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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But awhatever gain I had, bI counted as loss for the sake of Christ. 8 Indeed, I count everything as loss because of cthe surpassing worth of d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e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in order that I may gain Christ 9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f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gthat which comes through faith in Christ, the righteousness from God that depends on faith— 10 hthat I may know him and i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jmay share his sufferings, becoming like him in his death, 11 that by any means possible I may k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a[Luke 14:33]
b[Heb. 11:26]
c[2 Cor. 5:15]
dIsa. 53:11; Jer. 9:23, 24; John 17:3; 2 Pet. 1:3
eLuke 9:25 (Gk.)
fRom. 10:5; [ver. 6]
gSee Rom. 9:30; 1 Cor. 1:30
h[Eph. 4:13]
i[Rom. 1:4; 6:5]
j1 Pet. 4:13; See 2 Cor. 1:5
kActs 26: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Php 3:7–11.
이전에 율법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변화되었다.
7-8절) 이전에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이유는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이후의 삶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아니 전 삶에 대한 가치, 우선순위의 변화이다. 이전까지 바울에게 유익이라고 여겨지던 많은 항목들이 이제는 손실, 해라고 여겨지는 것이고 반대로 이전에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여겨지던 많은 항목들이 이익, 가치있는 일의 항목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후 10절에 이야기하듯이 이전에 십자가의 죽음과 고난, 부활은 분명하게 해에 해당하는 계정이었는데 이제는 가장 가치있는 항목외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손해와 이익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마 16:25-26)
Paul’s accounting, however, has now changed completely: what formerly went into the gaincolumn—his power, prestige, and “obedience”—now goes into the losscolumn. Likewise, the crucified Messiah, whom he had assumed must be a “loss,” is now seen as the ultimate “gain.” The language of loss and gain probably alludes to Jesus’ teaching (see Matt. 16:25–2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그런데 바울은 7절을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쓴 것들에 대해 반전을 이룹니다. 자신에게 인식의 변화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자신의 회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말하기 위해 상업적인 손익 대조표(balance sheet)의 용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족보(뛰어난 혈통)와 성취(바리새인, 열성, 흠 없는 의)를 과거에는 “이익”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이익”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손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가치가 뒤집어지는 가치전도(價値顚倒; Umwertung aller Werte)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6–127.
바울은 자신의 회심 또는 인식 변화의 근거를 먼저 “그리스도 때문에”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고는(7절, 8절 하반), 그것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우월성 때문에”라고 부연하고(8절),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라고 부연합니다(8–9절). 이 회심을 그는 또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나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의를 갖게 됨”이라고 설명합니다. 4절부터 6절까지 나열한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과 성취들은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나의 의”를 이루는 것들인데, 자신의 의와 그것을 얻게 하는 그런 것들이 “이익”이 아니라 “손해”임을 깨달았으므로 손비(損費) 처리해 버렸고 개똥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유효한 것이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의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27–128.
본문에서 배설물이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스키발론’으로 똥, 쓰레기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앞선 3:2과 연관하여 본다면 개에게 던져질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NTThe only NT usage is Paul’s in Phil 3:8. After recounting the natural and religious privileges that once seemed sweet and precious, he affirms that, for the sake of Christ, τὰ πάντα ἐζημιώθην, καὶ ἡγοῦμαι σκύβαλα, ἵνα Χριστὸν κερδήσω,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I regard them as rubbish, in order that I may gain Christ” (NRSV). Some have thought that Paul here deliberately uses language that is vulgar, or at least crude, perhaps comparable to Eng. crap(cf. Spicq 3:265; the orig. French is crotte, “dung”). However, the use of the term by various writers (see above, GL, esp. the refs. to Philo) does not indicate such a nuance; the rendering of the NIV 2011 is prob. on target: “I consider them garbage.” If Paul and his contemporaries associated the term with the notion of “what is thrown to the dogs” (see above, GL, ref. to Suda), there might be a wordplay with his previous warning regarding the Judaizers: “Beware of the dogs” (3:2; so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158). For further discussion of this passage see κέρδοςG3046.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326.
9절) 바울이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다. 이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바울이 이러한 선택을 한 가장 근본적인 중요한 이유는 그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 그는 율법에 열심을 품고 의로운자처럼 살면 그분 안에서 발견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생활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난 이후로 칭의가 율법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의지하고 추구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해로 여기고 이제 자신이 몸에 고난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때에 무죄선고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평생에 걸친 완벽한 순종의 기록을 전가하신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여기시며 따라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선다."
