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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But we do not want you to be uninformed, brothers, about those who are asleep, gthat you may not grieve as others do hwho have no hope. 14 For isince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even so, through Jesus, God will bring with him jthose who have fallen asleep. 15 For this we declare to you kby a word from the Lord,4 that l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until mthe coming of the Lord, will not precede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16 For nthe Lord himself will descend ofrom heaven pwith a cry of command, with the voice of qan archangel, and rwith the sound of the trumpet of God. And sthe dead in Christ will rise first. 17 Then we who are alive, who are left, will be tcaught up together with them uin the clouds to meet the Lord in the air, and so vwe will always be with the Lord. 18 Therefore encourage one another with these words.
g [Lev. 19:28; Deut. 14:1; 2 Sam. 12:20–23; Mark 5:39]
h Eph. 2:12
i 1 Cor. 15:13; [2 Cor. 4:14; Rev. 1:18]
j 1 Cor. 15:18
k See 1 Kgs. 13:17
4 Or by the word of the Lord
l 1 Cor. 15:51
m See ch. 2:19
n See Matt. 16:27
o 2 Thess. 1:7
p [Joel 2:11]
q Jude 9
r Matt. 24:31; 1 Cor. 15:52
s 1 Cor. 15:23; [2 Thess. 2:1; Rev. 14:13]
t See 2 Cor. 12:2
u [Dan. 7:13; Acts 1:9; Rev. 11:12]
v See John 12:2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4:13–18.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1)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1) 또는 자는 자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4:13–18.
 
바울은 앞서 1-12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한 성도의 삶의 태도를 말했다. 이제 13-18절은 주의 강림과 죽은자의 부활에 대한 성도의 자세에 대해서 다룬다. 본서에서 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재림시 이미 죽은 성도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논란과 임박한 재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상생활을 소홀히 하는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짧게 이러한 주제를 언급했었다.(1:3, 10; 2:12, 19; 3:13)
 
13절)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죽음의 문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바울이 이런 가르침을 전할 새가 없이 급하게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에 대해서 소망없는 이들과 같이 슬퍼했다.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망없이 슬퍼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다. 당시 고대 그리스의 시인 데오크리투스는 당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그리스-로마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절망감을 ‘희망은 산자를 위한 것이다. 죽은 자는 희망이 없다’라고 묘사했다. 
no hope. The ancient Greek poet Theocritus concisely captures the widespread sense of hopelessness in the Greco-Roman world concerning life after death: “Hopes are for the living; the dead have no hope” (Idyll 4.42).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5.
 
‘자는 자들’에 해당하는 표현은 ‘톤 코이모메논’인데 이는 ‘잠을 자다’라는 의미의 ‘코이마오’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 표현은 신약에 19번 등장하는데 원래 의미인 '잠을 자다'라는 의미로는 5번, ‘죽다'라는 비유적 의미로는 14번이나 사용되었다. 실제 히브리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은 것을 흔히 잠자는 것으로 묘사했다.(창 47:30; 신 31:16; 왕상 2:10)
 
본문에서 죽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죽은 자들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바울은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라고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너희가 알기를 우리가 원한다’라는 표현을 강조하기 위한 이중 부정의 표현이다. 
 
‘소망 없는 다른 이’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지 않은 비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엘피스’ 즉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과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의 삶은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소망이 없는 이들에게 가까운 이들의 죽음은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14절) ‘우리가 믿을진대’라는 표현은 ‘에이 가르 피스튜오멘’이다. 이는 조건 접속사 ‘에이(if)’와 ‘피스튜오’의 직설법 동사’피스튜오멘’으로 ‘만약에 믿는다면’이란 의미가 아니라 ‘실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그렇다면’이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부활, 그분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연합한 성도들역시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고전 15:22)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더이상 죽음은 주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코어, 핵심이다. 주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분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주님은 여타 다른 죄있는 인간과 다를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야, 구속주임을 나타내셨고 이로 인해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되셨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라는 한글 표현은 오역에 가깝다. ‘안에서’라고 번역된 ‘디아’라는 전치사는 ‘~통하여, ~때문에, ~로 말미암아’의 의미를 지닌다. 한글 성경은 이를 ‘안에서’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를 통하여 자는 자들을’ 혹은 ‘자는 자들을 예수를 통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전자의 의미로 번역한다면 ‘예수를 통하여, 예수를 말미암아 죽은 자들’은 순교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 ‘죽은 자들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데리고 오시리라’오 번역된 ‘악세이’는 원형인 ‘아고’의 미래 능동태 직설법으로 ‘인도하다, 붙잡아 함께 인도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하늘에서부터 성도들을 데리고 땅으로 오신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 ‘악세이’가 가정법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직설법 미래형으로 쓰인 것은 장차 이 일이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분의 오심, ‘파루시아’의 때에 주님과 함께 죽은 자들이 함께 온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15절) 바울은 이 부활과 재림에 대한 교훈이 자신의 사색이나 유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이를 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주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기록된 복음서의 말씀중에 본절과 같은 내용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이 기간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전해들은 것일 수 있다. 또한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로 받은 말씀을 근거로 이 본절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행 16:6; 18:9; 22:18; 고전 7:10, 40) 
 
