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dWe give thanks to God always for all of you, constantly1 ementioning you in our prayers, remembering before four God and Father gyour work of faith and labor of hlove and isteadfastness of hope in our Lord Jesus Christ.
d ch. 2:13; See Rom. 1:8; Eph. 5:20
1 Or without ceasing
e Rom. 1:9; 2 Tim. 1:3
f See Gal. 1:4
g 2 Thess. 1:11; [John 6:29; Gal. 5:6; Heb. 6:10; James 2:22]
h 2 Thess. 1:3, 4; [Col. 1:4; 1 Tim. 1:14; Rev. 2:19]
i Rom. 8:25; 15: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1:2–3.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1:2–3. 
 
 
2절) 바울은 인사말에 이어서 데살로니가 교인을 모두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하였다고 말한다. 본문의 ‘모두’는 ‘판토테’라는 헬라어이고 3절의 ‘끊임없이’는 ‘아디알레이프토스’이다. 이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without ceasing)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자세는 모두를 위해서, 항상 이었다. 
 
또한 본문에 말미암아라고 번역된 ‘페리’라는 단어는 위하여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때로는 때문에로 번역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바울은 너희 모두를 위하여, 또한 너희 모두들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디모데를 통해서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소식으로 인한 것이다. 바울인 1-2달정도 안식일에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그곳에 교회가 생겼고 이들이 신앙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으로 인하애 바울은 감사하고 있고 기도할 때에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 감사하다라는 표현은 ‘유카리스테오’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감사의 표현이다.(눅 18:11; 요 11:41) 바울의 감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감사해야할지를 보여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감사의 이유를 제공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감사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워보이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신앙에 굳게 서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꿰뚤어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이라는 표현보다는 ‘기도할 때에 너희를 언급함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해보인다. 기억함은에 해당하는 ‘므네이아’는 기억, 언급, 거론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3:6에서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본문 2절에서는 언급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는 바울이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소식을 듣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시간에 그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상황을 기억하고 기도시간에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는 행위야말로 목회자, 성도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원문 2절의 마지막에 사용된 단어가 개역개정에서는 3절에서 ‘끊임없이’로 번역된 ‘아디알레이프토스’인데 이는 3절의 동사인 기억하다(므네모뉴온테스)를 수식한다. 따라서 2절과 3절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언급함으로 쉬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다’라는 의미로 연결된다. 이렇게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은 바로 3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이다. 
 
The main clause of v. 2, “we give thanks always concerning you,” is followed by three dependent participial constructions: μνείαν ποιούμενοι … μνημονεύοντες … εἰδότες (“making mention … remembering … knowing”). These give a rhythmic quality to the material in vv. 2–4. The participles are not, however, logically parallel since “making mention in our prayers” does not constitute grounds for giving thanks to God, while “remembering your work of faith …” and “knowing your election” do.
ἀδιαλείπτως (“without ceasing”) at the end of v. 2 may go either with the preceding words, μνείαν ποιούμενοι (“making mention”) or with the following words, μνημονεύοντες ὑμῶν τοῦ ἔργου τῆς πίστεως κτλ. (“remembering your work of faith …”), at the beginning of v. 3. In opposition to UBSGNT and many commentators (e.g., Findlay, 19; Frame, 75; Friedrich, 211) it seems better to link this word with what precedes it since this is less disruptive to the rhythmic flow of the sentence (Rigaux, 361; cf. Best, 66). It then serves a parallel function to the πάντοτε of the main clause by explaining the manner in which Paul and the others “always give thanks” for the Thessalonian Christians, namely, by “constantly mentioning” them in their prayers.
UBSGNT The Greek New Testament, ed. Kurt Aland, Matthew Black, Carlo M. Martini, Bruce M. Metzger, and Allen Wikgren.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31975.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74.
 
3절) 3절은 바울의 감사와 기도의 세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믿음, 사랑, 소망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소망이 가장 마지막의 자리에 위치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세와 관련된 관심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1) 믿음의 역사(work of faith-투 에르구 테스 피스테오스) :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라는 의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본문에 역사라고 번역된 ‘에르곤’은 일, 행위에 해당되는 의미로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말과 태도와 행위를 통해서 외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약 2:26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했을때 행함이 ‘에르곤’이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역사, 우리의 행위로 드러나고 증명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거짓되고 생명없는 우상을 가차없이 버리는 믿음을 발휘했고(9절), 유대인들의 심한 핍박중에서도(행 17:5)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발휘하였다(살전 3:8)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야고복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강조했다. 그 증거 본문으로 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어서를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공격한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믿음의 역사를 말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들에 따라서 다른 강조점을 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투 코푸 테스 아가페스) : 이는 사랑으로 말미암은 수고, 사랑에 의해서 촉진된 수고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랑에 해당되는 단어는 ‘필리아’, ‘스톨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희생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수고로 번역된 ‘코포스’는 피곤할 정도의 노동 또는 녹초가 될 정도로 고된 일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수고는 이타적 사랑으로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고 수고를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소망의 인내(endurance of hope-테스 휘포모네스 테스 엘피도스) : 이는 소망으로 말미암은 인내, 소망에 의해 고무된 인내라는 의미이다. 소망의 원형은 ‘엘피스’인데 이는 성도와 교회 가운데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빌 1:6) 이러한 소망이 있을때에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들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다. 인내로 번역된 ‘휘포모네’는 ‘~아래에’에 해당되는 ‘휘포’와 ‘머물러 있다’에 해당되는 ‘메노’의 합성어이다. 문자적으로 견디기 힘들지만 지고 있는 짐 아래에 그대로 머물러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소망의 근거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무죄한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통을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성도는 죄 많은 세상에서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는 자는 어떠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장차 다가올 영광과 주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롬 8:23-25; 히 12:2)  
 
