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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Therefore remember that at one time you Gentiles in the flesh, called “the uncircumcision” by what is called kthe circumcision, which is made in the flesh by hands— 12 remember lthat you were at that time separated from Christ, malienated from the commonwealth of Israel and strangers to nthe covenants of promise, ohaving no hope and without God in the world. 13 But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pfar off have been brought near qby the blood of Christ.

k Rom. 2:26, 28; [Col. 2:11, 13]

l 1 Cor. 12:2; [ch. 5:8; Col. 3:7]

m ch. 4:18; Col. 1:21; [Ezek. 14:5; Gal. 2:15; 4:8]

n See Rom. 9:4

o 1 Thess. 4:13; See ch. 1:18

p ver. 17; Acts 2:39

q [Col. 1:20]; See Rom. 3:2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2:11–13.

 

앞서 2장 1-3절에서도 그때와 이제의 대조를 사용했었다. 바울이 이러한 대조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가 무엇인지를 기억하게하기 위한 것이다. 본문 11절의 기억하라(생각하라)라는 단어는 1-3장에서 유일한 명령형이다. 이처럼 그들이 과거가 어떠했고 지금 어떠한지를 지속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도록 하는 것을 돕는다. 

The real reason for the “formerly-now” contrasts in Ephesians is made clear. Paul wants his readers to remember the change effected by Christ. The command “remember” in 2:11 is the only imperative in chapters 1–3. This remembering covers all the material in verses 11–13, not merely the former life. Continual awareness9 of what they were and what they have now become will enrich both their thanks to God and their obedience.

9 This is the force of the present tense in the imperativ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6.

 

11절) 그러므로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들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이들이라고 불리우는 자들로부터 무할례자라고 불리는 자들임을 기억하라. 

유대인들은 이처럼 이방인들을 무할례자들이라고 무시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할례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중요한 증표라고 여기고 강조했지만 육체로 받은 이 할례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유대인들도 육체가운데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여전히 육체로 이땅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사람의 손으로 행한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12절)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이스라엘 시민권으로부터 제외된 자들이며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이방인이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었다. 

본 12절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불우하고 떨어져있고 멀리 있는 자들인지를 5가지로 묘사한다. 

  1.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 이는 이제는 그리스도안에 있다라는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룬다. 

  2. 이스라엘의 시민권과는 무관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자들이다. 이는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 대해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셨는데 이것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국인이다. 본문에서 바울이 어떤 언약을 마음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히 아브라함, 다윗, 새언약으로서의 예레미야의 약속, 렘 31:31-34절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약속의 언약은 과거 아브라함, 다윗, 예레미야 언약의 성취로서 그리스도와 성령에게 우선적인 초점을 두고 있다. 

  4. 희망 없는 자들이다. 인간의 고난으로 도피할 어떤 희망도 그들에게는 없었고 그래서 어떤 위안도 고대할 수 없었다.

  5. 하나님없는 자들이다. 이 말이 그들은 무신론자라고, 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신으로, 우상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Verse 12 describes five elements in which the Gentiles were deprived, disconnected, and distant:14

(1) They had no relation to Christ; this contrasts with their present position in Christ.15

(2) They were “excluded from citizenship in Israel.” Does “Israel” refer to historic Israel, spiritual Israel, or Jewish Christians? Probably Paul thought generally of exclusion from God’s people; that is, the Gentiles had no part in God’s purposes with Israel.

(3) They were “foreigners to the covenants of the promise.” This phrase emphasizes the same distance and disconnection as “excluded.” Precisely which covenants Paul has in mind is not clear. Surely the covenants with Abraham and David are included, and likely also the promise of the new covenant in Jeremiah 31:31–34. No doubt for Paul the “covenants of promise” focused primarily on the Messiah and the Holy Spirit, the means by which the covenants with Abraham, David, and Jeremiah were fulfilled (see 2 Cor. 3:3–18; Gal. 3:14).

(4) They were “without hope.” They had no hope of escaping the human plight and could not anticipate any relief (cf. 1 Thess. 4:13).

(5) They were “without God.” This does not mean they were atheists (although the word can be used this way), nor that they did not have gods (ancient Gentiles had plenty of gods). Rather, they did not have God (cf. Acts 17:23). In addition to being in the flesh, these Gentiles were “in the world” (a pejorative term that picks up the meaning of “world” in 2:2). The sphere in which they lived was isolated from God and what he was doing.

14 These elements assume the privileges Jews enjoyed (cf. Rom. 3:1–2; 9:1–5).

15 The word “excluded” is the same word translated “separated” in 4:18 and “alienated” in Colossians 1:21, the only other times the word occurs in the New Testamen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7–128.

 

13절)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까와졌다. 

그때에 그들이 관계가 없고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면 그 해답은 가까이 나아오고 속하는 것이다. 앞선 4-10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허물과 죄로 인한 우리의 곤궁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역에 우리를 세우시는 것으로 묘사했다. 본문 1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사람들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오게 한다. 바울의 본 서신에서 ‘영역 주권’ 개념이 강조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어떤 영역에 가까이 있고 누구의 영향력 가운데에 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이전에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온다. 

‘멀리’와 ‘가까이’라는 단어는 사 57:19(엡 2:17)의 인용이다. 

 

인간의 곤궁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에 기인한다. 생명이 그분으로부터 나왔고 그분의 임재가운데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이 곤궁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기로 인도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In sum, the human plight is caused by separation from God. Life comes from him and is to be enjoyed in his presence. The only solution to the plight, then, is proximity to God, and Christ is the one who takes us ther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29.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육체로 소망이 없는 자들임을 말한다. 물론 본문 속에서는 이방인들에 대해서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는자들인지를 설명하지만 유대인들도 이에 못지 않다. 그래서 결국 이 육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인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피가 멀리 떨어진,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멀어져서 나아갈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이끌고 하나님앞에 서게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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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zby grace you have been saved athrough faith. And this is bnot your own doing; cit is the gift of God, dnot a result of works, eso that no one may boast. 10 For fwe are his workmanship, gcreated in Christ Jesus hfor good works, iwhich God prepared beforehand, jthat we should walk in them.

z ver. 5

a 1 Pet. 1:5; [Rom. 4:16]

b [2 Cor. 3:5]

c [John 4:10; Heb. 6:4]

d 2 Tim. 1:9; Titus 3:5; See Rom. 3:20, 28

e 1 Cor. 1:29; [Judg. 7:2]

f Deut. 32:6, 15; Ps. 100:3

g [ch. 3:9; 4:24; Col. 3:10]

h ch. 4:24

i [ch. 1:4]

j Col. 1: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2:8–10.

 

본문의 8-10절에 등장하는 내용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바울의 구원의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축약하여 설명하는 본문이다.  

 

 

8절) 너희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앞서 5절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의 구원을 기초이고 원인이다.(롬 3:24; 11:6, 딛 3:7)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 호의로 그분의 율법을 어김으로 마땅히 그분의 진노를 받아야하는 이들에게 베푸신 것이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이들이기에 우리 자신이 우리를 돕거나 구원할 수 없다. 믿음 자체고 하나님의 선물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는 인간의 반응이다. 이는 우리 자신의 성취를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이루신 성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본문의 이것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인데 다시금 이것이 너희, 인간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is phrase first occurs in v. 5 and is repeated here for emphasis. Grace is the basis and cause of our salvation (Rom 3:24; 11:6; Titus 3:7). It is God’s unmerited favor toward those who have transgressed his commandments and deserve his wrath. We could not help ourselves because “we were dead” (Eph 2:5). See “Love and Grace,” p. 2684. through faith. Faith, itself a gift of God, is the human response by which we receive God’s salvation. It is a confident trust in God whereby we refuse to justify ourselves based on our achievements but gratefully receive what God has already accomplished in Christ (see Rom 3:21–31). this. The process of 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 not from yourselves. Human effort can never contribute to our salvation. the gift of God. Salvation, including our faith (Phil 1:29), is God’s initiative and activity; it is entirely “the gift of God” (cf. Titus 3:5).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p. page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2.

