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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why do you cry aloud?

bIs there no king in you?

cHas your counselor perished,

that dpain seized you like a woman in labor?

10  eWrithe and groan,2 O daughter of Zion,

like a woman in labor,

for fnow you shall go out from the city

and dwell in the open country;

you gshall go to Babylon.

There you shall be rescued;

hthere the Lord will redeem you

from the hand of your enemies.

11  Now imany nations

are assembled against you,

saying, “Let her be defiled,

and jlet our eyes gaze upon Zion.”

12  But kthey do not know

the thoughts of the Lord;

they do not understand his plan,

that lhe has gathered them as sheaves to the threshing floor.

13  Arise and thresh,

O daughter of Zion,

for I will make your horn iron,

and I will make your hoofs bronze;

you shall beat in pieces many peoples;

and mshall devote3 ntheir gain to the Lord,

their wealth to othe Lord of the whole earth.

b Jer. 8:19

c [Isa. 3:3]

d Jer. 6:24

e [John 16:20, 21]

2 Or push

f [ch. 2:13]

g Isa. 39:6, 7

h See Isa. 44:22, 23

i Zech. 12:3

j ch. 7:10; Obad. 12

k [Isa. 10:7]

l [Joel 3:13; Hab. 3:12; Matt. 3:12; Luke 3:17]

m Lev. 27:28

3 Hebrew devote to destruction

n Isa. 23:18

o Ps. 97: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미 4:9–13.

 

9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10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11 이제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12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13 딸 시온이여 일어나서 칠지어다 내가 네 뿔을 무쇠 같게 하며 네 굽을 놋 같게 하리니 네가 여러 백성을 쳐서 깨뜨릴 것이라 네가 그들의 탈취물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며 그들의 재물을 온 땅의 주께 돌리리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미 4:9–13.

 

 

앞서 4:6-8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을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을 말했다. 하지만 이제 예루살렘이 받을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지자는 유다가 이제(now) 겪게될 고통과 그때(then) 누리게될 회복의 영광을 대조하고 있다. 이는 훗날 하나님께서 이루실 회복을 기대하며 지금 닥칠 고난을 이겨내라고 말하는 것이다.

9, 10, 11절은 반복적으로 ‘이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상황의 전환을 나타낸다.  

 

9-10절) 왕이 없어졌고 모사가 죽었으므로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속에 부르짖느냐? 딸 시온은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 것이다. 이제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베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9절 본문에서 왕과 모사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본문은 달리 해석된다. 먼저 왕과 모사를 하나님으로 볼 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리더십으로 볼 수 도 있다. 전자로 본다면 하나님이 죽지 않았는데 네가 왜 울부짖느냐라는 질문이며 후자로 볼 경우 산헤립에게 공격을 받아 지도자를 잃고 방황하게 될 예루살렘의 처참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회복의 미래를 노래한 이후에 다시 임박한 암울한 현실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왕을 잃는다는 것은 온 국민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제 10절에서 선지자는 시온에게 해산하는 여인처럼 진통할 것을 요구한다. 새시대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해산의 고통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9절이 절망의 부르짖음이라면 10절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소망의 부르짖음이 된다. 10절에서 ‘힘들여 낳을지어다’라는 표현은 산파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산모들을 격려하는 말이다.   

10절에서 회복은 3단계로 진행된다. 1) 성읍에서 나가서, 2) 들에 거주하며, 3)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게 된다. 

1) 성읍에서 나간다는 것은 예루살렘 도성을 떠나는 것을 뜻한다. 

2) 들에 거주한다는 것은 광야에서의 삶을 연상시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40년동안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전에 광야에서 머물렀던 것처럼 광야에서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함을 말해준다. 

3) 바벨론에 들어간다는 것은 유다 사람들이 본국을 떠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감이 도리어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가오는 이스라엘의 앞날이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이 포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바벨론의 포로생활은 고난이요 심판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고난의 시기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아픔인 것이다. 

