, 제물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는 것은 바로 언약을 체결하는 모습이다. 앞서 12절 해 질 때였고 이제 한밤중이 되었다. 아브람은 낮 시간동안 언약 체결 의식에 필요한 동물들을 준비했다. 본절에서 연기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출 13:21-22) 이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는 것은 바로 이 약속, 언약을 어기면 자신이 이 제물과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렘 34:18) 당대의 언약을 체결할 때 언약의 당사자들이 이렇게 제물사이를 지나는 것은 죽음으로 이 언약을 지킬 것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이 언약 체결에서 제물 사이를 지나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순종을 대신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형벌을 담당하셨다. 

 The flame, symbolizing God, passes between the pieces, symbolizing that God himself will bear the penalty if the promise is broken. Ultimately, Christ bears the penalty for our disobedienc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77.

 

18-21절) 언약의 중심 내용은 바로 이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 땅의 한계는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이다. 남쪽의 한계은 애굽 강에서 부터 북쪽의 한계는 유브라데까지이다. 본 절의 애굽 강은 나일의 동쪽 지류로 보인다. 현재 아브람에게 언약이 주어졌을 때 가나안 땅은 다른 족속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약속은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대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진다.(왕상 4:21)

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았을까?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비전을 포기하고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브람 시대에는 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서에 당사자들이 숭배히는 신들의 이름을 포함시켰다. 이 신들은 증인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언약을 맺은 쌍방중 한쪽이 언약을 파괴할 때 그 사람(들) 에게 계약에 열거된 저주를 내리기 원한다는 의미에서 계약서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계약이 체결되면 세 개의 계약서가 만들어져 계약자들이 각각 하나씩 갖고, 하나는 봉인되어 신전에 소장되었다. 신들이 이 언약을 보호하고 사람의 약속이 가장 성스러운 곳에 보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풍습이었다. 또한 계익빨 체결할 때는 짐승들이 희생되었다. 피로 체결된 약속이란 것을 상정하기 위해서였다.(엑스포지멘터리 303)

