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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 besides uthe former famine that was in the days of Abraham. And Isaac went to Gerar to vAbimelech king of the wPhilistines. And the Lord appeared to him and said, “Do not go down to Egypt; dwell xin the land of which I shall tell you. ySojourn in this land, and zI will be with you and will bless you, for ato you and to your offspring I will give all these lands, and I will establish bthe oath that I swore to Abraham your father. cI will multiply your offspring as the stars of heaven and will give to your offspring all these lands. And din your offspring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 because eAbraham obeyed my voice and kept my charge, my commandments, my statutes, and my laws.”

u ch. 12:10

v ch. 20:2

w ch. 21:34

x ch. 12:1

y ch. 20:1; Heb. 11:9

z ch. 28:15

a See ch. 13:15

b [Mic. 7:20]; See ch. 22:16–18

c Cited Ex. 32:13; See ch. 15:5

d See ch. 12:3

e ch. 22: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26:1–5.

 

 

1-2절) 이전에(12:10) 아브라함 때에도 흉년이 있었는데 이제 그 땅에 또 흉년이 들었다. 이에 이삭은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다. 

창세기 12:10 (NKRV)

10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은 벧엘에서 남쪽이었는데 당시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인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에 거주할 것을 말씀하신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은 앞서 20장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의 아들이나 손자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본문의 흉년이 아브라함때의 기근과 비슷한 수준의 기근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지금 이삭은 그랄로 향하고 있는데 그의 발걸음이 애굽으로 향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더 기근이 심해지면 애굽으로 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이삭이 하나님께 직접 처음 받은 신탁이었다. 당시의 애굽은 지금의 미국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풍요함이 넘치는 애굽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명하시는 땅으로 가서 거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의미로 애굽의 바로와 같이 그랄의 모든 왕을 칭하는 호칭으로 보인다. 

저자는 아비멜렉을 블레셋의 왕이라고 하는데(1 절), 아브라함이 만난 아비멜렉은 그랄의 왕이라고 할 뿐 블레셋의 왕이라고 하지는 않았다(cf. 2장). 사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집트의 약화를 틈타 주전 1200년대에 가나안 남서부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다. 그리고 11 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나안 땅에 상당한 세력을 확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람세스 3세(Ramses llI, 주전 1182-1151 년)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가나안 땅에 가사(Gaza), 갓{Gath), 아스돗{Ashdod), 에글론(Ekron), 

아스겔론{Ashkelon) 등 5 대 도시국가{pentapolis)를 형성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등장하는 블레셋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아직은 세력을 구축하지 못한 한 집단/족속을 의미하거나 시대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anachronism). 날 이 땅이 블레셋 족속의 땅이 되는 것을 근거로 해서 그들 이전에 이 땅에 거했던 왕을 후 세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블레셋의 왕으로 부르는 것이다.(엑스포지멘터리 468)

 

본문의 사건의 시간을 특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이후인지 아니면 그 전인지 분명하지 않다. 창세기의 기록은 연대기적인 순서보다 문학적인 순서, 사건의 배열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3-5절)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이 땅,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지시하시는 땅에 거주하면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게 하심으로 이삭에게 복을 주시고 이 모든 땅을 이삭과 이삭의 후속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것으로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라는 것이었다. 이삭에게 허락하시는 축복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내용은 22:16-18의 내용이다. 

창세기 22:16–18 (NKRV)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삭은 아브라함의 상속자로서 이 약속의 성취는 아브라함의 순종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위의 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브람과 이삭이 아비멜렉과의 관계를 다룬 이야기와 그랄에서의 여정이 비슷하다. 창세기 저자가 이렇게 비슷한 사건을 비슷한 플롯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결국 두 사건을 통해서 같은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아브람과 이삭은 모드 아비멜렉에게 자신들의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호하심으로 축복을 받게 된다. 결국 언약은 받은 자들도 연약하여 실수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그분 스스로 지켜주시고 이루어 주시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신앙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흉년, 기근이라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 그 기근을 피해서 곡식이 풍부한 애굽으로 가는 것이 너무나도 합리적인, 현실적인 선택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삭과 그의 가족을 기근이 있는 땅에 거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곳에서 인간적인 방식을 초월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인간적인 문제앞에서 우리의 무지와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 또한 우리의 논리와 상식을 초월한 일을 선택해야 할 때는 먼저 그 일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확인해야 한다. 

