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니 스타크는 워싱턴 대학교의 사회학 및 비교종교학 교수이다. 그는 신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로 초기 기독교의 발흥에 관심을 가지고 당대 문헌과 자료를 조사하면서 사회학적 이론과 분석방법을 통해서 초대교회의 성장의 원인을 분석한다.
어찌보면 내부자의 시각이 아니라 더욱 신뢰가 가는 부분이 있다.
"기독교의 발흥(로드니 스타크)”의 책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의 성장률이 매10년당 40퍼센트 정도 였다고 추산한다. 그래서 AD 40년에는 기독교인의 숫자를 1,000명정도로 보는데 이 숫자가 AD 300년에 이르면 630만명으로 전체 인구에 10.5%에 이르게 되고 AD 350년에는 3,300만명으로 56%에 해당한다고 말한다.(p.23) 따라서 콘스탄니투스의 개종을 대대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응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의 중요한 이유 : “일탈적인 신흥종교 집단으로의 개종은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사람들이 비구성원보다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과 더 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했을 때 일어난다.” 이러한 성장의 과정속에 친구의 존재와 영향이 중요하고 또한 폐쇄적인 네트워크가 아니라 개방적인 네트워크로 나아갈때 폭발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초기 기독교 성장의 특징
1. 초기 기독교는 비천한 노예, 여성, 아웃사이더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고위층과 황실의 사람들을 포괄하는 집단이었다. 기독교가 프로레타리아 운동으로 간주되었다면 로마는 기독교를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위협으로 간주하고 대처했을 것이다.
2. 초대 기독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중에 많은 이들이 기독교로 회심하였다.
3. 큰 재난(역병)은 기독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급부상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재앙의 과정속에서 기독교의 사랑과 선행의 가치관은 사회 봉사와 공동체 결속으로 현실화되었다. 재앙이 닥쳤을 때 기독교인은 훌륭하게 대처했고 그 결과는 월등히 높은 생존률이었다. 매번 역병이 휩쓸고 간후, 기독교인은 새로운 개종 없도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 반면에 이교도의 비율을 급격하게 줄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사제들이 가난한 자를 외면하고 방치할 때 불경한 갈릴리인들은 이 점을 주목하고 구제하는데 주력했다. 불경한 갈릴리인들은 그들의 가난한 자만 돕는게 아니라 우리의 가난한 자까지 돕는다. 누가 봐도 우리 사람들이 우리로부터 받는 도움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p.131)
4. 여성의 역할 : 370년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다마수스 교황 1세에게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교도 여성의 가정집을 방문하는 것을 중단해 달라는 내용의 서면 훈시를 내릴 정도였다. 영아 살해및 낙태를 금지, 여성들의 종교성(개종의 성별 편향성), 높은 출산율
5. 초대 기독교 운동은 소아시아의 그레코-로만 도시들에서 가장 빠르게 발흥했고 그것을 지탱한 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였다.
6. 순교와 희생 : “헌금은 만찬을 베풀고 술잔치를 벌이고 식당에 가는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헌금은 가난한 자들을 지원하고 시신을 매장하고 부모 없는 불우 아동들과 집 밖으로 못 나오는 노인들, 난파선 피해자의 필요를 공급하는데 쓰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의 대의에 충성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광산이나 섬으로 추방되었거나 옥에 갇힌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지원하는데 쓰였다.(p.283)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와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구현하고자 애쓰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특히 목회자나 기독교의 리더들은 성서의 메시지(텍스트)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컨텍스트)과 연결시켜 해석해 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 역사는 기독교의 교리의 형성과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의 기록이 아니다. 세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상호작용해 왔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초대교회를 통해 한국 교회를 고민하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결코 그 시대가 이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순간도 현실교회에서 기독교적 이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적은 없었다. 초대교회의 기록들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도전들 앞에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이 된다.
교회사를 신학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게 되면 한계가 있고 또한 교회사의 시대구분이 다분히 서구 중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 인식과 의식의 지평 확대
역사 서술에서 객관이란 신화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객관은 사료를 다루고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1장. 교회의 시작점에 대한 논의-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론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이유
첫째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신앙고백적 위치를 인식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둘째는 오늘 교회 현실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주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다.
가톨릭 교회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예수 탄생의 날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실존의 시작이자 교회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다. 그래서 사제가 행하는 성찬이 중요하다. 화체설이란 사제가 성찬식에서 성체를 들고 축성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술취한 사제를 가장 두려워했던 포도주 생산 농민들) 이런 논리의 결과로 구원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베푸는 것으로 보았다.
루터가 깨뜨린 것이 바로 이 논리인데 구원이 교회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베푸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은 교회를 중시했고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겼다.
자유주의 - 인간 예수와 교조화된 그리스도
이들의 기본 입장은 예수는 이 땅에 와서 처음부터 교회를 세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최소한 예수를 도덕선생, 율법학자 혹은 선지자로 긍정적으로 그렸다. 20세기 초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했다. 현대화된 예수가 아닌 1세기 당시의 실제 예수를 찾아가려는 시도로 우리가 성서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독특한 인물일 것으로 보았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독자적인 교회를 세울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았는데 후에 제자들이 예수를 신화화해서 수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미지 혹은 종교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독교회의 출발은 유대교와 그 정체성이 완전히 분리된 1세기말에서 2세기 초 정도로 본다.