 

4:9 This verse can be understood in two ways (or even in one or two additional ways, according to a few commentators). First, anticipating the results of the prophesied Babylonian exile of v. 10, Micah asks rhetorical questions concerning the loss of a Davidic king in Jerusalem. He pictures its citizens as lamenting their forthcoming loss of the kingdom of Judah and its king. “The loss of the king was a much more painful thing for Israel than for any other nation, because such glorious promises were attached to the throne, the king being the visible representative of the grace of God, and his removal a sign of the wrath of God and of the abolition of all the blessings of salvation which were promised to the nation in his person.”71 (Cf. Lam 4:20.) King Jehoiachin would be taken prisoner to Babylon by Nebuchadnezzar, king of the Neo-Babylonian empire. Nebuchadnezzar would also have King Zedekiah’s eyes put out. Zedekiah too would be taken captive to Babylon. “Counselor” here is simply another word for “king.” In fact, counseling was one of the functions of ancient Near Eastern kingship. (See Isa 9:6–7 for the Messiah as both king and counselor par excellence.) The pain of Jerusalem’s people over such deprivation will be so intense that it is compared to that of a woman in labor and about to give birth (cf. Jer 4:31; 6:22–24).

Second, “king” and “counselor” can be taken as references to God (in that case, they should be capitalized). There is considerable support for this understanding. In v. 7 it is the Lord who is the King. In v. 12 he is presented as Counselor. In Jer 8:19 similar rhetorical questions are asked with God as the referent: “Is the Lord not in Zion? Is her King no longer there?” In this second interpretation of the verse, facing the Assyrian threat at that time, Micah is rebuking his people for their panic and failure to trust in God, their heavenly King. This second view is held by B. Waltke (who follows B. Renaud), H. Wolff, and E. Pusey.

The first view, on the other hand, is preferred by L. Allen, D. Hillers, W. Kaiser, C. Keil, J. Mays, T. McComiskey, C. Naegelsbach, J. Smith, and R. L. Smith (see the Bibliography for the bibliographical data on all these authors). Three primary reasons are usually cited for that preference: (1) If the second view is correct, it seems strange for Micah to rebuke the people’s pain like a “woman in labor” (v. 9), then to command them to writhe in agony “like a woman in labor” in the next verse. (2) Again assuming the second interpretation, ʾābad (“perished,” v. 9) appears to be inappropriate for deity. (3) The first view provides a more natural, unified reading of the text in the immediate context, for then the prophesied event and time frame would be the same in both verses. All things considered, the first understanding seems slightly favored. Incidentally, the contention of some that melek (“king”) is not used in this book of a human king is demonstrably incorrect, since it is used of Balak in 6:5.

71 Keil, Minor Prophets, 1:464–65.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90–91.

 

10절에서 속량하다라는 단어는 ‘가알’이다. 이는 구속하다, 복수자의 의미를 지닌다. 

Even though the people of Judah would be thus exiled, the Lord would rescue and “redeem” them from the Babylonian captivity in a new exodus (cf. Isa 41:14; 48:17, 20). So the deliverance would come not at Jerusalem but “there” (in Babylon), repeated for emphasis. The Hebrew verb for “redeem” here is gāʾal. It is familiar to many Christians in its participial form, commonly Anglicized as goel (“kinsman-redeemer”). The Old Testament picture of such a redeemer is that of an obligated family protector. The role of Yahweh as Goel (Redeemer) is one of the motifs of Micah’s contemporary, Isaiah. The Lord is portrayed in the Book of Isaiah as the perfect Family Protector of Israel. (1) He is related to Israel as Father (63:16; 64:8) and Husband (54:5). (2) He redeems their property, for he regathers them to their land (54:1–8). This function is applicable here in Mic 4:10. (3) He redeems their freedom (35:9; 43:1–4; 48:20; 52:11–12), also applicable here in Micah. (4) He avenges them against their tormentors (47:3–4; 49:25–26; 64:4), also applicable here (see the next pericope). (5) He secures their posterity for the future (61:8–9).72 Judah’s redemption and restoration to their land here would be effected through Cyrus the Great, king of Persia (Isa 44:24–45:7). The ultimate Goel, of course, is Christ the Redeemer.73 Through his redemptive work people are brought from distress to an even greater deliverance.