 faith … love … hope. A common Pauline triad (cf. 5:8; Rom. 5:2–5; 1 Cor. 13:13; Gal. 5:5–6; Eph. 4:2–5). The prominent final position here belongs to hope, which seems fitting in a letter so concerned with the end times (1 Thess. 1:10; 2:12, 19–20; 3:13; 4:13–18; 5:1–11, 23–24). work … labor … steadfastness. These are the practical outworking of the Thessalonians’ conversion. The “work” the Thessalonians do is a result or consequence of their “faith.” So, too, their “labor” flows from “love,” and their endurance or “steadfastness” comes from “hop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5.
 
1:3 When Paul gives thanks to God for his readers he does so because he remembers their response to the gospel: μνημονεύοντες ὑμῶν τοῦ ἔργου τῆς πίστεως καὶ τοῦ κόπου τῆς ἀγάπης καὶ τῆς ὑπομονῆς τῆς ἐλπίδος (“remembering your work of faith, toil of love, and steadfastness of hope”). This thanksgiving statement clearly serves as a word of praise. Rhetorically it is intended to create a positive emotion or pathos in the readers (on the use of pathos in rhetoric see Kenned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15) in order to make them well disposed to Paul’s parenetic advice (cf. Stowers, Letter Writing, 80). The well-known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recurs often in Pauline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f. 1 Thes. 5:8; Rom. 5:1–5; 1 Cor. 13:12; Gal. 5:5f.; Col. 1:4f.; Eph. 4:2–5; Heb. 6:10–12; 10:22–24; 1 Pet. 1:3–8, 21f.; Barn. 1:4; 9:8; Pol. 3:2f). Paul uses it here to express the essence of his readers’ experience as Christians. He does this by using each member of the triad as a subjective genitive to the verbal idea contained in the governing noun. Thus Paul remembers “their work that proceeds from their faith,” “their labor that proceeds from their love,” and “their steadfastness that proceeds from their hope.” No significant difference in meaning can be distinguished between ἔργος and κόπος in v. 3. Both, in connection with their respective subjective genitives, refer to activities that mark the addressees as Christians in a pagan and hostile world.
“Your work of faith” (ὑμῶν τοῦ ἔργου τῆς πίστεως) is of particular interest in the context of Pauline theology. The radical disjunction that Martin Luther claimed to have found in Paul’s writings between faith and human striving (work) and that led him to reject the letter of James as a “strawy epistle” needs careful qualification. In Galatians where Paul attacks “works” most vigorously and contrasts them with “faith,” he has a particular type of “works” in mind. He condemns those works proceeding from the Jewish Torah and what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calls “covenantal nomism” (cf. Gal. 2:15f.; 3:2–5). His attack on “works of the law” in Galatians was a theological polemic designed to distinguish the new religion to which he belonged from the mother religion from which it and he had come (though obviously Paul would not have articulated it this way). The loss of the original context of the debate, especially since the Reformation, has led to a fundamental misunderstanding of Paul and Pauline theology (see Wanamaker, “Case”). Our text clearly indicates that Paul did not conceive of Christian faith as radically opposed to works. For him Christian activity proceeds from faith, and thus he would probably have endorsed the views of Jas. 2:14–17. Paul does not specify what the “work of faith” consisted in here, but his readers probably would have understood it in terms of the totality of their new Christian life-style that distinguished them from the pagans around them and from their own past.
The expression “labor of love” (κόπου τῆς ἀγάπης), like the preceding phrase “work of faith,” cannot easily be given a specific content. Like much theological language it is evocative and allows the reader to fill in the detail from his or her own experience. Nevertheless, we may safely say that the love that Paul refers to is both his converts’ love for God and their love for one another (cf. 1 Thes. 4:9; 2 Thes. 3:5). Love was neither a mere emotion for Paul nor simply a social virtue, as Enslin (Ethics, 74) describes it. Instead, as Furnish (Love Command, 94) points out, for Paul love was “the necessary manifestation within Christ’s body of the new creation already underway in the working of God’s Spirit,” and like faith, it was inextricably linked to the activities that proceeded from it. It would appear from 4:10 that the Thessalonians had shown their Christian love toward their fellow believers in Macedonia (cf. 2 Cor. 8:1–5), and this may have been the specific fact in Paul’s mind as he wrote of their “labor of love.” Whether this is correct or not, Paul’s inculcation of love among his converts had an important social function, as we shall see later (see on 3:12).
The choice of ὑπομονῆς (“steadfastness”) to go with ἐλπίδος (“of hope”) would appear to have particular significance in the context of 1 Thessalonians. The letter makes it abundantly clear that Paul’s readers had experienced serious opposition from their fellow citizens (cf. 2:14). Nevertheless, they had remained faithful to the gospel (cf. 3:6) because their hope was fixed on the Lord Jesus Christ. Thus Paul uses the objective genitive phrase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our Lord Jesus Christ”) with the verbal idea contained in the noun ἐλπίδος: their hope was in Jesus, whom they believed would soon return from heaven to bring about their deliverance (cf. 1:10; 2 Thes. 1:3–10). Therefore, from Paul’s perspective it was their firmly fixed hope in Jesus Christ that gave them the strength to persevere in their new Christian beliefs and behavior in spite of considerable adversity from their non-Christian fellow citizens.
The concluding words of v. 3, ἔμπροσθεν τοῦ θεοῦ καὶ πατρὸς ἡμῶν (“before our God and Father”), may go either with the preceding words “the hope of our Lord Jesus Christ” or with the participle “remembering” at the beginning of the verse. Bruce (12f.) argues in his comment on 1:3 that “before our God and Father” is too far removed from the participle to be taken with it and therefore takes it with “work of faith,” “labor of love,” and “steadfastness of hope.” But when he comments on 3:9, where “before our God” occurs in a context concerning prayer, he refers back to 1:3 and implies that the phrase relates in 1:3 to the participle “remembering” (68). This seems the better choice because, if the phrase is taken with μνημονεύοντες, it becomes clear that Paul’s “remembering” of the Thessalonians “before our God and Father” refers specifically to his prayers of thanksgiving for them. Thus v. 3 provides part of the grounds for his thanksgiving to God concerning the Thessalonians.
Barn. Letter of Barnabas
Pol. Polycarp, To the Philippian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74–76.
 
