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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하나님의 해결책과 나의 응답

 

우리는 지난 시간 세상이 깨진 이유와 죄의 본질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죄로 가득찬 세상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심리적, 정서적, 육체적인 어려움,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의의 문제로 인한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로부터 인류와 사회 공동체의 문제 속에서 살아가며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깨어진 이 세상속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해결책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겟습니다. 

 

1. 하나님의 해결책

앞서 말한대로 우리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존재의 중심이신데 그 분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고 내가 그 자리에 앉아서 주인되려고 하는 자기 중심성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개인과 사회와 인류전체가 심각한 문제 속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로 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담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성육신 하심으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겪을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하신 일 첫번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주심.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신이시므로 인간과 다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우리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와 소통하셨습니다. 바로 성경의 복음서는 그 예수님의 이야기로 충만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인간이 되시고, 우리와 함께 거니시고, 우리의 생사고락을 경험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남녀노소, 온갖 병자들, 평범한 농부와 어부들, 사회의 저명인사와 부자와 거지, 창녀와 매국노,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셔서 모든 이들은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깊은 연민과 사랑으로, 해학과 눈물로, 촌철살인의 깨우침과 무서운 경책으로 이들을 대하셨습니다. 

이 모든 대화와 가르침, 이적을 행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하신 일 두번째,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

자신의 인격과 삶, 사역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깨진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회복은 예수님이 예고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놀랍게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의 기록중에 30-40%가 그분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고하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반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은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장 중요한 미션이 바로 그분의 죽으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배반학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혀서 주인 행세하는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대가를 예수님 자신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셔야 했을까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실컷 나 중심으로 살다가 갑자기 ‘아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다시 내 주인이 되어주세요’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심각한 죄를 지었는데 ‘아 그것 없던 걸로 해주세요’라고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성품중에 정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정의의 입장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어놓고 용서를 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신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참된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2. 인격적 반응과 그에 따르는 축복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으로 나와 인간사회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인격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적인 선택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이야기를 복음, 기쁜 소식(gospel, good news), 좋은 소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성경을 통해서, 교회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에게 유효해지기 위해서는 이것을 나의 이야기로 인격적으로 반응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바쳐서 너희를 사랑했다. 내 사랑을 받아주겠니?’라고 물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대는 단지 우리를 사랑해서 초대하시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에 대한 정의로운 대가를 자신이 지불하셨으니, 이제는 우리에게서 정의로운 분노를 거두시고, 우리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더 이상 너희 잘못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 내가 다 책임졌으니, 너희는 이제 자유롭게 나에게 반응해라. 내 사랑을 받아들여 나의 선한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첫번째, 무조건적인 사랑

거대한 우주 속의 우리, 빅뱅 이론, 무한한 우주 속에서 우리 인간을 택하신 하나님

 

태양 앞에서 모든 빛이 상대화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게 되면 우리는 더이상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적인 존재가 나를 사랑하시고 가치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의 배경, 학력, 외모, 능력, 연봉, 직장, 건강 그 무엇으로도 평가받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가는 내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내면에 들어와서 그것을 누릴 수록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 두번째, 궁극적인 삶의 목적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누리기 시작하면 당연히 우리 안에는 새로운 의욕과 동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 아픈 세상에서, 이 깨진 세상에서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하다 죽을까? 무엇을 해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동참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온 세상 구원 계획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3. 우리의 인격적인 반응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속에 함께 동참하는 여정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격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우리를 이 여정에 끌어들이지 않으십니다. 

1)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 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

- 죄, 자기 중심성을 인정하는 것

 

2) 죄인된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모든 죄책을 대신 져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 회개는 방향 전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책임을 지시고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3) 이제 하나님께 돌아서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살아가는 것,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가운데 내주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4.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반응

1) 기뻐합니다.(rejoice)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알기에, 그 놀라운 기쁜 소식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2) 재헌신합니다.(recommit) 

우리들은 과거에 하나님을 정말 받아들이고 그분을 주인으로 여기고 따라가면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떤 시점에, 어떤 계기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되어 세상의 성공을 좇아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의 소식을 듣고 다시금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며 재헌신하는 것입니다. 

