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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when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a delight to the eyes, and that the tree was to be desired to make one wise,2 she took of its fruit xand ate, and she also gave some to her husband who was with her, yand he ate. zThen the eyes of both were opened, a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loincloths.

2 Or to give insight

x 1 Tim. 2:14

y ver. 12, 17; Hos. 6:7

z ver. 5

a ch. 2:2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6–7.

 

 

6절) 뱀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여자가 선악과를 바라보게 되었을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 뱀의 유혹이 있기전에는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그것에 대한 갈망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선악과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한번 시작된 갈망은 우리를 삼킨다. 결국 여자는 그 열매를 따먹게 되었고 자신과 함께 하던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 

2장 9절을 보면 동산의 다른 모든 나무들의 열매도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였다. 하지만 뱀은 여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열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긴 것이다. 그 나무는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먹음직했다. 그런데 온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기초해야 하는데 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의 반역의 결과였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있었다. 뱀이 유혹을 했을때 아담이 함께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뱀은 이러한 유혹에 여인이 더욱 약하다는 것을 같파했고, 또한 여인에게 남성이 약한 것을 알았다. 아내의 요구를 아담은 거절하지 못했다. 분명히 그것이 하나님이 금지하신 열매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 열매를 먹은 것이고 이것은 2장 15절에서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하나님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본문에 지혜롭게라는 단어는 ‘사칼’로 바라보다, 이해하다, 파악하다라는 의미이다 

3. The theological use includes the giving of insight by God (1 Chron 22:12; 28:19; Dan 1:17; 9:22; cf. Prov 19:14), whose good Spirit instructs the people (Neh 9:20); so the faithful are to do, given their experience of God’s grace (Ps 32:8). In Gen 3:6, the way humans acquire wisdom becomes the issue, not acknowledging the one who gives wisdom. The people of God are to consider carefully God’s deeds (Ps 64:9 [10]; 106:7; Isa 41:20) and God’s ways (Neh 8:13; Ps 101:2; 119:99), wherein their lives can prosper (1 Kgs 2:3). God’s presence and action in the lives of the obedient can issue in good success (Josh 1:7–8; 1 Sam 18:14, 30), but a lack of success can befall those who do not attend to the Lord (Jer 10:21), who observes the house of the wicked (Prov 21:12). The move to action can be seen in the careful consideration of the poor (Ps 41:1 [2]). Insight is characteristic of the coming Messiah (Jer 23:5; cf. Jer 3:15); God will make the way of the suffering servant prosper (Isa 52:13). The wise will participate in the resurrection (Dan 12:3).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243.

 

하와는 돕는 배필이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함께 옆에 있어주면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인데 옆에 있어서 도와야할 아내가 남편을 타락으로 이끈 것이다. 아담의 이 죄는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모든 죄와 고통, 육적 영적 죽음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하와는 선악과를 보고 먹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그 충동은 선악과가 단순히 먹음직스럽고 보기 좋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와의 관심사가 지혜였다는 것은 창세기 3:6과 창세기 2:9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창 2:9 וְט֣וֹב לְמַאֲכָ֑ל 가)נֶחְמָֽד לְמַרְאֶ֖ה 나)וַיַּצְמַ֞ח יְהוָ֤ה אֱלֹהִים֙ מִן־הָ֣אֲדָמָ֔ה כָּל־עֵץ

와야츠마 야웨 엘로힘 민–하아다마 콜–에츠 네흐마드 레말에 베토브 레마아칼 창 3:6 וְנֶחְמָ֤ד הָעֵץ֙ לְהַשְׂכִּ֔יל 다)תַֽאֲוָה־ה֣וּא לָעֵינֵ֗יִם 나)טוֹב֩ הָעֵ֨ץ לְמַאֲכָ֜ל וְכִ֧י 가)כִּ֣י