아래 NIV의 해석은 흥미롭다. 믿음의 의해 만들어진 역사, 사랑에 의해 촉진된 너의 수고, 소망에 의해 고무된 너의 인내라고 말한다. 
- 3 We remember before our God and Fatherg your work produced by faith,h your labor prompted by love,i and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j in our Lord Jesus Christ.
g See Php 4:20
h Gal 5:6; 2 Th 1:11; Jas 2:14–26
i 1 Th 3:6; 2 Th 1:3; See 1 Co 13:13
j Ro 8:25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1), 살전 1:3.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는 주체는 바로 본서의 공동발신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이다. 본문의 기억하다라는 ‘므네모뉴온테스’는 1인칭 복수 현재분사로 이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소식을 듣고 이를 마음에 두고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오래지 않은 기간동안 데살로니가에 머물렀음에도 그들의 소식으로 인해서 너무나 감사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728x90
Paul, aSilvanus, and Timothy,
To the church of the bThessalonians in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cGrace to you and peace.
a Acts 15:22; 2 Cor. 1:19; 2 Thess. 1:1; 1 Pet. 5:12
b See Acts 17:1
c Rom.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1:1.
 
데살로니가전서 1:1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일반적으로 당시 서신은 인사말, 본문, 결론의 구조를 가진다. 
인사말도 세가지의 기본적인 요소로 구성되는데 첫번째 발신자의 이름 두번째 수신자와 세번째 형식적 인사말이다. 
 
바울이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동역자로 함께 소개하고 있는 이유
If in fact Paul is the real author of 1 Thessalonians, why has he included the names of his fellow workers Silvanus and Timothy in the salutation? Two answers may be given. In the first place, Silvanus and Timothy shared in the missionary work at Thessalonica, and therefore as Paul’s colleagues they had a stake in the development of the church there. Their inclusion as co-senders of the letter thus strengthens the authority of the document by implying unanimity among Paul and his coworkers regarding the situation of the Thessalonians. Doty (Letters, 30) has suggested a second reason. In Hellenistic letters the carrier who was to deliver the letter was often mentioned in order to link him with the writer and thereby “guarantee that what he had to say in interpreting the letter was authorized by the writer.” Since Paul used various colleagues in this way, including Timothy, this may help explain the inclusion of Silvanus and Timothy in the prescript if one or both of them was to deliver the letter (see 3:1–5 on the use of Timothy as an emissary and substitute for Paul’s apostolic parousia or presenc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8.
 
1:1 Opening. Paul makes no mention of his apostolic status, perhaps because there are no false teachers challenging it within the Thessalonian church. Silvanus and Timothy were coworkers with Paul during his second missionary journey. Silvanus, or Silas, was a Judean Christian (Acts 15:22) who joined Paul after he separated from Barnabas (Acts 15:39–40). Timothy, of Lystra in south Galatia, was a son of a Jewish mother and Greek father and became partners with Paul when Paul passed through his hometown early on his second journey (see Acts 16:1–4; Introduction to 1 Timothy). Timothy had just returned from a visit to the Thessalonian church (1 Thess. 3:6), and his report is Paul’s major source of information as he writes. While Silas and Timothy are included as co-senders, Paul was clearly the main author (see 2:18; 3:5; 5:27). in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Believers enjoy a mysterious union with both the Father and the Son and hence are supremely secure and safe from spiritual harm. Grace … and peace. See note on Rom. 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5.
 