 

8절은 구원을 얻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다. 믿음은 이 은혜를 받게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이 서신의 나머지에서는 믿음의 중요성과 구원과 삶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 

믿음(피스티스)는 정신적인 동의나 혹은 어떤 아이디어들을 믿는 것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 헬라어 명사는 ‘믿음’, ‘충실함’, ‘신뢰’, ‘약속’, ‘맹세’, ‘증거’, ‘신뢰’, 그리고 ‘자신감’을 뜻한다. 게다가 그것은 믿는 행위,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내용, 혹은 모든 복음을 한 단어로 포관한 단어로 ‘그 믿음의 종교’로 사용된다. 그 동사인 ‘피스테오’는 ‘신뢰하다’, ‘신뢰감을 주다’, ‘무언가를 확신하게되다’, ‘신뢰하다’, ‘자신감을 가지다’를 의미한다. 우선적으로 이 단어의 그룹은 의존할만한 어떤 것 혹은 무언가 믿을만한 것에 의존하는 행위를 다룬다. 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신뢰할만한 것으로 믿어지는 어떤 것 혹은 어떤 이를 의존하는 것이다. 

Faith. Romans 1:17 and Galatians 3:11 both show the importance of Habakkuk 2:4 for the origin of Paul’s understanding of “faith,” and an allusion to that Old Testament text is possible here. Up to this point in the letter “faith” and its cognates have served only to identify the readers as believers (1:1, 15, 19) and to indicate their reception of the gospel (1:13). Verse 8 is similar to 1:13, describing the means by which salvation is appropriated. Language is especially important here. Christians are saved by God’s grace, not by their faith. Faith is the only means by which this grace is received. The rest of the letter underscores the importance of faith and its cognates for salvation and life (3:12, 17; 4:5, 13; 6:16, 21, 23).

Faith (pistis) cannot be limited to mental assent or to believing certain ideas. The Greek noun can mean “faith,” “faithfulness,” “reliability,” “promise,” “pledge,” “proof,” “trust,” and “confidence.” In addition, it can be used of the act of believing, the content of what is believed, or as a word that encapsulates all the gospel stands for—in essence, “the faith religion” (cf. Gal. 3:23; Eph. 4:5). The verb pisteuo can mean “trust,” “give credence to,” “be convinced that,” “entrust,” and “have confidence.” Primarily, this word group treats that on which one may rely or the act of relying on something believed reliable. Both sides of the coin are present—relying on something or someone believed reliable. As always, context—not a catalogue of possibilities—determines meaning.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4–105.

 

이처럼 믿음은 단지 어떤 아이디어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접하여 그분과 교제하며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이 믿음에 대한 그의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구원이 단지 믿는 아이디어로부터 오거나 감정적인 결정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People who believe do not merely assent to certain ideas; they are bound to God and live in response to him. Paul’s frequent use of phrases such as “with Christ” and “in Christ” show his conviction that faith joins them to Jesus Christ so strongly that they are in him and that what is true of him is true of them. Christ’s past is their past, and he determines their present and future. Faith has an adhesive quality to it;46 it binds the believer to the one who is believed. Salvation does not come from believing ideas or an emotional decision, but from being bound to Christ.

46 See William Sanday and Arthur C. Headlam, The Epistle to the Romans (Edinburgh: T. & T. Clark, 1896), who define faith as “the lively act or impulse of adhesion to Christ” (11) and the “enthusiastic adhesion, personal adhesion; the highest and most effective motive-power of which human character is capable” (34, italics theirs).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5.

 

9절) 구원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기때문에 누구도 자랑하지 못한다. 

행위는 인간의 노력으로 유대의 문맥에서는 율법의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인간의 자랑도 배제시킨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로 자랑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안에서, 그분의 영광과 은혜와 지혜 안에서 자랑해야한다. 

Any human effort; equivalent to “works of the law” (Rom 3:20, 28) in a Jewish context. boast. God’s salvation excludes any human boasting (1 Cor 1:26–31). We should instead boast in the Lord (2 Cor 10:17; Gal 6:14)—in his glory (Eph 1:3–14), grace (2:7), and wisdom (3:10).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2.

 

모든 인간은 자랑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때로 우리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의 모습을 보일때가 많이 있다. 또한 인간 본성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불편해 한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는 것이 의미있고 이것이 성공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철저하게 부정하신다. 본문은 철저하게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일하심, 은혜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의 핵심중에 하나는 하나님앞에 자랑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렘 9:24) 

(렘 9:24, 개정)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구약의 내용은 바울의 예배와 사역, 그리고 자기이해의 기초를 제공한다.

 

 

10절) 우리는 그의, 하나님의 만드신 바, 작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로 이는 하나님이 전에 미리 예배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하신 것이다. 

본문에 ‘포이에마’는 헬라어로 장인의 숙련된 작품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신자의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변화는 아주 엄청난 것이기에 새로운 창조의 행위로 여겨진다. 이러한 새창조의 견해는 개별적인 것 이상이다. 그것은 믿음의 공동체를 포함한다. 개인과 공동체의 새창조는 우주의 새창조를 기대한다. 

본문에서 다시금 행하다라고 표현된 단어는 앞선 2절에사 사용된 단어로 우리의 이전의 상태와 현재의 삶의 방식을 대조하고 있다. 어디에서 행하고 있는가 말이다. 앞서 허물과 죄가운데 행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셔서 선한일을 행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의 기초(근거, 이유)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사역의 증거(결과)이다. 

The Greek word can connote the skillful work of a craftsman. created. The transformation of believers from death to life is so radical that it is considered a new act of creation (4:24; 2 Cor 5:17). The scope of this new creation is more than the individual. It also includes the community of faith (vv. 14–16; Gal 6:15), and, together, the new creation of the individual and the community anticipates that of the cosmos (Eph 1:10; Rom 8:18–25). See notes on Eph 2:15; 4:24; see also “Creation,” p. 2642. for us to do. Or “that we should walk in them.” The occurrence of the Greek for “walk” here and in v. 2 contrasts our former and present lifestyles. Instead of “walking” in “transgressions and sins” (v. 1), God has created us anew to “walk” in “good works.” These good works are not the basis of but the evidence of God’s new creative work in us.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p. page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2.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이 자기의 출생에 무언가를 기여할 수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거듭남에 기여할 수 없다. 모든 인간, 우리 모두는 그분의 행위의 결과물들이다. 구원과 새 생명은 하나님의 역사이고 인간 존재는 그것의 수여자일 뿐이지 원인자가 아니다. 이러한새 창조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한일을 위하여 지으셨다. 선행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일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근거나 수단이 아니라 그 결과와 증거이다.” 말하자면 선한일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증거로서 믿는 자들의 삶속에서 선한 행실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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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3 God, being rrich in mercy, sbecause of the great love with which he loved us, even twhen we were dead in our trespasses, umade us alive together with Christ—vby grace you have been saved— and raised us up with him and wseated us with him in the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 so that in the coming ages he might show the immeasurable xriches of his grace in ykindness toward us in Christ Jesus.

3 Or And

r ver. 7; Titus 3:5; See Rom. 2:4

s See John 3:16

t ver. 1; [Rom. 5:6, 8, 10]

u Col. 2:12, 13; [John 14:19; Rev. 20:4]

v ver. 8; See Acts 15:11

w See ch. 1:20

x ver. 4

y Titus 3: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2:4–7.

 

4절)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앞서 1-3절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의 상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죽음을 향해 치달아가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반전시키는 외침을 바울은 외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다. 

Just when things look the most desolate, Paul utters the greatest short phrase in the history of human speech: “But God!” rich in mercy. God’s mercy on his helpless enemies flows from his own loving heart, not from anything they have done to deserve i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4.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다. 공의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분의 큰 사랑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 때문이다. 

 

본문의 긍휼(엘레오스)는 성경에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할 때 긍휼을 떠나서 인간들을 향한 어떤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The word “mercy” (eleos) does not often occur in Paul’s letters. The importance of this theme for Paul, however, is evident in its use in Romans (9:16–18, 23; 11:30–32; 15:9) and in descriptions of his own conversion (1 Tim. 1:13–16). Numerous other Scriptures focus on the mercy of God, such as Exodus 34:6; Deuteronomy 4:31; 7:7–9; Psalm 78:38; Isaiah 55:7; Jeremiah 31:20; Micah 7:18 in the Old Testament, and Matthew 5:7; 9:13; 23:23; 1 Peter 1:3 in the New Testament. Apart from God’s mercy, no hope exists for humanity.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0.

