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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God dremembered Noah and all the beasts and all the livestock that were with him in the ark. And eGod made a wind blow over the earth, and the waters subsided. fThe fountains of the deep and fthe windows of the heavens were closed, the rain from the heavens was restrained, and the waters receded from the earth continually. At the end gof 150 days the waters had abated, and in the seventh month, on the seventeenth day of the month, the ark came to rest on the mountains of hArarat. And the waters continued to abate until the tenth month; in the tenth month, on the first day of the month, the tops of the mountains were seen.

d ch. 19:29; 30:22; Ex. 2:24; 1 Sam. 1:19

e Ex. 14:21

f ch. 7:11

f ch. 7:11

g ch. 7:24

h 2 Kgs. 19:37; Isa. 37:38; Jer. 51:2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8:1–5.

 

 

1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 안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셨다. 이 홍수 사건의 반전은 바로 이 하나님의 기억하심에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혹은 당신이 누군가와 맺은 언약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행복, 복지를 위하여 행동하기 시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멈추시고 남은 자들을 위하여 시작하신 행동은 바로 바람을 땅위에 불게하심으로 물이 줄어들게 하신 것이었다. 

(창 9:15, 개정)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창 19:29, 개정)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 30:22, 개정)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출 2:24, 개정)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 32:13, 개정)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시 25:6-7, 개정) 『[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시 74:2, 개정)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계 16:19, 개정)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삼상 1:19-20, 개정) 『[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 창세기 6:9–9:19 내용에 따른 홍수 기사 분해

A. Transitional introduction (6:9–10)

    B. Violence in creation (6:11–12)

        C. First divine speech: resolve to destroy (6:13–22)

            D. Second divine speech: “enter ark” (7:1–10)

                E. Beginning of flood (7:11–16)

                    F. The rising flood (7:17–24)

                        G. God remembers Noah (8:1)

                    F’ The receding flood (8:1–5)

                E’ Drying of the earth (8:6–14)

            D’ Third divine speech: “leave ark” (8:15–19)

        C’ God’s resolve to preserve order (8:20–22)

    B’ Fourth divine speech: covenant (9:1–17)〈–〉 6:18

A’ Transitional conclusion (9:18–19)

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홍수 기사의 정점은 8:1이다. 8:1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탄 모든 짐승들을 기억하였다. ‘자칼’(זָכַר, 기억하다)은 잊고 있던 것을 갑자기 생각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칼’은 종종 하나님이 자신이 한 언약과 약속에 신실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출애굽기 6:4에서 하나님은 이집트 땅에서 노예 생활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였다고 한다.4) 이 말씀과 함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은총을 베풀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8:1의 ‘자칼’은 하나님이 창세기 6:18–20에서 한 약속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나타낸다.5)

4) 창세기19:29에서하나님은아브라함을기억하고롯을소돔과고모라의멸망으로부터구해주며, 창세기30:22에서는라헬을기억하고요셉을잉태하게해준다.

5) Victor P. Hamilton, Genesis 1–17, 299.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82–38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69–270.

 

기억하다, 권념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자칼’이다. 특히 기억하는 주체가 누구이냐가 중요한데 하나님이 이 기억하심의 주체가 되었을때 심판과 은혜가 베출어지는 단초가 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혹은 우리가 그 기억의 주체가 될때 무엇을 기억하느냐가 중요한데 이 기억함이 바로 우리의 예배의 본질이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신다. 

“기억하라 예수의 산같은 믿음을”

6. Remembering God is often a dynamic phenomenon that leads to the situation of the believer or the believing community being transformed, especially in the Psalms. Recalling God’s past saving work becomes a bridge from a grim present to a blessed future. In Ps 77:11 [12] his saving activity at the Exodus is seen to be relevant to Israel’s disastrous situation and an implicit promise that the God who saved them will save again. In 143:5 the recollection of God’s past salvation changes despair into hope and prayer. Jonah, at death’s door, remembered God and turned to him in a prayer for rescue (Jon 2:7 [8]). In Ps 78:35 seeking God in repentance is triggered by memories of God as Savior. Similarly, in Isa 63:11, after sinning and being punished, Israel is represented as recalling the Exodus and turning back to God, while in Zech 10:9 those of Israel still in exile were to remember God and turn to him again in faith, as a prelude to their return to the land. Many of these examples focus on the Exodus not simply as an event in history but as a window through which to glimpse God’s redemptive will for his people and individual believers in every generation. To this end the Exodus was to be personally remembered in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Exod 13:3; Deut 16:3).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102–1103.

