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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I hope to come to you soon, but I am writing these things to you so that, 15 if I delay, you may know how one ought to behave in the household of God, which is the church of the living God, a pillar and buttress of the truth. 16 Great indeed, we confess, is the mystery of godliness:
sHe5 was manifested in the flesh,
vindicated6 by the Spirit,7
tseen by angels,
uproclaimed among the nations,
vbelieved on in the world,
wtaken up in glory.
s John 1:14; 1 Pet. 1:20
5 Greek Who; some manuscripts God; others Which
6 Or justified
7 Or vindicated in spirit
t Luke 2:13; 24:4
u Gal. 2:2
v 2 Thess. 1:10
w See Acts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3:14–16.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3:14–16.
 
디모데전서의 본론부에 해당하는 1:3-6:19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는 1:3-3:16로 목회자로서 교회안의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며 교회의 질서와 조직을 바로 세우기 위한 교훈을 주는 내용이다. 후반부 4:1-6:19은 목회자로서 행할 현장 사역에 대한 세부 지침과 권면을 주는 내용이다. 3:14-16은 본론부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위치하여 본 서신을 기록한 이유와 복음, 경건의 비밀의 위대함을 요약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마도 바울은 본론부의 전반부를 마치고 후반부를 새로 시작하면서 에베소 교회를 책임맡고 있는 디모데에게 본 서신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면서 목회자로서 올바른 교회관과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함으로 맡겨진 목회 사역에 힘쓰게 하도록 본 단락을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앞선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언급한 후에 교회의 본질과 복음의 위대함을 밝힘으로 자신의 영적 아들 디모데뿐만 아니라 교회의 직분자들에게도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다. 
 
14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 것을 요청하고 마게도냐로 향했다. 그 여정 속에서 그의 마음으로는 에베소로 속히 돌아가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으로 이 편지를 쓴 것이다. 만약에 바울의 계획대로 에베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어쩌면 목회서신인 디모데서가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시 바울을 둘러싼 적대적인 환경까지도 사용하심으로 지금 우리에게 교회 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해주는 본서를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15절) 바울은 자신의 에베소 방문이 지체될 것을 우려하여 본서신을 기록했는데 그 기록 목적은 목회자인 디모데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아마도 바울은 급하게 에베소에 디모데를 남겨두고 떠나야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해주지 못했던 것을 보인다. 디모데서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목회 지침이라면 본 15절은 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밝히는 교회관의 첫번째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이다. 이는 헬라오로 ‘오이코 데우’이다. 여기서 집으로 번역된 ‘오이코스’는 일반적으로 ‘건물 로서의 집 또는 그 건물에서 사는 사람들로서의 가족’을 의미한다. 
 
οἶκος -ου, ὁ; (oikos), 명사. 집, 가정. 히브리어 등가: בַּ֫יִת 1 (1406). 아람어 등가: בַּ֫יִת (33), הֵיכַל (4).  인명이나 다른 존재의 이름으로 사용된 정보를 보려면,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교회.
명사 용법
1. —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가족들의 처소로 사용되는 주거지. 관련 주제: 주택 및 주거. 관련 존재 항목들: 집, 영구적 거주지, 건물; 궁전.
막 2:11|| καὶ ὕπαγε εἰς τὸν οἶκόν σου.
행 7:47 Σολομῶν δὲ οἰκοδόμησεν αὐτῷ οἶκον.
몬 2 καὶ τῇ κατʼ οἶκόν σου ἐκκλησίᾳ·
히 3:2 ἐν τῷ οἴκῳ αὐτοῦ.
벧전 2:5 καὶ αὐτοὶ ὡς λίθοι ζῶντες οἰκοδομεῖσθε οἶκος
2. 사원 ⇔ 집 — 특별히 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해되는 신전. 관련 주제: 본당 중앙. 관련 존재 항목들: 집, 영구적 거주지, 건물; 이교도 사원; 궁전.
눅 11:51|| καὶ τοῦ οἴκου· ναί,
3. 가족 ⇔ 집 — 대개 가족, 종들, 그리고 대가족으로 이루어지는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단위; 가족이 주로 거주하는 물리적 건물로 이해된다. 관련 주제: 가족; 가족 관계; 가족. 관련 존재 항목: 집, 영구적 거주지, 건물.
눅 11:17|| οἶκος ἐπὶ οἶκον
행 16:15 καὶ ὁ οἶκος αὐτῆς,
딤전 3:4 τοῦ ἰδίου οἴκου
딤전 3:15 ἐν οἴκῳ θεοῦ
딤후 1:16 δῴη ἔλεος ὁ κύριος τῷ Ὀνησιφόρου οἴκῳ,
4. 가정 — 사람의 주기적인 거주지 (특정 시간에) 관련 주제: 거주; 주택 및 주거; 집. 관련 존재 항목: 집, 영구적 거주지, 건물.
막 2:1 ἐν οἴκῳ
막 3:20 Καὶ  ἔρχεται εἰς οἶκον·
막 5:19|| Ὕπαγε εἰς τὸν οἶκόν σου πρὸς τοὺς
막 8:3 ἐὰν ἀπολύσω αὐτοὺς νήστεις εἰς οἶκον αὐτῶν,
눅 11:24|| Ὑποστρέψω εἰς τὸν οἶκόν μου ὅθεν ἐξῆλθον·
5. 조상 ⇔ 집 — 집으로 이해되는 개인의 문벌(예를 들어, ”네 아버지 집”과 같이); 아마도 가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집이라는 용어의 확장일 것이다. 관련 주제: 가족 관계; 가족; 족장; 대홍수 이전의 족장들; 아브라함.
마 10:6 τὰ ἀπολωλότα οἴκου Ἰσραήλ.
마 15:24 εἰς τὰ πρόβατα τὰ ἀπολωλότα οἴκου Ἰσραήλ.
눅 1:27 ᾧ ὄνομα Ἰωσὴφ ἐξ οἴκου Δαυίδ,
눅 2:4 διὰ τὸ εἶναι αὐτὸν ἐξ οἴκου καὶ
히 8:8 καὶ συντελέσω ἐπὶ τὸν οἶκον Ἰσραὴλ καὶ
6. 집 (소유물) — 어떤 개인이 가진 유뮤형의 소유; 아마도 집들이나 토지들로 구성된 재산 관련 주제: 주택 및 주거.
눅 13:35|| ἰδοὺ ἀφίεται ὑμῖν ὁ οἶκος ὑμῶν.
여러 용어 명사 용법
1. 사원 ⇔ 집 — 특별히 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해되는 신전. 관련 주제: 본당 중앙. 관련 존재 항목들: 집, 영구적 거주지, 건물; 이교도 사원; 궁전.
마 12:4|| πῶς εἰσῆλθεν εἰς τὸν οἶκον τοῦ θεοῦ
막 2:26|| πῶς εἰσῆλθεν εἰς τὸν οἶκον τοῦ θεοῦ
눅 6:4|| ὡς εἰσῆλθεν εἰς τὸν οἶκον τοῦ θεοῦ
히 10:21 καὶ ἱερέα μέγαν ἐπὶ τὸν οἶκον τοῦ
벧전 4:17 ἀπὸ τοῦ οἴκου τοῦ
2. 교회 ↔ 하나님의 가족 — 하나님의 권속을 이루는 가족으로 이해되는 교회.
딤전 3:15 ἐν οἴκῳ θεοῦ
명사. 명사
||  || 눅 5:24 || 마 9:6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마 23:35
||  || 마 12:25 || 막 3:25
||  || 눅 8:39
||  || 마 12:44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마 23:38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막 2:26 || 눅 6:4
||  || 눅 6:4 || 마 12:4
||  || 막 2:26 || 마 12:4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앞선 4, 5, 12절에서 ‘오이코’는 일관되게 가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기에 본절에서도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가족으로서의 교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인 가족 관계를 이루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모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에클레시아 데우 존토스’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으로 특히 이방의 우상이 생명 없는 존재로 표현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신 6:15) 
예레미야 10:10
10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6:16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사도행전 14:15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구약의 선지자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신앙 고백,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보듯이 우리 기독교는 죽은 우상을 섬기는 모임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이다. 믿지 않는 이들,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주인되었고, 허탄한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따르던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스토트(J. Stott)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에 간략하 게 여호수아의 답변을 제시한다.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수 3:10). 이러한 선언은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은 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거할 것이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와 같은 사상은 성경 언약의 근간을 이루며(출 25:8 ; 29:45-46 ; 레 26:12 ; 시 114:2 ; 겔 37:27) 특히 바울의 신학 사상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는 실제로 고후 6:16에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한 뒤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약 성경의 말씀을 인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교회관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우리 교회는 과연 살아계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가란 질문은 교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항상 하여야 할 심각하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질문인 것이다(옥스포드 179)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진리는 ‘알레데이아’로 부정접두어 ‘아’와 ‘숨기다’라는 의미의 동사 ‘란다노’의 합성어로 숨길 것이 없는 진실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일반적 진리(엡 4:25; 롬 9:1)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기독교에서만 발견되는 구원의 진리를 가리킨다.(엡 4:21; 골 1:5) 나아가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기도 한다.(요 1:14-15; 14:6) 본문에서도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를 의미하면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터’라고 번역된 ‘헤드라이오마’는 ‘굳게 하다, 견고케 하다’라는 동사 ‘헤드라이오오’에서 파생된 명사로 건물을 견고하게 받쳐주는 대지를 의미한다. 이단이나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는 세력들의 공격으로부터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기둥’으로 번역된 ‘그튈로스’역시 ‘기둥, 원주’를 의미한다. 기둥은 건물이 머누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지지하고 떠받쳐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건물의 외양을 드러냄으로 멀리서도 이를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바울은 이러한 건물의 이미지를 통해서 교회가 터와 기둥이 되어서 복음 진리를 잘 지키고 전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터가 흔들리고 기둥이 약하면 건물은 흔들리고 마는 것처럼 진리의 복음을 담지한 교회는 견고하게 서야만 하는 것이다. 
In this very significant verse, Paul states his reason for writing 1 Timothy, providing one of the key NT descriptions of the church’s identity and mission. The use of household (Gk. oikos) and related words to describe the church and its ministry is common in Paul (cf. 1 Cor. 4:1; Gal. 6:10; Eph. 2:19; as well as 1 Tim. 3:4–5, 12, 15; 5:4, 8, 14; cf. 1 Pet. 4:17). It describes the church as God’s family, especially with reference to authority and responsibility within the church and the home. The stress is on God’s authority over the church and the behavior of people in the church. Church of the living God highlights the church as the gathering (Gk. ekklēsia, “assembly”) where God most clearly manifests his presence. Thus, references to God as the “living God” in Scripture often refer to his reality and presence in the community of believers (cf. Num. 14:28; Josh. 3:10; Matt. 16:16; 2 Cor. 6:16; Heb. 3:12; 9:14; 10:31). Identifying the church as a pillar and buttress of the truth is a way of saying that God has entrusted to the church the task of promoting and protecting the gospel (i.e., “the truth”; see note on 1 Tim. 2:4). The architectural imagery presents the church’s responsibility of “holding up” the gospel before a watching world, probably with a view to repelling the attack of false teaching. This picture of the church is striking. The role of advancing the gospel is divinely given to the church, not (at least not in the same way) to any other body. Parachurch organizations have value, but they must support and not supplant the church.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30.
 
16절) 본문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 경건의 비밀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 복음이 위대한 것은 바로 복음의 핵심이신 그리스도가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육신으로부터 승천까지 6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한글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은 고도의 정형적인 시적 운율을 보이고 있다. 먼저 각 행에 등장하는 동사는 모두 직설법 3인칭 단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데’로 끝난다. 또한 모든 명사는 정관사를 갖지 않는 여격으로 되어 있고 한 절을 제외하고 모두 ‘엔’이라는 전치사를 동반하고 있다. 
이는 3연으로 구성된 6행의 시적 구조를 지닌다. A-A’은 ‘육신과 영’, B-B’은 ‘천사들과 만국’, C-C’은 ‘세상과 영광’이 각기 대응을 이루고 있다. 즉 육신과 영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육체를 입으셨으나 죄가 전혀 없으신 완전한 영이심을 보여주며, 천사들과 만국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신성이 각각 증명되고 전파되는 대상임을 보여주며, 세상과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받아들여졌을 뿐아니라 하늘에서도 영접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15절에서 교회관을 언급했다면 이제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앞선 15절의 진리(알레디이아스) 즉 복음의 진리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다. 경건으로 번역된 ‘유세베이아스’는 일반적으로 ‘영혼의 거룩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 ‘활동적인 경건, 경건한 삶,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을 참되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경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비밀, ‘미스테리온’이다. 이는 신성한 비밀이라는 의미로 신이 함께 나누기로 선택한 사람들과만 관련된 비밀이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드러난 비밀, 지금은 공개적으로 계시된 신적 비밀을 의미한다. 이는 감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이는 신비이다.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mystērion), 명사. 비밀, 신비. 아람어 등가: רָז (8).
명사 용법
1. 신성한 비밀 — 신과 신이 함께 나누기로 선택한 사람들과만 관련된 비밀;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역사와 방법이나 다른 초자연적인 정보와 관련하여. 관련 주제: 비밀.
막 4:11|| τὸ μυστήριον
엡 3:3 τὸ μυστήριον,
골 1:26 τὸ μυστήριον τὸ ἀποκεκρυμμένον ἀπὸ τῶν αἰώνων
골 2:2 εἰς ἐπίγνωσιν τοῦ μυστηρίου τοῦ θεοῦ, Χριστοῦ,
살후 2:7 τὸ γὰρ μυστήριον
2. 드러난 비밀 — 지금은 공개적으로 계시된 신적 비밀
엡 3:4 ἐν τῷ μυστηρίῳ τοῦ
골 1:27 τοῦ μυστηρίου τούτου
골 4:3 λαλῆσαι τὸ μυστήριον τοῦ
딤전 3:9 ἔχοντας τὸ μυστήριον τῆς πίστεως ἐν καθαρᾷ
딤전 3:16 τῆς εὐσεβείας μυστήριον· Ὃς
명사. 명사
||  || 눅 8:10 || 마 13:11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이 땅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영원히 이 비밀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경건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비밀이자 신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이는 ‘호모로구메노스’로 ‘부인할 수 없이, 매우 확실하게’라는 표현이다. 이는 ‘말하다, 이야기하다’라는 동사 ‘레고’와 ‘같은, 비슷한’이라는 의미의 ‘호모이오스’의 합성어인 ‘호모로게오’ ‘시인하다, 고백하다’에서 파생된 부사이다. 
 
그 복음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다. 
1) 성육신
2) 부활을 통해 의롭다 하심
3) 천사들에게 보이심
4) 만국에서 전파되심
5)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심
6) 승천, 영광가운데 올려지심
 
The mystery of godliness refers to the entire content of God’s revealed plan of salvation (cf. note on v. 9). Next comes a poetic exposition of that great gospel message. great indeed, we confess. This introduction may implicitly   p 2331  call upon the Ephesian church to affirm this confession and therefore the ethical and doctrinal implications drawn from it throughout the letter. The exact structure of this “hymn” is debated, but the basic idea is clear. God the Son has been revealed in human flesh (resulting in the crucifixion, line 1), but he was vindicated by the resurrection (line 2) and afterward was displayed in victory before heavenly beings (line 3; cf. Eph. 1:20–21; Phil. 2:9–11; Heb. 1:3–4; 1 Pet. 3:21–22; Rev. 5:6–14). While the ESV footnote says that “vindicated” could be translated “justified,” the sense here clearly is vindication, which is a common use of the Greek verb dikaioō. Line 4 continues with the result of Christ’s life and ministry. The message of Christ has been (and continues to be) proclaimed among the nations (Gk. ethnos), that is, it has been preached specifically to the Gentiles. This preaching has been effective (believed on, line 5). Then taken up (Gk. analambanō) in line 6 would naturally be understood as a reference to the ascension (the same verb is used in Mark 16:19; Luke 24:51; Acts 1:2, 11, 22). A difficulty with this view is that line 6 does not fit chronologically. One possible explanation is that the ascension is presented as a foretaste of the ultimate exaltation of Christ.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30–2331.
 
Now Paul’s citing of part of what was surely a well-known hymn in the course of writing instructions for behavior in the church is to bring his readers to the point of corporate response. The hymn itself, like many in the New Testament, celebrates Christ’s appearance and ministry on earth. The introductory phrase is a call to consider the implications of this grand event, to evaluate our conduct on the basis of what we confess.
The introductory words, Beyond all question, the mystery of godliness is great, remind the readers of their common acceptance of the statement. And both the Greek term behind the NIV’s beyond all question (homologoumenōs; literally, “confessedly”) and the hymn piece that follows suggest that the idea of “confession”—that is, public, solemn agreement—may also be present.
But what is this great mystery of godliness? “Mystery,” as often used by Paul, denotes the appearance of Christ in history as the hidden salvation plan of God which, conceived before time, has been revealed and fulfilled in the cross and resurrection (compare 3:9). The content of the Christ-hymn in 3:16 confirms the deep theological meaning of “the mystery.”
The whole phrase the mystery of godliness needs some unpacking. It is commonly taken as the equivalent of the phrase in 3:9, “the mystery of the faith.” This would make godliness, like “the faith,” a reference to the objective content of Christianity—that is, “what” one believes. As such, the word here rendered godliness is often translated “religion.” But although “the faith” does often bear this meaning in the Pastorals, “godliness” is a more expansive, less static idea. It includes “the faith” but goes a decisive step further to link a certain Christian manner of life to it (see notes on 2:2). The context, with its focus on conduct (v. 15), supports the broader meaning of “godliness.”
Consequently, this phrase the mystery of godliness forms a connection between the appearance of Christ, which the hymn celebrates, and Christian living: the mystery is the essence of godliness. It was critical for Paul to remind the readers of this principle, for the false teachers were successfully driving a wedge between belief and behavior with damaging results. In our day of institutionalized atheism and the popular heresy of humanism, the church faces the same danger. Even if dangers of this sort seem remote, we easily forget the practical implications of what we believe and profess to be true.
The mystery is now explained in the six lines of the hymn, given in three couplets. We must remember that Paul included only part of a longer hymn and that its poetic nature prevented the making of a precise theological statement. Nevertheless, the thrust of this excerpt, to sketch a panoramic view of the outworking of God’s salvation plan, is easily seen.
1. The conception of the mystery (lines 1-2). He appeared in a body (literally, “he was manifested in flesh”) affirms the incarnation of Christ. The original term “flesh” and the passive form of the verb indicate the “mode” in which God revealed Christ to the world—in human form. Historically, the line of demarcation between the events recalled in lines 1 and 2 is the crucifixion/resurrection.
The meaning of was vindicated by the Spirit* is more problematic, but the juxtaposing of “flesh” (line 1) and “spirit” (line 2), seen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provides some help. The NIV correctly shows that Christ’s “vindication” is in view. But by the Spirit is better left “in spirit” according to the original text (en pneumati). In fact, the rather widespread use of the flesh-spirit antithesis in the New Testament suggests that “in spirit” is a reference to the supernatural realm which is characterized by the activity of the Holy Spirit. It is this realm that Christ entered by his resurrection from the dead. Furthermore, as numerous biblical references show, it was this event of resurrection/exaltation that demonstrated Christ’s “vindication” before hostile powers, whether human or angelic (Acts 2:22–36; 3:11–15; Rom 1:4; 1 Cor 2:1–9; Eph 1:20–21). Contained in these two lines, then, is the acknowledgment of the truth of the gospel message, that God came among humankind and introduced a new kind of life (compare 2:3–6).
2. The communication of the mystery (lines 3-4). Was seen by angels* depicts a revelation of Christ to angelic beings, rather than the passive observation of angels. In keeping with the panoramic scope of the hymn, line 3 recalls simply the fact that at some point Christ appeared victoriously before angels. The time of this occurrence may have been after or coincident with the resurrection or perhaps coincident with the ascension—chronology is apparently not a dominant feature of the hymn. In contrast to this “appearance” of the victorious Christ in the spirit realm, line 4 tells of the proclamation of this victory, won in behalf of humankind, in the world. Lines 3 and 4 concentrate on the communication of the good news about Christ. Here is acknowledgment of the church’s responsibility to reach the world for Christ (2:1–2, 7; 3:15).
3. The conclusion of the mystery (lines 5-6). Line 5 (was believed on in the world) and line 6 (was taken up in glory)* refer respectively to the result of the preaching of the gospel (line 4) and the ascension of Jesus. Of course, this sketch of the history of redemption would be incomplete without reference to the saving effects of the gospel—the church in Ephesus was to see itself as living proof of God’s plan to save (compare 1:15–16). To acknowledge this was to accept at the same time the call to godly living (2:2, 8–10; 3:1–13, 15).
Though we might have expected mention of the return of Christ in the closing line of this salvation-hymn (as we find in many contemporary hymns), the purpose of this piece was to ground the reality and presence of salvation in the past, historical appearance of Christ. So the hymn concludes by alluding to the point that marked the close of Christ’s earthly ministry (including resurrection appearances) and the beginning of the age of the Spirit.
Consequently, Paul’s readers are reminded of their confession that the first advent of Christ introduced a new way of life in the present age. The hymn combines snapshots of important points of that past appearance (lines 1, 2, 3, 6) with references to the salvation introduced by that event (lines 4, 5). The appearance of the God-man is the essence of the new lifestyle (godliness) that, Paul urges, must characterize the church as it gathers for worship and when it relates with the world. Our confession of Christ is our acknowledgment of the call to service and godly living.
notes 2:2 Godliness (eusebeia) is an important ethical term in the Pastorals. Paul possibly borrowed it from the false teachers’ special vocabulary (1 Tim 6:5; 2 Tim 3:5) in order to correct their erroneous views about the spiritual life. From Paul’s discussions of their misunderstandings about it, it appears that for them “godliness” was largely something to be attained at the cognitive level through “knowledge” (1 Tim 6:20; 2 Tim 3:5; Tit 1:16) but that had little or no bearing upon outward behavior. Thus Paul’s use of the term stresses correct knowledge of God (1 Tim 6:3; Tit 1:1) that produces an observable Christian manner of conduct (1 Tim 2:2; 4:8; 5:4; 6:11; 2 Tim 3:12; Tit 2:12). This genuine godliness is a product of Christ’s redemptive work (Tit 2:12) and the life-changing gospel (1 Tim 6:3; Tit 1:1).
“Seriousness” (NIV holiness; Greek semnotēs), a favorite term with Greek ethicists, also contributes to Paul’s description of the observable new life of faith (2:2; 3:4, 8, 11; Tit 2:2, 7). The respectability it denotes is connected with the believer’s witness to unbelievers.
* Vindicated or “declared righteous” is the meaning consistently expressed in the Greek Old Testament by the passive form of the verb (edikaiōthē).
* The passive verb was seen (ōphthē) in line 3, meaning “self-exhibition,” came to be used as a technical reference for the manifestation of God in the Greek Old Testament (Gen 12:7; 17:1–3). This, coupled with the strong New Testament tradition of Christ’s triumphant “appearance” before angels (Eph 1:21; Phil 2:9–11; Col 2:15; Heb 1:3–4; 1 Pet 3:22; Rev 5:8–14) and the dominant New Testament use of “angel” (angelos) for spirit beings, rules out a reference to human beings (who witnessed Christ’s resurrection) in the term angels. For the same reasons, the intention of the line exceeds the references to angels present on the day of Jesus’ resurrection (Mt 28:5–7; Mk 16:5–7; Lk 24:4–7; Jn 20:11–13; but see Hendriksen 1965:140–42).
For the use of the verb was taken up (analambanō) in line 6 in reference to Christ’s ascension, see Mark 16:19; Luke 24:51; Acts 1:2; 11:22.
* In glory denotes the glorified state of the resurrected Christ. On the significance of the ascension as indicating the conclusion of Christ’s earthly ministry and the inauguration of the age of the Spirit, see Ladd 1975:128.
 Philip Towner, 1–2 Timothy & Titus, vol. 14,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4), 딤전 3:16.
 
16 Beyond all question, the mystery of godliness is great:
He appeared in a body,
    was vindicated by the Spirit,
was seen by angels,
    was preached among the nations,
was believed on in the world,
    was taken up in glory.
 
