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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Their words pleased Hamor and Hamor’s son Shechem. 19 And the young man did not delay to do the thing, because he delighted in Jacob’s daughter. Now rhe was the most honored of all his father’s house. 20 So Hamor and his son Shechem scame to the gate of their city and spoke to the men of their city, saying, 21 “These men are at peace with us; let them dwell in the land and ttrade in it, for behold, the land is large enough for them. Let us take their daughters as wives, and let us give them our daughters. 22 Only on this condition will the men agree to dwell with us to become one people—when every male among us is circumcised as they are circumcised. 23 Will not their livestock, their property and all their beasts be ours? Only let us agree with them, and they will dwell with us.” 24 And all who went out of the gate of his city listened to Hamor and his son Shechem, and every male was circumcised, all who uwent out of the gate of his city.

25 On the third day, when they were sore, two of the sons of Jacob, vSimeon and Levi, wDinah’s brothers, took their swords and came against the city while it felt secure and killed all the males. 26 They killed Hamor and his son Shechem with the sword and took Dinah out of Shechem’s house and went away. 27 The sons of Jacob came upon the slain and plundered the city, because they had defiled their sister. 28 They took their flocks and their herds, their donkeys, and whatever was in the city and in the field. 29 All their wealth, all their little ones and their wives, all that was in the houses, they captured and plundered.

30 Then Jacob said to Simeon and Levi, x“You have brought trouble on me yby making me stink to the inhabitants of the land, zthe Canaanites and the Perizzites. aMy numbers are few, and if they gather themselves against me and attack me, I shall be destroyed, both I and my household.” 31 But they said, “Should he treat our sister like a prostitute?”

r [1 Chr. 4:9]

s See Ruth 4:1

t ver. 10; ch. 42:34

u [ch. 23:10]

v See ch. 49:5–7

w ch. 29:33, 34; 30:21

x Josh. 7:25

y Ex. 5:21; 1 Sam. 13:4; 27:12; 2 Sam. 10:6; 16:21; 1 Chr. 19:6 (Heb.)

z ch. 13:7; 15:20, 21

a 1 Chr. 16:19; Ps. 105: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4:18–31.

 

18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20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4:18–31.

 

 

18-24절) 하몰과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좋게 여겼다. 이에 야곱의 딸, 디나를 사랑하여 얻기 위하여 세겜은 지체하지 않고 행동을 시작했다. 세겜은 하몰의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였다. 부자가 성읍 문에 이르러 그 성읍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와 화목하다.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여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의 딸도 그들에게 주자. 하지만 한가지 조건이 있는데 우리 모든 남자가 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며 한 민족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짐승이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였다. 그러자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세겜의 말을 듣고 할례를 받았다. 

 

하몰과 세겜은 완전히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을 뿐아니라 이로 인해서 경제적인 이득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사람들을 설득했다. 당시 성문은 마을의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중요한 논의와 결정을 내리는 장소였다. 그런데 하몰과 세겜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야곱 집안을 들이는 진짜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세겜이 디나를 사랑해서 결혼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이 교류를 통해서 얻을 이익만을 강조하였다. 하몰과 세겜은 마음의 존귀한 자들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다. 

 

25-29절) 할례후 제3일에 그들이 아직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성읍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였다. 칼로 하몰과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 또한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성읍을 노략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었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과 들에 있는 모든 재물을 빼앗고 그들의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 잡고 집안의 물건을 모두 노략했다. 

 

당시에 할례는 지금 처럼 정교한 수술이 아니었을 것이다. 며칠동안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기 위해서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고 3일째 되는 날이 가장 고통에 시달리는 날이었을 수도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고통에 시달리는 세겜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켰다. 

세겜의 집에 붙잡혀 있다가 오빠들에게 구출된 디나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자신을 겁탈하고 강제로 결혼을 하려는 세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까?  자신을 겁탈한, 또한 자신의 남편될 세겜을 오빠들이 죽인 것에 대해서 그녀는 고마워했을까 아니면 원망을 했을까?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자의든 타의든 일단 여자가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경험이 있으면 이 사실을 숨기고 결혼할 수 없었으며 발각될 경우 여자와 친정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신 22:20-21) 그래서 디나는 이제 평생을 결혼하지 못하고 아버지나 오빠들 집에서 독신으로 살아야 했다. 성폭행 당한 자신을 대신해 복수한 것에 대해서 고마워했을까 아니면 이제 평생 홀로 살아야하는 것에 대해서 오빠들을 원망했을까?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를 위해서, 또한 실추된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복수를 했다고 하지만 도리어 가족을 위험에 빠뜨렸고 과도한 보복을 진행한 것이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을 몰살시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다른 형제들이 세겜 사람들의 모든 소유물과 아내와 자식들을 약탈했다. 이 가정에서 과연 다른 아들들은 시므온과 레위의 계략을 알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그들과 한 민족이 되어 통혼하고 함께 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폐기되는 것인데 야곱도, 다른 형제들도 이를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계략을 알고도 침묵했다라면 모두 그 죄에 동참한 것이고, 모르고 침묵했다면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인 것이다. 13절은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과 세겜을 속였다라고 말하지만 25절에서 시므온과 레위만이 가서 칼을 휘둘렀고 나머지 형제들은 남자들이 죽은 후에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하는 것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세겜사람들은 야곱 집안의 재산이 그들의 것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반대가 된 것이다. 

결국 야곱은 이로 인해 시므온과 레위에게 장자권 주기를 거부하고 넷째 아들 유다와 요셉에게 장자권을 주었다.(49장) 형제들을 다스리는 것을 포함한 법적인 권한은 유다에게, 지파와 땅을 분배하는 것에서는 요셉에게 장자의 몫을 주었다. 

창세기 49:5–7 (NKRV)

5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6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레아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과 디나를 낳았다. 이 세겜 사람들을 학살한 주역으로 시므온과 레위가 나섰다. 다른 형제들보다 같은 배에서 난 남매로 디나의 사건을 더 고통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25–26  For other references in Genesis to the third day cf. 22:4; 31:22; 40:20; 42:18. The third day after the circumcision is the day on which the pain from the operation would be the most intense. The fever that would develop as a result of the operation would only make the condition of the recently circumcised more intolerable.11 The men of Shechem would be least able to retaliate. In fact, retaliation would be ruled out. Accordingly, the sons of Jacob bide their time, and strike with a passion when counter-resistance is expected to be minimal.

Interestingly, only two of Jacob’s sons are associated with involvement in the massacre—Simeon and Levi. What about the remaining ten, or even their four full brothers by Leah (Reuben, Judah, Issachar, and Zebulon)? Dinah is as much a sister to them, especially these last four, as she is to Simeon and Levi. Those who have subjected this chapter to historical analysis (and reconstruction) have concurred that the names Simeon and Levi have been inserted secondarily into the narrative, perhaps in order to supply an explanation for the condemnation of the tribes of Simeon and Levi in Gen. 49:5–7.12 Those who excise these names maintain that they thereby solve the problem of an otherwise unknown bellicose (and secular) tribe of Levi. An examination of the function of the later Levites regarding the tabernacle, however, shows that the Levites were responsible for guarding the tabernacle and its sancta, especially against encroachment.13 Such a presentation accords well with Levi’s (and Simeon’s) sacking of Shechem in Gen. 34. Also apropos is the reference to the Levite’s slaughtering of 3,000 of their own people involved in the golden calf debacle (Exod. 32:25–29).14

It may seem odd that two sons of Jacob were able to massacre every male (wayyahareḡû kol-zāḵār) of Shechem. Of course, the same issue arose in ch. 14. How could Abraham and 318 servants go up against the armies of four of the mightiest rulers of the day? Or Gideon’s 300 versus the Midianites? How is Samson able to kill 1,000 Philistines? In the case of Gen. 34, the only way for two brothers to face a numerically superior opponent is to engage in deceit. Before the enemy can be killed, it must be incapacitated and its ability to launch a counterattack wiped out.15

The death of two men (here, Hamor and Shechem) in which a woman is involved appears again with Tamar (Er and Onan, Gen. 38), Rizpah (Ishbosheth and Abner, 2 Sam. 3), Bathsheba (Uriah and Bathsheba’s child, 2 Sam. 11, 12), Tamar (Amnon and Absalom, 2 Sam. 13–19), Abishag (Adonijah and Joab, 1 K. 2).16 For Blenkinsopp,17 the abundance of such incidents is evidence of the pervasiveness of the motif of the woman who brings death in the literature of ancient Israel.

Only with the end of v. 26 does the reader discover that throughout this whole ordeal Dinah has been held in the house of Shechem. The chiastic arrangement of the two verbs yāṣāʾ and lāqaḥ in vv. 1–2 and 26 provides a fine conclusion to the opening of this chapter (vv. 1–2), and something of a closure to the incident as far as Dinah, Levi, Simeon are concerned. The narrative began with Dinah going out (wattēṣēʾ, v. 1), and subsequently being taken by Shechem (wayyiqqaḥ, v. 2). In v. 26 the brothers remove (wayyiqḥû) Dinah from Shechem’s house, and leave (wayyēṣēʾû).

11 F. C. Fensham, “Gen XXXIV and Mari,” JNWSL 4 (1975) 89.

12 See A. de Pury, “Genèse xxxvi et l’histoire,” RB 71 (1969) 5–49; S. Lehming, “Zur Überlieferungsgeschichte von Gen. 34,” ZAW 70 (1958) 228–50.

13 See J. Milgrom, Studies in Levitical Terminolog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70), esp. p. 48.

14 Note ʾîš ḥarbô in Gen. 34:25 and Exod. 32:27, a phrase to describe the actions of both the ancestor Levi and the tribe of Levi.

15 Gen. Rabbah 80:10 asserts that Jacob eventually came and fought with his sons: “Now our father, Jacob, had not wanted his sons to do this. But once they had done it, he said, ‘Now shall I leave my sons to fall into the hand of the nations of the world?’ What did he do? He took his sword and bow and stood at the gate of Shechem. He said, ‘If the nations of the world come to make war against them, I shall do battle against them.’ ”

16 See D. M. Gunn, “Traditional Composition in the ‘Succession Narrative,’ ” VT 26 (1976) 223.

17 J. Blenkinsopp, “Theme and motif in the succession history (2 Sam. xi 2ff) and the Yahwist corpus,” Volume du Congrès: Genève, 1965, VTSup 15 (Leiden: Brill, 1966), pp. 44–57.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68–370.

 

30-31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말했다. “너희가 나에게 화를 끼쳤다. 나로 하여금 이 땅 주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다. 나는 수가 적은데 그들이 나를 치고 나를 죽일텐데 그러면 나와 내집이 멸망할 것이다.” 그러자 시므온과 레위가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하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따졌다. 

 

지금 야곱의 분노는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학살한 것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해서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에서의 군대를 두려워했던 야곱이 이제는 주변 사람들,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의 군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시므온과 레위의 악행을 통해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시고 이루어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악행, 거짓말하고 사람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것을 미워하시는 것은 명백하다. 물론 세겜의 죄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도시 전체가 그로 인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를 죄를 자신의 계획을 성취시키시는데 사용하신 것 뿐이다. 만약 그들이 이런 야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다른 방법을 강구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실뿐만 아니라 악을 인정하시는 분이 아니다. 단지 그 악을 이용하실 뿐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결코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시킬 수 없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의 행동에 대해서 책망하지만 필로같은 이는 그들의 행동을 칭찬한다. 신 25:6-15에서도 비느하스의 분노에 대해서 칭찬한다. 

31  Simeon and Levi have the last word. Jacob is unable to respond to their rhetorical question: Like a whore should he treat our sister? So revolted are they that Simeon and Levi cannot say “Should Shechem treat … ?” To repeat his name is cause for nausea. They simply say, “Should he21 … ?” Jacob’s silence is token acceptance of the legitimacy of their conduct, as portrayed by the narrator.

This chapter has six conversation scenes: (1) Shechem to Hamor (v. 4); (2) Hamor to the sons of Jacob (vv. 8–12); (3) the sons of Jacob to Hamor and Shechem (vv. 14–17); (4) Hamor and Shechem to their townsmen (vv. 21–23); (5) Jacob to Simeon and Levi (v. 30); (6) Simeon and Levi to Jacob (v. 31).22 The first and last of these six conversations is a son (or sons) speaking to a father. In neither case does the son(s) speak mildly. Shechem gives his father a command. Simeon and Levi give to their father what amounts to a scolding. They speak as coarsely to him as Joab did to sentimental and ineffectual David (2 Sam. 19:5–7). It is almost as if they say to Jacob in the light of his own words in the previous verse: “Father, damn the consequences.”23 Accordingly they are very careful in their last reference to Dinah to call her our sister rather than “your daughter.”

Throughout all of this violence and vendetta, not one word has been heard from Dinah! She is abused, avenged, spoken about, delivered, but she never talks. If in 30:21 she was denied an etymology for her name, in ch. 34 she is denied an opportunity to speak.

It is interesting that works from the Hellenistic and Roman periods praise the activity of Simeon and Levi. For example, Philo praises Simeon and Levi as “the hearers and pupils of sound sense” who overthrew the Shechemites, who were “still occupied in the pleasure-loving, passion-loving toil of the uncircumcised.”24 Philo also speaks of Simeon and Levi as “the champions who stand ready to repel such profane and impure ways of thinking.”25 Other sources such as the Testament of Levi, Jubilees, and Judith praise Simeon and Levi for their zeal and compare them to Phinehas (Num. 25:6–15).26 In all these cases Simeon’s and Levi’s behavior assumes paradigmatic significance when the issue is guarding Israel’s purity at all costs.27

21 That the verb yaʿaśeh, “should he treat,” has no explicitly stated subject opens up the possibility that the subject could be someone other than Shechem. Perhaps Jacob? Sternberg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p. 475) raises this possibility.