‘강림’은 ‘파루시안’으로 이 원형 ‘파루시아’는 왕이나 황제가 지방의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를 위해서 환영행사가 있었고 황제가 내리는 상에 대한 시상식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파루시아는 그 도시에 큰 영광이요 기쁨이 되었다.(2:19; 3:13)
‘우리 살아 남아있는 자’는 바울과 그의 일행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비롯한 당시 살고 있던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앞서다’의 의미로 번역된 ‘프다소멘’은 원형인 ‘프다노’인데 앞서 2:16에서 ‘임하다, 도착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었는데 본절에서는 ‘앞서다, 앞지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5절에서 바울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주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은 보지 못하고 산자들만 재림을 맞이 할 것이라고 혹은 재림시의 순서를 강조하는 잘못된 가르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관심사는 부활 순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산자나 죽은 자나 예수의 재림시에 재림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재림에 대한 잘못된 신앙, 소망없는 자들을 향해서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Lord’s word. The second reason for hope is grounded in Jesus’ words, which may refer to a saying of Jesus not recorded in the Gospels (John 21:25), a paraphrase of Jesus’ end-time teaching (Matt 24; Mark 13), a general summary of Jesus’ teaching, or a teaching revealed to Paul on the Damascus road or elsewhere. Paul is giving not merely his opinion but an authoritative teaching of the Lord Jesus himself. Jesus’ words emphasize that living believers “will certainly not precede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All believers—the deceased-but-now-resurrected ones (1 Thess 4:14, 16) and the living-but-now-transformed ones (1 Cor 15:51–52)—will share equally in the glorious “coming of the Lord.” Paul employs yet again (1 Thess 2:19; 3:13) a term (Greek parousia) commonly used to describe the coming of an emperor, general or other dignitary into a city with great pomp and celebration (see v. 17 and note).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5–2156.
 
16절) 본절은 ‘호티’(for)라는 접속사로 시작되는데 이는 15절의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와 연결되는 단락으로 첫번째가 15절 하반절이고 이것이 두번째 단락이다. 
원문은 ‘호티 아우토스 호 퀴리오스’로 친히라는 ‘아우토스’는 ‘큐리오스’를 수식하는 것으로 ‘주께서 친히’이다. 한글 번역은 이를 분리시켜 번역했다. 즉 재림의 날에 이 땅에 오시는 분은 천사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주님 자신이신 것이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호령’으로 번역된 ‘켈류스마티’의 원형 ‘켈류스마’는 ‘외침, 명령, 호령’의 의미로 권위있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으로 사냥꾼이 사냥개에게 내리는 명령, 선장이 노잡이에게 내리는 명령,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의미한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사장의 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아르캉겔루’는 ‘천사장의 음성’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르캉겔루의 원형 ‘아르캉겔로스’는 ‘우두머리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르코’와 ‘천사’를 의미하는 ‘앙겔로스’의 합성어로 ‘우두머리 천사’를 뜻한다. 그런데 이 표현에만 관사가 없다. 유대 전통에는 원래 천사장이 일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가엘,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사리엘, 가브리엘, 레미엘 등이다. 이중에 신약에 언급된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가엘뿐이다. 
‘하나님의 나팔’에 해당하는 ‘살핑기 데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팔을 부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나팔’이라는 뉘앙스를 지닌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릴 때(출 19:13, 16, 19), 새로운 해가 시작됨을 알릴 때(레 23:24), 앗수르와 애굽에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성산에 돌아옴을 알릴 때)사 27:13), 심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릴 때(욜 2:1) 나팔을 불었다. 여기에서는 주님의 재림으로 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기 위해서 백성을 모으시기 위해서 나팔을 사용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는 ‘카타베세타이 아프 우라누’이다. ‘우라누’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라기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처소를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하늘로부터, 그 자리로부터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강림하다로 번역된 ‘카나베세타이’는 앞서 등장하느 ‘파루시아’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이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시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다.(행 1:1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이미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교정해주기 위한 것이다. 
‘일어나고’로 번역된 ‘아나스테손타이’의 원형 ‘아니스테미’는 흔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막 9:31; 눅 18:33; 요 11:23; 행 13:34) 이때 죽은 자는 죽은, 부패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고전 15:42-44, 52-54) 이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능력이다.
 