3:16 Paul’s phrase “Beyond all question” introduces an outline of Christian truth that had the unanimous consent of Christians. The clause “the mystery of godliness is great” has a triumphant ring to it, much like the cry of the Ephesians in Acts 19:28. The term “mystery” also appears in 3:9 (translated “deep truths”) and refers to truth that is now revealed. The word “godliness” (eusebeia) has the article in Greek and in this context means the godliness. This structure causes translators to see the term as a synonym for the Christian religion (Fee; Moffatt; Williams). The mystery of the Christian religion to which Paul pointed refers to God’s redemptive plan which had been kept secret but was now revealed. Paul was extolling God’s powerful actions that form the basis of the gospel and the transforming results that derive from accepting it.
Paul’s outline of the Christian religion is representative but not exhaustive. For example, it does not mention the return of Christ. It is presented in the form of an early hymn.78 The mere recitation of a creed could be cold and lifeless, but a hymn would pulsate with warmth and vigorous emotion. For example, the hymns of Martin Luther (“A Mighty Fortress Is Our God”) and Charles Wesley (“O Sacred Head Now Wounded”) spearheaded great spiritual revolutions. Paul probably did not compose this hymn but found it current in the life of the church.
The hymn contains six distinct statements with Christ as the understood subject of each line. Experts differ on the arrangement of the statements. Lenski agrees with the KJV in rendering it as a single stanza with six consecutive lines. Kelly agrees with the NIV in calling for three verses of two lines each. Fee agrees with the GNB in calling for two verses of three lines each.79 The widespread disagreement even among experts makes one cautious in dogmatically following any set rendering. Fee’s suggestions will serve as the basis for arranging this hymn, and we will analyze six distinct statements of the hymn.
The quotation of the hymn in this verse is only a sentence fragment, for it begins with a relative pronoun literally translated “who” (hos). The NIV’s translation “he” disguises the fact that the Greek lacks a main clause. The absence of a principal clause led some early exegetes to alter the text. Some inserted the neuter relative pronoun “which” (ho) in order to link the clause with the term “mystery” so that the text spoke of a “mystery … which appeared in a body.” Others placed the word “God” (theos) in the text to create a complete sentence that read, “God appeared in a body.” The best manuscripts contain the reading “who,” from which it is easy to trace the development of the other readings.
There is agreement that the first line, “He appeared in a body,” is a reference to Jesus’ incarnation. The term “body” (literally “flesh”; sarx) is a reference to all that belongs to our human nature (except sin; cf. Rom 8:3). Paul was asserting that in Christ, God himself had appeared in a human body.
There is similar agreement about the content of lines four and five. Line 4, “preached among the nations,” refers to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among the nations of the known world by early Christians. Line 5, “believed on in the world,” describes a response to the previous proclamation. Christians preached the gospel throughout the nations of the world, and commitment to Christ was the result.
This interpretation of the content of lines 1, 4, and 5 suggests that the hymn is a story of salvation, somewhat along the line of J. Wilbur Chapman’s gospel song “One Day.” If this is correct, then we can understand the more difficult lines by relating them to the story of salvation.
Line 2 speaks of Christ’s “vindication by the Spirit.” The idea of vindication or the demonstration of Christ recalls statements about the resurrection in Rom 1:4 and 1 Pet 3:18. There is disagreement among some interpreters over whether “Spirit” is a reference to the Holy Spirit (NIV; NASB) or Christ’s spiritual nature. Lenski takes “spirit” to be a reference to the vindication of Christ’s spirit of holy obedience even to the death of the cross.80 Since the first line of this hymn refers to being manifest in the realm of the flesh, it seems that the parallel in line 2 is suggesting that Christ was vindicated or declared righteous in the sphere of his spiritual nature. The resurrection becomes the means of publicly declaring this vindication. What Paul was saying is that just as Christ was manifested in human flesh, so he was proved to be what he claimed to be in the spiritual realm. The resurrection of Christ declared that he was God’s Son.81
Line 3, “was seen by angels,” lacks the Greek preposition en and instead has a Greek dative case used with angels (literally “to angels”).82 The verb “was seen” is used in the New Testament to describe Jesus’ post-resurrection appearances (1 Cor 15:5–8). The angels who worshiped Christ may have been either fallen (Col 2:15) or unfallen (Heb 1:6; 1 Pet 1:12). The expression of Paul is likely a reference to the worship given by angels to the ascended Christ.83 If this interpretation is correct, then the first three lines of the hymn express Jesus’ incarnation, resurrection, and glorification. The first stanza of three lines extols the glory of Christ in his early ministry and concludes with a word of triumph and victory.
The next two lines (4 and 5) also offer expressions of Christ’s victory, but they sing about the developing ministry of Christ in his church. The sixth line of the song, “was taken up in glory,” uses a verb that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describes the ascension (Acts 1:2, 11, 22). Since the ascension preceded the preaching of the gospel, we might think that it is out of order to mention it at this point. However, Jesus ordered the preaching of the gospel (Matt 28:19–20) before the act of the ascension, and it is this order that the hymn follows. “Glory” is a reference to the brightness and majesty of God’s presence in Jesus, not merely a reference to the ascension. The emphasis may relate to the glory Christ received as he was declared and accepted.
This approach to the hymn finds two stanzas of three lines each. The first stanza praises the earthly ministry of Christ and concludes with a statement of triumph. The second stanza extols Christ’s ongoing ministry and concludes with a note of victory.
Paul used this hymn as an example of the mystery of godliness the church proclaimed. This mystery relates to the incarnation and resurrection of Christ and the church’s proclamation of him. Paul probably had two purposes in mind in placing the hymn at this point. First, his emphasis on the past humiliation and present triumph of Christ probably stood in contrast with the deficient Christology of the false teachers. They apparently spiritualized the resurrection (2 Tim 2:18) and drank in other Hellenistic ideas that could corrode Christian truth. Paul’s statement served as a corrective. Second, Paul was about to return to an attack against the false teachers. His statement of the truth here prepared for the attack by providing a broad expression of glorious truth in contrast to their demonic errors.84
Summary. Two characteristics of believers stand out in the statements of Paul in vv. 15–16. First, he wrote to point out how Christians should conduct themselves as members of God’s family. Christians are to distinguish themselves by a life-style of holiness. The mere mouthing of a creed without transformation of life does not denote a believer. Believers are those whose behavior designates them as God’s children and demonstrates the reality of their faith. Second, Christians are those who do have certain fixed beliefs about Christ. The incarnation, resurrection, and exaltation of Christ appear in the hymn Paul quoted. There is an appeal for belief. Christians are not merely those who think nice thoughts about a benevolent Jesus. They are those who have committed themselves to the incarnate Son of God and risen Lord. We must affirm fixed truths about Jesus.
78 Evidence for this comes from the parallelism of each line of the hymn. Each line begins with a verb in the Greek aorist passive tense followed by a prepositional phrase introduced by “in,” “by,” or “to.” There is a deliberate assonance in Greek marked by the sound th from the aorist passive verbs. Reading the passage aloud in the Greek shows the presence of rhythm in the diction. For a similar hymn see 2 Tim 2:11–13. Some scholars think that a creed would lack the deliberate parallelism or assonance of a hymn.
79 For discussion of the arrangement of the hymn see Lenski, St. Paul’s Epistles, 607–9; Kelly, Pastoral Epistles, 88–93; and Fee, 1 and 2 Timothy, Titus, 54–58.
80 Lenski, St. Paul’s Epistles, 612. The presence or absence of the article before the word is not always a clear indicator of the referent of the word “spirit.” Sometimes a reference to the Holy Spirit is anarthrous (e.g., 2 Cor 3:3), and sometimes it is articular (e.g., 1 Cor 2:12). Sometimes a reference to the human spirit of an individual is anarthrous (e.g., 2 Cor 7:1), and at other times it is articular (e.g., 1 Cor 2:11). The fact that “spirit” in the Greek text of v. 16 is anarthrous does not settle the issue of interpretation.
81 J. H. Bernard explains the meaning of the phrase to be that “as Christ was manifested in human flesh, so in His spiritual activities, words and works, He was proved to be what He claimed to be, Son of God no less than Son of man; His personal claims were vindicated” (The Pastoral Epistles [1899; reprint, Grand Rapids: Baker, 1980], 63).
82 In form the expression could read either “was seen by angels” or “appeared to angels.” The former translation would have “angels” in the instrumental case, showing agency. The latter translation would have “angels” in the dative case, indicating to whom the appearance was made. Guidance in deciding between these options can come by observing usage elsewhere.
In Acts 9:17 Luke used the same verb, and the NIV translates it “appeared to you.” In 1 Cor 15:5–8 the same verb is again translated “appeared,” and the persons to whom the appearances occurred (“Peter, the Twelve, five-hundred brothers, James, all the apostles, Paul”) are again preceded in the NIV by the preposition “to.” These translations take the case usages in these verses as dative, showing the person(s) to whom the appearances were made. Since these passages use the dative in translation, it seems wisest to continue that usage here. No serious issue is at stake in choosing the dative over the instrumental. To say that Jesus “was seen by angels” does not differ greatly in meaning from the statement that he “appeared to angels.”
83 The term translated “angels” can also mean messengers, and it can refer to those who reported Christ’s resurrection. However, Paul was attempting to show the worship given to the glorified Christ by angelic powers, and a reference to messengers on earth during Jesus’ incarnate life would be out of place here.
84 For further discussion of the question of why Paul placed the hymn at this point, see Fee, 1 and 2 Timothy, Titus, xxii–xxiii, and 57.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2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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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oTheir wives likewise4 must be dignified, not slanderers, but sober-minded, pfaithful in all things. 12 Let deacons each be qthe husband of one wife, qmanaging their children and their own households well. 13 For rthose who serve well as deacons gain a good standing for themselves and also great confidence in the faith that is in Christ Jesus.
o Titus 2:3
4 Or Wives likewise, or Women likewise
p [Titus 2:10]
q ver. 2, 4
q ver. 2, 4
r See Matt. 25:2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3:11–13.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3:11–13.
 
11절) ‘여자들’(귀나이카스)은 ‘귀네’의 대격 복수형으로 ‘여인, 아내’의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 231번 사용되는 동안 130번은 여자, 99번은 아내로 사용되었다. 이 귀네라는 단어의 다양한 용례로 본문의 ‘여자들’은 세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집사의 아내들, 2) 여자 집사들, 3) 여집사(집사를 돕되 집사와는 구별되는 여자들), 일반적으로는 문맥의 흐름상 집사의 아내들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본문이 집사들의 아내를 의미하는 것이든, 여집사 제도를 인정하는 것이든 초대교회의 상황속에서 여성도들의 역할이 요구되었던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여성들의 중요한 자격은 아래와 같다. 
‘정숙하고’로 번역된 ‘셈노스’는 ‘존경할만한, 위엄있는’의 의미를 가진다. 
 
‘모함하지 아니하며’, ‘참소하지’로 번역된 ‘디아볼로스’는 ‘고소하다, 비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디아발로’의 명사형으로 ‘마귀, 원수, 중상자, 참소자’(엡 6:11; 딛 2:3)의 의미를 가진다. ‘~사이’의 의미를 가진 ‘디아’와 ‘던지다, 두다, 놓다’라는 의미의 동사 ‘발로’의 합성어로 ‘~사이에 던져 놓다’라는 뜻으로 ‘비방이나 중상으로 타인의 명성을 해치는’의 의미를 가진다. 
요한복음 8:44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주님께서도 이렇게 고소나 비난, 참소를 일삼는 행위가 마귀에게서 났다는 것을 말씀해주신다. 이처럼 모함하는 자들은 마귀의 자녀들로 바울은 교회에서 남자들에게는 일구이언하지 말 것을, 여자들에게는 모함하지 말 것을 경고함으로 교회안에 혀를 잘 다스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한다. 
 
‘절제하며’는 ‘네팔리오스’로 ‘술취하지 않은, 절제하는’의 의미를 가진다. 영어 표현으로는 ’sober-minded, self-controlled, temperate’로 번역된다. 신약에 3번 사용된 이 표현은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들의 자격을 설명하면서 술과 관련된 측면에서 절제하는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일에 충성된 자’, ‘충성된 자’로 번역된 ‘피스타스’는 ‘신실한 사람,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모든 일(엔 파신)’에 충성됨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구제와 관련된 재정 운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재정을 맡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탐하지 않고 모든 일에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3:11 The word “wives” (gynē) is the same word translated “women” in 2:9–10 or “woman” in 2:11–12. The context will usually show whether the word refers to a married woman (“wife”) or is a reference to the female gender (“women”). Was Paul discussing the wives of the deacons, or was he presenting a special order of female helpers in Christian work?
In favor of viewing these as “wives” of the deacons is the fact that deacons are addressed on each side of the verse. Huther, who adopts this view, thinks the work of the deacon is of such a nature that the wives had a special role to play. Support for the view that Paul spoke of a special order of women helpers comes from a comparison of the structure of this verse to that of v. 8. The “likewise” (hōsautōs) of 3:8 appears to begin the enumeration of requirements for an office by reference to the previous requirements of 3:1–7. The same Greek word appears in v. 11 (translated “in the same way”) and seems to introduce qualifications for another office as v. 8 does. The statements of v. 8 and v. 11 are both logically dependent on “must be” of 3:2, and this further implies the presence of three categories of positions.
New Testament Greek did not have a special word for “deaconess,” but it used the same word with masculine endings to refer to both male and female helpers (see Rom 16:1, where Phoebe is described as a diakonos). Perhaps Paul’s failure to use a more specific title for these women was due to the fact that there was not one in use at that time. Paul’s use of the term “wives” or “women” implied that these were women who helped the church in some manner.
The early church did have women whose special responsibility was to work with women and children (see Titus 2:4 for an indication of the beginning of this task). They performed pastoral work with the sick and the poor and helped at baptism.73 The godly women Paul mentioned here stand in stark contrast with the gullible, immature women in 2 Tim 3:6. At 1 Tim 3:11 modern translations divide over the advisability of the translation “wives” (KJV, NIV, Phillips) or “women” (ASV, NASB, Amplified). Several versions use the term “deaconesses” (Williams, NIV margin, Montgomery). The GNB uses “wives” with a marginal alternative of “women helpers.” The term “women helpers” refers to a special order of women who had a responsibility for ministry within the congregation. Phoebe (Rom 16:1–2) may have served in this kind of role, and perhaps Euodia and Syntyche (Phil 4:2–3) held the same position.
Paul outlined four requirements for a woman helper. First, she was to be “worthy of respect,” a term used also of the deacons in v. 8. In prohibiting “malicious talking,” Paul used a word normally employed to designate the devil (diabolos, see 1 Pet 5:8). The literal meaning of the term is “slanderer,” or “accuser,” and in this sense it becomes an apt designation for Satan (Rev 12:9–10). In 2 Tim 3:3 and Titus 2:3 the word refers to people who slander or misrepresent others. Paul was prohibiting gossip and insulting usage of the tongue as he did for the deacons in 3:8 (see in 3:8 the term “sincere,” literally “not speaking a double-word” or “not being “double-tongued”).
The women are to be “temperate” by showing control or moderation in all their behavior. Paul had used the same word in 3:2 to refer to the overseer. The demand that the women be “trustworthy in everything” was an insistence on absolute reliability and faithfulness. Their trustworthiness could not be limited to a single sphere but had to be a part of all they did.
Whoever these women were, their qualifications stand in contrast to those of the women in 5:11–15 and 2 Tim 3:6–7. These women leaders were to have qualifications greatly contrasting with those who were duped by the false teachers.
Churches today that give women special places of responsibility rarely limit their work to women and children. A woman can certainly be as effective in handling finances as a man and often can be much more effective in maintaining church property. In light of the susceptibility of male leaders to moral failure in their working with women, it is sensible to look freshly at the pattern of the early church of using women to work with other women and children. The New Testament gives evidence that women who work with other women, the poor, and with children can render an important service for the cause of Christ. In taking advantage of the marvelous talents of highly trained, twentieth-century Christian women, we must be careful not to ignore special areas of natural competence in which women have long ministered effectively.
73 Ross, “A Reconsideration of the Diaconate,” indicates that from the earliest times deaconesses visited the sick, acted as doorkeepers at the women’s entrance for the church, kept order among church women, assisted in baptism for women, taught females in preparation for baptism, and acted as sponsors for exposed children (153). An insightful presentation of the role of women in the early church (including both heretics and heroines) appears in Christian History 7:17 (1988).
The early Christian writing known as the Apostolic Constitutions presents a picture of church life near the end of the third century. It outlines the work of a woman helper or deaconess as follows: “Ordain also a deaconess who is faithful and holy, for the ministrations towards women. For sometimes he cannot send a deacon, who is a man, to the women, on account of unbelievers. Thou shalt therefore send a women, a deaconess, on account of the imagination of the bad. For we stand in need of a woman, a deaconess, for many necessities; and first in the baptism of women, the deacon shall anoint only their forehead with the holy oil, and after him the deaconess shall anoint them: for there is no necessity that the women should be seen by the men” (Apostolic Constitutions 3.15).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9–121.
 
12절) 이미 앞선 감독의 직분을 설명하면서 2절과 4절에서 언급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는 것과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조건을 집사의 직분에서 동일하게 반복한다. 이처럼 집사의 자격과 감독의 자격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13절) 본 절은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이들에게 어떤 보상이 있는지를 언급한다. 
‘아름다운 지위’에서 ‘지위’로 번역된 ‘바드몬’의 원형은 ‘바드모스’로 이는 ‘단계, 계급, 등급, 지위’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더 나은 지위를 얻게 된다는 의미로 승진, 즉 집사의 직위에서 감독으로의 승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울 당시에도 교회의 직분에 승진이나 진급의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영적인 차원에서의 승진을 의미할 것인데 하나님의 교회와 주님앞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주님앞에서 잘했다라고 칭찬을 듣는 것일 것이다. 
‘담력’으로 번역된 ‘파르레시안’의 원형 ‘ 파레시아’는 ‘위험이나 위태로움을 수반하는 활동을 기꺼이 수행하는 특성, 특히 태도와 말에서 정직하고 직설적인 모습’을 의미한다(엡 3:12; 히 10:19). 이처럼 교회를 섬기는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되면 자신들의 믿음이 증진되고 이로 인해서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은 신학적인, 교리적인 믿음 체계가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본문에 ‘얻느니라’로 번역된 ‘페리포이운타이’는 원형 ‘피리포이에오’의 현재 중간태 직설법 표현으로 지금도 지속적으로 아름다운 지위와 큰 담력을 얻게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The use of the related verb “served” (diakoneō) so close to the noun for deacon in 3:12 suggests that Paul’s words here are primarily spoken in reference to deacons. However, the truth of the verse would apply also to overseers (3:1–7) and women helpers (3:11).
In the verse Paul explained a promise for the deacon who serves well. The present-tense verb “gain” states what the committed deacon can normally expect to get for his service.71 Paul outlined two promises. First, the servant will receive an “excellent standing” for his effective service. This standing is not an advance in ecclesiastical rank, a concern that was foreign to Paul’s mind. Nor is it likely that Paul was promising a good standing in heaven, namely heavenly rewards. The standing likely was an assurance of a good reputation or good respect from the church for a job well done, although it could also refer to a good standing with God. Second, the faithful servant receives “great assurance” (parrēsia), a term used frequently to describe access to God (see Eph 3:12; Heb 10:19). However, New Testament use of this term also refers to boldness before others (e.g., 2 Cor 3:12). It is possible that the term “assurance” could refer to an exercise of confidence both before God and those who hear the gospel. However, the prepositional phrase modifying “faith” clearly refers the noun to personal faith in Jesus. The absence of the article before “faith” in the Greek text is further support for identifying this faith as a personal response to Christ.72 It is best to see the “assurance” as a confidence before God produced in the sphere of a mature faith in Christ.
71 This is an example of the “customary” present that describes what may be reasonably expected to occur. The temporal element is remote because the promise is seen as true in the past or future, as well as the present. See H. E. Dana and J. R. Mantey, A Manual Grammar of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Macmillan, 1942), 183.
72 In the Pastorals Paul frequently placed the Greek article with “faith” when he intended to designate the content of the Christian faith (1 Tim 3:9; 4:1; 5:8), and he omitted the article when he referred to the personal experiential faith of the believer (1 Tim 1:5; 6:11; 2 Tim 1:13). The presence or the absence of the article in English is not always a safe indicator of Paul’s usage (see 1 Tim 1:2, which has the article in English, lacks it in Greek, but probably describes the sphere in which Paul and Timothy were related).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8–119.
 
한국 교회안에서 집사는 교회에 나오면 누구나 받게 되는 직분으로, 호칭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집사에게는 대단한 성품으로서의 자격과 의무, 책무를 요청했다. 결국 이러한 직분에 충성하게 될 때 그들의 믿음은 더욱 한단계 도약하게 되고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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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acons likewise must be dignified, not double-tongued,3 jnot addicted to much wine, knot greedy for dishonest gain. They must lhold the mystery of the faith with ma clear conscience. 10 And nlet them also be tested first; then let them serve as deacons if they prove themselves blameless.
i Phil. 1:1
3 Or devious in speech
j [ch. 5:23; Titus 2:3]
k Titus 1:7; 1 Pet. 5:2
l [ch. 1:19]
m See Acts 23:1
n [ch. 5:2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3:8–10.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3:8–10.
 
집사의 자격 조건
 
앞선 1-7절에서 감독의 자격을 논했다. 이제 8-13절에서는 초대 교회의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언급한다. 
 
8절) ‘이와 같이’로 번역된 ‘호사우토스’는 ‘바로 그’의 의미를 가진 ‘아우토스’와 ‘~같이, 처럼’의 의미를 가진 ‘호스’의 합성어로 '그와 같이, 마찬가지로, 유사하게’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앞선 감독의 요건에 대한 언급을 의미한다. 
‘집사’로 번역된 ‘디아코토스’는 본래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의미한다.(요 2:9) 이후 이 단어는 봉사자, 일꾼(롬 16:1; 골 1:7), 사역자(고전 3:5)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섬김’은 ‘디아코니아’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안의 집사의 직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본문은 행 6장이다. 행 6장에서 집사의 직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이 그들의 사역에 집중하도록 구제하는, 접대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 일곱명의 집사를 세운다. 하지만 그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디아코노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행 6장에서는 집사의 섬기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면 딤전 3장에서는 집사의 성품에 대해서 주로 언급하고 있다. 
‘정중하고’로 번역된 ‘셈노스’는 ‘경배하다, 경의를 표한다’라는 동사 ‘세보’와 형용사형어미인 ‘노스’의 합성어로 ‘존경할만한, 위엄있는’이라는 의미이다.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본문에서 ‘일구이언을 하지’로 번역된 ‘딜로구스’의 원형’딜로고스’는 ‘두 번’이라는 의미의 부사 ‘듀오’와 ‘말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레고’의 합성어로 ‘진실하지 못한, 동일한 사실에 대해서 두가지로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Mr. Two Tongues’라는 인물이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렁게 다르게 말함으로 두 사람 사이에 교묘히 처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집사들의 주요한 역할이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여 신앙을 점검하며 구제와 관련된 직무를 감당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말을 잘못 옮기거나 중상, 비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처신임에 틀림없다.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는 앞선 3절의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와 거의 같은 의미이다. 3절에서는 ‘파로이노스’라는 한 단어로 설명했다면 본 절에서는 ‘메 오이노 폴로 프로세콘타스’로 4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인박이다’라는 의미인 ‘프로세콘타스’의 원형 ‘프로세코’는 ‘주의하다, 조심하다, 전념하다, 열중하다’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많은 술에 열중하여 있지 아니하는’의 의미이다. 술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이들은 판단력이나 자제력이 부족하다.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며 구제하고 교회의 재정을 섬겨야하는 이들에게 이는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된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로 번역된 ‘아이스크로케르데이스’의 원형 ‘아이스크로케르데스’는 원래 ‘은밀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이스크로스’와 ‘유익한 이란 뜻을 지닌 ‘케르도스’의 합성어로 ‘은밀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이득을 취한 것’을 의미한다. 앞선 3절의 장로의 조건에서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에서는 합법적인 돈이라는 뉘앙스라면 본 절은 불법적인 돈, 깨끗하지 못한 돈을 의미한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하는 이들이 불법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하는 행동은 교회의 덕을 해치게 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사랑하지 않는 삯군 목자와 같다. 그런 자들은 자기의 배를 채우는데 급급하고 고난이 닥쳐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자들이다.(요 10:12)
 
Paul listed four requirements for the position of deacon. The first serves as a cover term for his description of deacon qualifications. The remaining three requirements of the verse are negative in that they prohibit certain attitudes in the deacon.67 Requirements were needed for the office of deacon as well as that of overseer.
“Worthy of respect” suggests that deacons are to be serious minded men whose character merits respect. The term combines such ideas as dignity, earnestness of purpose, and winsome attractiveness. A cognate noun (“proper respect”) is used in 3:4 to describe the manner of the overseer in the discipline of his children.
The deacon would be a frequent visitor in homes, and he needed to be consistent in what he reported to others. The NIV’s metaphorical translation “sincere” obscures the fact that the Pauline phrase (dilogos) has the meaning of not double-tongued and refers primarily to controlling speech (i.e., “not indulging in double talk,” NEB). The deacon is not to spread rumors to different groups of listeners.
The prohibition against indulging “in much wine” forbids the love of alcohol. The requirements resemble the demand of 3:3 for the overseer. Total abstinence today from alcohol would guard the deacon from the clutches of intoxicants. It would provide a credible witness to a society that needs help in combating alcoholism.
The deacon is to avoid the temptations of materialism by “not pursuing dishonest gain” (not given “to questionable money-making,” TCNT). Any deacon would face the temptation of using his spiritual office for financial gain. He is not to develop a questionable integrity by currying favors for mercenary ends. The quest for gain becomes base or dishonest whenever one makes personal gain rather than God’s glory the prime object of life. The use of this term does not merely prohibit the quest for gain in a dishonest manner. That would obviously be blatantly wrong. What Paul prohibited was the use of a spiritual office for material benefit, even if no dishonesty or illegality was present. The deacon is not to be perceived as greedy. In Titus 1:7 Paul used this same word (aischrokerdēs) as a requirement for overseers. Compare this with the appeal to the overseer in 3:3 that he not be “a lover of money.”
67 The term “likewise” ties the description of the deacons to that of the overseers. Lenski (St. Paul’s Epistles, 594) connects the statements in v. 8 with “must be” (δεῖ … εἶναι) of 3:2. He sees vv. 2–7 as a unit describing the qualifications of the overseer and v. 8 as the beginning of another unit. The requirements Paul would mention are necessitated by the nature of the diaconic office.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6–117.
 