 

그렇다면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신것은 어떤 의미인가? 물을 물러가게 하거나 증발시키기 위해서 바람을 불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이 본문을 읽으면서 창 1:2을 떠올리게 된다. 

(창 1:2, 개정)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본문에 부는 바람과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영은 모두 ‘루아흐’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이다. 땅이 혼돈한 상황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심으로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난것처럼 하나님께서 바람을 불게하시자 물에 잠겨버려 혼돈가운데 있던 지구에 물이 줄어들어 산봉우리가 드러나게 되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땅에 ‘루아흐’(רוּחַ)를 보내는데, 이는 영 또는 바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길가메쉬와 아트라하시스에서도 남풍이 등장한다. 남풍이 강렬하게 불자 산들이 물에 잠기게 되고 폭풍이 몰아친다. 제7일에 남풍이 수그러들자, 바다는 잠잠해 지고 홍수는 멈추게 된다.6)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에서 바람은 자연 현상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루아흐’는 단순한 바람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하나님이 보낸 바람을 일반적인 자연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 바람 때문에 폭풍이 일어나고 지구를 덮고 있는 물은 광란의 춤을 추어야 한다.7) 그러나 하나님이 보낸 ‘루아흐’는 메소포타미아 홍수 설화에 있는 그런 자연 현상을 일으키지 않고, 물이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사칵’(שָׁכַךְ)은 ‘줄어들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잠잠해지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물이 감소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방주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리라고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억함과 물의 감소는 노아의 방주를 아라랏 산에 도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렇듯 창세기 8:1의 하나님의 기억함과 하나님의 바람 또는 신은 파멸과 재앙의 수단이 아닌 살아남은 피조물의 회복의 출발점이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낸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8:1은 창세기 1:2의 지구의 상태를 연상시킨다. 창세기 1:2에서 지구가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음이 그 위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신(루아흐, רוּחַ)이 수면 위에 운행하였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8:1의 지구는 대홍수로 인하여 혼돈한 상태이며 방주를 제외하고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상태이며, 그리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물이 지구를 뒤덮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나님이 ‘루아흐’(רוּחַ)를 보낸다. 창세기 1장의 둘째 날 창조에서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던 물이 한 곳에 모여 뭍이 드러났던 것처럼, 창세기 8:1에서는 하나님이 루아흐를 보내자 물이 감소하여 산봉우리들이 드러나게 만든다. 이러듯, 창세기 8:1의 ‘루아흐’는 하나님의 신 또는 성령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처럼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의 표출임에는 틀림이 없다.8)

6) ANET, 94.

7) 수메르 홍수 설화에서 영웅 지우수드라가 탄 배는 폭풍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다(ANET 44).

8)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8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0–271.

 

2-5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서 150일 후에 줄어들었다. 일곱째달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고 이후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열렸던 것(7:11)들이 닫힘으로 홍수가 마쳐지고 있다. 

‘닫다’의 히브리어 ‘와이사케루’(וַיִּסָּֽכְרוּ)는 동사 ‘사칼’(סָכַר)의 닢알 수동형이다. 창세기 7:11에서 깊음의 샘이 터지고(닙케우, נִבְקְעוּ֙)하늘의 창이 열리는(닢타후, נִפְתָּֽחוּ)것을 묘사하는 동사들도 닢알 수동형으로 사용되었다. 홍수의 시작과 종료에서 모두 수동형 동사를 사용하여, 홍수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9) 창세기 8:3은 창세기 7:24를 이어가고 있다. 물이 150일 동안 땅에 창일한 후 마침내 물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9) Victor P. Hamilton, Genesis 1–17, 300.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1–272.

