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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We ask you, brothers, mto respect those who labor among you and nare over you in the Lord and admonish you, 13 and to esteem them very highly in love because of their work. oBe at peace among yourselves.
m 1 Cor. 16:18; Phil. 2:29
n 1 Cor. 16:16; Heb. 13:17
o See Mark 9:5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5:12–13.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5:12–13.
 
12-22절까지 바울은 종말의식을 가진 성도들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할지를 권면하고 있다. 먼저 12-13절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요청한다. 
 
12절) 다시금 바울은 ‘아델포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구하고 있다. ‘우리가 구한다’라는 표현은 ‘에로토멘’으로 원형 ‘에로타오’는 ‘묻다, 요청하다, 요구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현재 직설법 1인칭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위압적이거나 강제적인 명령이 아니라 부드러운 요청조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요청하는 두가지 내용은 ‘너희가 알고’,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알라’, 본문은 세 개의 현재분사가 등위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이들이 바로 교회의 지도자들, 리더들인데 이들은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동일한 부류의 사람인 것이다. 수고하는 사람, 다스리는 사람, 권하는 사람이 각각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의 리더, 지도자들로 이들이 마땅히 감당해야하는 역할들이었다. 
Rather, as in v. 12, Paul calls on the community to recognize as their leaders precisely those people who functioned in such a way as to toil for them, to protect and care for them physically and materially, and to direct them ethically.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3.
 
아마도 이 리더들은 바울이 직접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이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불과 3주에서 2-3달 정도 데살로니가에 머물며 그들과 함께 했기에 이후 바울이 핍박을 피해 떠난 이후에 교회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세워진 리더들이었을 것이다. 신생 교회였는데 당시 시한부 종말론으로 인한 문제가 교회안에 있었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리더들이 역할을 했지만, 이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에 바울이 지금 성도들을 향해서 이런 요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12-13절을 통해서 말하는 리더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수고하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코피온타스’의 원형 ‘코피아오’는 원래 ‘피곤한 노동을 하거나 극도로 지치게 노동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실제로 리더들은 지시하고 뒷짐을 지고 있지 않았고 지치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두번째는 다스리는 것이다. ‘프로이스타메누스’의 원형 ‘프로이스테미’는 ‘앞에’라는 뜻의 전치사 ‘프로’와 ‘서다, 세우다’라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로 ‘앞장서다, 진두에 서다’라는 뜻을 가진다. 
세번째는 권하는 것이다. ‘누쎄툰타스’의 원형 ‘누쎄테오’는 ‘마음, 정신’을 의미하는 ‘누스’와 ‘놓다, 두다’를 의미하는 ‘티테미’의 합성어로 ‘마음속에 놓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에서 훈계하다(행 20:31)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지도자, 리더는 수고하고 다스리며(솔선수범하고) 권하는 자들이다. 
 
‘너희가 알고’, 알다라는 표현은 ‘오이다’인데 이는 ‘알다, 깨닫다’라는 의미로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가지는 것,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ESV는 이를 acknowledge로, NIV는 respect로 번역했다. 단순히 리더들이 얼마나 수고하며 섬기는 지를 지적으로 알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실제로 그들의 수고를 눈으로 보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고 이를 알기에 그들을 존경하라는 의미이다. 실제로 '부모의 수고를 알아주라’라고 말할 때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지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고 존경하라는 의미이다. 
 