키 토브 하에츠 레마아칼 베 키 하아와–후 라에이나임 베테흐마드 하에츠 레하스킬

창세기 2:9과 창세기 3:6을 비교해 보면, 선악과는 다른 과일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 먹기에 좋고 나) 보기에(2:9) 또는 눈에(3:6) 탐스러운 과일이었다. 창세기 3:6의 선악과는 창세기 2:9과 다른 독특성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바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라는 점이었다. 이 지혜(레하시킬, להַשְׂכִּ֔יל)는 창세기 3:1에서 뱀을 가장 지혜롭다(아룸, עָרוּם)고 밝혔던 것과 관련 있다. 사탄은 부정적인 지혜로 하나님을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하는 자로 말하였다.23) 하와는 사탄의 말을 믿고 선악과가 엘로힘처럼 지혜롭게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열매를 따먹는다. 아담과 하와가 벗었다(아루밈, עֲרוּמִּם)는 것을 깨달은 것은 곧 뱀처럼 간교한(아룸, עָרוּם)자신을 깨달은 것일 수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심각한 관계 훼손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이어서 곁에 있던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한다. 학자들 중에는 전치사 임(עִם, 함께)이 장소나 공간적인 개념보다는 관계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담이 유혹의 순간 하와와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뱀이 하와에게 말할 때 한결같이 2인칭 남성 복수를 사용했던 것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24)

23) 사무엘하 14:17은 천사들도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24) John L. Harris, “An Exposition of Genesis 2:4–11:32,”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44 (2001): 43–4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27–128.

 

 

7절) 본절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의 변화를 보여준다. 앞서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과는 달리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선악과의 결과가 성적인 수치심의 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상태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이다. 선악과를 따먹기전 아담과 하와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일때는 목욕탕에 가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가 자라게 되면 2차 성징을 경험하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가 이들의 2차성징은 촉발한 것일까? 그래서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부끄러움과 죄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 것일까? 선악과는 결국 아담과 하와가 간직했던 순수성을 상실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나무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 이 나무잎으로 만든 옷은 이후의 가족옷과 비교가 된다.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은 ‘파카하’로 눈이 열려 무언가를 파악하다. 인식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4. One of the promissory statements made by the serpent to Eve was: “Your eyes will be opened,” to which he appended, “and you will be like God, knowing good and evil” (Gen 3:5). Whether or not the second part is sequential or explicative to the first is difficult to decide. That is, does the second half of the verse offer a second, distinct promise, or does it expand on and explain the first half of the verse?

In one sense what the serpent promised came true, for verse 7 reads, “Then the eyes of both of them were opened.” However, the remainder of the verse does not go on to say, “and they became like God.” Rather, it states, “and they realized they were naked.” That is hardly what they were bargaining for in having their eyes opened and becoming like God. How different is this couple who had their eyes opened from another couple who also had their eyes opened as they walked from Jerusalem to Emmaus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Luke 24:31)!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666.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호세아는 말한다. 

(호 6:7, 개정)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언약의 보편적인 구조는 서론-규정-저주의 형식이다. 2장에서는 인간을 창조하고나서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거기서 발원한 4개의 강을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규정은 이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것이며 또한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것이었다. 이 규정을 어겼을 경우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이 언약을 받았던 아담은 이를 어김으로 저주의 대상자가 되었다. 

 

창세기 3:7은 창세기 3:5의 표현을 사용하여 뱀의 말처럼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렸다고 또는 밝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창세기 3:5에서 뱀이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했었는데 반해 창세기 3:7에서 아담과 하와는 벗었음을 알게 된다. 벗었음(아롬, עָרוֹם)의 자음과 소리는 사탄의 간교함(아룸, עָרוּם)의 자음과 소리와 비슷하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벗었음과 사탄의 간교함과 연결시키고 있다. 즉 창세기 3:6에서 하와는 선악과가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어 줄줄 알았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벗었음을 깨닫는 사탄의 간교함을 얻게 되었다.

