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결국 창조가 주는 선물과 복음이 주는 선물을 모두 손상하고 만다.(12)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독교적인’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중압감은 창조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조를 불완전하게 보는 전제는 기독교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흔히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1장.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므로 악은 결코 결정권이 없다고 확신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24)
* 종교개혁자들의 사례
가정생활 / 미술분야 / 음악분야 / 문학분야 / 과학분야 / 교육분야
- 복음이 어떻게 전혀 다른 별개의 두 세계관을 만들어 낼수 있는가? (중세 미술과 바로크 미술) (호튼, 30p) / 중세의 종교 인물화 - 렘브란트의 인물화(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미술이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현세적인 작업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 종교개혁가들의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태도 : 예배 안에서 말씀을 해방하고 창조 질서를 방해하는 예술을 금하고 싶어했을 뿐이다.(32) / 루터는 “나는 지나치게 영적인 일부 사람들의 항의처럼 예술을 폐지해야 하고 복음의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모든 에술과 특히 음윽을 예술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주신 분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33)
2장. 기독교와 문화 : 영역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
- 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고 가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뿐 아니라 양질의 여가시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으며 국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현세적 사명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55)
*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맞서는 그리스도 : 터툴리안, 재세례파, 퀘이커교도, 톨스토이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
3)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 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르도 : 이원론, 루터주의자
5)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 하나님의 주권은 문화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개혁주의 전통
3장. 기독교와 학문 :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 바울 사도가 공격한 대상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일반적 동향이었다.(92)
- 바울 사도는 땅의일을 하늘의 일과 혼동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자연 계시를 사용해 땅에서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를 놓은 다음, 특별 계시로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계에 돌어서자마자 사다리를 내버림으로써 합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바울 사도는 현세적 세계관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했다.(95)
- 자신이 가진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든 알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두 요소는 우리 생각을 형성하는 세상의 힘과, 우리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성경의 진리다.(96)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섭리에 따라 유지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금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현세적인 활동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다니엘과 요셉의 예, 101)
- 기독교인은 일반 은혜의 분야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지만, 되찾거나 회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종사해야 한다.(102)
4장. 기독교와 예술1 :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풍부한 다양성을 환원주의에 따라 단편화해서 성경을 교재로 이해하는 관점을 경계해야 한다.
- 예수님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술가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교육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예술적 흥취를 돋우는 것이다.(118)
- 예술을 은혜의 수단과 혼동할 때, 우리는 예술과 은혜를 모두 손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122)
- 종교개혁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난 특징은 기독교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예술로 하여금 주어진 소명에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성경에 입각한 종교를 예술적 노력과 가장 상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125)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 활동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하는 태도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135)
6장. 기독교와 과학 :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
- 현대 문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마련된 처소에 과학을 봉인하려고 애써왔다.(174)
- 카이저는 과학이 꽃피우는데 필수적인 네가지 신학적 기초가 있다고 주장한다. : 1) 세계의 이해가능성, 2) 하늘과 땅의 일체성, 3) 자연의 상대적 자율성, 4) 치유와 회복의 사역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므로, 우주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양식이나 법칙을 알아내려고 탐구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179)
-루터, 칼빈 그리고 여러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은 교회의 권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182)
- 자연과 은혜는 하나님이 실제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두 개의 분리된 나라, 혹은 영역이다. 자연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이성과 관찰에 바탕을 둔 기술과 과학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죄 용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결국 두 나라를 하나님 안에서 융화할 수 있는데, 자연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183)
- 신앙이 비합리적, 비경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과학의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두 영역을 통합하는 작업은 지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결국 칸트는 신앙이 본체계(정신계)에 속하며 과학적 탐구는 현상계와 연관된다고 주장했다.(185) / 칸트는 신앙을 본체계로 안전하게 옮겨 지적, 과학적 비평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종교가 무의미 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 상식실재론, 증거주의
7장. 기독교와 직업 : 일과 휴식
- 우리는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자진해서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는 안된다.(209)
- 기독교인이 월요일 아침에 일허라 가는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정해 놓으신 자신의 소명에 종사하기 위함이다.(210)
-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결국 자기 일에 관심이 제일 적은 사람으로 드러날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인상은 사람을 고용하거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마음에 대체로 남아 있다.(211)
- 성경적 관점은 현세적인 활동에 성실하라고 요청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한다.(218)
8장. 기독교와 현대 세계 : 미쳐 버린 세계
- 결국 진보에 대한 급진적 생각때문에 영향력있는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미신과 신앙의 교의에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 헤겔의 등장으로 급진적 진보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243)
- 기술은 진보의 정신에 외형을 부여했고 철학자와 상인은 모두 미래를 지향하는 공통된 성향을 보였다.
- 현대성은 도시와 영향력있는 행정 중심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248)
- 신학자와 목회자는 현대성이 제공하는 온갖 바알에 굴복해 인종차별주의, 환경착취,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과학 기술, 권력 숭배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사용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신 역사의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의지해야 한다.(253)
결론 :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성경의 창조 교리 : 세상 안에 있다. / 세상이 사탄이나 악한 세력에 속하는 것으로 무조건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과 반대로 하나님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이라고 친히 공표하신다.(시 50:12)
* 성경의 구속 교리 : 하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영지주의자는 육신, 물질적 존재, 시간, 역사,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속을 바라보지만, 신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시간, 역사, 이세상 안에서 육체와 영혼 모두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묘사한다.(262)
-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펩 도나휴의 격려 연설이 설교를 대신하고, 예배가 시장 중심의 소비주의로 변모되고, 교회 안에서 확고한 성경적 핵심이 치유주의적 범주나 정치적 범주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다.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실용적인 쟁점이 잘 훈련된 제자도를 대신하고, 가시적인 인기와 숫자적인 성공을 목회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다.(263)
- 승리의 직설법(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는 선포)뒤에는 명령법(거룩하다는 사실에 모순하지 않는 태도로 생활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지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이는 거룩함의 진보에 따라 결코 좌우되지 않지만,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이 두가지를 모두 지녀야 한다.(264)
* 창조와 구속 :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 범속한 것과 거룩한 것의 분리를 비롯해 평범한 인가느이 삶에 닥친 이 모든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절망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하셨다.(270)
-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있으려면, 우리는 현세적인 정의, 태도, 사고방식, 양식이 자신의 신념과 표현을 형성하도록 묵인할 때가 언제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잘 알 필요가 있다.(275)
- 모든 삶은 거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평범한 것이 가치있고 훌륭한 까듥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의 주인이듯이 범속한 것의 주인이기도 하시다.(282)
- 우리에게는 자동차 정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나 심장 절개수술을 위한 성경적 원칙이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기독교 음악, 기독교 서적, 기독교 미술, 기독교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286)
- 많은 신자는 자기 일이 구체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창조가 창조 자체의 정당한 권리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소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288)
- 현대성은 종교 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부인함으로써 신학이 주는 풍성한 복을 현대 사회의 재앙과 우상으로 만들었다. / 민일 우리가 거룩성에 대한 의식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거룩성의 회복은 은혜를 입으려고 우상들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93)
'책읽기 > 기독교 세계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밀한 세계관(스티브 윌킨스 / 마크 샌포드, IVP) (0) | 2020.03.26 |
---|---|
역사관의 유형들(데이빗 베빙턴) (0) | 2019.09.27 |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제임스 스미스, 2019년 5월 28일-베리타스 포럼 고려대) (0) | 2019.05.30 |
광장에선 기독교(미로슬라브 볼프) (0) | 2017.09.27 |
세계관 종교 문화(안점식, 죠이선교회) (0) | 2017.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