 

본문의 5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법도, 율법(토라)를 잘 지켰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율법이 없던 시절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이는 비록 아브라함이 거짓말도하고 실수도 하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었고 율법으로 규정되지 않았지만 율법에 준하는 삶을 살아냈음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며 신명기가 추구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아냈다. 

신명기 30:6 (NKRV)

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아브라함은 율법이 그렇게 추구했던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이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서 이삭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처한 상황이나 개개인의 정황에 따라서 다른 것을 요구하실 수 있다. 같은 사람에게도 비슷한 상황에 다른 선택을 요구하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여러 정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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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ut if you call yourself a Jew and drely on the law and boast in God 18 and know his will and approve what is excellent, because you are instructed from the law; 19 and if you are sure that you yourself are ea guide to the blind, a light to those who are in darkness, 20 an instructor of the foolish, a teacher of children, having in the law fthe embodiment of gknowledge and truth— 21 hyou then who teach others, do you not teach yourself? While you preach against stealing, do you steal? 22 You who say that one must not commit adultery, do you commit adultery? You who abhor idols, do you irob temples? 23 You who jboast in the law kdishonor God by breaking the law. 24 For, las it is written, “The name of God is blasphemed mamong the Gentiles because of you.” 


앞서 1-16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 모두 유죄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제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부여 받은 특별한 지위(율법과 할례)에 대해서 그 전선을 넓혀 가고 있다. 바울은 또다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으로 인해서 무언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을 터뜨리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알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 The Jewish Failure to Keep the Law (2:17–29)  It is human nature to think we are somehow better than others. We all tend to point to something in our pedigree that makes us stand above the commoners around us, perhaps a successful relative or a moment of victory in the past. For the Jews it was their family tree. They thought that being the recipients of the law placed them above others and gave them a special status before God. In 2:1–16 Paul explained that Jew and Gentile stand equally before God as guilty of sin, and therefore neither can be justified by keeping the law. Now he turns to the other side of the issue. The Jewish people knew they were sinners but believed that they had a special privilege because they were the people of the covenant. Now Paul bursts that bubble as well. He points out first that being the recipients of the law brings them no advantage because they do not truly obey it (vv. 17–24)*. Then he turns to the covenant and its sign, circumcision, arguing that it does them no good either because they are lawbreakers (vv. 25–29). In this section also, Paul returns to the diatribe style of 2:1–5, challenging you Jews (just you in niv) to think seriously about their relationship to God and the law.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1.


17-24절에서는 율법을 의지하는 유대인을, 25-29절은 할례를 의지하는 유대인을 경고하고 있다.

- Paul discusses the situation of the Jewish people relative to the law in two parts. First (vv. 17–20), he addresses their self-understanding in relation to the law. They thought they had a privileged place because they had the law (vv. 17–18) and therefore were placed in this world to guide the blind and the foolish around them (vv. 19–20). Second (vv. 21–24), he points out to them the basic problem—they had the law but failed to keep it (vv. 21–22). That they transgress their law obviates all the advantages of being the covenant people because they actually dishonor God by breaking the law (vv. 23–24).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1–72.

17-24절의 본문은 율법을 수여받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가르치고 설교하는 그 내용을 실천하는 것에 실패했음을 지적한다.

17-20절)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이들로 이들이 율법을 수여받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며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며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를 가진 자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된 자들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진리를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 The list of things that Jews boast in are legitimate sources of pride. God entered into relationship with Israel alone among all the nations, gave them his law, and set them out as a “light” (v. 19) to the nations (e.g., Isa 49:6).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294.