복음주의 - 예수 승천후 이루어진 교회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예수를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예수를 개인적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육체를 입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는 사두개파 혹은 바리새파처럼 유대교 내의 한 분파 혹은 이단으로 알려졌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전의 휘장이 갈라졌다. 죄의 해결을 위해서 유대교에서는 희생제물을 드린다. 예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구약에서 지시한 율법의 요구를 완성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계신다. 이제 이땅에 교회를 두심으로 천상사역과 연결점의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볼때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성령이 함께 함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때 이를 깨닫지 못하여 다 도망갔었다. 하니만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 승천으로 인해 초대교회가 등장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최초로 세워졌다. 이것이 복음주의에서 바라보는 교회의 시작이다.
2장. 기독교가 급속하게 확산된 이유 - 초대교회의 형성 배경
구약의 세계에서 초대교회의 세계로
신약의 역사, 더 나아가 교회의 역사를 서술할 때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구약 시대와 신-구약 중간사 시대, 그리고 에수 탄생 시점의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초대 기독교외의 역사를 공부하는 올바른 출발점이다.
이 중간사 시대는 인도의 석가모니(기원전 624년경)부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경), 플라톤(기원전 429년경),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와 중국의 공자(기원전 551년), 맹자(기원전 372년)등에 이르는 세계사의 성현들이 탄생한 시기이디고 하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고(기원전 722년),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기원전 586년)한 이후 바벨론 포로기를 거쳐서 귀환한 유대인들을 통해 성벽과 성전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 중간기의 시기는 열방들 속에서 지배를 받는 피지배의 시기이고 결국 유대 역사가 끝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이후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알렉산드로스의 통치를 거쳐서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의 통치를 받는다. 이 시기에 마카비 왕조의 유대 민족 운동이 일어난다. 이후 기원전 63년에는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던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 100여년후 멸망하게 된다.
구약의 주요 활동배경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던 우르와 페르시아만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후 신약의 초대교회는 이 지역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동쪽 아시아 지역으로 향하지 않고 유럽으로 서진했다. 왜 성령께서는 바울을 구약의 문화권이 아닌 새로운 문화권으로 부르셨을까? 그리고 그 성장을 촉발시킨 배경은 무엇인가?
중간사 시대 - 동서양의 만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유럽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지만 동진하여 페르시아와 일전을 치르면서 동방지역의 헬라화를 성취하였다. 이 시기가 동방과 서방의 문화가 마주쳐 융합을 이룬 첫 시기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오면서 헬라화의 압박(헬라문화와 헬라어 사용 강요)이 심해진다. 이에 항거해 마카비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와같은 중간기의 시기를 거치면서 유대교의 자의식과 정체성이 형성되고 세분화되면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이후 독립을 유지하다가 기원전 63년경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정복당하고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의 주류인 헬레니즘과 소수에 불과하던 헤브리이즘이 만나게 되었고 이 과정이 복음의 수용을 가능케한 토양의 준비인 것이다.
헬레니즘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여기서 놀라운 것은 기독교의 확산 지역이 구약과 예수의 활동범위를 훌쩍 넘어선 전혀 다른 지역들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셨다. 유대인들은 아시리아의 영향으로 아람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당시 예배때는 전통 히브리어를 쓰고 일상생활에서는 아람어를 구사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이들은 헬라 문화속에서 유대 문화를 추구하며 살았기에 문화충돌은 불가피했다. 헬라문화는 문화족 인종주의(타자를 전통, 문화, 종교, 언어, 역사적인 기준을 통해 다른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였다면 유대인들은 혈통적 인종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헬라화되기 쉬웠던 반면, 헬라인들이 유대인이 되기는 어려웠다.
칠십인 역, 기독교 확산의 언어적 토대
성서는 흩어진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도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헬라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통해서 종교적 일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에 '70인역’ 성서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칠십인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결별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
칠십인역은 헬라 문화속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헬라의 비윤리적이고 퇴폐적인 문화속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던 헬라인들이 이를 통해 유대 신앙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개종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불리웠다.
상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람어를 사용하던 에수와 그 열두 제자들이 구약의 세계를 벗어나 신약의 세계인 헬라 문화권인 지중해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음이 그렇게 전파되기 전부터 흩어진 유대인들과 칠십인역을 통해서 사전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에 유대 사상 뿐만 아니라 헬라 사상에도 정통한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서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유대 세계의 범주를 넘어선 기독교의 세계화라는 큰 그림속에서 로마를 바라본 것이다.
로마와 초대교회
로마는 인근을 정복하면 조약을 체결하여 해당 국가의 지배체제는 그대로 두고 단지 로마에 조공을 바치고 로마의 법과 행정, 가치관을 수용하도록 했다. 로마가 이런 간접 지배를 기본적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 이유는 당시 이미 헬라 문화가 전 지역에 충분히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예배를 드렸다. 중세교회가 라틴 문화권이라면 초대교회는 헬라 문화권이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 메시야 사상에서 출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와 로마 문화의 토양위에서 확산시켜 나갔다. 그 복음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헬라 철학과 로마법의 영향이 지대하게 나타났다.
초대 기독교는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복음의 완성과 확산을 위해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됨으로 기독교가 퍼져 나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졌다. 이러한 준비가 없었다면 초대 기독교의 전파는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3장. 민족주의, 인종주의를 넘어 세계로 - 유대교와 기독교
유대교와 기독교 분화의 흐름
칠십인역으로 인해 기독교가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서 동시에 유대교 신자들에게는 종교로서 유대교가 기독교에 우선권 혹은 정통성은 넘겨주게 되는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도 있다.