17절) 죽은 자의 부활이후에 산자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휴거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끌어올려’로 번역된 ‘하르파게소메다’는 ‘하르파조’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형이다. ‘하르파조’는 어떤 것을 갑자기 잡아 채는 것, 강탈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다.(마 11:12; 요 6:15; 10:12; 행 8:39; 고후 12:2) 여기에는 돌연성과 강제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즉 당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사도바울 자신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다.(고후 12:2, 4) 
 
ἁρπάζω (harpazō), 동사. 끌고가다, 빼앗다. 미래 능동태. ἅρπα; 부정과거 능동태. ἥρπασα; 완료 능동태. ἥρπακα; 부정과거 능동태. ἡρπάγην; 완료 중간태. ἥρπαγμαι. 히브리어 등가: גזל (13), טרף (3).
동사 용법
1. 약탈하다 — 물건을 훔치거나 전리품으로 취하다, 자주 전쟁의 일환으로. 관련 주제: 도둑질; 부정한 이득; 약탈; 약탈자; 약탈자 무리; 망쳐놓다; 침입자.
마 12:29|| καὶ τὰ σκεύη αὐτοῦ ἁρπάσαι,
2. 뺏으려하다 — 재빠르고 강하게 움켜쥐다; 종종 빼앗기 위해. 관련 주제: 파악하다.
요 6:15 ὅτι μέλλουσιν ἔρχεσθαι καὶ ἁρπάζειν αὐτὸν ἵνα
요 10:28 καὶ οὐχ ἁρπάσει τις αὐτὰ ἐκ τῆς
행 8:39 πνεῦμα κυρίου ἥρπασεν τὸν
고후 12:2 ἁρπαγέντα τὸν τοιοῦτον ἕως τρίτου οὐρανοῦ.
유 23 ἐκ πυρὸς ἁρπάζοντες,
3. 강도 짓을 하다 — 어떤 것을 강제로 또는 주인의 합의 없이 빼앗다;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에 대하여. 관련 주제: 도둑; 강도질.
마 13:19|| καὶ ἁρπάζει τὸ ἐσπαρμένον ἐν τῇ καρδίᾳ
4. 좋지 않은 상황에서 빼낸 (상태) — 급하거나 간절하게 잡아 채다; 자주 건져 내기 위해. 관련 주제: 파악하다.
고후 12:4 ὅτι ἡρπάγη εἰς τὸν παράδεισον
살전 4:17 σὺν αὐτοῖς ἁρπαγησόμεθα ἐν
계 12:5 καὶ ἡρπάσθη τὸ τέκνον αὐτῆς πρὸς τὸν
5. 주장하다 ⇔ 빼앗다 — 주장하다, 어떤 것을 거칠고 강하게 움켜 쥐는 것으로 이해하여.
마 11:12|| καὶ βιασταὶ ἁρπάζουσιν αὐτήν.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17절) ‘끌어 올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파르조’는 ‘갑자기 귀거나 잡다, 낚아채다, 데려가다’의 의미로 강제로 갑자가 위로 들어 올린다는 의미이다.(요 6:15, 행 8:39)
 
 
 caught up. The only explicit reference in the Bible to the “rapture” (from the Latin translation of the Greek verb used here). Paul envisions the church being “raptured,” joined to Christ at his return. together with them. Paul’s concern is not to predict but to pastor, as he stresses (the word order in Greek is emphatic) yet again that both living and deceased believers in Thessalonica will participate equally in Christ’s glorious return. meet. Greek apantēsis; refers to a delegation party meeting an arriving dignitary outside of town to bestow honor on that visitor by escorting him back to their city. This practice of sending a delegation party to meet and escort an important visitor on the final leg of their journey is found in the only two other NT occurrences of this Greek term (Matt 25:6; Acts 28:15). Paul’s word choice, therefore, implies that the church, once it has been “raptured” to Christ in the air, escorts him to earth.
NT New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6.
 
