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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Therefore, my beloved, fas you have always gobeyed, so now, not only as in my presence but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13 for hit is God who works in you,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ihis good pleasure. 
14 Do all things jwithout grumbling or kdisputing, 15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lchildren of God mwithout blemish nin the midst of o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shine pas lights in the world, 16 holding fast to qthe word of life, so that in rthe day of Christ sI may be proud that tI did not run in vain or labor in vain. 17 Even if I am to be upoured out as a drink offering upon vthe sacrificial offering of your faith, I am glad and rejoice with you all. 18 Likewise you also should be glad and rejoice with me. 
f[ch. 1:5; 4:15]
gHeb. 5:9; [2 Cor. 10:5; 1 Pet. 1:2]
h1 Cor. 12:6; [Heb. 13:21]; See 1 Cor. 15:10
i[1 Tim. 2:4]
j1 Pet. 4:9
k1 Tim. 2:8
l[Matt. 5:45; Eph. 5:1]
mJude 24
n1 Pet. 2:12
oSee Deut. 32:5
pMatt. 5:14, 16; [Titus 2:10]
q[Acts 5:20]
rSee 1 Cor. 1:8
sSee 2 Cor. 1:14
tGal. 2:2; 1 Thess. 3:5; [Gal. 4:11]
u[1 John 3:16]; See 2 Cor. 12:15
v[Rom. 15: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2:12–18.

본문은 구원의 현재 시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이제 그 구원을 이루어내야하고 주님께서 오시는날 영광스럽게 그 구원을 이룰 것이다. 
이 구원은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서는 공동체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루어야할 구원의 스펙트럼은 대단히 넓다. 개인과 가정을 넘어서서 가정과 나라와 민족, 세계를 지나 광대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다. 우리는 이 구원을 이루어내는 주체로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안에 함께 하심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 일을 이루어 낼 것이다. 이 구원이 공동체 적인 이유는 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독은 바로 원망과 시비이다. 불만에 차 수근거리는 태도는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생명의 말씀에 굳게 서서 빛으로 살아낼때 자랑할 것이 있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 구원이 자랑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아깝지 않다라고 고백한다. 

12-13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여, 여러분들이 항상 나에게 순종하였듯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 더더욱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들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 일하려는 의지도 갖게 하시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고 계시니까요.
개역의 번역은 약간 오역으로 보인다. 1:5, 4:15에서 보는 것처럼 이미 항상 순종하였던 것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룰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구원을 개인적인 구원으로 볼 것인가, 공동체적 구원(평안, 안녕)으로 볼 것인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만족할 수 없고 날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성숙해가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렵고 떨림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만큼 선해질 수 없다고 걱정할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들 속에서 역사하셔서 그들을 돕는다. 12절이 행위를 통한 구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바울은 분명히 이런 가르침을 거부한다.(3:2-11) 
The Philippians have obeyed(cf. Christ’s obedience, v. 8) in the past and should continue to do so as they work outthei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They cannot be content with past glories but need to demonstrate their faith day by day as they nurture their relationship with God. But while God’s justice is a cause for sober living (“fear and trembling”), it is not as though Paul wants the Philippians to be anxious that they can never be good enough to merit God’s favor. Rather, it is God’s love and enabling grace that will see them through: it is God who works in you. They can rejoice in God’s empowering presence even as they work hard at living responsible Christian lives. While v. 12 may seem to suggest salvation by works, it is clear that Paul rejects any such teaching (cf. 3:2–11). In 2:12 Paul means “salvation” in terms of progressively coming to experience all of the aspects and blessings of salvation. The Philippians’ continued obedience is an inherent part of “working out” their salvation in this sense. But as v. 13 demonstrates, these works are the resultof God’s work within his people.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Even the desire (“to will”) to do what is good comes from God; but he also works in the believer to generate actual choices of the good, so that the desires result in actions. (On fear of God, see notes on Acts 5:5; 9:3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4.

