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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When no zbush of the field1 was yet in the land2 and no small plant of the field had yet sprung up—for the Lord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on the land, and there was no man ato work the ground, and a mist3 was going up from the land and was watering the whole face of the ground— then the Lord God formed the man of bdust from the ground and cbreathed into his d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ethe man became a living creature.

y ch. 1:1

z [ch. 1:11, 12]

1 Or open country

2 Or earth; also verse 6

a ch. 3:23

3 Or spring

b ch. 3:19, 23; 18:27; Ps. 103:14; Eccles. 12:7; 1 Cor. 15:47

c ch. 7:22; Job 33:4; Isa. 2:22

d Job 27:3

e Cited 1 Cor. 15:4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2:4–7.

 

 

- 얀 브뤼헐, 인간을 만드시는 하나님

 

앞선 1:1-2:3의 기록이 7일간의 기록의 요약이라면 2:4-25에 등장하는 내용은 여섯째날 인간 창조에 대한 내용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마치 앞선 1장에서 파노라마 사진을 통해서 전체를 조망했다면 이제 2장에서는 줌인을 해서 한 사건, 인간 창조와 에덴 동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묘사하면서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초월적인 존재로서 묘사했다면 2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곳에 내재하시며 인격적인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두 하나님에 대한 묘사는 서로 반하기 보다는 균형을 맞추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또한 1장은 인간의 왕적인 특성을 강조했다면 2장은 인간의 제사장 신분에 초점을 맞춘다. 

The Man and Woman in the Sanctuary of Eden. The panoramic view of creation in ch. 1 is immediately followed by a complementary account of the sixth day that zooms in on the creation of the human couple, who are placed in the garden of Eden. In style and content this section differs significantly from the previous one; it does not contradict anything in ch. 1, but as a literary flashback it supplies more detail about what was recorded in 1:27. The picture of a sovereign, transcendent deity is complemented by that of a God who is both immanent and personal. The two portrayals of God balance each other, together providing a truer and richer description of his nature than either does on its own. In a similar way, whereas ch. 1 emphasizes the regal character of human beings, ch. 2 highlights their priestly statu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2.

 

4절) 하늘과 땅의 내력, 본문에 내력이라고 표현된 단어는 generation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톨레도트’이다. 

 

창세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족보, 계보(톨레도트)는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에서 이 표현은 11번 등장한다.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 (2:4; 5:1 with slight variant;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이단어는 언급되는 대상이나 이름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자손에게 초점을 맞춘다. 70인역에서 창세기의 헬라어 표현으로 genesis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히브리어 ‘톨레도트’인 generations에서 나왔다. 

이 구절들은 마치 돋보기의 역할을 한다. 전체의 그림속에 작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세기의 족보들

본문의 ‘톨레돗’은 영어 표현으로는 모두 generations라고 번역되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내력, 계보, 족보라고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LORD GOD)의 이름이 등장한다. 앞서 엘로힘이라는 단어에서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여호와가 소개된다. 여호와는 영어성경에서 주(LORD)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여호와’라는 표현이 나오면 이를 감히 발음하지 못해서 ‘아도나이’로 바꾸어서 읽었던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여호와를 단어의 사용은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성품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5-6절) 본절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본문의 땅(land, 에레츠)는 땅 전체(earth)를 가리킨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의 땅은 아직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상태였다.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지 않았기에 마른 땅이었고 땅도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히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비를 내리지 않으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직 땅위에 내리지 않았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6일 창조의 완성은 인간의 창조로 이루어진다. 인간이 땅을 갈고 경작함으로 땅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1) 땅에 식물이 없음

2) 하나님의 비와 사람의 노동의 부재

3) 땅에서 수증기가 나와 표면을 적심

하나님의 은혜의 부재와 땅을 경작할 인간의 부재가 식물의 부재의 원인이다. 

 

창 1:2과 2:5-6의 주제상의 공통점

 

본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 땅은 ‘에레츠’, ‘싸데'이고 경작할 사람이 없는 땅은 ‘아다마’이다. 경작을 위해서는 땅을 갈고 물을 공급해주어야 했다. 물을 공급해주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을 마련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람의 부재는 무생산으로 연골된다. 