성도들이 휴거되어 끌어 올려질 곳은 ‘구름 속’이다. 이는 성도들이 물방울이 응결된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월적 실재에 대한 비유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휴거되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영광의 충만함 속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이 영광으로 충만한 이유는 바로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휴거된 성도들이 주를 영접하게 되는 장소는 ‘공중’이다. 이는 ‘아에르’로 지구상의 대기권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이 표현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이 권세를 잡고 있는 곳이다.(엡 2:2) 그렇다면 재림의 날에는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여 그 힘을 잃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주께서 휴거된 성도들은 마귀의 본거지에서 만나기로 하셨다는 의미로 악한 세력을 향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영접하다’라는 표현은 ‘아판테시스’인데 이는  한 도시의 주민들이 귀빈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며 인사하고 영접하러 나온 뒤 그 도시까지 동행하는, 에스코트하는 의미로 대단히 중요한 고위 관리에 대한 주민들의 환영 연회에 대해서 사용된 단어이다.(마 25:6, 행 18:15) 이 말은 성도들이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이동하는 방향은 그리스도의 이동방향과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은 아래 방향으로 땅을 향해 움직인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 25장에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처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되었다.(마 25:6) 이는 휴거된 성도들이 주님과의 혼인 잔치를 위해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를 맞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휴거되어 주를 영접한 성도들이 누리게될 축복은 바로 주와 함께 함이다. 마 28:20의 약속의 말씀은 주님의 재림으로 성취된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주를 보게 될 것이다(고전 13:12) 성도에게 죽음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재림까지의 시간이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멀게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영원과 비교하여 본다면 이는 경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4:16–17 cry of command … voice of an archangel … trumpet of God. The three noises summon the dead to wake from their slumber. The only “archangel” identified in the Bible is Michael (Jude 9). Trumpets in the OT proclaimed the Lord’s presence (Ex. 19:16; 1 Chron. 16:6; Ps. 47:5; Joel 2:1; Zech. 9:14); in Jewish tradition, the “trumpet” was associated with battle, the day of the Lord, and the resurrection (cf. 1 Cor. 15:52). first … Then. Dead Christians rise from their graves to the realm of the living, and then the living and the dead together are caught up from the earth into the air to   p 2310  meet Christ. The Greek for “caught up” (harpazō, “to grab or seize suddenly, to snatch, take away”) gives a sense of being forcibly and suddenly lifted upward (see John 6:15; Acts 8:39). together with. The dead Christians would suffer no disadvantage (cf. “we who are alive … will not precede,” 1 Thess. 4:15). clouds. Probably not earthly rain clouds but the clouds of glory that surround the presence of God (cf. Ex. 13:21; 33:9–10; 40:38; Num. 12:5; 1 Kings 8:10–11; Ps. 97:2; Dan. 7:13; Matt. 17:5; Mark 13:26; Acts 1:9; Rev. 14:14). to meet. The Greek term apantēsis is often used of an important dignitary’s reception by the inhabitants of a city, who come out to greet and welcome their honored guest with fanfare and celebration, then accompany him into the city (cf. Matt. 25:6; Acts 28:15; a related term hypantēsis is used in Matt. 25:1; John 12:13). It may indicate that the subsequent movement of the saints after meeting Christ “in the air” conforms to Christ’s direction, thus in a downward motion toward the earth. However, some interpreters caution that the vivid symbolism of apocalyptic language must be kept in mind to avoid over-interpretation of the apocalyptic details. in the air. The sk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9–2310.
 
18절) 바울이 주의 강림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야기한 이유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본문의 ‘이러한 말’은 앞선 13-17절을 말한다. 
본문의 위로하다라는 단어는 ‘파라칼레오’로 1절에서 ‘권면하다’와 동일하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이들에게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죽은 성도들에 대한 재림에 대한 믿음, 확신이 없음으로 죽은 자들로 인해 슬퍼하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의 재림시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새로운 몸으로 부활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이 사실을 서로 말하여 권면하라는 것이다.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이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는 믿음의 동지들이 필요하다. 이 여정을 위해서는 지도와 안내자와 이에 대한 확신과 동행하는 동지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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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ut since we were torn away from you, brothers, for a short time, xin person not in heart, we endeavored the more eagerly and with great desire yto see you face to face, 18 because we wanted to come to you—I, Paul, again and again—but Satan zhindered us. 19 For what is our hope or ajoy or crown of boasting bbefore our Lord Jesus at his ccoming? Is it not you? 20 For you are our glory and joy.
x 1 Cor. 5:3; Col. 2:5
y ch. 3:10
z Rom. 15:22; [Rom. 1:13]
a See Phil. 4:1
b 1 Cor. 15:31; [2 Thess. 1:4]; See 2 Cor. 1:14
c ch. 3:13; 4:15; 5:23; Matt. 24:3; 1 Cor. 15:23; 2 Thess. 2:1, 8; James 5:7, 8; 2 Pet. 1:16; 3:4, 12; 1 John 2:2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2:17–20.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8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2:17–20.
 
 
앞선 2장 1-16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했던 당시의 내용을 회고하고 있는 내용이다. 자신이 어떤 사역 자세를 가지고 사역했는지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과 고난에 대한 자세를 회고하며 감사하고 있고 복음을 대적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다. 이제 17-20절 본문은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를 재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실패했는지와 그들을 향해 얼마나 깊은 애정과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핍박으로 인해 비자발적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그곳을 여러번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갈 수 없어서 디모데를 대신 보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영접한 이들이 핍박으로인해 힘든 시기를 보낼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17절) 본문에 ‘떠난 것은’이라는 표현은 ‘아포르파니조’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형으로 ‘아포르파니스텐테스’가 사용되었다. 이는 ‘고아로 만들다, 분리되다’의 의미이다. 부로모부터 영구히 분리되는 것으로 여기서 ‘고아, orphan’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다. 바울은 지속적으로 가족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7절에서는 유모로, 11장에서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자신이 떠남으로인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고아와 같은 상태가 됨으로 자신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난 것이 마치 부모와 자식간의 원하지 않는 이별로 인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2:17 orphaned. Paul continues his family metaphors (see vv. 7, 11 and notes) by comparing himself to a child who has been orphaned from his parents—so deep were his feelings of anguish over being separated from his Thessalonian converts.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3.
 