본문 18절에 언약을 세우다라는 단어는 ‘카라트 엣 베리트’이다. 베리트는 언약을 의미하고 카라트라는 단어는 쪼개다/자르다라는 의미로 계약을 체결할 때 짐승들이 쪼개져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명예와 능력을 걸고 아브람이 반드시 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 그런데 이 언약은 성취되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애굽에서의 포로기간을 400년으로 잡는다고 할때 최소 600-800년 이후의 일을 말하고 있다. 만약에 나에게 이런 동일한 일이 일어났다라고 가정해보자. 어떤 집을 계약했다. 나의 바램은 새로운 집에 바로 입주하여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계약서의 작은 글씨로 된 조항을 읽어보니 이 집에 바로 입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400년 후에 들어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9)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기대가 일치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빠름을 추구하고 있다.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진다. 화면이 나오는데 2-3초의 딜레이에도 너무나 갑갑하다. 짧은 시간안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면 우리는 그냥 스킵하고 지나간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설교는 점점 더 짧아지기를 원하고 무언가를 깊이 되뇌이며 생각하는 것은 매우 힘든 소양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대도 이렇지 않은가?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은 누르면 내가 원하는 물건이 바로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으로 두드리거나 발로 찬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로 응답되지 않으면 더이상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고 더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기대는 미래를 바라보고 소망한다. 그런데 그 기대가 이루어지 위해서는 현재의 수고와 노력, 관계가 요구되어진다. 아이들을 향한 부모의 기대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빨리 젖을 떼고, 기저귀를 떼고 걷고 뛰기를 바란다. 그리고 유치원, 학교에 들어가서 부쩍부쩍 자라고 건강한 청소년기를 거쳐서 대학을 나와서 직장을 잡고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일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소망의 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 단계마다 부모의 수고와 노력,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다. 기저귀를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폭풍과 같은 청소년기를 거쳐야한다. 이처럼 우리는 미래의 기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현재의 관계를 아름답게 일구어 나가야 한다. 어찌보면 소비되고 낭비되어지는 것 같은 현재를 잘 일구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각각 한 사람이 살고 있는 별들을 방문하는데, 그들은 각각 무엇이 중요한지 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대표한다. 그는 복종받는 일에 매우 관심이 있는 왕을 만나는데,  그 왕은 자기가 명령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이를테면, 일몰). 그의 권위는 그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다. 또 어린 왕자는 허영심이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그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칭송을 받는 것이다. 세 번째 별의 “술고래”는 자기 의 음주 습관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업가는 사실과 숫자들에서 중요성을 발견하고,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비합리적 인지와 상관없이,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데서 중요성을 발견한다. 마지막 별에서, 어린 왕자는 지리학자를 만나는데 , 그는 오로지 변화하지 않는 것에서 중요성을 찾는다. 지리학자들은 덧없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탐험 과정을 통해,  그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 별에서 그가 돌보았던 장미 한 송이이었다. 그의 친구가 된 여우는 ‘네 장미를 그토록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네가 네 장미에 쏟은 시간”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어린 왕지는 이를 통해 그에게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것을 발견한다.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 선물, 칭찬의 말, 선물, 스킨십등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한다라고 말한다. 이중에 함께하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이 관계 자체가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이루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는 방법도 매우 즉각적일 수 있지만 또한 매우 오랜 시간을 통해서 우리로 기대하게 하신다.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현재의 우리의 관계에 집중하며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는 함께 걷거나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40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무의미해 보일 수 있지만 내일을 의심하고 걱정하는 대신 오늘에 집중하여 만족하며 오늘 나에게 주어주신 사명과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갈 때 400년의 기다림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열망함으로 오늘을 믿음을 살아가는 관계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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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w and the Promise
15 yTo give a human example, brothers:6 zeven with a man-made covenant, no one annuls it or adds to it once it has been ratified. 16 Now athe promises were made bto Abraham and to his offspring. It does not say, “And to offsprings,” referring to many, but referring to one, c“And to your offspring,” who is Christ. 17 This is what I mean: the law, which came d430 years afterward, does not annul a covenant previously ratified by God, so as eto make the promise void. 18 For if the inheritance comes by the law, it no longer comes by promise; but fGod gave it to Abraham by a promise. 19 Why then the law? gIt was added because of transgressions, huntil the offspring should come to whom the promise had been made, and it was iput in place through angels jby an intermediary. 20 Now kan intermediary implies more than one, but lGod is one. 21 Is the law then contrary to the promises of God? Certainly not! For mif a law had been given that could give life, then righteousness would indeed be by the law. 22 
But the Scripture nimprisoned everything under sin, so that othe promise by faith in Jesus Christ might be given pto those who believ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갈 3:15–22.

15절) ‘형제들아’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아 라고 부르는 바울. 그들이 혼란스럽고, 어리석고, 유혹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배신당하고 당황하고 버림받았다라고 느꼈을 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여전히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 We are struck by the fact that Paul addressed the Galatians here as “brothers,” a term of endearment he had not used since 1:11, although it would occur again seven other times in the letter (4:12, 28, 31; 5:11, 13; 6:1, 18). Although the Galatians were confused, foolish, and bewitched, and although Paul felt betrayed, perplexed, and forlorn about them, still they were adelphoi, “brothers.” This term of relationship is especially appropriate at the beginning of a passage that will seek to answer the questions: “What makes a family a family? Who are the true children of Abraham, the heirs of the promise, and thus entitled to call one another brothers and sisters?”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44–245.

사람의 언약이라도 이후에 함부로 폐하거나 더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어떠하겠는가라는 논지로 이야기하고 있다. 
- The chapter began with his reminding the believers of Galatia that Christ had been portrayed as crucified before their very eyes. And just two verses before, he had inextricably linked Christ’s death on the cross with his bearing of the law’s curse. In Heb 9:15–28 Paul worked out in greater detail than he did in Galatians the role of Christ as the mediator of the new covenant whose death was a liberating ransom bringing salvation for all who believe in him. In Hebrews the contrast is between the Mosaic covenant, which required the shedding of blood for the forgiveness of sins, and the great High Priest, who obtained eternal redemption by shedding his own blood once for all.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46.


16절)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약속들은 바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씨)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바로 한사람, 그리스도를 가리켜 약속하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의 언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본문의 자손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사용된다.
- As we have seen already in v. 8, Paul had interpreted this last promise to mean that the message of the gospel, that is, justification by faith, would be preached to the Gentiles as well as to Abraham’s natural descendants. However, here in v. 16 Paul’s main point was that all of these promises applied not only to one man, Abraham, but also to his “seed.” Now here is the hairsplitting point: the word “seed,” he observed, is singular, not plural; therefore in its deepest and fullest meaning it refers to one person, not to many. And that one person, Paul contended, Abraham’s true seed, is Christ himself.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47.