유대교에서는 신이 유대인을 선택하여 자신의 일, 즉 구원의 역사를 행한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이 결국 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유대민족의 배타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면 기독교는 이러한 유대의 배타성이 가려 놓은 신의 존재와 신에 관한 인식에 존재하던 차별의 장막을 거두어 해방시켰다.
종교라는 관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 예언자적 전통, 경전의 존재, 창조와 타락, 종말론의 관념등 공통점이 존재하지만, 유대교는 히브리 성서 그리고 이후에 미쉬나라고 하는 유대의 재판 기록과 그것을 해석한 탈무드 등의 율법 해석서들을 주요 경전으로 신봉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신봉하며, 신약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성취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유대주의의 형성과 발전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로부터 시작된 원시적 형태의 유대교는 헬레니즘 시대를 관통하여 기원후 70년, 즉 유대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까지이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이들과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귀환한 이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그들이 정통으로 서게 되었다. 이들을 귀환 이후 제2성전을 재건하고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의 혼합주의의 위협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면서 독특하게 정형화된 형태의 종교를 확립해 나갔다.
로마 제국은 헬레니즘화를 강요하였고 독립한 유대는 업격한 유대주의를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깊은 골과 상처가 생겼다. 초기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열심당등의 분파가 있었지만 기원후 70년의 유대전쟁과 그 후의 박해를 거치면서 유대주의는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 시점을 랍비 유대교의 출현으로 보는데 이들의 특징은 책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경전들이 집대성 되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이기보다는 유대교 여러 종파중의 하나였다. 유대교로 발전하는 바리새파와 정체성을 달리하던 나사렛파가 기독교로 분리되었다. 행 24장이나 28장을 보면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역초기 자신이 가는 도시마다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했다. 이는 초대 유대 공동체에서 바울이 학식있는 유대인이있기에 무슨말을 하는지 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가르치는 회당마다 분열과 갈등이 생겨나자 결국 그를 배척하게 된다.
기독교, 유대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를 넘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문명인인 헬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러한 도전앞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했고 이 결과가 폐쇄주의와 배타성이었다. 유대교가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가면서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하였다. 기독교가 단순히 유대교의 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보편 종교 혹은 세계 종교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 궁극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냈다. 더불어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점은 율법의 종교에서 약속의 종교로 나아간 것이다.
베드로는 선택받은 백성이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 공동체라고 가르친다. … 고등 종교의 가장 큰 핵심은 자기중심성의 극복에 있다. 보편 종교가 되는 것은 그 시대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가능하다. 그 시대 속에서 진정한 보편적 가치, 세계시민주의를 추구할 때 성장하고 꽃을 피워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독교가 성장한 시기는 유대교의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면서 유대 인종, 유대혈통주의와 선민주의를 벗어나서 세계 시민주의를 외쳤을 때이다.
교회의 갱신- 자기 중심성의 극복
오늘 날 기독교가 독선과 배타성,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는가? 바리새파 운동도 처음에는 헬라문화에서 오염된 유대인의 신앙을 개혁하는 개혁운동이었다. 하지만 바리새파운동이 그 역동성을 상실했을때 이데올로기로 박제화되어 수구적이고 폐쇄적이 된 것이다.
12세기의 스콜라학 - 13세기 대학의 모태가 됨 하지만 이 스콜라학은 16세기 스콜라주의로 이데올로기화 되어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대상이 된다.
신앙의 본질, 삶의 본질에 천착하여 나온 것이 바리새 운동이었다. 이런 신앙의 정화 운동이었던 바리새 운동이 역동성을 상실했을 때 조직으로 바뀌고 형식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종교를 수용하는 일반 대중이 관심을 가지는 가치는 교리가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삶이다.
단순히 유대교가 메시야 예수를 부정했기 때문에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 아니다. 보편적 가치, 신의 인간을 향한 본질에 대한 오해가 오히려 유대교의 자멸을 낳은 것이었으며, 반면에 인간 본질에 대한 재해석을 기반으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기독교가 역할을 대체한 것이다.
초기 기르스도인들은 새로운 인종, 혹은 헬라인과 유대인과 다른 제 3의 인종이라고 불렸다. 그들의 정체성은 헬라인의 문명과 야만의 구분, 유대인의 선민과 이방인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인종의 벽, 계급의 벽, 문화의 벽, 성별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이처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경계를 세우고 나누는 이들이 아니라 넘어서는 이들이었다.
4장. 대안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승리 - 초대교회의 성장과 박해
페허 위에서 돌아보는 초대교회의 성장
초대교회는 그 성장기와 박해기가 중첩된다. 초대교회의 구성원들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서 상류 계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장되었다.
교회, 대안적 인간관과 사회관을 제시하다.
초대 교회는 당시 로마의 전통종교가 주지 못했던 것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첫째로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고 둘째로 기독교회가 내세우고 실천한 인권과 평등사상이며 셋째로 로마인의 인식과 비교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내세관이다.
당시 노예나 하인, 여성이나 아이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교회가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복음과 예수가 가르쳐준 인간관 때문이다. 당시의 기독교는 오늘로 치면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감당했다.
빌레몬서에서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주인에게 오네시모를 잘 맞아 줄 것을 바울은 권면한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바울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고 비난하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앞서간 인식이요 행동이었다.(3세기 로마의 해방 노예 출신인 칼리스투스가 로마 감독, 교황으로 선출)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의 밥이 될 때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지 또한 여성을 위하고 보호하는 모습에 두번 놀랐다고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사상 속에서 역사란 동일한 과정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졌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신의 창조로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졌다. 이들은 역사란 신의 의지가 역사에 실현되며 역사는 신의 주권 아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가치관은 박해의 순간에 하늘나라의 복락을 고대하며 그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로마의 박해 이유와 양상들
로마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기독교회 안에는 순교자들과 변증가들이 출현했다. 순교자들은 기독교 신앙 때문에 로마의 박해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고 변증가들은 기독교 신앙의 편에 서서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서 외친 자들이다.