특별히 살전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바울의 사도의 지위에 대해서 도전하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서신서에서는 바울의 사도성이나 지위, 책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첨언된 반면에 데살로니가서의 경우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이는 그만큼 데살로니가 교인들과의 관계가 안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이 처음 쓴 서신이기에 그만큼 도전도 적었고 이에 대한 준비도 적었을 것이다. 
In most of his letters Paul begins by identifying himself as an apostle (Rom. 1:1; 1 Cor. 1:1; 2 Cor. 1:1; Gal. 1:1) or as the slave or prisoner of Christ (Phil. 1:1; Phm. 1). The absence of such a self-identification in 1 Thessalonians (and 2 Thessalonians) is therefore noticeable but can perhaps be explained in terms of the situation. In the case of Romans, 1 and 2 Corinthians, and Galatians, Paul’s status and authority were to some degree in question. In the case of Philippians and Philemon the self-description was intended to evoke respect and possibly sympathy from the recipients. Nothing in 1 Thessalonians indicates that Paul’s authority or status was in doubt among his readers, and Paul’s personal situation was certainly not as precarious at the time of writing as it was when Philippians and Philemon were written.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8.
 
- 실루아노 : 실라는 바나바와 헤어진 뒤 바울에게 합류한 유대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실루아노(고후 17:1-9)가 라틴식 이름이라면 실라는 그리스식 이름이다. 행 15:22절에는 실라와 유다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로 소개되고 있다. 실라와 유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안디옥 교회에 대한 사도들의 결정을 담은 서신을 전달하도록 임명된 인물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요한 마가가 2차 선교여행에서 동행할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려 헤어지고 난뒤에 실라가 바울의 선교팀에 동참하게 된다. 바울은 실라가 앞서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은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선교활동을 위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원을 확실히 하기 모교회와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행 16:37에서 바울은 실라와 자신을 로마 사람으로 묘사한다. 
Acts tells us several other things about Silas that may help explain his role with Paul. After the Jerusalem conference recorded in Acts 15, Silas and a man named Barsabbas, both “leading men among the brothers” at Jerusalem (v. 22), were sent with a letter to the Gentile converts in Antioch, Syria, and Cilicia specifying certain moral and ritual purity practices that the Gentile Christians were to adhere to (vv. 22–34). According to 15:36–41, when Paul and Barnabas fell out over whether John Mark should accompany them on a second missionary journey, Paul took Silas with him. While we are unable to confirm these details from Paul’s own letters, it is not beyond the realm of possibility that Paul took Silvanus along precisely because he was a representative of the mother church in Jerusalem. By doing so he perhaps hoped to ensure the support of Jerusalem for his missionary activity and to emphasize the unity of his work with the mother church.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8–69.
 
사도행전 15:36–41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사도행전 15:22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 디모데 :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초기에 그의 고향을 지나갈 때 동역자가 되었다. 디모데는 남부 루스드라 출신으로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특히 디모데는 갈라디아서와 에베소서를 제외하고 바울 서신의 공동 저자로 이름하고 있다.(고전 1:1; 빌 1:1; 골 1:1, 살전 1:1; 살후 1:1; 몬 1) 뿐만 아니라 디모데전후서의 수신자이다. 
- The name Τιμόθεος occurs in all the letters of the Pauline corpus except Galatians and Ephesians. In six letters Timothy is named as Paul’s co-writer (1 Cor. 1:1; Phil. 1:1; Col. 1:1; 1 Thes. 1:1; 2 Thes. 1:1; Phm. 1). 1 Cor. 4:17 and 16:10; Phil. 2:19–23; and 1 Thes. 3:1–6 make it clear that Timothy served as Paul’s special assistant and emissary to the churches when Paul was unable to be presen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69.
 
 
사도행전 16:1–3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디모데는 유일하게 바울이 직접 할례를 행한 인물로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믿음을 이어받아 바울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 영적 아들이 되었다. 
디모데후서 1:5
5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했다가 방금 되돌아왔고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전해준 인물이었다. 
 