22 The interrelationship of the second, third, and fourth speeches is creatively handled by A. Berlin, Poetics and Interpretation of Biblical Narrative (Sheffield: Almond, 1983), pp. 76–78.

23 So Sternberg,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p. 474. For another reading of vv. 30 and 31 that places Jacob in a more favorable light and Simeon and Levi in a less attractive light, see Fewell and Gunn, JBL 110 (1991) 206–7.

24 Philo Migration of Abraham 224.

25 Philo On the Change of Names 200.

26 T. Levi 6:3; Jub. 30:18; Jdt. 9:4.

27 R. Pummer, “Genesis 34 in Jewish Writings of the Hellenistic and Roman Periods,” HTR 75 (1982) 177–88.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72–373.

 

아쉬운것은 실제로 이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인 디나의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의 삶이 완전히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이렇게 여성의 피해와 아픔에 대해서 둔감한 것은 성경이 남성의 시각에서 쓰였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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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Now fDinah the daughter of Leah, whom she had borne to Jacob, went out to see the women of the land. And when Shechem the son of gHamor the Hivite, the prince of the land, saw her, he seized her and lay with her and humiliated her. And his soul was drawn to Dinah the daughter of Jacob. He loved the young woman and spoke tenderly to her. So Shechem hspoke to his father Hamor, saying, “Get me this girl for my wife.”

Now Jacob heard that he had defiled his daughter Dinah. But his sons were with his livestock in the field, so Jacob held his peace until they came. And Hamor the father of Shechem went out to Jacob to speak with him. The sons of Jacob had come in from the field as soon as they heard of it, and the men were indignant and ivery angry, because he jhad done an outrageous thing in Israel by lying with Jacob’s daughter, kfor such a thing must not be done.

But Hamor spoke with them, saying, “The soul of my son Shechem longs for your1 daughter. Please give her to him to be his wife. Make marriages with us. Give your daughters to us, and take our daughters for yourselves. 10 You shall dwell with us, and lthe land shall be open to you. Dwell and mtrade in it, and nget property in it.” 11 Shechem also said to her father and to her brothers, o“Let me find favor in your eyes, and whatever you say to me I will give. 12 Ask me for as great a pbride-price2 and gift as you will, and I will give whatever you say to me. Only give me the young woman to be my wife.”

13 The sons of Jacob answered Shechem and his father Hamor deceitfully, because he had defiled their sister Dinah. 14 They said to them, “We cannot do this thing, to give our sister to one who is uncircumcised, for qthat would be a disgrace to us. 15 Only on this condition will we agree with you—that you will become as we are by every male among you being circumcised. 16 Then we will give our daughters to you, and we will take your daughters to ourselves, and we will dwell with you and become one people. 17 But if you will not listen to us and be circumcised, then we will take our daughter, and we will be gone.”

f ch. 30:21

g Acts 7:16

h [Judg. 14:2]

i ch. 49:7

j Josh. 7:15; Judg. 20:6

k ver. 31; ch. 20:9; 2 Sam. 13:12

1 The Hebrew for your is plural here

l ch. 13:9; 20:15

m ver. 21; ch. 42:34

n ch. 47:27

o See ch. 33:15

p Ex. 22:16, 17; 1 Sam. 18:25; [Deut. 22:29]

2 Or engagement present

q Josh. 5: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34:1–17.

 

34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2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6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8 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9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10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11 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12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

13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14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창 34:1–17.

 

 

1-4절) 야곱의 딸 디나(레아가 낳은)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가 히위 족속 중 그 땅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보고 그녀를 강간하여 욕보였다. 욕정으로 그녀를 강간했으나 이후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를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앞서 리브가가 자신의 아들 에서가 ‘그 땅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여서 근심하였었다. 

창세기 27:46 (NKRV)

46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아마도 디나는 지금 오빠들이 양을 치러 나간 사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근처를 보러 나갔다가 이 사고를 당한 것이다. 

2절에서 개역개정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라고 번역하지만 이는 ‘히위 족속 중 그 땅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맞다. 그 땅의 지도자, 추장은 세겜이 아니라 하몰이었고 아버지 하몰이 아들의 아내를 맞는 것을 위해서 아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세겜은 처음 욕정에 휩싸여 디나를 강간했지만 이후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디나를 위로하고 그녀를 아내로 맞기 위해서 노력한다. 

사무엘하 13:14–15 (NKRV)

14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고 다말보다 힘이 세므로 억지로 그와 동침하니라

15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사무엘하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등장한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연모하여 병든체 하다가 간호를 하러 온 다말을 강간한다. 하지만 이후 암논은 다말을 미워하게 되는데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히위족의 추장이었던 하몰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보고 강제로 꿀어다가 욕을 보였다. 저자는 2절에서 4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시간이 지나며 더욱더 강하게 드러난 세겜의 포악성을 고발한다: ‘보았다'… 끌어들였다' ... [강제로]잤다-강강했다… 욕되게 했다.’ 또한 처음 두 동사 ‘보았다' ... 취했다’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묘사한 단어들이기도 하다(6:2).

디나를 성폭행한 후 세캠은 그녀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3절).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그녀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했다'(4절). 그의 디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3개의 동사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3절): ‘연연했다 사랑했다… 위로했다’ 여자를 강간할 정도로 포악했던 세겜이(cf.2절) 어느덧 디나를 사랑하는 연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디나의 집안에 사과하거나 보상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좋아하는 철없는 망나니 였을뿐이다'. 훗날 다윗의 아들 암논도 이복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지만그 이후 암논이 다말에게 취한 태도는 세겜과 현저히 다르다.(엑스포지멘터리 600)

이 결혼의 이야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디나의 의견은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결혼의 요구를 받고 있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한 남자가 강간을 통해서 아내를 취하는 방법을 수용하고 있다.(신 22:28-29) 

 

5-7절) 야곱은 그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했다는 부끄러운 소식을 들었지만 자신의 아들들이 들에 있으므로 잠잠하였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말하러 왔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근심하고 노하였다.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을 행했기 때문이었다. 

 

한가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지금 세겜이 디나를 강간하고 집으로 돌려보낸것이 아니라 여전히 데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시간이었을까? 당연한 아버지의 반응이라면 먼저 분노하며 디나를 집으로 데여왔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무기력하다. 아들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디나의 아버지인 야곱과 만나려고 왔다. 하지만 본문속에서 야곱과 만나서 대화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의 대화는 하몰과 야곱의 아들들과의 대화로 이어진다.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의 근심과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 복수는 도를 넘어선 것이다. 

 

7절의 부끄러운 일은 ‘네발라’라는 단어로 어리석음, 부도덕, 수치스러운 행위를 의미한다. 이단어는 첫번째 심각한 성적인 범죄와 관련되어서 사용되었다.(창 34:17, 삿 19:23; 20:6, 10: 신 22:21; 삼하 13:12-13) 하지만 두번재 성적인 내용이 아닐 때 이는 사회의 중요한 관습을 어긴죄를 지은 것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간주되었다.(수 7:15, 삼상 25:25) 세번째 네발라는 욥 42:8에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말을 한 욥의 친구들에게 사용되었다. 

3. Other than the passages mentioned, where נָבֵל refers to mental deficiency, more often נבל and its cognates in the OT refer to one who acts foolishly in a moral or religious sense, breaking social orders or behaving treacherously towards God. Phillips (VT 25, 1975, 241) asserts that “נְבָלָה is a general expression for serious, disorderly and unruly action resulting in the breaking up of an existing relationship whether between tribes, within the family, in a business arrangement, in marriage or with God” (cf. Roth, 402–7; Gerleman, 153; G. von Rad, Genesis, 1961, 332). The action is commonly expressed in an idiomatic phrase נְבָלָה בְיִשְׂרָאֵל, sacrilege in Israel, which describes a person who “commits an act of crass disorder or unruliness” or acts “in an utterly disorderly or unruly fashion.”

Phillips has identified the use of נְבָלָה according to three categories. (a) נְבָלָה is applied to sexual acts. Shechem committed “a sacrilege in Israel” (an outrage NRSV) by raping Dinah (Gen 34:7). Promiscuity and loss of virginity are a “sacrilege in Israel” (disgraceful act NRSV, cf. Judg 19:23; 20:6, 10; Deut 22:21). Similarly Ammon’s sexual assault on his half sister Tamar is “sacrilege in Israel,” and his action makes him a נָבָל in Israel (2 Sam 13:12, 13). More generally, committing adultery with a neighbor’s wife is also “sacrilege in Israel” (Jer 29:23). (b) When נֱבָלָה is applied to nonsexual offences, it refers to disorderly and unruly action in breaking a custom. Achan violated the covenant of the Lord and committed “sacrilege in Israel” by taking from the banned spoil, which, according to customary law of the holy war, was the Lord’s property (Josh 7:15). By custom David was entitled to the payment of tribute for protecting Nabal’s properties. Nabal’s refusal to pay anything reflected his נְבָלָה (1 Sam 25:25). (c) נְבָלָה is applied to the spoken word especially about God. Job’s friends are guilty of נְבָלָה because they have not spoken about God correctly as Job has done (Job 42:8). Their disorderly views, נְבָלָה, have prevented any constructive theological discussion of the suffering of the righteous (Phillips, 240). In the coming righteous kingdom the corrupted leader of Israel (collective use), who is the fool, נָבָל, and the scoundrel will be put to shame and punished. For the fool speaks folly, נְבָלָה. His mind plots iniquity: to practice ungodliness, to utter error concerning the Lord, to starve the hungry, and to refuse drink to the thirsty. The scoundrel devises wicked devices to destroy the poor with lies, even when the plea of the needy is just (Isa 32:5–7; cf. 9:17 [16]). In Jer 29:23, נְבָלָה refers not only to the adultery of the false prophets Ahab and Zedekiah, but also to their lying words.

VT Vetus Testamentum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11–12.

 

a wanton sin. The narrator uses the word neḇālá to describe Shechem’s violation of Dinah, a word choice that shows the narrator’s evaluation of Shechem’s behavior. The noun appears thirteen times in the OT, eight of which involve sexual crimes (Gen. 34:7; Deut. 22:21; Judg. 19:23, 24; 20:6, 10; 2 Sam. 13:12; Jer. 29:23). This noun is used in other contexts to describe, for example, Achan’s breach of the ban on Jericho (Josh. 7:15), and Nabal’s behavior (1 Sam. 25:25). On one occasion it is something God may do (Job 42:8), or threaten to do, to Job’s “comforters” for their attempt to defend God. neḇālá is something a person “does” (ʿāśá; see Deut. 22:21; 2 Sam. 13:12; Jer. 29:23; etc.). The word covers any kind of “serious disorderly and unruly action resulting in the break- up of an existing relationship whether between tribes, within the family, in a business arrangement, in marriage or with God.”26 Shechem’s actions will produce only disharmony between Shechemites and Jacobites, for Shechem has done what ought not be done. His crime is a violation not so much of sacral law as of accepted ethic (“it is not done so in Israel”). Shechem has not only destroyed and dishonored the sanctity of a family, but he has frontally challenged a nation’s modus operandi in matters sexual. “Israel” as a nation does not exist in the time of Jacob, and thus the reference to “Israel” must be anachronistic—unless “Israel” is a reference to Jacob. Shechem’s offense is by extension an offense against Jacob.27

26 See A. Phillips, “Nebalah, VT 25 (1975) 237–41. The quote is from p. 241. Cf. also W. M. W. Roth, “NBL,” VT 10 (1960) 394–409; J. Jensen, “Does porneia mean Fornication? A Critique of Bruce Malina,” NT 20 (1978) 167–70. See Sternberg,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p. 452.

27 See Sternberg,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 p. 453.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57.

 

8-12절) 하몰은 ‘세겜이 디나를 사랑하여 원하니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해달라. 아울러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라고 하였다. 이어 세겜도 야곱과 그의 형제들에게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겠다. 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한다면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원한다고 해도 원하는대로 주겠다’라고 말한다. 

 

하몰은 아들을 위해서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을 설득하고 있다. 세겜과 디나와의 결혼 뿐만 아니라 이것을 시작으로 야곱의 가족들과 자신의 족속들과도 통혼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서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밭을 샀다. 이제 자유롭게 그 땅에 거하며 기업을 얻을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겜은 디나와 그녀의 가족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원하는 모든 혼수와 예물을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세겜은 먼저 야곱과 오빠들에게 사과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사과 한마디 없이 디나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사랑하게 되어 큰 혼수와 예물을 제공하겠다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돈이면 다된다라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하나님의 약속,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했다면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당시 야곱의 가족은 히위 족속에 비하면 그 규모가 아주 적은 가족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결혼을 통해서 이들이 하나가 된다면 히위족속에 흡수통합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13-17절) 이 제안을 듣고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을 속여서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중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될것이지만 너희가 할례를 받지 않으면 우리는 디나를 데리고 갈 것이다. 

 

세겜은 진심으로 디나를 아내로 맞이하기 원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을은 이 마음을 이용하여 그들을 속이고 있다. 창 17장에서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을 증거하는 증표로 도입되었다. 