로마 제국에 있어서 종교란 개개인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한 신념 체계이기보다는, 로마 제국이 지향하는 사회 통합과 제국의 일체성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제로 이를 ‘피에타스’라 불렀다. 이러한 관점에서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미신으로 여겼는데 이들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식인풍습을 가졌다고 여겼으며 근친상간하는 성적으로 문란한 집단이라고 오해했다. 뿐만 아니라 보이는 우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도리어 로마인들의 눈에는 무신론으로 여겨졌다.
박해 앞에서 순교자들의 의연한 죽음은 살아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큰 용기를 주었다.(폴리갑)
박해가 남긴 유산, 그리고 오늘의 과제
박해로 인해 교회가 정화되고 확산되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는 배교한 자들을 교회가 다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말로 증거되기보다 죽음으로써 더 많은 증거를 보였다.
“순교자가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터툴리아누스)
5장. 죄인을 구원하는 은총의 통로 - 라틴 교회
라틴 교회, 헬라 문명을 넘어서다.
라틴은 본래 이탈리아 남부 라티움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세 유럽의 공용어였던 라틴어가 나왔다.
초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언어는 헬라어였다. 초대 교회의 발전에서 동방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주교구 교회가 로마, 콘트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 등 다섯 곳이 있었는데 여기서 로마를 제외한 네지역이 동방이다.
북아프리카, 라틴 신학의 중심에 서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로마의 이주 정책으로 아주 밑바닥부터 라틴 문화가 이식된 지역이다.
도나투스파 운동(경제적 분노와 종교적 열광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테르툴리아누스 -라틴 교회의 빛과 그림자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율법이 들어오게 된다. 서방 교회는 성서와 함께 교회가 결정하여 수용한 전통도 궁극적 권위로 동등하게 인정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카톨릭 교회의 신학적뿌리를 형성한 인물로 교회의 정의, 역할, 권위에 대해 다룰때에 철저하게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에서 주장을 이끌어냈다. 그는 라틴어로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남겼는데 이후 몬타누스 이단 운동에 빠져서 성인 반열에는 들지 못했다.
로마의 직접적인 식민지로 발전한 북아프리카에서는 지배자의 대중의 언어가 동일한 라틴어였음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을때 빠르게 문화화 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라틴화에는 두가지 작업이 수반되었는데 먼저는 헬라어로 정착된 신학 개념과 사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직 진화 단계에 있었던 신학을 라틴어를 사용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순교자들의 흘린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증거한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동방 신학은 헬라 철학의 바탕위에서 기독교 신학을 설명하고 있다. 반면 서방신학은 로마법에 기대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세속화(엄격한 금욕주의 주장)와 마르키온 주의(마니교에 영향을 받은 이원론)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의 여성에 대한 관점은 부정적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세례는 구원과 직결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세례는 이 땅에서 살면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박해를 견디는 삶을 살겠다는 공적인 선포이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의식을 넘어서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결단이 포함되는 것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고안하여 처음 사용하였다. 관계성의 층면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한 것이다.
라틴 신학, 공로주의의 길을 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유대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 이유는 그 법이 충분히 엄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복음에 대한 그의 이해가 공로주의로 가는 카톨릭 신학의 길을 열었다.
6장.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 - 동방 교회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보는 동양에 관한 인식과 규정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헬레니즘은 서구 역사의 뿌리가 아니다. 도리어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탄생한 헬레니즘 문화는 페르시아나 이집트와 같은 아시아권 문화와 융합했다.
이처럼 역사 해석에 있어서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텍스트 지상주의에 매몰되기 쉽다. 모든 신학이나 사상은 컨텍스트에서 출발하여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 컨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법을 알지 못하면 텍스트에 맹목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무리하게 다른 컨텍스트에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의 견해를 기초로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서 해석하는 것이 환원주의이다.
언어의 전환이 만들어 낸 다른 전통들
헬레니즘 철학과 헬라어라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공유하던 문화의 틀이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사고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스테리온(mysterious)과 세크라멘툼(sacramentum) : 신비를 나타내는 헬라어와 라틴어. 신비와 비밀. 신비를 풀려고 해도 쉽사리 풀 수 없는 것. 신비스러움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인 반면, 비밀은 풀어 나가는 것, 풀어야 의미가 있는 것등으로 볼 수 있다. 라틴어에서 세크라멘툼은 군인이 훈련소에 들어가 선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민간인이 선서를 통해 군인으로 신분 자체가 법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의 변화와 정체성을 법적인 용어로 설명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세례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살고자 한다는 결단이 내포된 법률적 자격이나 정체성의 변화로 받아들였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어떻게 죄가 용서되며 성령이 임하는 변화가 가능한 것인가 탐구하며 그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서방 교회에서 세례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적인 선포로 본다면, 동방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행위가 더 깊은 그리스도의 신비로 들어가는 첫걸음으로 본다.
결혼이 완성되는 순간은? 성혼 선포, 예물교환, 혼인신고, 초야를 치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사의 언어에 대한 차이와 인식의 차이가 교회의 역할의 차이를 가져왔다. 서방 교회에서처럼 법률적 관점에서 성사를 규정하면 한 개인의 구원의 여정에서 교회가 정한 의례의 중요성은 절대적이 된다. 이것이 라틴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카톨릭의 체제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즉 교회가 정한 성사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인문주의자들과 종교개혁가들에 의하여 이러한 틀이 깨진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헬라어 성서를 번역하여 성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 성서와 비교 편집함으로써 언어의 변환으로 인해 생긴 오류를 규명하였다.
