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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After these things kGod tested Abraham and said to him, “Abraham!” And he said, “Here I am.” He said,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l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of which I shall tell you.” So Abraham rose early in the morning, saddled his donkey, and took two of his young men with him, and his son Isaac. And he cut the wood for the burnt offering and arose and went to the place of which God had told him. On the third day Abraham lifted up his eyes and saw the place from afar. Then Abraham said to his young men, “Stay here with the donkey; I and the boy1 will go over there and worship and come again to you.” And Abraham took the wood of the burnt offering and mlaid it on Isaac his son. And he took in his hand the fire and the knife. So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 And Isaac said to his father Abraham, “My father!” And he said, “Here I am, my son.” He said, “Behold, the fire and the wood, but where is the lamb for a burnt offering?” Abraham said, n“God will provide for himself the lamb for a burnt offering, my son.” So they went both of them together.

k 1 Cor. 10:13; Heb. 11:17; James 1:12, 13; 1 Pet. 1:6, 7

l 2 Chr. 3:1

1 Or young man; also verse 12

m [John 19:17]

n [John 1:29, 36; 1 Pet. 1:19; Rev. 5: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22:1–8.

 

 

1-2절) 그 일들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시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하나님께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에서 말하는 '그 일들 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깝게는 이삭을 낳고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것일 수도 있지만 길게 본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에 응답하여 살아온 시간 전체일 수도 있다. 후자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정말로 자신을 믿고 따르며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험의 시점에 부르심의 초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충분하게 하나님에 대한 실패와 성공의 경험이 쌓인 이후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이스마엘이 떠날 때 이삭이 2-3살 정도였는데 이제 장성한 청년이 되어있는 것이다. 적어도 1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는 것과 마귀에게 유혹을 당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시지 않는다.(약 1:13) 하지만 때때로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지 시험하신다(출 15:25, 16:4).

2절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강조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표현한다. 이 시점이 이스마엘이 떠난 사건(21:8-21) 이후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강조가 더욱 아브라함의 순종의 의미를 부각시켜준다. 

이 하나님의 요구는 지금까지 허락된 모든 약속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The particular form of the verb “tested” makes this phrase a summary of the whole passage and clarifies the meaning of the events. The genuineness of Abraham’s obedience to God is tested. While it is not unknown for God to test individuals, testing must be clearly distinguished from tempting. God does not tempt anyone to do evil (see note on James 1:13); he does, however, test the commitment of people (e.g., Ex. 15:25; 16: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87.

 

The text clearly makes the point that what follows is a divine testing, not a demonic temptation. This particular verb, with God as the subject, does not occur again until Exod. 15:25 (and cf. Exod. 16:4; Deut. 8:2, 16; 33:8 for references to the same time period; also Deut. 13:4 [Eng. 3]; Judg. 2:22; 3:1, 4 for other divine testings). The wilderness period, after the departure from Egypt, is a testing experience. Will the Israelites take freedom with all the insecurities that freedom brings, or will they take incarceration and the guarantee of regular meals? That is the test. Whenever a human being is the subject of this verb and God is the object, the testing is negative, uncalled for, and out of place.16 Perhaps the closest parallel to Gen. 22:1–19 for the “divine testing” motif occurs in Exod. 20:20, right after the revelation of the Decalogue. In both instances the source of the test is hāʾĕlōhîm, some form of the verb nāsá is used (nissá/nassôṯ), and the aim of the testing is to evidence the fear of God (yerēʾ ʾĕlōhîm, Gen. 22:12; tihyeh yirʾāṯô, Exod. 20:20). The major difference between the two is that in Exod. 20:20 the people know well, via Moses, that through the revelation of his law God will test his people. How will his people respond to this God who has revealed himself in word and act? By contrast, the reader, but not Abraham, knows that what he is about to hear is a divine test.

16 See Exod. 17:2, 7; Num. 14:22; Deut. 6:16; Ps. 78:18, 41, 56; 95:9; 106:14. The exception is Ps. 26:2. In a few places nissâ carries the idea of “to have experience of, to practice, to be used to, be familiar with.” Cf. M. Greenberg, “nsh in Exod. 20:20 and the Purpose of the Sinaitic Theophany,” JBL 79 (1960) 273–76. Besides Exod. 20:20 cf. Deut. 28:56; 1 Sam. 17:39.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101.