벗었음을 깨달음(간교함) → 관계성 왜곡

벗었음을 깨달은 아담과 하와에게 관계성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가 벗은 것을 깨닫고 난 후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실제로 일어난 결과는 창조 때에 하나님이 세운 관계성과 관련된 진실의 왜곡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엘로힘처럼 된다는 것을 알고 사람에게 따먹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뱀이 하나님을 인간에게 진실을 감추고 그 능력과 역할을 제한하려 하는 분으로 묘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과 관련된 진리를 왜곡했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도 사탄처럼 그 관계성을 왜곡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창세기 2:25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벌거벗은 상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린 아이 같은 순박함도 있겠지만, 서로에 대한 친밀감과 하나됨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들은 벗은 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벗은 몸을 가려 그 수치심을 없애려 할 정도로 관계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26) 그들의 벗음은 서로가 상대방에게 지적해 준 것이 아니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마치 뱀이 진실을 왜곡했던 것처럼 스스로 세상을 보는 눈이 왜곡되어 부부의 관계성과 관련된 진실을 왜곡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됨을 상실했고, 벗었음에 대한 자기 의식과 상대방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숨겨야 했다. 결국 아담은 선악과 따먹은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시킴으로 둘 사이의 나누어짐과 왜곡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26) John H. Hewett, “Genesis 2:4b–3:31; 4:2–16; 9:20–27; 19:30–38,” Review and Expositor 86 (1989): 237–241.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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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aI hear, and bmy body trembles;

my lips quiver at the sound;

crottenness enters into my bones;

my legs tremble beneath me.

Yet dI will quietly wait for the day of trouble

to come upon people who invade us.

Habakkuk Rejoices in the Lord

17  Though the fig tree should not blossom,

nor fruit be on the vines,

the produce of the olive fail

and the fields yield no food,

the flock be cut off from the fold

and there be no herd in the stalls,

18  eyet I will rejoice in the Lord;

fI will take joy in the God of my salvation.

19  God, the Lord, is my strength;

ghe makes my feet like the deer’s;

he makes me htread on my ihigh places.

jTo the choirmaster: with kstringed4 instruments.

a ver. 2

b Jer. 4:19

c [Prov. 12:4]

d [Ps. 94:13; Isa. 14:3, 4]

e [Job 13:15]

f Ps. 9:14; 13:5; 21:1; 35:9; Luke 1:47; See Joel 2:23

g See 2 Sam. 2:18

h Amos 4:13; Mic. 1:3

i Deut. 32:13; 33:29

j See Ps. 4

k Isa. 38:20

4 Hebrew my stringe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합 3:16–19.

 

16절) 나의 창자(위, 자궁)이 흔들리고 나의 입술이 그 소리에 떨리는 것을 들었다. 썩음이 나의 뼈안으로 들어오고 내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나 나는 무리가 우리를 침략하러 오는 환난의 날을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본문은 앞선 2절의 메아리와 같다. 2절에서 하나님께서 과거의 그분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반복할 것을 요청합니다. 16절은 바벨론인들에게 재앙이 임할 것을 조용히 기다리라는 선지자의 반응이다. 주님의 임재에 들어오는 것은 경외와 혼란을 일으킨다. 

Verse two precedes the theophany with a petition requesting that God repeat his mighty acts of the past. Verse 16 follows the theophany with the prophet’s response to wait quietly for the evil to come on the Babylonians. Coming into the presence of the Lord produces awe and disturbance at the revelation of God (cp. Dan 7:28; 8:27). As the Lord said to Isaiah, “This is the one I esteem: he who is humble and contrite in spirit, and trembles at my word” (Isa 66:2b). “That response includes the typical reaction of terror in the presence of Yahweh’s majesty, but it also indicates the prophet’s willingness at last to await the fulfillment of the vision as he had been instructed in 2:3.”123

123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149.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72.