(롬 2:17-20, 개정)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롬 2:17-20, 새번역) 『[17] 그런데, ⑨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⑨그대는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⑨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18]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19]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며, [20]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한다고 합시다.』

17-18절)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5가지
1) 자신이 유대인이라 불리우는 것
2) 율법을 의지함, 자신들에게 율법이 주어진 것을 자랑함
3) 하나님을 자랑함
4) 율법의 교훈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앎
5) 율법의 교훈을 받아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함
이것자체는 참으로 부러워할 만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자랑하고 그들에게 맡겨진 것을 바르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0절) 본문에서 모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embodyment, the outward form이라고 번역된 '모포시스'라는 단어로 모습, 외형, perfect pattern이라는 의미로 딤후 3:5에서 경건의 '모양'이라고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 Full content translates a word in Greek that is rendered “embodiment” in most translations. The only other place where this Greek word occurs in the New Testament is 2 Timothy 3:15, where it has the meaning of “the outward form.” In the NEB this is rendered “they very shape (of knowledge and truth).”

Barclay Moon Newman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 to the Rom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3), 44.
19-20절) 어떻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 4가지
1)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
2) 어둠에 있는 자의 빛
3) 어리석은 자의 교사
4) 어린 아이의 선생
이것의 바탕은 바로 그들이 율법 안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21-22절) 이제 다시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한 4가지 질문을 던진다.
1) 가르침
2) 도둑질
3) 간음
4) 우상 숭배
이 내용은 마태복음 23장의 '화 있을진저'의 내용을 떠오르게 한다.

본문에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하는 것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먼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제대로 경배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제대로 경배하지 않거나 과도하게 경배함으로 우상을 섬기는 경우, 둘째로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을 실제로 빼앗고 도적질 하는 행동, 세번째는 이방 선전의 기물을 실제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고 여긴다. 이중에 3번째가 가장 그럴듯 하다.
- It is clear what Paul means by saying that they abhor idols since the idolatry that occurred so often in Israel according to the Old Testament was virtually unknown in the first century; the Jews were proud of their monotheism, and it was a symbol of their superiority over Gentiles. But it is difficult to see how the Jews would rob temples. Stealing from temples did commonly occur in the ancient world (see Josephus Jewish Antiquities 4.207), but the word itself can mean either “robbing temples” or “committing sacrilege or irreverent acts” against a temple (so Bauer et al. 1979:373). Therefore many believe that the sin is irreverence toward the Jerusalem temple, perhaps disregarding God by placing the law and themselves above God’s will (Hodge 1950; Barth 1933; Barrett 1957; Cranfield 1975) or by magnifying the law so highly that they turn it into an idol (Garlington 1990a:142–51). But this seems an obscure offense to set alongside the Jewish abhorrence of idols. Others see this as stealing from the Jerusalem temple itself (e.g., Bruce 1985), but again this does not parallel idolatry very well. Thus, most likely this refers either to the actual robbery of pagan temples or to the misuse of articles and wealth originally belonging to such temples (Godet 1969; Murray 1968; Michel 1966; Käsemann 1980; Krentz 1990; Stott 1994; Moo 1996; Schreiner 1998), which would have been regarded as taking from the temples by Jews. Derrett (1994:558–71) believes the “robbery” was defrauding pagan temples, but literal robbery is a very real possibility as well. Paul is hardly saying that all Jews did this but rather that it was a well-known practice.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5.

21-24절) 앞서 유대인들의 유익을 살펴본 바울은 이제 유대인들의 중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들이 선포하고 가르치는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자신들이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그러한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본인이 자신을 가르치지 않았다. 도둑질 하지 말라 선포하면서 본인은 도둑질 하였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면서 간음하였고 우상을 가증히 여겨라 말하면서 도리어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이를 망라하면 율법을 자랑하면서 도리어 자신이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이다. 결국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들로 인해서 이방인중에서 모독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도록 초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분의 영광을 더럽히고 나아가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들이 믿는 자들의 삶을 통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me too"운동이 법조계, 영화계, 연극계로 번져나가고 있다. 종교계안에서 이 문제가 지금 터져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역자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직하라 말하면서 정작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결국 이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좋겠지만, 모두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데 정작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가 말하고 가르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간극을 극복하는 것이 먼저 나 자신이 최우선적으로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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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s Judgment and the Law
12 For all who have sinned vwithout the law will also perish without the law, and all who have sinned under the law will be judged by the law. 13 For wit is not the hearers of the law who are righteous before God, but the doers of the law who will be justified. 14 For when Gentiles, who do not have the law, xby nature do what the law requires, they are a law to themselves, even though they do not have the law. 15 They show that the work of the law is ywritten on their hearts, while their conscience also bears witness, and their conflicting thoughts accuse or even excuse them 16 zon that day when, aaccording to my gospel, God judges bthe secrets of men cby Christ Jesus.