‘힘썼노라’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스푸다조’는 ‘서두르다, 열망하다’라는 의미이다. 힘쓰다라는 의미로 엡 4:3, 딤후 2:15에서 사용되었고, 서두르다라는 의미로 딤후 4:9, 21; 딛 3:12에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열정으로 더욱 힘썼다라고 말하고 있다. ‘열정으로’라는 표현은 ‘폴레 아피뒤미아’로 ‘폴레’는 ‘큰, 위대한’이라는 의미이고 ‘에피뒤미아’는 ‘강렬한 욕망’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죄악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정욕, 성적 욕망, 탐심을 나타내는 부적적인 의미인데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탈피하여 거의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열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빌 1:23) 이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얼굴은 있으나 마음을 떠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얼굴’을 
‘프로소폰’으로 히브리어로는 ‘파네’인데 이는 존재, 얼굴’을 의미한다. 살후 1:9에서는 ‘주의 얼굴’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마음’은 ‘카르디아’로 ‘심장, 내부기능’이라는 의미로 사람의 생각, 의지, 감정,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양심) 지식의 좌소의 의미이다. 히브리어로는 ‘레브’로 예수님께서도 이 표현을 많이 사용하셨다. 마 5:8; 6:21, 15:18
 
세상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도들간의 사랑은 이러한 통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성도간의 사랑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사랑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이기에 함께 할 때에는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하고 떨어져 있더라고 서로를 생각하며 복을 빌고 중보의 기도를 올려드려야 한다. 
 
18절)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바울의 대적자들은 데살로니가에서 도망간 바울이 성도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라고 비방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바울은 변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적대자를의 거짓말과 달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바울 만큼은 여러번 가고자 애썼음을 힘주어 강조한다. 나라는 표현은 바울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방문을 막은 것은 사탄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여기서 ‘막았도다’는 ‘에네콥센’으로 이는 중간에 끼어 들어서 방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롬 15:22) 이는 당시 도주하는 적군의 진로를 중간에 차단하는 것을 가리키는 군사 용어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사단이 어떻게 바울을 막았을까? 본문이 이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몇가지 추정해 볼 수 있다. 
1) 행 17:9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쫓겨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게되면 야손의 안전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2)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극심하게 핍박하여서(행 17:13) 바울이 되돌아가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3) 바울의 고질적인 가지인 병(눈병 혹은 간질)이 재발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사탄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사타나스’로 히브리어 ‘사탄’의 음역이다. 이는 ‘대적자, 고소자’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이를 인격적이고 악한 영적 존재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려는 목적을 가진 존재들로 주로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시험하는 자, 마귀, 벨리알, 뱀, 악한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Satan. From the Hebrew meaning “accuser,” it is the term Paul uses most often to refer to a personal, evil, spiritual being whose purposes are opposed to God and his people (2 Thess 2:9; Rom 16:20; 1 Cor 5:5; 7:5; 2 Cor 2:11; 11:14; 12:7; 1 Tim 1:20; 5:15). Paul elsewhere refers to this figure as “the tempter” (3:5), “the devil” (Eph 4:27; 6:11; 1 Tim 3:6–7; 2 Tim. 2:26), “Belial” (2 Cor 6:15), “the serpent” (2 Cor 11:3), and “the evil one” (2 Thess 3:3; Eph 6:16).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3.
 