 

본절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하박국의 반응을 묘사한다. 그의 창자(마음, 위)는 흔들렸고, 떨었고 그의 입술을 떨렸고 그의 뼈는 썩어들어가고 그의 다리는 후들거린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하박국의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들이 고백하는 성경의 모델과 일치한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받았을때 그는 자신이 가치없게 느꼈고 자신의 죄를 자각했다.(사 6:5-7) 우리의 시대에도 이러한 반응이 필요하다. 

The first half of the verse (i.e., as indicated by the Hb. accents; in the English text it is the first four lines) describes Habakkuk’s reaction to God’s revelation.124 His heart (beṭen, lit., “belly” or “insides”) “pounded” (lit., “trembled,” the same verb, rgz, translated “[be] in anguish” in v. 7), his lips “quivered,”125 his body went limp,126 and his legs “trembled” (rgz again).127

Habakkuk’s response fits the biblical model. When Isaiah received the vision of God in the temple, he felt his own worthlessness and recognized his sin (Isa 6:5–7; cp. Luke 5:8). Modern day experiences with God should produce the same feelings of reverence and unworthiness. Though culture and custom have changed since the days of Habakkuk, neither God nor human nature has changed. We should expect the same response to the genuine revelation of God as that experienced by the prophet.

124 In the second line in the Hb. text “at the sound” (לְקוֹל) is prominently placed first in the clause. See Robertson’s discussion of the significance of God’s voice as it is elaborated in Ps 29 (Nahum, Habakkuk, Zephaniah, 243).

125 The verb occurs only here and in 1 Sam 3:11; 2 Kgs 21:12; Jer 19:3. There the subject is the “ears” that shall “tingle” at the sound of bad news. Cf. R. H. O’Connell, “צלל,” NIDOTTE 3:805–6.

126 The same image of decay in the bones occurs in Prov 12:4; 14:30, the only other uses of רָקָב, “rottenness, decay.” The verb is used of rotting wood in Isa 40:20.

127 This fourth line of v. 16, וְתַחְתַּ֣י אֶרְגָּ֑ז, is literally “and beneath me I trembled.” BHS rejects the masoretic accents and places אשׁר in this clause rather than in the next, repointing it as אֲשֻׁרָי, “my steps.” Thus it can serve as the subject of the repointed verb, יִרְגְּזוּ. Thus the NRSV translates, “and my steps tremble beneath me.” Patterson repoints only אשׁר as אֲשׁוּר, “[foot]step” yielding a literal “I experienced a trembling [foot]step [beneath me],” more smoothly, “And I moved with faltering footsteps” (Nahum, Habakkuk, Zephaniah, 258).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72–373.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도움의 기억을 가짐으로 지금 우리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나빠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결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기에 두려워 떨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최종적인 승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본문은 가깝게는 바벨론의 심판의 때를 보여주지만 멀리는 계시록이 말하는 아마겟돈, 종말의 심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박국의 질문에 대답하셨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갈대아와 같은 악한 백성을 사용하셔서 그 자신보다 더 의로운 백성을 심판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 자신은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바벨론은 사용하실 수 있고 또한 그분은 바벨론의 죄악도 심판하실 것이다라는 것이다. 재앙의 날이 바벨론에게 임할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정직한 질문을 했기에 하박국은 세상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나 오래?”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것”으로 옮겨갔다.

 

God answered Habakkuk’s questions. How could God use a wicked people such as the Chaldeans to punish a nation more righteous than itself? God’s answer was that though he might use Babylon to punish Judah’s sins, he also would punish Babylon for its sin. “The day of calamity” would come on Babylon.132 What an amazing transformation! Because the prophet had been honest with God and took his genuine questions to a caring God, Habakkuk began to look at the world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Habakkuk had moved from “how long?” (Hab 1:2) to “I will wait patiently.”

