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bThe Lord saw that the wickedness of man was great in the earth, and that every cinten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 6 And dthe Lord regretted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egrieved him to his heart. 7 So the Lord said, “I will blot out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the face of the land, man and animals and creeping things and birds of the heavens, for I am sorry that I have made them.” 8 But Noah f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b Ps. 14:2, 3
c ch. 8:21; Job 14:4; 15:14; Ps. 51:5; Jer. 17:9; Matt. 15:19; Rom. 3:23
d 1 Sam. 15:11; 2 Sam. 24:16; Joel 2:13; [Num. 23:19; 1 Sam. 15:29]
e Isa. 63:10; Eph. 4:30
f ch. 19:19; Ex. 33:12, 13, 16,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6:5–8.
5절) 네피림, 즉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낳은 자식들은 용사이며 고대에 명성이 자자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땅에 많아질수록 이땅의 상태는 죄악이 가득한 상태였다. 사람들은 죄악을 행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모든 계획이 악하다. 인간들은 우리의 문앞에서 도사리고 있는 죄의 영향력을 거절하지 못하고 죄악을 행했다. 본문의 사람들은 가인의 후손, 셋의 후손 모두를 포함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던 아담과 셋의 후손들 마저도 노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인의 길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결국 악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며 파괴적으로 셋의 후손을 모두 가인의 길로 가게 만들었고 유일하게 소수, 노아만이 여인의 후손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는 모든 설화들에 홍수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홍수의 이야기속에서는 홍수의 원인이 인구 과잉과 이로 인해 발생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소음에 신이 진노하여 홍수를 일으켰다라고 말한다. 노아의 홍수 속에서는 이렇게 다른 신들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의 죄가 임계점(critical point)를 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땅을 바라보시며 인내하고 참으시는데 그 참을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섰다고 판단하셨기에 이제 심판을 계획하고 계신 것이다.
6-7절)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시는 주님께서 땅위에 사람을 지은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이 깊은 근심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결심하신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 뿐만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쓸어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지었음을 한탄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에 서있는 인간들을 향해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선악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이 죄는 모든 피조세계를 타락으로 이끌었다. 이제 세상은 총체적인 타락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락의 상태를 바라보시며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신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셨다라는 표현을 한다. 우리가 어떤 일에 후회하는 것은 슬픔을 표현함으로 우리가 한 어떤 행동이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표현이다. 우리들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후회하신다거나, 마음을 바꾸셨다라는 표현은 신학적인 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를 해결하는 세가지 방법
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단지 재고하는 방법, 신의 개방성(openness of God)
2) 신인동형표현으로 이해, 하나님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행동을 의인화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3) 이 표현의 번역이 바르게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하는 방법, 의미란 사전이나 어휘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용례를 평가함으로 의미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시적 분석(동시대 작가들이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였는지를 분석)에서 첫 단계는 세밀히 묘사된 사전적인 근거를 검토하는 것이다. 조사의 범위를 그 문맥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어근을 가진 동사들의 용례에 주로 국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어근 '나함’ 니팔형 어간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은 먼저 그 단어가 언급된 모든 인용구를 모으고, 이어서 그 문맥에서 제시하는 그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NIV가 이 단어에 대해 10개의 전혀 다른 번역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다른 번역들과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한 단어가 얼마나 복합적인지를보여 준다. 사전 편찬자의 임무는 어떤 단어에 대해 존재하는 의미의 범주들을 이해하고, 각 범주와의 연관성을 규명하여 연결해 주는 공통분모들을 밝히는 것이다. 전통
적인 번역에서는 ‘나함'에 대해 결국 두손을 들고 포기하고 말았으며, 한탄하다, 후회하다, 위로하다, 가없게 여기다, 위로받다, 마음을 바꾸다 둥과 같은 범주들과 연결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재검토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번역들이 정말로 적절히 분리된 범주들인지, 아니면 그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가 인정받지 못한 방식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둥을 물어야 한다. 필자의 분석 결과, 그 단어에 대해 예전에 주장된 것 이상으로 광범위한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필자는 이 단어를 회계 용어로 볼 때 가장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기에서 원장부들은 항상 일치해야한다. 즉 차변 기입액과 대변 기입액이 똑같아야 한다. 만약 그 장부들의 대차가 맞지 않다면, 조정해야 한다. 거래가 있을 때마다 거기에 맞춰 기입도 정확히 이루어져야 한다 '나함’ 의 니팔형은 개인적,국가적 혹은 우주적 '원장부들’ 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행위로볼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개인적인 손해로 괴로워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면, 먹구름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의 빛줄기를 보는 것 같이 그가 다시 마음을 잡게 해주는 어떤 행동이나 의해서 ‘원장부들’은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창 24:67; 삼하 13:39). 