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Do not grumble against one another, brothers, nso that you may not be judged; behold, othe Judge is standing pat the door. 10 As an example of suffering and patience, brothers, take qthe prophets who spoke in the name of the Lord. 11 Behold, we consider those blessed who remained steadfast. You have heard of rthe steadfastness of Job, and you have seen sthe purpose of the Lord, how tthe Lord is compassionate and merciful.
12 But above all, my brothers, udo not swear, either by heaven or by earth or by any other oath, but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be no, so that you may not fall under condemnation.
n Matt. 7:1
o [1 Pet. 4:5; Rev. 22:12]
p Matt. 24:33; Mark 13:29; [1 Cor. 4:5]
q Matt. 5:12; 23:34; Acts 7:52; Heb. 11:32–38
r Job 1:21, 22; 2:10
s Job 42:10, 12
t See Ex. 34:6
u Matt. 5:3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약 5:9–12.
9절) 서로 원망하지말라.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나가기 위해서 여러가지 행동을 선택한다. 그중에 하나는 다른이들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 19로 세월이 어수선하다. 말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킬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것 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원망할 대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정부의 무능력과 무책임(마스크 사태, 중국 입국 금지 조치)의 프레임을 만들어 내고, 신천지라는 집단에 분노를 쏟아 붓게 만든다. 신천지를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라면 누구든 신천지와 같이 집단 감염의 전파자가 되어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옳지 않다. 며칠전 강경화 장관의 한 외신과의 인터뷰 내용속에 보면 한국 정부가 이 코로나를 대처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원칙으로 "투명성(transparency)와 개방성(openness), 대중에 대한 완전한 정보 공개”를 꼽았다. 나는 이러한 원칙, 태도가 고난을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본문에서 서로 원망하는 태도는 심판의 이유가 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심판이던 우리의 현실의 삶에서의 심판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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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는 에베소서 4:2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고, 데살로니가전서 5:14–15에 나오는 것처럼 보복과 대조되는 것이다. 원망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테나조(stenazō)는 일반적으로 절대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지만, 성경 헬라어에서 여기에서만 서로(against one another)라는 목적어를 가진다. 그 말은 성도가 자신의 고난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투덜대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성도가 자신의 고난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NEB 참조).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두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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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B The New English Bible, Old Testament, 1970; New Testament,2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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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53.
10절)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이 고난을 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투명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대중들이 듣기 싫은 하지만 들어야만 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숨기지 않고 선포했기에 사람들은 귀를 막고 선지자들 핍박했다. 이러한 때에 필요한 자세는 원칙을 고수하며 오래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를 위하여 핍박은 받는 자세인 것이다. 그러한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11절) 인내하는 자들에게 복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욥의 삶에 어떤 결말을 주셨는지를 보았다. 주님의 욥의 인내를 기뻐하시고 그의 인생에 복주신 이유는 바로 주님은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욥은 당시로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아내마저 그를 떠났다. 이 상황속에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온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고난이 바로 너의 죄 때문이다.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고난이었고 욥은 이를 인내함으로 통과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과 삶에도 여전히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임할 때가 있다. 이를 믿음을 가지고 인내할 때 주님은 우리를 복되다 하실 것이다.
시험을 견디고 인내할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서 1:2-4, 12에서 말한바 있다.
we count as blessed those who have persevered. James returns to a theme from the beginning of his letter (1:2–4, 12). Job’s perseverance. Job had plenty of questions to bring before God, but he stubbornly persisted in his faithfulness to God (Job 1:21; 2:10; 16:19–21; 19:25–27). what the Lord finally brought about. A difficult Greek phrase; can also be translated “the end [or goal] of the Lord.” The NIV takes it to refer to the blessings that God showers on Job at the end of the book (Job 42:10–17). The phrase could also refer to the “goal” of a virtuous and patient character that the Lord had in view in Job’s sufferings.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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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야고보가 고난을 신실하게 견뎌낸 인내의 모델로서 욥을 언급한 것에 대해 의아해한다. 특히 KJV이 ‘욥의 인내’(the patience of Job)로 번역하였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욥의 확고함(steadfastness) 또는 욥의 ‘끈기’(perseverance)라고 번역할 경우에도 여전히 설명이 부족한 듯하다. 욥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원망하였고, 자기-의에 의지하여 무고함을 선언하였으며, 자신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정경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와 그에 대한 야고보의 서술이 외관상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야고보가 외경인 ‘욥의 유언’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욥은 훨씬 더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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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구약성경에 나온 욥이 인내의 위대한 모델로서 간주될 수 있는 여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왜냐하면 욥이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강하게 불평하였을지라도,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한복판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꼭 붙들고 그분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았다(욥 1:21; 2:10; 16:19–21; 19:25–27 참조). 바클레이(Barclay)가 말한 것처럼, “욥의 굴복은 비굴하고, 수동적이며, 맹목적인 굴복이 아니었다. 욥은 투쟁하였고 질문을 던졌으며, 심지어 때로는 반항하기도 하였지만, 믿음의 불꽃은 그의 마음속에서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11 야고보는 ‘욥의 인내’와 함께, 주님의 목적 (개역개정에는 ‘주께서 주신 결말’이라고 표현함-역자 주)에 대해 서술한다. 이 말은 다양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이는 텔로스(telos)를 ‘목적’으로 번역하고(RSV; JB), 그것을 욥의 고난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한다(욥 42:5–6 참조). 하지만, 대부분의 영어 번역이 그러한 것처럼 텔로스는 또한 ‘끝’ 또는 ‘결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파루시아(주께서 가져오시는 ‘끝’의 의미)를 의미하거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주님의 삶의 ‘끝’ 또는 ‘봉인’〈seal〉의 의미)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주께서 실제로 주신 욥의 상황의 결말 또는 결과, 이를테면 그의 가족과 재물의 회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상의 해석이다(욥 42:13). 이 해석은 야고보가 말한 내용의 병행부분과도 잘 어울리고(갓의 유언 7:4; 베냐민의 유언 4:1; 참조 히 13:7), 앞에서 언급한 ‘복’의 구체적인 예를 제공해주며, 또한 욥의 결말이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보여준다는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잘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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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해석은 욥기의 전반적인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욥기의 목적 중의 하나는 욥의 신실함이 어떻게 끝에 가서 보상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야고보는 인내의 보상이 항상 물질적인 번영을 의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약(특히 예레미야!)과 신약에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수많은 예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신실함의 보상으로 자비롭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받을 복을 상기시켜, 고난 속에서도 신실하고 끈기있게 인내하도록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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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W. Barclay, Letter of James and Peter (Daily Study Bible; Saint Andrew Press, 21960), 14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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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V The Holy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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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B The Jerusalem Bible,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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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J. 무 지음, 야고보서, trans. 이승호, 초판., vol. 16,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3), 25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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