132 The NIV has interpreted the preposition in לְיוֹם as marking the object of the verb אָנוּחַ, indicating what the prophet was waiting for, i.e., a day of “calamity” to fall on the Babylonians. If following Patterson the preposition is considered one of specification (“with respect to”) it could refer to the coming “calamity” to come on Judah when the Babylonians invaded. Patterson translates, “I will rest during the day of distress (and) / during the attack against the people invading us” (Nahum, Habakkuk, Zephaniah, 255). “In the midst of conflict and distress, the prophet rests securely in the knowledge of God’s purposes” (p. 259).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74.

 

17절) 비록 무화가 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확물이 없으며 밭에 곡식이 없으며 우리애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박국의 위대한 고백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전히 탄식가운데 있고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 같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찬양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본절은 6개의 조건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극단적인 재앙의 상황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지금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면서 하박국은 진정한 우리의 삶의 역경의 연단, 불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받고 정결해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6개의 조건절에 등장하는 재앙의 내용은 점층적이다. 무화과나 포도나무의 열매가 없는 것에 비해서 양과 소가 없는 재앙이 더욱 심각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다. 

The six clauses of v. 17 seem to be in ascending order of severity, with the loss of figs ranking least and the loss of the herd in the stalls causing the greatest economic damage. Figs served as a delicacy in Israel, but their loss did not produce severe hardship. Grapes provided the daily drink, but again the loss of the fruit of the vine would produce inconvenience rather than privation. The olive crop on the other hand produced oil for cooking and lighting. Grain (barley and wheat) provided for the staple diet of Palestine. The failure of the fields to produce food might mean starvation for large segments of the population. Both sheep and cattle made up much of the wealth of Palestine. Sheep and goats provided wool and the occasional meat for the Israelite diet. Hebrews did not normally eat cattle, but they were used for preparing the soil for planting and other heavy work.

The loss of any of these individually might be survived. Together, the losses spelled economic disaster and devastating loss of hope—loss of their daily provisions, loss of their economic strength, loss of the Lord’s blessing due to their sin (Lev 26; Deut 28; Amos 4:6–9; Hag 1:6–11). But Habakkuk knew that “man does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the Lord” (Deut 8:3; see also Phil 3:7–8). “The entire present world order may pass away, but God’s grace to his people shall endure.”136

136 Robertson, Nahum, Habakkuk, Zephaniah, 245.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375–376.

 

18절) 그러나 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다. 

18절은 앞선 6개의 조건절에 대해서 2개의 대조되는 기대를 표현한다. 그 나라에 임한 임박한 재앙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지자는 그의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이다. 앞선 경제적인 상황의 문제가 바뀐 것은 없다. 여전히 문제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선지자의 시각, 태도가 바뀐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 의심가운데 있었다면 이제는 신실함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문제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태도가 바뀐 것이다. 

 

Joy is a natural response to God’s Word (Jer 15:16) and God’s salvation (Isa 12:1–6). Initially problem-centered, the prophet is now God-centered. He will not be diverted from his trust and joy in God, even in times of bad economy, crop failures, and lost assets. Nimble and sure-footed “like the feet of a deer” (v. 19), he has embraced the “Sovereign Lord,” and so is empowered to live the lesson learned about living by faith (2:4). Along with Job’s sturdy expression of hope in his redeemer (Job 19:25), Habakkuk’s closing statement is one of the finest affirmations of faith (cf. Rom 8:31–39; 2 Tim 1:12).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cf. compare, confer

 D. A. Carson, ed.,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1838.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 그가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시고 그가 나를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신다. 

이 노래는 지휘자를 위하여 현악에 맞춘 것이다. 

본문에서 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일반적인 ‘호즈’가 아니라 ‘헤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것의 의미는 군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의 군대이시다. 그분이 바벨론에 대항해서 서 계신 것이다. 하바국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믿음에 정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약속의 말씀을 소망하고 믿고 있다. 