엡 2:4-10에는 긍휼, 사랑, 은혜, 자비, 선물이라는 용어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는 구원의 실제를 적절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바울이 중첩되는 이미지의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행동으로 인간들에게 표현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헌신의 위대함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광대한 언어의 폭포로 표현을 시도한 것이다. 

“Mercy,” “love,” “grace,” “kindness,” and “gift” in 2:4–10 are obviously closely related and show that Paul is stacking words in an attempt to describe adequately the reality of the gospel. While each of these words carries a nuance different from the others, their meanings shade into each other. They come as a cascade of expansive language attempting to describe the grandeur of God’s care for and commitment to human beings expressed in his action in Jesus.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0.

 

5절)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허물로 죽었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너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

본절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앞선 1절의 반복이다. 

바울의 신학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의 사건에 포함되어 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롬 5:6-10절에서는 구원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고 부활에 대한 언급은 미미하지만 여기 엡 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언급하는 대신에 그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These expressions do not refer to future resurrection, but to our being raised with Christ in the past, to being “co-resurrected” with Christ. Paul’s theology asserts that Christians were included in the redemptive events of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The threefold repetition of “with” is significant and underscores the Pauline emphasis on participation with Christ. To enjoy salvation requires being joined to the Savior (cf. Rom. 7:4.) The gift cannot be separated from the Giver.28

The language here is reminiscent of Romans 5:6–10, which speaks of God demonstrating his love even while we were weak, sinners, and his enemies. Salvation exists because God created life in the midst of death. Without the resurrection there would be no salvation. Romans 5:6–10—like other texts—emphasizes the death of Christ as the means of salvation, and the resurrection is implicit. Here in Ephesians 2 Paul does not mention the death of Christ, focusing instead on his resurrection (cf. 1 Peter 1:3).

28 Ernst Käsemann made this expression popular. See his “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New Testament Questions of Today (London: SCM, 1969), 174–76. Barth’s attempt (Ephesians, 1:220) to suggest that “made alive together with” has a double meaning referring to resurrection with Christ and to the joining of Jews and Gentiles is unconvincing.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0–101.

 

5절에서 갑자기 바울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그는 완료시제를 사용한다. 다른 바울의 서신에서는 구원이라는 단어, ‘소조’에 완료시제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시제는 과거의 사건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구원은 과거 일어난 사건이고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 현재에도 경험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위험으로부터의 구출을 일차적으로 의미하는데 이는 바울이 하나님의 구속의 행동을 말하는 여러가지중의 하나입니다. 칭의, 구원, 구속, 화해, 자유 혹은 다른 어떤 것도 단 한가지의 이미지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 실제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The language of having been saved and the use of the perfect tense do not follow Paul’s normal pattern. Outside this passage Paul does not use the perfect tense for the word “save” (sozo).39 This tense points to a past event and its continuing results. Salvation is viewed here as something that has occurred and is currently experienced by those who are in Christ.40 Salvation language points primarily to the idea of rescue from danger, but this is, of course, only one of several ways Paul speaks of God’s redeeming activity. No single image—justification, salvation, redemption, reconciliation, freedom, or any other—is adequate by itself to explain the reality God has worked for us.

39 The Pauline letters use the verb “save” (sozo) 29 times and the noun “salvation” (soteria) 19 times. Usually Paul has in mind our future salvation (Rom. 5:9–10), but he also uses it to refer to an event of the past (Rom. 8:24) or something being experienced in the present (1 Cor. 1:18; 2 Cor. 6:2).

40 The future component, the “not yet” part of Christianity is not mentioned here but is present elsewhere in Ephesians (1:10, 14; 4:30; 5:5).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3.

 

6절) 또 우리를 그와 함께 일으키셨고 우리를 그분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늘의 자리에 앉게하셨다. 

먼저 살리심을 받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죽음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바로 그분의 부활 때문에 그분을 믿는 자들은 영적으로 새 생명을 받게 됨으로 그분과 함께 우리를 살리신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분과 함께 일으키신다라는 것이다. 

 

5-6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세가지 사건을 성취하셨다. 첫번째는 우리를 살리신 것이고 두번째는 우리를 일으키신 것이며 세번재는 하늘에 앉히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며 영적으로 부활의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앉게 하심으로 그분의 승리를 이 악마적인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속에서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때 가능한 것이다. 

In these verses, Paul emphasizes aspects of our salvation that are a present reality. Due to our union “with Christ,” God has accomplished three events spiritually for believers that he did for Christ: (1) made us alive. We possess a living relationship with God (Rom 6:1–11). (2) raised us up. We presently experience spiritual resurrection life. The resurrection of our physical bodies will occur when Christ returns. (3) seated us. Being seated with Christ, we share in his victory over the demonic powers (1:20–21) and are no longer obligated to follow the world, the devil, and the flesh (vv. 1–3). with him. Although seated with Christ, we are not seated at God’s right hand. That exalted position is reserved for Christ alone.

vv. verses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2.

 

본문 속에서 말하는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인 부활은 이후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 인간의 처지가 영적 죽음의 삶이라면 그 해답은 바로 영적인 부활에 있다. 바울은 앞서 우리가 이미 허물로 인해 죽었다라는 이비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자들로 부터 일으키시고 그를 높이실 때 그분은 그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함께 일으키시고 높이신다는 것이다. 

Some have charged that Ephesians has lost the focus on the cross, but such a complaint reveals a failure to understand the movement of Ephesians and ignores texts that do focus on the death of Jesus.30 Ephesians 2:5–6 merely extends to believers God’s act of resurrection and exaltation mentioned in 1:19–20. Paul does not focus on dying with Christ here because he uses the imagery of our being dead already in transgressions. The next section (2:13–16) will suggest that by his death Christ both deals with our “living death” and puts to death all enmity (both that between humans and God and that among humans). The point here is that when God raised Christ from the dead and exalted him, he raised and exalted Christians with him.

30 See 1:7; 2:13, 15–16; 5:2.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1.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를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개별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실재이다.’ 바울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신자들을 위한 유익을 주는 사건이 아니라 신자들이 포함된 사건이다. 바울의 ‘영역주권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죄의 영향력 아래 살 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영향력아래 살게된다. 이것은 죄의 폭군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주 그리스도를 섬길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회심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의 전환, 주권의 변화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킨다는 것은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바울의 언어이다. 

Being raised with Christ and being seated with him are conditioned on being “in Christ Jesus.” The threefold repetition of this phrase underscores once again the centrality “in Christ” has for Paul’s theology.35 “Being in Christ is not only the fundamental fact of the individual Christian’s existence, it is the whole reality.”36 In Paul’s mind,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re not merely events that produce benefit for believers, they are events in which believers are included.37 According to Paul’s “spheres of influence” theology, people either live in sin and under its influence or in Christ and under his influence. It is a question of serving the tyrant sin or the Lord Christ. Conversion is a transfer from one sphere to the other, a change of lordships, and being raised with Christ is the language Paul uses to describe this transfer from the realm of death to the realm of life.38 Anything short of such a theology fails to understand Paul.

35 See pp. 38–40, 42, 47–48, 56–57, 63–64.

36 Lewis B. Smedes, Union with Christ: A Biblical View of New Life in Jesus Christ (Grand Rapids: Eerdmans, 1983), 59.

37 See Robert C. Tannehill, Dying and Rising with Christ (Berlin: Verlag Alfred Töpelmann, 1967), 1.

38 See Käsemann, “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170–76;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1977), 463–72, 506–8;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Philadelphia: Fortress, 1983), 4–10. Morna Hooker has several articles promoting “interchange” as a helpful explanation of salvation. “Interchange” is best summarized by the statement, “He became what we are in order that we might become what he is” (from Irenaeus, Against Heresies, Preface). See her “Interchange in Christ,” JTS 22 (1971): 349–61; “Interchange and Atonement,” BJRL 60 (1978): 462–81; “Interchange and Suffering,” in Suffering and Martyrdom in the New Testament, ed. William Horbury and Brian McNeill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81), 70–83; and “Interchange in Christ and Ethics,” JSNT 25 (1985): 3–17. Cf. John 5:24; 1 John 3:14.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2.