 

창세기 8:4은 물이 감소하기 시작하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7월 17일은 홍수가 시작되었던 2월 17일(창 7:11)로부터 정확하게 5개월 후의 일이다. 아라랏 산은 고대 앗시리아 문헌에서 우라르투(Urartu=Ararat)로 기록되어 있다.10)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우트나피스팀이 인류의 멸망을 슬퍼하는 동안 갈대배가 니느웨에 있는 니무쉬 산에 도착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라르투 산은 터키와 러시아 이란 3개국의 접경에 위치해 있는 빅 아리 다(Byk Ari Da) 산으로 본다. 이 산은 높이가 약 5,185m이며,11)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발원지에 인접해 있다.12) 하지만 이 산을 아라랏 산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성경은 방주가 도착한 곳을 아라랏의 산들(하레 아라랏, הָרֵ֥י אֲרָרָֽט)이라고 한다. 성경은 방주가 도착한 곳을 아라랏 지역에 있는 산들이라고 아주 포괄적인 지역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13)

‘안착하다’의 히브리어 ‘와타나흐’(וַתָּ֤נַח)는 동사 ‘누아흐’의 칼 능동형이며, 안식일 규정에서 ‘쉬다’의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창세기 8:4에서는 방주가 홍수의 격랑으로부터 아라랏 산에 안전하게 정박하였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안식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 이유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600년 7월 17일은 쥬빌리 달력에 따르면 금요일이다.14)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을 고려할 때 동사 누아흐의 사용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동사 누아흐(נוּחַ)는 노아(נֹח)의 이름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10) Kenneth A. Mathews, Genesis 1–11:26, 385–386.

11) 아라랏 산은 열왕기하 19:37, 이사야 37:38, 예레미야 51:27에서도 언급되며, 토비야 1:21도열왕기하19:37처럼산헤립의자식들이아버지를살해한후도망간장소로언급되고있다.

12) Sarna, Genesis, 57.

13) Jubilees 5:27은 방주가 도착한 산을 아라랏의 산들 중에 하나인 루발 산 꼭대기에 도착했다고한다.

14) 쥬빌리 카렌다는 안식일을 고정시키기 위해 일년을 7×52로 계산하여 일년을 52주 364일로 만든달력이다. 쥬빌리달력은매7년마다추가로한주를더하여그레고리안달력의365을기준으로 볼 때 부족한 하루를 7년마다 해소시켰다. S. Najm and Ph. Guillanume, “Jubilee Calendar Rescued from the Flood Narrative,” Journal of Hebrew Scriptures 5–1 (2004): 1–11. Gordon J. Wenham, Genesis 1–15, 18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2–273.

 

하나님의 기억하심으로 이제 반전이 시작되었다. 150일동안 홍수는 이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2월 17일 시작된 홍수는 7월 17일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른 것을 기점으로 150일동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홍수가 줄어드는데 있어서 인간일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물을 물러가게 하셨고 인간을 이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것 뿐이다. 다른 홍수의 설화와는 달리 창세기의 기록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대상은 노아(인가)만이 아니라 모든 들짐승과 가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자연은 총체적인 타락을 경험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총체적인 구원을 이루어내고 계신 것이다. 홍수를 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홍수를 물러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이 바랄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억하심속에 붙들리는 것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바랄때,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할 때 하나님을 우리를 기억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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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And zI will pour out on the house of David and the inhabitants of Jerusalem a spirit of grace and zpleas for mercy, so that, awhen they look on me, on him whom they have pierced, bthey shall mourn for him, cas one mourns for an only child, and weep bitterly over him, as one weeps over a firstborn. 11 oOn that day dthe mourning in Jerusalem will be as great eas the mourning for Hadad-rimmon in the plain of Megiddo. 12 The land shall mourn, feach family1 by itself: the family of the house of David by itself, and their wives by themselves; the family of the house of gNathan by itself, and their wives by themselves; 13 the family of the house of Levi by itself, and their wives by themselves; the family of hthe Shimeites by itself, and their wives by themselves; 14 and all the families that are left, each by itself, and their wives by themselve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12:10–14.

10절) 내가(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찌른 분, 나를 바라볼 때 그들은 그분을 위하여 애통할 것인데 마치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는 것같고 그분을 위해서 마치 장자를 위해서 통곡하는 것 같을 것이다. 
부어주다라는 단어 ‘샤팍’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를 묘사한다. 
Furthermore, the term wĕšāpaktî can describe the manifestation of God’s grace in the eschatological era. In a notable example, the Lord will pour out his Spirit on all mankind (Ezek 39:29; see Acts 2:16–21). In another passage, Joel 2:28–29 declares,
And afterward,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Even on my servants, both men and women,
I will pour out my Spirit in those days.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62–363.