사탄히브리어 단어 שָׂטָן(싸탄)은 반대하다, 방해하다, 고소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헬라어 용어(σατάν, 사탄)은 문자적으로 “대적”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사탄은 호칭 또는 이름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שָׂטָן(싸탄)은 70인역에서 디아볼로스로 번역된다.
히브리 성경에서의 “사탄”의 용례
구약에서 사탄이란 단어는 명사와 동사 둘 다로 사용된다. 동사로 사용될 때는 “대적으로서 반대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예, 시 38:20; 71:13; 109:4, 20, 29; 슥 3:1). 명사로 사용될 때는 인간 대적에게 적용된다(예, 삼상 29:4; 삼하 19:22; 왕상 5:4; 11:14, 23, 25). 구약의 네 책에서 이 용어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붙는다(민 22:22, 32; 욥 1:6, 7, 8; 슥 3:1; 대상 21:1).
인간 대적에 적용되는 “사탄”
“사탄”이란 단어는 구약의 여러 지점에서 인간 반대자를 지명하기 위한 명사로 등장한다. 이럴 때 영어 성경에서는 그것을 “대적” 또는 “원수”로 번역한다. 예를 들면, 솔로몬 왕은 자신이 성전을 지으려 했을 때 그것을 방해할 어떤 “사탄” 즉 “대적”도 없었던 것에 대해 말한다(왕상 5:4). 이 용어는 다윗 왕이 아비새를 반대자 또는 대적으로 말할 때도 사용된다(삼하 19:22).
초자연적 존재와 관련되는 “사탄”
구약에서 “사탄”이란 단어는 초자연적인 존재와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발람과 그의 나귀가 여행하는 길을 막고 있는 여호와의 천사가 “사탄”이라 일컬어지는 민수기 본문이 그런 경우다(민 22:22). 이 천사는 “사탄”이 아니라 발람을 “반대하는” 것이다.
        욥기.욥기에는 하나님의 허락 아래 욥의 신실함을 시험했던 초자연적인 “사탄”의 존재가 나온다(욥 1:6). 이 문맥에서 저자는 그 명사(“사탄”) 앞에 정관사(“그”)를 놓아서 그 용어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호칭 또는 직책임을 보여 준다. 이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천상 회의의 일원인 천사로 나오며, 그의 특별한 임무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일들을 조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정의 “그 사탄”은 스스로를 저항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고소하는 존재로 드러냈다.
어디에서 왔느냐는 여호와의 질문에 “그 사탄”은 자신이 땅을 두루 돌아 다녀왔다고 답한다(욥 1:7). 이것은 “사탄”으로서 행하는 것이 신에게 부여받은 임무였음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다(Tate, “Satan,” 462). 이 문맥에서 여호와가 “그 사탄”을 책망하시지 않는 것은 흥미롭다. 오히려 “그 사탄”은 단순히 욥의 종교적 진실성에 회의적일 수 있는 자로 제시된다(Tate, “Satan,” 463).
        스가랴서.스가랴서에서는 “사탄”이란 용어가 법정의 정황에 적용되면서 욥기와 비슷한 장면이 제시된다(슥 3:1). 스가랴 3장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서 있다. “그 사탄” 그를 고소하기 위해 거기 있다. 욥기에서처럼 “그 사탄”은 적대적이거나 악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사람들의 진실성 여부를 살피는 검사 역할을 하면서 단순히 여호수아를 기소하는 것처럼 보인다(Boring, Revelation, 165). “그 사탄”은 여호수아가 제사장직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묻는 것일 수 있다(Tate, “Satan,” 463).
스가랴 3장 본문에서 “그 사탄”이 여호와께 적대적인지 아니면 그가 단순히 여호와의 정책들에 도전하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모호함이 있다. 스가랴 3:2에는 “책망하다”를 의미하는 동사가 두 번 사용된다. 이 책망은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이며 “그 사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책망은 “그 사탄”에 대한 여호와의 일반적인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그 사탄”에 의해 초래된 상황이 여호와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Tate, “Satan,” 464). 마빈 테이트(Marvin Tate)는 “책망하다”라는 동사의 사용만으로는 이 장면에서 “그 사탄”을 하나님의 주적인 마귀로 확정하기에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Tate, “Satan,” 464). 이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테이트는 잠언(잠 17:10)에서 “책망”이란 명사가 하나님께 호의적인 사람과 관련해서 사용된다는 점에 주목한다(Tate, “Satan,” 464).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책망이란 단어는 강한 저주 또는 하나님의 분노 표현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Klein, Zechariah, 136). 이런 이유로 유진 메릴(Eugene Merrill)은 스가랴서의 “그 사탄”을 성경 전체에 걸쳐 알려져 있는 하나님의 최대의 적으로 식별한다(Merrill, Haggai, 133).
        역대기상.역대기상은 “사탄”이란 단어가 초자연적인 존재의 어떤 유형과 연결되는 또 다른 예에 해당한다(대상 21:1. 비교, 삼하 24:1). 이 본문은 여호와가 “사탄” 또는 다른 신적 대리인의 수단을 통해 다윗을 선동하셨음을 전하는 것일 수 있다. 이전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본문은 마귀로 이해되는 사탄적 존재를 의도하거나 후대의 문헌에서 하나님의 주요 대적으로 제시되는 사탄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직책 또는 기능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유진 보링(Eugene Boring)은 구약 어디에서도 사탄을 후대 문헌이나 신약 문헌에서 제시되는 “악의 화신”으로 제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Boring, Revelation, 164). 하지만 히브리 성경에서 제시되는 “사탄”을 더 적대적인 역할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예, Noll, Angels of Light, 103–104).
히브리 성경에서의 사탄의 반란