 

3) 영접합니다.(receive) 

영접이란 지금가지 나눈 모든 이야기를 내면에 온전히 심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래 계획, 그리고 깨진 세상과 그 원인인 죄, 하나님이 주신 해결 방법에 진실로 동의해서 마음의 주인 자리에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거듭났다’, ‘중생했다’라고 표현삽니다.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정말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왜 죄인인지 깨달아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을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새로운 삶의 살겠다고 무릎 꿇은 적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 일생일대의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4) 좀더 탐구합니다.(research)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깨진 세상, 하나님의 해결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하나님께 인생을 드리기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아직도 고민이 좀더 필요한 것 같다고,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실한 질문과 탐구는 귀한 일입니다. 억지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탐구하고나서 믿겠다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믿지 않겠다는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평생 동안 읽고 공부해야 할 책입니다.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는 성경의 방대한 이야기를 축약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앞에서 결단하기 위해서 들어야 할 이야기는 모두 이미 들었습니다. 정말 결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탐구를 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초청에 진지하게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5) 거절입니다.(reject)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인격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강제로 줄 수 없습니다. 받는 쪽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해야 사랑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수는 있지만 그 거절의 책임은 당연히 내가 져야 합니다. 

 

5. 기독교의 기본진리

1) 하나님이 나와 세상을 만드셨고 나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2)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주인의 자리에서 내몰아 버리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옳은 대로 살아가 심각한 문제에 빠졌고, 이렇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신이 중심이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3) 이 죄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시고 이 죄의 대가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4)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진실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감히 하나님께 돌아설 수 있는데, 이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게 돌아선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인데 이 이후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조적적인 사랑과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복음을 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Rejoice, recommit, receive, research, reject 5R중에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동참하시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여 이 깨지고 상처받은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깊은 다스림과 보살핌 가운데 성장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 나눔 질문

1. 당신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당신의 삶의 주인은 누구였으며, 어떠한 삶의 여정을 걸어왔습니까?

 

2. 당신은 다섯가지 반응(Rejoice, recommit, receive, research, reject)중 어떤 반응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반응에 따르는 인격적 결단을 내리고, 인도자와 함께 나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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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ting
Paul, aa servant1 of Christ Jesus, bcalled to be an apostle, cset apart for the gospel of God, which dhe promised beforehand ethrough his prophets in the holy Scriptures, concerning his Son, fwho was descended from David2 gaccording to the flesh and hwas declared to be the Son of God iin power according to the Spirit of holiness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Jesus Christ our Lord, through whom jwe have received grace and kapostleship lto bring about the obedience of faith for the sake of his name mamong all the nations, including you who are ncalled to belong to Jesus Christ,
To all those in Rome who are loved by God and called to be saints:
o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Ro 1:1–7.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고백하고나서 이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약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로마서가 구약(특히 이 약속)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2절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인 16:26절과 수미 쌍관을 이루고 있다.
Romans 16:26 (NKRV)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An important focus of Romans is the connection between the OT (especially its promises) and the gospel of Christ (3:21; 9:4–6; 11:28; 15:8–12). This verse and 16:26—“made known through the prophetic writings”—bracket the letter as a whol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291.


복음은 약속의 완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창세기의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깨뜨릴 것에 대한 것이나 오실 구원자를 예표하는 시편의 표현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등이 그러하다. 구약은 지속적으로 이 성취의 때가 올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구약안에서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를 약속하셨다.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그분의 메시지를 맏긴 사람들이다. 이후에 이 메시지를 기록하여 남기게 하셨고 바로 이것이 성경이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과 소통하시느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알리셨고 그들은 이를 성취할 목적으로 하나님이 드러내시기를 원하는 바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 결과 성경은 바로 거룩한  것이다.
The gospel comes in fulfillment of a promise. In Genesis, God spoke of the heel of the woman’s offspring crushing the serpent (Gen 3:15). Messianic psalms portray the coming deliverer (Pss 45; 72). Jeremiah spoke of a new covenant (Jer 31:31–34). The Old Testament continually points beyond itself to a time of fulfillment, the age to come. God made his promise “through his prophets” in the Old Testament. He entrusted his message to men chosen to speak for him. Beyond that, he allowed his message to be written down. What the prophets wrote became “Holy Scriptures.” Here we have a brief summary of the method God chose in order to communicate with his people. Scripture originated with God. He used prophets to communicate his will, and they accomplished that purpose by writing down what God was pleased to reveal. The result was Scripture that is holy.5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60.