 

특별히 본문 2절에서는 ‘나’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원하건대, 바라건대’라는 강조불변화사, 감탄사이다. 이 감탄사는 창세기에서 68번 사용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도중에 사용되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5번(창 13:14; 15:5; 22:2; 출 11:2; 사 7:3)인데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매우 어려운 일을 요구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창세기 13:14, NKRV)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5, NKRV)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출애굽기 11:2, NKRV)

그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이사야 7:3, NKRV)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지금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헤아리고 계신 것이다. 

 

The divine command Take is followed by the particle -nāʾ, which is normally translated something like “please” or “I beg you.” It might seem strange to some modern readers for God to say to Abraham “Take, please, your son” or “Take, I beg you, your son.” For this reason some have assigned to -nāʾ here a strengthening function instead of the usual precative meaning.17 But I observed in my discussion of Gen. 13:14 that -nāʾ, which occurs more than sixty times in Genesis, is used only five times in the entire OT when God speaks to a person.18 Each time God asks the individual to do something staggering, something that defies rational explanation or understanding. Here then is an inkling at least that God is fully aware of the magnitude of his test for Abraham.19

17 See J. Hoftijzer, “David and the Tekoite woman,” VT 20 (1970) 440 n.2.

18 See Y. T. Radday, “The Spoils of Egypt,” ASTI 12 (1983) 136–37. We need to add Isa. 7:3 to Radday’s four examples (Gen. 13:14; 15:5; 22:2; Exod. 11:2).

19 See Crenshaw, Whirlpool of Torment, p. 14.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101.

 

본문에서 말하는 번제는 희생제물 모두를 온전히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을 원하셨을까? 고대 근동 사람들은 실제로 신에게 사람을 번제로 바침으로써 신이 주는 지속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문에 시험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니싸’인데 일정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따라 테스트하는 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훈련하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굳세게 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신다. 즉 처음부터 인간 번제를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이를 실행할 의도는 없으셨지만 지금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이 바로 이삭이었기에 이런 헌신을 요구하신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헌신과 순종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확실한 것인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이삭을 죽이고자 했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돌려 받은 것이다. (히 11:17-19)

히브리서 11:17–19 (NKRV)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아들인가를 잠시 생각해 보자. 이삭은 아브라함의 삶의 의미이자 인생의 결정판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삶의 보람을 느꼈다. 하란에 있는 친척들을 떠나와 가나안에서 이곳 저곳 정처 없이 떠돌 사는 그의 나그네 인생에 대한 위안이요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즉, 아브라함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노년에 얻은 이삭이었다. 뿐만 아니라 늙은 아브라함이 지팡이 삼아 의지하며 살던 아들이었다.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늙은 아브라함에게 지팡이를 빼앗으려 신 것이다. 

 

3-4절)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종과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준 곳으로 갔다. 여정을 떠난지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순종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 그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이에 순종한다. 브엘세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여정은 72km에 해당하는 거리로 꼬박 2-3일을 이동해야하는 거리였다. 성경에서는 제 삼일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사용된다.(31:22; 42:18; 출 3:18; 15:22; 19:11, 15, 16; 마 16:21; 고전 15:4) 이 일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3일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이는 그가 즉흥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3일의 시간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라도 원했다면 결심을 번복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마 이 3일의 시간이 아브라함의 인생에 가장 잔인한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우리는 이 상황속에서 사라의 반응을 상상해볼 수 있다. 성경은 이 사건속에서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의 명령의 내용을 사라에게 이야기했는지 안했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5-8절)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이삭과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올것이다.’라고 말하고나서 번제에 사용될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고 나아갔다. 이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갔다. 

 

아브라함은 혹시라도 종들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것을 말릴까봐 두 종을 산 밑에 두고 아들과 단 둘이서 선을 올라갔을 것이다. 이렇게 올라가는 중에 아브라함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 아마도 이삭은 전혀 상황을 모르고 아주 단순하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 자신이 번제에 쓸 장작을 지고 있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한손에는 불과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오르는 중인데 정작 번제에 사용될 양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대답을 한다. 과연 이 대답은 그저 둘러내는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올라가면 번제물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을까? 아브라함이 부름받은지 약 40여년의 시간이 지났다. 40여년간 하나님을 따르며 그분의 약속을 받고, 수많은 일들을 겪어왔다. 이 과정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데려가신다면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물론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신실하시며 가나안의 다른 신들처럼 무자비하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었지만 그럼에도 두려움 가운데 함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Isaac is curious, and he does not hesitate to raise a logical question: Where is a sheep for a burnt offering? Isaac’s question indicates that he knew what was involved in the act of worship (v. 5) in which he and his father were about to engage. Although the text has not expressly said that Isaac was informed that they were going to offer a burnt offering, the burnt offering was not only the oldest offering but the only offering mentioned in the patriarchal age (see Job 1:5). Abraham, yet some distance from his destination, can see the place (v. 4), but Isaac cannot see any sacrifice.