창세기 17:9–14 (NKRV)

9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99세때에 그와 언약을 다시금 확증하시면서 언약의 표징으로 그의 가족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신다. 따라서 몸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자기의 조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히위 족속과 야곱의 가족들이 한 민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옳다. 하지만 올바른 주장 이면이 이들의 위험한 속임수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속임수에는 속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 있을 때 더 속게 되는데 남을 속이는데 선수였던 야곱의 아들들 답게 하몰과 세겜을 속이고 있다. 말하지만 사랑을 볼모로 이들을 협박하고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13  For a second time the word mirmá occurs in the Jacob cycle. It was used first by Isaac in telling Esau what Jacob did: “Your brother came fraudulently [bemirmá] and has taken away your blessing” (27:35). In 29:25 Jacob uses the related verb: “Why did you trick [rimmîṯānî] me?”

The choice of the verb replied (wayyaʿa) must be deliberate. The story began with Shechem violating (wayʿannehā) Dinah (v. 2). Both verbs contain the same radicals. Shechem violates Dinah (ʿāná II). The brothers now reply to Shechem (ʿāná I).

Jacob’s sons may be compared with Absalom. Both have had a sister (Dinah, Tamar) that has been violated. Both times (Gen. 34:2; 2 Sam. 13:14) the same verbs are used to describe the violation, but in reverse order (Gen. 34:2: šāḵaḇ-ʿāná; 2 Sam. 13:14: ʿāná-šāḵaḇ). The sons of Jacob resort to a stratagem, while Absalom takes two years to plan his vendetta.10 Jacob and David do not get involved. What separates the Dinah incident from the Tamar incident is that the latter uses the verb ḥāzaq, “force, overpower” (2 Sam. 13:11), and Tamar protests clearly to her half-brother (2 Sam. 13:12).

10 See H. Hagan, “Deception as Motif and Theme in 2 Sam. 9–20; 1 Kgs. 1–2,” Bib 60 (1979) 310–11.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8–5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362.

 

신 7:3은 이스라엘로 가나안의 사람들과 통혼하지 말것을 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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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And God said to Abraham, “As for Sarai your wife, you shall not call her name Sarai, but Sarah4 shall be her name. 16 I will bless her, and moreover, I will cgive5 you a son by her. I will bless her, and dshe shall become nations; kings of peoples shall come from her.” 17 Then Abraham efell on his face fand laughed and said to himself, “Shall a child be born to a man who is a hundred years old? Shall Sarah, who is ninety years old, bear a child?” 18 And Abraham said to God, “Oh that Ishmael might live before you!” 19 God said, “No, but gSarah your wife shall bear you a son, and you shall call his name hIsaac.6 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him as an everlasting covenant for his offspring after him. 20 As for Ishmael, I have heard you; behold, I have blessed him and will make him fruitful and imultiply him greatly. He jshall father twelve princes, and kI will make him into a great nation. 21 But lI will establish my covenant with Isaac, mwhom Sarah shall bear to you at this time next year.”

22 When he had finished talking with him, nGod went up from Abraham. 23 Then Abraham took Ishmael his son and all those born in his house or bought with his money, every male among the men of Abraham’s house, and he circumcised the flesh of their foreskins that very day, as God had said to him. 24 Abraham was ninety-nine years old when he was circumcised in the flesh of his foreskin. 25 And Ishmael his son was thirteen years old when he was circumcised in the flesh of his foreskin. 26 That very day Abraham and his son Ishmael were circumcised. 27 And all the men of his house, those born in the house and those bought with money from a foreigner, were circumcised with him.

4 Sarai and Sarah mean princess

c ch. 18:10

5 Hebrew have given

d ch. 35:11

e ver. 3

f ch. 21:6; Rom. 4:19; [John 8:56]

g ch. 18:10; 21:2; Gal. 4:23, 28

h ch. 21:3

6 Isaac means he laughs

i ch. 16:10

j See ch. 25:12–16

k ch. 21:13, 18

l ch. 26:2–5

m ch. 21:2

n ch. 35: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17:15–27.

 

 

15-16절)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을 이제 사라로 개명할 것을 명하신다. 사라의 이름은 ‘여주인, 열국의 어미’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복을 주어 아들을 낳게 해주시고 이를 통해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그녀로부터 민족의 여러 왕이 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사래의 원래 뜻은 ‘공주, 여왕’이란 의미이다. 이제 사라는 ‘여러 민족의 어미, 많은 왕들의 어미’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도 아브라함처럼 많은 민족과 왕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름이 바뀐 여인으로 기록된 사람은 사라가 유일하다. 또한 23:1에 그녀가 127살에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인의 죽음에 대해서 나이를 밝히는 것도 사라가 유일하다. 그녀는 독보적인 여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 이름이 바뀌면서 왕들을 후손으로 둘 것이라는 것 외에는 특별히 더해진 내용이 없는데 반해 사라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여러 민족과 왕들’이 사라의 몸을 통해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을 더하신다.(16절)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얻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나올 아들을 통해서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지금 그녀는 불임으로 수치스러운 인생을 살아왔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다가 큰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변화를 그녀의 삶에 시작하고 계신 것이다. 사라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통해서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이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평생의 수치를 한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대단한 사건이다. 또한 언약의 내용이 점점 더 구체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한계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때와 그 방법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 아브람과 사래의 모습은 참으로 아쉽다. 물론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원망을 할 수도 있다. 좀더 일찍 해주시지. 이처럼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때를 기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어려운 것이다. 

 

17-18절) 이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 그가 웃은 이유는 바로 자신과 아내의 늙음으로 인해서 출산이 불가능하다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생식적으로 출산이 불가능하기에 속으로 웃으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데 사라를 통홰서 아들을 주시겠다라는 말씀은 그에게 매우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살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어쩌면 지금 현재 이스마엘의 자라는 것을 보면서 그 삶에 만족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안정되고 익숙한 삶에 새 아이가 태어나면 지금이 안정감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을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없음으로 인해서 멈추지 않으시고 이삭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19-21절)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그의 웃음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하나님께서 이삭과 언약을 세울 것인데 이는 이삭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다.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시다)에게는 복을 주어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12두령을 낳고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지만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것은 사라를 통해서 태어날 이삭을 통해서임을 말씀하셨다. 

 

이삭은 ‘그가 웃는다’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이삭이 태어나는 것과 관련해서 웃임이라는 모티브가 여러 부분에서 등장한다. 17절에서는 아브라함이, 18:12-15에서는 사라가 믿지 못하고 웃었다. 또한 이삭을 낳고 나서 사라는 기뻐서 웃었다.(21:6) 또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라는 표현도 같은 단어이다.(21:9) 이는 히브리어로 ‘사하크’라는 단어로 옷음을 자아내다, 농담하다, 희롱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이 단어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 

צָחַק (ṣāḥaq), q. laugh; pi. play, joke, insult, indulge in revelry (#7464); nom. צְחֹק (ṣeḥōq), laughter, derision (#7465).

ANE There are cognates in Ugar. (ṣḥq and ẓḥq), Akk. (ṣâḫu), and Arab. (ḍaḥika), with the basic meaning laugh.

OT The term is used both positively and negatively.

1. Laughter can be associated with a positive change of fortune brought about by God for an individual. The aged Sarah reacted to the birth of Isaac by declaring “God has brought me laughter,” a laughter of joy that others would share with her (Gen 21:6; for the interpretation of v. 6b see Westermann, 333–34). There is a play on the name “Isaac” (יִצְחָק).

2. It is one of the ironies of the Samson narratives that his God-appointed work as judge to deliver Israel from the Philistine oppressors (Judg 13:5) was accomplished by the entertainment he was forced to provide, which led to their destruction (16:25).

3. In Exod 32:6 the vb. is used in connection with the worship of the golden calf (NIV indulge in revelry). This usage may correspond to that of שָׂחַק (#8471) for religious celebration (cf. Sasson, 152), but more likely it refers to a sexual orgy (Hvidberg, 148; Brenner, 47, 51; cf. Gen 26:8; 39:17).

4. There are instances of a negative connotation. In Gen 17:17 the vb. refers to Abraham’s incredulous reaction to God’s miraculous promise of a son, to which the name “Isaac” (17:19) would bear witness. In Gen 18:12, 13, 15 Sarah’s laughter seems to reflect a more reprehensible measure of doubt and disbelief. (Abraham/Abram)

q. qal

pi. piel

ANE Ancient Near East(ern)

Ugar. Ugaratic

Akk. Akkadia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796–797.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비웃던 비웃음이 이후에 진정한 웃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23-2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날에 그 집안의 모든 남자들을 불렀다. 이에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아브라함 집안의 남자들을 불러 할례를 행하였다. 아브라함은 99세,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받았고 다른 모든 남자들도 아브라함과 함께 할례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창 12:2에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큰 민족을 이루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15:4에 다시 나타나셔서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아니라 네몸에서 태어날 자가 너의 상속자가 될 것아라고 약속하셨다. 이때에도 누구를 통해서 태어날지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로 16장에서 사래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들여보내서 아들을 낳게한다. 그가 이스마엘이다. 하지만 17:16에서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사라의 태를 여서서 그녀를 통해 아들 이삭을 낳게 할 것을 약속하셨다. 이러한 약속을 받으면서 아브라함은 어땠을까? 

노년에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아브람은 이스마엘이 약속된 아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13년동안 하나님께서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이 과정에서 아브람은 나름대로 이스마엘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그의 재롱을 보면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모든 사랑, 희망, 꿈들은 이 소년 이스마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이미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이야기해놓았을지도 모른다. 이당시 아브라함은 다른 아들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가 99세되는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때였을까? 아브라함이 사라와 처음 가나안에 입성했을때, 그들은 그때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조그만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사라의 아름다움은 바로의 마음을 휘어잡을 정도였기에 충분히 아이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의 폐경기가 지났고 아브라함도 나이가 들어 소망이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 의학적으로, 생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의 때인 것이다. 사라에게 육체적으로/의학적으로 티끌만한 희망이 남아있는 한 그때는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사자들이 완전히 불가능하다라고 여길 그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잉태 단계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기족을 통해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완전히 포기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할례를 행하고 사래를 사라로 개명하는 것은 가능했는데 사라를 통해서 자녀를 주시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은 어쩌면 기쁜 소식이 아니라 믿기 어려운, 도리어 자신의 기존의 계획과 생각을 뒤엎어야 하는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웃었고 나중에는 결국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고민에 휩싸였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이러하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살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기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상황가운데 자신의 계획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담담히 해나간다. 하지만 그러다가 어떤 순간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나의 계획은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브라함처럼 웃으며 말도 안되요라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부할 것인가 아니며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불가능해 보이는 그 길을 향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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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God said to Abraham, “As for you, you shall keep my covenant, you and your offspring after you throughout their generations. 10 This is my covenant, which you shall keep, between me and you and your offspring after you: Every male among you shall be circumcised. 11 You shall be circumcised in the flesh of your foreskins, and it shall be a zsign of the covenant between me and you. 12 He who is aeight days old among you shall be circumcised. Every male throughout your generations, whether born in your house or bbought with your money from any foreigner who is not of your offspring, 13 both he who is born in your house and he who is bought with your money, shall surely be circumcised. So shall my covenant be in your flesh an everlasting covenant. 14 Any uncircumcised male who is not circumcised in the flesh of his foreskin shall be cut off from his people; he has broken my covenant.”

z Acts 7:8; Rom. 4:11

a Lev. 12:3; Luke 1:59; 2:21; Phil. 3:5

b [Ex. 12:48, 4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17:9–14.

 

A detail of a relief in the tomb of Ankhmahor at Saqqara depicting a priest performing ritual circumcision, ca. 2600 BC.

Werner Forman Archive/Glow Images

 

 

앞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칭하시고나서 그 이름처럼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라고 약속하셨다. 그것의 결과로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오고 거류하는 이 땅 가나안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시겠다라고 약속하시고 나서 이제 또한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요구하신다. 

어떤 언약의 경우에 이와 연관된 증표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무지개(9:12-13)와 안식일(출 31:16-17)등이다. 

 

9-14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명령하시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내용은 바로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요구하시는 내 언약이 바로 할례이다. 이는 앞선 1절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증표로 할례를 요구하신다. 11절은 남자의 포피를 베는 이 행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결국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이 언약에 매인바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겠다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할례는 집에서 태어난 자이던 아니면 이방인으로 돈으로 산 자이던 간에 관계없이 받아야 하는데 난지 8일만에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언약의 표징이 너희의 몸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려는 것이고 할례는 받지 않은 남자, 그 포피를 베지 않은 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질 것인데 이는 ‘내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11절)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다. 

결국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안에 있다라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언약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니라 거룩함이다. 구약은 이처럼 거룩함을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셨고 믿는 이들에게 외적인 할례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십자가위에서 정결케 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육신의 할례는 유대인들이 처음 고안해 낸 것은 아니다. 이미 이집트의 신전에서 제의를 거행하던 남자들에게 할례를 통해 종교적인 정결을 요구하였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포피의 끝부분을 잘라내는 의식이다. 육체에 분명하게 남겨지는 표지로서 다른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보이려는 목적은 아니다. 결국 이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하나님의 언약속에 구별되었음을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베풀어진 것이다. 이 할례가 다음 세대에도 대대로 지켜진 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새로 태어나는 사내아이는 8일 째 되는 날에 할례를 시행했다. 

