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And ithe tongue is a fire, a world of unrighteousness. The tongue is set among our members, jstaining the whole body, setting on fire the entire course of life,1 and set on fire by hell.2 7 For every kind of beast and bird, of reptile and sea creature, can be tamed and has been tamed by mankind, 8 but no human being can tame the tongue. It is a restless evil, kfull of deadly poison. 9 With it we bless our Lord and Father, and with it we curse people lwho are made in the likeness of God. 10 From the same mouth come blessing and cursing. My brothers,3 these things ought not to be so. 11 Does a spring pour forth from the same opening both fresh and salt water? 12 Can a fig tree, my brothers, bear olives, or a grapevine produce figs? Neither can a salt pond yield fresh water.
i Ps. 120:2–4; Prov. 16:27
j Matt. 15:18
1 Or wheel of birth
2 Greek Gehenna
k Ps. 140:3; Eccles. 10:11; Rom. 3:13
l See Gen. 1:26
3 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3:6–12.
이제 6절 이하의 본문은 혀를 불로 표현하면서 혀의 파괴적인 위력(혀의 파괴력과 이중성)을 설명해나간다.
6절) 혀는 불이고 불의의 세계이다. 혀는 우리의 신체의 부분중에 온 몸을 더럽게하고 삶의 모든 과정(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고 혀도 지옥불에 의해서 불탈 것이다.
(약 3:6, 개정)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6, 새번역) 『그런데 혀는 불이요, 혀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지체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며, ②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결국에는 혀도 ③게헨나의 불에 타버립니다. / ②또는 '출생의 바퀴' 또는 '자연의 순환' ③지옥 불』
(약 3:6, 쉬운) 『혀도 곧 불입니다. 혀는 우리 몸 가운데 악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불씨가 됩니다. 이 불씨는 지옥 불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의 불의의 세계라는 표현은 ‘호 코스모스 테스 아디키아스’라는 표현으로 불의한 세상이라는 뜻이다. 눅 16:9에 ‘맘모나 테스 아디키아스’와 같은 구조로 이는 불의의 재물이라는 의미로 본문의 세상은 하나님께 반역한, 타락하고 죄로 물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의미는 혀가 우리의 지체 안에서 불의한 세계가 된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혀 안에 타락한 세상의 죄가 들어 있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몸의 작은 부분이 모든 불의의 세계를 내포한다”라는 것이다. 예수 역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강조하시고, 그 입이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 나오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설명하셨다(마 15:11, 18–19). 몸의 어떤 지체도 혀만큼 경건한 삶에 파국을 가져오는 것은 또 없을 것이다.
이어서 야고보는 혀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세계의 분사를 통해 혀의 파괴력을 설명한다. 첫번째로 혀는 온 몸을 더럽히고 두번째로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며 세번째로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난다라고 말한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힌다라는 말은 사람의 전 존재에 영적인 오염을 퍼뜨린다는 것이다.(코로나 바이러스) 두번째 삶의 수레바퀴라는 표현은 ‘자연의 주기’라는 표현으로 당시 오르케우스교에서 사용된 종교적인 표현으로 구원을 위해 끝없이 반복되는 환생의 주기를 표현한 말이었는데 야고보 당시 시대에 이미 대중화된 용어로 인간의 삶의 전 과정, 삶의 흥망성쇠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는 혀의 파괴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파괴력의 근원이 어디로부터인가에 대해서 야고보는 지옥으로 부터 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문의 지옥은 헬라어 ‘게헨나’라는 표현인데 예수가 최후의 심판의 장소를 묘사하기 위해서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셨다. 이는 히브리어 ‘힌놈의 골짜기’의 음역으로 구약 성경과 중간기 시기에 마지막 심판의 장소라는 의미로 악명 높게 사용되었다. 이는 지옥의 통치자인 사탄이 혀에 거대한 파괴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혀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는 창이다.