앞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 앞에서 같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이방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편향되지 않게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율법을 가졌던 그렇지 않던 간에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기준으로 공정하게 심판하신다. 앞서 11절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은 12, 13, 14절에 절에 계속해서 for(gar)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Paul now introduces the Mosaic law for the first time, an issue that will be prominent in the rest of the letter. The point is that if judgment comes by works (vv. 6–11), then all will be judged by the same impartial criteria, whether they are Jews with the Mosaic law or Gentiles apart from it (but still having a law written on their hearts by God). The theme of God’s impartial judgment in verse 11 is explained further (vv. 12, 13 and 14 all begin with gar, for) in terms of its effect on those without the law (v. 12) and with the law (vv. 12–13). All stand equally guilty before God, for those who have the Mosaic law fail to keep it (v. 13) and those who do not have that law still have God’s law written on their hearts (vv. 14–15).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67.


12절) 율법없이 범죄한 자(이방인)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자(유대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통해서 그리고 나머지는 양심의 법을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방인은 율법없이 망하고(perish, ἀπόλλυμαι is used in John 3:16 and 1 Cor 1:18 to designate the ultimate destiny of nonbelievers.) 유대인은 심판을 받는다(judge,κριθήσονται (a “theological passive,” God will do the judging) means not simply that those under the law will be judged but that they will receive a negative verdict, they will be condemned.)
이 둘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 Once again Paul compared two groups of people—those who were apart from the law and those were are under the law.88 The Gentiles were “apart from the law” in the sense that they had no responsibility to obey the commands and ordinances given to Israel through Moses. Israel was “under the law” because they were the recipients of God’s revelation through Moses, the great law-giver. Although both groups had sinned,89 the basis for judgment was different. The Gentiles would “perish90 apart from the law,” while the Jews would be “judged91 by the law.” The Mosaic legislation will play no part in the judgment of those who have not heard. God judges the “heathen” on the basis of the light they have received. In the case of those who have heard, however, the law will serve as the standard for judgment.92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9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 율법을 소유했던 율법을 소유하지 않고 있던 간에 관계없이 이 둘은 모두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 편에서는 달라보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모두 같은 죄인인 것이다.
- The Jews and Gentiles are separated in verse 12 as those outside the Mosaic law and those within it. Those outside will perish without it, but those inside will be judged by it. The first half is common Jewish diatribe against Gentiles (the fact that they were not the recipients of the Torah was the heart of Jewish contempt for them), but the second half is Paul’s rejoinder regarding their equal guilt before God. The key is that both have equally sinned, one outside and the other inside the law, and so both must suffer the consequences of that depravity. Since the Gentiles have sinned outside the Mosaic law, they will be judged accordingly, for they have still sinned against God. But the Jews have sinned from inside the law and so will by judged by the law. The parallelism between perish and be judged is obvious. Here the judgment of the Jews leads to a death sentence similar to that for the Gentiles at the last judgment (2:2, 5, 8–9, 16). There is no distinction, and the Jewish people have no final advantage. Today this is an important message to many churchgoers who think being active gives them a distinct advantage before God. Many will have the terrible shock of Matthew 7:23 when they too hear,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s!”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67–68.


13절) 바울이 말하는바 의인은 도덕적인 성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행함으로 얻는 구원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단언코 이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이를 차용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너무나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가르침, 율법의 행위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율법을 듣는 것은 그것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첫번째 단계이다. 하지만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들음이라면 이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 Obviously Paul was not teaching salvation by works. Later, in his summary of this entire section (3:20), Paul clearly stated that “no one will be declared righteous in [God’s] sight by observing the law.” In the immediate context Paul adopted for the moment the perspective of Judaism. What needs to be added is that no one could ever keep the law so perfectly as to be considered righteous before God. People have a fatal tendency to substitute passive agreement for action. But God does not pronounce people righteous because their doctrine is correct. Only those who do what God requires are declared righteous (cf. Lev 18:5).95 Hearing what the law requires is only the first step. Unless hearing becomes doing, it has no particular benefit (Jas 1:22–23, 25). This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94.