할례는 고대 근동에서 여러 민족들이 성년식으로, 다산 예식으로, 결혼 예식으로, 자신의 신전의 제사장을 정결케 하는 이유로 이루어졌다. 결혼 예식으로 사용될 때는 신부 집안의 남자들이 신랑에게 할례를 행했는데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느 상징적인 의미였다. 아이에게는 8일째 할례를 행했는데 당시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이가 일주일을 살면 생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8일쩨 할례를 행한 이유는 이 내어난 아이가 7일 동안의 천지창조 사이클을 경험한 후 첫날이며 또한 8일째 되는 날은 속죄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22:29; 레 9:1; 14:10, 23; 15:15, 29; 22:27; 민 6:10) 아이가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은 하나님께 아이를 헌신하기에 가장 좋은 날인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들을 부정한 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여겼다.(삼상 17:26, 36; 합 2:16; 사 52:1) 뿐만 아니라 레 19:23을 보면 새로운 땅에 들어가 얻은 열매는 3년간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이 열매를 먹지 말것을 명하고 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레위기 19:23, NKRV)

 

그렇다면 이 할례, 표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은밀한 성기에 있는 이 표징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할례를 받은 당사자를 위한 것이다. 이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Circumcision is called both “my covenant” (v. 10) and a mark (or sign, ʾôṯ) of the covenant (v. 11). The designation of circumcision itself as a covenant is a synecdoche for covenantal obligation: “this is [the aspect of] my covenant you must keep.”

Circumcision is designated as a sign of the covenant, but a sign for whom? The one who is circumcised (and his family)? God? The outsider? This is the fourth passage in Genesis that mentions a sign (Heb. ʾôṯ). In 1:14 the luminaries serve as signs to identify the seasons. In 4:15 the sign on Cain identifies him to the outsider as one under divine protection. He belongs to that category. Along with these two identity signs we have the mnemonic sign of the rainbow (9:8–17, “when I see it, I will remember”), put in the heavens by God to remind him of his promise to Noah not to destroy the world by a deluge again.

Circumcision does not identify Israelites qua Israelites to non-Israelites, for many non-Israelites already practiced the same rite. And the later verses of this chapter record the circumcision of Ishmael, who is not part of the covenant that is to be perpetuated by Isaac! Also, how would one identify an Israelite via circumcision when clothing concealed it?

May the act of circumcision be a sign for the benefit of the one circumcised? Every time he looks at his body he is reminded that he is part of Yahweh’s covenant. Thus interpreted, circumcision is a mnemonic sign, reminding God’s people of who they are (as in Exod. 13:9, 16; 31:12–17; Num. 15:37–40; Deut. 6:8; 11:18; Josh. 4:6–7), from what they have been delivered, and by whom they have been delivered.

It is equally possible that circumcision is a sign to God, as was the rainbow in ch. 9. God will see the circumcised penis of the Israelite before and during sexual congress, and will then “remember” his promise to Abraham and to all his descendants to make them very fertile.14

One factor that militates against the idea of circumcision as a sign for the one circumcised and favors the idea of circumcision as a sign for God is the lack of an explanation for the sign. In other instances where a sign is given to the Israelites, the function or purpose of that sign is also given.

We may note the following: (1)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Exod. 13:3–10) is to be “a sign of your hand and as a memorial between your eyes that the law of the Lord may be in your mouth” (Exod. 13:9). (2) The consecration of the firstborn (Exod. 13:1–16) is to be “a mark on your hand or frontlets between your eyes, for by a strong hand the Lord brought us out of Egypt” (Exod. 13:16). (3) The Sabbath (Exod. 31:12–17) is “a sign between me and you throughout your generations, that you may know that I, Yahweh, sanctify you” (Exod. 31:12; also v. 17). (4) The bronze censers for the altar (Num. 17:1–5 [Eng. 16:36–40]) are “to be a reminder to the people of Israel … so that no one who is not a priest … should draw near to burn incense before Yahweh” (Num. 17:5 [Eng. 16:40]). (5) Aaron’s rod is to be “a sign … so that you make an end of their murmurings against me” (Num. 16:25 [Eng. 17:10]). (6) The placing of the phylacteries between one’s eyes and on the doorposts of the house is to remind God’s people of his word (Deut. 6:8; 11:18). (7) The monument of stones (Josh. 4:1ff.) is to be a “a sign among you,” reminding both the present and succeeding generations of the redemptive acts of God (“so that all the people of the earth may know that the hand of Yahweh is mighty”; Josh. 4:24).

In two passages the sign (ʾôṯ) is for God. The rainbow is for his benefit, and it serves to remind him of his earlier promise to Noah never again to drown the earth (Gen. 9:12–17). The blood on the doorposts at Passover (Exod. 12:7–13) is a sign for God to observe. When he sees it he is to “pass over” that house. This example is all the more remarkable when it is recalled that the Israelites already are living apart from the Egyptians, confined to the land of Goshen. The occupants of these houses can only be Hebrews. Clearly the sign of the blood does not identify the occupants of the house as Hebrews, when Yahweh passes over, but rather is an evidence to Yahweh of their compliance with his directive about the blood on the doorposts.

How, then, may one account for the absence of a clause explaining the purpose of this sign of circumcision? God sees the rainbow with the result that he remembers. He sees the blood with the result that he passes over the house. One might suggest that the delicacy of the circumstances mandated this omission in Gen. 17. It is unlikely that the OT would have inserted “And when I see you copulating I will remember my promise to make Abraham fertile”!

14 See M. Fox, “The Sign of the Covenant: Circumcision in the Light of the Priestly ʾôt Etiologies,” RB 81 (1974) 595–96.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470–471.

 

본문에서 포피라고 말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의 끝의 피부를 말한다. 이는 ‘아홀라’라는 히브리어 인데 주로 할례와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עָרַל (ʿāral), q. treat as uncircumcised; ni. be uncircumcised (#6887; but see below [OT 1]); denom. from עָרֵל (ʿārēl), adj. uncircumcised (#6888); עָרְלָה (ʿorlâ), nom. foreskin (#6889).

ANE The root occurs in Akk., Arab., and Aram.

OT 1. The adj. עָרֵל, uncircumcised, and nom. עָרְלָה, foreskin, are used literally in the passages that relate to circumcision (מוּל, #4576): Gen 17:11ff.; 34:14; Exod 4:25; 12:48; Lev 12:3; Josh 5:3, 7. In Judg 14:3; 15:18; 1 Sam 14:6; 17:26, 36; 31:4 (= 1 Chron 10:4); 2 Sam 1:20, the adj. is used as a term of ethnic contempt concerning the Philistines, who were probably of Indo-European origin and so did not conform to the West Sem. practice of circumcision. It implies their alien status and, especially in 1 Sam 17:26, 36, their opposition to Israel’s God. In Hab 2:16 the vb. הֵעָרֵל, be uncircumcised, may connote “show one’s foreskin” and so “be exposed” (NIV), but there is strong textual evidence (cf. NRSV, REB) for a reading הֵרָעֵל, stagger (cf. Isa 51:17, 22). In Isa 52:1 Jerusalem, ruined during the Exile, is promised that the עָרֵל, uncircumcised, and the unclean, the foreigners who destroyed it, would not invade the holy city again. There is a link with the cultic role of circumcision (מוּל).

2. The vb. and nom. are used in a metaphor at Lev 19:23. The fruit of newly planted trees was for the first three years to be regarded as their uncircumcised foreskins and so could not be offered to God as firstfruits. Again, the cultic role of circumcision is in view.

3. Regarding the metaphorical uses of the nom., for a discussion of Deut 10:16; Jer 9:25 [24], see מוּל, circumcise (Circumcision [sec. 5]). A similar case occurs in Lev 26:41, which refers to the humbling of Israel’s “uncircumcised heart” (לְבָבָם הֶעָרֵל); it is explained in terms of rejecting God’s laws (v. 43). In Ezek 44:7 (cf. v. 9) foreigners, who are עַרְלֵי־לֵב, uncircumcised in heart, and עַרְלֵי בָשָׂר, uncircumcised in flesh, and thus emphatically not members of the covenant people, are forbidden to serve in the grounds of the new temple, unlike the Carian guards who patrolled the courts of the preexilic temple (cf. 2 Kgs 11:4–16). In Jer 6:10 Israel’s ear is called עֲרֵלָה, uncircumcised, in its unresponsiveness to God; the same lack of commitment has been considered above (see מוּל). In the priestly text of Exod 6:12, 30 Moses objects to God’s commission of him on the ground that he (Moses) is עֲרַל שְׂפָתָיִם, uncircumcised in lips. It clearly connotes “faltering lips” (NIV), probably via the notion of being unfit for cultic use (cf. Lev 19:23; Isa 6:5 [unclean lips]; 52:1; cf. Hermisson, 71–72).

4. In the satirical lament over Egypt in Ezek 32:18–32, mention of the עֲרֵלִים, uncircumcised, lying in the underworld occurs 9× (in v. 27a reading מֵעוֹלָם, long ago, is preferable; cf. NRSV, NJPSV). Similar language is used in 28:10; 31:18. Since at least in 28:10; 32:29, 30 reference is made to ethnic groups who normally practiced circumcision, it has been suggested that a term for infants who died before being circumcised and were barred from burial in the family tomb is here used of a category of outcasts in Sheol (cf. Lods, 271–83).

q. qal

ni. niphal

ANE Ancient Near East(ern)

Akk. Akkadian

Sem. Semitic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REB Revised English Bible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JPSV New Jewish Publication Society Version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537–538.

 

12-13절) 본문은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 집에서 태어난자나 돈으로 산 종들이나 모두 할례를 받을 것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결국 이는 할례가 인종적인 순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사회적인 신분을 나누기 위한 것도 아니다. 왜나하면 아브라함에게 속한 이방인 종들에게도 할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례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의 중요성을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14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매우 중요한 의식, 표징이었다. 그래서 이 육신의 할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신약에 와서도 복음을 증거하면서 이를 강조했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신약의 초대교회때가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메시야로 믿는 이방인의 숫자가 많아지자 이 할례의 문제가 현실적인 난관이 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구원에 있어서 할례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강조한 반면에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기 때문에 육신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더욱 중요하다고 하였다. 

할례 자체에 특별히 어떠한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 상징으로 주신 것인데 이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가 언약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는 표증이지 언약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 평생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자신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고 묵상하게끔 하기 위한 흔적, 흉터라고 할 수 있다. 

Every uncircumcised male was excluded from the benefits of belonging to the covenant. Circumcision distinguished those who believed in the importance of the divine promises to Abraham from those who did not. This created a major theological problem for the early church as more and more Gentiles believed in Jesus Christ as Savior and Lord. While some Jewish believers argued that circumcision was necessary for salvation (see chart), Paul contended that “righteousness” comes through faith and that circumcision of the heart is what matters, not circumcision of the foreskin (see Rom. 2:25–29; 1 Cor. 7:18–19; Gal. 6:1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80.

 

 

아브라함 사이클에서 그동안 진행되어 언약의 구체화를 되돌아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시며 만일 그가 떠나면 그를 통해 큰 나라를 만들고 복을 주어서 그의 이름을 높여 주시고, 그를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다(12:1-3). 이것이 아브라 언약의 서곡이었다. 롯과 헤어진 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재확인하시면서 그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땅을 그와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다(13:14-17), 가나안 땅 소유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으로 입성한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정식 언약이 체결되었디(cf. 15 장). 하나님께서는 이 약 체결식에서 아브라함에게 자손도 약속하셨지만 땅에 대해 구체적으로 씀하셨다. 아브라함과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지만,  일이 있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직 가나안땅을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넘겨주실 여건이 차 않았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후로 이스마엘이 태어났지만(cf. 16장), 이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아이가 아니었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13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17 장). 일을 기념하면서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이 바뀌었다. 할례 제도를 설정해 종들과 이방인까지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다. 언약의 증거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잃어 버리고 망각히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폼에 영구적인 언약의 증표를 주신다. 이것이 할례이다.(엑스포지멘터리 325)

 

 

할례 

할례(割禮, circumcision) 남성 음경의 포피를 절제하는 의식. 하나님과 아브라함(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선민 이스라엘 전체) 사이에 체결된 언약의 증표로서 제정된 의식이다(창 17:10–14).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복종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모든 남자아이에게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식이 집행되었으며(창 17:12; 레 12:3) 특히 할례의 중요성 때문에 안식일에도 허용되었다(요 7:22–23). 그리고 외국인이든 나그네든 개종한 자는 할례를 통해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출 12:48). 하지만 비록 혈통상 이스라엘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언약 공동체에서 끊어졌다(창 17:14).

물론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 동안 계속해서 행진해야 하는 특별한 상황이었으므로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할례를 행할 수 없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곧바로 여호수아 주도로 할례 예식이 이뤄졌다(수 5:2–5). 할례 의식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행하되(창 21:4), 주로 그 집안의 가장(家長)에 의해 실시되었으며(창 17:23), 간혹 모친의 손에 의해 행해지기도 했다(출 4:25). 히브리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 곧 무할례자를 심히 경멸하여 그들과의 교제를 일절 단절하였다(삿 14:3; 15:18; 삼상 14:6; 사 52:1).

한편, 신약 시대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 율법이 정한 한시적인 제도인 할례의 종결(폐지)이 선언되었다(행 15:5–29; 롬 3:30; 4:9–11; 고전 7:18–19; 갈 2:3–4; 5:2–11; 6:12; 엡 2:11, 15; 골 2:11; 3:11). 물론 초대교회 당시 과도기적 상황에서 방편상 할례가 행해지기도 했지만(행 16:3), 구원과 관련된 할례의 효력은 철저히 부인되었다(고전 7:18–19).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고 오직 믿음뿐이요(갈 5:6), 오직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할 뿐임을 강조했다(갈 6:15).