신약과 구약이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시점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실은 바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
Both in the Old Testament and in the New Testament prophets are primarily persons who speak on the behalf of God (Moses, David, and Solomon, along with others, are called prophets), and not merely persons who foretell the future. In the present context the emphasis is on the fact that what God promised through the prophets has come true. The Holy Scriptures is a reference to the Old Testament (see 2 Timothy 3:15 where this same phrase occurs). More often the Old Testament is referred to simply as “the Scriptures” (Matthew 21:42; 22:29; 26:54; John 5:39; etc.).

Barclay Moon Newman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 to the Rom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3), 8.

본문은 복음의 핵심이 그의 아들에 관해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할때 너무 쉽게 신약의 내용에 한정해서는 안된다. 구약 전체를 토대로,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다룰때 이를 총체적으로 다루어내야할 것이다. 로마서는 지속적으로 그분의 약속과 구원의 계시를 중요한 주제로 이끌어 나간다.


본문에서 사용된 미리 약속하셨다라는 표현은 '프로에판겔로'라는 단어로 '프로'와 '에팡겔로마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는 미리 약속하다라는 의미이다. 본 단어에서 에방겔리온이라는 만화영화 제목이 등장한다. 이는 약속이라는 의미이다.
Paul now describes the gospel he has been sent to proclaim, noting three characteristics. First, he tells us it was promised beforehand in the Old Testament. Throughout Romans, Paul will be anchoring his theological points in Old Testament truth. This statement in verse 2 establishes the promise-fulfillment pattern that will dominate his use of the Old Testament. The verb is made up of two parts, promise and before, with the latter drawing out the main aspect of the promise, that it was given ahead of time through the prophets. The idea of promise is frequent in the New Testament (especially in the writings of Paul, who employs it twenty-two of the fifty-two times it is used in the New Testament) to describe the blessings of salvation (e.g., Gal 3:22; 2 Cor 7:1; Heb 4:1; 10:23). Cranfield (1975:56–57, from Barth [1959:12–13]) points out how this idea dominates the letter. Anchoring these truths in the previous revelation by God in the Old Testament gives Paul’s message special credence, providing a perfect introduction for an apostle the church had not yet met. The prophets here are undoubtedly not just those of the latter part of the Old Testament but would also include Moses (Acts 3:22) and David (Acts 2:30). It is important for us to realize that the Bible as a whole, and not just the New Testament, forms the gospel.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29–30.

‘복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은 ‘좋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부사인 유(εὐ)와 ‘사자, 천사, 목사, 전령,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명사 앙겔로스(ἄγγελος)에서 파생된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 복음을 전파하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다, 기쁜 소식을 보이다, 복음을 가르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유앙겔리죠(εὐαγγελίζω)의 명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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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emptation of Jesus
12 yThe Spirit immediately drove him out into the wilderness. 13 yAnd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being ztempted by aSatan. And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and bthe angels were ministering to him. Jesus Begins His Ministry
14 cNow after John was arrested, Jesus dcame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spel of God, 15 
and saying, e“The time is fulfilled, and fthe kingdom of God is at hand;5 grepent and believe in the gospel.”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막 1:12–15.

12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 예수님의 시험 당하심에 있어서 궁극적인 주체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사탄이 시험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시험의 자리, 광야로 나아가신 것은 성령에 의해서 였던 것이다. 본문의 몰아내다라는 단어는 ‘엑발로’라는 단어로 마가복음에서 18번 등장하는 단어로 귀신을 쫓아낼때 주로 사용하던 단어이다. 
- This time (contrast v. 10) the NIV translates the word meaning “at once” or “immediately” (euthys). Mark used the verb ekballō a total of seventeen times, most often about exorcisms so that something stronger than “sent … out” is needed, something like “drove … out” (RSV, NRSV, REB) or “impelled” (NASB). The idea is that of divine necessity, not that Jesus was reluctant to go. The “desert” was the place of John’s preaching (vv. 3–4); it was also the place of Jesus’ temptat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4.