“Silas” (the name consistently used in Acts) is a variant of the longer “Silvanus” (the name used in the rest of the NT, including the Greek text here).3 This Silvanus likely was the same person as the Silas mentioned in Acts who was a trusted leader of the church in Jerusalem (Acts 15:22, 27). He, along with Judas (also called Barsabbas), carried a letter to the Gentile church in Antioch from the Jerusalem church. Both men also were prophets, and they ministered to the church at Antioch (15:32, 34).4 Paul later chose the same man as his companion on the second missionary journey (Acts 15:40). The need to select a missionary companion other than Barnabas resulted from the disagreement between Paul and Barnabas over John Mark. The choice of Silas to fill this role probably was motivated both by his gifts (Acts 15:32) and by the esteem in which he was held by the Jerusalem church. His participation in the Gentile mission might well have given the mission credibility in Jewish circles, where Paul was considered theologically suspect. The narrative of the mission to Greece presents Silas as an equal to Paul but Paul as the main spokesman of the team (Acts 16:19, 25, 29; 17:4, 10, 14–15; 18:5). In addition to these references in Acts, Paul named Silvanus in 1 Thess 1:1; 2 Thess 1:1; and 2 Cor 1:19 as a coworker in the mission in Greece.5
Timothy is a prominent character both in Acts and in the Pauline corpus. He was a resident of Lystra and a member of the church there of whom the believers “spoke well.” As the son of a Jewish-Christian mother and a Greek father (probably a non-Christian), he had not been circumcised (Acts 16:1–3). After being recruited and circumcised by Paul, Timothy remained an associate of the apostle during his evangelization of Greece (Acts 17:14–15; 18:5) and his ministry in Ephesus (Acts 19:22; 20:4). He is named in six Pauline letters as a coworker (1 Corinthians; Philippians; Colossians; 1 Thessalonians; 2 Thessalonians; Philemon). Several times he served as a special emissary from the apostle (1 Cor 4:17; 16:10; Phil 2:19; 1 Thess 3:2, 6).6 In the several letters where he is mentioned, Timothy is accorded the respect of a faithful fellow worker in the gospel and at the same time lauded as a beloved son in the faith to Paul (Rom 16:21; 1 Cor 4:17; Phil 1:1; 2:19–23). He also is the named recipient of two letters.7
3 Silvanus (Σιλουανὸς) may be the Latinized form of the Greek name Silas (Σιλᾶς). Considering that the first mention of the man places him in Jerusalem as a representative of the Jewish Christian church, both names may well have been derived from a Semitic original. See BAGD, s.v. “Σιλουανὸς” and “Σιλᾶς.”
4 V. 34 contains a variant reading explaining that Silas decided to stay in Antioch. The variant is a scribal addition inserted to explain Silas’s presence in Antioch later in the narrative (15:40). See B.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New York: UBS, 1971), 439.
5 Also see B. N. Kaye, “Acts’ Portrait of Silas,” NovT 21 (1980): 13–26.
6 See R. W. Funk, “The Apostolic Parousia: Form and Significance,” in Christian History and Interpretation: Studies Presented to John Knox, ed. W. R. Farmer et 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249–68, for a discussion of the tasks and authority that characterized such apostolic emissaries.
7 See T. D. Lea and H. P. Griffin, Jr., 1, 2 Timothy, Titus (Nashville: Broadman, 1993), 19–53, for a general introduction to matters related to the authorship and the recipient(s) of 1, 2 Timothy.
 D. Michael Martin, 1, 2 Thessalonians, vol. 3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48–49.
 
바울은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라 그 도시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교회를 향해 썼다. 교회(에클레시아)는 어떤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함께 모인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는 표현은 데살로니가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원래 이 단어는 총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행 19:32, 39)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무리를 뜻하는 의미로 전용되었다. 이 말의 동의어인 회당(시나고게)는 유대인의 모임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The letter is addressed to the church (ekklēsia). Ekklēsia was not a distinctively Christian word. It means “assembly” and was used of a variety of assemblies in the first-century world—social, political, or religious. Acts 19:32, 39, for instance, identifies as an ekklēsia the gathering of citizens in Ephesus to protest the work of Paul and the church. Ekklēsia is also a synonym for “synagogue” (synagōgē) and was occasionally used of Jewish assemblies in the Septuagint. The early Christian assemblies could have described themselves as ekklēsiai to distinguish their Christian assemblies from the Jewish synagōgai. It seems more likely, however, that ekklēsia was chosen as a word that was both understandable to the Gentile population and at the same time general enough so as not to prejudice the uninformed hearer regarding the character of the assembly.8 In other words, it was not so much separation from the synagogue as access to the Gentile world that made the term ekklēsia useful as a self-designation. Considering the degree of anti-Semitism in the first century Greco-Roman world, it would have been much easier for an inquirer to attend an ekklēsia than a synagōgē.
8 For a more detailed discussion see K. L. Schmidt, TDNT, s.v. “kaleō … ekklēsia.”
 D. Michael Martin, 1, 2 Thessalonians, vol. 3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49–50.
 