His emphatic assertion of faith in 3:18–19 consists of two sets of parallel statements (A, B). In the center is Habakkuk’s confession of faith:

A Yet I will rejoice in the Lord,

I will be joyful in God my Savior.

Center: The Sovereign Lord is my strength.

B He makes my feet like the feet of a deer,

He enables me to go on the heights.

Habakkuk’s joy is also typical in the Psalms but is a contrast to the usual rejoicing over God’s good gifts and protection (Ps. 5:11–12; 13:5–6; 16:5–11; 47:1–4). Habakkuk rejoices despite the lack of goods and protection. He shows he is prepared to live by faith in unseen promises, even in suffering. His joy is in contrast to the pleasure of the Babylonian, who rejoices because “he lives in luxury and enjoys the choicest food” (Hab. 1:15–16).

The central expression (“The sovereign Lord is my strength”) is also common in the Psalms (Ps. 28:7; 59:10, 17; 118:14; cf. Ex. 15:2; Isa. 12:2; 49:5; Jer. 16:19). In contrast, however, the typical word for “strength” (ʿoz) is absent. Its synonym (ḥayil), translated “strength” in the niv, can mean “army.” God is Habakkuk’s army, standing against the Babylonians, “whose own strength is their god” (Hab. 1:11b).7 Habakkuk’s faith has found its sure footing as faith. He does not hope or believe in what he sees but in what he has heard as promises from Yahweh.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7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158.

 James Bruckner, Jonah, Nahum, Habakkuk, Zephaniah,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2004), 258–259.

 

여호와의 반응은 하박국이 요구한 그가 듣기 원한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박국은 변했다. 이러한 반응은 욥을 떠오르게 한다. 예레미야애가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반응을 볼 수 있다. 

Habakkuk is resolute in his faith, even when Yahweh’s response is not the answer he prefers to hear (Hab. 3:17–19). His faith is like a strong steel blade that is flexible but does not break. Habakkuk’s resolution is like Job’s: “I spoke … twice but I will say no more” (Job 40:5b); “Shall we accept good from God, and not trouble?” (Job 2:10); and “Though he slay me, yet will I hope in him; I will surely defend my ways to his face” (Job 13:15). Jeremiah’s collection of Lamentations is similar in his stalwart, gritty expression of faith in a loving God in spite of immediate sociological and psychological evidence to the contrary. The center of the graphic and extensive laments in Lamentations is also a confession of undying belief:

I well remember them,

and my soul is downcast within me.

Ye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Because of the Lord’s great love we are not consumed,

for his compassions never fail.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I say to myself, “The Lord is my portion;

therefore I will wait for him. (Lam. 3:20–24)

 James Bruckner, Jonah, Nahum, Habakkuk, Zephaniah,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2004), 264–265.

 

우리는 하박국과 여호와 하나님의 대화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와 함께 우리는 어려운 질문들을 던지고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는 강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역사적으로 근거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노래를 통해 그의 심오한 믿음에 합류할 것을 초대받았다. 우리는 하박국과 같이 부패가 지배하는 세상안에 하나님의 목적에 증인이 될 수 있다. 

We can learn much from Habakkuk’s extended dialogue with Yahweh. With him we can ask difficult questions (Hab. 1:2–4) and be persistent in questioning (1:12–2:1). We can be historically grounded in God’s mighty acts of deliverance (3:1–15). We are also invited to join him in his profound faith in song (3:16–19). Habakkuk’s humanity and joy are a model and a challenge. May we be witnesses, like Habakkuk, to God’s purposes in a world dominated by corruption. May Yahweh’s kingdom come also to us