13절) 광야에서의 40일, 하지만 마가는 이 광야에서의 시험을 매우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 The “forty days” recalls Moses on the mountain (Exod 24:18; 34:28), Elijah’s journey to the sacred mountain (1 Kgs 19:8), Jesus’ instruction of his disciples (Acts 1:3), and perhaps even Israel’s forty years in the wilderness (especially Deut 8:2). The word translated “tempted” also means tested, and that is probably the primary idea here. “Satan” is the anglicized form of the Greek transliteration of a Hebrew word meaning adversary.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4.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들짐승과 함께 계심. 
- Mark’s inclusion of wild animals in the temptation story is variously explained as an allusion to Jesus as the second Adam (Waetjen 1989:75–76) or to the persecution that Christians in Rome experienced during Nero’s reign (Best 1965:8–9). Such interpretations should be regarded cautiously. While they are not implausible in themselves, there is little, if anything, in the rest of this Gospel to support them. The presentation of Jesus as the second Adam is a prominent theme in Luke, but there is no explicit depiction of Jesus in these terms in Mark. Furthermore, the wild animals appear only in this passage. They are not mentioned in the apocalyptic discourse of Mark 13 at all, where the testing of Jesus’ disciples is a central theme. On balance, it is better to take this reference as an indication that Jesus was alone, a theme that comes to a climax during the crucifixion. Except for the presence of the angels and wild animals Jesus was alone in his temptation (Lane 1974:61). There was no human comfort or support, and in that loneliness he was tempted by Satan.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40.

요한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신 이후에 이제 공식적인 사역의 시작을 알리시는 주님

14절) 요한이 잡힌 후, 본문은 신적 수동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주님의 잡히심을 떠올릴 수 있다. 
- Mark placed the beginning of Jesus’ ministry after the imprisonment of John, although he did not describe John’s imprisonment and death until 6:14–29. Actually the word Mark used (paradidomi) means to hand over and is used to refer to the betrayal and arrest of Jesus in 9:31; 10:33; 14:21, 41. Its use with reference to John suggests that his death foreshadowed that of Jesus. The use of the passive voice implies that what was done was in accordance with God’s purpose.1
1 This use is called the “divine passive.” It probably had its origin in the reluctance of the Jews to use the sacred name Yahweh. It was one of many substitutes for the divine nam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5–47.
이제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심, 그 하나님의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15절이다. 

15절)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본문의 때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인데 마태의 경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해서 천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성격을 강조한데 반하여 마가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경을 강조한다. 마가의 표현은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왕의 다스림, 통치, 지배, 하나님의 주권을 암시한다. 
- The word translated “time” (kairos) means a favorable, opportune, or significant time as opposed to mere chronology. Here Mark referred to the time appointed by God for the fulfillment of his promises. The period of preparation, that of ancient Israel and John, was complete. The divinely appointed time had come. The prophecies were being fulfilled in Jesus.
The expression “kingdom of God” appears fourteen times in Mark (also 4:11, 26, 30; 9:1, 47; 10:14, 15, 23, 24, 25; 12:34; 14:25; 15:43). According to the Synoptic Gospels, it was the major subject of Jesus’ message. In first-century Judaism it described a future, earthly kingdom in which God through Israel would rule over the nations. With the possible exceptions of 14:25 and 15:43, however, in Mark it refers to a present, spiritual kingdom rather than a future, earthly one. Therefore the expression refers to the kingly rule, the reign, the dominion, the sovereignty of God in the hearts of people. “Realm” in the sense of sphere of influence might be a better translation, but it too is subject to misunderstanding. “Reign” probably is the best translation.
Jesus claimed that the kingdom, which to most Jews seemed far in the future, had drawn near with his appearance. On linguistic grounds either “is near” or “is at hand” (RSV, NASB) or “has come near” (NRSV) is a better translation than “has come” (cf. use in 14:42). One of the former alternatives is preferable on theological grounds as well. The reign of God began to take place in the life and ministry of Jesus, but it was not fully manifested then and will not be until Jesus returns. Therefore a present, mystical kingdom does not rule out the possibility of a future, earthly one. Mark, however, says little about that. Jesus, like John (cf. v. 4), preached repentance, but the distinctive element in his message was faith or commitment or trust. The necessity of faith is a major subject in Mark, underscoring the theological motivation of the writing. Note especially the commands to believe in 1:15; 5:36; 11:22, 24 and the rebuke of unbelief in 4:40; 6:6; 9:19. Note also how faith is commended in 2:5; 5:34; 9:23; 10:52; 11:23.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47.