An honest question deserves an honest answer. Abraham does not turn on Isaac for speaking out of turn or for being presumptuous. Isaac’s question consists of six words (in Hebrew), and Abraham responds with an answer of six words. Isaac begins his question with Father. Abraham ends his answer with son. We have here the same phenomenon as in v. 1—special attention is drawn to the subject by placing it ahead of the verb: God himself will provide.…” There is no indication that Abraham replies hesitantly or misleadingly, but at least one writer detects ambiguity in Abraham’s “God will provide.” That answer can be reduced to either “I don’t know” or “it will come out right in the end.”48 There is possible ambiguity not only in Abraham’s first word to Isaac, “God will provide,” but in his last words in this verse: “God will provide … for a burnt offering, my son.” “My son” at the end of the quote may be understood as a vocative (the way Abraham wished Isaac to hear it) or in apposition to “a burnt offering”—“God will provide … for a burnt offering, i.e., you, my son” (the way Abraham would not want Isaac to hear it).49 Isaac makes no response to his father’s explanation. Such silence could be read as either satisfaction with Abraham’s projection or bewilderment.

48 See F. Landy, “Narrative Techniques,” p. 17. Westermann (Genesis, 2:359) describes Abraham’s response as throwing “the ball back into God’s court.”

49 See Sternberg,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p. 192; Crenshaw, Whirlpool of Torment, p. 23. The reading of “my son” in apposition to “burnt offering” has a long history and is not a discovery of modern exegetes. See Midrash Gen. Rabbah 56:4–5.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109–110.

 

본문은 아브라함의 삶속에 가장 큰 시험이다. 앞서 아브라함의 삶에 여러가지 시험이 있었다.(12, 13, 16, 20장)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그 일들 후에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장 큰 시험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앞서 이스마엘을 잃었다. 이제 이삭을 잃으면 대가 끊기는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이 시험을 제대로 통과함으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제대로 얻게 된다. 본문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명령(22:2)은 그를 처음 부르시는 내용(12:1)을 떠오르게 한다. 둘다 명령형으로 시작되는데 12장 1절은 떠나가라, 22장 2절은 데려가라라고 말한다. 12장에서는 ‘너의 고향, 너의 친척, 너의 아버지 집’에서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계시고 22장에서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또한 이 명령에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길을 떠나야하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할뿐 구체적인 목적지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삭을 데리고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으로 가라고 하실 뿐 구체적인 행선지를 밝히지 않으신다. 우리들은 뭔가 구체적인 손에 잡히는 것을 원한다. 나 자신도 일을 하는 것 자체는 힘든 일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나 큰 그림을 알지 못한채 기다리거나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못견뎌 한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실 때는 내가 익숙하고 잘하는 것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불편해하고 잘 하지 못하는 일들을 요구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만을 의지하고 내려 놓을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두 사건의 연관성은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22:2)과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12:1)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 문구의 반복에서도 역력히 드러난다. 이 문구는 이 두 곳을 제외하면 성경에서 다시는 사용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 문구를 시용하여 두 사건을 의도적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12:1)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22:2)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동일한 비중의 심리적인 갈등을 유발하는 문구들로 여겨진다. 저자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의 여정의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는 사건들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시작과 그들이 누리는 축복이 모두 하나님의 복과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 위함이다.(엑스포지멘터리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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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uBlessed is the man who remains steadfast under trial, for when he has stood the test he will receive vthe crown of life, wwhich God has promised to those who love him. 13 Let no one say when he is tempted, “I am being tempted by God,” for God cannot be tempted with evil, and he himself tempts no one. 14 But each person is tempted when he is lured and enticed by his own desire. 15 Then desire xwhen it has conceived gives birth to sin, and ysin when it is fully grown brings forth death.