따라서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갈 6:13), 할례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행 15:1), 그리고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고 생각하는 것(롬 2:28) 등을 삼갈 것을 명하고 있다. 대신 참된 할례는 마음 가죽을 베는 것(렘 4:4) 곧 마음에 하는 것으로서(신 10:16; 롬 2:29)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할례(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나고 구원받음)라 할 수 있다(갈 5:2; 골 2:11).

 가스펠서브, 라이프 성경사전 (서울시 종로구 경희궁1길 5-9(03176): 생명의말씀사, 2006), 1040–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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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ly, my brothers,1krejoice in the Lord. lTo write the same things to you is no trouble to me and is safe for you. 
Look out for mthe dogs, look out for nthe evildoers, look out for those who mutilate the flesh. For owe are the circumcision, pwho worship qby the Spirit of God2and rglory in Christ Jesus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 sthough I myself have reason for confidence in the flesh also. If anyone else thinks he has reason for confidence in the flesh, I have more: t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uof the people of Israel, vof the tribe of Benjamin, ua Hebrew of Hebrews; as to the law, wa Pharisee; xas to zeal, ya persecutor of the church; zas to righteousness under the law,3blameless.
1Or brothers and sisters; also verses 13, 17
kch. 4:4; 1 Thess. 5:16
l[2 Pet. 1:12]
mPs. 22:16, 20; Isa. 56:10, 11; Rev. 22:15; [Gal. 5:15]
n[2 Cor. 11:13]
oSee Rom. 2:29
p[John 4:23]
q[Gal. 5:25; Jude 20]
2Some manuscripts God in spirit
rRom. 15:17; [Gal. 6:14]
s2 Cor. 11:18
tSee Gen. 17:12
u2 Cor. 11:22
vRom. 11:1
u2 Cor. 11:22
wActs 23:6; 26:5
xActs 22:3, 4; Gal. 1:13, 14
ySee Acts 8:3
z[ver. 9]
3Greek in the law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3:1–6.

이 구절에서 4:4로 곧장 가면 의미가 매우 잘 통합니다. 그러나 3:1에서 3:2로의 연결은 잘 안 됩니다. 그래서 3:2–21(또는 4:3)은 끼어 들어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앞서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울이 감옥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여러 날을 두고 이 편지를 구술해 가는 중 빌립보교회에 유대인들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의 언약의 표증인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면 온전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는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핍박 중에서도 일치와 화평과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라는 1:27의 권면을 일단 중단하고 그 유대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올바른 신앙을 설명하는 내용을 구술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이 3장입니다. 그리고는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4:1부터 구술한 것 같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7–118.

1절) 마지막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이 내용은 이후 4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무엇인지는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표현인지 이후 2절부터 등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볼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로 3:18에서도 밝혔듯이 이를 여러번 반복했던 것이다. 
3:2–21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를 발하는데, 3:18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이미 그것을 여러 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똑같은 것들을 여러분에게 쓰는 것은 나에게 수고로운 일이 아니요, 여러분들에게는 안전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 번 했던 유대인들의 시비와 유혹에 대한 경고를 다시 하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확실하게, 안전하게 하려 함입니다. 양떼의 올바른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것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거듭 경고하는 것이 사도인 자신에게는 당연한 의무이므로 전혀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3:1절 전반부까지 구술한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다시 유대인들의 시비와 유혹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3:2 후반부터 3:21(또는 4:3)까지 새로운 내용을 구술하여 덧붙이고, 4:1(또는 4:4)에 가서 원래의 주제로 복귀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3:1(전반부)에서 문단이 끊어지고, 3:1(후반부)에서 새 문단이 시작되어 3:2이하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18–119.

형제들아라는 표현은 3:1, 13, 17; 4:1에 등장한다. 

2-3절)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복음의 적대자들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대조하고 있다. 
적대자들(유대주의자들) : 개들, 행악하는 자들, 몸을 상해하는 이들이다. 이들을 삼갈 것을 명령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진정한 할례파)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다. 
본문의 개들이라는 표현은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인 조롱, 욕에 해당하는 말로 유대인들이 정결예법에 벗어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바울은 지금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구약의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아가 율법의 선한 행실을 찬양하는 이들을 향해서 행악자들이라고 말하며 할례(페리토메)를 강조하는 이들을 향해서 몸을 상해하는 자들(텐 카타도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유다주의자들의 자랑의 상징이 그들의 멸망의 징표로 드러난 것이다. 
육체의 할례를 높이는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이다.(요 4:23-24)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빌 1:26) 육신을 자랑하지 않는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Dogswas not only a general term of derision in the ancient world, it was particularly a word used by some Jews in reference to Gentiles, who were considered ritually unclean. With biting irony, Paul says that the Judaizers, not the Gentiles, deserve that label. Paul’s irony continues as he labels those who extol good works of the law as evildoersand those who mutilate the flesh. This last phrase (Gk. tēn katatomēn) is a play on words with circumcision (Gk. peritomē). The Judaizers’ supposed badge of pride turns out to be the sign of their destruction. On Jewish views of circumcision, see note on Acts 15:1.
In contrast to those promoting physical circumcision (v. 2), the true people of God (the circumcision) are those who worship by the Spirit of God(cf. John 4:23–24). They glory in Christ Jesus(cf. Phil. 1:26) and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that is, as Calvin put it, in “everything that is outside of Christ”). This verse mentions all three members of the Trinity: “God” (the Father), “Christ Jesus” (the Son), and “the Spirit of God” (the Holy Spiri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중요시했는데 바울은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됨의 징표인 할례를 몸을 상해하는 일, 즉 살점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비하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랑하는 할례가 그저 몸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육신”(sarx; flesh)을 가끔 “몸”(soma; body)과 함께 인간의 외형, 즉 살 덩어리를 지칭하기 위해 쓰기도 합니다만, 더 많은 경우에서 “육신”이나 “몸”에 특수하고 깊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씁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바울의 중요한 신학 용어들 중에 속합니다. “몸”은 피조물로서 피조 세계 전체와의 연대성 속에서 제한성(결핍성)을 가지고 사는 인간을 특히 그 외형적인 관점에서 지칭할 때 쓰는 인간론적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현재는 제한성을 가지고 죄와 죽음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께 산제사로 바쳐질 수도 있으며(롬 12:1), 종말에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영적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빌 3:20–21, 고전 15:42–44). 이 “몸”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성(제한성)을 망각하고 자신의 내재 자원으로, 그리고 자신의 뜻을 좇아 자신의 구원(의, 안녕, 행복)을 확보하려 할 때, 바울은 그런 인간을 “육신”이라고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신학 언어에서의 “몸”은 인간의 피조물성(제한성)을 뜻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중립적인 개념인 반면, “육신”은 자신을 신뢰하며(자신의 우상화) 하나님과 이웃에게 자기 주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지칭하는,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개념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0–121.

레 21:5과 왕상 18:28을 보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신의 몸을 찢는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깍지 말것을 명령한 바 있다. 
The Greek word for circumcision is peritomē(= “to cut around”); katatomē, used here, denotes “cutting to pieces,” hence “mutilate.” This wordplay, especially the emphatic For it is we who are the circumcision(v. 3), makes it certain this is the primary issue between Paul and them. This is the most “cutting” epithet of all, the ultimate derogation of circumcision, since the cognate verb occurs in Leviticus 21:5 (LXX) prohibiting priests (who serve God) from cutting their flesh as pagan priests did (cf. 1 Kings 18:28).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Westmont, IL: IVP Academic, 1999), 133.

4-6절) 바울은 자신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데 만약 누구든지 다른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것 같으면 나는 더욱 신뢰할 것이 많이 있다고 말한다. 그 내용으로는 바울은 
  1.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2.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3.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4.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5.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6.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유다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반대는 그 자신이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적 특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성령이 임하시기 이전의 지배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봤을때 바울은 완벽한 자격(육체를 신뢰할 만한 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완벽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구약의 율법을 따라서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자신이 어느 지파의 소속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그가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면서도 아람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가장 엄격한 종교적 분파인 바리새인(행 26:5) 출신이었고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있던 자였다. 이러한 열심은 비느하스나 엘리야의 따라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면을 볼때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전혀 의가 아니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표현했다. 
Paul’s opposition to the Judaizers was not because he himself in any way lacked a Jewish “pedigree.” When it came to the things of the flesh—the whole system of life that held sway before the coming of Christ and the giving of the Spirit—Paul had perfect credentials. He was circumcised on the eighth dayin accord with OT law (Lev. 12:3). He was an ethnic Israelite and knew the tribe from which he came. Hebrew of Hebrewsprobably indicates his descent from Jewish ancestors, and many think it also means that he spoke Aramaic (the national language of Israel in his day), even though he came from Greek-speaking Tarsus. He was from the strictest religious sect—the Pharisees (Acts 26:5). His zealwas such that he had even been a persecutor of the church. He probably had thought of himself as following in the footsteps of Phinehas (Num. 25:11) and Elijah (1 Kings 19:10, 14) in his zeal. If anyone could be said to be blamelessin following the law, it was Paul. But before God it was no righteousness at all, for though Paul thought he was pleasing God, in persecuting the church he had shown himself to be the “foremost” of sinners (1 Tim. 1:1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바울이 자신의 베냐민 지파 소속을 특별히 내세우는 이유는 베냐민이 야곱이 특별히 사랑한 아내 라헬로부터 난 두 아들 중 하나였으며,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남북조로 갈릴 때 유다 지파와 함께 남조를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를 지속했던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첫 왕을 배출하였으며(자신의 이름이 그 왕의 이름을 따른 사울이었음), 전쟁 때 영웅적으로 싸운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매우 자랑스러운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히브리 부모들 사이에서 난 히브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은 헬라파 유대인(Hellenistes)과 구별해서 쓰인 용어입니다. 후자는 로마 제국 등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로서, 즉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서 헬라어를 모어로 쓰는 사람들을 지칭한 반면, “히브리인”(Hebraios)은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히브리”어(실제로는 아람어)를 모어로 쓰는 유대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행 6:1–6 참조). 당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이민 1세대로서 아람어를 모어로 쓰며 아람어를 사용하는 회당을 출석하는 사람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지금의 터키 남부) 다소 출신이지만 아람어를 모어로 쓰는 가정의 출신이었음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을 두 부류를 구분할 때는 사용 언어가 주된 기준이었습니다. 물론 이 구분은 문화적 차이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이 자신을 히브리인 부모로부터 출생한 히브리인이라고 내세우는 데는 자신이 헬라 문화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 유대인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교의 관점에서 자신의 출생이 가져다준 자랑거리들을 열거한 바울은 이제 자신의 개인적 성취들을 덧붙여 열거합니다. 그것들은 세 가지입니다. 곧 “율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바리새인이요, 열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교회의 핍박자요, 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흠이 없는 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주의는 출애굽기 19장 5, 6절에 반영된 이상(理想), 곧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들의 왕국이어야 한다는 이상을 성취하려는 중산층 평신도 성결운동이요 부흥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장들을 위한 정결법들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부분 제사장들이 아니고 평신도들이었지만, 그 법들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불결로부터 분리, 곧 정결과 성별을(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의 기원)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주의는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자신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철저히 지키려 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열성”(zelos; zeal)은 단순히 심리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지닌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열성을 보이는 것이 비느하스 전통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이스라엘인들이 그곳의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때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에 대한 열성(개역 성경: 질투심)으로 미디안 여인과 동침하는 이스라엘인을 창으로 찔러 죽였는데, 이 열성이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고 그에 대해 내려진 하나님의 재앙을 거두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민 25장). 구약 성경은 이러한 비느하스의 열성을 속죄 제사로 그리고 의의 행위로 기념합니다(시 106:31). 주전 168년에는 모딘의 제사장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마카비 형제들)이 유대교를 말살하려는 시리아의 통치자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때 그들은 비느하스의 열성을 재현하려 하였고, 또 주후 1세기 중반에 당시 로마의 통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투사들도 비느하스의 열성을 본받고자 했기에 열성당(zealots)이라 불리었던 것입니다.
이 전통에서 “열성”(zelos)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그것들을 범하는 자들을 폭력으로 대항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런 태도를 가졌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범하고 이스라엘의 순결을 해치는 자들이라 생각하여 교회를 잔해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야말로 바리새인들 중에서도 더 열성적인, 유대교의 정통과 순결을 위해서는 폭력을 불사한 맹렬파로서 비느하스, 마카비 운동, 바울 당시 세력을 얻어 갔던 열성당과 같은 신학적 전통에 섰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바리새적 헌신과 유대교에 대한 전투적 열성은 바울을 유대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온전한 의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출생의 특권들과 자신의 개인적 경건의 성취들을 종합하여, 특히 후자를 염두에 두고 바울은 결론하는 것입니다. 과거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삶을 율법이 요구하는 또는 율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의의 관점에서 보면 “흠 없는 자”였다고 말입니다. 요컨대 바울은 이 말로 자신들의 특권과 율법 지킴을 자랑하며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모세 율법을 지켜 온전한 의인이 되라고 선동하는 유대인들에게 대항하여 과거 자신의 삶이 그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들의 것보다 훨씬 더 자랑스러운, 온전한 의의 삶이었다고 결론합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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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rin him the whole fullness of deity dwells sbodily, 10 and tyou have been filled in him, who is uthe head of all rule and authority. 11 In him also vyou were circumcised with a circumcision made without hands, by wputting off the body of the flesh, by the circumcision of Christ, 12 xhaving been buried with him in baptism, in which yyou were also raised with him through faith in zthe powerful working of God, zwho raised him from the dead. 13 aAnd you, who were dead in your trespasses and the uncircumcision of your flesh, God bmade alive together with him, having forgiven us all our trespasses, 14 by ccanceling dthe record of debt that stood against us with its legal demands. This he set aside, nailing it to the cross. 15 wHe disarmed the rulers and authorities2and eput them to open shame, by ftriumphing over them in him.3
rch. 1:19; John 1:14
s[ver. 17]
tEph. 3:19
uSee Eph. 1:21, 22
v[Eph. 2:11]; See Rom. 2:29
wver. 15; ch. 3:9
xRom. 6:4
ych. 3:1; [Rom. 6:5]
z[1 Cor. 6:14]; See Acts 2:24; Eph. 1:19
z[1 Cor. 6:14]; See Acts 2:24; Eph. 1:19
aSee Eph. 2:1
bSee Eph. 2:5
cSee Acts 3:19
dSee Rom. 7:4
w[See ver. 11 above]
2Probably demonic rulers and authorities
e[Gen. 3:15; Ps. 68:18; Isa. 53:12; Matt. 12:29; Luke 10:18; John 12:31; 16:11; Eph. 4:8; Heb. 2:14]
fEph. 2:16
3Or in it(that is, the cros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Col 2:9–15.