- 하나님이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 때가 요한이 잡힌 후였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는데 여전히 무고한 자가 잡히고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는 지금 하나님 나라가 이미와 아직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의미와 종말적인 의미를 우리는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문의 '가까이 왔다’라는 표현이 바로 이미와 아직의 이중적 의미를 모두 보여준다.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임했지만 아직 임하지 않은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개인적인 버전과 사회적인 버전을 서로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다. 개인적 회심과 사회적 회심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 The kingdom of God expresses the hope for a world in which the powers of sin, death and darkness are replaced by peace, justice and the worship of the one true God. In essence, it is the hope that the rule of God would be restored over all of creation.
Yet here at the beginning of Jesus’ ministry we encounter a disturbing paradox. If, as Jesus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is near, how is it that John the Baptist, who appeared as the herald of Jesus’ message, was arrested and eventually put to death? According to Mark 1:14 it was not the forty days in the wilderness, but John’s arrest that marked the start of Jesus’ ministry. If the rule of God were about to be restored over creation, we would expect things to work out differently.
The Greek verb translated “is near” can mean either “has arrived” or “has almost arrived.” Since either translation is possible, we must look at the context for clues that point to Mark’s meaning. The first one is found in Jesus’ announcement that the time has come (or is fulfilled). The time that is fulfilled is the time of waiting, and this observation implies that the kingdom of God is actually here (Beasley-Murray 1986:73). If the kingdom were not here, the time of waiting would not be over.
On the other hand, John’s arrest is a precursor of Jesus’ death. That is to say, if the kingdom of God is really present, how is it possible that innocent people still suffer and die? This observation suggests that the kingdom is either not present or not completely present. If we take both statements seriously, that is, without allowing either one to negate the other, then we arrive at the conclusion that the kingdom of God has actually come into history, although we are still waiting for its complete realization (Schnackenburg 1971:141–42). As we look more closely in the following sections at Jesus’ ministry, we will try to figure out inductively what it means to affirm that the kingdom of God is actually, though not completely, here.
For this reason Jesus called people to repent and believe. John had called people to embrace the new thing God was doing. With Jesus, embracing this new thing becomes even more complex for he invites us to turn away from our expectations about how the rule of God comes. Believing the gospel means affirming what God does, particularly when our expectations are not met. There is a fundamental tension between the hopes that Jesus’ ministry generated and the course of events as they unfolded according to God’s will. The need for repentance did not disappear when John’s ministry came to an end. On the contrary, the call to repent and believe was essential to Jesus’ ministry.
Repenting and believing are as important for Jesus’ modern followers as they were for his first ones. Jesus’ gospel was not packaged into a personal version for those who seek inner peace and a social version for those who want to change the world. In Mark the personal and social dimensions of the gospel are inseparable. The kingdom of God addresses us personally, just as it addresses the structures of our life together. Picking and choosing the aspects of the gospel we like is a matter for repentance, just as embracing those aspects of the gospel that make us anxious is a matter for faith.

 Ronald J. Kernaghan, Mark,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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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Other Gospel
I am astonished that you are lso quickly deserting mhim who called you in the grace of Christ and are turning to na different gospel— onot that there is another one, but pthere are some who trouble you and want to distort the gospel of Christ. But even if we or qan angel from heaven should preach to you a gospel contrary to the one we preached to you, rlet him be accursed. As we have said before, so now I say again: If anyone is preaching to you a gospel contrary to the one you received, rlet him be accurse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갈 1:6–19.

6절) 너희를 그리스도의 예수안에서 부르신 분을 그렇게 속히 떠나서 다른 복음을 향한 것에 내가 매우 놀랐다. 