두 구약 본문(사 14:12–15와 겔 28:11–19)이 사탄의 반란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원래의 히브리어 본문의 연대가 BC 1세기 또는 AD 1세기로 추정되는) 아담과 이브의 생애에서는 계명성의 추락이 사탄과 그의 천사들의 추락으로 해석된다(아담과 이브의 생애 12-15장. 참고, 에녹2서 29:4–5). 천사들은 별에 비유된다(삿 5:20; 욥 38:7; 에녹1서 104:1; 모세의 유언 10:9). 이 전통에 따르면 사탄은 하나님이 쫓아내셨던 첫 피조물들에 속해 있었다.
제2성전기 문헌에서의 사탄적 존재
모세 승천기(10:1)와 희년서(2:23–29)는 “사탄”이란 용어가 고유명사로 사용된 가장 초기의 증거들일 것이다.
하나님의 최고 대적으로서의 사탄
 BC 2세기와 3세기의 글들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최대의 적인 것이 분명한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면,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의 반대자일 뿐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에서 사탄은 죽음의 현상들과 관계되기도 한다(솔로몬의 지혜 2:24).
악한 영들의 지도자를 가리키는 다양한 명칭들이 제2성전기 문헌들에서 등장한다(참고, 제2성전기의 사탄). 그 이름들에는 벨리알, 마스테마, 사타나일, 사탄이 포함된다(갓의 유언 4:7; 베냐민의 유언 7:1; 르우벤의 유언 4:7; 시므온의 유언 5:3; 아셀의 유언 3:2; 희년서 11:5; 에녹2서 31:6). 사탄이 악과 죄의 창시자로 여겨지면서 여러 본문에서 그의 파멸이 기대되고 표현되었다(레위의 유언 18:12; 유다의 유언 25:3).
창세기 2–3장의 뱀과 사탄
히브리 성경에는 창세기 2–3장에 나오는 뱀이 사탄이었다는 증거나 사탄이 지휘하는 생물이었다는 증거조차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솔로몬의 지혜(약 BC 220년—AD 50년)는 둘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초기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솔로몬의 지혜 2:24). 사탄과 뱀의 연결은 아담과 이브의 생애(33장)와 에녹2서(31장)에서도 입증된다. 두 본문 모두 이브를 미혹한 것이 마귀였다고 언급한다.
신약에서의 사탄
신약은 사탄이 하나님의 최고 대적으로 발전하는 그림을 보여 준다. 신약의 문헌들 이전이나 동시대에 기록된 성경 밖 작품들은 이 발전과 평행을 이룬다. 신약에서 “마귀”라는 단어는 32회, 사탄은 33회, 벨리알은 1회(고후 6:15), 바알세불은 7회 사용된다.
예수와 사탄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의 반대자일 뿐 아니라 예수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기도 한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간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그분의 아들이라 선언하신 직후의 일이고 따라서 사탄은 이 선언에 도전하는 것이다(마 3:17; 4:1–11). 예수는 구약 성경에 의존해서 사탄의 시험들을 극복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동산에서의 하와의 불순종과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불순종 모두를 상징적으로 무효화한다.
신약에는 마귀에게 고통받은 것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불구로 만드는 영”을 가졌던 여자를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자로 묘사한다(눅 13:11, 16). 13:16의 사탄이 13:11의 영과 똑같은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간” 것으로 묘사된다(요 13:27). 이것이 완전한 “소유”를 가리키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예수의 가르침은 능동적인 적으로서의 마귀의 존재를 반영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예수의 비유에서는 악한 자가 길가에 떨어진 씨를 낚아챈다(마 13:19; 막 4:15). 다른 말로 하면, 마귀가 하는 일들 중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무시하게 하는 일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마귀를 따르는 자들이나 마귀의 자녀들이라 일컬어진다(요 8:44; 행 13:10; 계 2:9; 3:9; 요일 3:8).
패배했으나 아직 위험한 존재인 사탄
신약에서 사탄은 종종 패배한 적으로 여겨진다(마 13:36–43; 롬 16:20; 히 2:14–15; 요일 3:8; 계 20:2). 전투는 이미 치러졌고 승리했다(계 12:7–10). 그러나 동시에 신약은 그가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 공격적인 세력이라고 주장한다(살후 3:3; 약 4:7; 계 2:24).
사탄의 이름들과 호칭들
신약에서 사탄에게 붙여지는 다양한 호칭들과 이름들은 마귀의 특징을 나타내는 폭넓은 표현을 제공한다. 그는 용(계 20:2), 뱀(계 12:9), 악한 자(요 17:15; 엡 6:16), 시험하는 자(마 4:3; 살전 3:5)로 분류되고, 사자처럼 두루 다닌다(벧전 5:8). 바울에 따르면 그는 공중 왕국의 통치자, 즉 마귀 영역의 지도자다(엡 2:2). 바울 시대의 사람들은 영들이 천상과 지상 사이에 위치한 공간에 존재한다고 믿었다(Arnold, Ephesians, 60). 여러 경우에 사탄은 “집의 주인” 또는 “높음의 주인”을 의미할 수 있는 “바알세불”로 불린다(예, 마 12:27; 눅 11:18). “공중의 왕국”이라는 문구와 마찬가지로 바알세불은 사탄이 마귀들을 지도하는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사탄의 기원
신약의 일부 본문은 사탄을 세상의 시초에 하늘에서 있었던 전쟁 중에 떨어진 것으로 묘사한다. 즉,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하늘에서 내쫓았다(계 12:7). 요한일서는 마귀를 “처음부터 범죄한” 자로 묘사한다(요일 3:8). “처음부터”란 문구는 창세기 기사에 대한 언급일 수 있으며, 마귀를 뱀과 연결시킨다. 신약은 사탄의 떨어짐이 교만 때문이었음을 보여 준다(딤전 3:6). 예수는 그가 처음부터 살인자였다고 말했다(요 8:44).
사탄에 대한 초대 교부들의 관점
초대 교부들은 교회를 향한 사탄의 공격에 대해 논했다. 교부들은 마귀가 교회를 죄와 불화로 이끌기 위해 활발히 활동한다고 이해했다(클레멘트1서 51:1).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빛과 어둠 사이의 이원적인 전투를 실제적인 것으로 봤고, 그래서 마귀를 “어둠의 주”라 칭했다(바나바 서신 20:1).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감독했던 주교 이그나티우스 데오포루스는 누구든지 주교의 허락 없이 행하는 자는 마귀의 종이라고 주장했다(To the Smyrnaeans 9:1).