16 Do not be deceived, my beloved brothers. 17 zEvery good gift and every perfect gift is from above, coming down from athe Father of lights, bwith whom there is no variation or shadow due to change.4 18 cOf his own will he dbrought us forth by the word of truth, ethat we should be a kind of ffirstfruits of his creatures.

u ch. 5:11; Matt. 10:22; 1 Pet. 3:14; [Dan. 12:12]

v Rev. 2:10; 3:11; [1 Cor. 9:25; 2 Tim. 4:8; 1 Pet. 5:4]

w ch. 2:5

x Job 15:35; Ps. 7:14; Isa. 59:4

y Rom. 5:12; 6:23

z Ps. 85:12; John 3:27; 1 Cor. 4:7

a 1 John 1:5

b Mal. 3:6

4 Some manuscripts variation due to a shadow of turning

c John 1:13

d [Gal. 4:19; 1 Pet. 1:3, 23]

e [Eph. 1:12]

f Jer. 2:3; Rev. 14:4; [Rom. 8:19–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1:12–18.

 

12절) 본문의 생명의 면류관은 앞선 2절의 응답이다. 이는 보석이 장식된 황제의 왕관이 아니라 경기의 승자나 전쟁에 승리한 황제에게 주어지는 월계수 관을 가리킨다.(고전 9:25) 이처럼 시험을 이겨내는 신실한 자에게 약속된 상은 다름아닌 모든 풍성한 복이 동반된 영원한 생명이다.(계 2:10)

 

13절) 앞선 본문 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약 1:2, 개정)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가지 시험을 우리는 당한다. 이는 시련을 포험한 여러가지이다. 믿음의 시련은 ‘도키미온’이라는 단어로 불순물을 포함한 금이 순금이 되기위해서 거쳐야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러 시험은 테스트나 유혹, 시련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라고 야고보는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시험하신 여러 사건들을 보면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창 22장), 이스라엘(출 16:4), 히스기야(대하 32:31)를 시험하셨다. 이는 그들을 검증하심으로 그들의 성품이 더욱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굳건히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시험(test) 하시지만 유혹(tempt)하시지는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꾀어서 그들로 죄를 저지르도록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죄를 짓는 것에 대해서 이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 13절의 하반부에는 왜 유혹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되는데, 그 분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he cannot be tempted with evil).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택하고 있는 이 번역은 드물게 사용되는 헬라어 단어 아페이라스토스(apeirastos)를 수동의 의미를 지닌 동사적 형용사로 이해하여 ‘유혹받으실 수 없는’(unable to be tempted)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다른 두 개의 가능성도 언급될 수 있다. 호르트는 그 단어를 좀 더 자주 사용되는 유사어 아페이라토스(apeiratos)와 연관시켜 ‘전혀 경험이 없는’(inexperienced)으로 해석한다. 이 해석은 NEB에 반영되어, ‘하나님은 악과 접촉이 없으시다(untouched)’로 표현된다. 반면에 데이비스(Davids)는 이 단어를 ‘시험받아서는 안 된다(ought not to be tested)’로 번역한다. 그에

  • 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06.

 

14-15절)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짓는 것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심에도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를 통해서 마음껏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죄를 낳았고 이것이 자라나 사망을 가져오게 된것이다. 

본문에서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모습은 낚시꾼이 낚시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루어 낚시’가 있다. 이는 지렁이나 떡밥과 같은 미끼가 아닌 인조 미끼를 사용하는 낚시를 말한다. 보통 릴 낚시로 루어(미끼)를 멀리 던진후 릴을 감으면서 헤엄치듯 움직여 고기를 유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욕심에 미혹된 인간은 우리를 유혹하는 거짓된 성공, 자기만족, 기쁨에 끌려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다. 결국 길을 잃고 멀리 떨어져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벧전 5:8-9, 개정)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욕심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도록 깨어서 경성해야 한다. 

본문은 3대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설명한다. 욕심이 자라나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죄이다. 그리고 그 죄가 장성하여 새롭게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망인 것이다. 결국 욕심(에피티미아)-죄(하말티아)-사망(타나토스)의 사이클이 이러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이클을 끊어 내야 한다. 