72 For a complete study of Hebrew words for “salvation,” see J. F. A. Sawyer, Semantics in Biblical Research (London: SCM, 1972), 28–88.

73 See NIVSB, Introduction to Ruth: Theme and Theology; see also Ruth 2:20 n.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91–92.

11-13절) 많은 이방 사람들이 모여서 너를 치며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보기 원한다라고 한다.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의 게획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곡식 단을 타작마당에 모음같이 그들을 모으셨으며 딸 시온에게 일어나서 칠지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강하게 하심으로 여러 백성을 치게 하실 것이다. 이로 인해 탈취물을 여호와께 드리게 될 것이다.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사건은 무엇인가? 많은 이방 사람들이 시온을 더럽게 하는 이 사건을 586년의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701년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용병을 이끌고 유다를 공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한 사건으로 해석한다. 

시온을 공격하여 이를 더럽히는 열방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는 것이다. 자신들이 역사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을 용납할 수가 없다. 자신들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이 하나님을 대적한 이들이 결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깨뜨려지게 될 것을 선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적들이 주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한 행동이 도리어 자신들의 심판을 가속화 시키게 된 것이다. 열방에 의한 시온의 침략은 하나님의 큰 그림 속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침략군에게 대항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틀을 짓밟아 승리하도록 그들의 ‘뿔’을 쇠 같게 하시고 그틀의 굽’을 놋쇠 같게 하실 것이다(13 절). 뿔은 고대 근동 예술과 문헌들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힘을 상정한다(신 33:17; 삼상 2 :10; 삼하 22:3; 시 22:21; 75:10; 132:17; 48:25; 2:3). 하나님께서 시온의 뿔을  같게 하신다는 것은 주의 백성이 그 누구도 대적할 없는 막강한 능력을 갖게 될 것을 뜻한다(cf. 왕상 22:11). 굽은 보통 달리는 힘이나 짓밟는 력을 뜻하는데 (cf. 사 5:28; 햄 47:3; 젤 26:11), 하나님께서 이들의 굽올 놋쇠로 만드신다는 것은 시온의 강인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쇠 뿔과 농쇠 굽은 시온의 무적을 상징한다. 이처럼 시온은 소가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짓밟듯이 열방을 짓밟을 것이다. 이처럼 시온은 자신들에게 두려움을 선사했던 이들에게 두려움을 선사한다. 이어 대적들이 폭력을 써서 탈취했던 재물을 약날하여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친다. 

본문 13절에 사용된 ‘여호와께 드리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헤렘’이라는 명사의 동사형으로 진멸하다, 파괴하다, 봉헌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시온을 더럽혔던 이방이 이스라엘을 약탈하여 자신의 신들에게 바쳤던 것을 다시금 여호와께 바칠 것을 명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전히 바치는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역전의 명수이시다. 요셉의 삶이 그러했고 십자가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사단은 자신들이 승리했다라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 성취된 것이다. 

 

4:11 This is the second of three consecutive oracles of judgment and salvation introduced by ʿattâ (“Now”). Opinions are divided concerning the “many nations.” Some refer them to mercenaries from many nations in King Sennacherib’s Assyrian army (701 b.c.). Others argue for the same, but in King Nebuchadnezzar’s Neo-Babylonian army (588–586). Still others support the period of the Maccabees. It is possible that all these could be typological stages in the progressive fulfillment of the whole prophecy. The final, complete stage, however, seems to be what Micah had primarily in view, namely, an eschatological onslaught against the Jews akin to the apocalyptic scene depicted in such passages as Isa 29:5–8; Ezek 38–39; Joel 3:1–3, 12–17; Zech 12:1–9; 14:1–5, 12–15; Rev 16:12–21.74 The intent of the hostile nations is to “defile,” pollute, desecrate, or profane God’s holy city (“you”), holy land, and holy people by trampling on them with pagan feet. Those who are unholy desire to render the holy also unholy, like themselves, then to gloat over it.75 But those who devastate Zion and its people will in turn be devastated (vv. 12–13).