οἶδα (oida), 동사. 알다, 깨닫다. 미래 능동태. εἰδήσει; 부정과거 능동태. εἴδον; 완료 능동태. οἶδα. 히브리어 등가: ידע (107). 아람어 등가: אֲנָה (1).
동사 용법
1. 알다 (인지) — 어떤 사실이나 특별한 정보의 조각에 대해 인식하거나 깨닫다; 무엇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다. 의미상 반의어: 알지 않다. 관련 주제: 경험; 지식의 나무; 지식; 영지주의.
살전 1:4 εἰδότες, ἀδελφοὶ ἠγαπημένοι ὑπὸ θεοῦ, τὴν ἐκλογὴν
살전 2:1 Αὐτοὶ γὰρ οἴδατε,
살전 4:2 οἴδατε γὰρ
약 1:19 Ἴστε, ἀδελφοί μου ἀγαπητοί. ἔστω δὲ πᾶς
유 5 εἰδότας ὑμᾶς ἅπαξ πάντα,
2. 알다 (경험적으로) — 알다 또는 무엇에 대해 지식을 가지다; 보통 관찰이나 감각을 통해 획득한 것으로서. 관련 주제: 경험; 지식의 나무; 지식; 영지주의.
막 14:71|| Οὐκ οἶδα τὸν ἄνθρωπον τοῦτον ὃν λέγετε.
요 8:19 Οὔτε ἐμὲ οἴδατε οὔτε τὸν πατέρα μου·
요 8:55 ἐγὼ δὲ οἶδα αὐτόν·
고후 12:2 οἶδα ἄνθρωπον ἐν Χριστῷ πρὸ ἐτῶν δεκατεσσάρων—
살전 4:5 τὰ μὴ εἰδότα τὸν θεόν,
3. 기억하다 — 주의 깊게 생각하거나 고려하다. 의미상 반의어: 잊다 (억제). 관련 주제: 마음; 기억하다.
고전 1:16 λοιπὸν οὐκ οἶδα εἴ τινα ἄλλον ἐβάπτισα.
4. 알다 (알아 차림) — ~에 대한 성격이나 특징을 알다. 관련 주제: 경험; 지식의 나무; 지식; 영지주의.
막 10:38|| Οὐκ οἴδατε τί αἰτεῖσθε·
요 4:10 Εἰ ᾔδεις τὴν δωρεὰν τοῦ θεοῦ καὶ
요 13:7 Ὃ ἐγὼ ποιῶ σὺ οὐκ οἶδας ἄρτι,
요 16:18 οὐκ οἴδαμεν τί λαλεῖ.
요 20:9 οὐδέπω γὰρ ᾔδεισαν τὴν γραφὴν ὅτι δεῖ
5. 어떻게 할지 알다 — 어떤 일을 하거나 수행할 방법을 알다.
마 27:65 ὑπάγετε ἀσφαλίσασθε ὡς οἴδατε.
살전 4:4 εἰδέναι ἕκαστον ὑμῶν τὸ ἑαυτοῦ σκεῦος κτᾶσθαι
딤전 3:5 προστῆναι οὐκ οἶδεν, πῶς
6. 인정하다 — 권리대로 (어떤 사람)을 받아들임.
막 2:10|| ἵνα δὲ εἰδῆτε ὅτι ἐξουσίαν ἔχει ὁ
살전 5:12 Ἐρωτῶμεν δὲ ὑμᾶς, ἀδελφοί, εἰδέναι τοὺς κοπιῶντας
7. (언어)를 이해하다 — 언어의 의미가 통하다.
고전 14:16 οὐκ οἶδεν·
유 10 ὅσα μὲν οὐκ οἴδασιν
동사. 동사
미래 능동태. 미래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부정과거 능동태
완료 능동태. 완료 능동태
||  || 눅 22:60 || 마 26:74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마 20:22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  || 눅 5:24 || 마 9:6
현재 의미를 포함하여 나오는 현 원형의 모든 용례.
 Rick Brannan, ed., Lexham 헬라어 성경 어휘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we ask. See note on 4:1. acknowledge. Not merely recognize them as leaders but honor and respect them (v. 13). those who work hard … who care for … who admonish. Describes not three groups but one—congregational leaders, likely elders (Acts 14:23), who have at least three distinct functions. The verb used to describe the second function (Greek proistēmi) conveys both the notion of authority (“to rule”) and concern (“to care for”). This linking of exercising authority and providing care is a characteristic feature of leadership in the NT: the one who leads is to be like the one who serves (Luke 22:26).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NT New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Biblical Theology Study Bibl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2157.
 
Though Paul does not explicitly call for obedience to those who toil at Thessalonica, the request that certain people be recognized in the community probably implies such obedience. Paul seems to have in mind the need for the community to acknowledge as leaders certain of its members because they carry out important functions in its life. On the basis of our knowledge of Stephanas and his role as patron of the church at Corinth, it may be assumed that the leaders at Thessalonica were those who had sufficient status and wealth to act as patrons to the community. Such a non-egalitarian form of leadership should not surprise us as this is precisely the way leadership in the Diaspora synagogues emerged and it reflects the hierarchical character of Greco-Roman society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4.
 