Paul used a strong word to describe the crisis that had befallen the churches of Galatia. The word translated “deserting” in the NIV is metatithesthai, which means literally “to bring to another place.”22 The word is used in this literal sense in Heb 11:5 to describe Enoch’s translation from earth to heaven. It occurs eighteen times in the Greek Old Testament, where it translates a variety of Hebrew words meaning “to transplant,” “to set in another place,” “to alter or change.” From these meanings it was extended metaphorically to one who had changed allegiance from one country to another, a political traitor, or one who had switched sides in an armed conflict, a military deserter. Paul claimed the Galatians were spiritual turncoats! That he used this verb in the sense of a continuous present, “you are deserting,” “you are in the process of leaving,” indicates that their apostasy is not yet complete. Obviously the false teachers had made great inroads among them; the situation was desperate, but not beyond hope. Paul was “hard pressed on every side, but not crushed; perplexed, but not in despair” (2 Cor 4:8). Later in the letter he expressed confidence that they could be recovered, and he reminded them that they would “reap a harvest if [they] do not give up” (Gal 5:10; 6:9).
22 See C. Maurer, “Μετατίθημι,” TDNT 8.161–62.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91.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가 누구인가에 대한 여러 견해가 있다. 먼저 바울, 예수님, 하나님으로 설명된다. 
What is the referent of the expression “the one who called you”? Three answers to this question have been given in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It could refer, of course, to Paul himself since he, along with Barnabas, was the human instrument God used to awaken faith in the Galatians. Yet as Paul would make abundantly clear in v. 8, he himself was not the standard by which the situation in Galatia was to be judged. Something far greater than personal prerogative or pastoral loyalty was at stake in this struggle. Another possible interpretation, adopted by Calvin and many scholars since, holds that “the one who called” refers to Jesus Christ. This is certainly a possible reading since many of the earliest and best manuscripts do not contain the qualifying genitive “of Christ,” following the word “grace” in the next phrase.23 It is true that by following the way of the false teachers the Galatians had contradicted the finished work of Christ, making him and his cross “of no value to you at all” (5:2). However, as drastic as that error may be, Paul linked it to an even more serious one: the Galatians were guilty of nothing less than deserting God himself. In Paul’s writings “he who calls” is synonymous with God, as can be seen in Paul’s two other uses of it in Galatians (1:15; 5:8; but see also Rom 4:17; 9:12; 1 Thess 2:12; 5:24). The Galatians were deserting the God who calls—the God who called the world into existence by his creative power, the God who raised Jesus from the dead, the God who wrought the miracle of conversion in the Galatians themselves. True, they also were deserting Christ, Paul, and the gospel he had preached

23 See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London: United Bible Societies, 1971), 589–90.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91–92.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은혜, 이 은혜가 보라 갈라디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Already we have encountered the word “grace” in the salutation (1:3); it is the operative concept in Galatians and runs like a scarlet thread throughout the epistle from start to finish (1:15; 2:9; 2:21; 3:18; 5:4; 6:18).
There is not a wasted syllable in Galatians; we must not imagine that Paul here threw in one of his favorite words as a kind of theological grace note to soften his otherwise harsh rebuke. No, grace is what Galatians is all about. Both here and in Romans, Paul set grace and faith together over against law and works as the basis of justification (Rom 6:14; 11:6; Gal 2:21; 5:4).24 At the end of his explicat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Paul would summarize his verdict against the Galatians thus: “You who are trying to be justified by law have been alienated by Christ; you have fallen away from grace” (5:4). Here at the beginning of the letter he wanted them to realize that the God who called them out of pagan idolatry to salvation and new life in Jesus Christ did so on no other basis than his own good pleasure and gratuitous favor. To forget this is worse than betraying an army or a country; it is to betray the true and living God.

24 H. Conzelmann, “Χάρις,” TDNT 9.372–415. Cf. also D. P. Fuller, Gospel and Law: Contrast or Continuum? (Grand Rapids: Eerdmans, 1980).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92–93.