동방 교회, 신비를 숙고하다.
일반적으로 헤브라이즘과 신본주의, 헬레니즘과 인본주의라는 단어를 연결시키는데 사실 헤브라이즘은 철학체계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유일신 여호와와 이스라엘 민족 간의 계약 관계를 핵심으로 하는 히브리인의 삶과 문화, 전통을 의미한다.
플라톤주의 : 이데아(천상)와 그 그림자인 현실세계 / 신플라톤주의(일자 개념)
서방과 동방의 차이 : 삼위일체, 구원에 대한 이해 / 서방은 신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했다면 동방은 신비를 그 자체로 경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의 성품을 설명할때 동방은 부정의 신학을 통해 신을 설명한다. 신의 성품을 규정하게 되면 신의 속성중 선함이란 무엇인지, 무한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규정해야 한다. 반면 동일한 내용도 부정문으로 표현하면 신의 진정한 성품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모나키(통치 혹은 시작, 원천 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 차이(필리오케 논쟁-성부,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이 발현하였다라고 바꿀것을 주장) / 성화상에 대한 입장 차이
낯설지만 열린 마음으로
같은 대상을 지시하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컨텍스트에서 사용할 때 다르게 이해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근대 선교 운동이 일어났을때 그리스 정교회 지역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와서 전도를 하자 이미 토착화된 그리스 정교와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기성의 관념을 흔들 만한 낯설고 다른 것들을 접하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이들은 이렇게도 이해하고 있구나’라는 자세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에 댛해서 도그마를 앞세워 단죄하는 자세로는 신학에 대한 풍부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려울 수있다. 물론 이런 포용은 자신이 위치해 있는 신학의 기반을 분명히 파악하고 그 위에 안정되게 서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7장. 근본을 추구하는 급진파들 - 초대교회의 이단 운동
교회사 속에서의 이단의 역할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트뢸치는 기독교를 정통 교회, 이단, 신비주의의 세가지로 분류하였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과거 그 시대에 있다가 사라져서 오늘의 현실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고비고비마다 유사한 흐름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오늘 우리의 역사일 수도 있다.
이단이 무엇인가? 신학적 관점에서 주류 교회나 주류 신학이 가진 신학적 프레임에 어긋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보편성이 결여될 문제가 있다. 실천적-사회적 관점에서는 건강한 모습을 띠느냐이다. 그래서 교리적 독특성뿐 아니라 해당 집단이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인 것이 자명할 때 이를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단 - 신비와 논리 사이
정통과 이단의 관계 : 본래부터 정통이 존재했고 이단이 반기를 든것인가? 아니면 여러가지 견해들이 서로 경쟁하다가 궁극적으로 이긴 것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일까?
정통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함축적인, 암묵적인 정통이었다. 이단의 문제 제기로 인해서 그 정통이 더 잘 설명될 필요가 생겨났고, 결과적으로 더욱 명확하게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하는 정통 신학이 형성된 것이다. 교회사속에서 이단의 도전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초대교회로부터 믿고 고백해 온 것을 확인하고 보존하고 강화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교리화의 과정이었다.
1985년 예수 세미나(150명의 성서학자들이 참여) : 이들은 사복음서와 도마복음, 5개의 텍스트를 비교하여 이중에 예수의 진정한 말씀은 붉은 구슬, 정확히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것은 핑크 구슬, 예수의 사상 속에 들어 있었을 정도의 말씀을 첨가한 것이라고 보면 회색 구슬, 후대의 완전한 창장물이라고 판단되면 검은 구슬을 넣어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92%의 찬성으로 최고 득표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은 82%의 득표를 얻었다.(p. 185)
교회에 대해 제기되는 도전에 대해 반이성, 초월성, 신비성만을 강조하여 대응하는 것이 해답은 아니지만 기독교에서 초월과 신비라는 가치가 제거되는 순간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진다. 교회가 직면하는 도전에 대해 교회는 교회의 초월과 신비를 설명하는 교리적인 정밀함이 아닌, 교회다움의 본질로서 거룩을 보여줌으로써 대응해 나가야 한다.
마르키온파와 몬타누스파의 역사적 위치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고 이해했다. 이에 대한 도전으로 교회는 율법과 은총과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몬타누스파는 강렬한 종교적 열정, 엄격한 신앙적 고행, 임박한 종말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사라진 이유는 정경이 마련되고 교회 직제가 마련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을 소멸시키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재세례파중에 폴란드 츠비카우의 예언자 조직은 독일의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뮌스터시를 점령하여 메시야 왕국을 선포하고 재림을 예언했다. 이렇게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는 이들이 반대파를 암살하고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등의 과격한 행동을 일삼자 가톨릭과 개신교 연합군이 뮌스터시를 전복시키고 재세례파를 흩어 버린다. 이후 메노 시몬스라는 지도자가 재세례파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한다. 당시 재세례파가 국가의 박해를 받은 주요 원인은 유아세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국가교회는 해당 영토에 태어나는 자는 자연히 영아세례를 받음으로서 국가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교회란 누구나 다 태어나자마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다르게 정의한 것이다.