13절)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는 실제로 교회안의 리더들이 성도들 가운데서 수고하는 것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리더들을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 러더들이 교회안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수고이기 때문이다. 
‘사랑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본문은 ‘카이’라는 등위 접속사로 연결되는데 이는 12절의 ‘구하노니’에 연결되는 표현이다. 바울은 형제들이 ‘알고’, ‘귀히 여기’기를 원했다.  ‘여기며’라고 번역된 ‘헤게이스다이’의 원형 ‘헤게오마이
는 ‘지도하다, 다스리다, ~라고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고 대단하게’라는 의미를 지닌 ‘휘페렉페릿수’라는 부사와 더불어 사용되어서 ‘할 수 있는 만큼 최고의 대우로 존중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최고의 존중을 보이라는 권면이다. 이렇게 존중하는데 이를 ‘사랑안에서, 엔 아가페’ 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너희끼리 화목하라’라고 말한다. ‘너희끼리’로 번역된 ‘엔 헤아우토이스’는 ‘너희 자신들 안에서, 너희들 가운데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인가? 앞선 권면의 내용과 연장선 상에서 본다면 성도들과 리더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리더들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어린 성도들을 향해서 그들의 수고를 알고 귀히 여길 것을 충고하면서 서로 화목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화목하라’는 표현은 ‘에이레뉴에테’로 ‘에이레뉴오’의 현재 능동태 명령법 표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하고 힘써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 교회가 화목하지 못하고 나뉘고 분쟁한다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전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는 한 성령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며 화목을 위하여,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다. 
 
The verb ἡγεῖσθαι creates problems for the interpreter. The context seems to require the sense “to esteem,” but this meaning is nowhere else attested for the word (see Rigaux, 579f.). Another possibility is to take it with ἐν ἀγάπῃ, resulting in the sense “to consider in love” or simply “to love” (see Findlay, 122f.). The usual arguments offered against this possibility are that “in love” is too distant in the grammatical structure from the infinitive to be taken with it and that the infinitive does not require a qualifying prepositional phrase. A third view is that the adverb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gives the infinitive the meaning “esteem” because “to consider exceedingly highly” is paraphrastic for this sense. Although there are no other known instances of ὑπερεκπερισσοῦ being used with ἡγεῖσθαι in this way, other adverbial modifiers are used in a similar way (see Hdt. 2.115 and Thucydides, Hist. 2.89). For this reason I prefer this third explanation, but whichever is chosen the meaning remains more or less the same.
In the phrase διὰ τὸ ἔργον αὐτῶν (“on account of their work”) Paul explains why the Thessalonians should respect those described in the three participles of v. 12: their work is done for the sake of the community and its members. Therefore Paul urges that they be treated with the deference due to them.
Hdt. Herodotus
Hist.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Thucydides)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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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Bless those who persecute you; bless and do not curse them. 15 f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weep with those who weep. 16 gLive in harmony with one another. hDo not be haughty, but associate with the lowly.8iNever be wise in your own sight. 17 jRepay no one evil for evil, but kgive thought to do what is honorable in the sight of all. 18 If possible, so far as it depends on you, llive peaceably with all. 19 Beloved, mnever avenge yourselves, but leave it9to the wrath of God, for it is written, n“Vengeance is mine, I will repay, says the Lord.” 20 To the contrary, o“if your enemy is hungry, feed him; if he is thirsty, give him something to drink; for by so doing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n his head.” 21 Do not be overcome by evil, but overcome evil with good. 
eSee Matt. 5:44; 1 Pet. 3:9
f1 Cor. 12:26; [Job 30:25; Heb. 13:3]
gch. 15:5; 2 Cor. 13:11; Phil. 2:2; 4:2; 1 Pet. 3:8
hver. 3; Ps. 131:1; Jer. 45:5
8Or give yourselves to humble tasks
ich. 11:25; Prov. 3:7
jProv. 20:22; Matt. 5:39; [ch. 14:19]
k2 Cor. 8:21; [ch. 14:16]
lSee Mark 9:50
mProv. 20:22; Matt. 5:39; [ch. 14:19]
9Greek give place
nHeb. 10:30; Cited from Deut. 32:35; [Ps. 94:1; 1 Thess. 4:6]
oCited from Prov. 25:21, 22; [Ex. 23:4, 5; 2 Kgs. 6:22; Luke 6:2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12:14–21.

앞서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책임에 대해서 다루고 나서 바울은 외부인들과의 관계로 관심을 돌린다. 먼저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자들이다. 

14-16절) 본문에서는 3가지의 긍정적 권고와 3가지의 부정적 권고를 하고 있다. 