 
데살로니가의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의 교회 라 불리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는‘ 교회 라고 불린다. 이 것은 바울 서신에서는 드문 표현이다. 바울 서 신에 서 “하나님 안에 있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 자랑함( 롬 2 : 17 : 5 : 1 1 ) 이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짐 ( 엡 3 : 9 : 골 3 : 3) 이란 용례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또는 ‘ 주 안에서”는 바울이 사용하는 특징적인 표현이 다. 특히 이 말은 “연합”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또는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이 다. 만일 이 러한 의미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라는 구절의 의미라면, ‘하나님 아버지 . . . ( 안에 있는) "도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할것이다. 이 것은 바울 서신 의 특징적인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베스트(Best, 62) 는 전치사 ‘ 안에"(낭/1 - 엔) 를 분명히 도구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여기 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은 기독교 공동체” 라고 해석했다(WBC 62)
 
은혜와 평강
Paul wishes his readers grace and peace, as he does in all his letters. the context does not narrow the meaning of these words, which should therefore be taken in their widest sense. There is a considerable overlap of meaning between them. Grace here means, not physical gracefulness and not a specific favor, but God’s willingness to look upon Christians as his people, and to give them good gifts, such as forgiveness. In secular Greek peace meant the cessation or absence of war, just as it usually does in modern English. Paul, however, uses the term to mean a right and harmonious relationship among men or between men and God, a total well—being which God himself gives. TEV FrCL GeCL NEB, like older translations, retain the traditional nouns, grace and peace.
TEV Today’s English Version
FrCL French common language translation
GeCL German common language translation
NEB New English Bible
 Paul Ellingworth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6), 3.
 
은혜(카리스) :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백성, 자녀로 여기시며 용서와 같은 선물을 주시려는 마음
평강(에이레네, 샬롬) : 전쟁의 중단 또는 부재 하지만 바울은 사람 사이 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 즉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완전한 웰빙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당시 ‘카이레인’이라는 표현이 헬라식의 편지의 서두에 인사말로 쓰였는데 이는 지금으로는 '친애하는(Dear)’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카리스’라는 신학적 표현으로 바꾸었다. 이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신학적인,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낸 것이다. 
In a play on words that produces a uniquely Pauline and distinctively Christian construction, the Greek salutation (chairein) “be glad” or “greeting” (which was stylized at the beginning of Hellenistic letters and had as little content in the first century as “Dear …” has for writers today) was replaced by (charis) “grace.” The Jewish greeting (shalom) “peace” is added in Greek (eirēnē). The combined effect turns a perfunctory “hello” into a theologically meaningful salutation. “Grace” would remind the reader of the goodness of a God who gives blessings even to those who are undeserving and particularly of the preeminent work of undeserved benevolence—the giving of his Son.12 “Peace” reflects the Hebrew wish for wellness and wholeness and ties the grace of the Christ to the foundation of the God of the Jews, the one true God.13
12 See H. Conzelmann, “χαίρω,” TDNT (which contains also a discussion of the Heb. equivalents of charis by W. Zimmerli); C. L. Mitton, “Grace,” IDB, and Holladay, “Grace in the Old Testament.”
13 See W. Foerster, “Εἰρήνη,” TDNT. Included in this article is a brief treatment of shalom by G. von Rad.
 D. Michael Martin, 1, 2 Thessalonians, vol. 3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51–52.
728x90
데살로니가전서 서론
 
데살로니가 : 로만 마케도니아의 수도, 현재 그리스의 데살로니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의 수도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고 분화한 동서 방향의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 자연 항구에 위치해 있었다. 
 
1. 저자와 제목
본문 1장 1절에서 밝히는 것처럼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이다.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 발신자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한 선교팀임을 소개함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러 오지 않고 디모데를 보낸것에 대한 실망을 상쇄하기 위함일 것이다. 
 
2. 저작 연대
대부분의 학자들은 데살로니가 전서가 바울이 2차 선교여행기간 중(행 18:1-18) 고린도에 18개월 머무는 동안 기록한 것으로 본다. 행 18:12절에 언급된 갈리오라는 총덕은 실제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델파이시에 보낸 서신의 내용과 일치한다. 당시 갈리오가 51-52년경에 총독으로 재위한 것으로 보인다. 
 
3. 주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주제는 예수님의 재림이다. 재림은 이 책에서 장마다 언급된다(1:10, 2:19~20, 3:13, 4:13~18, 5:1~11, 23~24) 예수님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하여 산 자들과 함께 꿀어 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다 (4:15~17). 불신자들은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노에서 구출되어 진노 대신 구원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1:10, 5:2~4, 9~10). 성도(‘거룩한 자들’)로서 재림에 참여하도록 예정된 이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며 (3:11~4:8, 5:23)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시는 이들의 삶 속에서 거룩함이 생겨나게 히실 것이다 (5:24).
 
4. 목적, 계기, 배경
사도행전 17장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론했고 많은 무리의 경건한 헬라인과 이방인들이 믿고 따랐다. 하지만 유대인들중 바울을 시기하는 이들이 바울을 공격하였고 가이사에게 반역을 한다는 명분으로 구금하였다가 풀어주었다. 이후 베뢰아의 유대인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바울을 잡으려 무리를 보냈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는 그곳에 머물게 하고 아덴으로 이동하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죽은 자들이 재림에 참여하지 못할 것으로 걱정하여 소망없는 슬픔에 빠졌다(4:13) 이에 바울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재림때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점을 재확인 시켜주었다.(4:13-5:11) 뿐만 아니라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지 않고 더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부양해 줄 것을 기대했는데 이에 대해서 성실하게 자기일을 다할 것을 충고한다.(4:10-12; 5:14; 살후 3:6-15)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의 진정성을 강조했고(1:5; 2:1-12)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상적인 것임을 설명했다.(3:3-4) 또한 최근에 회심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의 성적인 거룩함(4:3-8)을 강조했다. 
 