개혁 -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정통이 모두가 믿어야할 규범을 제시한 것이라면 이단이나 이설은 내부의 정통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상을 추구하고 본질을 추구하며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실상 사회와 제도 교회가 흘러가는 관성을 거스르는 급진적인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이단 운동들에 대한 초대교회의 반응
첫째, 교회는 정경을 정하였다.
둘째, 믿는 바를 언어로 표현하는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셋째, 교회의 직제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제도화, 안정화를 위한 시도였지만 이는 고착화라는 부수적인 문제도 함축할 수 밖에 없다.
교회 역사에서 주류 교회가 자신을 내려놓고 변화를 추구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에 대한 통찰, 원천적 가치에 대한 천착, 이것이 진정으로 필요한 때이다. 진정한 급진성은 신학적 사유의 진보성, 개방성에 근거하기보다, 복음의 근원적인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한 타협없는 용기와 실천에서 찾을 수 있다.
8장. 세속화에 맞선 사막의 영웅들 - 수도원 운동
교회사에서 수도원의 위치
초대교회의 종교개혁을 이어 주는 중세 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시기를 암흑기로 볼 것인가 의미 있는 시기로 볼 것인가?
보통 수도원을 제도 교회와 비교하여 파라처치라고 표현한다. 이는 수도원 운동을 제도 교회, 주류 교회에 대한 주변부적인,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도원 운동은 기성 교회 제도가 사회적 역할을 담보하지 못하고 종교성을 상실했을 때 교회를 일깨우고 새롭게하는 역할을 감당했다.(영성과 운동성)
세속화를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
313년 콘스탄니누스의 기독교 공인, 밀라노 칙령을 기점으로 교회 역사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기독교가 인정되기 이전에는 예수를 믿을 때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이제는 예수를 안믿는 것이 차별을 받고 예수를 믿는 것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기독교가 담지하고 있던 도덕적, 영적 수준이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초기 수도원운동은 강력한 금욕주의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기번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종교로 도피한 불행한 삶”을 선택한 이들로, 부르크하르트는 “도피주의자들이 아니라 당시 교회의 세속화를 심각하게 자각한 사막의 영웅들”로 평가했다.(당시의 세례 요한)
공동수도회 : 대중적인 운동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든 개개인을 위해 기본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키는 온정주의 차원에서 시작됨 / 사람들이 모이게 되며 모임의 규칙이 강화됨
독거수도회 : 종교적 엘리트를 추구
사막 교부들이 은거한 사막이란 지리적으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장소가 아니었다. 사막은 신자들이 박해를 견디며 기독교의 정신을 이어간 상징적인 장소였다.
은둔 수도사들의 정체성 : 첫째 수도사들은 대개 신학자가 아닌 영성가를 추구했다. 둘째 수도원 운동은 속인 중심의 운동이다.
서방의 수도원들
베테딕투스회의 회칙의 핵심은 순종과 겸손으로 그 핵심은 신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시’, ‘자발적으로’, ‘불평하지 않고’이다.
수도회란 사람을 교육하는 곳이란 의미와 함께 교회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선발대이자 정예부대 역할을 하는 엘리트, 종교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수도회는 선교와 교육(학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에서 운영했던 학교가 고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한 것이 대학이다.
전반적으로 수도원에는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의 교차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할 책임
초대교회 당시 기독교가 국가교회로 공인되고난후 교회가 부요해졌을때 반대 급부로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세속을 떠나 복종의 본을 보여주었다. 이후 서유럽 기독교가 1200년경 최고의 번성기에 이르러 타락하기 시작했을때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등장하여 초대교회처럼 사도적인 청빈을 추구하는 삶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종교개혁당시 루터의 역할도 그러하다. 수도원은 재속 성직자의 규모에 비해 매우 적었지만 수도원이 역동적으로 활동했을 때는 작은 방향타가 거대한 항공모함의 방향을 정하는 것처럼 시대의 방향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 되어 속박받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쉼을 얻고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섬겨줄 수 있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떼제, 라브리, 예수원)
개인화되고 다원화된 현대 사회속에 사람들이 더욱 크게 부딪치는 소외와 고독의 문제, 박탈감의 문제, 근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 등은 개인의 역량과 역할로만 맡겨 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치밀하게 치열하게 이러한 구조를 읽으며 대처해 나가지 못했을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이다.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요 5장. 베데스다 연못, 불치병자들을 위한 해결책은 일차적으로 물이 동할때 그들을 그 물에 넣어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아가 베데스다 연못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할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바로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개인화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구원도 개인구원으로 환원시키면 된다. 개인의 책임이고 믿음이 없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상을 제대로 살피고 실제적인 도움을 줄 필요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현상 자체를 넘어서서 구조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야 한다.
수도원은 세상과의 분리, 현실 세계에 대한 무관심, 현실과의 유리 등 부정적인 영향을 남긴 것이 사실이지만, 반면에 수도원은 한 시대에 바로 명상과 사색 가운데서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것을 기성교회에 전해주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9장. 국가와 교회의 관계의 전환점 - 기독교 공인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고민하다.
초대교회는 국가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교회의 세력이 점점 커져감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갈수록 갈등이 불거졌다.
로마가 정복하여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신들을 인정해주면서 그것을 로마화시켜 로마 신화에 포함시켜나가면서 확장해 나갔다. 그런데 민족적인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사람의 전체적인 삶에도 영향을 미치도록 확장해 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로마에 위협으로 여겨졌고 믿는 이들을 직접적으로 박해하거나 성서를 압수하고 교회 지자들을 체포하거나 교회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박해가 이루어졌다.