 

 

7절) 그래서 오는 세대에 그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자비안에서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4-6절) 모든 세대에 그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다. 

The purpose of God’s action in saving us is to demonstrate in the coming ages how rich his grace is; in intervening for us, God shows his own character (cf. Rom. 3:25–26). By its very nature the gospel is a revelation.43 The revelation of God’s character will continue throughout eternity, and the primary evidence of his grace and kindness are the people who have received life in Christ Jesus. We should also remember the expression “to the praise of his glory” in 1:6, 12, and 14. God’s saving work shows who he really is and results in worship, both now and throughout eternity.

43 See my discussion of this issue in “The Gospel in Romans: A Theology of Revelation,” Gospel in Paul: Studies on Corinthians, Galatians and Romans for Richard Longenecker, eds. L. Ann Jervis and Peter Richardson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288–314.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104.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분의 행동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은혜를 깨닫는 것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된 우리를, 나를 살리신 것을 깨달았을 때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또한 우리로 그분을 예배해야할 이유를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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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you were kdead in the trespasses and sins lin which you once walked, following the course of this world, following m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 the spirit that is now at work in nthe sons of disobedience— among whom we all once lived in othe passions of our flesh, carrying out the desires of the body1 and the mind, and pwere by nature qchildren of wrath, like the rest of mankind.2

k ver. 5; [ch. 4:18]; See Luke 15:24

l ch. 4:17, 22; 5:8; Col. 3:7; See Rom. 11:30; 1 Cor. 6:11

m [ch. 6:12; Rev. 9:11]; See John 12:31

n ch. 5:6; [1 Pet. 1:14]

o Gal. 5:16

1 Greek flesh

p See Ps. 51:5; Rom. 5:12

q [2 Pet. 2:14]

2 Greek like the rest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2:1–3.

 

1-3절) 그리스도가 없는 소망 없고 무력한 상태.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를 돕는 자들을 도우신다”라는 표현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바울이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바는 그 진리는 완전히 반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력한 자들을 도우신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한 법을 어긴 그분의 적들까지도 도우신다. 

“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is not from the Bible but from the ancient Greeks. As Paul emphasizes in this section, the truth is the exact opposite: God helps the helpless! Even more, he helps his enemies who have transgressed his holy law.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4.

 

본문안에 많은 대조의 표현이 등장한다. 

허물과 죄가운데 사는 자들 vs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 가운데 사는 자들

이 세상 vs 하늘의 왕국

죽음 vs 생명

죄된 본성 vs 그리스도와의 연합

진노 vs 은혜와 구원

권세 잡은 자 밑에 있음 vs 그리스도와 함께 앉게 하심

본성을 따라 vs 은혜를 따라

행함을 따라 vs 믿음으로

The number of oppositions in this passage is striking: living in transgressions and sins versus living in good works prepared by God; this world versus the heavenly realms; death versus life; sinful nature (lit., “flesh”) versus union with Christ; wrath versus mercy and salvation; under the “ruler” versus seated with Christ; by nature versus by grace; not from works versus through faith.

We make several observations at the outset. Although the niv introduces 2:1 with “As for you,” the Greek text has only “and,” which binds this section closely to 1:15–23.3 Significant parallels exist between 1:18–21 and 2:1–7: “raised,” “seated in the heavenly realms,” “riches,” “ruler,” “this age and the coming age(s),” and the idea of God’s having a people. What was said about Jesus in 1:19–21 is now being applied to Christians: God raised and exalted Christ and he has raised and exalted Christians with him (cf. also Col. 2:12–13; 3:1–4).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3 Some have even suggested 1:23 should end with a comma instead of a period, but this is unwarranted.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94.

 

1절) 당신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 

본문은 우리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 상태, 그 결과는 죽음임을 선언하고 있다. 한글 성경에는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원어나 영문성경에는 이런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 전체를 통해서 걔속해서 두가지의 대조를 보여준다. 허물과 죄 안에 살아가는 삶과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삶은 죽음과 생명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후의 6, 7, 10절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상태를 강조하지만 본문 속에서는 처절한 허물과 죄안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죄가 왕노릇 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죄의 결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갖지 못하고 다른 이들과의 사이에 왜곡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변화하기에 무기력하고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있다. 로마서 5:12-21에 따르면 사망은 죄의 결과이다. 너희의 허물들과 죄들 가운데 죽었다라는 표현은 죄들이 죽음을 야기하고 또한 죄가 죽음의 증거임을 제시한다. 

Elsewhere Paul views death as a tyrant that dominates unredeemed humanity, both in their present living and in their destiny in the grave.10 Ernest Best describes the view in 2:1 as “a realized eschatological conception of death.”11 In other words, the end result has invaded and permeated the present. Death controls life. It is nonrelational, powerless, and corrupting. As a consequence of sin, people have no relation to God and distorted relations with each other. They are powerless to change and are being pulled down to destruction.

As in Romans 5:12–21, death is a result of sin. The expression “dead in your transgressions and sins” suggests that sins both cause death and are evidence of death. No attempt should be made to distinguish between “transgressions” and “sins;” for both words are used to express one idea concerning the variety and dominance of sins.12

10 See especially Romans 5:12–21; 6:15–23; 7:5, 24; 8:6–13.

11 Ernest Best, “Dead in Trespasses and Sins,” JSNT 13 (1981): 16.

12 The two words are used interchangeably both in the singular and in the plural (e.g., Rom. 5:20; Col. 1:14; 2:13. Regarding the word “sin” (hamartia), 48 of the 64 Pauline occurrences of this word are in Romans, of which only three are plural. In Romans Paul views sin not so much as individual misdeeds as the tyrant that dominates human life. Of the 16 occurrences outside Romans, 9 are in the plural.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95–96.

 

1-2절에서는 대명사로 너희를 사용하는데 3절 부터는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본문에서 너희는 이방인들을, 우리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2절) 너희는 한 때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 그 영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한다. 

본문에서 행하여라고 표현된 ‘페리파테오’라는 단어는 걷다라는 의미로 신약 성경에서 삶의 방식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주로 사용한 단어로 구약의 여호와의 도를 행하는 것의 의미를 담고 있다. 

The word translated “live” is actually “walk,” a word used frequently in New Testament texts to describe a way of life. The instructions in chapters 4 and 5 are framed around this word. While more frequent in Ephesians than other Pauline letters, this word is at the center of Paul’s ethical thinking.13 The metaphor has its origin in the Old Testament idea of walking in the way of the Lord (e. g., Deut. 5:33; Ps. 1:1; Isa. 30:21.)

13 See Romans 6:4; 8:4; 1 Corinthians 3:3; 7:17; 2 Corinthians 4:2; Galatians 5:16. This use of “walk” also occurs in the Johannine literature and elsewhere in the New Testament (e. g., John 8:12; 11:9–10; 1 John 1:6–7; Acts 21:21).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96.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어떤 영역에서 걸을 것인지,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것인지 아니면 죄와 허물가운데서 행할 것인지를 말이다. 이처럼 허물과 죄는 이전 삶이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2절의 본문에서 이전 삶에 대한 두가지 묘사가 나오는데 이는 이 세상의 방식과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다. 본문의 이 세상의 방식, 세상 풍조라는 표현은 ‘이이온’과 ‘코스코스’라는 단어의 반복인데 이와 비슷한 표현이 1:21에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2:7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날 오는 세대로 사용된다. 여기서의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신약에서 세상은 창조, 사람, 그리고 세상의 시스템을 포관하는 넓은 범위의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하나님을 그림 밖으로 나오게 하거나 또는 공개적으로 그를 적대시합니다. 분명한 바울의 의도는 여기서 하나님을 의도하지 않는 체계에서 형성된 세상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 가운데 사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순응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앞서 1:21-23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와 만물위에 높임을 받으셨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권세들도 일하고 있다. 