긍정적 권고부정적 권고
14절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저주하지 말라
15절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라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절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하지 말라
바울은 본문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한다.(마 5:44, 눅 6:27-28) 이처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이 하는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눅 23:34, 행 7:60) 본문이 말하는 축복은 먼저는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고 딤전 2:2의 내용처럼 도고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대적자, 원수들을 사랑할때 이는 그들이 회심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벧전 2:12, 개정)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5절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본문은 14절과 관계가 있는데 당시의 우는 것의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박해때문이었다. 진정한 교제, 코이노니아는 이처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 뿐만 아니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벧전 2:12, 개정)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절) 본문의 harmony는 헬라어로 ‘프로네오’로 이는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빌 2:2, 개정)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하지만 이 하나됨이 기계적으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태도에 있어서 연합으로의 부름인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안에서 모두를 향해서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들의 사회적, 인종족, 경제적 상태에 관계없이 말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은사를 받았고 그 어떤 은사도 상대방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고 지혜롭게 생각하기를 배웠을 때 이 변화된 마음은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 하나됨을 이루어 낼 것이다. 
  • Harmonyliterally means “think the same thing” and occurs also in Philippians 2:2, “being like-minded, having the same love, being one in spirit and purpose.” This is certainly not demanding that everyone think the same things, but it is calling for a unity of heart and attitude. Also, Paul is thinking more relationally than doctrinally, although it would certainly apply to the “sound doctrine” of the pastorals (1 Tim 1:10; 6:3; 2 Tim 1:13; 4:3; Tit 1:9; 2:1). As Moo rightly asserts (1996:782), this is not so much “think the same thing amongone another” as “think the same thing towardone another.” In other words, we should maintain the same attitude toward all, whatever their social, racial or economic status (see below). We all have different gifts in the church (vv. 3–8), but no gift should gain over any other. When our minds have been renewed (12:2) and we have learned to think soberly (12:3), that transformed mindset will produce true harmony with one another.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6.
자만심이야말로 교회의 하나됨과 낮은 자들을 돌보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다. 

17-18절)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세상의 일반 법칙이다. 그런데 성경은 악을 악으로가 아니라 선을 도모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나아가서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화목할 것을 명령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선한 관계를 도모하고 유지하는 것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모든 사람들과 화목한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본문은 ‘할 수 있거든’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나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른 이들이 화평이 아니라 분쟁과 다툼을 원해도 우리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 It is natural that, in light of the encouragement to do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everybody,Paul would then extol us to live at peace with everyone(v. 18). Here again (cf. vv. 14, 17) we have a reflection of Jesus’ teaching, especially Mark 9:50, “be at peace with each other,” but also Matthew 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so Dunn 1988b; Fitzmyer 1993b; Moo 1996). The necessity of establishing peaceful relations with others is a frequent biblical theme (Ps 34:14; Rom 14:19; 2 Cor 13:11; 1 Thess 5:13; Heb 12:14). However, Paul realizes that we do not always control the situation and so prefaces his command with, if it is possible, as far as it depends on you.All we can do is pursue peace; if the other does not wish peace but prefers conflict, there is nothing we can do. This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8.