9절)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원문에는 ‘가진 자라야 할지니’에 해당하는 ‘에콘타스’가 문장의 처음에 등장한다. 이 단어의 목적어인 ‘믿음의 비밀을'에 해당하는 ‘토 뮈스테리온 테스 피스테오스’이후에 이를 부연하는 전치사구 ‘엔 카다라 쉬네이데세이’가 등장한다. 이 본문은 ‘깨끗한 양심 안에 믿음의 비밀들(KJV)’ 혹은 '깨끗한 양심을 지닌 믿음의 비밀을(NASB)’이란 의미가 된다. 이는 깨끗한 양심의 기초 위에, 그 안에서 믿음의 비밀이 자리잡고 자라간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지 못한 자가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비밀을 갖되 깨끗한 양심안에 가져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비밀’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피스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믿고 복음의 진리 안에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계를 말하는 믿음이다. ‘비밀’에 해당하는 ‘뮈스테리온’은 그리스도인들은 알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은 알지 못하는 진리를 의미한다. 구원과 관련된 특별계시와 관련된 것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deep truths. Translates the Greek word mystērion (1 Cor 2:7; 4:1; 15:51; Eph 3:3, 4, 9; Col 1:26–27; 2:2–3; 4:3 and notes), a word Paul uses to describe God’s formerly hidden but now revealed plan (see Rom 16:25–26 and notes) to bring salvation through Christ. truths. See note on Titus 1:14. Whereas overseers must be “able to teach” (v. 2), deacons must show they have fully grasped “the faith” and uphold it in an exemplary fashion. the faith. Refers here to apostolic teaching, as it does at the end of 1:19 (see note; see also 4:1, 6; 6:10, 12, 21; 2 Tim 4:7; Titus 1:13).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72.
 
Christian leaders are to exhibit a proper doctrinal and moral response to Christ’s message. Paul’s demands here turned positive. The “deep truths” of the faith are teachings once hidden but now revealed (cf. “the open secret of faith,” Williams). The “faith” is the content of the Christian religion. It is objective Christian truth.
“Conscience” is a frequent emphasis of the Pastorals (1 Tim 1:5, 19; 4:2; 2 Tim 1:3; Titus 1:15). Paul used the term in 1:5, 19 to describe that inner guide to life which demonstrates obedience to God. To have a “clear conscience,” a Christian leader must give continual obedience to God’s truth as revealed in Scripture (cf. 1 John 1:7). The false teachers Paul had described (1:5–6, 19) lacked a clear conscience. Paul placed more emphasis on the clear conscience with which the deacons held the faith than on their merely holding to the faith.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7.
 
10절) ‘먼저 시험하여 보고’, ‘먼저’로 번역된 ‘프로톤’은 순서나 서열상의 우선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본문에서는 문맥상 시험하여 보는 과정이 집사 임명보다 순서에서 선행되어야 할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포함하다. 본문에 ‘시험하여 보고’로 번역된 ‘도키마제스도산’은 본래 금이나 은과 같은 금속의 순도를 시험해보다라는 의미의 ‘도키마조’라는 동사의 현재 수동태로 ‘조사하다, 면밀히 밝히다, 확인하다, 인정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빌 1:10). 여기서는 ‘확인하여 인정하기 위해서 시험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집사 직분에 합당한 자인지를 시험함에 있어 필기시험을 치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품성이나 믿음, 은사 등이 그 심사의 대상일 것이다. 행 6:3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그러한 심사를 진행할 수 있다. 
 
δοκιμάζω (dokimazō), 동사. 조사하다, 면밀히 밝히다. 미래 능동태. δοκιμάσω; 부정과거 능동태. ἐδοκίμασα; 완료 능동태. δεδοκίμακας; 부정과거 능동태. ἐδοκιμάσθην; 완료 중간태. δεδοκιμάσμεθα. 히브리어 등가: בחן (10), חקר (2), יקר (1), מַצְרֵף (1).
동사 용법
1. 인정하다 — 옳거나 훌륭하다고 판단하다; 좋게 생각하다. 의미상 반의어: 못마땅해 하다 (잘못). 관련 주제: 승인하다.
롬 1:28 καθὼς οὐκ ἐδοκίμασαν τὸν θεὸν ἔχειν ἐν
롬 12:2 εἰς τὸ δοκιμάζειν ὑμᾶς
고전 16:3 οὓς ἐὰν δοκιμάσητε διʼ ἐπιστολῶν,
엡 5:10 δοκιμάζοντες τί ἐστιν εὐάρεστον τῷ κυρίῳ·
빌 1:10 εἰς τὸ δοκιμάζειν ὑμᾶς
2. 조사하다 (검사) — 관찰, 검사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고 확인하다. 관련 주제: 증인; 보다; 관찰하다.
눅 12:56|| οὐρανοῦ οἴδατε δοκιμάζειν, τὸν
고후 13:5 ἑαυτοὺς δοκιμάζετε·
살전 2:4 τῷ δοκιμάζοντι τὰς καρδίας ἡμῶν.
살전 5:21 πάντα δὲ δοκιμάζετε,
요일 4:1 δοκιμάζετε τὰ πνεύματα εἰ ἐκ τοῦ θεοῦ
3. 면밀히 조사되다 — 참인지 거짓인지 정밀하게, 낱낱이 또는 상세하게 조사하다.
딤전 3:10 καὶ οὗτοι δὲ δοκιμαζέσθωσαν πρῶτον,
벧전 1:7 πυρὸς δὲ δοκιμαζομένου εὑρεθῇ
4. 허가를 받다 — 훌륭하다고 혹은 옳다고 판결되다. 좋게 생각되다. 관련 주제: 승인하다.
살전 2:4 καθὼς δεδοκιμάσμεθα ὑπὸ τοῦ θεοῦ πιστευθῆναι τὸ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완료 능동태. 완료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수동태
완료 중간태. 완료 중간태
||  || 마 16:3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The demand for “testing” raises two questions. First, what is the nature of the testing? Paul did not clarify whether the examination of the candidate concerned doctrinal beliefs, moral practices, or a combination of both. The emphasis of 3:9 suggests that both doctrine and practice are important in Christianity. The use of the present tense for “be tested” implies testing over a period (i.e., “let them continue to be tested”). The testing may not be so much a period of probation as a continual testing so that when deacons are later needed they may come from the available worthy group.
A second question concerns who did the testing. Again there is no specific statement from Paul. Acts 6:5 implies that the “Seven” were chosen by the entire congregation, but Titus 1:5 highlights the role of Titus in selecting leaders for the church on Crete. Perhaps a more mature congregation would act as a body in selecting its leaders, but a fledgling flock might rely on the wise insight of its founding pastor. The examination may have been informal, but the deacon-candidate needed to convince the church of his genuine Christian faith.
After the experience of testing, those who had “nothing against them” served as deacons. The word translated “nothing against them” (aneng-klētos) is a synonym for “above reproach” of 3:2 and signifies someone against whom no specific charge of wrongdoing can be laid.68 Paul’s requirements assure that the deacon would not normally be a recent convert. Following this demand would prevent the premature acceptance of unworthy men (see 1 Tim 5:22).
Paul did not specifically mention a process of testing for the office of overseer. Such action is implied by Paul’s general description of the qualifications to be sought in the overseer. Although he did not mention any formal act of testing, it is implied that some process similar to that of v. 10 probably took place also in regard to the office of overseer.69
68 “In one sense, then, all Christians are blameless; in another sense all are unworthy; but in the mercy of God some men, though they feel their own unworthiness, are adjudged fit by their experienced fellow believers. God uses men before they are completely sanctified, and the church perforce must do likewise. But in that same mercy, some men have progressed far enough in discipleship to hold office in the church” (Ward, 1 & 2 Timothy & Titus, 60).
69 Justification for this statement comes from the appearance of “also” (καὶ; not translated in the NIV) in the Greek. A literal translation of the opening statement of v. 10 is, “And let these also first be tested.” The “also” implies that the call for testing renews a practice being carried out with the overseers.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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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 must manage his own household well, with all dignity ekeeping his children submissive, for if someone does not know how to manage his own household, how will he care for wGod’s church? He must not be a recent convert, or he may fbecome puffed up with conceit and fall into the condemnation of the devil. Moreover, he must be well thought of by goutsiders, so that he may not fall into disgrace, into ha snare of the devil.
e [ver. 12]
w [See ver. 1 above]
f ch. 6:4; 2 Tim. 3:4
g See Mark 4:11
h 2 Tim. 2:26; [ch. 6: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3:3–7.
 
디모데전서 3:4–7
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4절)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집’으로 번역된 ‘오이쿠’는 ‘오이코스’의 소유격이다. 본 3장에는 집(household)이라는 표현이 4번(4, 5, 12, 15절) 사용되는데 이중 15절에서는 교회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당시의 교회는 일반 가정 집이었다. 
‘다스려’로 번역된 ‘프로이스타메논’의 원형은 ‘프로이스테미’로 ‘지도하다, 진두에 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앞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프로스’와 ‘서다, 서 있다’를 의미하는 ‘이스테미’의 합성어로 앞에 서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딤전 5:17; 살전 5:12; 롬 12:8). 이처럼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가 믿는 공동체인 교회를 잘 다스릴 수 있다. 또한 한 가정에서 자녀들을 교훈과 훈계로 잘 다스린 사람이어야 주님의 몸된 교회의 성도을 잘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을 잘 다스리면 자녀들은 모든 공손함으로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게 된다. ‘공손함’에 해당하는 ‘셈노테스’는 ‘위엄, 존엄, 온전한 기품’을 의미한다. 감독은 관용하며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하지만 그 안에는 위엄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자녀가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로 ‘안돼’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자녀들이 진심으로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감독의 조건으로 객관적인 품행이나 스펙(직업, 학력, 경제력)등도 중요하지만 결혼 생활과 부모로서의 역할을 가정안에서 잘 하는 지는 매우 중요한 지표이다. 이는 공동체인 교회를 섬기는 목회 지도력을 측정하는데 있어서 공개된 책과 같다. 
manage his own family well. A leader who is not a catalyst for orderly godliness within his own home and family does not inspire the confidence needed to teach and guide other households making up a particular congregation (“God’s church,” v. 5). More than formal, academic, or professional qualifications are vital. A man’s marriage and parental skills are open books for assessing pastoral readiness.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71.
 
Paul demanded that the church leader be exemplary in controlling his own family. He was to raise children known for their obedience and morally upright behavior. The verb for “manage” carries the idea of governing, leading, and giving direction to the family. The same Greek word appears in 1 Thess 5:12 (“are over you”) and 1 Tim 5:17 (“direct”) and also in v. 5 (“manage”). The term demands an effective exercise of authority bolstered by a character of integrity and sensitive compassion. Its use in v. 5 with the verb “take care of” defines the quality of leadership as related more to showing mercy than to delivering ultimatums.
For the father to see “that his children obey him” does not demand excessive force or sternness. It demands primarily a character and manner of discipline that develop a natural respect. “Either the children show respect for their father or the meaning is that his character and demeanor call it forth.… This is not the martinet’s paradise but is the Christian home, in which the husband exercises love, as the context in Ephesians shows.”58
The NIV translation takes the phrase “with proper respect” as a description of the manner of the children’s obedience. It is better to translate the term for “respect” with the word “seriousness” and use it as a description of the overseer’s manner in the discipline of his children. The Williams translation brings out the idea “managing his own house well, with perfect seriousness keeping his children under control.” The passage assumes that the leader is married but does not require it. It does not demand that the married leader have children. If he does, they must be obedient children who reflect a skillful blend of authority and compassion in their training.
58 Ward, 1 & 2 Timothy & Titus, 57.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2.
 
5절) 한글 성경에서는 본절이 괄호로 묶여져 있다. 이는 이 구절이 4절에 대한 설명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수사 의문문으로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한 사람은 감독의 자격이 없음을 강조한다. 본문에서는 ‘자기 집-이디우 오이쿠’과 ‘하나님의 교회-에클레시아스 데우’를 연관시킨다. 가정은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돌보고 다스리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장이다. 
‘돌보다’는 ‘에피멜레오마이’는 ‘어떤 것이나 상황에 대해 책임지고 관리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신약에 3번 사용되었는데 나머지 2번은 눅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한다. 
 
누가복음 10:34–35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Paul indicated that the experience the leader gained in the home would develop sensitive compassion (“take care of”) for his role in the church. The verb “manage” appeared in v. 4. The development of proper leadership skills in the home was a prerequisite for using them in the church. Paul’s reference to the church as “God’s household” (1 Tim 3:15) underscores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church and home. Paul intended that the church leader exhort his people to obedience not by ruling them with a heavy hand but by showing the care and compassion of a servant-leader (1 Pet 5:1–4). The overseer’s duty is to so “conduct himself that the members of the church may be obedient to him, not as servants to a master, but as children to a father, that they may show him obedience in love.”59 The skillful pastor will give to the church the type of leadership that will encourage his people to follow him.
59 Huther, Epistles to Timothy and Titus, 121.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2.
 
6절) 본절은 새로 입교한 자는 감독으로 세우지 말것을 권고한다. 이는 영적 성숙도와 관련된 것으로 아직 본인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감독이 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교만함으로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 입교한 자’로 번역된 ‘네오퓌톤’은 ‘새로운’을 의미하는 ‘네오스’와 ‘심다, 자라다, 성장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퓌오’의 합성오로 문자적으로는 ‘새로 심은’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이제 막 회심한, 새신자를 의미한다. 새신자에게 감독의 직분을 바로 맡겨서는 안되는 이유는 바로 교만때문이다. ‘교만하여져서’로 번역된 ‘튀포데이스’는 ‘연기, 안개’를 의미하는 ‘튀포스’에서 파생된 단어로 ‘연기 또는 안개를 일으키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자만하다, 교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딤전 6:4; 딤후 3:4) 교회안의 중요한 직분은 단순히 나이나 경제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성숙하지 못한 이들은 섬기는 자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가 되어 교회를 분란에 빠지게 하고, 본인도 교만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영적으로 성숙한 이가 교회의 지도자, 감독이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영적 성숙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시간을 거쳐 하나님과 교회가 인정한 사람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본문에 사용된 ‘마귀’라는 표현은 ‘디아볼로’인데 이는 ‘비방하는 자, 고발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투 디아볼루’를 주격적 소유격이나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주격적 소유격으로 보면 ‘마귀가 꾀어 빠뜨리는 정죄에 빠지지 않도록’이라는 의미가 되고,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면 ‘마귀가 받는 심판에 빠지지 않도록’이라는 의미가 된다. 마귀는 죄를 범하고 하나님앞에 참소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본다면 전자의 해석이, 심판의 권한은 마귀가 아닌 하나님께만 속한 고유 권한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본다면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러니까 정죄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The term “recent convert” means literally to be “newly planted,” hence recently converted. The condition of being a novice has more to do with spiritual than with chronological age. Churches could not carry out the prohibition against using a recent convert in their first few years of existence. Only the first converts could assume office where the gospel had recently appeared (Acts 14:23). Eventually it would be important to select leaders with enough maturity to avoid the pitfalls of pride. The danger of appointing a recent convert to a place of leadership is that he may become a victim of conceit that comes with his important new position. To be “conceited” (typhoō) means to be blinded.60 The pride in a prominent position produces a blindness that blunts spiritual alertness.
The reference to falling “under the same judgment as the devil” is literally translated from the Greek as “the judgment of the devil.” That literal phrase is capable of two different interpretations. It can refer either to the judgment the devil receives or the judgment the devil causes.61 The translation of the NIV suggests that the former interpretation is preferable. The translation of the NEB (“a judgment contrived by the devil”) reflects the latter interpretations. Fee follows the former interpretation, suggesting that the judgment is that given to the devil by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cf. Rev 12:7–17; 20:7–10). However, Kelly points out that this interpretation does not prepare us for the devil’s role in setting a trap in v. 7. In that verse Paul described Satan as setting a trap for the unwary overseer. It seems best to take the references in both v. 6 and v. 7 as condemnations or spiritual traps Satan causes.62 Proud people will become blind to Satan’s working and will fall into defeat, trouble, and ruin (cf. 1 Tim 6:9, where Paul described the progression of falling, entanglement, and drowning). This is a condemnation Satan can inflict on spiritually insensitive leaders. Although Peter’s denial of Christ was not due to pride, it displayed an arrogance and conceit that came from blindness to Satan’s working (Matt 26:30–35).
60 The similarity of the word used here (τυφόω) to the Greek τύφω (“give off smoke,” “smolder”) leads some to suggest that Paul’s thought contains a warning against being wrapped in the smoke of pride (see Lenski, St. Paul’s Epistles, 588). Hanson points out that the correct meaning is “blinded” or “beclouded” (Pastoral Epistles, 76). The idea is that pride leads to a conceit that produces blindness. Pride can produce moral blindness as a defective retina can cause physical blindness.
61 In the Greek the interpretive question revolved around whether the genitive should be seen as objective or subjective. If it is objective, then the term refers to a judgment Satan receives. If it is subjective, then the term refers to a judgment or a condemnation Satan brings about. The most likely interpretation sees the genitive as a subjective genitive.
62 Fee, 1 and 2 Timothy, Titus, 45–47. Kelly, Pastoral Epistles, 79.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3.
 
7절) 2-3절에서 감독의 품행과 관련된 12가지 조건을 언급하고 4-5절에서는 가정생활과 6절에서는 영적 성숙도를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울은 이제 외부적 평판이 감독 선별의 기준이 되어야함을 제시한다. 
‘외인’으로 번역된 ‘엑소덴’은 ‘외부, 바깥, 외부인’의 의미이다. 즉 본문에서는 교회안의 성도들이 아닌 비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선한 증거’로 번역된 ‘마르튀리안 칼렌’은 ‘good reputation’으로 좋은 평판을 의미한다. 교회의 감독이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 선한 증거를 얻지 못하면 교회의 권위는 떨어지고 교회의 세상에 대한 복음 증거의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한 증거를 얻을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는 교회가 외부에 대하여 선한 일을 행함으로 그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또한 감독이 교회만이 아니라 외부, 세상에서도 자신의 일상의 삶 혹은 공적인 직무를 통해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으로 가능하다. 결국 이는 감독이 교회안에서만 존경받는 존재가 아니라 외부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 위험이 높다. 
‘마귀의 올무’로 번역된 ‘파기다 투 디아볼루’는 ‘디아볼로스’의 주격적 소유격으로 적극적으로 마귀가 쳐 놓은 덫, 올무를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교회의 감독이 외부에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할 때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과 복음의 능력이 훼손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시대 한국 교회의 상황속에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를 이루지 못하고 상식이 기적이 되는 교회로 전락하게 될 때 복음은 힘을 잃고 하나님의 이름은 망령되이 일컬어지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좋은 지도자, 감독을 세우지 못하게 되면 복음이 전파되기는 커녕 도리어 복음의 능력이 훼손되고 도리어 위축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적극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감독들을 세우려고 노력할 것이고 반면에 교회는 준비된 감독들을 세우기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3:7 An effective church leader needs the respect of even the unsaved world. If the behavior of the leader does not present a creditable witness, the devil can entrap the church by making outsiders wary of believing the gospel.
The “good reputation” is literally a “good witness.” This is an appeal that the church leader have a good name and standing in the wider community. The mention of the leader’s name should not cause derision among the opponents of the gospel. The behavior of the leader should provide an example of integrity and commitment to the gospel he professes.
The outsiders are those who have not believed the gospel. The moral instincts of enlightened outsiders are sound and worthy of respect. Christians ought not ignore such opinions in assessing the character of a potential leader.63
The “disgrace” may be that reproach which outsiders bring on professing Christians who dishonor Christianity by disobedience. Satan uses such disgraces to trap his victims.
If the overseer has an unsavory reputation with the unsaved world, he and the entire church will fall into disgrace. Paul stated that such disgrace is a trap set by the devil. When church leaders live in such a way that unsaved outsiders refuse to listen to their message, the devil has clearly lured believers into a trap. Christians must realize that unbelievers scrutinize their actions with a searchlight of fault-finding investigation. Paul’s implied appeal is that church leaders give no opportunity for unbelievers genuinely to find fault. Perhaps the discouragement that comes from learning of a disgraceful reputation among unbelievers might induce an unwary Christian to turn to further disobedience. In this verse Paul presented Satan as a hunter who lays out traps into which the careless, short-sighted Christian can fall. This trap is clearly one set by the agency of Satan. This leads Zerwick and Grosvenor to view the uses of “devil” in both vv. 6 and 7 as subjective so that Satan is causing both the judgment and the trap.64
63 N. J. D. White,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imothy and the Epistle to Titus,” EGT, ed. W. R. Nicoll (New York: George H. Doran, n.d.), 4:114.
64 M. Zerwick and M. Grosvenor, GAGNT, 2 vols. (Rome: Biblical Institute, 1979), 2:630.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1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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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ying is vtrustworthy: If anyone aspires to wthe office of overseer, he desires a noble task. Therefore xan overseer1 must be above reproach, ythe husband of one wife,2 zsober-minded, self-controlled, respectable, ahospitable, bable to teach, not a drunkard, not violent but cgentle, not quarrelsome, dnot a lover of money. He must manage his own household well, with all dignity ekeeping his children submissive, for if someone does not know how to manage his own household, how will he care for wGod’s church? He must not be a recent convert, or he may fbecome puffed up with conceit and fall into the condemnation of the devil. Moreover, he must be well thought of by goutsiders, so that he may not fall into disgrace, into ha snare of the devil.
v See ch. 1:15
w See Acts 20:28
x Titus 1:6–9
1 Or bishop; Greek episkopos; a similar term occurs in verse 1
y [ch. 5:9]
2 Or a man of one woman; also verse 12
z ver. 11; Titus 2:2
a 1 Pet. 4:9
b 2 Tim. 2:24
c Titus 3:2
d Heb. 13:5; [ch. 6:10]
e [ver. 12]
w [See ver. 1 above]
f ch. 6:4; 2 Tim. 3:4
g See Mark 4:11
h 2 Tim. 2:26; [ch. 6: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3:1–7.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3:1–7.
 
앞선 2장에서 모든 사람들을 향한 기도와 교회안의 남녀 성도들의 품행에 대한 교훈을 한데 이어서 3장 1-13절에서는 교회안의 직분자들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한 자격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다. 
 
1절) 미쁘다 이 말이여, ‘피스토스 호 로고스’ 이는 앞선 1장 15절에서도 등장한다. 
디모데전서 1:15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앞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표현에 대한 진실성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 본문에서는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사모해야한다는 것이다. 
‘미쁘다’는 ‘피스토스’로 ‘충성된, 믿을만한, 신실한’이라는 의미이다. 아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 절에서는 1절 이하의 부분에 대한 언급이 신뢰할만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감독의 직분’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페스’는 ‘돌보다, 감독하다’는 의미의 동사 ‘에피스코페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에피스코포스’는 ‘감독, 관리자, 주교’라는 의미이고 ‘에피스코페’는 ‘방문, 지위, 감독’의 의미이다. 
사도행전 20:28
28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에피스코포스)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포이마이노) 하셨느니라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교회안의 감독의 역할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감독, 장로는 초대 교회를 지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감독과 장로라는 표현을 혼용해서 사용한다.(딛 1:5-7)
신약에서 ‘장로’로 번역되는 ‘프레스뷔테로스’는 각 회당에서 경험과 나이가 많은 자로 말씀을 가르는 자로 목회자의 품위와 가르치는 사역의 측면을 강조한 용어라면, ‘감독’으로 번역된 ‘에피스코포스’는 당시 헬라와 그에 종속된 도시를 다스리는 관리나 관원들을 일겉던 용어로 당시 행정 제도나 헬라적 어법이 반역된 표현으로 목회자의 사역 가운데 성도들의 생활을 돌보고 교회를 관리 감독하는 행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처럼 목회자는 ‘프레스뷔테로스’와 ‘에피스코포스’의 두가지 성격을 모두 지녀야 하며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교회를 가르치고 돌보는 직분임을 말해준다. 
바울은 이처럼 교회를 섬기는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는 사람은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한다고 말한다. 본문의 ‘얻으려’라는 표현은 ‘오레게타이’로 원형인 ‘오레고마이’의 현재형이다. 이는 ‘손을 내밀다, 열망하다’라는 의미로 지속적으로 열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교회를 섬기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 일시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열망은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어서는 안된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공격이 심했고, 복음에 도전하는 거짓 선생들과 이단의 도전이 강력한 상황에서 감독의 직분은 매우 어렵고 중요한 역할이었다. ‘선한 일’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 하나님나라에 유익이 되는 일을 의미한다. 교회를 가르치고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며 칭찬받는 일이 바로 선한일이다. 본문에 ‘사모한다’는 표현은 ‘에피뒤메이’인데 이는 ‘마음에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 원형 ‘에피뒤메오’의 현재형이다. 앞선 ‘오레게카이’와 함께 현재형으로 지속적인 열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선한일을 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바로 감독인 것이다. 
 