13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빌립보의 독자들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그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즉 교회의 일치를 통한 안녕)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의지(will)를 발동시키시고, 이룰 수 있는 능력(energy)도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들의 “구원”(즉 공동체의 안녕)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3절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의 역사하심을 상기시켜, 12절에 한 권면을 그들이 이행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그리하여 그것을 이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까?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12절의 “구원”을 개인의 종말론적인 구원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12절은 알미니안주의자에게 합당한 것이고, 13절은 칼빈주의자에게 적절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12절의 “구원”이 공동체의 안녕을 의미하는 사회학적 개념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하더라도 12절은 독자들에게 성화를 통한 교회의 일치와 안녕을 이루어 가라고 권면하는 알미니안적 강조를, 13절은 하나님께서 독자들에게 바로 그것을 이루려는 의지와 이룰 수 있는 능력도 주시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칼빈주의적 강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절과 13절은 얼핏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관점들이 온전한 균형을 이루며 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이건 공동체적이건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두려움과 떨림”, 즉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런 성화를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리 와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시키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후자의 확신이 없다면,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지 않은 채 성화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것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그런 성화는 당연히 온전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는 아무런 성화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화를 이루려는 의지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실상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칼빈주의적 관점이 없는 알미니안주의는 인본주의에 불과하고, 성화를 위한 알미니안적 강조가 없는 칼빈주의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01–103.



14-15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흠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어그러지고 뒤틀린(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그런 자들 가운데서 너희가 세상의 빛처럼 비춰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로 하여금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상속에서 빛으로 살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삶을 상기하는 표현을 인용한다. 
(신 32:4-5, 개정)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진보는 원망과 시비에 의해서 위협을 받았다. 
Paul continues the theme of “working out” one’s salvation (vv. 12–13). The Philippians should shine as lightsamid 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Paul’s choice of words recalls the wilderness generation of Israel, who in Deut. 32:5 are described by these very words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nd whose spiritual progress was thwarted by grumblingand questioning(cf. 1 Cor. 10:1–12).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4.

하나님은 반석이시며 그분의 길은 정의롭고 진실하시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바르신데 반하여 이스라엘은 악을 행함으로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롬 9:25-26은 하나님께서 내 백성 아닌 자들을 내 백성 삼으셨다라고 말한다. 
Paul refers to Moses’ song (Deut 32:5), also a free-standing hymn in Paul’s day. It contrasts the crookedness of the people with God’s rock-like faithfulness (Deut 32:4), expressing that the people are no longer God’s children because of their wickedness. Paul says that God has now fulfilled his promises, however, and made people his children again (cf. Rom 9:25–26, where God changes “not my people” into “my people” so that they are then his “children”; cf. also “adoption” in Rom 8:23; Eph 1:5).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8–2419.

16절)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들어 내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수 있도록 하라.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결국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굳게 하는 사역인데 그렇지 못할 때 자신의 달음질과 수고가 헛될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헛되지 않도록, 도리어 자랑할 것이 있도록 말씀위에 굳게 설 것을 요청하고 있다. 본문의 ‘밝혀’라는 단어는 ‘에페코’로 굳게 붙들다, 제시하다, 제공하다, 주목하다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The Philippians’ obedience to the word of lifeis not merely a matter of private concern. As an apostle and fellow sharer in the gospel, Paul’s own laborwould be in vainif they failed to hold fast until the day of Christ(cf. 1:6; 1 Thess. 5:2–11; 2 Pet. 3:10–13; Rev. 20:11–21:8) and thus proved not to be genuine believers. Holding fastmeans both believing God’s Word and following it. Since the Greek epechōcan mean either “hold fast” or “hold out to, offer,” some think that Paul may have in mind “holding forth,” i.e., proclaiming, the word of lif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4.