 

본문에서 안개로 번역된 ’에드’는 NIV에서 시내들(streams)로 번역하고 있다. 이 표현은 욥 36:27에 단 한번 등장한다. 수메르어 ‘이드’는 지하에 있는 신선한 물을 가리키고, 아카드어 ‘에두’는 물이 모여있는 곳에서 일어난 물결이나 큰 파도를 가리킨다. 츠무라라는 학자는 본문에서 ‘에드’를 주요 하천 시스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보고 있다. 이는 비와는 다른 것으로 고대 근동에서 물이 땅을 비옥하게 하는 대표적인 두 방식(하천의 범람과 비)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Two connections have been suggested: one to the Sumerian id, which refers to subterranean fresh waters (followed, e.g., by Westermann and Wenham); the second to Akkadian edu, which refers to waves or the swell of a body of water (followed, e.g., by Speiser and Hamilton).

Tsumura makes a case that ʾed refers (among other things) to the regular inundation of the major river systems.4 As such it stands in contrast to rain, so that both represent the two major ways that water fertilized the land in the ancient Near East. The inundations would be mentioned in relation to people working the ground because the annual inundations were only made useful by the digging of irrigation canals to channel the water profitably. It is also true that the inundation rises (to match the verb in v. 6). In Akkadian usage edu was believed to arise from the apsu, the subterranean waters.5

4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110–16.

5 Ibid., 111–12.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164–165.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고 이에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앞서 1:26-28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2:7에서 하나님은 토기장이처럼 흙으로 사람을 직접 만들어 그 코에 입맞춤을 하듯이 생기를 불어넣으신다. 

본문에서 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다마’이다.(2장에서는 땅(에레츠)와 지면, 땅(아다마)가 모두 사용된다.) 이 땅(아다마)라는 단어에서 사람(아담)이 나왔다. 아담은 먼저는 사람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이면서 첫 인간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기도 하다. 

본절에서 지으셨다라는 표현은 ‘야차르’라는 동사로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특별한 형태의 토기를 빚어내는 것을 가리민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을 지으실 때 직접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사람이 당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생명의 숨(신체적, 정신적, 영적)을 불어 넣으신 것이다. 본문에서 생령은 생물(living creature, 네페쉬 하야)로 앞서 창 1:20, 24절에서 바다와 땅의 생물을 지칭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비슷한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생기를 인간에게 불어 넣어주심으로 자신안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셨다. 이러한 육체의 생명을 주신 것은 영적인 생명의 수여를 기대하게 한다. 생명이 아들안에 있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God has life in himself and imparts life to his creatures. The impartation of physical life anticipates the impartation of spiritual life (John 1:4; see 1 Cor. 15:45). Life is in the Son (John 5:21, 26; 1 John 5:12) and comes to us through the Spirit (John 3: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53.

 

생기의 ‘기’는 히브리어로 ‘네사마’(נְשָׁמָה)이며 ‘바람,’ ‘호흡,’ ‘영’이란 뜻을 가지고 창세기 1:2의 루아흐(רוּחַ)와 동의어적인 표현이다(욥 27:3, 사 42:5). 창세기 1:2에서 지구를 덮고 있던 그 영을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얼굴을 흙으로 빗어진 인간의 얼굴에 맞대고 자신의 입에서 그의 코에 인공 호흡하듯이 불어 넣고 있다.12) 그 결과 사람은 생령이 되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12)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197. Lyn Bechtel은 창세기 2:4–3:24을 아담의 탄 생에서 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Lyn M. Bechtel, “Genesis 2.4B–3:24: A Myth about Human Maturation,” JSOT 67 (1995): 3–26.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87–88.

 

본절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땅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설명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창조의 화룡점정이 바로 인간의 창조였다. 인간이 없는 땅은 아직 생산을 위한 비, 하나님의 은혜가 부재한 상태였고 인간의 창조로 생산하지 못하던 땅이 생산이 가능한 땅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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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p“What profit is an idol

when its maker has shaped it,

a metal image, qa teacher of lies?

For its maker trusts in his own creation

when he makes rspeechless idols!

19  sWoe to him twho says to a wooden thing, Awake;

to a silent stone, Arise!

Can this teach?

Behold, it is overlaid with gold and silver,

and uthere is no breath at all in it.

20  But v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wlet all the earth keep silence before him.”

p Isa. 44:10

q Jer. 10:8, 14; Zech. 10:2

r Ps. 115:5; 1 Cor. 12:2

s ver. 6, 9, 12, 15

t See 1 Kgs. 18:26, 27

u Ps. 135:17; Jer. 10:14

v Ps. 11:4; Mic. 1:2

w [Zeph. 1:7; Zech. 2: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합 2:18–20.