2절) 본절부터 7절까지는 감독의 구체적인 자격조건을 다룬다. 이 내용은 딛 1:6-9절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 ‘아네필렘프톤 에이나이’, ‘책망할 것이 없다’로 번역된 ‘아네필렘프톤’은 부정의 의미를 지닌 ‘아’와 ‘붙잡히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필람바노’의 합성어로 ‘붙잡히지 않는’이란 뜻이다.
디모데전서 5:7
7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디모데전서 6:14
1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이는 전혀 흠이나 잘못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 눈에 띄게 흠 잡을 것이 없는이라는 의미이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미아스 귀나이코스 안드라’, 여기서 한 아내로 번역된 ‘미아스 귀나이코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 감독이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견해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감독의 자격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과 바울이 독신의 삶을 부정하는 결과를 도출한다. 
둘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혼한 후에 재혼한 자들이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도 예수께서 허락하신 ‘배우자가 심각한 성적인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혼하게 된 이들의 경우’(마 5:31-32; 19:9)나 바울이 허락한 ‘믿지 않는 배우자가 믿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결혼 관계를 지속하지 않으려 하기때문에 발생한 이혼의 경우’(고전 7:12)를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셋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는 사별했다가 재혼한 자들이어서는 안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두번 결혼한 남자들은 감독의 직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터툴리안이 이 견해를 강력히 지지했지만, 롬 7:1-3이나 고전 7:39에서 과부나 홀아비의 경우 분명하게 그들의 재혼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넷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는 여러 아내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외적인 조건의 믜미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일부다처제에 대한 반대로 보는 것인데 당시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는 하나님이 창조 원리(창 2:21-25)에 어긋난다. 이런 의미에서 일부일처제의 결혼 관계 안에서 성적 순결을 지켜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다섯째 감독이 되고자 하는 자들은 결혼 생활에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어사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 한 아내의 남편됨을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결혼생활의 규정으로 하나님의 창조섭리 안에서 참되고 신실하며 도덕적으로 부정함이 없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절제하며로 번역된 ‘네팔리오스’는 ‘술이 깨다’라는 ‘테포’에서 파생된 단어(3:11; 딛 2:2)로 이후 3절의 ‘술을 즐기지 아니하는’과 병행된 표현이다. 당시 헬라 표현에서 이 단어는 ‘금주하는, 술취하지 않는’의미와 좀더 넓게는 식욕을 비롯해 세상의 많은 욕망을 제어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신중하며로 번역된 ‘소프로나’는 모든 일에 신중하게 임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단정하며로 번역된 ‘코스미온’은 행동이 선하고 무리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 세 표현은 모두 인간의 내적 자제력, 통제력과 관련되어 있다. 이처럼 감독은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이끄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다스릴줄 모르는 사람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필록세노스’는 ‘사랑’을 뜻하는 명사 ‘필로스’와 나그네, 낫선 사람을 뜻하는 명사 ‘크세노스’의 합성어로 ‘낯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서 자기를 절제할 수 있는 이들만이 다른 이들을 대접할 수 있다. 바울 당시 숙박 시설이 용이하지 않았는데 숙박의 어려움을 겪는 순회 설교자들이나 그리스도인 여행자들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다.(히 13:2)
 
‘가르치기를 잘하며’, ‘디닥티콘’은 원형인 ‘디닥티코스’ 신약에 2번 등장하는데 본절과 딤후 2:24에 등장한다. 감독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당시 복음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이를 대적하는 이단의 세력들, 특히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율법주의적 유대인들이나 영지주의자들에 맞서서 복음의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했다. 앞선 내용들이 도덕적인 성품, 자질이라면 이는 전문적인 자질이라고 할 수 있다.  
Above reproach heads the list as the key qualification for an overseer; it is then expounded by the words and phrases that follow in these verses (see note on Titus 1:6). The meaning of husband of one wife (Gk. mias gynaikos andra) is widely debated. The Greek phrase is not common, and there are few other instances for comparison. The phrase literally states, “of one woman [wife] man [husband].” (1) Many commentators understand the phrase to mean “having the character of a one-woman man,” that is, “faithful to his wife.” In support of this view is the fact that a similar phrase is used in 1 Tim. 5:9 as a qualification for widows (Gk. henos andros gynē; “one-man woman,” i.e., “wife of one husband”), and in that verse it seems to refer to the trait of faithfulness, for a prohibition of remarriage after the death of a spouse would be in contradiction to Paul’s advice to young widows in 5:14. Interpreters who hold this first view conclude that the wording of 3:2 is too specific to be simply a requirement of marriage and not specific enough to be simply a reference to divorce or remarriage after divorce. In the context of this passage, the phrase therefore prohibits any kind of marital unfaithfulness. (2) Another view is that “husband of one wife” means polygamists cannot be elders. Interpreters who hold this view note that there is evidence of polygamy being practiced in some Jewish circles at the time. On this view, the phrase means “at the present time the husband of one wife,” in line with other qualifications which refer to present character. On either of these views, Paul is not prohibiting all second marriages; that is, he is not prohibiting from the eldership a man whose wife has died and who has remarried, or a man who has been divorced and who has remarried (these cases should be evaluated on an individual basis). (3) A third view is that Paul is absolutely requiring that an elder be someone who has never had more than one wife. But that does not fit the context as well, with its emphasis on present character. On any of these views, Paul is speaking of the ordinary cases and is not absolutely requiring marriage or children (cf. v. 4) but is giving a picture of the typical approved overseer as a faithful husband and father. able to teach. This is the one requirement in this list that is not necessarily required of all believers. It is also not required of deacons. Thus, it is a distinguishing skill required of the pastor/elder. It yields the only reference in this list to his actual duties (see note on Titus 1: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9.
 
3절)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메 파로이논’ ‘술을 즐기지’로 번역된 ‘파로이논’의 원형 ‘파로이노스’는 ‘곁에, 가까이’를 뜻하는 전치사 ‘파라’와 ‘포도주, 술’을 의미하는 ‘오이노스’의 합성어로 ‘술 곁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을 뜻한다. 술은 이성과 판단력을 둔하게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품위에 손상을 주는 행동을 초래한다. 구약에서 성전에 들어가 다른 불을 드려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던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가 그러하다.(레 10:1-11) 바울은 절대적인 금주를 말하지는 않았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인간의 혈기와 관련된 교훈이다. 
‘구타하지'로 번역된 ‘플렉텐’은 물리적 폭력행사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말이나 태도를 통해서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이 단어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의 뒤에 나오는 것은 술을 즐기는 자들이 이런 행위를 일삼기 때문이다. 
‘관용하며’로 번역된 ‘에피에이케’의 원형 ‘에피에에케스’는 ‘위에, ~에 대하여’란 전치사 ‘에피’와 ‘양도하다’라는 뜻의 동사 ‘에이코’의 합성어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베푸는 선한 감정, ‘호의적인, 친절한, 동정심 많은’의 의미이다. 
‘다투지 아니하며’로 번역된 ‘아마콘’의 원형 ‘아마코스’는 부정사 ‘아’와 ‘쟁론’을 의미하는 ‘마케’의 합성오로 불필요한 논쟁이나 이해 관계로 인한 논쟁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가지 덕목은 예수 그리스도와(마 11:29) 사도 바울(고후 10:1)이 소유했던 덕목으로 교회의 감독들에게 필수 요구사항이다.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의 원형 ‘아필라르귀로스’는 부정사 ‘아’와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필로스’와 ‘돈’이라는 의미의 ‘아르귀로스’의 합성어로 돈에 대한 애착심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울은 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고 딤후 3:2에서 말세에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순회 설교자로 자처하면서 돈을 탐하던 이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떠돌이 철학자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을 돈을 받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킨 자들이었다. 
베드로전서 5:2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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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Let a woman learn quietly owith all submissiveness. 12 pI do not permit a woman to teach or to exercise authority over a man; rather, she is to remain quiet. 13 qFor Adam was formed first, rthen Eve; 14 and Adam was not deceived, but sthe woman was deceived and became a transgressor. 15 Yet she will be saved through tchildbearing—if they continue in ufaith and love and holiness, with self-control.
o Titus 2:5
p [1 Cor. 14:34]
q Gen. 1:27; 2:8
r Gen. 2:18, 22
s Gen. 3:6, 13
t [Gal. 4:4]
u ch. 1: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2:11–15.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2:11–15.
 
9-10절에서 바울은 여성도들은 단정함과 선행으로 외면보다 내면을 가꿔야함을 권면했다. 이어 11-15절에서는 교회안의 남녀관계속에서 여성의 태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당시 로마시대의 법률로 ‘파트리아 포테스타스’(아버지의 권한)이라는 규정이 있었다. 자식의 운명이 아버지에게 맡겨져 있다는 내용으로 당시 매우 가부장적인 문화속에서 성경의 가르침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도 시대적인 문맥속에서 읽어야할 필요가 있다. 
 
한편 바울은 앞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언급한 바 있다(6절). 이것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특권 의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되었다는 사실 또한 함축한다. 남성과 여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평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기서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일견 바울의 주장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절은 ‘공중 예배시 질서에 대한 교훈’이란 문맥 가운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시대나 상황을 막론하고 자구적으로 그대로 적용되는 보편 원리가 아니다. 지금 바울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입각하여 공중 예배라는 프리즘을 통해 여성들이 지녀야 할 태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는 유사한 교훈이 기록된 고전 14:31-36을 참고하라. 한편 이와 같은 언급은 당시 본서 수신자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에서도 고린도 교회에서와 같은 오해들 곧 그리스도인 여성들이 남자와 여자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한 나머지 남자와의 기능론적 차이를 망각한 채 행동함으로 사람들의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거나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사례가 있었을 것이란 점을 짐작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성적 차별의 철폐를 성적 차이의 철폐로까지 확장시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옥스포드 129)
 
11절)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네’는 ‘남자와 반대되는 성인 여성, 결혼한 여자, 최근에 결혼한 여자’, ‘여인, 아내, 신부’의 의미를 지닌다. 
‘순종함으로’는 ‘휘포타게’인데 이는 ‘굴복, 복종’이라는 의미로 ‘~아래에, 부족한”을 의미하는 전치사 ‘hypo’와 ‘두다, 정해두다’라는 동사 ‘타쏘’의 합성어로 ‘휘포타쏘’는 ‘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라는 의미이다. 어떤 것 아래 위치하여 그것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엔 파세 휘포타게’(with all submission)으로 사용되었다. 
‘조용히’로 번역된 ‘헤쉬키아’는 소극적 차원에서 ‘침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적극적 차원에서 ‘평화와 안식’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바울은 공적 예배시에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조용히 배울것을 요청하고 있다. 아마도 당시 교회안에 문제를 일으키고 시끄럽게 만드는 이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절)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본절은 공예배시 여성도들이 취해야할 자세에 대한 내용이다. 그렇기에 이를 가정이나 일반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가르치는 것’으로 번역된 ‘디다스칼레인’은 공예배시 여성도들이 공적으로 설교하거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동사 ‘디다스코’는 ‘가르치다, 지도하다라는 의미이고 명사인 ‘디다케’는 ‘가르침, 교훈’이라는 의미이다. 
‘주관하는 것’으로 번역된 ‘아우덴테인’은 ‘주관하다, 권세를 휘두르다’라는 동사 ‘아우덴테오’의 현재 부정사형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공예배시 여자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과 여자가 교회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과연 이 금지 규정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먼저 이 바울의 명령은 여자들이 에베소나 고린도에서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문화에 속한 여인들이 가르칠만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이는 이 시대 그 문화권에만 해당되는 제한된 명령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를 보편적인 창조 교리를 통해 설명하고 당시 에베소에 거명되는 거짓 교사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잘 교육받은 여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아내가 남편을 가르치거나 남편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만을 금지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의 상황이 어떠하던 이 바울의 권고를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명령을 주신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교훈은 바울이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발생했을 법한 모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권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당시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이 성령의 열광적인 은사에 사로잡혀 교회를 소란하게 만들고 어지럽게 만들었던 상황에 당면하여 고린도 교회의 여성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했던 것과 같이 여기서도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알려지지않은 에베소 교회의 특정한 상황을 감안하여 교훈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브리스가(롬 16:3-5)와 유오디아 및 순두게(빌 4:2,3) 같은 여성들을 자신의 동역자로 여기고 이들의 활약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던 바울은 일관성이 없는 매우 모순된 사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바울은 단지 어떤 의견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글을 쓴다(예컨대 살전 4:1; 살후3:6) 이 진술은 바울이 교회가 함께 모일 때의 관례에 대해 교회에 제시한 사도적 지침이라는 문맥 속에서 주어진다. 그 문맥에서 다음 두 가지는 금지된다 (1) 여자가 교회에서 님자에게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2) 여자가 교회 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것’에 대한 언급은 모인 교회라는 문맥 속에 있다) 여자가 다른 여자를 가르치는 것과 여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니며 다른 곳에서는 둘 다 권장된다(여자가 여자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 딤 2:4를 참조하라 여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딤후 1:5를 참조하라) 또한 이 구절은 교회 밖의 리더십의 상황에서(예컨대 기업이나 정부) 여자의 역할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 사이에 있는 접속사(헬 ‘우데’)의 존재는 바울이 ‘권위 있는 가르침’ 이라는 한 가지 활동이 아닌 서로 다른 두 가지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가리킨다 ‘주관하는’ 이란 말은 신약에서는 오직 여기서만 발견되는 헬라어 ‘아우텐테오’롤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신약 밖에 존재하는 이 단어의 80회가 넘는 예들은 그 의미가 (때때로 주장되는 것처럼 ‘권위를 빼앗다’나 ‘권위를 남용하다’ 등이 아니라) ,권위를 행사하다’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목사/장로/감독의 역할은 가르치고 교회에 권위를 행사하는 일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구절에 따르면 여자들은 이런 직분으로 섬기는 일에서도 제외될 것이다(참조 딤전 3:2) 따라서 바울이 여자들에게 조용할 것을 요구할 때 그 말은 여지에게는 모밍 교회에서 가르치는 책임이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여자들은 교회 모임에서 다른 방식으로 실제로 말을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고전 11:5를 보라) 고전 14:34~35의 해설도 함께 보라
2:12 I do not permit. Paul self-consciously writes with the authority of an apostle (e.g., 1 Thess. 4:1; 2 Thess. 3:6), rather than simply offering an opinion. This statement is given in the context of Paul’s apostolic instructions to the church for the ordering of church practice when the church is assembled together. In that context, two things are prohibited: (1) Women are not permitted to publicly teach Scripture and/or Christian doctrine to men in church (the context implies these topics), and (2) women are not permitted to exercise authority over men in church. (The reference for both “teaching” and “exercise authority” here is within the context of the assembled church.) Women teaching other women, and women teaching children, are not in view here, and both are encouraged elsewhere (on women teaching women, cf. Titus 2:4; on women teaching children, cf. 2 Tim. 1:5). Nor does this passage have in view the role of women in leadership situations outside the church (e.g., business or government). The presence of the word or (Gk. oude) between “to teach” and “to exercise authority” indicates that two different activities are in view, not a single activity of “authoritative teaching.” “Exercise authority” represents Greek authenteō, found only here in the NT. Over 80 examples of this word exist outside the NT, however, clearly establishing that the meaning is “exercise authority” (not “usurp authority” or “abuse authority,” etc., as sometimes has been argued). Since the role of pastor/elder/overseer is rooted in the task of teaching and exercising authority over the church, this verse would also exclude women from serving in this office (cf. 1 Tim. 3:2). Thus when Paul calls for the women to be quiet, he means “quiet” with respect to the teaching responsibility that is limited in the assembled church. Paul elsewhere indicates that women do speak in other ways in the church assembly (see 1 Cor. 11:5). See also note on 1 Cor. 14:34–3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8.
 
13절)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이는’으로 번역된 ‘가르’는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앞선 11-12절에서 여성도들이 공예배시에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해서는 안되고 조용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음을 받고’로 번역된 ‘에플라스테’는 ‘만들다, 형성되다’라는 의미의 동사 ‘플라소’의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 표현이다. 이 표현은 구약의 70인역에서 창 2:7과 창 2:19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짐승을 지으셨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11:8–9
8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바울은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불가한 근거로 창조 원리를 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 아담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가 독처하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 그를 잠재우시고 갈빗대를 하나 취하여 그의 돕는 배필로 여자, 하와를 창조하셨다.(창 2:18) 따라서 여자는 남자를 주관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 창조 원리에 근거하여 교회안에서 여자의 역할, 지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와’라는 표현은 신약에 2번 등장한다. 본절과 고후 11:3에 나오는데 이는 ‘생명’을 뜻하는 단어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여성의 조상이다. 
 
하와(חוה, 하바). 아담의 아내. 성경 기록에 따르면 인류 여성의 조상이다.
어원
하와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발전되어 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론은 하와를 "살아있는 것"을 의미하는 하야의 오래된 형태로 제시한다. 70인역은 창세기 3:20을 "생명"을 의미하는ζωή(조에)로 번역하면서 이 관점을 취한다. 일부에서는 이 이름이 "뱀"을 의미하는 아람어 hiwya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해왔다. 페니키아의 (아마도 뱀일 수 있는) 신인 hwt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see Hamilton,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205–207).
엔키와 닌후르사그의 수메르 신화에서 엔키의 병은 닌후르사그에 의해 치료되는데, 닌후르사그는 여신 닌티("갈비뼈의 여인")이 그를 위해 태어나게 한다. 수메르어에서 닌티는 "생명을 주는 여인"을 의미한다. 하와와 닌티가 지닌 의미의 유사성은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 기록이 도출된 공통 출처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창세기에서의 하와
하나님은 여섯째 날에(창 1:24–31) 아담의 갈비 뼈에서(2:21–22), 아담을 돕기에 적합한 사람인(2:18) 하와를 창조하셨다. 그 다음 아담은 하와라는 이름을 처음에는 일반명사의 개념으로 불렀고(2:23), 이후에는 고유명사의 개념으로 불렀다(3:20). 뱀이 하와를 속여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한 후(3:1–7), 아담과 하와는 벌을 받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었다(3:8-19). 하와에게 내려진 벌은 출산시 고통이 증가하는 것과 남편에게 더욱 복종해야 하는 것이었다(3:16). 하와는 가인, 아벨, 셋을 낳았고(창 4장), 그 밖의 많은 아들과 딸도 낳았다(5:4).
창세기 외 다른 본문에서의 하와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하와를 세 번 사용하는데, 그 중에서 두 번에 걸쳐 뱀에서 속은 자로서의 하와의 역할을 강조한다.
1. 고린도후서 11:3에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하와에 비유하는데, 이는 교회 공동체가 그들을 잘못 이끌 수 있는 속임수에 걸리기 쉬움을 의미한다(고후 11:3).
2. 디모데전서 2:8-14에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에서의 성 역할에 대한 지침에서 하와를 언급한다(딤전 2:8-14).
3. 고린도전서 11:8-9에서 바울은 창조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하와를 언급한다.
바울이 하와를 죄인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딤전 2:14) 이후의 해석과 관련하여 창세기 기록의 내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창세기에서 아담, 하와, 뱀은 모두 죄인으로 처벌 받는다(창 3:14–19). 하와는 아담보다 더 많은 잘못이 있는 것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하와가 나중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담보다 열등하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이 동일한 논리를 사용하면 지구와 초목과 같은 창조의 다른 측면이 인간보다 우월할 것이다. 하와는 아담을 돕는 사람이자 동반자로 창조되었지만 아담과 관련하여 하와의 지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해석의 문제이다. 하와의 창조에 내재된 종속적인 역할을 본 사람들도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아담이 죄의 영향을 받은 후에 하와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지적한다(Webb, Slaves, Women, and Homosexuals, 119).
현대 해석
아담이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창 3:20) 된 하와의 이름을 붙인 것은 "하와"라는 이름이 고대 근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출산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대 근동에서 두드러졌던 다산 숭배에 비판하는 논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모든 산 자의 어머니"인 하와는 고통스러운 출산으로 저주를 받은 인간이며, 다산의 상징이기도 한 뱀과의 상호 작용은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이어진다(Wallace, Anchor Bible Dictionary, 677).
유일하게 기록된 하와의 담화는 그녀가 맏아들 가인을 출산한 후에 나타난다. 하와는 “내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득남하였다”라고 말한다(창 4:1 ESV). 이 문장("여호와의 도움으로")에 제시된 동역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부정한 삶에 대한 징조라고 여기기도 한다(Waltke, Genesis: A Commentary, 96). 하와의 맏아들이 두 번째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다산 숭배 신화를 비판하기 위한 하와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Nick Bott, “하와,”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2:13 For introduces the biblical basis for the prohibition of v. 12. Paul indicates that the prohibition is based on two grounds, the first being the order of creation (Adam was formed first), and the second being the deception of Eve (v. 14). “Formed” (Gk. plassō) is the same term that the Septuagint uses in Gen. 2:7, 8, which evidently refers to creation (cf. 1 Cor. 11:8–9). Paul’s argument indicates that gender roles in the church are not simply the result of the fall but are rooted in creation and therefore apply to all cultures at all times. The meaning of this passage, however, is widely contested today. Some interpreters argue that the prohibition of 1 Tim. 2:12 does not apply today because: (1) the reason for Paul’s command was that women were teaching false doctrine in Ephesus; or (2) Paul said this because women in that culture were not educated enough to teach; or (3) this was a temporary command for that culture only. But Paul’s appeal to the creation of Adam and Eve argues against those explanations. In addition, the only false teachers named in connection with Ephesus are men (1:19–20; 2 Tim. 2:17–18; cf. Acts 20:30), and no historical evidence exists of women teaching false doctrine in first-century Ephesus. Moreover, ancient inscriptions and literature speak of a number of well-educated women in that area of Asia Minor at that time (cf. also Luke 8:1–3; 10:38–41; John 11:21–27; Acts 18:2–3, 11, 18–19, 26; 2 Tim. 4:19). Finally, some have claimed that this passage only prohibits a “wife” from teaching or exercising authority over her “husband,” since the Greek words gynē and anēr (translated “woman” and “man” in 1 Tim. 2:12) can also mean “wife” and “husband” in certain contexts. Given the immediate context of vv. 8–9, however, the most likely meaning of the Greek words gynē and anēr here in vv. 11–14 would seem to be “woman” and “man” (rather than “wife” and “husban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8.
 
14절) 앞서 창조의 원리에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은 것이 첫번째 이유라면 이제 여자가 먼저 속임을 당해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글이나 영어 성경에서는 속다(deceived)라는 표현이 아담과 여자에게 동일하지만 헬라어 원어는 이 표현이 분명하게 다르다. 아담이 속은 것에서는 ‘아페테데’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속이다, 기만하다’라는 ‘아파타오’의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 표현이다. ‘여자가 속아’라는 표현에서는 ‘엑사파테데이사’는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 ‘에크’와 ‘아파타오’의 합성어인 ‘엑사파테오’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처럼 아담이 속은 것과 여자가 뱀에게 속은 것이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여자가 완전하게 속임을 당했고 그 책임이 여자에게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어 ‘죄에 빠졌음이라’라는 표현도 여자에게만 적용된다. 결과적으로 아담이 죄에 빠진 것은 분명하지만 바울은 이 선악과의 범죄가 여자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속은 것’, ‘속아’라는 두 표현은 모두 수동태인데 반하여 ‘빠졌음이라’(게고넨)은 능동태로 여자가 죄에 빠지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13절에서 창조의 순서를 다룸에 있어서는 ‘아담과 하와’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14절에서는 아담은 고유명사로, 여자는 보통명사를 쓰고 있다. 
 