본문의 의롭다 하심은 justify(디카이오데손타이)라는 단어로 앞서 1:17절에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이들을 의롭다고, 무죄라고 법적 선언을 내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 Here Paul introduces the important verb “justify” (dikaiōthēsontai), which is part of the discussion in 1:17 and means that God makes a legal decision, declaring repentant sinners righteous or innocent as a result of the sacrifice of Christ for them. Yet this is problematic because it seems to link justification with obeying the law, something that Paul rejects in 3:20 (“no one will be declared righteous [justified] in his sight by observing the law”). It could be that Paul is not thinking of present justification but of final justification at the last judgment (so Dunn 1988a; Schreiner 1998); more likely Paul is writing from the standpoint of the Jew under the law, for whom the heart of the matter was obedience and not just hearing (so Barrett 1957; Murray 1968; Stott 1994; Morris 1988; Moo 1996). Of course, none could ever be truly justified by keeping the law, but Jews standing before God are held accountable for their actions.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68.

14절) 모세를 통해서 수여된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도 본능적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가 있다. 이러한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 본문의 본성은 단지 자연적인 직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가운데 창조하신 양심에 대한 신적 반응에 의한 것을 의미한다.
- This is a “natural” response, not because it is something that one does by instinct of by nature, but because it is a response of the divinely created conscience within man. An expression for their own free will is difficult to render in a number of languages. In some instances it is simply equivalent to “whenever they themselves decide,” “whenever their own heart tells them to,” or “whenever their innermost thoughts say they should.”

Barclay Moon Newman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 to the Rom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3), 40.

예를 들어 이방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연민을 품고 선을 행한다고 할 때, 그는 모세 율법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에게 부여된 신의 성품, 양심에 따라서 이러한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 By nature (see also 1:26) is used in accordance with “the typically Stoic thought of the moral law found in nature,” a view also seen in Philo and Josephus (Harder 1976:600; cf. also Martens 1994:55–67). Calvin (1974:97–98) called this “common grace,” and it means that the Gentiles had a certain innate sense of right and wrong that allowed them at times to do that which was required in God’s law. They do not know God, but they have an internal barometer that enables them to know when they are doing wrong in his sight. As Stott says (1994:86), “Not all human beings are crooks, blackguards, thieves, adulterers, and murderers. On the contrary, some honor their parents, recognize the sanctity of human life, are loyal to their spouses, practice honesty, speak the truth and cultivate contentment, just as the last six of the ten commandments require.” In this sense the Gentiles become a law for themselves, that is, they possess a God-given form of the divine law, a form that is in keeping with the Mosaic law. Paul’s point is that the Jews have no true advantage over the Gentiles by having the law, for the Gentiles have their own form of it.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69.

유대인들은 율법을 돌판에 새겼지만 이방인들은 그들의 양심, 마음에 그 것을 새겼다.
15절) 이런 이들, 이방인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서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1) 그들의 행동, 2) 그들의 양심, 3) 그들의 생각을 통해서 그들 자신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다.
마음(hearts, 카디아), 양심(conscience, 시네이데시스)
본문에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때로는 우리가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해서 네가 잘못했다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네가 잘했다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모든 상황과 사건에 대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해 놓고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우리 양심을 통해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판단해야만 하는 것이다.
- Accuse and defend are expressed in some languages as direct discourse—for example, “sometimes their thoughts say, You did wrong, and sometimes their thoughts say, You did right.”

Barclay Moon Newman and Eugene Albert Nida, A Handbook on Paul’s Letter to the Romans,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3), 41.