Found in himmeans being spiritually united to Christ and therefore found not guilty before God as divine judge. Paul had trusted in a righteousness of my ownbased on obedience to the law rather than the right standing before God that comes through faith in Christ. God “imputes” Christ’s lifelong record of perfect obedience to the person who trusts in him for salvation; that is, he thinks of Christ’s obedience as belonging to that person, and therefore that person stands before God not as “guilty” but as “righteous.” This is the basis on which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s considered “fair” in God’s sight. As explained in Rom. 10:1–8, righteousness cannot come by the law because all human beings sin, and therefore right standing before God as the divine judge is possible only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who isthe believer’s righteousness before God. See note on Gal. 2:16.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10-11절)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였고 그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어떻게든 가능하다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의 목표는 그분을 아는 것, 즉 인격적 관계속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그 부활의 권능 즉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서 행하시는 권능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 권능을 신자들이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직면하셨던 같은 종류의 고난, 타락한 세상에서 신실한 증인이 받아야만 하는 고난을 경험해야 한다.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The goal of trusting in Christ is to know him, that is, to know Christ in a personal relationship, and also to know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namely, the power Christ exerts now from the right hand of God. But this power is made known as the believer shares the same kind of sufferingsJesus faced—the sufferings that attend faithful witness in a fallen world. The good news is that those who suffer with and for Christ will attain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even as he di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5.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우리를 위해서(우리 대신/대표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우리 대신(대표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 안에 내포시켜 우리가 그리스도의 품격과 하신 일에 동참하도록 만듭니다. 그의 죄에 대해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죽음이 되고, 그의 새 생명으로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며, 그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되고,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됨이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 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옛 아담적 자아(죄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아담적 자아(새 사람/ 새 피조물/ 의인)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6:1–11, 갈 3:27). 요컨대 믿음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대신적(대표적) 속죄행위의 덕을 입게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구원은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미 이루어졌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지금도 덕 입을 수 있지만,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출범(出帆)을 하고 구원이 이미 제공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사단의 악과 고난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고 우리의 구원도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구원의 “첫 열매” 또는 “보증금”을 받은 셈입니다(롬 8:23, 고후 1:22). 그리스도의 재림 때 받을 우리의 완성된 구원은 악과 고난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죽음의 힘을 완전히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을 온전히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그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부활의 새 생명이라는 구원의 완성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대신(대표)하여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 그와 함께 죽고 부활함을 체험한 믿음 안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와 함께 옛 아담적 자아(죄인, 육신으로서의 자아)가 죽고 새 아담적 자아(의인)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로서, 미래의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현재적 실존에서 가치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사단의 통치를 거부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좇음으로써 “육신”(사단의 사주 아래 하나님에 대항해 자기 주장하려는 옛 아담적 자아)을 죽이고 자신의 의인(새 아담적 자아)됨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현재적 실존은 믿음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이 실재화(actualized)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자기 주장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사단의 통치를 거부하고 이웃을 위해 자기를 내어 주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순종하는 과정이므로 이 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 손해를 보고 아픔을 당하는, 즉 고난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은 죽어 가는 것이고, 그의 반비례로 우리의 의인적 자아는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과정을 두고 “우리의 겉 사람(옛 아담적 자아, 육신으로서의 자아)은 날로 닳아 없어지나, 우리의 속 사람(새 아담적 자아, 의인으로서의 자아)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합니다(고후 4:16). 그는 이 과정을 또 “예수의 (부활)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도록 우리의 몸에 예수의 죽임 당함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과정이라고도 말합니다(고후 4:10). 이 과정을 전통적인 신학 용어로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이라고 하는데, 바울의 언어로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같은 형상되어 감”(symmorphosis; conformation) 또는 그 형상으로 “변형되어 감”(metamorphosis; transformation)이라고 하고(고후 3:18, 골 3:9–10, 롬 12:2),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입는” 과정이라고도 합니다(갈 3:27, 골 3:9–10, 에 4:22–24).
이와 같이 실존에서 믿음의 실재화를 통해 우리의 옛 아담적 자아가 점점 닳아 없어지고 새 아담적 자아가 새로워짐, 즉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형상되어 감(변형되어 감)의 궁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의 영광스런 형상으로 완전히 “변형됨(같은 형상됨)”입니다(고전 15:42–45, 롬 8:29–30).
바울은 이 궁극적인 변화에 대한 소망을 빌립보서에도 표현하고 있습니다(빌 3:20–2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의 영광스런 형체에로 온전히 변형됨”(metaschematizein/transform)은 다른 말로 하면 그의 부활에 온전히 동참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11절에 표현된 소망은 곧 21절에 표현된 소망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에 지금 현재 자신의 믿음의 실재화, 즉 자신의 옛 아담적 자아(육신)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실재화를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육신”의 관점에서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었던 것들을 다 손해 봐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의 죽음과 같은 형상되는(symmorphosis; conforming) 삶”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0절).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130–132.
우리의 현재적 실존은 믿음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이 실재화해 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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