이단들은 사탄의 추종자로 불렸다(Polycarp, To the Philippians 7:1). 거짓 가르침의 존재는 선과 악의 우주적 싸움의 일부였다.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는 이단들을 사탄 군대의 구성원들과 관련시켰다(Heresies 1.25). 이것이 결국 거룩한 전쟁, 십자군, 이단 및 비그리스도인 박해를 정당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Russell, Satan, 87).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AD 185–254년경)은 이사야 14:12–15를 누가복음 10:18에 나오는 사탄의 떨어짐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관련시킨다(Principiis 1.5.5와 4.1.22). 기독교 저자 터툴리안(AD 197–220년경)은 사탄의 죄의 배경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도출하고, 사탄의 최후를 에스겔서에 기록된 두로 왕의 몰락과 연관시켰다(겔 28:11–19; Marcus 2:10).
추가 연구를 위한 선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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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실(David Seal)
 David Seal, “사탄,”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19절)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소망’이라고 묘사한 것은 그들로 인해서 장차 마지막 날에 얻게될 영광이 있기 때문이요 ‘기쁨’이라고 한 것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터져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역자에게 있어서 자기가 복음을 전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흠과 티 없이 서게 되는 것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울의 자랑이자 영광 그 자체 이기 때문이다. 
‘면류관’이라고 번역된 ‘스테파노스’는 ‘주변을 두르다’라는 의미를 지닌 ‘스테포’에서 유래한 명사로 ‘머리를 에워 씌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왕이나 고귀한 지위를 지닌 자에게 씌워지는 관이나(삼하 12:30; 대상 20:2)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씌워지는 월계관을 가리키는 단어였다(고전 9:25). 이것은 최고의 영애를 상징한다. 원형 경기장이나 올림픽에서 승리한 우승자에게 월계관이 씌워지고 금메달이 수여될 때 그 영광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칭찬하실 것이기에 그 영광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어서 이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이외에도 의의 면류관(딤후 4:8),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 9:25)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야고보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베드로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강림'이라는 표현은 ‘파루시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약의 여러시대에 강림하신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또한 왕이나 황제 등 위대한 인물이 어떤 도시를 방문하거나 도착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황제의 방문을 위해 주민들은 여러가지를 준비한다. 그리고 황제가 방문하면 도시에 새로운 신기원이 도래하게 된다. AD 124년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도시에 하드리안 황제가 방문함으로 그 지역에 신기원이 도래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분의 방문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이 표현이 7번(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2:8, 2:9)이나 사용되었다. 주님께서 영광가운데 다시 오실 때 모든 무릎을 그 아래 꿇게 하실 것이다.(빌 2:10)
 
우리는 마땅히 마지막 때, 주님의 재림시에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때 영벌과 영생으로 나뉘어지게 될 것이다. 바울은 종말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었고 그 때에 너희가 나의 소망이요 기쁨, 소망의 면류관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서 모든 것은 불타 없어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3:10–15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20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 복음 전하는 이들에게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본문에 ‘이요’라고 번역된 ‘에스테’는 현재형 동사로 19절에 말한대로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뿐 아니라 서신을 쓰고 있는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들에게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자랑, 기쁨은 무엇인가? 얼마나 큰 교회를 건축하고, 얼마나 많은 재정을 집행하고 많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이 아니라 바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바르게 살아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로 서가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것에 잇대어 살아가기를 다짐하고 노력하는 삶의 모습이야말로 목회자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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