 
15절) 구원에 이르는 방법, 과정은 남자나 여자나 다르지 않다. ‘이신칭의’의 원리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그 믿음이 드러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서, 남자나 여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정숙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에안 메노이신 엔 피스테이 카이 아가페 카이 하기아스모 메타 소프로쉬네스’, 먼저 ‘거하면’으로 번역된 ‘메이노신’은 ‘남아있다, 머물다, 거하다’라는 의미의 ‘메노’의 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특정 상태, 조건, 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숙함이라는 표현은 ‘소포로쉬네’로 개인의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조절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지혜라는 의미로 ‘타당함, 자기 절제, 성숙함’의 의미이다. 과유불급이라는 표현이 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라는 것이다.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그것도 공예배시에 이를 적절하게 절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본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표현은 소테세타이’로 이는 ‘구원하다, 구하다’라는 의미의 ‘소조’의 미래 수동태 직설법의 표현이다. ‘해산함으로’는 ‘디아 테스 테크노고니아’로 ‘테크노고니아’는 ‘아이, 자손’이라는 의미의 ‘테크논’과 ‘낳다, 아버지가 되다’라는 의미의 ‘겐나오’의 합성어이다. 인류의 비극은 최초의 여자인 하와의 범죄로 시작되었다. 앞서 14절이 이를 증명한다. 하여 15절은 이러한 비극의 탈출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길이다.(창 3:15)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제 그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믐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널리 전하는 것이다. 바로 그 역할이 여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본절이 강조한다. 본절은 여인들에게 정숙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그 자녀를 신앙안에서 양육함으로 믿음의 유산을 전수할 책임을 여인에게 말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이 여인들의 해산함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이 임하게 될 것이다. 
2:15 This is a notoriously difficult-to-understand verse. Paul clearly does not believe people can be saved in the sense of earning justification through childbearing or any other means (e.g., Eph. 2:8–9). But the NT can also use the term “saved” (Gk. sōzō) in the sense of progressively coming to experience all the aspects of salvation. In that sense, “salvation” is ongoing (see note on Phil. 2:12–13). A similar view is that “saved” can be understood as referring especially to the endurance and perseverance in faith that is necessary for eternal salvation (cf. Matt. 10:22; 24:13; etc.). People are saved as they persevere (continue) in the faith to carry out the Lord’s calling in their life, one example being the unique role of women in childbearing. (The change from singular she to plural they is a literal rendering of the Gk. tex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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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esire then that jin every place the men should pray, klifting lholy hands without anger or quarreling; likewise also mthat women should adorn themselves in respectable apparel, with modesty and self-control, not with braided hair and gold or pearls or costly attire, 10 nbut with what is proper for women who profess godliness—with good works.
j [John 4:21]
k Ps. 63:4; 119:48; [Isa. 1:15]
l Job 17:9; Ps. 24:4
m 1 Pet. 3:3; [Isa. 3:18–23]
n [1 Pet. 3: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2:8–10.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2:8–10.
 
8절) 앞서 바울은 1-7절에서 모든 사람들과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셔서 자신이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음을 이야기했다. 이제 이어지는 8-15절을 통해서 교회가 공동체 예배 속에서 남녀의 행동하는 방식(하나됨, 겸손, 단정함, 올바른 복종)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도에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운’(헬) 이 표현이 어느 구절과 연결되는 것인가? 1절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할 것을 요청했다. 
이와 연결되어서 본다면 바울은 다시금 기도의 자세를 명하고 있는 것이다. 
본절의 첫 시작은 ‘원하노라’로 번역된 ‘불로마이’라는 동사로 시작된다. 이는 ‘원하다, 소원하다, 열망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바울이 전파하는 자와 사도, 이방인의 스승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하는 명령을 의미한다. 
 
‘각처에서’, in every place
ἐν παντὶ τόπῳ, “in every place,” may simply indicate that Paul wants prayer to be as universal as is its objects; but it is more likely that he is referring to the various meeting places of the church in, perhaps, house churches or other groups (cf. Rom. 16:3–5; 1 Cor. 16:19 [Ephesus]; Col. 4:15). The phrase has this significance in most of the other Pauline occurrences (cf. 1 Cor. 1:2; [2 Cor. 2:14]; 1 Thes. 1:8) and is perhaps also influenced by OT usage (e.g., Ex. 20:24; especially Mal. 1:11).
 George W. Knight, The Pastoral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Carlisle, England: W.B. Eerdmans; Paternoster Press, 1992), 128.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울은 여기서 남자들이 기도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회당에서 남자들이 기도를 인도했던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공중 예배시 주로 남자들이 기도를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기도의 태도는 
첫번째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한다. ‘분노’로 번역된 헬라어는 ‘오르게’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와 이로인한 결과로서의 처벌을 의미한다. 분노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웃과 형제를 향한 불리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화를 내려달라고, 보복하여 달라고 분노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다툼’은 ‘디알로기스모스’로 원래 ‘대화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디알로기조마이’에서 파생된 명사로 ‘의논, 변론’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시비(빌 2:14), 다툼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트집잡기 좋아하는 이들의 공연한 시비’를 의미한다. 
두번째 거룩한 손을 들고 기도해야 한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다. 고개를 숙여서 하는 기도,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하는 기도,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하는 기도 등 다양한 기도의 자세가 있지만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손의 위치, 자세가 아니라 ‘거룩한 손’을 들고 하는 기도, 즉 기도하는 사람의 영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거룩한’으로 번역된 ‘호시우스’는 ‘거룩한, 의로운’ 경건한’이라는 의미로 부정한것과 단절된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살인이나 간음, 도적질, 거짓말등과 같은 범죄에서 분리되어 더렵혀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의 예배속에 기도하는 자가 부정한 범죄로 자신을 더럽혔다면 기도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시 24:3-4; 마 5:23-24).
 
διαλογισμός -οῦ, ὁ; (dialogismos), 명사. 논쟁, 논의, 언쟁. 히브리어 등가: מַחֲשָׁבָה (7), מְזִמָּה (1), עֶשְׁתּוֹן (1), רֵעַ 3 (1).
명사 용법
1. 생각 — 사람이 생각하는 내용.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διανόημα, νόημα. 관련 주제: 추론; 이유; 생각; 뮤즈; 생각하다; 깊이 생각하다; 로고스.
막 7:21|| οἱ διαλογισμοὶ οἱ κακοὶ
눅 2:35 ὅπως ἂν ἀποκαλυφθῶσιν ἐκ πολλῶν καρδιῶν διαλογισμοί.
눅 9:46|| Εἰσῆλθεν δὲ διαλογισμὸς ἐν αὐτοῖς, τὸ τίς
고전 3:20 Κύριος γινώσκει τοὺς διαλογισμοὺς τῶν σοφῶν ὅτι
약 2:4 καὶ ἐγένεσθε κριταὶ διαλογισμῶν πονηρῶν;
2. 결정 (결단) — 숙고 후에 도달한 입장, 의견, 또는 판단. 관련 주제: 결정; 결론내다; 심판원; 결정하다.
롬 14:1 εἰς διακρίσεις διαλογισμῶν.
3. 생각 — 어떤 것을 숙고하기 위해 당신의 생각을 사용하는 과정  다음을 참고하십시오 λογισμός, φρήν, φρόνησις. 관련 주제: 추론; 이유; 생각; 뮤즈; 생각하다; 깊이 생각하다; 로고스.
롬 1:21 ἐματαιώθησαν ἐν τοῖς διαλογισμοῖς αὐτῶν
4. 토론 — 어떤 제안이나 문제에 대한 찬반으로 사유가 전개되는 논의
빌 2:14 Πάντα ποιεῖτε χωρὶς γογγυσμῶν καὶ διαλογισμῶν, ἵνα
딤전 2:8 ἐπαίροντας ὁσίους χεῖρας χωρὶς ὀργῆς καὶ διαλογισμοῦ.
5. 의심스러운 생각 — 가능성 또는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 하는 생각 특히 논리 심의 결과로. 관련 주제: 의심.
눅 24:38 καὶ διὰ τί διαλογισμοὶ ἀναβαίνουσιν ἐν τῇ
명사. 명사
||  || 마 15:19
||  || 막 9:33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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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Since Paul had just discussed the subject of prayer, it was proper for him further to discuss the role of men in praying. The expression beginning “I want” (boulomai) indicates what he intended for the men to carry out. Fee points out that Paul’s instruction is not that only men should pray (cf. 1 Cor 11:5), nor that men should pray, nor that they should do it with raised hands, but that they should do it with holiness and without anger or controversy.18
The “everywhere” in which the men pray is wherever believers gathered together in Ephesus. Probably this is a reference to local house-churches. The types of prayer to which Paul called the men are those indicated by the terms for prayer in 2:1.
In calling for men to “lift up holy hands,” Paul was not prescribing a universal posture for prayer but was alluding to the mode of prayer normally practiced by Jews and many early Christians. Standing with uplifted hands was seen among both Jews and Christians in the first century (Pss 134:2; 141:2).19
Paul’s primary emphasis was the attitude that the men were to bring to prayer. The term “holy hands” describes hands that are morally pure. This calls for a devout life-style that seeks passionately to please God (John 4:34). The “anger” Paul denounced is a settled attitude of indignation against another. The word “disputing” refers to a spirit of controversy that was the special hallmark of the Ephesian false teachers (1 Tim 6:3–5). Controversy and contempt would vitiate the effectiveness of prayers. Men defiled by these attitudes were in Ephesus, and Paul knew that no good could come from their prayers. Paul’s description of the manner in which the men should pray has universal application although local circumstances had stimulated the earnestness of his appeal.
18 Fee, 1 and 2 Timothy, Titus, 34.
19 Standing with raised hands was not an unusual sign of earnestness but was the common prayer posture also for NT believers. The NT petitioner showed great seriousness whenever kneeling was the practice (Eph 3:14).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94–95.
 
9절) 8절에서 공예배시 남자 성도들이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다루었다면 이제 9-10절에서 바울은 여성도들을 향해 미덕과 선행으로 외모보다 내면을 단장할 것을 명하고 있다. 
본절은 ‘이와 같이’ ‘호사우토스’로 시작된다. 이는 8절과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공중 예배시에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과 동일하게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부분은 기도시의 영적인 태도가 ‘거룩함’이었던 것과 같이 공예배시에 여성도가 갖추어야할 거룩한 태도,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바울은 먼저 단정하게 옷을 입을 것을 요구한다. 본문에서 ‘단정하게’로 번역된 ‘코스미오’의 원형 ‘코스미오스’는 신약에 2번 등장하는 표현으로 ‘존경할 만한 속성이나 절제에 걸맞는, 아담한, 단정한’의 의미이다. 본절에서는 외모를 표현했고 딤전 3:2에서는 사람의 성품과 관련해 ‘행동이 선한, 질서가 잡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코스모스’라는 명사는 ‘세상, 장식’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화장품을 의미하는 ‘cosmetic’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소박함’을 의미하는 ‘아이도스’는 ‘겸손함’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스스로를 가치없게 보이도록 하는 행위를 할까 두려워하는 자의식적인 소심함을 의미한다. ‘정절’로 번역된 ‘소프로쉬네’는 ‘마음의 건전함, 타당함, 훌륭한 판단, 자기 절제’로 개인의 감정과 욕구를 스스로 조절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지혜를 의미한다. 결국 이는 경솔함과 천박함에 대립되는 품위와 순결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앞서 소박함과 정절로서 단장할 것을 명했는데 이제 무엇으로 단장하면 안되는지를 설명한다. ‘땋은 머리’로 번역된 ‘플레그마’은 여기에 단 한번 등장하는 표현으로 고전 헬라어에서는 포도나무 덩굴이나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화관을 지칭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바울 당시 고급 매춘부들의 치장한 머리 모양을 의미한다. 당시 매춘부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탑처럼 닿아 올렸고, 그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서 값비싼 비녀를 사용했었다. 이것은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금아니 진주나 값진 옷도 마찬가지이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3:3
3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당시 이러한 화려한 치장으로 외모를 꾸미는 것은 매춘과 관련되어 사람들을 미혹하는 용도였기에 이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금이나 진주, 값진 옷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The NIV obscures the link of v. 9 with v. 8 brought out by “in like manner” (KJV; hōsautōs). This expression shows that vv. 9–10 are still dependent on the “I want” of v. 8 and that Paul was discussing the dress and deportment of women in times of public prayer.20
Although Paul discussed dress, his true emphasis was not merely that women should dress modestly but that genuine ornamentation is not external at all and consists of an attitude of commitment to good works.21 To dress “modestly” demands that the women dress tastefully and not provocatively. The term “dress” (katastolē) describes the outward deportment of the women as expressed in the clothes they wear. To practice “decency and propriety” demands that the women not flaunt their wealth or their beauty. The former word shows reserve in matters of sex, and the latter word indicates a mastery of the appetites, particularly in matters of sex. The two terms refer to inner virtues.
The prohibition against “braided hair” or expensive jewelry or clothing prohibits a gaudy, showy display, not normal attention to neatness and good taste. Paul perhaps referred to a style in which “women … wore their hair in enormously elaborate arrangements with braids and curls interwoven or piled high like towers and decorated with gems and/or gold and/or pearls.”22 At best such a style demonstrates pride and self-centeredness and should not be the concern of Christian women (cf. 1 Pet 3:3). The fact that some Christian women could afford gold or pearls indicates that the Ephesian church had some members of substantial wealth (cf. 1 Cor 1:26–28). Acceptable standards of modesty will vary with place and generation, but Paul wanted the women to cultivate the fear of God rather than vanity.
20 Kelly suggests that what Paul had in mind was that it would be improper for women to exploit their physical charms on such occasions, for this would be a deterrent to prayer (Pastoral Epistles, 66). However, Huther (Epistles to Timothy and Titus, 102) disagrees, feeling that the infinitive “to dress” expresses what Paul wanted for the women. Under this interpretation Paul was not discussing public prayer for the women but how they were to dress on occasions of public worship. Kelly’s arguments seem more compelling.
21 M. Dibelius and H. Conzelmann, The Pastoral Epistles (Philadelphia: Fortress, 1972), 46.
22 J. B. Hurley, Man and Woman in Biblical Perspective (Grand Rapids: Zondervan, 1981), 199.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96.
 
10절) 바울은 너무 화려한 치장을 금하면서 이제 선행으로 치장할 것을 명한다. 딤후 3:6을 보면 이러한 옷을 입고  미혹하는 이들이 있었다.
디모데후서 3:6
6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바울은 여성도들로 하여금 단정한 옷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소박함과 정절, 선행으로 자신의 내면을 가꿀것을 명하고 있다. 본문에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바로 단장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로 번역된 ‘데오세베이안’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명사 ‘데오스’와 예배하다는 동사 ‘세보마이’의 합성어로 하나님을 예배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외하는 자들은 선행으로 자신의 외모보다는 내면을 단장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로 보건데 당시 에베소의 여인들은 이런 치장을 한 여인들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aul urged the women to produce good works instead of devoting attention to mere physical appearance. Some women in Ephesus had a desire to fulfill their sexual urges in any manner (2 Tim 3:6) and probably expressed this in their dress. Paul warned against indulging these drives and appealed for good works. This is healthy teaching for godly women.
Paul later would explain that the good works he had in mind must first appear in the home (1 Tim 2:15; 5:9–10, 14). Ward aptly says that the women are to show their religion not by “barefaced dazzle but character and conduct.”23 The “good works” Paul demanded represent more than a performance of general benevolence, for they include an appeal to a reverent godliness (2 Tim 3:5) which begins in the home.
The Ephesian women in these passages doubtless were wealthy. Their costly clothing, ornate hairstyles, and expensive jewelry suggest luxuries only the wealthy could afford. There is evidence from outside these passages that wealthy, prominent women were among those converted under the preaching of Paul (Acts 16:15; 17:4, 12). Peter’s description of the women in the churches of Pontus, Galatia, Cappadocia, Asia, and Bithynia (1 Pet 3:3) also suggests that some of the women were wealthy. Barnett points out that the leading women of Roman imperial society were wealthy, politically powerful, patronesses of the arts, and educated; and he feels that it is likely these wealthy women in the Ephesian congregation had the same characteristics.24 The probability is that the presence in the church of prominent, powerful women called for comment by Paul on their dress, adornment, and behavior. Barnett says:
This does not mean, however, that the teaching in these Petrine/Pauline passages is thereby limited in application to wealthy/educated women. The presence of wealthy women in church was a historical catalyst which raised the more general question. Problems posed by women from this socioeducational background created the need to address these questions in broader ways, as relating not merely to wealthy women, but to women and wives in general. This Paul does in the passage under discussion.25
23 R. W. Ward, Commentary on 1 & 2 Timothy & Titus (Waco: Word, 1974), 51.
24 See P. W. Barnett, “Wives and Women’s Ministry,” EvQ 61 (1989): 226–28. Barnett also points out that it is questionable to suggest that the ban on elegant appearances was linked to the practice of cultic prostitution in the Artemis temple in Ephesus. Peter’s statement in 1 Pet 3:3 has words similar to those of Paul here, and it is obvious that Peter’s words are for a general readership and are not linked with a pagan religious background.
25 Ibid., 228.
 Thomas D. Lea and Hayne P. Griffin, 1, 2 Timothy, Titus, vol. 34,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2), 96–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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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 cthere is one God, and there is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1 Christ Jesus, dwho gave himself as a ransom for all, which is ethe testimony given fat the proper time. gFor this I was appointed a preacher and an apostle (hI am telling the truth, I am not lying), ia teacher of the Gentiles in faith and truth.
c See Gal. 3:20
1 men and man render the same Greek word that is translated people in verses 1 and 4
d See Matt. 20:28
e See 1 Cor. 1:6
f ch. 6:15; Titus 1:3; [Gal. 4:4]
g ch. 1:11; Eph. 3:7, 8; 2 Tim. 1:11
h See Rom. 9:1
i See Acts 9: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2:4–7.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2:5–7.
 
본문 5-6절은 앞선 4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라는 내용에 대한 기초를 제공한다. 
 
5절)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롬 3:29-30; 갈 3:20)
로마서 3:29–30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갈라디아서 3:20
20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세상의 여러 나라, 민족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긴다. 그래서 그 신들이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구원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 구원자는 오직 한분이시다. 헬라 세계의 사람들은 ‘모든 민족은 제각기 자기 민족만을 특별히 돌보아 주는 민족 수호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헬라의 세계관,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메시아, 중보자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기독교는 강력하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선포한다.(행 4:12) 
사도행전 4:12
12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 과정에서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의 성인들이나 인간 제사장, 사제의 중재자 역할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로마서 3:29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이 유일하신 하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요소를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둘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한 분이심을, 세번째는 그 중보자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중보자’로 번역된 ‘메시테스’는 본래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두 편을 연결하는 중재자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래 평화의 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그 평화의 관계는 깨어져 버렸고 이제 더이상 인간은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보자이자 대속물이 되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 유일한 중보자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안드로포스 크리스토스 이에수스’ 여기서 안드로포스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앞선 ‘하나님과 사람’에서는 ‘안드로폰’ 복수형이라면 여기서는 단수형으로 바로 그 사람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는 인종이나 국적, 계층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본절에서 성자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당시의 이단들 중에 에비온파와 같이 그리스도가 육체로 임하지 않고 영으로만 임하셨다는 주장, 가현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의 가르침에 대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5 For. Verses 5–6 provide the theological basis for the preceding statement that God wants people to be saved. There is only one God, therefore this God seeks “all people” (v. 4; cf. Rom. 3:29–30; Gal. 3:20). Various people groups do not each have their own gods, though they may imagine they do; all must come to the one true God for salvation. This means that Jesus, God’s incarnate Son, Israel’s Messiah, is the one and only mediator, the only way to salvation (cf. Acts 4:12). Furthermore, this verse allows no place for intermediaries between people and Jesus, such as saints or human priest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7.
 
6절)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한 분이신 사람이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중요한 역할은 바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보자가 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구원의 대상에 있어서 인종과 남녀 및 빈부 격차의 모든 차별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문의 대속물은 ‘안틸뤼트론’으로 누군가를 돈을 주고 풀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마가복음 10:45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이해하고 계셨고 이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이루셨다. 이는 구속, 대속물이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되었다. 
 
위 막 10:45에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는 표현이 ‘뤼트론 안티 폴론’이다. 전치사 ‘안티’가 본래 ‘~를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함축하는데 여기에 ‘뤼트론’이 더해져서 ‘안틸뤼트론’이라는 단어가 파생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한’ 대속 죽음이었음을 의미한다. 
‘휘페르 판톤’,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이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대신한 죽음이었으며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 대속물, 속전이었다.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증거라고 번역된 ‘토 마르튀리온’은 바로 앞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이 되셔서 구원과 중보사역을 감당하셨다’라는 것이다. 바로 이 증거를 바울이 위임받은 것이다. ‘기약이’로 번역된 ‘’카이로이스’는 통상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시기, 지정된 시간, 좋은 기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καιρός -οῦ, ὁ; (kairos), 명사. 때, 시절, 기회. 히브리어 등가: עֵת (54), מוֹעֵד (10). 아람어 등가: זְמָן (1).
명사 용법
1. 시간 (무기한) — 종종 특정한 활동이나 특징으로 구별되는 무한한 시간.
엡 1:10 εἰς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πληρώματος τῶν καιρῶν,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살전 2:17 ἀπορφανισθέντες ἀφʼ ὑμῶν πρὸς καιρὸν ὥρας, προσώπῳ
살전 5:1 Περὶ δὲ τῶν χρόνων καὶ τῶν καιρῶν,
히 9:9 ἥτις παραβολὴ εἰς τὸν καιρὸν τὸν ἐνεστηκότα,
벧전 1:5 ἀποκαλυφθῆναι ἐν καιρῷ ἐσχάτῳ.
2. 행사 (이벤트) — 특정 사건의 시간 (혹은 기간) 관련 주제: 행사, 때.
요 7:6 Ὁ καιρὸς ὁ ἐμὸς
고후 6:2 Καιρῷ δεκτῷ
갈 6:9 καιρῷ γὰρ ἰδίῳ
딤전 2:6 τὸ μαρτύριον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벧전 5:6 ἵνα ὑμᾶς ὑψώσῃ ἐν καιρῷ,
3. 계절 (활동) — 일년중 어떤 분야에서 특별한 사건이나 행위들로 특징지어진 기간. 관련 주제: 계절.
행 14:17 καὶ καιροὺς καρποφόρους,
4. 적절한 시간 —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거나 유리한 때. 관련 주제: 시간.
고후 6:2 ἰδοὺ νῦν καιρὸς εὐπρόσδεκτος,
엡 5:16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τὸν καιρόν, ὅτι αἱ ἡμέραι πονηραί
골 4:5 τὸν καιρὸν ἐξαγοραζόμενοι.
딤전 6:15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딛 1:3 ἐφανέρωσεν δὲ καιροῖς ἰδίοις, τὸν λόγον αὐτοῦ
명사. 명사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위에서 보는 것처럼 카이로스는 무한한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특정한 때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남자나 여자, 종이나 자유자나, 어린이나 노인을 무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과 중보 사역에서 예외가 없는 시기, 새로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완성된 후 열인 은혜의 시대이다. 
마가복음 1:15
15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 
 
본문에서의 증거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심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다. 
 
2:6 Ransom (Gk. antilytron) refers to purchasing someone’s release and describes a common Pauline and NT understanding of Christ’s work as redemptive (cf. Gal. 1:4; 2:20; Eph. 5:2; and related NT concepts of “redemption” [Luke 1:68; 2:38; 24:21; Titus 2:14; Heb. 9:12; 1 Pet. 1:18] and “ransom” [Matt. 20:28 par.; cf. Rev. 5:9]). This language also reflects Jesus’ words, “the Son of Man came …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Gk. lytron] for many” (Mark 10:45). Since Jesus gave himself as this “ransom,” the idea of substitution (dying on behalf of sinners) is also includ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7.
 