- Our solidarity in Christ implies unity in the church. As N. T. Wright has shown, the oneness of the “seed” in v. 16 must be linked to the oneness of God in v. 20 and the oneness of the body of Christ in v. 28. According to this view, the original covenant with Abraham envisaged one seed, that is, a single family of faith, a unitary people of God. This is why Paul was so upset over the issue of table fellowship at Antioch. To assume that the “works of the law” have an abiding validity after Christ has come is to divide the church permanently into Jew and Gentile, not to say “Athenian and Roman, Galatian and Ephesian, African and Scythian, and so on ad infinitum.”84 Paul was not saying, of course, that such distinctions, and others we could think of (white and black, rich and poor, First World and Third World, and so on) have lost all their significance for those who are in Christ. Clearly they have not. What they have lost, however, is the ability to define absolutely, to circumscribe definitively. To be of the seed of Abraham means to belong to Christ, to have a share in the new humanity of the Last Adam, in whom there is no East or West, no South or North, “But one great fellowship of love Thro’-out the whole wide earth” (J. Oxenham).
84 Wright, Climax of the Covenant, 165.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48.

17절) 430년 후에 생긴 율법, 본문의 430년은 약속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까지의 애굽에서 있었던 전체 시간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을 주신후에 430년이 지나서 모세에게 구체적으로 율법을 시내산에서 주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미리 정하신 언약을 이후에 하나님과 모세가 세운 율법이 폐기하거나 헛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Paul is apparently referring to the Septuagint translation of Ex. 12:40, “The dwelling of the children of Israel … in Egypt and in Canaan was 430 years,” which would mean 430 years from Abraham to the exodus (the Hb. text does not include “and in Canaan”). Another explanation is that Paul is not counting the time from the first statement of the promise to Abraham but from the last affirmation of that promise to Jacob before he went to Egypt in Gen. 46:3–4. This method would then count the entire time in Egypt as the time from the “promise” to the “law.” If this is so, then Paul is relying on the Hebrew text of Ex. 12:40 to affirm a 430-year stay in Egyp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50.

18절) 바로 그 율법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19절) 율법은 무엇인가? 본문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으로 천사들을 통해 한 중보자(모세)를 통해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까지이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고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지 그래서 구세주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 The question then arises: If the law has no impact on God’s plan rooted in his promise, why was the law ever given? Because of transgressions might mean (1) “to provide a sacrificial system to deal temporarily with transgressions,” (2) “to teach people more clearly what God requires and thereby to restrain transgressions,” (3) “to show that transgressions violated an explicit written law,” or (4) “to reveal people’s sinfulness and need for a savior” (cf. Rom. 3:20: “through the law comes knowledge of sin”). All four senses are theologically true, but the last is probably uppermost in Paul’s mind. put in place through angels by an intermediary. Deuteronomy 33:2 talks about God coming from Sinai, where he gave the law, “from the ten thousands of holy ones,” so the angels were present with God on that occasion (cf. Acts 7:53; Heb. 2:2). Moses was God’s “intermediary” in the gift of the law to Israel (Lev. 26:46; John 1:17). The Mosaic law was part of a temporary covenant never intended to last forever. Now that Jesus has come as the true offspring of Abraham, the Mosaic law is no longer   p 2251  in force. Therefore, circumcision is no longer required, since it is part of the Mosaic covenan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50–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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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o I became the shepherd of the flock doomed to be slaughtered by the sheep traders. And I took two staffs, one I named uFavor, the other I named vUnion. sAnd I tended the sheep. In one month wI destroyed the three shepherds. But I became impatient with them, and they also detested me. So I said, “I will not be your shepherd. xWhat is to die, let it die. What is to be destroyed, let it be destroyed. And let those who are left devour the flesh of one another.” 10 And I took ymy staff Favor, and I broke it, annulling the covenant that I had made with all the peoples. 11 So it was annulled on that day, and the sheep traders, who were watching me, knew that it was the word of the Lord. 12 Then I said to them, “If it seems good to you, give me my wages; but if not, keep them.” And they weighed out as my wages zthirty pieces of silver. 13 Then the Lord said to me, “Throw it to the potter”—athe lordly price at which I was priced by them. So I took the zthirty pieces of silver and threw them into the house of the Lord, to the potter. 14 Then I broke bmy second staff Union, annulling the brotherhood between Judah and Israel.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11:7–14.