기독교 공인, 교회의 힘에 대한 로마의 인정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은 어떤 지역을 정복하며 피정복지의 통치를 그 지역의 본래 지배층의 자율에 맡기고 세금만 걷어가는 방식이었다.
260년경 팔미라 왕국의 분봉왕이었던 제노비아 여왕은 로마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한 후 안디옥 감독으로 사모사타의 바울을 지명하였다. 교회의 감독이 지역의 총독을 맡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은 복잡한 로마의 정치적 지형속에서 이루어졌다.
국가주의 교회의 출발
기독교 공인은 교회에는 자유와 해방의 소식이지만 제국의 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는 로마를 새로운 가치 안에 하나로 묶기 위한 통치이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가 제국을 분열시킬 소지를 안고 있음을 보고 제국안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325년 티케아 공의회를 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계시를 받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기독교의 능력을 체험했고,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했지만 이후의 행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황제로 여전히 태양신을 숭배하는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며 이교 축전에 참석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국가의 핍박에서 벗어났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이는 교회가 타락할 수 있는 위험성에 직면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 공인 이전 교회는 핍박을 각오하고 예수믿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면 이후 태어나면서 의무적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 분열은 구원론이나 기독론이 아닌 교회론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재세례파는 신앙이란 자발적인 의지로 개인이 선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재세례파의 사상은 위정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넘어
도나투스파는 진정한 교회란 세상과 타협해서 특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으며 참된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라고 보았다.
프랑스에서 피의 혁명이 일어난것과 달리 영국에서 혁명이 없었던 이유는 웨슬리와 메소디스트의 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와 국가, 종교와 세속 권력의 긴장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때 종교는 타락하게 된다. (박정희 유신 개헌, 신국부 독재 시절의 교회)
교회는 국가의 이해를 넘어선 인간 보편의 이익과 가치를 지향할 때만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
10장. 제국 교회, 제국 신학의 탄생 - 니케아 공의회
공의회, 제국 신학의 출발점
313년 밀라노 칙령 반포후 서방교회는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도나투스파에 의해서, 동방교회는 아리우스파 이단의 출현으로 분열을 겪게 된다. 아리우스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와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가 열렸다.
아리우스는 3세기 중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등장하여 예수가 하나님과 동격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도 아닌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 니케아 공의회의 소집은 교회가 아니라 황제가 소집한 것이다. 이를 기록한 유세비우는 니케아 공의회를 대단히 큰 기독교의 승리, 박해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고 보았다. 기독교 역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삼위일체 신조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만, 제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 황제가 제국의 종교적 문제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역사가 학문적인 엄정함을 우구하기보다는, 흔히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처럼 지배자에게 유리하도록 지배자의 관점과 입장에 함께 하고 뒷받침하도록 쓰여져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역사로 남아 있는 기록의 효용성은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아리우스파, 그 길고 긴 논쟁
아리우스는 예수를 이성본질, 즉 하나님과 예수는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 호모우시오스)인가, 유사본질(homoiousios)인가 하는 문제로 나뉘었다. 이오타(i) 하나를 두고 벌어진 어리석은 논쟁 하나가 교회를 찢어 놓았다라고 에드워드 기번은 말하였다. 유사본질을 강조할 경우 에수의 신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여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결정을 공의회에서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교회문제에 세속 권력이 관여했으며, 관여한 황제의 결정이 신앙에 기초한 확신이나 엄밀한 신학적 입장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고려에 따른 것이었기에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이후 유세비우스는 이 결정이 정치적인 결정임을 간파하고 황제를 설득하여 아리우스를 복권하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하여금 친아리우스파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개최되면서 로마(라틴어권), 안디옥(헬라어권), 알렉산드리아(북아프리카), 콘스탄니노플과 예루살렘의 5대 교구체제가 이루어졌다. 동방의 4도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이 경쟁하다가 이슬람의 위협속에 약화되고만다. 8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이란ㄴ 위조문서가 로마의 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니케아 공의회 그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아들중 둘은 니케아 공의회 결정은 지지하고 하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를 지지했다. 그런데 이 셋의 충돌이후 콘스탄티우스 2세가 세력을 확보하며 다시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힘을 얻게 되었다. 율리아누스가 로마를 지배하는 동안,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갈릴리인들이라고 비하하는 등의 차별을 가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속에 아타나시우스와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여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헬라 사상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해석하고 이교도의 도전에 대응하는 변증신학을 발전시켰다.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게 많은 핍박과 추방을 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심성이 피폐해지지 않고 도 깊은 영성을 쌓았다.
동방 신학의 황금기
아타아시우스는 망명생활을 통해서 동방과 서방을 두루 경험하며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을 이어주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였으며 동서방 교회 모두에 큰 신학적 유산을 남겼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엄정한 논리로서가 아니라 아타나시우스처럼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고난을 통해서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적인 삶을 통해 아리우스파를 제압했고 위대한 갑바도기아인들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 드러난 세속의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본질을 지키려는 수도원적인 삶을 살았던 것이 아리우스파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이겨냈다.
서방신학은 스콜라학의 영향으로 어떤 현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를 학문의 형식을 따라 이론화를 이루는 것이 핵심이라면 동방신학은 ‘신학은 삶’이라는 핵심명제를 따랐다.
루터는 신학자를 만드는 세가지 조건을 첫째는 기도, 둘째는 말씀과 묵상, 셋째는 시험 혹은 고난이라고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이들까지 교회에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난속에서 투사가 아니라 성인이 되었다.
11장. 다름이 틀림으로 -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분열
다름이 틀림이 되는 과정
역사적인 관점에서 주요 신학이 규정되는 역사는 뒤집어 표현하면 교회의 분화, 분열의 역사이다.