- The Gentiles by their conduct showed that what the law required100 was written on their hearts. Paul was not saying that God’s specific revelation to Israel through Moses was intuitively known by pagan peoples. He was saying that in a broad sense what was expected of all people was not hidden from those who did not have the revelation given to Israel. Their own conscience acknowledged the existence of such a law.101 Thrall suggests that Paul was saying that in the pagan world the conscience performed roughly the same function as the law performed in the Jewish world.102 The conscience, however, is not a norm for action but an inner witness that judges whether or not an act is right or wrong.103 It is customary to point out that in v. 15 Paul   p 96  distinguished three ways in which the pagan was apprised of moral responsibility—the law, the conscience, and thoughts that accuse or defend.104 But since Gentiles were “apart from the law” (v. 12), law in their case hardly could function for them in that sense. Further, two parallel clauses with which the verse closes are closely related. Although the conscience is not specifically the thoughts that accuse and defend, it is not wrong to say that they represent the way they function. The second clause clarifies and explains the first. In other words, one ought not to separate the conscience from the inner thoughts that alternatively accuse or defend. The picture is that of people inwardly debating an issue of moral conduct.105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95–96.

16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 나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것에 대해서 바울이 복음에 말한 것과 같이 심판의 날에 심판하실 것이다.
이 심판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 심판은 복음을 통해서, 여러 성경의 기록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선포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은밀한 것까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은 이에 대해서 핑계치 못할 것이다.

- The relationship of verse 16 to verses 12–15 is difficult because the previous verses discuss a present work of the conscience while verse 16 links it with the final judgment. Several different solutions have been proposed (see Cranfield 1975; Dunn 1988a; Moo 1996; Schreiner 1998): (1) Some believe it is a later addition, but there are no grounds for such. (2) Verse 16 might connote a present judgment in the mind (like v. 15), but Paul elsewhere uses “the day” for the Day of the Lord at the end of history (e.g., Rom 13:12; 1 Cor 1:8; 2 Cor 1:14; Eph 4:30; Phil 1:6, 10). (3) Both verses 15 and 16 could refer to the final judgment, with the conscience exercised at that final event, but that does not fit the present orientation of verses 14, 15. (4) The niv places verses 14–15 in parentheses, with the result that verse 16 would go back to verse 13 and justification at the final judgment. However, there is too close a link between verse 15 and verse 16 for this. (5) Verse 16 might sum up the whole paragraph with its emphasis on both present and final judgment. This is partially correct, but the introductory on the day when that opens verse 16 points to a special relationship with verse 15. (6) The best option is to see the present activity of the conscience as finding its culmination in the final judgment. In this sense verse 16 is in inclusio with verse 12, both referring to that final consummation when God will judge [everyone’s] secrets, that is, when all the things hidden from others will be brought to light by God (1 Sam 16:7; Ps 139:1–2; Mk 4:22 par.; Lk 12:2–3). This is similar to 1 Peter 1:17, where God is described as “a Father who judges each man’s work impartially”; that is, he both refuses to play favorites and judges on the basis of the totality of one’s actions.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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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Now before faith came, we were held captive under the law, qimprisoned until the coming faith would be revealed. 24 So then, rthe law was our sguardian until Christ came, tin order that we might be justified by faith. 25 But now that faith has come, we are no longer under a guardian, 26 for in Christ Jesus uyou are all sons of God, through faith. 27 For as many of you as vwere baptized winto Christ have xput on Christ. 28 y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there is neither slave7 nor free, zthere is no male and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29 And aif you are Christ’s, then you are Abraham’s offspring, bheirs according to promis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갈 3:23–29.