 

고대 세계에서는 공중을 땅과 하늘 사이의 영들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보았다. 이러한 표현은 욥기 1-2장에서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Two other descriptions of this former life are given in 2:2: following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he ways” of this world is an appropriate translation, but a nuance is lost from the more literal “age of this world”—the same word used in 1:21 of the present and the coming age, and in 2:7 of the coming ages throughout which God’s grace will be demonstrated. The former way of life of these believers involved conformity with the present worldly age.15 “World” has a broad semantic range in the New Testament, covering creation, people, and a world system that either leaves God out of the picture or is openly hostile to him. Clearly Paul’s intent here is to focus on this world system, a way of life shaped by a system that does not consider God (similar to the expression “living according to the flesh”).16

Living in sins is also living in conformity with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Christ is exalted over all the powers and fills all things (1:21–23), but another power is also at work. Although Paul does not name this ruler, he is clearly talking about a life that follows the evil one (6:16) or the devil (4:27; 6:11).17

Exactly what is intended with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and how it relates to the words that follow are unclear. The word translated as “kingdom” is actually the word usually translated by “authority.”18 Colossians 1:13 has a similar theology; Christians are delivered from the realm or dominion of darkness. According to 3:10 and 6:12 the domain of the rulers and powers is in the heavenly realms. The ancient world apparently viewed the air between heaven and earth as the domain of spirits.19 From a biblical perspective, this may have been enhanced by Job 1–2, which speaks of Satan appearing before the throne of God, though that is uncertain. The ruler has control of this godless domain, the atmosphere, and instead of living in accord with God’s domain, people choose a tyrant instead of the God who created them.20

15 The attempt by Schnackenburg, Ephesians: A Commentary, 91 and 96, to see “age” in 2:2 as pointing to a personified being does not do justice to the temporal meanings of the word in 1:21 and 2:7.

16 Compare Galatians 1:4, which speaks of Christians being rescued from the present evil age, and Romans 12:2, which cautions Christians not to be conformed to the present age (niv, “the pattern of this world”).

17 Compare “the prince of this world” in John 12:31; 14:30; 16:11, and “the prince of the demons” in Matthew 9:34; 12:24, in which the word “prince” (archon) translates the same word rendered “ruler” here. References to “rule” or “rulers” in Ephesians 1:21; 3:10; 6:12 use a related word arche.

18 Exousia; the neb translates this singular word as a collective noun, “spiritual powers,” but that is without warrant.

19 See Clinton E. Arnold, Ephesians, Power, and Magic, 60–61; Everett Ferguson, Demonology of the Early Christian World (Lewiston, N.Y.: Edwin Mellen, 1984). 45–47, 75–86

20 Walter Wink, Naming the Powers, Vol. 1: The Powers (Philadelphia: Fortress, 1984), 83. It is possible that exousia (“authority,” the word translated “kingdom”) is a genitive of apposition. If so, we should translate, “the ruler, the authority of the air.”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96–97.

 

3절) 전에 우리 모두는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바울은 앞선 공중 권세잡은 자들의 영향이 아니라 본질상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죄인임을 강조한다. 우리들이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살아가는것뿐만 아니라 그들과 같이 생활한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의 자녀라는 표현은 어떤 특징을 지닌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의 본질상이라를 표현은 죄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죄가 얼마나 인간의 내면에 깊이 침투해 있는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패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살아있는 죽은 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순종을 일으키는 폭군과 일하는 세상 질서를 따라 살고 있습니다. 노예상태에서 그들은 그들의 욕망을 따르고 그림 밖으로 신을 떠나게 하는 왜곡된 생각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1-10의 주요 논점은 하나님은 그림밖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Paul uses sarx in various ways in his letters, usually with negative ethical connotations as here. It usually refers to that which leaves God out of the picture, that which is merely human and left to its own devices. Implicit is the thought that without God, desires are the lord in control. They must be gratified and followed. In the former life we lived by our sinful desires, doing whatever they told us. “Cravings” and “desires” refer to legitimate human needs that are distorted, subverted, and heightened to produce an irrational self-centeredness (see comments on 4:17–19, 28–29). Once again Paul focuses on the mind. The former life is marked by a misaligned reasoning process that causes people to do what the sinful nature says. Sin causes a distortion in the mind (see esp. Rom. 1:21–22, 28).

The result is that all people are “by nature objects of wrath.” That is, all people are headed for an encounter with God’s wrath. “Objects of wrath” is literally “children of wrath.” “Children of” (or “son of”) is a Semitic way of saying “characterized by” or “described by.” 23 These people are under God’s wrath, both his present wrath (cf. John 3:26; Rom. 1:18)24 and his future wrath (cf. Rom. 5:9; Eph. 5:4). Both are implied here. Paul is not thinking of uncontrolled outbursts of angry passion on God’s part nor of some impersonal wrath; rather, wrath points to God’s constant displeasure and reaction against sin.

“Nature” (physis) has a variety of meanings: for example, the order of nature (Rom. 1:26; Rom. 11:21; 1 Cor. 11:1425), every kind of animal (James 3:7), and what one is by constitution rather than from experience or circumstance (e.g., Rom. 2:27; Gal. 2:15; 4:8; 2 Peter 1:4). The use in Ephesians 2:3 falls into this third category. By their very nature human beings in this fallen world are sinful and therefore under God’s wrath, even though the text does not explain how this came about.

This text speaks of the universality of sin, but it does not reject the value of humanity. It points to pervasive depravity, a depravity that extends to all human thought and action, but it does not suggest total depravity in the sense of absolute worthlessness. All humans—whether believers or not—are created in the image of God and have enormous value and capability. Despite depravity, God finds something worth loving.26

The picture the text paints is bleak. Because of sins, humans are the living dead. They live in keeping with a world order that ignores God and in keeping with a tyrant who works to cause disobedience. In their enslavement they follow desires and distorted reasonings that leave God out of the picture and, therefore, they are under God’s wrath. But, the main point of Ephesians—and especially of 2:1–10—is that God will not stay out of the picture.

23 Compare Deuteronomy 25:2, where “deserves to be beaten” is literally “a son of stripes,” and 1 Samuel 26:16, where “deserve to die” is literally “sons of death.”

24 The contrast with the mercy of God in verse 4 seems to require that the wrath in verse 3 is also present.

25 The meaning here is virtually “custom” and is the loosest use of this term.

26 Whether “by nature objects of wrath” was intended to teach a doctrine of original sin is debated. The Semitism “children of wrath,” which stands behind this expression, does not refer to babies. Paul is describing adults, not children, so this part of the statement is not about original sin. The key word is the word “nature.” It is probably better to say this text assumes a doctrine of original sin than teaches it. How sin gains entrance or is transmitted is not discussed here or elsewhere; that sin has infected the human race is presupposed. This text is similar to Paul’s discussion in Romans 5:12–14. The strongest recent argument for the relevance of Ephesians 2:3 to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is that by David L. Turner, “Ephesians 2:3c and Pecattum Originale, GTJ 1 (1980): 195–219.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98–99.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상태에 있었던 우리들, 우리들은 세상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을 따름으로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나면서부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자들이었다. 이는 전적인 타락, 그러니까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때문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이 없는 그 상태에서도 우리의 무기력함, 소망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글 번역에는 5절의 살리셨고라는 표현을 미리 1절에서 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처절한 죄가운데 있는 우리의 상태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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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For this reason, mbecause I have heard of your faith in the Lord Jesus and your love6 toward all the saints, 16 I ndo not cease to give thanks for you, oremembering you in my prayers, 17 that pthe God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glory, qmay give you the Spirit of wisdom and of revelation in the knowledge of him, 18 rhaving the eyes of your hearts enlightened, that you may know what is sthe hope to which he has called you, what are tthe riches of his glorious inheritance in the saints, 19 and what is the immeasurable greatness of his power toward us who believe, uaccording to the working of vhis great might 20 that he worked in Christ wwhen he raised him from the dead and xseated him at his right hand yin the heavenly places, 21 zfar above aall rule and authority and power and dominion, and above bevery name that is named, not only in cthis age but also in the one to come. 22 And dhe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and gave him as e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23 fwhich is his body, gthe fullness of him hwho fills iall in all.