 

 

James knows the origin of temptation. It is not God, nor is it Satan and Satan alone. It is instead a personal desire born of self-interest that renders us susceptible to the evil inclination and therefore, at times, to the wiles of the evil one. We may wrongly seek to blame others, Satan, or even God, but ultimately we are morally responsible. The key term here is epithymia, which means “desire.” In the New Testament epithymia generally carries a negative meaning, such as “lust,” “selfish ambition,” or “evil desire.”14

Unlike the case in 1:2–8, here peirasmos (“temptation, trial”) is clearly restricted in origin to the internal, to its source lodged within us. This source is the “evil desire,” and James must be thinking again of the yeṣer ha-ra.15 According to him, we are “dragged away” and “enticed” by evil desire. The expressions have their home in the realms of hunting and fishing. The fact that they appear in an odd order (“dragged off” is placed before “enticed”) is best explained by the predilection of the Old Testament to mesh images of snares and nets. So in Ecclesiastes 9:12 we read, “As fish are caught in a cruel net, or birds taken in a snare, so men are trapped by evil times that fall unexpectedly upon them.”

In other words, this verse contains two similar images, not a succession of action within one image. The first pictures the violent action of capture that follows setting a lure, and second the attractive bait that draws an unsuspecting victim. The extraordinary vividness of these images shows how dangerous James believes the evil impulse to be. Evil desire within us acts as both the attractive bait and as the lure. The evil desire is our own, and a bent to be attracted to it is equally our own responsibility. This deep character inclination explains the actions of the double-minded person in 1:6–8 and the wealthy person in 1:10.

14 In Matt. 5:28 Jesus speaks of “lust”; Paul in 2 Tim. 3:6 speaks of those who are swayed by “evil desires”; and Peter in 2 Peter 1:4 speaks of escaping the corruption caused by “evil desires.”

15 See pp. 18, 23–24, 56–58, above.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the variety of rabbinic views concerning the yeṣerim (sometimes it is undifferentiated, sometimes clearly evil, and sometimes clearly pure) parallels the intended ambiguity of James’s use of peirasmos.

 David P. Nystrom, Jame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73–74.

 

16-18절) 야고보는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서 다시 설명한다. 앞서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도 시험을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했다면 이제는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시련을 당할때 그들을 죄짓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은사와 선물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강건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그 누구와 달리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복음의 말씀 고후 6:7, 엡 1:13, 골 1:5, 딤후 2:15)을 통해서 우리를 낳으셨다. 이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미 어머니의 태에서 출생한 우리들이 다시금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영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영적인 생명의 탄생을 말한다면 앞선 15절에서는 죄와 사망의 탄생을 말하고 있댜. 

  • 새 탄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 즉 그 분이 창조한 피조물과는 달리 전혀 변함이 없으신 그 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이 영적 탄생을 이루신 수단이 바로 진리의 말씀인 복음이다. 그리고 이 영적 탄생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계획의 첫 불입금(첫 열매)이 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좋은 선물을 모든 피조물에게 주시기를 원하신다.

  •  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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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I the Lord do not change; utherefore you, O children of Jacob, are not consumed. vFrom the days of your fathers you have turned aside from my statutes and have not kept them. wReturn to me, and I will return to you, says the Lord of hosts. xBut you say, ‘How shall we return?’ Will man rob God? Yet you are robbing me. xBut you say, ‘How have we robbed you?’ yIn your tithes and contributions. zYou are cursed with a curse, for you are robbing me, the whole nation of you. 10 aBring the full tithe into the storehouse, that there may be food in my house. And thereby bput me to the test, says the Lord of hosts, if I will not open cthe windows of heaven for you and pour down for you a blessing until there is no more need. 11 I will rebuke dthe devourer2for you, so that it will not destroy the fruits of your soil, and your vine in the field shall not fail to bear, says the Lord of hosts. 12 Then eall nations will call you blessed, for you will be fa land of delight, says the Lord of hosts. 
tPs. 102:27; See Num. 23:19
uLam. 3:22
vActs 7:51
wSee Zech. 1:3
x[ch. 1:2]
x[See ver. 7 above]
y[Neh. 13:10]
z[ch. 2:2]
a[Prov. 3:9, 10]
bSee 2 Cor. 9:6–8
cSee Gen. 7:11
d[Joel 1:4]
2Probably a name for some crop-destroying pest or pests
eZeph. 3:19
f[Isa. 62: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말 3:6–12.

십일조 과연 ‘축복의 계약금'인가?