 

마지막 화에 대한 경고에서는 앞선 4개의 구조와는 다르게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이 두번째 절에 등장한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 아닌 다른것들을 섬기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생기가 없는, 인간이 부어 만든 것들을 신으로 여기며 섬기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강해보이는 무언가에 의존하고 도움과 보호를 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사람들은 부, 중요한 사람들, 무력, 아름다움, 인간적인 재능들을 뿐만 아니라 악을 의지한다. 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형제나 친구들을 의지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는 완전하지 않고 종국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To trust “is a concept of central theological importance in the Old Testament. It expresses that which is, or at least should be, central in people’s relationship with God.”70 Trust “almost always refers to a process at the foundation of existence. Whoever trusts, relies on something, and everything depends upon the reliability of the other; one seeks protection, and one stands or falls with that on which one relies.”71 God calls on his people to trust him at all times (Ps 62:8; cp. 115:9–11; Isa 26:3–4; 30:15). People are trusting folk, but choose the wrong things in which to place their trust—riches (Job 31:24; Prov 11:28); important people (Ps 146:3; cp. Jer 17:5–8); military fortifications (Deut 28:52; Jer 5:17); beauty (Ezek 16:15); in personal abilities (Prov 3:5; 28:26). One can even trust in evil (Isa 30:12). “The logic of biblical monotheism requires that all these things be used in the service of God and not set up as alternatives to him.”72

Trust is not confined to God in the biblical revelation. Spouses (Prov 31:11), brothers (Jer 9:4) and friends can be trusted (Mic 7:5), but only in relationship to an ultimate trust in God. This trust in God is not an illusory, spiritual emotion. It relates to life crises, especially national ones (Pss 22:4–5; 25:1–2; 28:7; 31:14–15; Isa 36–37; Jer 39:18). But even trust in Yahweh can be misplaced if it is only ritualistic and not connected to genuine obedience (Jer 7:3–15).73 Trust in God wipes away all fear (Pss 56:5, 12; 25:2; 21:8). “Israelite tradition recognizes and demands an absolute, exclusive devotion to Yahweh; this trust in Yahweh includes hope of salvation (Job 11:18) and faith in the God of the fathers (Ps 22:4f.).”74 Like Habakkuk, the prophets mocked the Babylonians for their worship of idols and the people of Judah for wanting to be like the Babylonians in their worship.75

70 R. W. L. Moberly, “בּטח,” NIDOTTE 1:644.

71 E. Gerstenberger, “בטח bṭḥ to trust,” TLOT 1:228.

72 Moberly, “בּטח,” 645. Note Gerstenberger’s statement (“בטח bṭḥ to trust,” 229) that the OT assumes “that one can successfully place confidence only in Yahweh, that no other entity can be an ultimate object of trust.”

73 See Gerstenberger, “בטח bṭḥ to trust,” 229.

74 Ibid., 230.

75 Isaiah and Jeremiah scorned the Babylonians for idolatry. Of course, these prophets turned the lessons to be learned to the people of Israel and Judah who should have known better. Isaiah described the foolishness of idolatry in much the same way as Habakkuk, describing the making of an idol by cutting down a tree, carving the wood and finally overlaying the wood with metal (Isa 44:9–20). Isa 46:1–7 described two Babylonian gods being carried into exile before the invasion of Cyrus the Persian. Bel and Nebo sat helpless before the invader. Isaiah’s message decried the foolishness of worshiping gods which have to be carried. Better to worship the God who can carry you! Jeremiah coined a word for the idols—they were hăbālîm, only breath. For Jeremiah, the idols lacked the power to do good or to do evil (Jer 10:5). They were nothing.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6–347.

 

우리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긴다. 그 우상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금이나 은, 나무나 돌에 새긴 형태이기도 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돈, 명예, 권력, 아름다움, 건강, 미래에 대한 안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우상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안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앞에 잠잠히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문제는 우리들은 즉각적인 효과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줄 것을, 저 멀리 계신 하나님, 마치 지금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 침묵하고 계시는듯한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영향을 주고, 즉각적으로 효과를 제공해줄것과 같은 것들을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들어야 한다. 

 

18절) 우상 만드는 자가 그것을 만들었을때 그 우상, 또는 거짓 스승이라하는 금속으로 만든 우상은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가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만들었을때 그 자신이 만든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부어서 만든 말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상숭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째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둘째 우상은 거짓만을 가르친다. (렘 10:5) 세번째 우상을 만드는 것은 그 예배자가 그 자신의 이미지로 신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들이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신이 우리 자신의 모습에 제한되기 때문에 항상 작게 된다. 네번째 우상은 말하거나 인도함을 주지 못한다. 우상은 말하거나 듣거나 인도하거나 구원해주지 못한다. 

 

19절) 나무로 만든 우상에게 깨어라 혹은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보라 이것이 금과 은으로 덮여져있지만 그 안에는 생기가 없다. 이것들이 가르칠 수 있느냐? 