 James Bruckner, Jonah, Nahum, Habakkuk, Zephaniah,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2004),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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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sson from the Withered Fig Tree
20 iAs they passed by in the morning, they saw the fig tree withered away to its roots. 21 And Peter remembered and said to him, j“Rabbi, look! The fig tree that you cursed has withered.” 22 And Jesus answered them, “Have kfaith in God. 23 lTruly, I say to you, whoever says to this mountain, m‘Be taken up and thrown into the sea,’ and does not ndoubt in his heart, but obelieves that what he says will come to pass, it will be done for him. 24 Therefore I tell you, pwhatever you ask in prayer, obelieve that you qhave received3 it, and it will be yours. 25 And whenever ryou stand praying, sforgive, tif you have anything against anyone, so that uyour Father also who is in heaven may forgive you your trespasses.”4

20-21절)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이제 아침에 지나가실때 그 무화과 나무가 말라 있었다. 마가의 경우 본문의 내용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마태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땅히 열매를 맺혀야 함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가 바로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이다. 
  • The fig tree had withered within 24 hours, perhaps sooner (Matt. 21:19). It represents the judgment of God on Israel (Isa. 34:4; Joel 1:7–12; Amos 4:9; see note on Mark 11:13–14).

22-23절) 지금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말한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구하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응답은 어쩌면 생뚱맞은 것이다. 지금 한창 시들어 버린 무화과 나무를 이야기하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과 믿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주님의 관점은 지금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는 것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릴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산을 옮기는 이 비유, 상징은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주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신 것이다. 
  • Have faith in God. Jesus’ response must have surprised the disciples. (What does faith have to do with the cursing of the fig tree?) His point is that they should trust God to remove whatever hinders them from bearing fruit for God. Moving a mountain was a metaphor in Jewish literature for doing what was seemingly impossible (Isa. 40:4; 49:11; 54:10; cf. Matt. 21:21–22). Those who believe in God can have confidence that he will accomplish even the impossible, according to his sovereign will.

24절) 기도하고 구하는 바를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성급하게 일반화 시켜서는 안된다. 불가능한일을 “믿씁니다”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앞에 떼를 쓰면 하나님이 우리의 열정과 열심에 감복해서 들어주실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을 일반화시키거나 예외없이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동시에 이 본문의 내용이 오직 사도들에게만 한정되기에 우리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제껴놓아서도 안된다. 믿음은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  The statement is not to be universalized and applied without exception, but neither is it to be localized and confined to the original disciples or ignored as having no practical value. Faith is an indispensable element in answer to prayer.

25절)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다면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처럼 당시는 서서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마가는 본문에서 응답되는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의 중요성을 동시에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에 앞서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응답받는 기도를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용서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다. 
  • Standing probably was the most common Jewish posture for prayer, but both standing and kneeling are well attested in the Old and New Testaments. Mark seems to have understood that forgiveness of others is another prerequisite for answer to prayer. Some think the verse indicates that Mark and his readers knew the Lord’s Prayer, but no confident decision seems possible. What is certain is that effective prayer must be offered in faith with a spirit of forgiveness.

  • It is possible then that 11:25 describes a corporate prayer by an oppressed community that is asking God to rectify the injuries it has suffered. In that case the request for justice is to be tempered by forgiveness. It must be tempered also by the recognition that oppressed groups can injure other people as well, a concern that the disciples’ own conduct justifies (9:34; 10:13, 37). Viewed in this light, a prayer for justice is also ultimately a prayer for reconciliation.

  • Jesus’ use of the word father at the end of 11:25 should not be overlooked. This is the first time in the Gospel of Mark that God is described in this way. Jesus has been described as God’s “son” in 1:11 and 9:7, but heretofore no one has referred to God as father. One of the major themes in the previous sections of the Gospel is the creation of a new family (3:31–35), in which the will of God is the defining factor. The reference to God as father here is entirely consistent with that passage. We might wonder then why we have not seen it before or why it appears here. The best answer is that in this passage the will of God is startlingly and clearly revealed. Against the backdrop of nationalistic dreams and all the roiling patriotic fervor,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are revealed to lie at the very center of God’s will.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성전 청결을 명하시고나서 이제 이 성전이 있는 산을 보시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전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명하여 옮기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고 또한 용서를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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