7절) 그래서 내가 양을 매매하는 자들에 의해서 잡혀 죽을 운명의 양무리의 목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나의 이름은 은총, 또하나의 이름은 연합이라하는 두 막대기를 취했다. 그리고 나는 양무리를 돌봤다. 
(슥 11:7, 개정) 『내가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들이라 내가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합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새』 
 (Zch 11:7, ESV) 『So I became the shepherd of the flock doomed to be slaughtered by the sheep traders. And I took two staffs, one I named Favor, the other I named Union. And I tended the sheep.』 
 (Zch 11:7, NIV) 『So I pastured the flock marked for slaughter, particularly the oppressed of the flock. Then I took two staffs and called one Favor and the other Union, and I pastured the flock.』 
 (슥 11:7, NASB) 『So I pastured the flock doomed to slaughter, hence the afflicted of the flock. And I took for myself two staffs: the one I called Favor, and the other I called Union; so I pastured the flock.』

메시야적 목자(스가랴)가 가련한, 불쌍한 양들을 돌보고 은총과 연합이라는 두개의 막대기를 취한다. 이 두 막대기는 겔 37:15이하를 상기시킨다. 
The two staffs the shepherd took and named serve as one of the most powerful symbolic images in the passage. Zechariah’s actions clearly echoed earlier Old Testament examples where two poles or staffs symbolized something far more profound. For example, when the nation challenged Aaron’s office as priest, Moses ordered that every tribe present a staff with its tribal name written on it. When every staff was gathered and placed together in the Tent of Meeting, along with Aaron’s inscribed staff, the staff belonging to Aaron budded, blossomed, and produced almonds, vindicating the priest’s mandate from the Lord to serve as priest (Num 17:1–11). Another example is Ezekiel’s adaptation of two sticks to express a divine message, which for Zechariah’s audience was a comparatively recent memory. The exilic prophet wrote “Belonging to Judah and the Israelites associated with him” on one pole and “Ephraim’s stick, belonging to Joseph and all the house of Israel associated with him” on the other (Ezek 37:15–18). Ezekiel’s symbolism underscores the restored unity of the tribes. Zechariah’s message ultimately communicated the breaching of relationships, not unity, but he used the same well known vehicle to express God’s message. The ironic twist in Zechariah’s message, in comparison to Ezekiel’s, would have made an impression on the postexilic community.
At the Lord’s command, Zechariah named both staffs. The first, commonly translated “Favor,” reflects the Hebrew term nōʿam.285 The word expresses “grace” or “kindness.” The adjectival form of the word describes the “gracious” qualit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David and Jonathan (2 Sam 1:23). “Favor” reflects one of God’s fundamental divine attributes. The concluding prayer of Ps 90:17 illumines this divine trait: “May the favor of the Lord our God rest upon us; establish the work of our hands for us—yes, establish the work of our hands.”
The second staff bears the name “Union,” rendering the Hebrew ḥōbĕlîm.286 “Union” with God and harmony among God’s people should result from godly leadership. The meaning “Union” or “Bond” becomes clearer in v. 14 where breaking the second staff illustrates the severance of brotherly relations between Judah and Israel.

285 נֹעַם. HALOT, 706.
286
חֹבְלִים. HALOT, 286; TDOT, 4:183.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27–328.