본문에서 심령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루아흐’라는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구약에서는 성령, 하나님의 영을 상징한다. 본문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The word for “spirit” (rûaḥ) has evoked extensive discussions in v. 10, Zech 13:2, and throughout the Old Testament.428 The diversity of translations that rûaḥ may suggest has encouraged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the “spirit.” Some understand rûaḥ as a reference to the Spirit of God, that is, the Holy Spirit, 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 For example, Barker contends that this Trinitarian view is “in keeping with what appear to be parallel passages (Isa 32:15; 44:3; 59:20–21; Jer 31:31, 33; Ezek 36:26–27; 39:29; Joel 2:28–29). Because of the convicting work of God’s Spirit, Israel will turn to the Messiah with mourning.”429 Barker is not wrong in affirming that rûaḥ can refer to God in the Old Testament, but his interpretation of v. 10 is far from certain.
McComiskey does not even acknowledge the possibility of a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rûaḥ.430 McComiskey revisits the occurrences of rûaḥ in previous passages in Zechariah. In the three texts where rûaḥ occurs, the word “spirit” has a pronominal suffix that refers the noun back to God himself. Zechariah 4:6 and 6:8 refer to “my Spirit,” where the Lord does the speaking. Zechariah 7:12 contains “his Spirit,” but again the clear antecedent to the pronoun is God. But no markers exist in 12:10 to indicate that the “spirit” Zechariah introduced refers to the Lord.
The “spirit” in v. 10 portrays the new heart God’s people possess. When “spirit” occurs in a “spirit of” construction, the expression speaks of an emotional disposition, such as a “spirit of jealousy” (Num 5:14) and a “spirit of justice” (Isa 28:6).431 Ezekiel 36:26 exemplifies this use of the word rûaḥ: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Like that miraculous metamorphosis in Ezek 36, God’s work of grace in his people will transform their hardened sinful hearts into hearts characterized by grace, faith, and repentance. This change does not rest on human resolve or effort. Instead, the heart of “grace and supplication” represents the outcome of God’s gracious gift to them.

428 דוּחַ. HALOT, 1197–1201. TWOT, 3:1202–20; TDOT, 13:361–402.
429 Barker, “Zechariah,” 683; see Unger, Zechariah, 215–16.
430 McComiskey, Zechariah, 1214; see Merrill, Zechariah, 318–19.
431 Meyers and Meyers, Zechariah 9–14, 335.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63–364.

은혜(은총-Grace-hen)와 간구(supplication-타하눈)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은혜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라면 간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Grace and supplication” describe the spirit that the Lord will bestow on the otherwise recalcitrant nation.432 “Grace” (ḥēn) represents the mercy that God granted to an undeserving people.433 Some commentators wrongly translate the word as “compassion” or “pity,” missing the theological point of the passage.434 Grace represents God’s favor granted to those who deserved anything but divine blessing. This grace led the people to repent for the sin of piercing the one whom God had sent to deliver them. Grace also moved the nation to seek forgiveness. In turn, the forgiveness that only the Lord could extend resulted in a restored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is people.435 The theological message parallels that in Rom 2:4b: “God’s kindness leads you toward repentance.”
Coupled with “grace,” Judah will also receive “supplication” (taḥănûnîm).436 HALOT defines the term as “pleading,” a word which has far greater emotive connotations than does “supplication.” The word taḥănûnîm communicates pleading for grace from the Lord. A clear parallel appears in Ps 143:1: “O Lord, hear my prayer, listen to my cry for mercy [taḥănûnay]; in your faithfulness and righteousness come to my relief.”437 Grace signifies the blessing that comes from the Lord alone; no one other than he can give the gift of grace. Supplication, or pleading for grace, represents the human side of the equation. Miraculously, the people of Judah would soon long for her relationship with their God to be restored.