In v. 6a Paul’s argument concludes with a christological explanation of Christ’s act of mediation: “who gave himself as a ransom for all people.” The form of the saying found here represents a retelling of the tradition of Jesus’ self-giving that in earliest form is found in Mark 10:45.56 Paul had already adapted this tradition, with various omissions and substitutions, so we cannot be sure how closely he draws on the Marcan logion at this point. Nevertheless, if we start with Mark 10:45 as a base, Paul’s adaptations are easily seen:
Mark 10:45—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Gal 1:4—who gave himself for our sins
Gal 2:20—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Eph 5:2—and gave himself up for us
1 Tim 2:6—who gave himself as a ransom for all people
Titus 2:14—who gave himself for us.
The key elements of the saying in each application are a verb denoting “giving,” the reflexive pronoun “himself” that lays emphasis on the voluntary self-offering, a preposition that conveys the effects of his offering to others, a recipient, and an indication of purpose (variously expressed). Paul’s usual preference to apply the work of Christ to “us” (Gal 1:4; Eph 5:2; Titus 2:14) is shifted to “all.”57 While this shift might be regarded as a clarification of the Marcan tradition’s “many,” we should rather think that Paul’s widening of the scope from his more typical “us” to “all” is determined by the universal thrust of the passage. His choice of the preposition “for” (hyper) instead of Mark’s “for” (anti) is normal, and his consistent use of the reflexive pronoun “himself” in place of the Semitic “his life” is an improvement in the Greek.58 Where the saying most resembles the Son of Man logion is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giving “as a ransom.”59 For this, Paul replaces Mark’s lytron with the rare compound antilytron.60 This shift may intensify the sense of substitution (already present in Mark 10:45), or render the idea into more suitable Greek; but the same sense of a ransom payment that secures release (of someone or something) is expressed.61
This portrayal of act of mediation contains several elements. First, the saying interprets Jesus’ death as a voluntary act of self-sacrifice. The common verb “to give” in some contexts expressed the idea of a martyr’s death,62 and came to be used to describe Jesus’ death as an act of sacrifice intentionally undertaken by him.63 As the statement is constructed here (active substantival participle referring to Jesus; cf. the divine passive in Rom 4:25), it portrays Jesus as the responsible actor. The reflexive pronoun “himself” makes Jesus the object of his own action, reinforcing the idea of selflessness.
Second, the prepositional phrase, “for all [people],” perhaps strengthened by the rare form of “ransom,” underlines two interrelated elements in the theology of Jesus’ self-offering: he died as both a representative and a substitute. The preposition (Titus 2:14) occurs frequently in Paul and throughout the NT to describe the effects of Jesus’ actions on others.64 In doing so, the sense of his solidarity with the intended recipient (“all,” “us”) is implicit; here following the phrase “the human Christ Jesus,” solidarity with the human race is emphasized. Just as important is the fact that in this demonstration of solidarity, Jesus not only represented humankind but also stood in its place as substitute for its benefit.65 And here the circle that began with universality has run its course through particularity to arrive again at universality: what Jesus has done he has done “for all people.”
Christology in this statement finds expression at a very human level. While nothing of the higher elements of Christology are necessarily sacrificed (for all that is implicit remains), the formulation establishes clearly the necessity of Christ’s complete participation in humanity in order to accomplish the work of mediation intrinsic to God’s universal salvation plan. As stressed elsewhere in Paul (Rom 5:12–21), it is this full participation in the human experience that makes representation and meaningful self-sacrifice possible, and it is as a human being (not as an object of belief) that Jesus is the mediator of salvation to all people.66 The very nature of Christ’s self-offering, as told and retold in the church’s growing tradition, verifies the universal scope of God’s salvation.
The closing phrase of v. 6 is problematic, as both the modern translations and the ancient variants demonstrate.67 The problem is caused largely by asyndeton, since (lit.) “the testimony (made, given) at the right time” is simply appended without connectors to indicate the relation to the preceding statement (vv. 5–6a). Without this information to aid us, we must rely on the two components of the phrase and the context to guide us. The way in which v. 7 links to it suggests its transitional function and also its meaning.
56 Cf. the relevant phrases: 1 Tim 2:6a—ὁ δοὺς ἑαυτὸν ἀντίλυτρον ὑπὲρ πάνῶεν; Mark 10:45—δοῦναι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λύτρον ἀντὶ πολλῶν.
57 Gk. πάντων = “all”; cf. πολλῶν = “many” in Mark 10:45.
58 Gk. ἑαυτόν replaces Mark’s τὴν ψυχὴν αὐτοῦ.
59 This is accomplished in Titus 2:14b with the verb λυτρόομαι (“to redeem, set free”).
60 Gk. ἀντίλυτρον; the term is rare (see BDAG, s.v. for occurrences; cf. Josephus, Antiquities 14.107 for the similar phrase employing the simplex form: λύτρον ἀντὶ πάντων = “ransom for all”). Paul’s preference seems to be for ἀπολύτρωσις (“redemption”; Rom 3:24; 8:23; 1 Cor 1:30; Eph 1:7, 14; 4:30; Col 1:14), which views the result of ransoming. See F. Büchsel, TDNT 4:340–56, 349; Spicq, TLNT 2:423–29 (423 n. 10). This is achieved.
61 The interpretation of the λύτρον word group in Christology has generated a great deal of discussion. For the question of substitution and the meaning of ἀντίλυτρον in 1 Tim 2:6a, see esp. Marshall, 432; Büchsel, TDNT 4:349; K. Kertelge, EDNT 2:366; D. Hill, Greek Words and Hebrew Meaning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76–77; L. Mor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 (32d ed. London: Tyndale, 1965), 51–52.
62 Gk. δίδωμι; 1 Macc 2:50; 6:44; Thucydides 2.43.2. See F. Büchsel, TDNT 2:166.
63 Titus 2:14; Mark 10:45 (Matt 20:28); Luke 22:19; Gal 1:4 (sometimes in compound form παραδίδωμι; Rom 4:25; 8:32; Gal 2:20; Eph 5:2). See N. Perrin, “The Use of (para-)didonai in Connection with the Passion of Jesus in the New Testament,” in E. Lohse (et al.), ed., Der Ruf Jesu an die Antwort der Gemeind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0), 204–212.
64 Gk. ὑπέρ; Rom 5:6, 7[2x], 8; 8:32; 14:15; 1 Cor 11:24; 2 Cor 5:15[3x], 21; Gal 2:20; 3:13; Eph 5:2, 25; Mark 14:24; Luke 22:19; John 10:11; Heb 2:9; 1 Pet 2:21; 3:18; etc. See further M. J. Harris, NIDNTT 3:1196–97; H. Riesenfeld, TDNT 8:507–516; R. E. Davies, “Christ in our Place: the Contribution of the Prepositions,” TynBul 21 (1970), 71–91.
65 On the combination of representation and substitution contained in ὑπέρ, see esp. Harris, NIDNTT 3:1197; N. Turner, Syntax (Edinburgh: T & T Clark, 1963 [vol 4 of J. H. Moulton, ed. A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158, 171; M. Hengel, The Atonement (Philadelphia: Fortress, 1981), 52.
66 Cf. Johnson, 197.
67 The variants represent attempts to improve the situation: א places the connective καί (“and”) before “testimony” to make it a part of what Christ “gave”; more witnesses (D* F G, etc.) precede the statement with the relative pronoun, οὕ (“of which, to which”) and the verb ἐδόθη (“it was given”) to relate the statement to the preceding and clarify the meaning: “to which testimony was given at the appropriate time.”
lit. literally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83–185.
 
7절) 본문의 ‘내가’는 ‘에고’로 이는 1인칭 주격 대명사이다. 이는 강조 용법으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세움을 입은 것’이라는 표현은 ‘에데텐’인데 이는 세우다라는 의미른 가진 ‘티데미’의 부정과거 수동태 표현이다.이는 신적 수동태로 바울이 전파하는 자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강권적인 부르심, 위임에 의한 것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자와 사도가 된 것을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여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에베소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유대주의적 이단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 강한 의심을 제기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파하는 자는 ‘케뤽스’로 공개적으로 중요한 소식을 외치는 사람, 특별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의 길에 관하여 하나님으로부터온 소식을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의 동사형이 ‘케뤼쏘’로 ‘선포하다, 설교하다, 가르치다’이고 명사형이 ‘케리그마’로 ‘선포, 설교’이다.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자, 사도,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을 위하여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행 9:15; 22:15, 21; 26:17-18). 
‘스승’은 ‘디다스칼로스’이다. 이는 ‘디다스코’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르치심, 교훈이라는 의미의 명사는 ‘디다케’이다. 
 
The closing statement of this passage brings the whole of the prayer instructions and backing theology into the sphere of Paul’s apostolic calling. It has a polemical ring to it, especially in its insistence that Paul is telling the truth. This is not accidental, nor is it done just to lend authority to the teaching. As in the case of 1:11–16 (Titus 1:1–3; cf. 2 Tim 1:11–14), Paul’s explicit linking of his apostolate with the traditional gospel is calculated to substantiate and reinforce his own claim to be the authoritative apostle to the Gentiles. The would-be teachers of the Law already encountered in 1:3–8 had apparently challenged his position or his understanding of the gospel (which amounts to the same thing). In this passage, the instructions to pray for all people (and for government rulers) and possibly the view of God’s will and supporting theology he endorses here (stressing the humanity of Christ) were corrective in thrust. Paul calls for prayer for all people, and it only makes sense to see this within the context of Paul’s own mission to all people. The problem of a narrow prayer outlook was not an isolated matter, but rather part of the wide-ranging effect of the Law-centered opposition’s penetration into a Pauline church that undermined the apostle’s authority. Consequently, in 2:7 Paul attempts again to convince the church of the divine origin of his mission and gospel as the authoritative guide for faith and practice.
First, Paul establishes his authoritative link to the gospel for the Gentiles (i.e. 2:5–6a). With the same phrase that he uses in 2 Tim 1:11,72 and the same verb of appointment as 1 Tim 1:12 (1 Cor 12:28; 2 Cor 5:19), he underscores the fact that his appointment to ministry was God’s choice.73
Second, Paul defines the scope of his commission with three nouns that also occur in 2 Tim 2:11: herald, apostle, teacher.74 The first of these terms, “herald,” picks up language that Paul often used of the act and message of proclamation.75 However, the noun “herald” is infrequent in the NT (2 Tim 1:11; 2 Pet 2:5), owing perhaps to strong religious associations with the secular herald, but the sense of one who proclaims the message is clear.76
“Apostle,” Paul’s usual term of self-description (see 1:1), comes second in the list. With it he distinguishes his position on the basis of the divine origin of his ministry and appointment. Its placement after “herald” suggests that proclamation is uppermost in Paul’s mind, which is in keeping with the missiological interest of the entire passage.77
Between the second and third nouns, Paul inserts the emphatic affirmation of truthfulness: “I am telling the truth, I am not lying.” The statement bears a close resemblance to Rom 9:1.78 These statements along with shorter forms of the truth claim (2 Cor 12:6) and the denial of lying (2 Cor 11:31; Gal 1:20) occur in contexts where Paul’s claim to be the apostle to the Gentiles, or to authority, was being challenged. The emphasis on truthfulness may apply to the whole statement, or specifically to the preceding claim to be an apostle. But its placement just before the final more elaborate description, alongside the concern of the whole passage for the universal mission, suggests that the affirmation underlines the certainty of his specific responsibility to the Gentiles.79
The term “teacher” fills out the job description of the “apostle.” The task of teaching was integral to the Pauline ministry and churches, and was carried out both by him and others (3:2; 5:17; 2 Tim 4:2).80 The difference between teaching and preaching (cf. 5:17) was probably more a matter of audience or purpose than of the content communicated or the degree of authority invested in the communicator or message.81 Paul was known as the apostle of the Gentiles (Rom 11:13; Gal 2:7–8; cf. Acts 13:47), and in this context in which “the teaching” was in dispute and being compromised through the activity of false teachers, and in which the openness of the gospel to the Gentile world was in some sense being threatened, the description “teacher of the Gentiles” reminds the readers that Paul is the one who has received authority to preach and teach in the Gentile churches. This was not information needed by Timothy;82 but bearing in mind the public dimension of the letter commending the coworker to the Ephesian church, we should almost expect Paul as that church’s founding apostle to underscore his authority in all matters—an authority that extends to his delegate, Timothy.
72 Gk. εἰς ὃ ἐτέθην; see 1:12. Cf. Eph 3:7; 1 Tim 1:11 for similar expressions.
73 The first person pronoun, ἐγώ, is emphatic, and the passive voice of the verb implies divine agency.
74 Gk. κῆρυξ καὶ ἀπόστολος … διδάσκαλος; cf. 2 Tim 1:11: κῆρυξ καὶ ἀπόστολος καὶ διδάσκαλος.
75 For Gk. κηρύσσω (“preach”), see 1 Cor 9:27; Gal 2:2; 2 Tim 4:2; for the noun, κήρυγμα, see Rom 16:25; 1 Cor 11:21; 15:14.
76 Gk. κῆρυξ. In the Greek world, the term “herald” described a variety of messengers whose task was to proclaim a message. In service of the royal court, heralds carried out diplomatic missions under the protection of the country he represented and the deity. Political and religious functions overlapped; he pronounced at the time of sacrifices and other cultic activities. Qualities needed by the herald included a loud voice and faithfulness to the message to be communicated. Philosophers could be called heralds of the gods (for refs. and further discussion, G. Friedrich, TDNT 3:683–96; J. Roloff, Apostolat-Verkündigung-Kirche [Gütersloh: Mohn, 1965], 240–44; 251–52; idem, 124, nn. 79, 80; Spicq, 368–69; Mounce, 92; Dibelius and Conzelmann, 43, nn. 54, 55). Roloff, 124, points out that it is equivalent to “evangelist” (2 Tim 4:5; see also Marshall, 434; Mounce, 92).
77 Marshall, 434.
78 Gk. ἀλήθειαν λέγω οὐ ψεύδομαι cf. Rom 9:1: ἀλήθειαν λέγω ἐν Χριστῷ, οὐ ψεύδομαι. The view that this represents a later author’s attempt to recreate “Paul” for a later church (Roloff, 112; Trummer, Paulustradition, 120–23; Hanson, 70) depends solely on a late dating of this letter.
79 Marshall, 434; Fee, 67; Guthrie, 83; Roloff, 112.
80 Gk. διδάσκαλος; for Paul as teacher, see 1 Cor 4:17; Col 1:28; for others in this role, see Rom 12:7; Col 3:16; for the place of teaching in Pauline churches, see 1 Cor 12:28–29; Eph 4:11, 21; Col 2:7; 2 Thess 2:15. See also K. H. Rengstorf, TDNT 2:157–58.
81 J. H. McDonald, Kerygma and Didache: The articulation and structure of the earliest Christian messa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5, 135 n. 28; K. H. Rengstorf, TDNT 2:162; K. Wegenast, NIDNTT 3:771; Towner, Goal, 123.
82 Although Paul is identifying the unique nature of his authority in the Gentile mission, it is not necessarily the sort of “canonizing” that some attribute to a late “paulinist” (but see Roloff, 124; Wolter, Paulustradition, 77–78).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86–189.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셔서 중보자로 아들을 보내셨고 이를 위해 그분이 대속물이 되셨음을 전파하는 자로, 사도로,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지,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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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of all, then, I urge that 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and thanksgivings be made for all people, vfor kings and all who are in high positions, that we may lead a peaceful and quiet life, godly and wdignified in every way. This is good, and xit is pleasing in the sight of yGod our Savior, who desires zall people to be saved and ato come to bthe knowledge of the truth
v Ezra 6:10
w ch. 3:4
x ch. 5:4
y ch. 1:1
z ch. 4:10; Ezek. 18:23, 32
a 2 Tim. 3:7
b 2 Tim. 2:25; Titus 1:1; Heb. 10:2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2:1–4.
 
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1)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 헬, 참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2:1–4.
 
바울은 앞선 1장에서 자신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이단에 대한 경계와 자신의 신앙 간증을 통해서 교회안에 이단, 거짓 선생에 대한 문제와 목회자의 자세에 대하여 권면하였다. 
이제 2장부터는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현안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주고 있다. 본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 특히 위정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명하고 있다. 
 
The structure of the text yields four basic points. First, Paul commands that prayer be given for all people and for those in authority. What seems puzzling is that the purpose of prayer for all people is left implicit. As we will see below, the purpose clause in v. 2b explains the subsequent prayer focus on those in authority. But the greater interest emerges as the passage unfolds. Second, Paul sets out God’s will concerning salvation, and this in fact determines the thrust of the prayer and of the whole section. The concern is for salvation. But, third, this statement of God’s will is surprising enough, or important enough, to call for its own justification. For this Paul draws on traditional theological concepts and christological materials that demonstrate God’s universal salvific will. Fourth and finally, Paul relates the prayer for the salvation of all to himself and his mission to the Gentiles.
Sharpening the soteriological point of the passage is the repeated use of the term “all.” The term occurs six times in ways that clearly underline the universal scope of the discussion. In vv. 1–2 it is “all people” and “all who are in authority” who are to be prayed for, and the outcome of prayer for government is to be a life lived in “all godliness and holiness.” In v. 4 God’s will is that “all people be saved,” which then resonates with the declaration in vv. 5b–6a that “the human being, Christ Jesus gave himself for ‘all’.”
The theological interests and the universal theme reveal that the prayer practice Paul sought to reinstate in Ephesus had the evangelistic mission to the Gentiles as its target. What is less clear is why this had to be urged. Probably the speculative views of the false teachers or the general atmosphere surrounding the approach to the faith they promoted fostered either some sort of elitism or indifference to those outside the church. The evidence of an excessively realized view of salvation (see Introduction C.2.b.) might have heightened the church’s sense of separation from the world, and it is worth noting that the similar situation in Corinth apparently spawned similar separationist tendencies (1 Cor 5:9–10).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64–165.
 
1절) 1절에서는 ‘판톤’이라는 모든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가 두번 사용되었다. 하지만 한글 성경에서는 앞부분의 ‘판톤’을 번역하지 않고 있다. 이를 포함시켜 번역해보면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 가운데 첫째로 권하노니’라는 의미가 된다. ‘첫째로’라고 번역된 ‘프로톤’은 시간적 의미에 있어서 ‘처음’(막 4:48)도 있지만 중요도에 있어서 ‘으뜸’이란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바울은 ‘프로톤 판톤’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함으로 지금 자신이 말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권하노니’로 번역된 ‘파라칼로’도 옆에서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파라’와 부르다, 청하다란 의미의 동사 ‘칼레오’의 합성어로 ‘옆에서 청하다, 간구하다, 빌다, 간청하다’로 번역되는 ‘파라칼레오’의 현재 능동테이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과 반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바울은 여기서 유사한 의미의 단어 4개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로 ‘간구’로 번역된 ‘데에세이스’의 원형 ‘데에시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하고 긴급한 요청'의 의미이다. 이는 원래 ‘~해야 한다, ~할 필요가 있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데이’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것의 동사형은 ‘데오마이’이다. 이처럼 간구는 인간이 어떤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필수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의 성취를 위한 탄원’의 의미를 가진다. 
 
둘째 ‘기도’에 해당하는 ‘프로슈카스’의 원형 ‘프로슈케’는 ‘~을 향하여, ~에게 가까이’란 의미의 전치사 ‘프로스’와 그 자체로 ‘권하다, 구하다, 기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유코마이’의 합성어로 ‘신에게 전한 요청, 청원, 기원’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성도가 일상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일반적인 모든 종류의 기도를 통칭하는 것으로 모든 형태의 경건한 아룀을 의미한다. 
 
셋째 ‘도고’에 해당하는 ‘엔튝세이스’의 원형 ‘엔튝시스’는 ‘청원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의 동사 ‘엔튕카노’에서 유래한 것으로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기도를 의미한다. 
 
넷째 ‘감사’로 번역된 ‘유카리스티아스’의 원형 ‘유카리스티아’는 ‘좋은’이라는 의미의 부사 ‘유’와 ‘주다’라는 뜻의 동사 ‘카리조마이’의 합성어로 ‘좋은 것으로 주는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축복들에 대해 인간의 사의의 형식으로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간구와 기도와 도고를 하는 성도라면 그의 삶에서 감사는 필수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위의 네 단어는 모두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이러한 종류의 기도가 생활 가운데 일상화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바울은 이 모든 기도를 ‘모든 사람을 위하여’하라고 명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인가? 일차적으로 바울이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기도해야할 것을 요청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후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하고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본문의 맥락에 국한해서 본다면 이는 디모데가 당시에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안에 있는 여러 인종과 신분의 다양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이처럼 디모데로 하여금 인종이나 국적,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차별없이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The “first” thing to be addressed (either in sequence or priority of importance)6 is the church’s prayer practice, and its “first-mention” placement in the letter indicates the importance in Paul’s mind. The instruction identifies two interrelated objects of prayer: “everyone” and “kings and all those in authority.” The nature of their interrelationship is crucial to an understanding of the passage, and this needs to be teased out from the logic and flow of the argument.
Four terms for prayer combine to express the subject of the passive infinitive “to be made” that supplies the content of the exhortation.7 Rather than understand the four terms as descriptive of a systematic liturgy of prayer, the thought is one of completeness—every dimension and action of prayer being focused on the need at hand. Three of the terms are widely used by Paul and occur together in Phil 4:6. The variety evident in the English translations shows the range of meaning covered by the terms, and there is a good degree of overlap.
“Petitions” (“requests,” NIV) accurately captures the sense of the first term. It describes a direct request made to God to intercede in some way for his people.8
“Prayers” translates the most generic term for communicating petitions or requests for intercession to God,9 and includes all aspects of prayer from petition to thanksgiving. But this general coverage does not make the term a reference to a general prayer request (“petitions” being the more specific). These first two terms sometimes occurred together (e.g. 5:5; Eph 6:18; Phil 4:6), and probably do so here with the intention of describing prayer activity in the fullest way possible.10
“Intercession” (pl.; 4:5) is limited to this NT letter. It referred originally to formal petitions made among people and usually directed to one of higher rank, and gradually took its place within the church’s prayer vocabulary.11
“Thanksgiving” (pl.; 4:3, 4) refers to prayers that express thankfulness to God. Paul’s letters to churches reveal how fundamental thanksgiving was to his practice.12 Within the church’s holistic practice of prayer, thanksgiving not only bolstered confidence by focusing reflection on God’s past responsiveness to petition, but also was an expression of confidence in anticipation of God’s future response (Phil 1:3 [cf.1:6]; 4:6; Col 3:17).
This multi-faceted prayer is first of all to be made “for everyone.” As noted, the term “all” is intentionally universal in thrust (cf. vv. 2, 4, 6; 4:10), and probably calculated to counter a tendency towards insular thinking in the Ephesian church brought on by an elitist outlook or theology.13 While in the NT this universalism is possibly most graphically expressed in this passage, Paul was also pushing forcefully in this direction in other contexts (Rom 15:11; 1 Cor 9:22; 2 Cor 5:19; cf. Acts 1:8). The purpose of this first prong of the prayer effort, delayed until vv. 3–4, will link it with the Gentile mission (cf. v. 7). Opposition to Paul’s authority placed this mission in jeopardy, and enlisting the Ephesian church’s active support in this way was designed to ensure the uninterrupted progress of the gospel.
6 Gk. πρῶτον (3:10; 5:4; 2 Tim 1:5; 2:6; see discussion at 1:15–16); either to be taken as a superlative (“first” in importance), or simply as an indication of the “first” in a series of items (typical of Greek letters, see Spicq, 356). There is no way to be sure which nuance Paul intends, but often the first item mentioned is of greatest importance or urgency.
7 Gk. ποιεῖσθαι is probably passive (TNIV; NRSV; BDF §392.4), taking the subsequent accusative nouns as subject. A middle voice meaning is possible (see Phil 1:4; Luke 5:33; BDAG s.v. δέησις and ποιέω; see Marshall, 419), but there is little difference in meaning.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8 Gk. δέησις (for Pauline usage see 5:5; 2 Tim 1:3; Rom 10:1; 2 Cor 1:11; 9:14; Eph 6:18[2x]; Phil 1:4[2x], 19; 4:6); H. Greeven, TDNT 2:40–41.
9 Gk. προσευχή; also used widely by Paul (Rom 1:10; 15:30; Col 4:12; Eph 1:16; etc.). See J. Herrmann, H. Greeven, TDNT 2:775–808; H. Balz, EDNT 3:164–69.
10 Maintaining a rigid distinction between δέησις (“petition”) as a specific request (or the request made by an individual) or and προσευχή (“prayer”) as a general request (or one made communally by the congregation) is not possible in light of such texts as Phil 4:6 and 1 Tim 5:5. But cf. Oberlinner, 66; U. Schoenborn, EDNT 1:287.
pl. plural
11 Gk. ἔντευξις; for formal petitions to people of rank, see Josephus, Antiquities 16.12; 2 Macc 4:8; Philo, Legation to Gaius 276.2; in reference to prayer, see the later Shepherd of Hermas, Mandates 5.1.6; 10.3.2–3; 10.11.9. See further, Spicq, TLNT 2:6–10; O. Bauernfeind, TDNT 8:238–45; MM 218.
pl. plural
12 Gk. εὐχαριστία; note Paul’s use of the verb in describing his thanksgiving to God (Rom 1:8; 1 Cor 1:4; Phil 1:3; etc.); for the noun in the same sense, 1 Cor 14:16; 2 Cor 4:15; 9:11; Phil 4:6; Col 2:7; 4:2; 1 Thess 3:9. Spicq, TLNT 2:9.
13 Given a too fully realized eschatology (understanding the present experience of salvation to be fuller than it actually is) a number of factors (such as are more evident in the Corinthian situation) could persuade the church to view itself as a closed society; see Towner, Goal, 33–42. There is no basis for the view that a Gnostic disregard for the State (v. 2) was specifically being addressed (W. Schmithals, “The Corpus Paulinum and Gnosis,” in A. H. B. Logan, A. J. M. Wedderburn, eds., The New Testament and Gnosis [Edinburgh: T & T Clark, 1983], 117).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65–167.
 
2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위하여 하라’, 1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권했다면 이제 2절에서는 그 기도의 초점을 한정하여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렇게 권면을 한 것은 이것이 중요한 것임과 동시에 당시 성도들 가운데 위정자들을 위한 기도가 소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임금들’에 해당하는 ‘바실레온’은 왕, 임금을 의미하는 ‘바실류스’의 복수형으로 로마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분봉왕을 함께 지칭하는 것이다. 당시 로마 황제는 자신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며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처형에 처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자신들을 죽이려는 대상을 향하여 기도할 것을 요청하는 바울의 명령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사회의 지배 계층들이었다. 이들도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하는 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실천이면서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너무 커서 이후의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위하여 이들의 도움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본문의 헬라어는 ‘히나’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히나’는 본절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목적을 나타냄을 보여준다. 
‘고요하고’로 번역된 ‘에레몬’은 본래 광야, 빈들이란 뜻을 지닌 ‘에레모스’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간섭 또는 방해로 괴로워하지 않는’의 의미이다. ‘평안한’으로 번역된 ‘헤쉬키온’의 원형 ‘헤쉬키오스’는 ‘고통받지 않는 그리고 괴로움에서 자유로운’의 의미로 신약에서 2번 사용된다. 
혹자는 전자가 외적인 방해가 없는 상태를, 후자가 내적인 근심이나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보았다. 바울이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위하여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교회에 대한 심한 핍박을 멈추고, 복음 전파가 더 자유롭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위정자들이 박해를 가하게 되면 성도들은 경건과 단정함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경건은 ‘유세비이아’로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행위와 바른 믿음을 의미한다. 
 