m Col. 1:4; Philem. 5; See Rom. 1:8

6 Some manuscripts omit your love

n Col. 1:9

o Rom. 1:9; 2 Tim. 1:3

p See Rom. 15:6

q [Col. 1:9]

r [Heb. 6:4; 10:32; Rev. 3:17, 18]; See Acts 26:18

s ch. 4:4; [ch. 2:12]

t ch. 3:8, 16; Col. 1:27; See ver. 7

u ch. 3:7; Phil. 3:21; Col. 1:29; 2:12

v ch. 6:10; [Dan. 4:30]

w See Acts 2:24

x See Mark 16:19; Acts 2:33; 1 Pet. 3:22

y See ver. 3

z ch. 4:10; Col. 2:10; See John 3:31

a 1 Cor. 15:24

b ch. 3:15; Phil. 2:9; [Heb. 1:4]

c [Matt. 12:32]

d Cited from Ps. 8:6; See 1 Cor. 15:27

e ch. 4:15; 5:23; Col. 1:18; 2:19; [1 Cor. 11:3; Col. 2:10]

f ch. 4:12, 16; 5:30; Col. 1:18, 24; [ch. 5:23; 1 Cor. 12:27]

g ch. 3:19; See John 1:16

h ch. 4:10

i [Jer. 23:24; Col. 3: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15–23.

 

15-23절도 앞선 3-14절처럼 헬라어 원문으로는 복문의 형태로된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울은 교회가 주님의 강력한 역사하심과 그리스도안에 풍성한 은사, 선물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기를 기도한다. 

 

15-16절) 이러한 이유는 바로 앞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속을 성취하시는데 있어서 행하신 것들로 이것이 바로 바울의 찬양과 그의 간구의 이유가 된다. 

'주 예수 안에서의 너희 믿음’은 바울이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이미 들었고 그것을 토대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있다. 

에베소 교인들이 가진 믿음과 모든 성도들을 향한 너희의 사랑때문에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나의 기도에 너희를 기억한다. 바울이 이렇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그들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Faith in the Lord Jesus” is not Paul’s usual way of talking about Jesus as the object of faith, though other passages in the Pauline letters do occasionally speak of Jesus in this manner (1:13; Col. 1:4 [cf. Philem. 5]; likely Rom. 3:25; Gal. 3:26; 1 Tim. 3:13; 2 Tim. 3:15). The designation “the Lord Jesus” appears in Ephesians only here, but it does occur in Paul’s other letters, especially the Thessalonian correspondence. At times the name “Jesus” may carry an emphasis on the historical character of the person, but no such nuance seems intended here. Variations in the names for Jesus and their order occur with no distinction intended.

Faith in Christ leads unavoidably to “love” for others whom God has set apart for himself in Christ. Note the trilogy of faith, love, and hope that appears here and in at least nine other New Testament passages.2 Whereas in this text Paul has heard of his addressees’ faith and love and prays they may know hope, in Colossians hope seems to be the basis of faith and love. A variety of nuances exists in the ways the trilogy is used. That these three occur together so frequently in early church writings is no accident. They are foundational terms for Christianity, and along with grace and truth, summarize the gospel and its consequences.3

Verses 15–16 suggest Paul may not have even known the recipients, but he has heard of their faith and life. On that basis he has a rapport with them and intercedes for them. That Paul does not stop praying for them is a figurative way of saying that he prays for them regularly. Similar ideas are expressed in many of the opening prayers of his letters (see esp. Rom. 1:9–10).

2 Romans 5:1–5; 1 Corinthians 13:13; Galatians 5:5–6; Ephesians 4:2–5; Colossians 1:4–5; 1 Thessalonians 1:3; 5:8; Hebrews 6:10–12; (cf. 10:23–24); 1 Peter 1:21–22. The textual question as to whether “the love” belongs in Ephesians 1:15 should be answered in the affirmative.

3 See p. 59. As in the doxology, all five terms appear in Galatians 5:4–7; Ephesians 4:2–15; Colossians 1:4–6.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71–72.

 

17절) 영광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거나 혹은 그분 자신이 행하신 역사를 보이도록 표현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출 33:17-34:7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구한다. 본 서신의 맥락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보이시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기도의 의도는 명확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 지를 알수 있도록 계시를 받기를 구하고 있다. 성령의 역할은 이처럼 계시하시고 조명하심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앞선 내용에서 구속을 은혜를 이루시기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The glorious Father” (niv) is literally “the Father of glory.” Though this is a legitimate way of translating a Greek “of” expression (a genitive case), “glorious Father” is probably too weak. “Glory” often refers to that which makes God visible or to his activity of making himself visible. Note, for example, the classic description of the revelation of God in Exodus 33:17–34:7, in which Moses asks to see God’s glory.4 Given the context in Ephesians, the nuance seems to be “the Father who shows his glory,” that is, the Father who reveals himself.5 As in the doxology, God is viewed as a giver, who by giving makes himself, along with his character and plan, known.

The intent of Paul’s prayer is clear: that people will receive revelation to know what they have in Christ. Questions arise, however, over the intent of specific words. How, for example, should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be understood? Does it refer to the Holy Spirit (so niv) who brings wisdom and revelation or to the human spirit enabled by God to see the wisdom and revelation he gives?6 Some commentators say both ideas are present, but this is probably not Paul’s intent here. The themes of wisdom and revelation were emphasized already in 1:8–9. Paul focuses here on what is accomplished for humans, but as 3:16 shows, he is thinking of the Holy Spirit as the one who performs this task (see also 1 Cor. 2:10–12).7

Ephesians 3:5 speaks of revelation given by the Spirit to the apostles and prophets, but here revelation is open to and needed by all. Just as 5:18 encourages believers to be filled with the Spirit (who is already theirs as a guarantee, 1:13)), so here Paul prays that the Spirit will continually reveal to them knowledge about God (the “him” in 1:17 refers to God, not Christ). As in the doxology, this text is theocentric and Trinitarian. Some sections of Ephesians (e.g., 2:11–22) are primarily Christocentric, but most of Ephesians, especially 1:3–2:10, is theocentr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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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ee also Romans 6:4; 8:18; 2 Corinthians 3:18.

5 Technically, this may be a Hebraic genitive: “the Father characterized by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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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he Greek word pneuma (“spirit”) occurs fourteen times in Ephesians, twelve of which refer to the Holy Spirit (1:13, 17; 2:18, 22; 3:5, 16; 4:3, 4, 30; 5:18; 6:17, 18). This word is used of the ruler of this world in 2:2 and of the human spirit in 4:23. In Ephesians the Holy Spirit is the guarantee of salvation (1:14; 4:30), a revealer (1:17; 3:5), the basis of unity (2:18; 4:3–4), the builder of the church (2:22), a present power (3:16), the source of life (5:18), and the means of ministry (6:17–18).

7 See the discussion in Gordon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 (Peabody, Mass.: Hendrickson, 1994), 674–76.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72–73.

 

바울은 지금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또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기를 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단순히 육적인 시력이 아니라 내적인, 영적인 시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 시력이 회복되고 강화되어야 건강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18-19절)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했고 이를 구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마술과 주술을 통한 초자연적인 힘을 제어하는 능력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경쟁하는 권세들을 압도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기업은 믿는 자들의 기업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기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소유, 기업이다.(11절)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할 세가지 실재들이다. 

  1.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 :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그들을 선택하신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초점은 하나님의 선택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인 그것의 결과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부름이 급진적인-긍정적인 변화를 이을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원했다. 이러한 소망에 대한 앎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에베소서 2:12과 4:4에걸쳐 두번만 소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이 주재는 본 서신의 중요한 주제이다. 희망의 내용은 이미 믿음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다. Moule는 희망은 ‘발 끝으로 서 있는 믿음, 조심성 있는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바울은 롬 8:24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썼다. 바울은 현재의 부르심이 그들의 미래에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를 원했다. 