5. 핵심 주제
1) 하나님의 진노는 복음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임한다 (2:16, 5:3).
2)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다 (4:14, 5:10).
3)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진노가 아닌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1: 10, 5:4, 9).
4) 죽음을 겪는 그리스도인도 재림에 온전히 참여할 것이다 (4:14~17, 5:10).
5) 복음에 반응하는 이들은 역사 이전에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하나님께 부르심 받았으며 이 땅에 사는 내내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심 받는다(1: 4, 2:12, 4:7, 5:9, 24).
6) 그리스도인은 전반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3 : 13, 4:3~8, 5:23).
7) 그리스도인은 일해야 할 의무를 회피해선 된다 (4:9~12, 5:14).
8) 복음의 신뢰성은 복음 전파자들의 진실성을 통해 확인된다(1: 5, 2:1~12).
9) 특별히 고난 가운데서의 기쁨은그리스도인의 한 특징이다(1: 6, 5:16).
10) 그리스도인은 예언된 새 언약의 실재를 경험한다 (4:8~9).
11)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이다(1: 2~3, 5:8).
 
6. 문예적 특징
이 서신은 일반적인 바울의 서신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이 편지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감정, 바울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 기독교의 교리와 실천 등을 다룬다. 
이 편지의 뚜렷한 문예적 특정들은 다음과 같다. 강력한 변증적 자전적 요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쁨 가득한 감사의 표현, 펀지의 수신자들에 대한 반복적인 직접적 호칭, 일부 도덕적 권면마저도 재림 교리와 관련될 만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 각 장이 그리도의 재림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되는 점이다. 
- ESV 스터디 바이블 내용 정리
 
CITY OF THESSALONICA
There are four unique features of the city of Thessalonica that are important for understanding Paul’s letters to this place:
1. A Strategic Location. Thessalonica enjoys the best natural harbor in the Aegean Sea. The city was located at a juncture of the Via Egnatia (a major east-west Roman highway) and a road north to the Danube. These two geographic features caused Thessalonica to become the most populous (100,000 people) and important (provincial capital) city in Macedonia.
2. A Favored Status. As a reward for siding with the victorious Octavian in the Roman civil wars, Thessalonica was granted the designation “free city.” This favored status resulted in more autonomy over local matters, the right to mint its own coins, tax concessions, and freedom from military occupation.
3. A Unique Political Structure. As a free city, Thessalonica was allowed to keep its traditional city institutions. The lowest level involved the “citizen assembly” (“crowd” in Acts 17:5), and the highest level involved the city council, made up of unique officers called “politarchs” (“city officials” in Acts 17:6, 8).
4. A Religiously Pluralistic Setting. Archaeological and inscriptional evidence indicates the presence of various Greco-Roman deities, such as Dionysus, Asclepius, Aphrodite, Demeter, and Zeus. The Egyptian gods Isis and Serapis were also popular, as was the imperial cult with its worship of the Roman Empire. The city also housed a large Jewish synagogue consisting of “a large number of God-fearing Greeks and quite a few prominent women” (Acts 17:4). Most of the Thessalonian church had participated in these various cults before they “turned to God from idols” (1 Thess 1:9).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48.
 
데살로니가 시에 대한 4가지 특징
1) 전략적 위치 : 에게해 연안의 자연 항구로 동서로는 에그나티아 가도(로마의 동서 주요 도로)를 북쪽으로는 다뉴브강에 이르는 위치로 당시 10만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한 마케도냐의 주요 도시였다. 
2) 우호적인 지위 : 로마 시민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 편에 선 대가로 자유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우호적인 지위는 지역 문제에 대한 많은 자치권을 보장해주었는데 자체 주화를 주조할 권리, 세금 혜택 및 군대 주둔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왔다.
3) 독특한 정치 구조 : 자유도시로서 데살로니가는 전통적인 도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가장 낮은 수준인 시민 모임(행 17:5의 군중)과 가장 높은 수준인 정치가(행 17:6, 8의 시 관리들)로 불리는 독특한 관료들로 이루어져있다. 
4)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환경 : 고고학 및 비문 증거는 디오니소스, 아스클레피오스, 아프로디테, 데메테르, 제우스와 같은 다양한 그리스-로마 신들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집트 신들인 아이시스와 세라피스도 인기가 있었고 로마 제국을 숭배하는 제국 숭배도 인기가 있었다. 그 도시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많은 수의 헬라인과 소수의 저명한 여인들’(행 17:4)로 구성된 유대 회당이 있었다. 대부분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살전 1:9)’전에 이러한 다양한 우상에 참여했었다. 
 