하나님은 처벌의 과정을 정하실 때, 이따금씩 대사면을 통해 처벌을 하시고 ‘원장부’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으심으로 균형을 유지하실 수 있다(렘 26:13; 욘 3:9-10). 사람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자신들의 악함으로 장차 도래하게 될 불균형의 결과들에 대하여 경고를 받았는데도, 회개하여 원장부의 균형을 회복하기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렘 8:6). 하나님은 그 원장부에 악이 적혀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와 자비로(욜 2:13; 욘 4:2) 혹은 처벌로(렘 18:10)로 그 원장부의 균형을 맞추시는 하나님으로 알려져 있다. NIV의 10가지 다른 번역들은 모두 이런 식의 표현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정보를 가지고 창세기 6장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사사기 21장에 잠시 들러야 할 것 같다. 거기 보면 베냐민 족속의 수가 줄어들었고, 다른 족속의 지도자들이 그 상황을 논하려고 함께 모였다. 6절에서 그들은 베냐민을 위해 “원장부의 균형을 맞추기"( 나함’ 의 니팔형 ; NN에서는 “grieved’ 로, 개역개정 “뉘우쳐”로 번역함- 역자 주) 시작했다. 그들이 결정한 조치의 과정은 8-14절에서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균형은 맞춰지지 않았고, 급기야 15절에서 그 백성들은 더욱 “원장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설명이 부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인즉 “이는(히브리어로 ‘키’ ki)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제시하고자 하는 입장은 창세기 6:6-7에 나오는 ‘나함’이 후회, 슬픔, 유감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상황을 교정하고자 노력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기에(히브리어로 ‘키’) 그 계좌들을 감사하고(auditing the account) 계신 셈이다. 하나님이 취하신 조치의 과정 속에는 지상에서 거의 전 인구를 쓸어버리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그 계좌들을 감사하는 조치는 인류의 악함으로 균형이 깨어진 ‘원장부의 균형을 잡으려는’ 그분의 궁극적인 의도의 일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견제와 균형의 체계’(system of checks and balances)를 시행하고 계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뉘앙스를 보여 수 있는 영어 동사가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결국 필자는 6-7절을 다음과 같이 완곡하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여호와께서 그 땅에 인류를 지으셨기에 그 계좌들을 감사하셨고 그 때문에 그의 마음이 그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그분이 괴로워하셨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인류를 지면에서 쓸어버리겠다. …왜냐하면 내가그들을 만든 이후에 그 계좌를 감사해 왔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번역에 사용할 영어 단어가 없어 곤란하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번역은 그 어근의 의미와 신뢰할 만한 연관성을 보이고 있으며, 하나님이 후회하거나 반성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성을 제거해줌으로써 그와 관련된 신학적 난제들을 해결해 준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고 계신 일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나 느낌도 없으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분은 그 상황을 ‘달아보시고” 그에 따라 그분의 정의감이 그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참조.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단 5:27)
- There are three ways to seek resolution. (1) We can simply rethink our view of God. This is exactly what is happening in the new theology called the “openness of God.”3 (2) We can justify the terminology by seeking to understand ways in which anthropomorphic language is used in describing God’s actions without imputing human limitations to him. This is the path followed in most commentaries. (3) We can reassess the lexical data to see if we are on the right track when we translate terms in particular ways. We must remember that meaning is established by usage, not by dictionaries or lexicons. The latter arrive at meaning by evaluating usage, and sometimes their conclusions must be reevaluated by starting from the beginning and checking the data they used to draw their conclusions. The need for this is especially evident when there is a lack of cohesion in how a term is translated or when the theological implications of a translation indicate that something may be amiss. Both of these situations exist in the word used here, so a reexamination is in order.
In synchronic analysis (that which explores how contemporary authors used the word), the first step is to examine a narrowly delineated lexical base. This means that the investigation must initially be limited to usage of verbs of the same stem as that used in this context.4 In this verse we are dealing with the Niphal stem of the root nḥm. The procedure is to gather all the references and consider what the contexts suggest about the meaning of the word. The fact that the niv uses ten different translations for this word,5 some exactly the opposite of others, indicates how complex a word it is.
The job of the lexicographer is to come to an understanding of categories of meaning that exist for a word and to identify the common denominators that define and bring cohesion to each category. Traditional translation has in effect thrown up its hands on nḥm and contented itself with categories such as grieve, repent, console, relent, be comforted, and change one’s mind. In a reexamination, we must ask whether these really are legitimately separate categories or whether some or all of them cohere in ways that have not been recognized. My analysis has concluded that a broader cohesion exists than previously maintained.