이 에페코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5번 사용되는데 눅 14:7, 행 3:5, 딤전 4:16에서는 바라보다, 주목하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행 19:22에서는 유지하다, 계속 머물다의 의미를 빌 2:16에서는 굳건히 붙들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The compound ἀντέχωoccurs 4× (“hold firmly to” in Matt 6:24 par. Luke 16:13; Titus 1:9; “to help” in 1 Thess 5:14), while ἐπέχωoccurs 5×, once with the meaning “hold fast [orhold forth]” (Phil 2:16), otherwise “hold [the mind] toward,” i.e., “give attention” (Luke 14:7; Acts 3:5; 1 Tim 4:16) and “hold back, stay” (Acts 19:22).
par. (and) parallel(s)
i.e. id est(that is)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347.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세(두렵고 떨림)로 노력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이제 그것을 위해서 실제적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하여 일러 줍니다. 첫째로 모든 것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원망”이란 말은 “불만스러워 수군거리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그 길이 험하고 어렵다고 하여 불만에 차 수군거리며 그들의 해방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의 지도력과 지침에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을 당합니다(출 16:2–3, 민 14장과 16장, 고전 10:10). 물질적으로 쪼들리거나, 핍박이 있거나 다른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에 대해 특히 지도자에 대해 원망하고 시비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공동체는 파괴되고 맙니다. 원망과 시비야말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공동체의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서 설령 신앙생활이 여러모로 어렵더라도 원망과 시비 없이 공동체의 모든 일들을 해 나가야 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들과 같은 죄를 저지르면 그들처럼 멸망 받을지도 모르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의 자세를 가지고 원망과 시비를 자제함으로써 자신과 교회 공동체가 멸망 받지 않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뒤틀리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흠 없는, 순전한, 마치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같이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고, 그런 암흑의 세상에서 별(발광체)로 빛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별로 빛난다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말합니다. 빛을 발하는 자들로서 어두운 세상을 밝혀 다른 사람들이 빛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구성원들이 순전한 자들이 되고 원망과 시비가 없는(그러니까 화평과 일치가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적 사명 수행의 기본 조건이며, 지금까지 말한 바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교회가 선교를 위해서 해야 할 일 하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곧 ‘생명의 말씀을 밝힘’입니다. 여기서 ‘밝힌다’라고 번역된 말은 횃불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어 빛을 밝히는 동작을 그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동작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듦,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 내밈(즉 선포함)”. 이것은 첫째 외적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굳건히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그것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횃불을 꽉 움켜잡고 앞으로 내밀어 빛을 밝히듯이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앞으로 내밀어(즉 선포하여) 사람들을 흑암의 세계에서 건져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물론 복음을 지칭하는데, 그것은 복음이 생명(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03–105.

17-18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희생 제물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자신은 기뻐하고 너희 모든 무리와 함께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와 같이 너희, 빌립보 성도들고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명한다. 
바울은 자신을 전제로 드릴 것을 말한다. 
(딤후 4:6, 개정)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민 28:7, 개정) 『또 그 전제는 어린 양 한 마리에 사분의 일 힌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 드릴 것이며』 
그 전제는 위의 민수기의 기록과 같이 희생 제물위에 독주나 포도주를 붓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전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부어진 삶을 표현하는 생생한 묘사이다. 
(롬 12:1, 개정)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전제’는 원래 짐승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로서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붇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그것도 그림언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 그림을 쓰는 목적은 자신의 현재 처지에서 사형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때 뿌려질 희생의 피, 포도주같이 붉은 피를 독자들에게 연상시키기 위함입니다. 그가 1:27부터 권면해 온 대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또는 복음)에 입각한 올바른 삶, 곧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회를 세워 올리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믿음의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붉은 피를 “관제”(붉은 포도주)로 쏟아 붓게 되어도 그는 그들 모두와 함께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도 그는 역시 “너희 무리”(“여러분 모두”)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을 한데 묶으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희생적 사고와 삶으로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하라고 권면해 온 바울이 자기도 빌립보교회의 온전한 믿음의 삶을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도 바울 자신도 본받아서 공동체의 “구원”(안녕)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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