432 The construct relationship, “spirit of grace and supplication,” expresses an attributive idea (see GKC § 128 p)—it describes the nature of the spirit/heart that Judah will receive from God.
433
חֵן. HALOT, 332; TDOT, 5:22–36.
434 Hanson, Dawn of Apocalyptic, 356.
435 Merrill, Zechariah, 319.
436
תַּחֲנוּנִים. HALOT, 1718–19.
HALOT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 ed. L. Koehler and W. Baumgartner, trans. M. E. J. Richardson
437
תַּחֲנוּנַי.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64–365.

이러한 놀라운 유다의 재기, 부흥은 본 스가랴서뿐만 아니라 구약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 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이 대표적이다. 
This miraculous revitalization of Judah does not emerge in the book of Zechariah only. It is also the theme of Ezek 37, comprising the revitalization of the valley of dry and disheveled bones (37:1–14) as well as the prophecy regarding the pieces of wood that symbolized the eschatological establishment of Judah’s new kingdom (37:15–28). In this future era “the nations will know that I the Lord make Israel holy, when my sanctuary is among them forever” (Ezek 37:28). Isaiah’s prophecy regarding the coming Branch (Isa 11:1–16) and Micah’s mountain of the Lord oracle (Mic 4:1–8) both foretell a similar message of God’s people gathered and restored so that they may “walk in the name of the Lord our God for ever and ever” (Mic 4:5b).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65.

본문에서 그들이 찌른 그분이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이를 역사적인 특정한 인물로 보는가 하면 이스라엘 나라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인물로 보는가 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타낸다고 보기도 한다. 
To what might Zechariah compare the depths of grief and mourning the nation would suffer once they received the new spirit from the Lord? Perhaps no sorrow in human experience could compare to the depths of grief parents feel at the death of “an only child.” The prophet chose the word yāḥîd to express the idea of “only child.”459 This same word occurs prominently in Gen 22:2, 12 to emphasize Isaac’s status as Abraham’s only son, and to make the reader understand the anguish of the situation when God commanded him to sacrifice the boy. Although “only child” is a correct translation, this English idiom fails to convey the full emotive force of the term in the biblical account. The word yāḥîd also describes Jephthah’s daughter whom he had vowed to sacrifice to the Lord (Judg 11:34). There is little doubt that Zechariah appreciated the poignancy carried by the unusual word yāḥîd in Gen 22 and Judg 11. Particularly in the Abraham and Isaac passage, the personal pathos of the circumstances was compounded by the fact that through Isaac the covenant promises of God to the patriarch would flow. Without the son, the promise of God could not come to fruition. The phrase “firstborn son” translates the Hebrew word bĕkôr, and reinforces the “only child” motif in the verse.460 The only child theme underscores the intensity of grief, mourning, and guilt for the murder of the pierced martyr.
459 יָחִיד. HALOT, 406–7.
460
בְכוֹר. HALOT, 131.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68–369.

The New Testament alludes to Zech 12:10 on two separate occasions. First, John referred to v. 10 when presenting the death of Jesus as a fulfillment of Old Testament prophecy. John wrote, “as another scripture says, ‘They will look on the one they have pierced’ ” (John 19:37; see v. 34).461 Second, in introducing his vision on the isle of Patmos, John presented the “son of man” (Rev. 1:13) with the following doxology: “Look,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and every eye will see him, even those who pierced him; and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will mourn because of him. So shall it be! Amen” (v. 7).462
461 M. J. J. Menken, “The Textual Form and the Meaning of the Quotation from Zechariah 12:10 in John 19:37,” CBQ 55 (1993): 494–511.
462 C. M. Tuckett, “Zechariah 12:10 and the New Testament,” in The Book of Zechariah and Its Influence, ed. C. Tuckett (Burlington: Ashgate, 2003): 111–21.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69.