I propose that this word can be best understood in accounting terms. In bookkeeping, the ledgers must always be kept in balance; debits equal credits. If the books get out of balance, something must be adjusted. Whenever transactions are made, entries must be made accordingly. The Niphal of nḥm can be viewed in terms of acting to keep personal, national, or cosmic “ledgers” in balance.
If someone has suffered personal loss and is in mourning, his “ledgers” are brought into balance by some action or situation that gets him back on his feet by a silver lining he sees to the cloud (Gen. 24:67; 2 Sam. 13:39). When God has set a course for punishment, it can at times be counterbalanced by an act of grace that revokes that punishment and brings the “ledger” back into balance (Jer. 26:13; Jonah 3:9–10). God is disturbed when people have sinned and been warned of the coming consequences of the imbalance represented by their wickedness, but they refuse to balance their ledgers with repentance (Jer. 8:6). God is known as a God who does not allow evil to stand on the books but balances it with either grace and mercy (Joel 2:13; Jonah 4:2) or with punishment (Jer. 18:10). All of the niv’s ten different translations can be understood in these terms.6
Taking this information back to Genesis 6, we must first make a stop in Judges 21. Here the tribe of Benjamin has been decimated, and the other tribal leaders have gathered to discuss the situation. In verse 6 they begin seeking to “balance the ledgers” (niv “grieved,” the Niphal of nḥm) for Benjamin. The course of action they decide on is described in verses 8–14. Still balance is not achieved, and in verse 15 the people seek to “balance the ledgers” further, here with the important explanation, because (Heb. ki) the Lord has made a gap.
We are now in a position to suggest that nḥm in Genesis 6:6–7 has nothing to do with regrets, grief, or being sorry. Yahweh is seeking to redress the situation. He is auditing the accounts7 because (Heb. ki) he had made humankind. His course of action entails wiping almost the entire population from the earth. This action of auditing the accounts is the first part of his ultimate intention to “balance the ledger” that has been put out of balance by the wickedness of humankind.8 We can say, then, that God is enforcing a system of checks and balances as part of the equilibrium that he is maintaining in the world.
It would be wonderful if there were an English verb to capture this nuance, but alas, I can think of none. Consequently, I must resort to circumlocution: “The Lord audited the accounts because he had made humankind in the earth and his heart tormented him (i.e., he was distressed) over it. So the Lord said, ‘I will wipe humankind, whom I have created, from the face of the earth … because I have audited the accounts since I have made them.’ ” Despite the discomfort of not having an English term to use in translation, this proposal lends a credible cohesion to the meaning of the root and resolves the theological difficulties by eliminating any need to explain how God could be sorry or repent. This does not suggest that God is without emotion or feeling about what he is doing. It simply suggests that his action is motivated by his sense of justice as he “weighs” the situation (cf. “You have been weighed on the scales and found wanting,” Dan. 5:27).
3 See fuller discussion on pp. 106–7.
4 The “stems” in Hebrew refer to the various verbal forms that indicate that the verb is active (e.g., Qal), passive (e.g., Niphal), causative (e.g., Hiphil), and so on. Additionally, we will achieve the best results if we can eliminate those occurrences that are clearly in a different time period or genre or are used in specialized contexts or phrases. In the present case, however, these issues turn out not to be relevant.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5 The lxx likewise uses ten different translations.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6 The most difficult occurrence is probably 1 Sam. 15:29, which, in apparent contradiction to Joel 2:13, says that God is not like people to go about “changing his mind.” This needs to be understood in the context of the parallel term used in this verse, “lie”; it means that he doesn’t balance his words so as to deceive. The English term for this is “equivocation.”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7 Obviously this is a modern concept that would not have occurred to the Israelites—but translation always has to find a point of communication in the modern world of discourse if it is to succeed. Israel would be inclined to think of balancing a scale rather than balancing books.
8 In a similar way, the verses with the closest phrasing to this (1 Sam. 15:11, 35) depict Yahweh’s seeking to balance the ledger of kingship by removing Saul from office and appointing David.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1), 308–311.
히브리어 ‘나함’ 후회하다, 한탄하다라는 단어는 매우 복잡한 단어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 2. The meaning of be sorry, repent, change one’s mind. (a) The word is used to express two apparently contrasting sentiments in 1 Sam 15, where God says, “I am grieved (נָחַם) that I have made Saul king” (v. 11; cf. v. 35), but where Samuel also announces that “the Glory of Israel does not lie or change his mind (נָחַם), for he is not a man, that he should change his mind (נָחַם)” (v. 29). The explanation seems to be that God does not capriciously change his intentions or ways of acting. It is the change in Saul’s behavior that leads to this expression of regret. The reference is notable as being one of the rare occasions when God is said to repent or change his mind concerning something intended as good (cf. Gen 6:6).