(마 15:18, 개정)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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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은 혀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세 개의 분사로 종결된다. 혀가 온 몸을 더럽힌다(스필루사)는 말은 혀가 ‘참된 경건’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과 같다. ‘참된 경건’이란 자신을 지켜 세속(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아스필론, aspilon)이기 때문이다. 혀로 짓는 죄는 그 사람 전체에 영적 오염을 퍼뜨린다. 이어 나오는 두 개의 분사를 통해 야고보는 불의 이미지로 돌아가 혀가 초래하는 대재난의 범위와 근원을 각각 설명한다. 자연의 주기(the cycle of nature, 개역개정에는 ‘생의 수레바퀴’로 표현함-역자 주)를 불사른다는 말이 혀가 지닌 잠재적인 파괴성의 크기를 말하려는 의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는 오르페우스교(Orphic religion)에서 사용된 표현으로서, 구원을 위해 끝없이 반복되는 환생(reincarnation)의 주기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본래는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전문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야고보의 시대에는 이미 ‘대중화’(popularized) 되어 인간의 삶의 과정, 삶의 ‘흥망성쇠’(up and down)를 강조하는 표현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6 그렇다면 요점은 혀가 지닌 맹렬한 파괴력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인간의 전 존재(전 생애)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파괴력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지옥으로부터 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그는 지옥을 헬라어 게헨나(gehenna)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다시 한 번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친숙함을 보여준다. 예수는 최후의 심판의 장소를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하신다. 이 용어는 히브리어 ‘힌놈의 골짜기’의 음역인데, 구약성경과 중간기 시기에 얻은 악명 높은 명성으로 마지막 심판의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지옥의 통치자인 사탄 자신의 힘이 혀에 거대한 파괴력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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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혀의 파괴력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지만, 잠언에 열거된 말의 죄, 즉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는 말’(잠 10:8; 12:18; 29:20 참조), 거짓말(잠 12:19), 거만한 자랑(잠 18:12), 험담(잠 10:18) 등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근거 없는 잘못된 소문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때로는 돌이킬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그러한 소문은 어떤 산불 보다 진화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5절 참조). 우리가 혹독한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은 ‘막대기와 돌은 내 뼈를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말은 결코 나를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고 들었던 어린 시절 어른들의 힐책이 사실은 정반대의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막대기나 돌로 입은 상처는 치유되지만, 말로 입은 상처는 결코 치유되지 않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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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Dibelius, 196–198의 참고문헌과 논의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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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87–189.
7-8절) 여기서는 혀의 특성으로 길들일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파괴력을 지옥으로부터 제공 받았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면 동물을 네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창세기의 분류와 유사하다.(창 1:26)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인간에게 맡기신 역할이 바로 이 동물들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들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다(완료시제)의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이는 창조 때에 인간에게 부여된 통치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동물을 다스릴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혀를 길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혀를 다스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혀가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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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은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 140:3). 혀에서 나온 독은 이웃을 ‘망하게 하고’(잠 11:9), 죄 지은 사람 또한 멸망으로 이끈다(잠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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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1.
9절) 우리는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럴 수 없는, 그래서는 안되는 일을 우리는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창조시의 영광이 우리에게 있다. 문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타락이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파괴하거나 제거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이 남아 있고 이를 얼마나 더 발현시키느냐가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혀를 가지고 저주를 더욱 하면 이 형상이 점점 쪼그라들게 될 것이고 우리의 혀를 가지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면 점점 이 형상이 밝아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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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위험성에 대한 야고보의 경고는 혀의 ‘이중성’(doubleness)을 지적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른다. 이중성이라는 주제는 야고보가 반복해서 지적하는 문제인데, 차별하는 태도(2:4 참조)와 행함이 없는 믿음의 태도(2:14–26)에서 나타나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모순되고 불안정한 동요가 혀의 경우에도 표현된다. 번연(Bunyan)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등장인물 가운데 ‘밖에서는 성인이요, 집에서는 악마’였던 ‘수다쟁이’(Talkative)처럼,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말의 모순된 특성으로 말미암아 초점이 없고 안정이 없는 믿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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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이 찬양의 행위를 가장 높고, 순수하고, 고귀한 언어 형태로 인용한다. 반면에 가장 낮고 더럽고 비천한 언어 형태는 저주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축복의 정반대편에 있는(신 30:19) 저주의 말이 커다란 힘을 가진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저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욕을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오히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는’ 것이었다(눅 6:28; 참조 롬 12:14). 저주하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쁜 일인가 하면 우리가 저주를 선언한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7절에 창세기 1:26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랍비들 역시 동일한 이유로 저주를 금하였다. “내 이웃이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Bereshith Rabba 24, 창 5:1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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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1–192.
10-12절) 야고보는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올 수 없음을 몇가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한다. 첫번째는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으며 두번째는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말한다.
본문에서 야고보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다.(마 15:11, 18-19; 12:36-37)
(마 15:11, 개정)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8-19, 개정)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 12:36-37, 개정)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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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의 유언 6:5에 따르면, “선한 마음은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 욕설과 공경, 평화와 다툼, 위선과 진리, 가난과 부 등의 양극단의 말을 내지 않고, 모든 사람에 대해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의 성향을 가진다.” 그러므로 말의 이중성은 마땅하지 않다. 하나님의 영으로 변화 받은 그리스도인은 일관되고 순결한 언어로 마음의 온전함과 순결을 나타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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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193.
우리 인간들은 마땅하지 않은 이 일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샘이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없고 무화과 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낼 수 없고 짠 샘이 단 물을 낼 수 없음에도 인간은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동일한 입으로 사람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야고보는 이러한 이중성을 극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새로와짐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하고 이러한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통해서 선하고 아름다운 행동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선 내용과 연결한다면 아름다운 혀의 사용,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행함으로 너의 온전한 믿음을 보일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 행함으로. 그 행함의 한 갈래가 바로 말에 실수가 없음을 통해서, 혀의 파괴력을 이해하고 그 이중성을 극복하는 것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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