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친히 원수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이 보복을 멈추고 그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보복의 문제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속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이는 도피성 제도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도피성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가 피의 보수자, 친족의 보복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내에 설치한 도피처이다. 접근의 용이성을 위해서 전체 이스라엘에 6개를 설치하면서 하룻길안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신(19:3) 구약에서는 이처럼 보복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이 모든 보복을 하나님께 맡길 것을 명령받고 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고난을 위해서 보복의 정의를 행하고 계시다. 
  • Verse 19 sums up what has already been said about not cursing others (v. 14) or retaliating (v. 17): Do not take revenge, my friends(literally “beloved”). As stated earlier, the desire to get even is normal when we are wronged. In fact, Cranfield (1979:646) says Paul inserts “beloved” because “he was enjoining something very hard even for Christians.” The problem of vengeance was so acute in the ancient world that Israel established cities of refuge (Ex 21:12–14; Num 35:6–34; Deut 4:41–43; Josh 20:1–9) as places of asylum for those who had accidentally killed someone, to protect them from retaliation. The Torah stipulated that a murderer was to be executed by an “avenger of blood” (Num 35:19–21; Deut 19:12), a family member of the victim chosen to execute the guilty party. In accidental death, the perpetrator needed to be protected from this “avenger.” In fact, such cities were evenly distributed in Israel for easy access (not more than a day’s journey from anywhere, Deut 19:3). But things are different now because of the advent of Christ. Instead of vengeance, we must leave room for God’s wrath*(literally, “give place to wrath,” certainly God’s in this context). The wrath of God has been discussed in 1:18; 2:5, 8; 3:5; 5:9; and 9:22; in most passages it refers to the last judgment, but here it is the ongoing justice of God bringing retribution for the suffering of his people. Once again, the already-not yet tension of the book is operative. God will choose the appropriate time for wrathto take place, whether now, later or at the final judgment.
  • *12:19Schreiner (1998:673) gives the options for the interpretation of wrath.It could be (1) the believer’s own wrath, but that is negated here and in Eph 4:26–27; (2) the wrath of our enemies, but that is unlikely in this context of divine vengeance; (3) the wrath of the state, but that is the subject of the next section rather than this one; (4) the wrath of God, which is by far the most likely here.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8–339.
원수 갚는 것을 맡기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시록이나 시편의 기자가 했던 것과 같은 저주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악을 그냥 두시지 않는 분이시기에 그분이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이 일을 해결해주실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보복의 기도, 저주의 기도는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인간의 성정으로 그런 아픔과 고통을 마땅히 토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 상처와 아픔마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하나님께서 정의를 행하실 것을 믿고 의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용서받를 자격이 없는 자를 용서하고 우리로 하여금 비통한 삶으로부터 우리를 나오게 할 수 있다. 
  • We must free ourselves from bitterness and find the strength to forgive those who do not deserve forgiveness. Only God has the right to avenge wrongs, and only he can do it perfectly. This is one of the most difficult quandaries a believer faces. The person deserves judgment, but to “repay … evil for evil” (v. 17) will render us no better than the one who so deeply hurt us. The answer is right here—leave the vengeance to God. The means by which we can do this is called the imprecatory prayer or prayer for vengeance such as is exemplified in Revelation 6:10, “How long, Sovereign Lord … until you … avenge our blood” (see also the imprecatory psalms—Ps 12; 35; 52; 57–59; 69; 70; 83; 109; 137; 140). These psalms are not the product of an ethics that has long since been shown sub-Christian. Actually, they put into practice the injunction here by asking God to do what he has promised here—avenge and repay the hurt. However, it is important to realize that this prayer is not an end in itself but a means to a larger end, namely, leaving the hurt and the justice with God. This then will allow us to forgive those who do not deserve it and to free ourselves from a life of bitterness.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39.

20절)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이를 통해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본문의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놓는다는 말은 우리의 친절과 선행을 통해서 그들의 죄의 심각성이 더욱 깊어지고 더 큰 심판이 임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들의 선행을 통해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먼저 원하고 있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준다는 것은 바로 선한 행동의 아주 구체적인 표현이다. 본문의 숯불은 크게 잠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부끄러움과 선한 행실로 인해 야기되는 뉘우침이라는 해석과 박해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는 견해로 나뉜다. 
  • If your enemy is hungry, feed him; if he is thirsty, give him something to drink.As Cranfield notes (1979:648), food and drink stand for good works of every kind. Rather than returning evil for evil, we are to show love for our enemies concretely via acts of kindness. When we do this, it will heap burning coals on his head.Scholars are divided on whether the coals of firehere and in Proverbs refer to shame and remorse caused by the good deeds (Augustine; Godet 1969; Cranfield 1979; Käsemann 1980; Moo 1996) or to the judgment of God coming down on the oppressors as a result (Chrysostom; Stendahl 1962:343–55; Piper 1979:115–19; Schreiner 1998). In actuality, this is not an either-or. Both options fit the biblical imagery as well as the context. Fire is a frequent image of judgment in Scripture (e.g., Ps 140:10; Is 1:31; Heb 10:27), and good deeds as causing “burning pangs of shame” (so Fitzmyer 1993b; Moo 1996) among the oppressors fits well with the immediate context. The problem is that the one (shame) is favored by context, the other (judgment) by the imagery. Critics are doubtful regarding the judgment interpretation because it could lead people to do good for a negative purpose (to bring judgment on their enemies), while others doubt the shame interpretation as not fitting the “fire” metaphor. Actually, the two work well together (another example of double meaning) and may well supply the missing aspect in 1 Peter 2:12 (see on vv. 9, 14 above), in which oppressors view the good deeds and “glorify God on the day he visits us.” Paul here would be telling us that the good deeds cause the oppressors to feel shame for their slander and bring them under conviction (Rom 12), leading many to be converted (1 Pet 2); but those who refuse to respond with repentance will then come under divine judgment (Rom 12). Augustine says it well: “The evil man who is overcome by good is set free, not from an exterior, foreign evil but from an interior, personal one, by which he is more grievously and ruinously laid waste than he would be by the inhumanity of any enemy from without” (Bray 1998:323).
  •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40.

21절) 위의 모든 내용을 하나로 정리하면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명령한다. 우리의 노력이나 능력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가운데 이 일을 이루실때에만 이것이 가능하다. 주님이 이미 보여주신 그 본을 따라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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