11절) 그날에 예루살렘안에 슬픔이 있을 것인데 므깃도 평야 하다드림몬을 위한 슬픔과 같이 클 것이다.(므깃도에서의 요시야 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본문의 하다드림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로는 아합의 죽음(왕상 22:34)을 나타낸다고도 하고 둘째로 이방 우상의 죽음을 슬퍼하는 예식이라고도 하는데 우가릭 문서에 따르면 하다드는 가나안의 폭풍의 신으로, 림몬은 앗수르의 폭풍 신이라고 한다. 셋째로 지역명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이는 요시야 왕의 죽음을 나타내는 므깃도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는 것이다.(왕하 23:228-30; 대하 35:21-25)
One approach takes Hadad Rimmon as the name of an individual person, in which case the translation might mention mourning “for” or “over” Hadad Rimmon, as in the RSV: “the mourning in Jerusalem will be as great as the mourning for Hadad-rimmon” (cf. REB “over”). As a variant of this viewpoint, some have made this Hadad Rimmon responsible for the death of Ahab (1 Kgs 22:34).467 Ancient historical accounts leave no record of a person with this name.
A second interpretation views Hadad Rimmon as a reference to a Canaanite religious festival that mourned the ritual death of the god.468 Hadad does occur as the name of a Canaanite storm god in the Ugaritic Texts.469 Rimmon may be related to the Assyrian storm god Ramimu, otherwise known as Adad.470 In a related view, Ramman may have been an Aramean deity.471 For still another take on the question, the wailing in Hadad Rimmon may refer to weeping for the Babylonian god Tammuz (Ezek 8:14–15). In an era when biblical prophets had long focused their efforts on attacking every vestige of paganism,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why Zechariah would make such an overt parallel between a pagan mourning ritual and the appropriate sorrow felt by God’s people for their role in the piercing of the Messiah.
A third interpretation treats Hadad Rimmon as a place name.472 The suggestion makes sense in the context. Further, the qualifying phrase, “in the plain of Megiddo,” may have differentiated one Hadad Rimmon from another, although this observation cannot be proven. Since King Josiah was slain in the valley of Megiddo (2 Kgs 23:28–30), a reference to the Megiddo valley might evoke powerful memories of profound national grief. The reference to mourning for the death of Josiah in 2 Chr 35:21–25 may add further significance to the mention of Megiddo, but this notion is conjectural.473 Since no record of a place bearing this name survives, interpretative certainty remains out of reach. Nonetheless, the place name viewpoint offers the most promising solution.

REB Revised English Bible
467 Surveyed by Baldwin, Zechariah, 193.
468 Meyers and Meyers, Zechariah 9–14, 343–44.
469 UT, § 749.
470 W. von Soden, Akkadisches Handwörterbuch (Wiesbaden: Otto Harrassowitz, 1972), 2:950.
471 J. C. Greenfield, “The Aramean God Ramman/Rimmon,” IEJ 26 (1976): 195–98.
472 NJPS translates “at Hadad-rimmon.” For a thorough survey of the development of this interpretation, see Mitchell, Zechariah, 332–33.
473 For possible New Testament appropriation of Zech 12:11, see J. Day, “The Origin of Armageddon: Revelation 16:16 as an Interpretation of Zechariah 12:11,” in Crossing the Boundaries: Essays in Biblical Interpretation in Honour of Michael D. Goulder, ed. S. E. Porter, P. Joyce, and D. E. Orton (Leiden: E. J. Brill, 1994), 315–26.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70–371.

12-14절) 온땅의 각 족속들의 애통함을 다루는데 다윗의 족속과 그들의 아내들, 나단의 족속과 아내들, 레위의 족속과 아내들, 시므이의 족속과 아내들, 그리고 남은 족속과 그들의 아내들이 모두 애통할 것을 말한다. 
The “house of David” refers to the entire dynastic line as it does in 12:7, 8, 10, but “the house of Nathan” represents one of the few questions in this section of chap. 12. The uncertainty arises from the number of individuals named Nathan in the Old Testament, numbering at least seven. Nathan the prophet offers an attractive option (2 Sam 11–12) since he would represent the prophetic tradition and their culpability for the sin against the Lord. However, nowhere in the Old Testament can one detect evidence of a prophetic dynasty.475 Consequently, it is quite unlikely that a “house of Nathan” could signify Nathan the prophet. As a result, most conclude that Nathan in 12:12 refers to David’s son (2 Sam 5:14; 1 Chr 3:5; cf. Luke 3:31).
“The house of Levi” (v. 13) represents the whole priestly clan in a similar way that “the house of David” stands for the entire royal line. Following this interpretation, the priests joined the royal house in conspiring against the martyr. The priests also served as accomplices with the king in their attack on Jeremiah (Jer 37:15; 38:4). Numbers 3:18 states that Levi had a son named Shimei, presumably the same individual mentioned here in v. 13. If “Nathan” in v. 12 speaks of David’s son, then Zechariah lists two representatives of the royal line and two who stand for the priesthood in Judah.
Zechariah began his catalog of mourners with the royal line and the priests to charge these two groups with the greatest responsibility for the crime against the martyred Messiah. Yet despite the role the social leaders played in the death of the Messiah, Zechariah clearly stated that all in society bore responsibility for the deed. Unger concludes that “the sorrow will be for sin, and deep personal and national iniquity in putting to death the One who was resurrected and has the keys of hell and death.”476