74 For more details see Barker, “Zechariah,” 680–82, 688–91, 694.

75 The verb rendered “gloat” is חזה, “see.” It may express the act of gazing at something with enjoyment or disdain (Ps 27:4; Song 6:13 [7:1]; J. A. Naudé, “חזה,” NIDOTTE 2:57). The nations will enjoy the sight of defiled Jerusalem. For the use of the singular verb (וְתַ֥חַז) with the dual subject (עֵינֵֽינוּ) cf. GBH § 150d.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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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In him we have rredemption sthrough his blood, tthe forgiveness of our trespasses, u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race, which he lavished upon us, in all wisdom and insight vmaking known3 to us the mystery of his will, naccording to his purpose, which he wset forth in Christ 10 as a plan for xthe fullness of time, yto unite all things in him, things in heaven and things on earth.

q Col. 1:14

r Rom. 3:24; 1 Cor. 1:30; [ch. 4:30]

s See Acts 20:28

t See Acts 2:38

u [ch. 3:8, 16; Col. 1:27]; See Rom. 2:4

v See Rom. 16:25

3 Or he lavished upon us in all wisdom and insight, making known …

n [See ver. 5 above]

w [ver. 11; Rom. 8:28; 9:11]

x See Mark 1:15

y Col. 1:16, 20; [ch. 3:15; Phil. 2:9, 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7–10.

 

7절) 그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곳 죄사함을 받았다. 

속량, 구속이란 누군가를 포로 혹은 노예의 상태로부터 값을 치르고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최고의 예시는 바로 출애굽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의 상태로부터 구속하셨다.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구속의 특성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죄책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과이며, 보혈은 속죄의 희생으로서 그분의 죽음을 의미한다. 

Redemption denotes ransoming someone from captivity or from slavery. The supreme OT example was the exodus, where God redeemed Israel from slavery in Egypt (see Ex. 15:13; Deut. 7:8; 2 Sam. 7:23; Mic. 6:4). Forgiveness of our trespasses explains the nature of redemption: Christians are freed from slavery to sin and guilt. This was effected by Christ’s blood, which means his death as an atoning sacrifice (see also Rom. 3:24; Eph. 1:14; 2:13; 4:30; Heb. 9:1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2.

 

8절) 그분의 은혜는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넘치게 하셨다. 

 

9절) 그분의 기뻐하심, 목적을 따라서 그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는데 이는 때가 찬 경륜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비밀은 ‘미스테리온’으로 전에는 감추어졌거나 단지 애매하게 알려진 것이지만 이제 분명하게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한 계시를 의미한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은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Mystery as used in Scripture (Gk. mystērion) refers to the revelation of something that was previously hidden or known only vaguely but now is more fully made known (see note on Col. 1:26–27). The mystery of God’s will, now revealed in Christ, is “to unite all things in him” (Eph. 1:10; see also 3:3–1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3.

본문의 때가 찬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무르익은 때를 의미한다.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그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 

통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케팔라이오’로 이 문맥에서 세가지 강조점을 지닌다. 1)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통치자이다. 2) 그리스도는 매듭을 짓거나 일관되고 의미있는 전체를 가져온다. 3) 그리스도는 죄때문에 혼란에 이른 우주를 조화롭게 회복한다. 본질적으로 앞절, 9절에서 말하는 신비의 내용은 살아있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모든 창조물을 요약하고 통일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bring unity. Greek anakephalaioō. A significant term that conveys three emphases in this context: (1) Christ is the head or ruler (v. 22), (2) Christ “sums up” or brings things into a coherent and meaningful whole, and (3) Christ restores harmony to a universe that has come into chaos because of sin (Col 1:20). In essence, the content of the “mystery” (Eph 1:9) is God’s will to sum up and unify all creation, both the animate and inanimate, under Christ’s headship.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0.

 

통일이라는 단어는 이 문맥의 핵심 주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인 화해를 가져오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은 하늘과 땅위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의 역사에 대한 중심축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백성을 구속하셨고 모든 적대적인 세력을 잠잠케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때가 찬 경륜은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계획 ‘오이코노미아’는 때가 되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있는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으로 우리가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뜻의 비밀이다. 그 비밀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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