8-9절) 한달동안에 세명의 목자를 없앴다.(해고시켰다.) 내가 그들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고 그들도 나를 미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의 목자가 되지 않을것이다. 죽을 것은 죽게 두고 멸망할 것은 멸망하게 두며 남겨진 자들은 서로의 살을 먹게 두라고 말했다. 
이 한달의 기간에 대한 해석과 세 목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하고 특정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이 세왕을 유다의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라고도 하는데 한달이라는 기간과는 맞지 않는다. 
Of these views the first option, the brief duration of time, offers the best explanation. Nothing in the context or in related biblical literature supports the second view that equates each day of the month with a calendar year. Further, the third explanation, a lengthy undetermined duration of time, seems odd in light of the text’s specific language, “one month.” The short time frame fits the context best, stressing the Lord’s intention to act swiftly. Further, the participle in v. 6, “I will hand everyone over,” likewise underscores the imminent action.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29.
Yet another approach contends that interpreters have mistakenly sought to relate Zechariah’s three deposed shepherds to specific historical figures. In one of the broader understandings, some see the three shepherds as symbolizing the offices of prophet, priest, and king generally.305 Both Baldwin and Smith suggest that “three” should not receive a literal interpretation.306 This position takes the number three symbolically, perhaps representing all of the shepherds collectively. Baldwin clarifies her point: “Apocalyptic uses numbers symbolically. Is the number three used in that way here (cf. Dn. 7:8, 24) to signify completion? If so, the good shepherd would be removing from power all the unworthy leaders who frustrated his work.”307 Meyers and Meyers agree that the number three is symbolic in v. 8, representing all of the shepherds over Judah. They state that the number “is deliberately vague and, thereby, inclusive.”308
305 Redditt, “Two Shepherds,” 677.
306 Baldwin, Zechariah, 183; R. L. Smith, Micah-Malachi, 467.
307 Baldwin, Zechariah, 183.
308 Meyers and Meyers, Zechariah 9–14, 265.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31.
Consequently, it is best to treat v. 8 as a symbolic action in which the three shepherds metaphorically represent the host of faithless shepherds who exploit the Lord’s flock for their personal advantage. Zechariah certainly pronounced God’s judgment against political leaders over Judah who did not fulfill their divine mandate righteously. However, the same principle applies to modern faithless shepherds of God’s flocks, insincere pastors who use their holy office for personal advantage. As mentioned above, the phrase “three shepherds” symbolizes the totality of faithless shepherds whom the Lord will ultimately judge. The single month stresses the haste with which the Lord will exact judgment when the day of reckoning finally arrives, not a literal thirty-day period.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33.
본문을 신학적,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난해한 작업이다. 이에 대한 수십가지의 견해가 있을 정도이다. 결국 이는 상징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Few themes evoke deeper revulsion than that of cannibalism. Yet Zechariah declared that those who do not perish right away as a result of judgment will face a more grim prospect, for they will “eat one another’s flesh.” Jeremiah predicted something similar in an earlier day when he warned Judah about the impending judgment meted out by the Babylonians: “I will make them eat the flesh of their sons and daughters, and they will eat one another’s flesh during the stress of the siege imposed on them” (Jer 19:9). Josephus reported that the brutal siege of Jerusalem in AD 70 by the Romans forced the surviving inhabitants of Jerusalem to do this very thing—eating the flesh of their deceased brethren.314 Since Judah had repeatedly faced the unspeakable tragedy of sieges that led to limited occasions of cannibalism, cannibalism does not provide adequate evidence for identifying the three shepherds with any particular ruler or epoch. Further, it remains an open question whether Zechariah intended his prophecy about cannibalism to be read literally. The horror of the experience could not be clearer, though.
314 Josephus, War, VI, 193–213.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33–334.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돌보심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주님의 보호하심을 거두시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어 버려두심”으로 죽음과 멸망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10-11절) 내가 은총이라는 나의 막대를 취하여 그것을 부러뜨렸는데 이는 내가 모든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언약이 폐하여진 그날, 나를 보던 양을 판매하는 자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줄 알았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하는 막대기가 부러졌다는 것은 말그대로 그 언약이 파기되었다는 것이다. 메시야적 목자가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심으로 은총이 거둬지게 되었다. 은총의 막대기는 하나님의 보호와 언약을 상징한다. 
(슥 11:11, 개정) 『당일에 곧 폐하매 내 말을 지키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 줄 안지라』 
 (Zch 11:11, ESV) 『So it was annulled on that day, and the sheep traders, who were watching me, knew that it was the word of the LORD.』 
 (Zch 11:11, NIV) 『It was revoked on that day, and so the afflicted of the flock who were watching me knew it was the word of the LORD.』 
 (슥 11:11, NASB) 『So it was broken on that day, and thus the afflicted of the flock who were watching me realized that it was the word of the LORD.』