475 Meyers and Meyers, Zechariah 9–14, 346.
476 Unger, Zechariah, 21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71–372.The “house of David” refers to the entire dynastic line as it does in 12:7, 8, 10, but “the house of Nathan” represents one of the few questions in this section of chap. 12. The uncertainty arises from the number of individuals named Nathan in the Old Testament, numbering at least seven. Nathan the prophet offers an attractive option (2 Sam 11–12) since he would represent the prophetic tradition and their culpability for the sin against the Lord. However, nowhere in the Old Testament can one detect evidence of a prophetic dynasty.475 Consequently, it is quite unlikely that a “house of Nathan” could signify Nathan the prophet. As a result, most conclude that Nathan in 12:12 refers to David’s son (2 Sam 5:14; 1 Chr 3:5; cf. Luke 3:31).
“The house of Levi” (v. 13) represents the whole priestly clan in a similar way that “the house of David” stands for the entire royal line. Following this interpretation, the priests joined the royal house in conspiring against the martyr. The priests also served as accomplices with the king in their attack on Jeremiah (Jer 37:15; 38:4). Numbers 3:18 states that Levi had a son named Shimei, presumably the same individual mentioned here in v. 13. If “Nathan” in v. 12 speaks of David’s son, then Zechariah lists two representatives of the royal line and two who stand for the priesthood in Judah.
Zechariah began his catalog of mourners with the royal line and the priests to charge these two groups with the greatest responsibility for the crime against the martyred Messiah. Yet despite the role the social leaders played in the death of the Messiah, Zechariah clearly stated that all in society bore responsibility for the deed. Unger concludes that “the sorrow will be for sin, and deep personal and national iniquity in putting to death the One who was resurrected and has the keys of hell and death.”476

475 Meyers and Meyers, Zechariah 9–14, 346.
476 Unger, Zechariah, 219.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371–372.

은혜는 자격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그 은혜를 받기 위해서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은 용서이다. 용서라는 것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를 떠나셨다. 이제 용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을,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신다. 그분이 돌아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성전을, 하나님의 나라를 새롭게 세우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루살렘에 돌아오셨다.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게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목자의 음성, 하나님의 휘파람(10:8)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분의 부름을 듣고 나아가 애통해하며 용서를 구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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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Vision of Four Chariots
Again I lifted my eyes and saw, and behold, four chariots came out from between two mountains. And the mountains were mountains of mbronze. The first chariot had nred horses, the second oblack horses, the third pwhite horses, and the fourth chariot dappled horses—all of them strong.1 Then I answered and said to qthe angel who talked with me, “What are these, my lord?” And the angel answered and said to me, r“These are going out to the four winds of heaven, after spresenting themselves before tthe Lord of all the earth. The chariot with the black horses goes toward uthe north country, the white ones go after them, and the dappled ones go toward vthe south country.” When the strong horses came out, they were impatient to go and wpatrol the earth. And he said, “Go, wpatrol the earth.” wSo they patrolled the earth. Then he cried to me, “Behold, those who go toward uthe north country have set my Spirit at rest in uthe north country.”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슥 6:1–8.