기독론이 결여된 철학과 진리체계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첫 고백에서 발견된 두가지 핵심적인 확신으로 돌아간다. 첫번째는 그리스도가 역사속에 하나님의 개인적이고도 완전한 계시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모든 다른 권세들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두가지 기독론적인 확신을 품을 때,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한 충만함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라고 말한다. 
In responding to a philosophy or system of truth devoid of any Christology, Paul returns to two core convictions found in his opening confession of the Lord Christ (1:15–20). The first claim is that Christ is the personal and complete revelation of God within history (2:9–10; compare 1:19). The second claim is that Christ rules over every other power within God’s created order (2:10–15; compare 1:18). When we embrace these two christological convictions, Paul says, we participate with Christ in the abundant fullness of God’s salvation.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9.


9절)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전, 건물에 거하시지 않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몸안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만약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면 우리는 충만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그분께 속한 것이다. 


11절) 바울은 여기서 할례를 영적인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할례를 육체의 몸을 벗는 것으로 표현한다. 믿는 자들은 더이상 육체와 이것의 영향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져 그분의 주권아래서 그분을 통해, 그분안에 거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할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죄와 그들의 아담과의 연대책임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제 이전에는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분의 의안에서 그분을 위해서 살수 있게 되었다. 
- In him also you were circumcised. Paul here uses circumcision metaphorically for a spiritual (made without hands) action, which he describes as putting off the body of the flesh. Believers no longer live in the sphere of the flesh and its influence (Gal. 5:24) but have been transferred to the kingdom of Christ and live through and in him, under his lordship (Col. 1:13). In this “circumcision” performed by Christ, Christians have been removed from their solidarity with Adam and his sin (see Rom. 6:6) and are now in solidarity with Christ and his righteousness and can live for him, as they before could no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7.

바울은 이 유대 전통의 생생한 비유로 할례와 세례를 사용한다. 이는 신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은 영적인 성형수술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벗어야할 육의 몸은 죄된 인간의 본성으로 이는 부패했고 성령에 반대하는 힘의 세력에 노예가 되었다. 이 육의 몸을 벗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지배하에 있는, 옛 아담과 연대해 있는 우리의 육신에 영적인 수술을 행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분께 항복할 때 신자들의 죄된 본성을 잘라내신다. 
- circumcision … baptism.Paul uses these vivid metaphors from Jewish initiation rites to underscore what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chieved for believers. Christian conversion requires more than spiritual cosmetic surgery. flesh.Human nature that sin has corrupted and enslaved; a power sphere opposed to the Spirit (Gal 5:17). circumcised by Christ.Pictures a major spiritual “operation” in which Christ cuts off “the body ruled by sin” (Rom 6:6) and our solidarity with the old Adam (Rom 5:12–14; 1 Cor 15:22). Christ cuts off believers’ sinful compulsions when they submit to him.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12-13절) 본절은 세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일어남은 바로 죄와 사탄의 힘에 대해서 죽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부르셔서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힘을 부여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 buried with him in baptism … also raised with him … made alive together with him. In a second metaphor drawn from Christ’s work on the cross, Paul says that the Christian rite of baptism represents an identification with Christ in his death (cf. Rom. 6:4–6) along with an identification with Christ in his resurrection (cf. Eph. 2:6). Dying and rising with Christ signifies death to the power of sin and Satan plus empowerment to live the new life that Jesus calls believers to live in imitation of him (see Rom. 6:3–1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7.

세례는 신자들이 교회로 들어가는 징표가 되는 가장 단순한 의식이다. 이것은 물로된 무덤으로 이를 통과함으로 죄된 육신이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는 장소, 의식이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또한 회심의 온전한 경험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죽음,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항복,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묻히고 그분과 함께 살아나는 것을 나타낸다. 
- baptism.More than simply a rite marking the believer’s entry into the church, it is the watery grave for the flesh that is dead in its trespasses (Rom 6:4) and the birthplace of the new creation in Christ. It symbolically reenacts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nd represents the whole experience of conversion. It marks the Christian’s death to sin, total surrender to God, and solidarity with Christ by being buried and raised with him. faith in the working of God.Trust that God indeed raised Christ from the dead and inaugurated the new age that dismantles the reign of sin and death.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13절) 우리들은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14절) 이것의 법적인 요구들로 우리에 반대에 서있던 빚의 기록을 무효화하시고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치워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The Holy Bible: New Korean Standar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골 2:14.
바울은 여기서 법정 증서, 보증서의 비유를 사용한다. 이 증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것을 순종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것에 순종하는 것에 실패할 때 우리의 죽음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빚을 도저히 청산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빚의 목록들을 완전히 지워버리셨고 그리스도깨서 우리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때 우리에게 불리한 모든 유죄의 증거들을 파괴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짐을 가져가셨다. 신자들은 그분의 의의 평결을 받았다. 
- the charge of our legal indebtedness.Paul uses the metaphor of a legal bond or certificate of debt (an IOU) in which humans promise to obey what they know to be God’s will (cf. Rom 1:32). It becomes our death warrant when we fail to obey (cf. Rom 3:23) because we cannot possibly repay the debt. But God blotted out the list of debts and destroyed all the incriminating evidence against us when Christ was nailed on the cross in our place. Christ took away the burden of our guilt. Believers receive the verdict of his righteousness.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15절)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다는 이 말은 ‘데이그마티조’라는 표현으로 마 1:19절에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그녀를 부끄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구절에 사용된 표현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노력이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수치의 십자가가 바로 승리의 십자가가 된것이다.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을 실패로 몰고가려고 그를 십자가에 죽였지만 도리어 그 죽음을 통한 부활로 말미암아 사탄의 아들의 머리가 상하게 된  것이다. 
- put them to open shame. This is the same term (Gk. deigmatizō) used in Matt. 1:19 to refer to Joseph’s unwillingness to expose Mary’s pregnancy and bring public shame on her. The cross publicly reveals the failure of the demonic powers to thwart God’s plan of salvation through Christ (see 1 Cor. 2:6–8). triumphing over them. The image is of a triumphal Roman military procession. The defeated king with all of his surviving warriors and the spoils of war were paraded through the streets of Rome, as a public spectacle for all to se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7.

본문의 무력화하다라는 단어는 ‘아펙됴마이’라는 단어로 무장을 해제하다. 폐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그분을 예루살렘을 통해 끌고왔을때, 그분을 알몸으로 벗겼을 때, 모욕적으로 그분을 대했을 때 그리고 십자가위에서 그분을 대항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때 그것을 행한 그 능력들에 대해 그들을 무력화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힘의 정사와 권세들을 벗기시고 그들의 약점을 드러내셨다. 십자가위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이러한 외세의 힘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를 가져온다. 
로마의 장군들은 전쟁의 전리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포로들을 행진시키며 로마의 거리를 행진함으로 그들의 승리를 경축했다.  바울은 지금 승리의 퍼레이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십자가를 승리한 장군이신 그리스도께서 타신 전차로 상징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정복된 대적들이 굴욕적인 패배로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 
- disarmed.In the crucifixion God paradoxically did to the powers what they did to Christ when they dragged him through Jerusalem, stripped him naked, treated him with contempt, and nailed the charges against him on the cross. God stripped the “powers and authorities” of their power and exposed their weakness. Christ’s victory on the cross brings freedom from the tyranny of these alien forces. triumphing over them by the cross.Roman generals celebrated their victories by marching through the streets of Rome exhibiting the spoils of war and parading their captives. Paul’s metaphor of the victory parade (2 Cor 2:14; Eph 4:8) imagines the cross as the chariot in which Christ rode as a triumphant general. Paul may envision Christ’s vanquished foes trailing behind him in humiliating defea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심으로 모든 충만이 그분안에 거하고 우리들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다. 또한 우리가 육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 이 육의 몸을 벗는 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 할례가 바로 세례로 이어진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의 증서를 무효화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제거해버리셨다. 이로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본문의 그리스도의 승리는 바로 창 3:15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의 성취를 보여준다. 그 보장된 승리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고 그 승리의 행진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통치자와 권세들이 도리어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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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For circumcision indeed is of value nif you obey the law, but if you break the law, your circumcision becomes uncircumcision. 26 So, if oa man who is uncircumcised keeps pthe precepts of the law, will not his uncircumcision be regarded2 as circumcision? 27 Then he who is physically3 uncircumcised but keeps the law qwill condemn you who have rthe written code4 and circumcision but break the law. 28 For sno one is a Jew twho is merely one outwardly, nor is circumcision outward and physical. 29 But a Jew is one uinwardly, and vcircumcision is a matter of the heart, by the Spirit, not by the letter. wHis praise is not from man but from Go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Ro 2:25–29.

육신의 할례
25절) 만약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참으로 유익하지만 만약 율법을 범하면 너의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네가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한다면 네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너에게 유익이 될 것이지만 만약에 그 율법이 명하는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는 네가 할례를 받지 않았었던 것과 같이 된다. 즉 무할례가 될 것이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증표로 그의 몸에 받는 것이다.(창 17:9-14) 당시 이방 사회속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들은 몸에 할례를 행하고, 음식 규정이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기원전 2세기경 아티오쿠스 4세가 유대교를 낙인찍는 것으로 이 할례가 사용된 이후에 특별한 명성을 얻게 됩니다.
- Circumcision. God instructed Abraham to circumcise every male in the Israelite household as “the sign of the covenant” (Gen 17:11) that God entered into with Abraham and his descendants (Gen 17:9–14). Circumcision became an important distinguishing mark of the people of Israel, gaining special prominence in the aftermath of the attempt of the pagan king Antiochus IV to stamp out the Jewish religion (167–164 BC). Many Jews in Paul’s day lived where they had to struggle to preserve their identity among pagans, so they emphasized outward distinguishing marks of their Jewish faith such as circumcision, dietary rules, and Sabbath observance. has value if you observe the law. Again, “doing” is what counts in God’s judgment of humans (see note on v. 7).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295.

- 신구약 중간기 시절, 아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했다. 하지만 이 결과로 도리어 할례는 유대인이 되는 확실한 징표가 되었다. 시약시대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마지막 관문, 예식이 바로 이 할례이다.
In the intertestamental period, Antiochus Epiphanes banned circumcision (1 Maccabees 1:48, 60–61), and as a result it was made even more the single definitive sign of being Jewish (see Schreiner 1998:137). In the New Testament period it was the concluding rite when a Gentile became a Jew; and when the sages “went over land and sea to make a convert” (Mt 23:15), the emphasis was on talking God-fearers into taking the final step of circumcision.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6.

26절) 무할례자,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기지 않겠느냐? 본문의 여기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의미론적 방식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한편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들이 율법의 명령을 준행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그들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주실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 Paul continued his emphasis on obeying the law rather than simply knowing what it teaches. In the previous paragraph Paul demonstrated that the possession of the law in and of itself did not grant the Jew a position of privilege. Now he said the same thing about circumcision130 unaccompanied by an observance of the law.   p 101  Circumcision did have value but only if a person continued to do what the law required.131 Otherwise circumcision was no better than uncircumcision. Fitzmyer comments that “Paul’s bold declaration, equating a good pagan with a circumcised Jew, would have been an abomination to Pharisaic ears.”132 Elsewhere Paul wrote: “Circumcision is nothing and uncircumcision is nothing. Keeping God’s commands is what counts” (1 Cor 7:19; cf. Gal 6:15). The Jew who habitually breaks the law133 has become for all practical purposes an uncircumcised pagan. What Paul taught here about circumcision for the Jew is equally true of baptism for the Christian. Both function as signs; they do not themselves effect what they signify.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00–101.