24절)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고전 4:15)이다. 이 단어는 ‘파이다고고스’라는 헬라어 단어로 스승, 보호자, 가정교사 등등으로 번역된다.  
- In ancient Greece and Rome wealthy parents often placed their newborn babies under the care of a wet-nurse who in turn would pass them on to an older woman, a nanny who would care for their basic needs until about the age of six. At that time they came under the supervision of another household servant, the paidagōgos, who remained in charge of their upbringing until late adolescence.123 The pedagogue took over where the nanny left off in terms of offering menial care and completing the process of socialization for his charge. For example, one of the functions of the pedagogue was to offer instruction in the basics of manners as this description from Plutarch reveals: “And yet what do tutors [hoi paidagōgoi] teach? To walk in the public streets with lowered head; to touch salt-fish but with one finger, but fresh fish, bread, and meat with two; to sit in such and such a posture; in such and such a way to wear their cloaks.”124 The pedagogues also offered round-the-clock supervision and protection to those under their care. In this regard Libanius described the pedagogues as guardians of young teenage boys who warded off unsolicited homosexual advances their charges regularly encountered in the public baths, thus becoming “like barking dogs to wolves.”125
No doubt there were many pedagogues who were known for their kindness and held in affection by their wards, but the dominant image was that of a harsh disciplinarian who frequently resorted to physical force and corporal punishment as a way of keeping his children in line. For example, a certain pedagogue named Socicrines was described as a “fierce and mean old man” because of his physically breaking up a rowdy party. He then dragged away his young man, Charicles, “like the lowest slave” and delivered the other troublemakers to the jailer with instructions that they should be handed over to “the public executioner.”126 The ancient Christian writer Theodoret of Cyrrhus observed that “students are scared of their pedagogues.”127 And well they might have been because pedagogues frequently accomplished their task by tweaking the ear, cuffing the hands, whipping, caning, pinching, and other unpleasant means of applied correction.
Thus the metaphor of the law as pedagogue is colored by the preceding image of the prison guard. The unfortunate translation of paidagōgos as “schoolmaster” (KJV) has misled many preachers and exegetes to interpret this metaphor in terms of educational advance or moral improvement. As we shall see in Galatians 5–6, the law continues to have a vital role for every believer in the process of sanctification. However, that function is clearly not within the scope of Paul’s meaning here. The fundamental error of Pelagius was to see the law, and for that matter Christ himself, as an external standard given to human beings as an incentive for self-improvement. Paul has already shown the utter folly of this approach to justification. No, in Galatians 3 the law is a stern disciplinarian, a harsh taskmaster. Yet in its very harshness there is a note of grace, for the function of discipline, as opposed to mere torture, is always remedial. “With its whippings,” Luther said, “the law draws us to Christ.”128

123 There is a large literature on Paul’s analogy of the παιδαγωγός. In addition to the standard commentaries, see especially L. G. Bertram, “παιδεύω” TDNT 5.596–625; R. N. Longenecker, “The Pedagogical Nature of the Law in Galatians 3:19–4:7,” JETS 25 (1982): 53–61; D. J. Lull, “ ‘The Law Was Our Pedagogue’: A Study in Galatians 3:19–25,” JBL 105 (1986): 481–98; L. L. Belleville, “ ‘Under Law’: Structural Analysis and Pauline Concept of Law in Galatians 3:21–4:11,” JSNT 26 (1986): 53–78; N. H. Young, “PAIDAGŌGOS: The Social Setting of a Pauline Metaphor,” NovT 29 (1987): 150–76; Westerholm, Israel’s Law, 195–97; Thielman, From Plight to Solution, 77–79.
124 Plutarch, Mor. 439f–440, cited in Young, “PAIDAGŌGOS,” 160–61.
125 Ibid., 159.
126 This incident is cited by Alciphron in EP.3.7.3–5, quoted by Lull, “ ‘The Law Was Our Pedagogue,’ ” 489–90.
127 Epistle 36; Young, “PAIDAGŌGOS,” 162, n. 138. Cf. Libanius’s likening of the pounding of the boat’s oars on the sea to the pedagogue’s lash upon a child’s back (Epistle 1188, 3–4; ibid.).
128 LW 26.346.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65–266.