스가랴의 마지막 환상은 붉은 말, 검정 말, 흰 말,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이끄는 네 병거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온 땅을 두루 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첫번째 환상과 유사하다. 마지막 환상은 첫번째 환상을 상기시키며 전체 환상을 마무리하고 있기에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절) 스가랴가 눈을 들어 두 구리산 사이의 네 병거를 바라본다. 
첫번째 환상이 한 밤중에, 마지막 환상이 새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구리산이 의미하는 바는 실제로 구리산인지, 구리빛깔이 나는 산인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새벽녁의 산의 색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는 어둠이 지나고 이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Many scholars believe that the first vision occurs at dusk and the eighth vision appears to Zechariah at dawn on the same evening. Some even explain the “mountains of bronze” as the color of the mountains when the dawning rays of the sun strike them.439 The suggestion that vision one commenced at dusk and vision eight began at dawn may seem attractive at first glimpse. However, the text does not confirm it.440 While acknowledging these similarities between visions one and eight, numerous important differences occur between the two visions. Among these many differences, the mountain motif represent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distinctives, a point that will receive attention later.441
439 Boda, Zechariah, 319.
440 G.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trans. D. M. G. Stalker (New York: Harper and Row, 1965), 2:287.
441 R. L. Smith, Micah-Malachi, 213. Mitchell comments that emending the word “myrtles” (
הַחֲדַסִּים) in 1:8, 11 to “mountains” (הֶהָרִים) further enhances the symmetry between the visions (Zechariah, 178). No evidence exists to justify such an emendation. The Masoretic Text reads well in its received form.
 George L. Klein, Zechariah, vol. 21B,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 & H Publishing Group, 2008), 183.

당시 병거는 이시대의 탱크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하는 대상이다. 
Chariots were the ancient equivalent of tanks, the key symbol of military power. These chariots were pulled by strong horses (v. 3), and there were four of them, the number of completeness. The heavenly army is finally on the mov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58.

2-3절) 첫째 병거는 붉은 말, 둘째 병거는 검은 말, 셋째 병거는 흰 말, 넷째 병거는 어룽진 말이 이끌었다. 마지막에 건장한 말이 개역개정에서는 네번째 어룽진 말만을 꾸미는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병거를 끄는 말이 건장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 (슥 6:2-3, 새번역)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끌고 있고,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얼룩말들이 끌고 있었다. 말들은 모두 건장하였다.』

4-8절) 스가랴는 천사에게 이것들이 무엇인지 묻는다. 천사는 온세상의 주앞에 서있던 하늘의 네 바람이라고 대답한다. 
- (슥 6:5, 새번역) 『그 천사가 나에게 대답하였다. "그것들은 하늘의 네 ㉠영이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뵙고서, 지금 떠나는 길이다. / ㉠또는 '바람’』
여기서 바람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자연적 현상으로의 바람, 사람의 숨/호흡, 하나님의 영의 의미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네 바람(영)은 하나님의 메신저로 하늘의 천상회의에서 온세상을 향해 가도록 명받았다. 이에 검정 말과 흰 말은 북쪽으로, 어룽진 말은 남쪽으로 향했다. 붉은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특징적이다. 동쪽은 아라비아 광야, 서쪽은 지중해 바다가 있는 지역으로 유다 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북, 남쪽이 주요 지역이었다. 북쪽은 바벨론, 앗수르, 페르시아 / 남쪽은 이집트가 있었다. 
Judah’s main enemies always came from the north (Babylon, Assyria, Persia) or the south (Egypt), since to the west is the Mediterranean Sea and to the east is the deser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58.

7절의 건장한 말들이 땅에 두루 다니더라는 말은 이 병거들이 역할을 보여준다. 이들의 임무는 첫번째 환상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땅을 정찰하는 것이었다. 
- (슥 1:10, 개정)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이어 8절은 북쪽으로 나아간 말들이 임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표현한다. 앞서 말한대로 주요 대적들이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 (슥 6:8, 새번역) 『천사가 나를 보고, 소리를 치면서 말하였다. "북쪽 땅으로 나간 말들이 북쪽 땅에서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
내 마음을 히브리어 ‘루히’이다. 이 단어는 내 영, 하나님의 영을 말한다. 시원케하다는 ‘헤니후’로 쉬게하다, 머물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북쪽으로 나아간 병거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여 바벨론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벨론에 노를 발하기 보다는 이 지역에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향시키거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과 결합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감동하기 위해서이다.(슥 2:6-13; 8:7-8,20)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향력(겔 37:1-14)을 뜻한다.(how주석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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