본문의 다른 복음을 말할때 6절과 7절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다르다. 6절에서는 ‘헤테로스’가 7절에서는 ‘알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This is a difficult expression to translate into English as the awkward wording in most modern versions indicates. The AV reads “another gospel, which is not another.” However, Paul used two separate words in Greek for “another.” The first is heteros, which connotes a difference in kind between one thing and another. For example, Heb 7:11 poses the question of why, if perfection were possible through the Levitical priesthood, there still was need for another (heteron) priest to come, that is, a priest of a different class or kind from that of the old order of Aaron. The other word, allos, on the other hand, means “another one of the same kind.” We are familiar enough with this usage from everyday life; it is used when the waitress asks whether we would like another cup of coffee, meaning a second (or third) installment of our original drink.
So here in Galatians Paul asserted that his fickle followers had embraced a heteros gospel, one drastically different in kind from that they had received from him, for there is, in fact, no other (allos) genuine gospel to be placed alongside the real thing. Perhaps the NEB comes closest to the original: “I am astonished to find you … following a different gospel. Not that it is in fact another gospel.”25

25 While heteros and allos carry the distinction referred to above in the Galatian passage under review, they are sometimes used synonymously (cf. Matt 16:14; 1 Cor 12:10). See the discussion in E. deW. Burt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ICC (Edinburgh: T & T Clark, 1921), 420–22. See also J. H. Thayer,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Associated, 1963), 254. For the adverbial use of heteros meaning “otherwise, differently,” see Phil 3:15.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93.

7절) 다른 복음은 없고 어떤 이들이 너희를 어렵게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혼란케 하는 것과 복음을 변질시키고 전복시키려는 것이 거짓 교사들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Paul leveled two charges against them: one, with reference to their disturbance of the Galatians; the other, relating to their subversion of the gospel. The Greek verb translated “to throw into confusion” (tarassō) means to “shake,” “agitate,” or “to excite to the point of perplexity and fear.” Here again is an indication of how vulnerable the new Christians of Galatia were to evidently impressive presentations of the false teachers. Paul’s second charge against them was that they were perverting, or rather, wanted to pervert, the gospel of Christ. As J. Stott has wisely observed: “These two go together. To tamper with the gospel is always to trouble the church. You cannot touch the gospel and leave the church untouched, because the church is created and lives by the gospel. Indeed the church’s greatest troublemakers (now as then) are not those outside who oppose, ridicule and persecute it, but those inside who try to change the gospel.”28
28 J. R. W. Stott, Only One Way: The Message of Galatians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68), 23.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94–95.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른 복음에 관심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에 아직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이들에게 거짓 교사들이 찾아와 복음에 무언가를 덧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복음을 말하지만 결국 거기에 그들의 전통과 율법을 첨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것은 다른 복음이 된 것이다. 
We know that most of the Christians in the churches of Galatia came from a Gentile background, though some were likely Jews and others “God-fearers” attached to the local synagogues. Some may have dabbled in the mystery religions that were well represented in the cities of Southern Galatia, while others perhaps bowed at the shrine of the imperial deity.
In any event, there was likely a deep hunger and thirst for spiritual reality that the religious marketplace of “this present evil age” could not satisfy. To these people Paul and Barnabas preached the good news of salvation through Jesus Christ. The Holy Spirit was poured out in miraculous power, the new believers were baptized, local churches were formed, and the missionaries departed. Soon thereafter, before the first wave of enthusiastic ardor had been dampened, the false teachers arrived with their new message of how the Galatians could perfect the good beginning they made and so move on toward complete salvation.
Christ was still prominent in their preaching, but only as an adjunct to the law. Grace was a word they used as well, but grace for them meant simply one’s natural ability to obey the laws and rites required in the Torah. This kind of “gospel” Paul saw as a total perversion. But the Galatian Christians, naive and immature, were intrigued by its promise of an even more elevated spiritual status. What the false teachers offered the Galatians was a way to enhance and elevate their already robust spirituality. Luther masterfully captured the genius of their appeal in his summary of their message: “ ‘Christ’s a fine master. He makes the beginning, but Moses must complete the structure.’ The devil’s nature shows itself therein: if he cannot ruin people by wronging and persecuting them, he will do it by improving them.”31

31 Ibid., 54. cf. LW 26.50.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96.

8-9절) 그러나 우리 혹은 하늘로 부터 온 천사라도 너희에게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에 반하는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지금 내가 다시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너희에게 너희가 받은 그 복음에 반하는 어떤 복음을 전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순전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을 믿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들을 첨가하고 전하는 것은 바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기에 바로 그 복음을 바르게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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