6-12절) 앞서 두번째 논쟁에서 제사장들의 실패를 논했다면 이제 말라기는 그 범위를 확대해서 온 백성들의 실패를 지적하고 있다. 6절에서 야곱의 자손들이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포로됨으로부터 돌아온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야곱은 약속의 땅과 하나님께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벧엘에 제단을 세웠고 창 28:20-22절의 맹세에 따라서 십일조를 드렸다. 이와 유사하게 야곱의 자손들이 포로 귀환 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에 제단을 쌓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심각하게 무심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곡물의 흉작, 가뭄, 전염병 때문이라고 정당화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연 재해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의 원인이 아니라 저주받은 결과임을 밝히신다. 

6절)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는 소멸되지 않는다. 
본문은 하나님의 속성과 영원한 목적은 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의 백성들의 믿음과 소망의 견고한 기초를 제공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 불변하심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된다. 우리 인간은 신실할려고 하지만 신실하지 못하다. 시시때때로 변하고 말그대로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말씀을 통해서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예측 가능하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불변성이 하나님의 행동이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7절의 말씀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른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하심을 보여준다. 
- I the Lorddo not changeimplies that God’s character and eternal purposes do not change, which gives a solid foundation for his people’s faith and hope. However, unchangeableness in characterdoes not mean that the Lord is unchanging in his actions, for the very next verse, “Return to me and I will return to you” (v. 7), shows that God acts differently in response to different situation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78.

본문에서 변하지 않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비한정 완료로 “나는 변하지 않았다’와 동시적인 완료로 “나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여호와 께서는 변하지 않으셨고 변하지 않으시며 변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기 34:6–7, NKRV)
하나님께서는 위 언약에 대해서 불변하신다. 

7절) 내게로 돌아오라고 요청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조상의 날로부터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게서 내게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시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묻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규례를 떠났고 지키지 않았다. 이는 거절과 불순종을 의미한다. 
본문의 돌아오다(return)은 ‘슈브’로 회개를 의미한다. 이는 완전한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의 경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리고 그분께 충성을 바칠 것을 다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회개의 선포는 메시야의 길을 예배한 신약의 세례요한의 사역으로 간주한다. 
- Return.Signifies repentance; repeats Zech 1:3. Repentance is an “about face,” a complete change of direction. In this case it is a shift in loyalty, a reorientation back to the God of Israel (cf. 1 Kgs 8:33; Jer 24:7). Preaching repentance characterizes the ministry of John the Baptist, forerunner of the Messiah (Matt 3:2, 11; Luke 3:3–6). The church still proclaims a gospel that calls everyone to repent and turn to God (Acts 3:19; Rom 2:4; 2 Cor 7:10; 2 Pet 3:9).
cf. compare, confer
 D. A. Carson, ed.,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188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아오라고 요청하시는데 이스라엘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반문한다. 이말은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그 방법을 모른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가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가라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니까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8-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습니까?’라고 한다. 너희가 도둑질한 것은 십일조와 봉헌물이다.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본문에서 도둑질하다라는 ‘카바’동사가 4번이나 반복된다. 이 단어는 뒤따라 걷다, 속이다, 빼앗다. 강탈하다라는 의미이다.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 (잠언 22:23, NKRV)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땅의 소산의 1/10을 드리는 것;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드리는 십일조의 십일조; 3년에 이스라엘의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는 십일조로 나뉜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공급자이시며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예배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tithes.Required tithe offerings in the OT included: a tenth of the produce of the land (Lev 27:30–33; Deut 12:6, 11, 17); the tenth of the tithe required of the priests and Levites (Num 18:21–32); and the third-year tithe given to the socially disadvantaged in Israel (Deut 14:28–29; 26:12–15). Malachi’s ambiguity with reference to specific tithes may be intentional. The giving of tithes was an act of worship acknowledging Yahweh as the Lord of the earth and the provider for Israel. offerings.Including freewill, or voluntary, offerings and mandatory gifts to the Lord or his sanctuary that may include agricultural produce, material goods, or personal valuables (e.g., Exod 25:2; 29:27; Num 5:9; 31:29; Deut 12:6). Such contributions were thank-offerings recognizing God’s goodness and generosity (see “whole tithe” in v. 10 [see also note]).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 A. Carson, ed.,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1888.