단정함으로 번역된 ‘셈노테스’는 존중되거나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자질로 위엄, 존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라 잡혀가기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기도할 것을 명하신다. 
예레미야 29:7
7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Verse 2 adds a second parallel14 prayer object—“for kings and all those in authority”—and follows it up immediately with a statement of its purpose. Generally, Paul has in mind all those who would fit into the structure of civic or government authority (cf. Rom 13:1; 1 Pet 2:13), whose office would be filled at the pleasure of the emperor. The term “king” had wide usage at this time throughout the Hellenistic world for certain local rulers (e.g. various of those in the Herodian line, Mark 6:14; Acts 12:1; 25:13; the ruler of the Nabateans, 2 Cor 11:32).15 But its first reference for those in Asia Minor in the first century, where the imperial cult was the fastest growing religion, would have been to the emperor. The plural reference to “kings” would signify successive reigns of emperors16 (i.e. pray for the current emperor). Nevertheless, prayer for the local or regional representatives of imperial power is also included in the broad addition “and for all those in authority.” The breadth of the command takes in all kinds of officials. The key term in the phrase “in authority” indicates those in a position of status and corresponds to those holding various imperial appointments throughout the empire.17
Where did this sense of responsibility originate? The precedent for the practice of God’s people praying for pagan rulers goes back to Israel’s exile experience. In this context we find the prophetic instruction to display loyalty to the surrounding power structure: “But seek the welfare of the city where I have sent you into exile, and pray to the LORD on its behalf, for in its welfare you will find your welfare” (Jer 29:7; cf. Ezra 6:9–10; 1 Macc 7:33).18 This could perhaps be dismissed as an expedient measure designed to help the displaced Jewish people make the best of temporary difficulties. But lying behind the prophetic instruction and evident in the prophetic and Wisdom writings19 was a developing theological (and eschatological) awareness that with the exile the lines of Israel’s religious world were being redrawn. YHWH now accomplished his will through pagan leaders whom he called his “ministers” and “servants” (Jer 25:9; Isa 45:1; cf. Isa 5:26–29; 7:18–20; 8:7–8; 13:4–5). In exile Israel’s vision had to expand to encompass all the nations, and it is chiefly in the body of literature that emerges from and after this experience that God’s universal redemptive intentions become increasingly clear. It was a logical (and theological) step for Paul to interpret the church’s prayer responsibility on the basis of the prophetic instruction, because he knew the very existence of the church was linked to the universal promises that came to expression in writings of those times. Also stemming from this development was the awareness of an extensive obligation to serve society (Titus 3:1–2; Rom 13:1–7; 1 Pet 2:13–17).20 Within this setting, prayer “for kings and all those in authority” cannot be severed from Paul’s conception of Christian existence as witness and service in the world.
The purpose statement given to explain this prayer seems also at first blush to be an expedient designed to ease the various pressures the church might experience in a hostile society. It divides into two parts. The first part depicts an ideal set of circumstances or environment in which the church might live: “that we might live peaceful and quiet lives.” The second part describes the observable manner in which such a life is to be lived: “in all godliness and holiness.” The two parts must be seen as a whole, but for convenience we shall consider each part separately.
Paul characterizes a “life”21 that is observable, lived among people in society in a way that registers.22 The two terms (“quiet and peaceful”)23 that initially describe this life express the Hellenistic ideal (conveyed variously) of a tranquil life free from the hassles of a turbulent society.24 It is obvious enough that Paul envisions the State, with God’s help, as being capable of ensuring the conditions that would make such a life possible.
The next phrase, “in all godliness and holiness,” describes this life’s character and observable shape. The language Paul uses gains its effectiveness by its currency in Hellenistic ethics and by the Christian interpretation he gives it. Many modern commentators have emphasized the former element of the language and ignored the latter, resulting in the conclusion that the writer was endorsing an ethic that conformed to the Hellenistic ideal of respectability. Yet when the theological reshaping of these concepts is taken into account, it becomes clear that Paul had other aims—namely, to express the theology of a dynamic Christian ethics by means of the language of the day. This technique would of course ensure intelligibility. But Paul almost certainly intended also to reinvent the language and subvert alternative claims about the nature and source of godliness associated with the politics and religious cults in the empire.
“Godliness” (“piety”) is a crucial concept in the letters to coworkers.25 It serves to describe the whole of Christian existence as the vibrant interplay between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observable life that emerges from this knowledge (see Excursus below). As Paul understands it, the potential to live this life characterized by the integration of knowledge and behavior (faith and deeds) is linked to the appearance of Christ in human history (Titus 2:11–12). What should not be confused here are the ideal circumstances for life sought in prayer for the State (“the quiet and peaceful life”) and the authentic Christianity called for. “Godliness” as authentic Christian existence is expected in all situations, tranquil or turbulent (2 Tim 3:12). Prayer for the tranquil setting is prayer for an ideal set of social circumstances in which Christians might give unfettered expression to their faith in observable living. This distinction allows us to place the second prayer (for leaders) into the missiological grid of the passage: the church is to pray for the salvation of “all,” and it participates in that mission by making God present in society in its genuine expression of the new life for all to see.
The second term in the phrase is better translated “respectability” (“holiness”, TNIV), for it conveys the ideas of “seriousness” and “appropriateness”26 by which respectability was measured. Although not lacking an inward origin, it focuses more on behavior that is deemed acceptable by other people. Together the pair of terms (“godliness and respectability”) describes Christian existence as a holistic experience of new life produced by faith in God and lived out observably in human society. While not denying the degree to which the testimony of Christ might antagonize unbelievers (2 Tim 3:12), the language Paul chooses and the emphasis on observable respectability describe the Christian life as a life of engagement in society that is worthy of respect. It is a life that truly communicates the realities of faith in Christ in a language understood by all, while it also challenges secular notions about the source of such qualities.
Paul’s choice of this current ethical language was designed with communication of the gospel in mind. Far from compromising the uniqueness of the gospel and its claims, by employing the common terminology Paul established the relevance and challenge of his message for the culture. The language of “godliness” (eusebeia), among other crucial theological terms which all have their place in Paul’s lexicon (“epiphany,” “savior,” “God,” “Lord”), was so closely linked to the Artemis cult in Ephesus that his choice of this term to define the essence of Christian existence would directly confront the cultural story (see Excursus below). The point would be clear: authentic eusebeia was neither to be found nor expressed in association with Artemis, but only by faith in Christ.
14 Both objects of prayer are indicated by the repeated prepostion ὑπέρ (“on behalf of”) followed by genitive objects.
15 Gk. βασιλεύς; see also Josephus, Antiquities 17.188; 18.273; Jewish Wars 2.20. Spicq, TLNT 1:264–65.
16 As in Josephus, Jewish Wars 3.351; 4.596; 5.563. In light of Josephus, it is unlikely that the plural “kings” is a specific reflection of the later situation in which there were co-emperors in Rome (i.e. post c.e. 137).
17 Gk. καὶ πάντων τῶν ἐν ὑπεροχῇ ὄντων (for ὑπεροχή as “excellence”, 1 Cor 2:1; 2 Macc 5:13; as “position of authority,” 2 Macc 3:11; Polybius 5.41.3; Josephus, Antiquities 9.3); cf. the similar language of Rom 13:1 (πᾶσα ψυχὴ ἐξουσίαις ὑπερεχούσαις ὑποτασσέσθω) where the parallel term for “authority” is ὑπερέχω (1 Pet 2:13). See MM 653–54; G. Delling, TDNT 8:523–24.
1 See also Bar 1:10–13; Epistle of Aristeas 44–45; Josephus, Jewish Wars 2.197, 409; Philo, Legation to Gaius 157, 317; E.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 (Rev. Ed. by G. Vermes, F. Millar, M. Goodman; Edinburgh: T & T Clark, 1973–79), 2:311–13; H.-W. Bartsch, Die Anfänge urchristlicher Rechtsbildungen: Studien zu den Pastoralbriefen (Hamburg: Reich, 1965), 34–39; Johnson, 195–96; Marshall, 421–22.
8 See also Bar 1:10–13; Epistle of Aristeas 44–45; Josephus, Jewish Wars 2.197, 409; Philo, Legation to Gaius 157, 317; E. Schü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 (Rev. Ed. by G. Vermes, F. Millar, M. Goodman; Edinburgh: T & T Clark, 1973–79), 2:311–13; H.-W. Bartsch, Die Anfänge urchristlicher Rechtsbildungen: Studien zu den Pastoralbriefen (Hamburg: Reich, 1965), 34–39; Johnson, 195–96; Marshall, 421–22.
19 Isa 41:2–4; 45:1–7; Jer 21:7, 10; 27:5–6; Dan 2:21, 37–38; 4:17, 25, 32; 5:21; Prov 8:15–16. Sir 10:4; 17:17; WisdSol 6:3.
20 See Towner, “Romans 13:1–7.”
21 Gk. βίος (“life, activities of life, the means to live”; 2 Tim 2:4; Luke 8:14, 43; etc.) H.-J. Ritz, EDNT 219; BDAG, s.v.
22 The Gk. verb διάγω carries the same sense in Titus 3:3; see discussion and refs. in Roloff, 116, n. 43.
23 Gk. ἤρεμον καὶ ἡσύχιον; the adj. ἤρεμος occurs only here in the NT and is rare in Greek literature (LSJ, s.v); the adj. ἡσύχιος occurs elsewhere in the NT only at 1 Pet 3:3, but the related verb and noun occur in 1 Thess 4:11 and 2 Thess 3:12, respectively, where Paul encourages pursuit of the same ambition of leading the quiet life.
24 For the sentiment, see BDAG, s.v., for its occurrence in the closely similar statement “living a quiet and calm life” (ἤρεμον καὶ γαληνὸν τὸν βίον διαγότων); see also Josephus, Antiquities 13.407; Philo, Life of Moses 2.235.
25 Gk. εὐσέβεια (“godliness, piety”); the word group occurs a handful of times in Acts (3x) and 2 Peter (5x) but most prominently in these letters (13x).
TNIV Today’s New International Version
26 Gk. σεμνότης. This word group, also significant within Greek ethics, has an important role in developing a view of Christian existence in 1 Timothy and Titus. For the noun, σεμνότης, see 1 Tim 2:2; 3:4; Titus 2:7 (not used elsewhere in the NT); for the adjective, σεμνός, see 1 Tim 3:8, 11; Titus 2:2 (elsewhere in NT only at Phil 4:8). The word group envisages a particular deportment (translated by a wide range of English terms) of seriousness, dignity, respectability, and holiness.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67–171.
 
3절) 본문의 이것은 앞선 1-2절에서 세상의 위정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가리킨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주’엔 ‘소테로스’로 구원자라는 의미인데 이 단어가 하나님과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드려지는 중보 기도는 위정자들을 위해서도, 성도들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중보 기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연결되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 되는 것이ㅏㄷ. 
 
4절)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3절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과 위정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선한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에 이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복음의 진리를 알기 원하기 때문에 중보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17세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본절을 근거로 보편구원론을 주장했다.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판타스 안드로푸스’를 전 인류로 볼 수 있는가가 쟁점이다. 이를 양적 측면에서 전인류를 나타낸다기 보다 질적 측면에서 ‘계층이나 인종이나 국적의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본절은 문맥상 인종이나 피부 색까, 지위나 신분에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칼빈주의자들은 제한 속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만이 구원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며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했다.(엡 1:4, 11; 행 13:48; 벧전 1:2; 롬 11:5) 
바울이 이렇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이 이방인을 구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바울은 구원을 받는 것과 진리를 아는 것을 등치시키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요한복음 17:3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진리(알레데이아) 곧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아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함을 드러낸다. ‘아는’으로 번역된 ‘에피그노신’은 강의적인 의미로 사용된 ‘에피’와 지식을 의미하는 ‘그노시스’의 합성어로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충만한 지식(딤후 3:7)을 의미한다. 
 
바울은 인종이나 계층, 국적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통해 진리를 아는데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원하시느니라’에 해당하는 ‘델레이’는 현재 능동형으로 하나님의 원하심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vangelistic prayer for all people is rooted in the fact that God desires all people to be saved. It appears that Paul is countering an exclusivist tendency in the false teachers or at least their downplaying of the importance of evangelizing the Gentiles (along with their emphasis on the Jewish law). This statement figures prominently in theological disagreements over the extent of the atonement. It cannot be read as suggesting that everyone will be saved (universalism) because the rest of the letter makes it clear that some will not be saved (4:1; 5:24; 6:10; cf. Matt. 25:30, 41, 46; Rev. 14:9–11). Does that mean God desires something (all people being saved) that he cannot fulfill? Both Arminian and Calvinist theologians respond that God “desires” something more than universal salvation. Arminians hold that God’s greater desire is to preserve genuine human freedom (which is necessary for genuine love) and therefore he must allow that some may choose to reject his offer of salvation. Calvinists hold that God’s greater desire is to display the full range of his glory (Rom. 9:22–23), which results in election depending upon the freedom of his mercy and not upon human choice (Rom. 9:15–18). However one understands the extent of the atonement, this passage clearly teaches the free and universal offer of the gospel to every single human being; “desires” shows that this offer is a bona fide expression of God’s good will.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highlights the cognitive aspect of conversion, i.e., individuals must come to understand key truths in order to be converted. “The truth” occurs often in the Pastorals as a synonym for the gospel (cf. 1 Tim. 3:15; 4:3; 2 Tim. 2:15, 18, 25; 3:7, 8; 4:4; Titus 1:1, 1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7.
 
Thus Paul explains that prayer for the salvation of all people, and specific prayer for the effectiveness of the civic powers, conforms to the will of God. It is not simply an optional church practice that pleases God, but a practice as integral to the church’s life with God as was sacrifice in the time before Christ.
But the enormity of what Paul calls for—a kind of prayer that encompasses the whole world—elicits a specific elaboration of the will of God concerning salvation (v. 4). The added relative clause not only describes the preceding “God our Savior” (v. 3), but also explains why the prayer for all people is good and acceptable to him. The reason is that God “wants [wills] all people to be saved.” There are several points to consider.
First, the verb “to will” should be understood in the strongest sense as indicating God’s will.33 In this statement of God’s purpose for humankind, however, the element of human response to the gospel is not minimized within the process. It is God’s universal intention, as opposed to some form of exclusivism, that is mainly in mind.
Second, the purpose of the reference to “all people,” which continues the theme of universality in this passage, is sometimes misconstrued. The reference is made mainly with the Pauline mission to the Gentiles in mind (v. 7). But the reason behind Paul’s justification of this universal mission is almost certainly the false teaching, with its Torah-centered approach to life that included either an exclusivist bent or a downplaying of the Gentile mission.34 This kind of corporate self-centeredness was at least latent in other Christian communities to which Paul addressed letters that argued for Jew-Gentile equality and the divine origin of his calling to the Gentiles (Galatia, Rome). Here the presence of an overly realized view of salvation may have encouraged the belief that Christians are not part of this world (see also 1 Corinthians; Introduction C.2.b.)
Third, the meaning of God’s will to save “all people” has been equally problematic. As a statement of the breadth of God’s will about salvation,35 this echoes Paul’s statements in Rom 3:27–31 and 11:26–32. There and here the chief concern is to clarify that God’s salvific intentions fully include the non-Jewish world, and that Paul’s unique mission to reach that world is indeed God’s means to fulfill his universal redemptive promises (v. 7).36 But this salvation statement is not simply about a life after death. As Johnson maintains, Paul’s statement “is less about future destiny (‘eternal life’), than about present location.”37 “Salvation” in its theological sense here (following “savior”) carries the full meaning of deliverance from sin (1:15; 1:1; Titus 2:14; 3:5–7). Yet Paul’s focus is on the building of a people of God that incorporates all people regardless of ethnic, social or economic backgrounds, and who are characterized by a manner of life that is qualitatively different from society at large (v. 2). In Pauline thought the presence of this combination of features (deliverance from personal and social sin) is present salvation. While the theological and eschatological elements of salvation persist, the primary concern in Ephesus is for a church that has tilted off this Pauline axis or is in danger of doing so.38
From the human side, the process of salvation, of coming to faith, can be described in various ways. Paul explains the process here by means of the phrase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39 The term translated “knowledge” (or “recognition”) is frequent in Paul, and especially in this phrase with the verb “to come to” reflects the cognitive process of knowing (here the content is “truth”).40 In these letters to coworkers the term occurs only in the technical phrase “knowledge of the truth” (1 Tim 2:4; 2 Tim 2:25; 3:7; Titus 1:1),41 which, with appropriate verbs,42 expresses the idea of conversion as a rational decision to embrace “the truth.”43 It may also regard authentic Christianity from the perspective of one’s understanding of and commitment to “the truth” (so 1 Tim 4:3).
“Truth” language (2 Tim 2:15; Titus 1:1, 14), as used by Paul, is intentionally polemical, inviting the reader/hearer to distinguish between his assessment of the gospel (= the truth) and fallacious competing claims (cf. 6:20). The same standard of measure was employed in Qumran to determine genuine membership in the Sect on the basis of a commitment to “the truth” that separated the community from corrupt mainline Judaism.44 However much he was indebted to this tendency, Paul’s other letters suggest that he first deployed the “truth” category in Christian mission. He applied it, among other overlapping concepts, with various verbs of perception to emphasize the divine origin of his message over and against pagan falsehood.45 In these letters to coworkers, “truth” stands for God’s authoritative revelation (as represented in Paul’s gospel). The polemical intention is clear from the descriptions, which employ various key verbs, of the opponents’ departure from “the truth.”46 Consequently, “coming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combines a statement about the quality of the gospel message and commitment to it. In the Ephesian context of false teaching, Paul emphasizes that salvation and adherence to the apostolic message are inseparable. God’s will is that all people will commit themselves in faith to the truth about Christ.
33 Gk. θέλω can express the weaker sense of “desire,” and for some this sense is preferable to a statement about God’s will that human indecision can thwart (see M. Limbeck, EDNT 2:137–39; D. Müller, NIDNTT 3:1015); but the stronger sense is best (see Rom 9:18; 1 Cor 4:19; 12:18; etc.; cf. the noun θέλημα 2 Tim 1:1; 1 Cor 1:1; Col 1:9; G. Schrenk, TDNT 3:44–62; Marshall, 427. See further P. H. Towner, “Will of God,” in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ed. W. Elwell (Grand Rapids: Baker, 1996), 820–22.
34 The view that a Gnostic exclusivism underlay this emphasis (Roloff, 119; Oberlinner, 72–73; Bassler, 52; Kelly, 63; J. Sell, The knowledge of the Truth [Frankfurt: Lang, 1982], 11–16) is not supported by the evidence (see the discussion in Towner, Goal, 22–24).
35 For the meaning of Gk. σῴζω, see discussion at 1:15; see also Quinn-Wacker, 180–81.
36 See also Marshall, 426–27; Knight, 119.
37 Johnson, 191; see also, id., “The Social Dimensions of Soteria in Luke-Acts and Paul,” in The SBL 1993 Seminar Papers, ed. E. H. Lovering (Atlanta: Scholars Press, 1993), 520–36.
38 The possibility that this text expresses a thoroughgoing “universalism” (God will save all people regardless of their disposition towards the gospel; e.g. V. Hasler, “Epiphanie und Christologie in den Pastoralbriefe,” TZ 33 [1977], 204–207) is removed by the consistent emphasis on faith for salvation in 1 Timothy (1:16; 3:16; 4:10; cf. 2 Tim 1:5).
39 The conjunction, καί (“and”), which links the two parts of v. 4, is epexegetical (see BDF §442.9): “… all people to be saved, that is,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or even “all people to be saved by coming to a knowledge of the truth” (cf. BDAG, s.v. 1.δ).
40 Gk. ἐπίγνωσις; see Rom 1:28; 3:20; 10:2; Col 1:9–10; 2:2; 3:10; Phlm 6; R. Bultmann, TDNT 1:689–714.
41 Gk. ἐπίγνωσις ἀληθείας; see also Heb 10:26. The verbal equivalent occurs at 1 Tim 4:3.
42 From the human side, the action is described with the verb “to come to” (Gk. ἐλθεῖν; 2:4; 2 Tim 3:7; in 1 Tim 4:3, the verbal form of the formula is equivalent); from God’s side the action is described in terms of a gift: “to grant them repentanc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 (2 Tim 2:25).
43 See esp. Sell, Knowledge of the Truth, 3–7, et passim; Quinn, 276–82; Dibelius and Conzelmann, 41.
44 For the parallel Hebrew phrase, דעת אמת, see 1QS 9:17–18. The polemical thrust of this use of “truth” is clear: “The Instructor must not reprove the Men of the Pit, nor argue with them about proper biblical understanding. Quite the contrary: he should conceal his own insight into the Law when among perverse men. He shall save reproof—itself founded on true knowledge and righteous judgment—for those who have chosen the Way” (1QS9:16b–19a; Wise, Abegg, Cook). For the place of “truth” in the Sect’s self-identity, see 1QS 6:15 where initiation into the Sect is described as “returning to the truth …”
45 See 2 Thess 2:10, 12, 13–14; Col 1:5–6; Eph 1:13 for the combination of “truth” with “word,” “gospel,” and “faith,” and verbs such as “to hear,” “to believe,” “to know” (ἐπιγινώσκω) and “to receive.” Marshall, 122; Wolter, Paulustradition, 71.
46 Thus in 1 Tim 6:5 “robbed of the truth” (ἀποστερέω); 2 Tim 2:18 “wandered from the truth” (ἀστοχέω; cf. 1 Tim 6:21); 2 Tim 4:4; Titus 1:14 “reject the truth” (ἀποστρέφω).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7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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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is charge mI entrust to you, Timothy, my child, in accordance with nthe prophecies previously made about you, that by them you may owage the good warfare, 19 pholding faith and a good conscience. By rejecting this, some have qmade shipwreck of their faith, 20 among whom are rHymenaeus and sAlexander, whom I thave handed over to Satan that they may learn not to ublaspheme.
m 2 Tim. 2:2
n ch. 4:14
o 1 Cor. 9:7; 2 Cor. 10:4; 2 Tim. 2:3, 4; [ch. 6:12]
p [ch. 3:9]
q [ch. 6:9]
r 2 Tim. 2:17
s 2 Tim. 4:14
t See 1 Cor. 5:5
u Acts 13:4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딤전 1:18–20.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딤전 1:18–20.
 
바울은 이 권면의 세션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명하고 있다. 12-17절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긍휼에 대하여 간증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했다. 앞서 3-7절에서도 거짓 교훈을 가르치는 이들에 대한 경고가 있었고 다시 한번 거짓 선생들을 주의할 것을 명하고 있다. 
 
18절) 바울은 아들 디모데야라고 호칭한다. ‘테크논’이라는 표현은 아이, 자녀, 자손이라는 표현으로 돌봄과 양육이 필요한 아이들을 특별히 애정을 담아 부르는 호칭이다. 이 단어는 원래 ‘낳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틱토’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비록 육신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바울은 자신이 디모데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얼마나 바울이 디모데를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본문에서 ‘교훈으로써’라고 번역된 ‘파랑겔리안’은 앞서 5절에서도 사용된 표현이다. 본문에서는 ‘명령, 올바른 삶과 관련된 특별한 지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어 ‘명하노니’라는 표현은 ‘파라티데마이’로 원형은 ‘파라티데미’이다. 이는 옆에라는 의미의 ‘파라’와 두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티데미’의 합성어로 ‘내놓다, 제시하다, 맡기다’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를 직역하면 ‘내가 이 교훈, 명령을 네게 맡긴다’라는 의미이다. 이후 딤후 2:2에서도 디모데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임무를 맡길때도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 제자훈련의 핵심이 바로 이 받은바 명령,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주께 받은바 말씀, 교훈을 디모데에게 가르쳤고 이제 이를 그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기는 내용, 명령은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은 바울이 디모데를 교회의 지도자로 위임하면서 부여하고 가르친 여러 예언, 교훈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에 지도한’으로 번역된 ‘프로아구사스’의 원형은 ‘프로아고’이다. 이는 앞에를 의미하는 전치사 ‘프로’와 인도하다, 데려오다라는 뜻의 동사 ‘아고’의 합성어로 앞서 끌어내다, 앞서가다라는 뜻을 지닌다. 
예언은 ‘프로페테이아스’로 복수형이 사용되었다. ‘프로페테이아’는 예언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마음, 의지 혹은 지식을 나타내는 선언을 의미한다. ‘프로페테스’는 예언자, ‘슈도프로페테스’는 거짓 ,  선지자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서 이미 바울이 오래 전에 디모데에게 여러가지 예언에 대한 내용을 지도한 바가 있다. 
 