  2. 성도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 이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부요함”이라는 의미이다. 이 기업이 누구의 기업인지가 본문속에서는 불분명한데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성도안에서는 그 기업이 발견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누구이신지에 대한 계시와 그분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기업을 주실때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3. 능력의 지극히 크심 : 19절 본문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삶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능력을 표현하는 다른 표현이 4번 등장한다. 여기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루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성취하게 했음을 강조한다. 바울은 신자들이 이 위대한 능력이 그들에게 유용함을 알기를 바란다. 또한 여기서의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우주적인 능력의 발현이나 하나님 만이 가지신 내재된 특벼한 힘이 아니다. 도리어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앞선 내용들 속에서 강조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일하시는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As to the content of Paul’s intercession, he wants his readers to know three realities about God: the hope of his calling, the riches of his inheritance in the saints, and the incomparable greatness of his power for us. The relation of these three to each other is unclear. Are these three different items? or one with two explanations? or one from three vantage points? Since the second item deals with the wealth of God’s inheritance and the other two with benefits for believers, it is best to see the focus on three different items. This is not to suggest that other items are unimportant, but only that these three are the focus here.

(1) That Christians should know “the hope to which [God] has called” them means that they should know the significance that God’s call has for their future. In effect Paul prays they will know the significance of God’s choosing them—one of the themes of the doxology. The focus here is not on the fact of God’s choosing, but on the outcome, the consummation of God’s plan in eternity. Paul wants believers to know that God’s call makes a radical—and positive—change in what the future holds for them. Correspondingly, their understanding of that hope will change the way they live. In 4:1, 4 Paul will expand this focus on the ethical implications of God’s call for their daily life and for unity.

Hope is an important theme in this letter, despite the fact that the word occurs only here and at 2:12 and 4:4.8 The content of hope is already implied in the word “faith.” In fact, C. F. D. Moule rightly defined “hope” as “faith standing on tiptoe.”9 In Romans 8:24 Paul even wrote that we are saved by hope. An essential characteristic of Christianity is its tilt toward the future, and Paul desires his readers to have a sense of what God’s present call means for their future.

(2) The way the niv translates the second reality is questionable. “The riches of his glorious inheritance in the saints” (1:18b) is literally, “the wealth of the glory of his inheritance in the holy ones.” These kinds of liturgical combinations create difficulty for translators (see 2 Cor. 4:4, 6), but even if “of the glory” is to be taken as the adjective “glorious,” it should modify “riches” rather than “inheritance.” However, “the wealth of the glory” is more than either of these ideas. Paul points to the tremendous glory that is present when God inherits the people he has set apart for himself. It is the Father’s inheritance that Paul refers to, not that of believers (cf. 1:14). “In the saints” means that the inheritance is found in, or consists of, these people. The revelation of who God really is and enjoyment of him will take place when God inherits his own people. His glory will then be made manifest.

(3) The third reality believers should know is God’s “incomparably great power” for people with faith. With the mention of power Paul makes explicit a subject that has been implicit from the first and is central to the letter. In fact, statistically Ephesians focuses on words for power more than any other New Testament letter. In verse 19 alone four different words for power occur, emphasizing God’s activity in people’s lives. Here the apostle emphasizes what God’s power has accomplished in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in his exaltation to God’s right hand. Paul desires that believers will know this great power is available for them.

Significantly, the focus on God’s power here is not on God’s inherent power or on some cosmic display of force. Rather, it is on God’s life-giving power as it is specifically available for believers. In this way the prayer looks back to the emphasis in the doxology on God’s activity of planning and working for us and our salvation.10

8 Several other passages also focus on the future (see 1:10, 12, 14; 2:7; 3:11; 4:13, 30; 5:5; 6:8–9).

9 C. F. D. Moule, The Meaning of Hope (Philadelphia: Fortress, 1963), 11, quoting M. War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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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See pp. 45–54.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73–75.

 

본문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 부활에 대한 기록은 죽음의 상태로부터 일으키심이 아니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분의 부활은 고립된 사건이 아니라 미래의 부활의 첫번째 단계로 보기 때문이다. 그의 부활은 마지막 부활의 개시이다. 

In verse 20 the niv, as most translations, reads “raised him from the dead.” The Greek text actually uses the plural, “from the dead ones” (as do most passages in the New Testament referring to Christ’s resurrection). The point is not that Christ was raised from a state of death, but that he was raised out from the dead ones. This is an important difference, for it suggests that his resurrection was not viewed as an isolated event, but as the first stage in the future resurrection.11 His resurrection is an inauguration of the final resurr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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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f. Acts 4:2; 1 Corinthians 15:20–24.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75.

 

본문에서 표현된 하늘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의 고귀함과 존경을 나타낸다. 이는 단지 문자적인 장소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들 그리고 영적인 싸움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심은 그의 삶과 죽음 부활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의 승귀는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인생의 무계의 중심은 지상 생활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하늘의 영역에 있다. 승귀하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며 그의 승귀는 삶과 교회를 위해서 결정적이다. 이 승귀의 의미는 편지 전체에 걸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Christ has been raised and is now exalted “in the heavenly realms.” The words express the dignity and honor that God’s power has given Christ (Phil. 2:9–11). As indicated above,12“in the heavenly realms” does not point to heaven or to a literal location; its use in connection with the rulers and powers (3:10) and spiritual warfare (6:12) precludes this. “In the heavenly realms” here points to Christ’s presence with God and to the larger reality of life with God. That Christ is exalted to the highest position possible shows the importance of hi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Further, his exaltation shows that a shift has taken place. Life’s center of gravity is not earthly life; it is in the heavenly realm with Christ and God. As the Exalted One, Christ is Lord, and his exaltation is determinative for life and for the church. The implications of this exaltation will be unfolded throughout the letter (esp. in 2:5–6; 4:7–16).

12 See pp. 46–47.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75.

 

에베소서는 전반에 걸쳐서 영적인 세력, 영적 싸움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긴다. 1세기 소아시아 지역에서 중요한 목회적 관심사였다. 행 19:11-41절을 보면 실재적으로 에베소에서 이러한 마술적인 능력들과의 관계에서 축사와 마술 책을 불태우고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1-22절에서는 5종류의 능력이 언급된다. 통치, 권세, 능력, 주권, 이름이 그것이다. 이 능력에 대한 언급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비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혹은 현실의 존재인지 아니면 상상의 존재에 대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본문에서 분명한 것은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복종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해서 모든 권세는 패배했다.(골 2:15) 

The five categories of powers mentioned in 1:21—“rule,” “authority,” “power,” “dominion,” and “title”—are a stacking of terms to emphasize that Christ’s victory over them is total. No certain conclusions can be drawn about distinctions between these terms, and no hierarchy of the powers is in mind.15 In fact, precise definition of the five terms is difficult for three reasons: (1) New Testament discussions of the powers is brief and general, (2) most of the terms are used of both humans and spiritual beings, and (3) prior use of some of the terms provides little insight. For example, “rulers and authorities” is used of humans in Luke 12:11 and 20:20. “Authority” (exousia) is not used of angelic or demonic powers prior to the New Testament, and “dominion” (lit., “lordship”) does not occur prior to its Christian usage. The meaning of “ruler” (arche or archon) is debated. Does 1 Corinthians 2:8 refer to humans or spiritual powers who crucified the Lord of glory? Similarly, does “authorities” in Romans 13:1 refer to human political leaders or, as O. Cullmann argued, to human authorities and the spiritual beings that stand behind the humans?16

Without doubt, the five terms in 1:21 refer to spiritual beings, as the further development of the idea in 2:1–3 shows. But do they include human rulers as well? M. Barth affirms that these terms refer to spiritual beings, but he also writes, “Paul had in mind at the same time both visible, specific governors and the invisible authority exerted by them; concrete conditions and manifestations of life and the invisible mystery of the psyche.” By this he means the very structures of life, whether they be political, financial, biological, or historical.17 Walter Wink in his three volumes on the powers takes a similar approach, arguing that “principalities and powers” refers to the inner and outer aspects of any manifestation of power.18

15 See the discussion of 6:10–20, pp. 334–46.

16 Oscar Cullmann, The State in the New Testamen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6), 95–114.

17 Barth, Ephesians, 1:154, 174–75 (italics his).

18 Walter Wink, Naming the Powers, vol. 1, The Powers (Philadelphia: Fortress, 1984), 5.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76–77.

 

22절) 또 그는 모든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정복하셨고 모든 만물위에 교회의 멀리로 삼으셨다. 