28절) 누가 진정한 유대인인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가 진정한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내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며 할례는 율법 조문에 맞춰서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영으로 해야한다.
"반면에 진정한 유대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되어진 사람이지 율법 조문으로 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유대인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2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진정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할례가 진정한 것인지를 요약하고 있다. 겉모습, 외양이나 종교적인 예식을 행하는 것이 사람을 진정한 유대인으로 만들지 못한다. 진정한 할례는 겉으로, 육체에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면에, 심령의 할례만이 의미 있다. 진정한 할례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는 율법 조문을 기계적으로 지킨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유대인됨은 내면에 영으로 되는 것이다. 진정한 할례는 오래된 죄악의 성품을 잘라내는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를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다.
- In the last paragraph of chap. 2 Paul summarized what it meant to be a real Jew141 and what kind of circumcision was considered authentic. People were not Jews if their Jewishness was no more than outward appearance. Going through the ceremonial activities of Judaism did not make a person a Jew. And real circumcision was not that which was merely external and physical. A person was a Jew only if he or she was one inwardly. The circumcision that counted was a circumcision of the heart (cf. Deut 30:6).142 Real circumcision was the work of the Spirit.143 It did not come through the mechanical observance of the written code.144 Authentic Jewishness was inward and spiritual. Authentic circumcision was the cutting away145 of the old sinful nature. It could be accomplished only by the sanctifying Spirit of God. Those who had experienced it received their praise from God, not from others.146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02.

바울은 왜 더이상 할례가 더이상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가르는 중대한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본문 속에서 몇가지 대조가 등장한다. 표면적/이면적, 육체/마음, 율법 조문/영, 사람에게서/하나님에게서.
- Paul then tells why (gar) circumcision no longer makes one right with God by differentiating between a professing Jew and a true Jew (2:28–29). One cannot be in right relationship with God merely by possessing the covenant signs of the law and circumcision. Such are outward or external realities, and they no longer make one right with God. Since Christ has come, it is the inward or internal reality that matters. In other words, it is not the act of circumcision but circumcision of the heart that God demands. This was also demanded in the Old Testament, as in Deuteronomy 10:16 or Jeremiah 4:4 (“circumcise your hearts”); cf. also Jeremiah 9:25–26. Of course, Paul gives this an entirely new meaning, for this internal reality is now completely realized in Christ and made possible by the Spirit, and only in both can it occur. There are several contrasts here—outwardly/inwardly, physical/of the heart, written code/Spirit, from men/from God.* Each is important. For instance, the written code is the Mosaic law, and the Spirit is not the human spirit (e.g., nrsv, “it is spiritual and not literal”) but the Holy Spirit. As several commentators point out (Käsemann 1980; Moo 1996; Schreiner 1998), this is a salvation-historical switch—the Old Testament covenant centering on the law has now given way to the New Testament covenant centering on the age of the Spirit. Therefore, the true follower of God seeks praise not from people but from God, most likely again a reference to the final judgment (see 2:16). The message is just as important for our day as it was for Paul’s. It is just as easy today to center on the external (church attendance, activity or external piety) rather than on one’s relationship with God. As Stott says (1994:94), “Human beings are comfortable with what is outward, visible, material and superficial. What matters to God is a deep, inward, secret work of the Holy Spirit in our hearts.”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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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Has Set Us Free
For sfreedom Christ has tset us free; ustand firm therefore, and do not submit again to va yoke of wslavery. Look: I, Paul, say to you that xif you accept circumcision, yChrist will be of no advantage to you. I testify again to every man who accepts circumcision that zhe is obligated to keep the whole law. You are asevered from Christ, byou who would be justified1 by the law; cyou have fallen away from grace. For through the Spirit, by faith, we ourselves eagerly dwait for the hope of righteousness. For in Christ Jesus e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counts for anything, but fonly faith working through lov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갈 5:1–6

1절) 본 절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하갈과 사라의 예에서 자유와 종에 대해서 강조하였기에 본절의 의미는 더욱 강조된다. 본문은 직설법/명령법의 병렬 구조로 되어 있다.(5:13 참조)
- The structure of the indicative/imperative formula in Paul also relates to the salvation-historical situation of the believer who must live out the Christian life in the eschatological tension between the No Longer and the Not Yet of this “present evil age” (1:4). We have seen Paul struggling with this tension throughout Galatians, and it continues to shape his ethical instructions in Gal 5–6. As W. Grundmann has put it: “The Christian stands in the tension of a double reality. Basically freed from sin, redeemed, and reconciled … he is actually at war with sin, threatened, attacked and placed in jeopardy by it.”11 The fact of justification propels the Christian into a world of struggle, an in-between time bounded by the great accomplishment of redemption in Christ’s finished work on the cross on the one hand and the yet-to-be-realized consummation of God’s salvific purposes at the second advent of Christ on the other. In this real world of struggle and temptation, the sham gods of this present evil world, ta stoicheia tou kosmou, war against the people of God, ever seeking to subject them “again” (palin) to the yoke of bondage.
11 W. Grundmann, “ἁμαρτάνω,” TDNT 1.313. Grundmann also describes the believer’s status in Christ as “sinless.” However, as R. Fung has noted, this statement can only be applied to one’s positional sanctification in Christ (Galatians, 283, n. 24). See 1 John 3:4–6.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353.

율법과 자유를 고민하면서 우리는 잘못하면 율법주의 혹은 상대주의의 양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경계를 그릴때 주의해야 한다. 이 경계를 잘 그리기 위해서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혼란속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기초해야하고 동시에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해야 한다. 
- Christian freedom is the precious birthright of every believer, “An inestimable blessing,” Calvin called it, “for which we should fight even to the death. For we are not talking here about our hearths but about our altars.”14 Yet no word in the Christian vocabulary has been more misunderstood or abused than this one. What did Paul mean by freedom? First, he was not talking about political freedom. However much we Americans may believe on the basis of natural law that God has endowed all persons with certain inalienable rights, including that of political liberty, Paul provided no basis for the kind of philosophy articulated in our Declaration of Independence. Still less was Paul referring to freedom in a psychological sense. Emotional health is a desirable goal, and certain therapeutic techniques developed in the modern world may be quite compatible with New Testament Christianity. However, Christian freedom is not “an innate quality or state of being which the individual discovers (or recovers) by sorting out past experiences and relationships. It is a gift bestowed as a result of Good Friday and Easter.”15 Finally, Paul did not understand by Christian freedom the right to advocate theological anarchy within the confines of the believing community. A church that is unable to define and maintain the doctrinal boundaries of its own fellowship or, even worse, that no longer thinks this is a task worth doing, is a church that has lost its soul. The proclamation of the whole counsel of God involves identifying and saying no to those forms of teaching that, if carried out consistently, would threaten the truth of divine revelation itself.16 This is one of the most serious issues facing the contemporary church today. We can err either by drawing the boundaries too tightly or by refusing to draw them at all. On the one hand, we lapse into legalism; on the other, into relativism.
14 J. Calvin, CNTC 11.92.
15 Cousar, Galatians, 109.
16 See T. George, “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and the Quest for Theological Integrity,” in P. Basden and D. S. Dockery, eds., The People of God: Essays on the Believers’ Church (Nashville: Broadman, 1991), 85–95.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353–354.

- We will not go astray if we remember that for Paul, Christian liberty was always grounded on the believer’s relationship with Jesus Christ on the one hand and with the community of faith on the other. Outside of Jesus Christ, human existence is characterized as bondage—bondage to the law, bondage to the evil elements dominating the world, bondage to sin, the flesh, and the devil.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to shatter the dominion of these slaveholders. Now God has sent his Spirit into the hearts of believers to awaken them to new life and liberation in Christ.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354.

이 자유는 이후 모든 성령의 열매에 배여있는 가치이다. 
- When the Galatians first received the Spirit of God, they also received the gift of freedom, as Paul made clear in 2 Cor 3:17, “The Lord is the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freedom.” When Paul listed the various graces included in the “fruit of the Spirit” (5:22–23), freedom was not included among these desirable virtues. This is because freedom is already presupposed in each one of them. Thus the fruit of the Spirit is freedom—freedom to love, to exude joy, to manifest peace, to display patience, and so on. It is for freedom that Christ has set us free. This means that Christian liberty is freedom for others, freedom that finds its true expression not in theological privatism (“I am free to believe anything I choose”) or spiritual narcissism (“I am free to be myself no matter what”) but rather freedom to love and serve one another in the context of the body of Christ.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354–355.

2절) 바울이 생각하기에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이방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는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의 충족성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 For the Galatians to accept this heretical theology and the practice derived from it would mean that they had rejected God’s all-sufficient provision for salvatio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and his finished work on the cross. This would be equivalent to their assuming “again” (palin, v. 1) the old yoke of bondage. In Gal 3–4 Paul drew a parallel between Jewish servitude under the Mosaic law and Gentile slavery to evil elements of the world. The same analogy still applies in the present context. For the Galatians to reject the cross of Christ by going “forward” into Judaism by accepting circumcision as a means of salvation would be the same as their sliding “backwards” into the paganism of their former life. For Paul, Jesus Christ was all or nothing. If you reject him now, he warned the Galatians, then he will be (future tense) of no use to you at all on the Day of Judgment.21
21 Longenecker denies that ὠφελήσει has any reference to the future eschaton, referring instead to the present alienation from Christ that a rejection of his redemptive work would imply (Galatians, 226). Betz (Galatians, 258–59), however, sees here a reference to the Parousia and Last Judgment. Cf. Rom 2:25–27.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357.

3-4절) 바울은 율법을 받은 사람의 경우에는 율법 전체를 행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 율법을 지켜야만 하는데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거대한 맹수를 율법이라는 사슬로 묶어두었는데 그 고리중에 하나라도 끊어지면 맹수는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그렇게 율법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힘입어 서 있을때 우리의 어떠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율법의 모든 순종을 위한 첫 걸음으로 보는 것이다. 

5-6절)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림
- “By the Spirit” and “through faith” recall two of the major emphases over which Paul had labored throughout the epistle. The Spirit was first introduced in 3:1–5 in the context of Paul’s reminder to the Galatians of their conversion to Christ and the great difference it had made in their lives. In Gal 4:6 Paul further linked the sending of the Spirit into the hearts of God’s children with the sending of the Son into the world to accomplish his redemptive mission. In Gal 4:29 Isaac, representing believers in Jesus Christ, was described as “the son born by the power of the Spirit.” The mention of the Spirit in this present verse anticipates the increasingly prominent role Paul would assign to the Spirit in his depiction of the Christian life in the closing two chapters of the letter. Similarly, the catchword “by faith” has been close to the center of Paul’s doctrinal exposition since its initial appearance in the summary definition of justification in 2:15–16. Paul’s rehearsing of the Abraham story in particular focused on the patriarch’s faith which God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3:6). Faith is also directly connected with baptism and the unity of the church associated therewith (3:26–29). Here in Gal 5–6 faith is intimately connected with love, so much so that Paul could say,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5:6).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360.

골 3:11에 따르면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라고 말한다. 과거 구약의 관점에서 할례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신약에 와서 이는 지엽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구원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다. 과거 카톨릭 신학에서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믿음’을 강조했는데 칭의의 관점에서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바울은 칭의를 말할때 믿음과 사랑을 함께 말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추가적인 선결조건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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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ccepted by the Apostles
Then after fourteen years I went up again to Jerusalem with Barnabas, taking Titus along with me. I went up because of a revelation and set before them (though privately before those lwho seemed influential) the gospel that mI proclaim among the Gentiles, nin order to make sure I was not running or had not orun in vain. But even Titus, who was with me, pwas not forced to be circumcised, though he was a Greek. qYet because of false brothers secretly brought in—who rslipped in to spy out sour freedom that we have in Christ Jesus, tso that they might bring us into slavery— to them we did not yield in submission even for a moment, so that uthe truth of the gospel might be preserved for you. And from those vwho seemed to be influential (what they were makes no difference to me; wGod shows no partiality)—those, I say, who seemed influential xadded nothing to me. On the contrary, when they saw that I had been yentrusted with zthe gospel to the uncircumcised, just as Peter had been entrusted with the gospel to the circumcised (for he who worked through Peter for his apostolic ministry to the circumcised worked also through me for mine to the Gentiles), and when James and Cephas and John, vwho seemed to be apillars, perceived the bgrace that was given to me, they cgave the right hand of fellowship to Barnabas and me, that we should go to the Gentiles and they to the circumcised. 10 Only, they asked us to remember the poor, dthe very thing I was eager to do.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갈 2:1–10.

1-2절) 14년 후에 내가 다시 예루살렘에 바나바와 디도를 동행하여 올라갔다. 나는 계시 때문에 올라갔습니다. 또한 나는 이방인 중에서 선포하던 복음을 유력해 보이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전했습니다.  이는 내가 달리지 않고 있고 또한 내가 달리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이다. 
14년만에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한 본 사건이 과연 행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인데 반해서 갈 2장은 공의회의 내용을 담지 않고 도리어 사사로이 쓴 내용이라고 밝히고 있기에 두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 아닌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등장하는 세 부류가 있는데 첫번째는 바울의 일행(바나바와 디도)이고 두번째는 거짓 형제들로 율법의 준수를 고집하는 부류이다. 세번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다. 
바울은 본문의 예루살렘 방문에 세가지 중요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는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라고 말한다. 이는 이러한 행동이 개인적인 의도나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방 가운데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Paul’s second motivation in convening the conference is succinctly expressed: “I went … to set before them the gospel that I preach among the Gentiles.” The verb anethemēn, “set before them,” means literally “to declare, communicate, advocate, propound.”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39.
세번째로 이 공회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바울 자신이 공회에 소환당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도적으로 모임을 소집했음을 밝힌다. 
The Jerusalem Council in Acts 15 also was a public event, one fraught with great tension and controversy. Yet in the providence of God that public airing and resolution of the question of Christian liberty was a necessary antidote against the destructive teachings of those who would have reduced the Christian faith to a small sect within Judaism. How do we know when to seek private counsel and when to take a public stand? When is it right to swallow our scruples and yield to a fellow Christian on a matter of secondary importance? Conversely, when is it wrong to sit still and keep the peace when our speaking out could make a difference about whether our church or our denomination will remain faithful to the gospel? There is a time to speak and a time to keep silent. Every Christian must seek the wisdom of the Holy Spirit to know which is appropriate at a given time.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0.