‘선한 싸움을 싸우며’, 선한 싸움은 ‘칼렌 스트라테이안’, 싸우며는 ‘스트라튜에’이다. ‘스트라티아’는 군대, 무리를 의미하며 ‘스트라테이아’는 싸움, 전투를 의미하고 이것의 동사 ‘스트라튜오’는 군복무하다, 싸우다라는 의미이다. 고전 9:7이나 고후 10:3에서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9:7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린도후서 10:3
3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전투에 사용되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바울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을 연상시키며 디모데에게 이러한 자세를 가질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은 3-12절에서 언급한 대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며 또한 거짓 교훈을 전하는 이들과의 싸움이다. 넓게는 이를 조종하는 사단과의 영적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이 영적 전쟁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전에 지도한 예언을 따르는 것임을 확신했다. 결국 이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18 The resumption of personal instruction is evident from Paul’s twofold use of the second person pronoun “you” and in the personal way he addresses his coworker (“Timothy, my son”; cf. 2 Tim 2:1).1 As with the first reference to “the command” in 1:5, there is some debate about the content of the more specific reference to “this command” here.2 The translations illustrate the disagreement: “I am giving you these instructions” (NRSV), “I am giving you this command” (TNIV). By broadening the Greek singular to a plural, the NRSV apparently understands the reference to be to the instructions throughout the whole letter.3 However, the singular is intentional. The original commission given to Timothy was to oppose the false teachers (1:3); it is this task that is subsequently referred to with the term “command” or “instruction” in 1:5. While we may be sure that Paul’s instructions from 2:1 onwards relate in some way to Timothy’s task of opposition and correction, they also probably exceed that task. Consequently, what Paul does at this point is to refer back to the original task, resuming the original thought as a way out of the testimonial digression, to add motivational material, before moving on to other related topics.
The verb of conveyance employed here (“I am giving, entrusting”) further suggests a reflection back on the original commissioning. Here it expresses the sense of “entrustment” associated with receiving a commission (2 Tim 2:2) in a way not noticeably different from the simplex cognate verb, “to appoint,” that Paul used of his own appointment in 1:12 (2:7; 2 Tim 1:11).4 This link, along with the bracketing of the instruction to Timothy around the Pauline testimony, ensures that Timothy will feel the weight of his commission.
The following prepositional phrase, “in keeping with the prophecies once made about you,” motivates by establishing the context of authority for the present command: Timothy’s earlier appointment. The role of prophecy in defining Timothy’s calling and authority is confirmed by 4:14 (see discussion), but neither the procedure envisioned nor the time is entirely clear. As for procedure, the best analogy is probably Acts 13:2, where, in the Spirit, words of confirmation and calling were uttered by the group of prophets and teachers praying for Barnabas and Paul.5 As for time, the translation above suggests the reflection here is on an earlier6 episode in which multiple prophecies,7 mutually confirming, were declared “upon”8 Timothy.9 It is not possible to locate this event with certainty. 4:14 might seem to indicate that Timothy’s authority was confirmed in the local Ephesian setting,10 or there and here the reference may be back to some earlier occasion(s) either at the outset of Timothy’s career (Acts 16:2), or as marking the commencement of this present assignment.11 Either way, Timothy is thus bound to his commission (1:5, 18a) by the divine decision communicated to him in the presence of others.
The purpose (hina) of Timothy’s commission, given earlier in terms of commanding and correcting the false teachers (1:3–4), is repeated here in a vivid military metaphor: “fight the battle well” (lit. “fight the good fight”). The saying seeks to elevate the urgency of the action to be taken by Timothy in the same way as the athletic metaphor in 6:12 does (2 Tim 4:7). The combination of the verb and cognate noun portrays Timothy’s calling as that of a soldier (2 Tim 2:4) engaged in a military campaign.12 Although Hellenistic writers used the metaphor of military struggle widely to describe life in general or in ethical contexts to characterize moral effort,13 the usage here is continuous with other Pauline letters. The combination of verb and noun occurs also at 1 Cor 10:3–4 in a similar discussion about opponents, and a wider array of military imagery is frequent in Paul.14 The addition of the adjective “good”15 specifies that this is the authentic war of faith. But not to be overlooked in this description is the continuing role of the prophecies that accompanied Timothy’s commission. It is “by recalling them” that the war will be successfully fought, a reference both to the binding commitment and to the promise of divine help involved in Timothy’s commission.
1 For discussion of the epithet, “(my) child” (Gk. τέκνον), see above on 1:2a.
2 Gk. ταύτην τὴν παραγγελίαν (see on 1:5); in these letters, the demonstrative pronoun, οὖτος, more frequently refers backwards.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TNIV Today’s New International Version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3 So also Bassler, 45–46. In the commentaries, attention is sometimes drawn to the verb of “commission” here, Gk. παρατίθεμαι (mid.), which is cognate to the important term παραθήκη (6:20; 2 Tim 1:12, 14). Since the latter is used to describe the passing on of the apostolic tradition/message/mission to Timothy, it is argued, via the related verb, that “this command” refers extensively to “the apostolic message” (cf. Dibelius and Conzelmann, 3; Roloff, 101; P. Trummer, EDNT 3:22; see the discussion in Marshall, 408).
4 Gk. παρατίθεμαι (2 Tim 2:2; Acts 14:23; 20:32; 1 Pet 4:19; Trummer, EDNT 3:22) is cognate to the verb indicating appointment in 1:12 (θέμενος; ptc.). See Johnson, 184.
5 Cf.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758–61.
6 The verb προάγω (here in ptc. τὰς προαγούσας) is best taken in a temporal sense “earlier” (rather than in a local sense as “leading to or going before”; for which see Knight, 108).
7 Gk. προφητεία (4:14; Rom 12:6; 1 Cor 12:10; 13:2, 8; 16:6, 22; 1 Thess 5:20); see esp. D. E. Aune, Prophecy in Early Christianity and the Ancient Mediterranean World (Grand Rapids: Eerdmans, 1983), 247ff.; H. Krämer (et al.), TDNT 6:781–861; F. Schnider, EDNT 3:182–83; C. M. Robeck. DPL 755–62.
8 The syntax of the phrase, κατὰ τὰς προαγούσας ἐπὶ σὲ προφητείας, is problematic. It is possible to take the prepositional phrase as dependent upon the participle (“the going before you prophecies”; see Knight, 108 and preceding note). But on the model of 4:14 (τοῦ ἐν σοὶ χαρίσματος; “the gift in you”; article/prepositional phrase with personal pronoun/noun), the sense would be “according to the prophecies [prophesied] upon you” (with κατά “in accordance with,” indicating that the prophecies are being fulfilled as Paul gives the commands to Timothy) with the participle simply indicating the time frame. See fuller discussion in Marshall, 409.
9 The view that “prophecies” refers to words spoken at a formal ordination (Bassler, 46; Roloff, 102) is anachronistic and surely, in view of such precedents as Acts 13:1–4, not required by the texts.
10 Cf. Brox, 118.
11 Fee, 57–58; discussion in Marshall, 409. As Johnson, 184, points out, the “mandate” function of the letter, which sets out for the receiving community the authority and instructions for Timothy in assuming his role in Ephesus, might suggest the event took place as Paul sent Timothy off.
lit. literally
12 For the verb στρατεύομαι, see 2 Tim 2:4; 1 Cor 9:7; 2 Cor 10:3; for the noun στρατεία, see 2 Cor 10:4. For the verb-object combination see 4 Macc 9:24. See also O. Bauernfeind, TDNT 7:701–713; Johnson, 185.
13 Cf. Epictetus 2.4.17; 3.24.34; Plutarch, Moralia 204a.
14 1 Cor 9:24–25; 2 Cor 6:7; Phil 1:27–30; 2:16; 3:12–14; 4:4; Eph 6:11–17; Col 1:28–2:2. See also V. C. Pfitzner, Paul and the Agon Motif (Leiden: Brill, 1967), 157–64.
15 The TNIV rendering of the adjective καλός (in the article/adjective/noun combination τὴν καλὴν στρατείαν) as an adverb (“fight the battle well”; cf. NIV “the good fight”) is puzzling and fails to capture the import of the καλός word group in these letters for categorizing aspects of the authentic faith. See the discussion of “good” at 1:8 and “good works” at 2:10. Towner, Goal, 153–54.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55–157.
 
19절)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믿음은 ‘피스틴’으로 단순히 올바른 신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투의 전신 갑주중의 하나로서의 믿음(엡 6:10-17)을 의미한다. 
착한 양심은 앞서 5절에서 선한 양심으로 표현되었다. 양심으로 번역된 ‘쉬네이데신’의 원형 ‘쉬네이데시스’는 ‘~함께’라는 의미의 ‘쉰’과 ‘보다, 알다’란 의미의 동사 ‘에이도’의 합성어로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이처럼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자아의 핵심이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이처럼 믿음과 양심을 3번이나 반복해서 한 절안에 사용하고 있다.(1:5; 3:9)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믿음과 인간의 도덕적 측면을 관장하는 양심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버렸고’로 번역된 ‘아포사메노이’는 ‘~로부터 밖으로’란 의미의 전치사 ‘아포’와 멀다라는 의미의 ‘오데오’의 합성어로 ‘멀리 밖으로 던져버리다, 밖으로 밀어내다’라는 의미의 부정과거 중간태이다. 이는 극단적이고 단호한 거절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배를 영원한 휴식의 안전한 항구로 이르도록 안내해 주는 키인 선한 양심을 항해가 진행중인 배 밖으로 던져버리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결국 이러한 행위는 믿음의 파선까지 이르게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글 번역은 ‘이 양심’을 버렸고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원어에서는 ‘헨’이라는 단수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파선하였느니라’로 번역된 ‘에나우아게산’이 워내 배가 산산 조각나다라는 뜻을 지닌 ‘나우아게오’의 부정과거형이다. 앞서 18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좋은 군사로서의 삶을 요구하였다면 19절에서는 좋은 선원, 선장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1:19 This represents a singular pronoun in Greek and refers to a good conscience. The false teachers, rejecting their consciences, plowed ahead in their sin. shipwreck of their faith. This most likely refers to the false teachers who claimed to be believers but had fallen away from the faith they initially professed, thereby showing they were never truly converted (cf. 1 John 2:19).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7.
 
19 As the Greek sentence continues with a participial phrase,16 Paul returns to the profile of authentic Christian existence in 1:5 to underline the means by which Timothy will be able to wage the good war. In doing this, he is returning to the contrast between his understanding of authentic Christianity as the inward cleansing of the heart that enables the believer to process God’s law internally (new covenant) and the heretical notion of spirituality as adherence to an external framework of law. The concepts of “holding on (“having,” “keeping”) to faith” and to “the conscience” are expressed elsewhere in the NT.17 But here the close interrelation of the two items belongs to Paul’s schematic of the inner workings of the genuine believer worked out especially in these letters to coworkers. “Faith” is that posture of trust in God that animates the individual’s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see on 1:2 [note], 5). The “good conscience” is the organ of decision (1:5 Excursus), by which the Christian may move from knowledge of the faith (considered from the standpoint of objective content) and the sound teaching to appropriate conduct. Particularly in this theological configuration, the “good conscience” is an ethical description of what the Spirit does within the believer to apprehend God’s law. The condition of the conscience is determined by one’s disposition towards the gospel (by conversion), which suggests the ordering of “faith” followed by the “good conscience.” Paul is obviously setting faithfulness to his gospel as the prerequisite of Timothy’s success. Together, then, these two items link the ministry of opposition Timothy is to be engaged in to godly faith and behavior, just as they distance authentic Christian ministry from the activities of the opponents.
In fact this distance between authentic and inauthentic faith is now explained in terms of the opponents’ act of rejection. Just as Paul in 1:5–6 first sets out the authentic shape of faith and then shows how the opponents have veered from it, so here, with the same device,18 he first establishes the benchmark of authenticity and then the deviation from it. The verb describes a deliberate act of rejection,19 and coincides with other terms describing the culpable deviation of the opponents from sound doctrine.20 In this case the grammar makes it clear that they have let go of the “good conscience.”21 If we’ve followed Paul’s discourse thus far, we know that Paul is here alluding to the heretical decision to return to an external law-based (and ascetical) “faith” (1:3–4, 7, 8–10a; 4:1–3). Essentially, their rejection of the Pauline conception of the faith, with its insistence on the internalizing of the norm of godliness, for an external law structure without the Spirit, rendered their conscience incapable of discerning authentic from inauthentic doctrine and conduct (4:2): the law functions to reveal sin, not to empower for holy living (1:8–10a). “Rejecting the good conscience” is neither a reference to specific immoral tendencies that destroyed their faith, nor to a dualistic absorption in the cognitive dimension of faith that ignores practical ethics.22 But as in 1:5–6, here too the stress is more on the integrity of the whole Christian person: the parts are interdependent, and the failure of any one will affect the other. The false teachers exchanged Paul’s understanding of salvation and Christian living for a materialistic approach that relied on novel exegesis of the OT instead of the inner working of the Spirit in a converted heart. This decision of rejection does indeed have practical and visible results in the form of behavior that does not conform to godliness, but the root error seems to have been rejection of Paul’s gospel.
The consequences of this rebellion were severe. Employing the aorist tense, Paul speaks historically of an event that has already occurred that he will link to two characters. The well-known metaphor of “shipwreck” signifies the catastrophic scale of damage caused by their rejection.23 But what (or whom) has suffered shipwreck? The prepositional phrase, “with regard to the faith,”24 defines the context of the disaster. Some take this impersonally as a reference to damage caused to the gospel mission or to “the faith” by the false teaching.25 But a personal reference to damage caused to the opponents’ own faith in some sense is more likely.26 The most decisive factors are probably the verb itself, whose subject is the collective “some” (about to be narrowed to two individuals), and the main topic of this closing subsection. The verb, whether literally or figuratively, is consistently intransitive, describing a state of the subject, and so means “to suffer shipwreck or disaster” but not “to cause something to be shipwrecked.”27 In this construction, it is the heretics who suffer shipwreck, and the added prepositional phrase is required to describe that in relation to which the figure of disaster is to be measured—it is too indirect to serve as a direct object (even if the verb could take one). This means that in whatever sense “(the) faith” is taken, it must still be seen in connection with the false teachers’ personal disaster. Then, the immediate context is taken up with repeating the charge to Timothy, after a long (but carefully planned) digression, and with motivating him. Just as reference to his earlier commissioning and attendant obligations is meant to encourage faithfulness, so too is the warning of possible disaster. Consequently, either the “some” have suffered disaster with respect to “their own faith” (the standard for which is the authentic faith just referred to), or they have suffered disaster “so far as the Christian faith is concerned.”28
16 TNIV shows the close relationship of this clause to the preceding by incorporating it into v. 18.
17 For the verb ἔχω with “faith” as object (Rom 14:22; 1 Cor 13:2; Matt 17:20 21:21; Acts 14:9; James 2:18), with “conscience: as object (Acts 24:16; Heb 10:2; 13:18; 1 Pet 3:16).
18 The relative pronoun followed by the derogatory indefinite pronoun (ἥν τινες; 6:21; 2 Tim 2:18).
19 Gk. ἀπωθέω (ptc. “to reject, repudiate”; Acts 7:27, 39; Rom 11:1, 2).
20 1:6; 4:1; 5:15; 6:21; 2 Tim 2:18; 4:4; Titus 1:9.
21 The antecedent of the feminine, singular relative pronoun, ἥν, is the immediately preceding feminine noun, ἀγαθὴν συνείδησιν. Cf. TNIV (“some have rejected these”) and NRSV (“by rejecting conscience”).
22 See Schlarb, Die gesunde Lehre, 122–34; see discussion in Marshall, 412.
23 Gk. ναυαγέω (2 Cor 11:25 literal); the verb is intransitive and does not take an object but sometimes take prepositional phrases that define the context (e.g. Dibelius and Conzelmann, 33, n. 12); for the figurative use, see also Philo, On Dreams, 2:147; On the Change of Names, 215.
24 Gk. περὶ τὴν πίστιν (for the construction cf. 2 Tim 2:18).
25 See Fee, 58; Mounce, 67. This requires taking the verb transitively to mean “to cause shipwreck.” The main considerations are: (1) the articular form of “the faith” in the prepositional phrase (as in the identical phrases 6:21 and 2 Tim 3:8) tends to refer to “the Christian faith” as opposed to personal faith; (2) in context, Paul’s first concern is for his and his mission’s authority in Ephesus. This has come under attack by those who have reverted in some sense to a Judaizing faith; (3) the sin of the two named individuals, “blasphemy” (v. 20), could be understood as an attack on the gospel.
26 Johnson, 186; Marshall, 412; Arichea and Hatton, 41–42.
27 Mounce, 63, 67, takes ναυαγεῖν as a transitive verb but without evidence that it functioned this way. In fact, in each of the περὶ τὴν πίστιν phrases (1:19; 6:21; 2 Tim 3:8), the verb or verbal idea governing the prepositional phrase functions intransitively (6:21; cf. 2 Tim 2:18: ἀστοχέω = “to miss the mark”; 2 Tim 3:8: ἀδόκιμοι), and so requires the preposition to define that in respect of which the state (shipwreck, bad aim, etc.) exists.
28 Arichea and Hatton, 42. See also NRSV. This latter solution is perhaps better supported by the other occurrences of the phrase περὶ τὴν πίστιν (6:21; 2 Tim 3:8).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57–160.
 
20절) 바울은 본절에서 양심을 바려 믿음에 파선한 구체적인 실례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언급하고 있다. 후메내오의 경우 딤후 2:17에 한 번 연급된다. 
디모데후서 2:17
17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알렉산더의 경우 행 19:33-34, 딤후 4:14-15에 등장한다. 이 이름은 당시 매우 흔한 이름으로 여기 등장하는 사람을 동일인으로 특정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사도행전 19:33–34
33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변명하려 하나
34그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이나 하더니
디모데후서 4:14–15
14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그는 구리 장색으로 바울을 괴롭게 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적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믿음에 파선하여 복음의 진리를 막은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징례로 이들을 사탄에게 내주었다. 동일함 표현이 고전 5:5에 등장하는데 이는 교회의 장로들이 논의와 의결을 거쳐 출교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5:5
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 ‘내주다’라는 표현은 ‘파라디도미’이다. 이는 넘겨주다, 내어주다, 전달하다의 의미로 주로 권위자에게 무언가를 넘겨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안의 권면의 목적은 죄를 범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물론 거짓 교사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출교의 목적이다. ‘파이듀도신’은 원래 교육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파이듀오’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내준 이유가 훈육의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아마도 바울은 이들을 출교라는 매우 강력한 징계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신성을 모독하는 심각한 죄를 지을 것을 알았기에 이들이 자신의 죄를 깨달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출교를 명한 것이다. 이처럼 교회안의 권면의 목적은 죄를 범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다. 물론 거짓 교사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If the false teachers repent, they may still be saved; church discipline is motivated by love, with the hope that the one disciplined will turn back to the Lord. There is no explicit indication that the false teachers directly uttered evil statements about God (“blasphemed”). However, to misrepresent God’s truth is to speak ill of him.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27.
 
20 In the finale to this section, Paul, without breaking the sentence, underlines the gravity of the danger just mentioned by identifying two of the larger group (“some”)29 who have rejected good conscience and suffered the faith-consequences. The effect of this concrete illustration is both to emphasize the warning to Timothy and to convey to the receiving Ephesian community Paul’s official censure of the opposition.
“Hymenaeus and Alexander” were obviously known to both Timothy and the church. Explicit reference to their names probably indicates that they were prominent in the church. Within the NT, the name “Hymenaeus” is the rarer of the two,30 occurring only here and in connection with the resurrection heresy in 2 Tim 2:18. From the latter reference, it seems that despite the action taken against him (see below), he apparently continued to operate in opposition to the Pauline mission in the later setting reflected in 2 Timothy. The present context suggests he was one of the teachers of false doctrine (1:3, etc.), and 2 Tim 2:18 may indicate the sort of distortions the heretical speculation was capable of producing.31
The name “Alexander” was more common and often taken by Jews.32 Four occurrences of the name in the NT have something to do with Paul (Acts 19:33[2x]; 2 Tim 4:14) and are all, even if coincidentally, linked to Ephesus. On balance, though some maintain that the additional reference to his trade in 2 Tim 4:14 intends to distinguish between two people bearing the same name,33 it seems just as plausible that the additional information supplied at a later time was meant to identify the same opponent who because of Paul’s disciplinary action (see below) moved to a new location and posed a new level of threat to Timothy.
In the disciplinary action taken by Paul, his apostolic authority is clearly in view. The first person verb “I have handed over” suggests a more direct role in the activity than the parallel text in 1 Cor 5:5, where with the same language, Paul instructs the Corinthian church to “hand this man over to Satan.” The difference is, however, minimal,34 since in both situations it is his authority as apostle that is to compel the church to take action, and since the past (aorist) time of the action alluded to here does not rule out the church’s participation in the event. What the language of each text makes clear is that an established disciplinary act—“handing over to Satan”35—was known in the Pauline churches.
“Satan” (5:15)36 refers to the supernatural nemesis of God and the church (1 Thess 2:18; Mark 4:15), who is here seen as serving God’s purposes by overseeing the chastisement of sinners (Job 2:6). This rather curious relationship was apparently a way of explaining the presence of evil in the lives of God’s people in a way that compromised neither God’s holiness nor the priority of God’s purposes for his children (Job 2:6; 2 Cor 12:7; cf. Matt 4:1–11).
The nature of the disciplinary procedure is less clear. By extrapolation from several texts (see also Matt 18:15–17; 1 Cor 5:5; 2 Cor 2:5–11; 2 Thess 3:14–15), it would seem that “handing over to Satan” involved a last stage in which the unrepentant sinner was turned out of the church to be treated as an unbeliever (see esp. 1 Cor 5:5, 9, 11). This was probably envisioned as removal from the sphere of God’s protection into the world where Satan still held sway. The situation of even more extreme punishment involving death inflicted directly by God is not in view (Acts 5:1–11; cf. 1 Cor 11:30).
As elsewhere (1 Cor 5:5), the goal of such discipline is reclamation of the erring person. Here that is implied through the purpose (hina) of “handing over”, namely, “that they might be taught not to blaspheme.” The term translated “teach” (TNIV) included both instruction and discipline and envisioned a process (possibly very severe) that brought improvement.37 Here the verb defines the process of “handing over to Satan” above as a disciplinary/educative measure designed to correct the sinners. The positive thrust of the action is apparent (2 Tim 2:25), as is the way Paul subtly distances himself from the process. The passive form of the verb, “be instructed,” either locates the remedial education in God (who never loses control over Satan) or more blandly locates it in the whole process.
The categorization of their sin, which must have included false teaching and rejection of Paul’s authority, in terms of “blasphemy” (see discussion at 1:13) forms a link back to the behavior of the pre-conversion Paul (1:13). Apparently, Paul viewed the legalism and speculative exegesis of this movement in a way similar to his own pre-enlightened Torah zeal. The identical charge of blasphemy, in its religious sense (the meaning is not simply “slander” as in 6:4), places the whole of their activities under the category of behavior that disrespects God by distorting the truth and opposing his agents. Thus the note of denunciation is unequivocal. Yet it is Paul’s hope that expulsion from the fellowship will bring these two leaders to their senses and from the position of opposition to alignment with Paul’s gospel and work.
29 For the use of the genitive relative pronoun to indicate part of the whole (ὧν ἐστιν …), see also 1:15; 2 Tim 1:15; 2:17.
30 Gk. Ὑμέναιος frequent in Greek mythology (see BDAG, s.v.; cf. Acts of Paul and Thecla, 14).
31 For the view that the heresy denying the resurrection was already current when Paul wrote 1 Timothy, see Towner, Goal, 100–107; Schlarb, Die gesunde Lehre, 179–82.
32 Gk. Ἀλέξανδρος; see M. C. Pacwa and Joel Green, “Alexander,” n.p., ABD on CD-ROM. Version 2.1a. 1995, 1996, 1997. Of Jewish men, Acts 4:6; 19:33(2x); 2 Tim 4:14; cf. Mark 15:21; BDAG, s.v.
33 See Quinn-Wacker, 804; cf. Marshall, 413.
34 It is unlikely that the different perspectives should be interpreted as reflecting different degrees of church involvement in the measures taken in keeping with the alleged theme of Paul as guarantor of the gospel in the PE (pace Roloff, 105–106; Brox, 121).
35 Gk. οὓς παρέδωκα τῷ σατανᾷ (1 Cor 5:5: παραδοῦναι τὸν τοιοῦτον τῷ σατανᾷ). The language describing the action of “handing over” is modeled on the episode in Job 2:6, in which God hands Job over for testing (LXX Job 2:6: εἶπεν δὲ ὁ κύριος τῷ διαβόλῳ ἰδοὺ παραδίδωμί σοι αὐτόν; “And the Lord said to the devil [MT = “Satan”], ‘Behold, I hand him over to you’.”). For the use of παραδίδωμι in this sort of action, see discussions in MM 483; F. Büchsel, TDNT 2:169–72.
36 Gk. Σατανᾶς; (b. Sanh 89b for Satan’s part in testing Abraham); see V. P. Hamilton, “Satan,” n.p., ABD on CD-ROM. Version 2.1a. 1995, 1996, 1997; W. Foerster, K. Schäferdieck, TDNT 7:151–65.
TNIV Today’s New International Version
37 Gk. παιδεύω (see discussion and notes at Titus 2:12).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6), 16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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