10절)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라. 그러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을 것이다.
본문의 온전한 십일조는 엄밀하게 말하면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에게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의미한다. (민 18:26, 느 10:38)  
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민수기 18:26, NKRV)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느헤미야 10:38, NKRV)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나를 시험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에 충실하심을 확증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십일조를 개인의 성공을 위한 공식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말하는 것의 핵심은 믿음과 순종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을 확인하는 것이지 십일조를 바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다. 
- whole tithe.Perhaps the tenth-part tithe and the tithe tax (or “tenth of the tithe” that the Levites were required to give on the tithes they received from the Israelites, Num 18:26; cf. Neh 10:38). If so, Malachi may be calling for reinstating the tithe tax (not the giving of additional offerings). food in my house.Food and other goods received as tithes and offerings were stockpiled in the treasury rooms (“storehouse”) of the temple (1 Kgs 7:51; 2 Chr 31:11–12; Neh 13:12). The sacrificial gifts were literally “food” for the priests and Levites, whom the gifts supported (cf. Num 18:8–21; Deut 18:1–4). Test me.The prophet’s challenge does not contradict the prohibition against testing God (Deut 6:16). It offers the priests and the people an opportunity to prove Yahweh’s covenant-faithfulness by personal experience through obedience to God’s commands. The passage is not a formula for achieving personal wealth, as some claim, although it is possible to give freely and attain more wealth (as a general principle, not a promise, cf. Prov 11:24). Context indicates Malachi has the blessings of the Mosaic covenant in mind (see Deut 28:12). These blessings are national, or corporate, in character, rather than individually centered. They are primarily agricultural benefits, but are not without moral and spiritual counterparts. The prophet recognized that turning to God in repentance and reasserting fidelity in covenant relationship with him must begin somewhere—in this case, the practical act of obedience to the Mosaic laws regulating tithes. The point of the “testing” is to probe the willingness of the community to respond to God in faith and obedience, not to manipulate God’s blessing through the giving of tithes. The theme of God’s testing and providing runs through the Bible, giving rise to names for God like “The Lord Will Provide” (Gen 22:14; cf. Deut 8:2, 16; Ps 81:7; 1 Thess 2:4. throw open the floodgates of heaven.Abundant rainfall would yield bumper crops (cf. Deut 28:12), overturning the drought and poor harvests that Haggai reports (Hag 1:6; 2:16, 19).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D. A. Carson, ed.,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1888.

본문에서 사용된 시험이라는 단어는 ‘바한’으로 정직한 믿음에서 나온 시험이라면 신 6:16에서 시험하지 말라라는 단어는 ‘낫사’로 오만하고 냉소적인 불신앙의 자세에서 나온 시험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요구의 성격(이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보라)은 특별한 것이며18)구약 성경에서 드문 그러나 유일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도전이다.19)말라기의 명령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금한 것(신 6:16)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의 문맥에서 시험이라는 말을 위한 단어(낫사, nāśā’)는 오만하고 냉소적인 불신앙의 자세로부터 온 ‘시도하다’(try) 혹은 ‘검사하다’(혹은 심지어 ‘시험하다’[tempt])를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바한, bāḥan)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확증하고 격려하려는 의도를 가진 정직한 의심의 태도에서 온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보라’(NLT)고 초대하시는 것은 언약의 약속에 여호와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을 순종의 경험을 통하여 확인할 기회를 회복된 공동체에 제공하는 것이다.
표현 하늘의 홍수의 문(‘하늘 문’ 개역개정-역주)은 하나님의 언약의 복의 구체적인 표시인 풍부한 농업적인 생산과 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이는 유다 백성들이 고대해오고 있는 것이다. 학 1:6, 10–11; 2:16, 17, 19 참조). 말라기가 사용하는 열다, 창고, 하늘 같은 말들은 말라기가 신명기의 복인 풍부한 비의 복을 마음에 그리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신 28:12).20)
18)Petersen (1995:217).
19)Baker (2006:286).
NLT New Living Translation, copyright © 1996[2004, 2007]. Anglicized version, copyright © 2000
20)Baker (2006:286).
 힐앤드류E., 학개·스가랴·말라기, ed. 백승현 and 정희연, trans. 유창걸, 초판., vol. 28, 틴데일 구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475.

11-12절) 하나님을 시험한 것에 대한 복의 증거로서 메뚜기를 금하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할 것이고 포도나무의 열매가 익기전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열방이 너희를 복된다라고 할 것인데 이는 네가 아름다운 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메뚜기로 인한 흉작, 전염병으로 인한 수확의 실패등은 모세 언약에 불순종할 때 임할 저주가운데 하니인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것을 막으실 것임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땅이 됨으로 모든 이방인이 너희를 복되다 하는 것이다. 이는 이방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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