(b) In many cases the Lord’s “changing” of his mind is a gracious response to human factors. Thus in Jeremiah we often read that repentance on the part of the people (usually שׁוּב, but נָחַם in Jer 8:6 and 31:19) will make it possible for God to repent, change his mind (נָחַם): 18:8, 10; 20:16; 26:3, 13, 19; cf. 42:10. Note also God’s response to Amos’s pleas on behalf of Israel (Amos 7:3, 6).
(c) In other places we are told or are left to infer that the change is due to feelings of compassion for a person or people. The ni. sometimes means “have compassion.” So the Lord “had compassion” on the people because of their groaning, although they deserved their punishment (Judg 2:18), and the people of Israel had compassion for Benjamin (Judg 21:6, 15) after they had vowed not to give them their daughters in marriage; having made a decision to punish them they tried to find a way of lessening the effects of the punishment (cf. Ps 90:13; Jer 15:6).
(d) In all but five occurrences of נָחַם the subject is God. The vb. occurs in the set formula describing God as “gracious (חַנּ֤וּן) and compassionate (רַחוּם),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love (חֶסֶד), and he relents (נִחָם) from sending calamity” (Joel 2:13; Jon 4:2, cf. 3:9–10).
ni. niphal
Willem VanGemeren,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7), 82.
8절) 하나님께서는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맞게 되는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줄기 빛을 비추어주신다. 바로 그것은 노아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이다. 이러한 죄악이 관영한 세상속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하나님의 눈에 합한 삶을 살아간 것이다.
노아는 당시의 모든 인물들과 차별적인 사람이다. 노아와 모세만이 유일하게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인물이다.(출 33:12, 13, 16, 17) 한명을 더 추가한다면 아브라함 정도가 가능할 것이다.(창 18:3; 19:19)
- Noah is distinguished from the rest of humanity. Apart from Noah, the only other person in the OT who is described as finding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is Moses, in Ex. 33:17 (and possibly Abraham; cf. Gen. 18:3). Placed on a par with Moses, Noah is rescued from the looming annihilat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1.
A에 해당되는 창세기 6:6a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만든 것을 한탄하고 있고, A’에 해당되는 창세기 6:7d에서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을 만든 것을 한탄하고 있다. B에 해당되는 창세기 6:6b에서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근심하고 있는 반면에 B’에 해당되는 창세기 6:8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은혜를 입고 있다. C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을 제거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7절의 ‘와요멜’(וַ֣יֹּאמֶר)의 ‘아말’(אָמַר)은 ‘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대화의 상대가 없을 경우 화자가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나타낸다.
인간의 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 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를 모두 땅에서 쓸어 버리겠다고 한다. 사실상 창세기 1장의 5–6일에 창조된 생명체를 언급하고 있다. 물고기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인 물을 염두에 둔 듯하다. 그리고 창세기 6:7은 창세기 6:3에서 인간의 날이 120년이라고 했던 말과 상호 관련이 있다. 고대 근동의 전통에서는 한결같이 급격하게 늘어난 인간들 만들어 낸 소음 때문에 분노한 신들이 홍수를 통해 멸망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의도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영적이며, 분노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였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교제할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과 동행) 의롭고 완전한 자가 노아였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35–236.
당시 죄악이 관영하였고 사람들은 항상 악한 생각을 했다. 악함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바라보시면 한탄 하셨고, 혹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 노력하셨다. 그의 일환으로 모든 것을 리셋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발견되었다라는 표현은 바로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후 9절을 통해서 노아가 의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이다.
하나님은 견제와 균형의 체계를 운영하시는 분이시다. 주식 시장은 강세장과 약세장으로 나뉘는데 이것에 영향을 미치는 요이는 수천 가지에 달한다. 정부가 혹은 중앙은행이 균형이 깨어졌을때 사이드카를 발동하여 시장 상황을 조정하려고 하는 것처럼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상을 감독하시고 조정하신다. 우리의 삶이 죄로 인해서 왜곡되고 망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감사하신다. 감찰하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시는지 깨닫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그분의 초월적인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조정하시기 위해서 홍수라는 방식을 선택하신다. 우리는 이 심판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죄가 가득찬 세상을 해결하시고 그분이 원히는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대홍수를 준비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혼돈을 사용하실 수 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혼돈에 빠진 개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혼돈을 사용하시기도 한다.(하나님의 몽둥이, 찰스 콜슨-워터 게이트-유죄 인정후 복역-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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