본문에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생명을 의미한다. 우상은 생명이 없는 존재이다. 생기는 우상이 인도하거나 계시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우상은 인간의 깊은 필요에 대해 답할 능력이 없다. 생기 없음은 우상을 창조자보다 약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진정한 하나님으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The last line is more emphatic than the NIV rendering reflects. “There is no breath in it at all” would more adequately reflect the sense. In this context, “breath” (rûaḥ) meant life. An idol was a lifeless form. Snaith pointed out the peculiar significance of rûaḥ. He saw three particular points of emphasis. It stood for power, life, and came from God in contrast to coming from man.78 Breath could refer to the idol’s inability to give guidance or revelation. It lacked the ability to answer to the deepest needs of human beings. Lack of breath made the idol weaker than its “creator,” for the true God had placed breath in man’s nostrils (Gen 2:7).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78 N. H. Snaith, The Distinctive Ideas of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46), 183–203.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9.

 

20절) 여호와는 그분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분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침묵하고 생기없는 우상들과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분은 무가치한 우상들에게 드려졌던 존경과 경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모든 이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모든 만물에 대한 그분의 주재권을 깨닫을 것을 깊이 생각하도록 침묵을 명령받는다. 

But the Lord. There is a tremendous contrast between silent, inanimate idols and the awesome living God who sits enthroned in heaven and rules over the earth. He is the One who deserves the honor and reverence bestowed on worthless idols (see Isa. 41:1; Zeph. 1:7; Zech. 2:13). Silence is commanded so that everyone will consider God’s awesome nature and realize his sovereignty over all creation (see Zeph. 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25.

 

본문에 나오는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성전을 의미한다. 하늘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그분 홀로 영광을 받으셨다. 그룹 천사들 위에서 좌정하셔서 다스리시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반응은 거룩한 침묵이다. 잠잠하라는 단어는 ‘쉿’하고 말하는 의성어적 표현이다. 이 구절은 신이 아닌 사람들과 하늘에서 인간의 필요와 인간의 질문들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사이의 대조를 그려낸다. 하박국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가 하늘의 하나님의 성전에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장의 마지막 구절인 20절에서는 마지막 화에 대한 적절한 결론이자 일련의 모든 화들에 대한 결론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기 위해서 그의 망루로 후퇴하고 하나님의 침묵에 초초한 선지자를 가리킨다. 이제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때에 그분의 입을 여실 것을 기꺼히 기다릴 것을 자신과 모든 세계를 향해 ‘쉿’하고 요청합니다. 이 장의 마지막 구절은 독자들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 좌정하시고 이후 하박국의 기도에 독자들이 준비할 것을 지시한다.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함이 입증되었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행동과 그의 신학을 화해시킬 수 있다. 그분의 분명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분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예배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경외심 가득한 침묵속에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For Habakkuk, the “temple” probably meant not only the temple in Jerusalem but also the heavenly sanctuary (Mic 1:2). From the heavenly temple, the Lord ruled over heaven and earth and received the honor due him alone. The proper response to such a God who is enthroned above the Cherubim is awed silence. The word for “keep silence” is “an onomatopoeic interjection with a force much like the English ‘hush!’ (cf. Zeph 1:7).”79 The verse pictures the contrast between those who are no gods and the one who is in heaven ready to respond to human need and to human questions. Habakkuk himself knew from experience that he could take his questions to God’s temple in heaven.

The last verse of the chapter serves as a fitting conclusion to the final woe as well as a conclusion to the entire series of woes.80 Likewise, it points back to a prophet making demands of God, asking questions of God, and retreating to his watchtower to wait for God’s answers, impatient at God’s silence. Now the prophet hushes himself and all the world, willing to let God act in God’s time and willing to wait for God to open his mouth when God chooses. This final verse of the chapter points the reader to the holy God enthroned in his holy temple and prepares the reader for the prayer of Habakkuk in chap. 3.“Finally, God’s holiness was vindicated, and the prophet was able to reconcile his theology with God’s actions.”81 “Despite his apparent silence, he still remains with them; he has not lost control of their destiny. One should wait upon him in the awed silence that is often the most appropriate expression of true worship.”82

79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209.

80 Patterson sees v. 20 as “the chief lesson to be learned from the whole discussion. Verse 20 forms an inclusio with v. 4 that reveals the underlying thesis and its implication for the entire section: The Lord is a just and holy God who deals righteously with all people and is actively present in the flow of earth’s history; therefore, He is to be acknowledged as God by all” (ibid., 205).

81 Barber, Habakkuk and Zephaniah, 20.

82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128.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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