본문의 언약(베릿)은 구약 성경안에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One of the major questions arising from this verse focuses on the nature of the broken covenant. Moses’s instructions in Deut 17:14–20 to Israel for the institution of kingship may serve as a background for Zech 11:8, although the Pentateuchal instruction does not incorporate covenantal terminology. But King David made “a compact” with the elders at Hebron (2 Sam 5:3). Further, Jehoiada “made a covenant between the Lord and the king and people that they would be the Lord’s people” (2 Kgs 11:17). The covenant that the shepherd in Zech 11:10 revoked resembled the covenant established between the faithful kings of Judah and their people (Ezek 34:25).
From the broad perspective of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most have understood the covenant in v. 10 to represent a general covenant that protected Judah from the wiles of her neighboring nations.316 This view does not attempt to relate “covenant” (bĕrît) in v. 10 with a particular biblical covenant. Rather, according to this view, the broken covenant speaks metaphorically of God’s protective restraint on the nations that would be withdrawn when the shepherd broke the covenant. Several Old Testament passages employ bĕrît similarly to describe God’s protection of his people from foreign powers and even wild beasts (Job 5:23; Hos 2:18). Ezekiel 34:25 illustrates the usage well: “I will make a covenant of peace with them and rid the land of wild beasts so that they may live in the desert and sleep in the forests in safety.”
This approach focuses on a general perspective of the word bĕrît.317 The word frequently refers to an agreement or a contract between two or more parties in the Old Testament. For instance, in 2 Sam 3:12 Abner sought to establish a bĕrît, an agreement with David (cf. Josh 9:6; 1 Sam 18:3; 23:18).
Regarding “my covenant,” to whom does the pronoun “my” refer? The immediate referent, the shepherd, cannot satisfy the scope of the prophecy. No shepherd or shepherds throughout Judah’s history possessed sufficient might to shield the nations from the wolves that surrounded her. Ultimately, the only one with adequate power to extend or withhold protection to Judah was the Lord himself (see Zech 1:11–12, 15; 2:12–13). According to this interpretation “my covenant” speaks of the general, restraining influence exerted by the Lord on the nations to protect his own flock, Judah. Without divine protection, God’s people were defenseless.

316 Smith, Zechariah, 308; Unger, Zechariah, 197. Smith’s alternative proposal postulating an unknown covenant between Judah and her neighbors with Egypt is pure speculation.
317
בְּרִית. HALOT, 157.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34–335.

Zechariah stressed the point that the nation understood that God had spoken to them. The oppressed people, facing affliction brought on by their sinful intransigence, recognized that the Lord had delivered a message to them through Zechariah. When the crowd observed the prophet cleaving the staff “Favor,” the theme from God was as clear as the symbolic actions Hosea acted out before all Israel. For example, when Hosea named his daughter “Lo-Ruhamah” he declared that God would “no longer show love to the house of Israel” (Hos 1:6). Similarly, Hosea’s son, “Lo-Ammi,” proclaimed to Israel that “you are not my people, and I am not your God” (Hos 1:8). When Judah saw the staff “Favor” broken, they knew that their love for disobedience would lead to devastation.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36.

12-13절)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이것이 네게 좋게 보이거든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않다면 주지 말라” 그들이 나의 품삯으로 은 삼십을 달아서 주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것, 그들이 매긴 주님의 값을 토기장이에게 던져라.” 그래서 내가 은 삼십을 여호와의 집안에 있는 토기장이에게 던졌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의 직무에 상응하는 품삯을 달라고 요구하신다. 이는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품삯을 은 삼십으로 정했다. 이는 소가 어떤 종을 쳐 죽였을때 지불하는 값에 불과하다.(출 21:32) 느헤미야 시절 총독의 하루 생활비가 은 40개였다.(느 5:15)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이렇게 하찮게 여긴 것이다. 이 은 30일 토기장이에게 던진 행위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나타낸다.(마 27:9-10)

14절) 그리고 나서 내가 나의 연합이라는 두번째 막대기를 부러뜨렸고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형제관계를 무효화시켜버렸다. 

The next inevitable consequence of Judah’s rejection of the Lord and the shepherd he had sent would be disunity among the people. The breaking of the second staff named “Union” portrayed this final rupture 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ribes of Israel and Judah. The Hebrew term for “brotherhood” (hāʾaḥăwāh) is a unique word in the Old Testament.344 Related to ʾāḥ (“brother”), hāʾaḥăwāh conveys the idea of family ties. As the broken staff “Union” foreshadowed, every vestige of unity among Abraham’s seed would cease. The next five or six centuries of Jewish history would indeed manifest the most bitter internecine strife ever witnessed, providing a sobering, albeit partial, fulfillment of Zechariah’s prophecy.
344 הָאַחֲוָה. HALOT, 31.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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