나케아 공의회가 개최된 계기는 ‘얘수와 하나님이 동등하지 않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완벽한 신인 동시에,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논쟁
교회 공의회는 기독론에 관한 세가지 사상을 단죄했다.
첫째로 아몰리나리우스주의이다. 그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개의 완벽한 독립적인 실체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완벽하게 합쳐져 연합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성서의 어려운 부분을 알레고리로 해석했다. 반면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면서 유대교 전통, 즉 유대교의 문자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를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을 결합으로 설명했다. 이에 대해서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키릴리우스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서로 분리함으로 통일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반박이지만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입지가 강화된 데 따른 불안감으로 인해 제기된 정치적인 성격의 주장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교회안의 논쟁을 세속 군주에게 들고 나아가 결정을 부탁한, 교회 문제에 세속 권력이 개입하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네스토리우스는 황제에 의해 추방당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이단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배척당한 이들로 동방선교에 기여했다.
부정의 신학의 결정체
칼케돈 공의회는 500여명의 성직자들이 참석한 역대 규모의 공의회로 황제가 소집했다. 여기에서 결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모두는 만장일치로 가르친다. 한 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자는 완전한 신과 완전한 인간으로 섞이거나 변화되거나 나뉘거나 분리되거나 함이 없는 두 본성이다. 이 두 본성 사이에 두분이 연합을 통하여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며 오히려 각 본성의 동일성은 보존되면서 한 인격과 존재에서 동시에 타나난다."
이 칼케돈 회의는 잘못된 것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올바른 것만 남게하는 부정의 신학의 절정을 보여준다.
공의회가 남긴 유산
교회 공의회의 긍정적인 기여는 중요한 문제들을 정의하고 신학을 정리해서 합의된 교리를 도출한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유산으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 특정하게 정의하는 순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집단들이 떨어져나가게 되어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텍스트 기반의 교리적 관점에서분 아니라, 사람들이 문화와 전통 속에서 호흡하고 살아가는 컨텍스트를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12장. 초대교회의 뒤안길 - 아우구스티누스와 역사
초대교회의 끝자락에서
초대교회는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시기의 중요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중세교회사의 첫머리이고, 중세교회사의 마지막 인물인 동시에 종교개혁사의 첫머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실제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지,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지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 인식 혹은 역사철학을 정립하여 신의 도성이라는 관념을 제기했기에 주목받는다.
초대교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고 국교가 되어 당시 지중해와 소아시아 세계의 주류가되었다. 하지만 소위 정통신학은 당시 세상이 맞닥뜨린 로마의 멸망이란 사건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돌이 양편에서 제기하는 의문앞에서 어떠한 해답도, 영향력도 주지 못했다. 기독교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것이 교회의 나아갈 길인지 방향을 제시하는 고민이 부족했다. 프랑스 혁명, 유럽의 1차 세계대전, 나치의 독일 교회의 예속에서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위기의 순간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이 지적 여정
아우그스티누스이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는 이교도였다. 그는 타카스테라는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여기서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여인과 동거를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이때를 아주 방탕하게 지냈던 때라고 참회록에서 회고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지기도했고 신플라톤 철학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다.
그는 악은 신이 만든 창조의 문제가 아니라 선이 결핍된 상태, 즉 선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과 아타나시우스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결정적으로 ‘톨레레게 톨레레게’(집어서 읽어라)라는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 회심하였다. 이후 그는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신국론’, ‘삼위일체’ 이 삼부작은 모두 그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과 고민을 배경으로 한다. 기독교 공인이후 기독교가 맞닥뜨린 내적인 병폐들과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교회 외적인 문제등을 염두에 두고 그의 저작을 읽어야 한다.
펠라기우스는 은총이 잘못 적용되어서 모든 문제를 넘어가고 덮어주는 신학적인 문제가 사람들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을 낳았다고 보아 윤리적인 삶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다. 펠라기우스는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고 보았다.
서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로 인하여 주주 받은 존재인 인간을 강조하는 반면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선한 의지, 성화와 도덕적 삶을 위한 노력들을 강조하였다. 반(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인간의 원죄와 그 죄가 유전된다는 것을 수용하고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의 의지가 구원에 반영될 수 있음을 수용했다.
이러한 논쟁은 종교개혁시대 루터와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재현된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자신의지로 바뀌고 변화될 수 있다고 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에 입각한 ‘자유의지론’을 썼다. 루터는 이를 반박하여 의지의 속박,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도 죄 때문에 근본적으로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포한다.
종교개혁을 루터의 관점이 아니라 에라스무스나 재세례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의식
로마의 멸망은 ‘어떻게 신의 택함을 받은 로마가,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진 로마가 허망하게 이교도들에게 짓밟힐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낳았다. 그는 ‘신국론’을 통해서 제국을 신학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제국 너머의 신국으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다.
헬라의 역사관은 순환사관이었다면 히브리의 역사관은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창조로부터 완성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이 이끌고 개입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중요성은 바로 모든 역사적 사건과 그 과정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과 인간은 신의 뜻과 목적을 헤아릴 때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반대로 천국을 향한 나그네요 이방인의 삶을 추구하게 했는데 이를 통해 이 땅의 부정과 불의, 제도적 구조적 모순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하게 했으며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삶을 추구하게 했다.
이후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신의 의지에서 인간 이성(헤겔)으로 대체되었다.
기독교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이란 신의 뜻에 맡겨 버리는 종속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역사의 주체이자 적극적인 해석자로 서기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