25절) 믿음이 온 후로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멀리서 보았던 것을 우리는 가까이서 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보았던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성취하였다. 우리의 눈앞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말씀하신것, 족장이나 선지자들이 과거에 간절히 바랐던 것, 그리고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이는 율법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약화되었기 때문(롬 8:3)으로 하나님 스스로 사실상 이를 행하셨다. 이는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이 주제를 확장하여 어떻게 ‘믿음의 도래’가 우리를 율법으로 부터 자유케 하는지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업과 자유를 자유케 하는 지를 보여준다. 
- Paul described the whole complex of events surrounding the lif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as “the coming of faith.” He did not mean, of course, that the Old Testament saints were justified by works and we who live on this side of Good Friday and Easter are justified by faith. From 3:6 onward he strenuously argued the contrary: we are all the children of Abraham and heirs of the promise, by faith and not by works. Yet there is a critical difference. What Abraham glimpsed from a distance, we have seen up close; what he beheld in figures and types, we have received in fulfillment and reality. Before our very eyes Jesus Christ has been clearly portrayed as crucified (3:1). What God decreed in eternity past, what the patriarchs and prophets longed for in days gone by, and what the law was powerless to do—not because it was defective in any way but because it was “weakened” by human depravity (Rom 8:3)—God himself has in fact done. This has really happened not only theoretically but historically so that “now … we are no longer (ouketi) under the law” as a pedagogue. In the section that follows (3:26–4:11) Paul expanded on this theme to show how the “coming of faith” has set us free not only from the law but also for the inheritance and freedom of the children of God.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67.

율법의 3가지 기능
1) 제의적 기능, 2) 시민법, 3) 도덕법
- However, if one accepts the validity of the third use of the law, it becomes immediately necessary to distinguish further various dimensions or layers of the law as found in the Old Testament. The most commonly accepted schema finds within the law a threefold distinction: the ceremonial law, which included the sacrificial cultus and other regulations such as circumcision that related to the ethnic particularism of the Jewish people; the civil law, which contained the code of behavior and penal sanctions given to Israel as a national entity; and the moral law, the eternal standard of God’s righteous rule embodied succinctly in the Ten Commandments. When we speak of the third use of the law, that is of the continuing validity of the law as a moral guide in the life of the believer, we are speaking of the moral law of God and not the law in its civil or ceremonial aspects.131 Both of these construals, the threefold use of the law and the threefold differentiation within the law, are patterns of interpretation derived from the history of exegesis. While they do reflect an accurate distillation of the overall teaching of the Scripture, they must be used with great caution when applied to a particular text.
131 Theonomists regularly include the civil along with the moral law of God in their design for restructuring contemporary society on the basis of the divine will. A plethora of literature on this topic continues to be hotly debated among evangelical theologians. See W. G. Strickland, ed., The Law, the Gospel, and the Modern Christian: Five Views (Grand Rapids: Zondervan, 1993). See also the very sensible study by W. J. Chantry, God’s Righteous Kingdom: The Law’s Connection with the Gospel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0). On the third use of the law see the classic study by G. Ebeling, “On the Doctrine of the Triplex Usus Legis in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Word and Faith (Philadelphia: Fortress, 1964), 62–78.
 Timothy George, Galatians, vol. 3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4), 268–269.

26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you are all sons of God. This is the crucial difference between old covenant and new covenant believers: life under the law was slavery; life in Christ is marked by the freedom that comes from being God’s “sons.” Both men and women are here characterized as having the rights of “sons,” because with sonship comes the right of inheritance. The Greek word huioi (“sons”) is a legal term used in the adoption and inheritance laws of first-century Rome. As used by Paul here and elsewhere in his letters (cf. 4:5–7; Rom. 8:14–16, 23), this term refers to the status of all Christians, both men and women, who, having been adopted into God’s family, now enjoy all the privileges, obligations, and inheritance rights of God’s childre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51.

28절)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본문은 동일함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하나됨,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neither Jew nor Greek. The fact that the Mosaic law has been left behind in the old age means that, in the new creation, the distinction between Jew and Gentile is broken down (see Eph. 2:11–22). Certainly these Galatians do not have to become Jews in order to be Christians (cf. Gal. 3:14). There is neither slave nor free, there is no male and female does not imply that there are no distinctions in how these groups should act, for Paul elsewhere commands slaves (“bondservants,” ESV footnote) and masters differently (Eph. 6:5–9), and husbands and wives differently (Eph. 5:22–33). Paul clearly is not advocating the elimination of all distinctions nor the acceptability of same-sex marriage or homosexual relations (see Rom. 1:26–27). Rather, he teaches that old divisions and wrongful attitudes of superiority and inferiority are abolished,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He does not take away the distinction between men and women but says they are “united,” joined together in “one” body, the church. The verse teaches unity within diversity but not sameness.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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