 
As a result of the support it lent to the Second Triumvirate in the civil war after Julius Caesar’s murder, Thessalonica was made a free city in 42 BC by Marcus Antonius (Mark Antony). This had several important consequences, as Jewett (Thessalonian Correspondence, 123) observes. First, it meant that the city was given a degree of local autonomy, as well as the right to mint both its own and imperial coins (see Larsen, “Roman Greece,” 449). Second, the city was promised freedom from military occupation and granted certain tax concessions. Third, it meant that the city did not become a Roman colony. This had two important effects: (1) Ius Italicum, which would have replaced local legal institutions, was not imposed, and (2) Thessalonica did not have to absorb a large settlement of demobilized Roman soldiers as happened at Philippi, Cassandra, and elsewhere. This naturally left the local ruling elite in control of the city with its traditional institutions intac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3.
 
데살로니가(Θεσσαλονίκη, 테살로니케). 현대의 테살로니키 또는 살로니카. 헬레니즘 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점유되는 몇 안 되는 그리스 도시 중 하나. 사도행전 17:1-13, 27:2; 빌 4:16; 딤후 4:10에 언급됨.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그곳에 기반한 초대 교회를 위해 기록되었다.
서론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중해의 핵심 도시로 기능했다.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Cassander)는 BC 315년 무렵에 데 살로니가를 세워서 아내인 테살로니케("테살리아의 승리")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명명했다. 이 도시는 고대 테르메의 자리 또는 그 근처에 건설되었으며, 이 지역에 있던 약 25개의 다른 마을을 통합했다. 이는 그것이 초기부터 엄청난 규모였음을 보여 준다(Strabo, Geography. 7.7, 21; Papagiannopoulos, History, 14).
로마의 통치하에서(BC 167년–AD 395년), 데살로니가는 주요 무역 경로를 따라 있는 광대한 항구와 우세한 위치를 가진,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기능했다. 사도행전 17:1-9에 따르면, 바울은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에, 그의 동역자인 디모데 및 실라와 함께 빌립보를 통해 이르는 경로로 데살로니가를 방문했다(대략 AD 50년). 이러한 선교 활동의 결과로, 데살로니가는 영향력 있는 주교가 있는 중요한 교회 대도시로 발전했다. 이 도시는 초기 교회 공의회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비잔틴 제국 내에서 강력한 재정적, 정치적 독립체로 남아 있었다.
위치
도시의 남쪽 가장자리는 자연의 항구인 테르마이코스만에 자리 잡고 있었고, 북쪽으로 호리아테스 산맥을 향해 뻗어나가면서 가파르게 상승했다. 항구를 통해 에게 해와 연결된 데살로니가의 지리적 위치는 그 도시를 때때로 더 넓은 지중해를 괴롭히는 악천후로부터 보호했다. 항해가 가능한 악시오스 강과 할리아크몬 강의 하구도 데살로니가 주변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마케도니아 통치자들과 이후의 로마 지도자들은 그 전략적 위치 때문에 이 도시를 가치 있게 여겼다.
 Andrew R. Talbert, “데살로니가,”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지리적 배경
데살로니가는 에게 해(Aegean Sea)의 페르메스 만(灣)에 있던 항구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 동쪽에는 빌립보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동쪽에는 비잔티움이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에서 빌립보, 데살로니가를 거쳐 아폴로니아(Apollonia)와 뒤라큠(Dyrrhacium)이라는 두 도시까지 이어진 도로가 있었습니다. ‘비아 에그나시아(Via Egnatia)’라고 하는 이 도로는 로마의 중요한 군사 도로이며, 데살로니가는 바로 이 도로상에 있었습니다. 뒤라큠과 아폴로니아에서 바다를 건너면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부른디지움(Brundisium)이라는 도시에 이릅니다. 부른디지움은 ‘비아 압피아(Via Appia)’라는 고속도로를 통해 로마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는 중요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와 이 두 고속도로를 통해 로마까지 이르는 중요한 군사 도로이자 무역로에 있던 도시입니다.
 김세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두란노, 2002), 11.
 
 
 
 
 
종교적 배경
그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에는 소위 신비 종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신비 종교가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디오니소스 컬트(Dionysus-cult)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비루스 컬트(Cabirus-cult)라는 것입니다. 이 두 종교가 특히 아주 성행했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 컬트는 남자의 성기를 상징으로 삼고, 성적 탐닉을 통해 디오니소스 신을 예배하고 그 신의 힘을 얻는 생식(生殖) 종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성적으로 심하게 문란했는데, 특히 바알을 숭배하던 종교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어서, 성적으로 지나치게 문란한 문화가 그 지역에 꽃피게 되었습니다.
카비루스 컬트는 카비루스라는 신이 무참히 살해되자 그 동생들이 카비루스를 왕으로 떠받들면서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신비 종교였습니다. 그 동생들이 데살로니가의 큰 산 밑에 카비루스를 묻었는데, 언젠가 카비루스가 부활해서 데살로니가로 돌아온다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교가 카비루스 컬트였습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시가 위험에 처하면 부활하여 돌아온 카비루스 신이 데살로니가 시와 그 시민들을 구원한다는 신화를 중심으로 한 신비 종교였습니다.
실제 시민들의 삶에는 이 두 종교가 거의 혼합 종교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며 술을 많이 마시고 파티를 자주 하는 종교 생활이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시민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이와 같은 것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김세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두란노, 2002), 12–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