3-5절) 나와 함께 한 디도는 그가 헬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엿보기 위해서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우리가 잠시도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는 복음의 진리가 너희를 주장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Later, in his Letter to Titus, Paul addresses him as “my true son in our common faith” (Titus 1:4). Titus was probably won to Christ through the witness of Paul himself and thus became one of his most trusted coworkers (2 Cor 8:23).94 Titus is nowhere mentioned in Acts but he appears frequently in Paul’s letters serving as the apostle’s confidential agent especially in the gathering and administration of the love offering the Gentile churches were collecting for the poor saints in Jerusalem (2 Cor 8:20; 12:17). It has been well said that Titus “possessed considerable people skills … and was a man of unquestioned integrity, especially with regard to financial resources.”95
94 E. E. Ellis, “Paul and His Co-workers,” NTS 17 (1971): 437–52. See also C. K. Barrett, “Titus,” Essays on Paul (Philadelphia: Westminster, 1982), 118–31, and B. Reicke, “Chronologie der Pastoral briefe,” TLZ 101 (1976): 82–94.
95 T. D. Lea and H. P. Griffin, Jr., 1, 2 Timothy, Titus, NAC (Nashville: Broadman, 1992), 273.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1.

왜 바울이 디도와 동행했을까?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시리아의 이방 교회에서 회심하여 돌아온 이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전해진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직접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이방인에 대한 할례에 대한 논쟁을 위해서 동행했을수도 있다. 
Why did Paul take Titus with him to Jerusalem? If, as we have argued, this visit was made for the purpose of delivering famine relief to the Christians of Judea, then it would be perfectly natural for a Gentile member of the church at Antioch to be sent along as an expression of solidarity between the predominantly Gentile church in Syria and the largely Jewish mother congregation at Jerusalem. However, there is also the possibility that Paul may deliberately have included Titus in the delegation to have a living example of a Gentile convert on hand when he “set forth” his gospel to the church leaders there. He surely knew that Titus was uncircumcised, and he may well have anticipated the controversy over this issue.
On this reading, then, Paul took Titus with him as a test case for the principle of Christian freedom. In some sense this was a deliberate act of provocation although, as John Stott has said, “It was not in order to stir up strife that he brought Titus with him to Jerusalem, but in order to establish the truth of the gospel. This truth is that Jews and Gentiles are accepted by God on the same terms, namely,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and must therefore be accepted by the church without any discrimination between them.”96
Here for the first time in Galatians we encounter the issue of circumcision. It will be mentioned again later in this same chapter and also in the closing section of the book (2:7–9, 12; 5:1–11; 6:12–15). Controversy over circumcision was not limited to the Galatian context. It dogged Paul wherever he went as can be seen from his discussions of it in Romans (2:25–29; 3:1, 20; 4:9–12; 15:8), Philippians (3:3–5), 1 Corinthians (7:18–20), and Colossians (2:9–15; 3:10–11). In Gal 2:12 Paul identified the troublemakers in Antioch as “those who belonged to the circumcision group.” The same expression recurs in his Letter to Titus (1:10), where the apostle warned his younger colleague against “many rebellious people” who oppose sound doctrine, “mere talkers and deceivers, especially those of the circumcision group.” In order for us to understand more clearly what was at stake in the episode over Titus at Jerusalem, and indeed in the Galatian crisis generally, we must review briefly the role of circumcision both within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96 J. Stott, Only One Way: The Message of Galatians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68), 42. Cf. also Barrett’s comment: “Paul could see that trouble was blowing up (the next few verses will show how near it was), and went to lay his cards on the table.… Perhaps what he wanted was a showdown, and he took Titus with him as a deliberate provocation. Jerusalem was evidently a divided church, for we leave the authorities and come first to the false brothers (2:4), that is, people who looked like Christians, and claimed to be Christians, but (in Paul’s view) were not Christians. It was these men who required that Titus, the Greek, should be circumcised, evidently taking the line that this was the only way into the Christian body, the people of God. Paul would not have it” (Freedom and Obligation, 11)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1–142.

창 17장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할례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징표로 생후 8일에 행하도록 했다. 이후 이 할례는 회개와 여호와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후 헬라시대에 할례는 유대인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징표가 되었다. 
- Circumcision is the act of removing the foreskin of the male genital, a rite practiced among various peoples of the ancient world as a sign of initiation at puberty or marriage.97 Among the Jewish people, however, circumcision originated in the special covenant God made with Abraham (Gen 17:1–27) whereby every male child, whether freeborn Israelite or household slave, would be 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after birth as a sign of participation in the chosen people of God. In the tradition of the great prophets of Israel circumcision is extended metaphorically to refer to the act of repentance and total consecration demanded by the Lord. Thus Jeremiah could deliver this word from the Lord for the people of his day, “Circumcise yourselves, and take away the foreskins of your heart” (Jer 4:4, KJV). Obviously the children of Israel were guilty of overreliance on the external rite of circumcision and the sacrificial system of the temple to the neglect of what Jesus would call “the more important matters of the law—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 (Matt 23:23). There may well be, as some scholars have claimed, a line of continuity between Jeremiah’s spiritualizing of circumcision in terms of a genuine response of the heart and Paul’s use of the term as a metaphor for the Christian life.98
In the Hellenistic Roman period, circumcision became more and more prominent as a distinguishing mark of Jewish identity as the people of Israel found themselves in a political environment that grew increasingly hostile. According to the Maccabean literature, the reign of terror unleashed by Antiochus IV (175–163 b.c.), included a prohibition of circumcision and a policy by which babies who had been circumcised were put to death along with the mothers who had submitted them to this sign of the covenant.

97 The following summary is based on the article by R. Meyer, “Περιτέμνω,” TDNT 6.72–84. Also see J. B. Polhill, “Circumcision,” MDB. Also worthy of note are N. J. McEleney, “Conversion, Circumcision and Law,” NTS 20 (1974): 319–41, and J. M. Sasson, “Circumcision in the Ancient Near East,” JBL 85 (1966): 473–76.
98 See, e.g., Paul’s comment in Phil 3:3: “For it is we who are the circumcision, we who worship by the Spirit of God, who glory in Christ Jesus, and who 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 Similarly, Paul can say to the Colossians that in Christ we have received a circumcision made without hands. This has happened through a putting off of the old life in the circumcision of Christ, evidently a reference to the experience of forgiveness secured by the cross and the inner transformation of the believer wrought thereby (Col 2:12–13). For Paul, regeneration, not baptism, is the New Testament antitype for which literal circumcision in the OT was the type. On how this issue has fared in recent baptismal controversies, see T. George, “The Reformed Doctrine of Believers’ Baptism,” Int 47 (1993): 242–54.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2–143.

- Thus, during the period of the New Testament, circumcision was regarded by devout Jews as an indispensable precondition and seal of participation in God’s covenant community. The strictest Jews insisted that even proselytes be circumcised as a rite of initiation into the special people of God. When Paul listed among his preconversion bragging points the fact that he had been “circumcised on the eighth day” (Phil 3:5), he was giving witness to the powerful emotional and ideological force this ancient rite conveyed to Jewish people everywhere.100
100 In the rabbinic Judaism of the post-NT era, this high view of circumcision was maintained. If the circumcision day fell on a Sabbath, “the duty of circumcision took precedence of the law of the Sabbath.” The circumcision ceremony was a high moment of family ritual including a series of benedictions and concluding with a feast. A major contributing factor to the Bar Kochba revolt of a.d. 135 was an imperial ban on circumcision promulgated by the emperor Hadrian. This ban was lifted by his successor Antoninus Pius (Meyer, “Περιτέμνω,” 79–81).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4.

바울에게 있어서 할례자인가 무할례자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 As he wrote to the Corinthians: “This is the rule I lay down in all the churches. Was a man already circumcised when he was called? He should not become uncircumcised. Was a man uncircumcised when he was called? He should not be circumcised. Circumcision is nothing and uncircumcision is nothing. Keeping God’s commands is what counts” (1 Cor 7:17–19). He explained the same principle somewhat differently in Gal 6:15: “Neither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means anything; what counts is a new creation.”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4–145.

할례를 중요시 여기는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행 15:1) 바울은 할례의 행위 자체가 아니라 이처럼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거나 부정하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 복음은 개인이 이를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할례의 행위여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 Then why all the fuss over Titus? If circumcision is after all a matter of indifference, then why not submit Titus, a Gentile believer, to this harmless ritual in order to keep peace with the more scrupulous element of the Jerusalem church? The answer relates to the claims for circumcision advanced by the Judaizing party, “Unless you are circumcised … you cannot be saved” (Acts 15:1). To accept this verdict is to renounce the truth of the gospel, that salvation is by divine grace manifested in Jesus’ completed work on the cross, the benefit of which is received through personal faith in the Redeemer, and that alone. In this case, for a Gentile believer to submit to circumcision is to “make Christ of no value to you” (Gal 5:2). Those to whom Christ is of no value are still under the curse of the law, without God and without hope in this world and the next.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5.

이처럼 디도는 할례를 받는 것을 거부했지만 디모데가 할례를 받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디도의 경우 이방인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받았지만 디모데의 경우는 어머니가 유대인으로 유대 전통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 구원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 Why would Paul be so adamant in refusing to have Titus circumcised when he was later so concessive in submitting Timothy to the same rite? The answer, of course, is that Timothy was not Titus. We know that Timothy had a Jewish mother, which, then as now, was a recognized criterion of Jewish identity. Moreover, the two situations were quite different. Titus, a Gentile, was being pressured to be circumcised in order to receive salvation and full membership in the church. Timothy, however, could submit to the ancestral traditions of his mother’s family without compromising the cardinal doctrine of salvation by grace. He did so with Paul’s full blessing in order to enhance their missionary witness among the Jews.104
To summarize: during Paul’s visit to Jerusalem, perhaps even during the course of his private meeting with the church leaders, certain “false brothers” made a big deal over the fact that he had brought with him an uncircumcised Gentile Christian, Titus, whom they insisted should undergo this sacred Jewish rite. Paul resisted, and their scheme came to naught: Titus was not compelled to be circumcised.

104 On the circumcision of Timothy see the perceptive comments of J. B. Polhill (Acts, NAC [Nashville: Broadman, 1992], 341–43: “Many scholars have argued that Paul would never have asked Timothy to be circumcised, since he objected so strenuously to that rite in Galatians. That, however, is to overlook the fact that Galatians was written to Gentiles and Timothy was considered a Jew. There was no question of circumcising Gentiles.… The converse was also true: Jews would not be required to abandon their Jewishness in order to become Christians. There is absolutely no evidence that Paul ever asked Jews to abandon circumcision as their mark of membership in God’s covenant people.… To have had a member of his entourage be of Jewish lineage and yet uncircumcised would have hampered his effectiveness among the Jews. It was at the very least a matter of missionary strategy to circumcise Timothy (1 Cor 9:20). It may have been much more. Paul never abandoned his own Jewish heritage. He may well have wanted Timothy to be true to his (cf. Rom 3:1f.).” See also W. O. Walker “The Timothy-Titus Problem Reconsidered,” ExpTim 92 (1981): 231–35.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6–147.

가만히 들어왔다라는 의미는 둘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악의적인 의도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 The verb Paul used is a kindred word, pareiserchomai, “to slip in,” “infiltrate.” It deepens the idea of a conspiratorial activity carried out for sinister purposes. True, this word can mean simply “to come in between or intercept.” Paul himself used it this way in Rom 5:20 to describe the unique purpose of the “intrusion” of the law into salvation history, “The law was added so that the trespass might increase.” The Galatian context, however, points unmistakably to the unworthy motives of these infiltrators. This is spelled out in the third word Paul used to describe what they did: kataskopeō, “to spy on, to destroy in a sneaky manner.” The word kataskopē is closely related to another Greek word, episkopē, “oversight,” a word Paul used in a positive sense to describe pastoral authority in the governance of a New Testament congregation. Perhaps Paul was here making a deliberate contrast between the proper oversight of a godly pastor and the arrogant usurpation of ecclesiastical power the false brothers had assumed for themselves.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7–148.

거짓 형제들의 특징
1) The false brothers were not what they seemed to be.
2) The false brothers were secretive in their work of disruption
3) The false brothers carried out their destructive mission step-by-step.
4) The false brothers demonstrated the connection between false teaching and unworthy behavior
5) The heretical trajectory of false teaching.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48–150.

결국 본문에서 디도와 거짓 형제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자유와 진리라는 두가지의 매우 중요한 개념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결국 거짓 형제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파괴하려고 한다. 
The parenthetical paragraph on Titus and the false brothers concludes with the introduction of two concepts that will dominate the remainder of Galatians: freedom and truth. The underhanded efforts of the false brothers were aimed at subverting “the freedom we have in Christ Jesus,” a phrase that sums up the central theme of the entire letter. To submit to their demands would have been to abrogate the No Longer of Christ’s finished work on the cross and the present reality of the Holy Spirit, who had been poured out in the lives of the Galatian believers. Paul used the example of Titus to encourage the Galatians to resist the same kind of bondage that was being urged upon them by equally subversive interlopers who had intruded into their midst. Later in the letter he would reiterate this theme: “Stand firm, then, and do not let yourselves be burdened again by a yoke of slavery” (5:1).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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