본문은 구약의 시편 8:6의 인용이다. 

(시 8:6, 개정)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창 1:26-28, 개정)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히 2:6-9, 개정)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고전 15:27, 개정)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그는 피조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하신다. 본문의 머리는 케팔레라는 단어로 일반적으로 권세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위의 탁월하고 권위있는 통치자이시다. 

 

 

23절)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개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 있어서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첫째는 그의 몸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의 관계를 유기체의 하나됨으로 묘사한다. 이는 결혼안에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하기도 한다. 둘째는 충만으로 교회는 우주안에 그리스도의 통치와 존재의 중심 장소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이심을 선포한다. 교회라는 주제는 에베소서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로 다른 서신서에서 개별적인 모임으로 교회를 언급한다면 에베소서에서는 우주적인 관섬에서의 교회를 다루고 있다. 에베소서는 교회와 주님의 관계를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다루는데 그런 의미에서 머리는 권세,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의 위치는 그분이 주님이심을 강조한다. 또한 몸의 이미지는 신자들과 그의 연합 그리고 서로간의 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When Paul uses “head” in Ephesians and Colossians, “body” always occurs in the same context (though “body” is used at times without mention of head). This has led to debate as to whether there are two different meanings of “body” and how “head” and “body” are related. But to ask whether Christ as head is part of the body may well be an overreading of the metaphors. The main point is that Jesus’ position as “head” stresses that he is Lord; the image of the “body” stresses his unity with believers and their unity with each other.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79.

 

본문에서 충만의 의미와 충만의 지시어가 무엇인지? 채우다(충만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모든 것을 명사로 이해할지 아니면 부사적으로 모든 면에서로 이해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1. 교회는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2.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면에서 채우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다. 

  3.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본문에서 충만(플레로마)는 왼전함, 전체, 충만한 숫자등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7번 사용된다. 에베소서에서는 1:10, 3:19, 4:13에 등장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쓰인다.(골 2:9-10 참조) 구양에서도 이러한 충만의 개념을 하나님의 임재, 성막과 성전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쉐키나)으로 표현했다. 또한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지혜가 개인들에게 충만하게 임재했다고 표현한다. 충만은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와 능력을 느끼게 만드는 표현이다. 구약에서 성전에 가득했던 영광의 충만함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채우셨고 이제 교회가 이러한 신적인 충만을 분여받았다. 

 

19-23절에서 그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다. 하나님은 이 본문에서 주연 배우로서 역할을 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높이셨고 그의 발아래 모든 만물을 복종하게 하셨고 그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 23절 하반절은 그리스도와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더 묘사한다. 그는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구원을 알게되는 장소이며 교회는 이 충만함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이땅에서 구현해내는, 분여받는 곳이 바로 그의 몸인 교회이다. 

Given this Old Testament background and the other uses of “fullness” in Ephesians and Colossians, it seems unlikely that “fullness” refers to the church (options 1 and 2). Understanding the term in that way would give the church an elevated status that it has in no other letter (even though Ephesians does have an exalted view of the church; cf. 3:21). “Fullness” instead refers to Christ (option 3), and as C. F. D. Moule suggested, 28 the phrase “which is his body” in 1:23a is merely understood as a parenthetical comment about the church. In 1:19–23 God is the prime actor. He raised and exalted Christ, subjected all things to him, and gave him as head to the church. Accordingly, 1:23b is further description of Christ and his relation to God. He is the fullness of God, who fills all things. Christ is the place where God’s presence, power, and salvation are known, and the church draws from this fullness (see also 4:15–16).

28 C. F. D. Moul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and Philemon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62), 168.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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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In him we have obtained zan inheritance, ahaving been predestined baccording to the purpose of him who works all things according to cthe counsel of his will, 12 so that we who were the first to hope in Christ might be dto the praise of his glory. 13 In him you also, when you heard e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and believed in him, fwere sealed with the gpromised Holy Spirit, 14 who is hthe guarantee4 of our iinheritance until jwe acquire kpossession of it,5 lto the praise of his glory.

z Deut. 4:20; 32:9; See ver. 14

a ver. 5

b ch. 3:11; [Rev. 4:11]; See Rom. 8:28

c [Acts 20:27]

d ver. 6, 14; [Phil. 1:11]

e 2 Cor. 6:7; Col. 1:5; 2 Tim. 2:15; [Acts 13:26; 15:7]

f ch. 4:30

g See Acts 1:4

h 2 Cor. 1:22

4 Or down payment

i Acts 20:32; [ver. 18]

j Titus 2:14; See ver. 7

k See 1 Pet. 2:9

5 Or until God redeems his possession

l ver. 6,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11–14.

 

11절) 

그안에서 기업이 되었다라는 의미의 단어는 ‘클레로’라는 단어로 추첨하여 임명하다, 제비뽑아 얻다의 의미이다. 영어의 문자적인 의미로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기업을 얻었다라는 의미이지만 원어의 의미는 그분안에서 추첨을 통해 어떤 사람을 지명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예정을 의미한다. 

우리가 천국의 기업을 얻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선택, 추첨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모두 그분의 목적 안에서 그분의 계획을 따라서 예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초월하시면서 자유로우신 분이시다. 그런데 이분은 이방의 변덕스럽고 이해할 수 없고 변덕스러운 신들과는 달리 믿는 자들의 구원을 영원전부터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예정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와 선택을 통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협의, 결정을 따라 일하시는 분이다. 이 말은 구원과 관련된 모든 일이 그냥 임시 방편이나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삼위의 협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 예정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책임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모든 그의 대단한 노력을 보인 것처럼, 그는 개인 전도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양심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정하신 일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의 수단을 사용하신다. 비극들이나 악에 대해서 바울이나 다른 성경의 기자들을 절대 그들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주원 교리를 위로와 확신의 수단으로 보며 악이 승리하지 못할 것을 확신하며 그분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이 세상속에서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는 누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Who works all things according to the counsel of his will is best understood to mean that every single event that occurs is in some sense predestined by God. At the same time, Paul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human responsibility, as is evident in all of the moral commands later in Ephesians (chs. 4–6) and in all of Paul’s letters. As Paul demonstrated in all of his remarkable efforts in spreading the gospel (Acts 13–28; cf. 2 Cor. 11:23–28), he believed that doing personal evangelism and making conscious choices to obey God are also absolutely essential in fulfilling God’s plan. God uses human means to fulfill what he has ordained. With regard to tragedies and evil, Paul and the other biblical writers never blame God for them (cf. Rom. 5:12; 2 Tim. 4:14; also Job 1:21–22). Rather, they see the doctrine of God’s sovereignty as a means of comfort and assurance (cf. Rom. 8:28–30), confident that evil will not triumph, and that God’s good plans for his people will be fulfilled. How God’s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work together in the world is a mystery no one can fully understan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3.

 

13절) 

성령의 인치심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을 때까지 성령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는 성령께서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신 것이 사실임을 확증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성령의 인침, 왕의 인을 받은 사람은 구원이 보장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유다 왕의 도장

본문의 너희는 이방인들을 의미한다. 바울 시대에 인침은 소유권과 보호를 의미했다. 신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시하는데 그 인침을 사용하고 최종 구속을 얻을 때까지 보존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시다. 

you. The majority of Paul’s readers were probably Gentile. See note on v. 11. marked … with a seal. In Paul’s day, a seal indicated ownership and protection. The seal used to mark believers as God’s people (Ezek 9:4–6; Rev 7:1–8; 9:4) and to preserve them until they attain their final “redemption” (Eph 1:14) is the Holy Spirit whom God promised (Ezek 36:26–27; Joel 2:28–29). Being marked with this seal does not refer to some second blessing or subsequent action; it refers to receiving the Spirit “when” Gentiles believe the gospel.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0.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의 인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을때 받는 성령을 의미한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을때 성령께서 신자들안에 내주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침이다. 

 

이 진리의 말씀인 구원의 복음은 유대인들 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역사했다. 사도인 베드로 조차도 이방 백부장 고넬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것을 처음에는 꺼리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름을 알지 못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복음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해졌고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다. 

The gospel is “the message of truth”—“the true message of the gospel,” as it is called in Col. 1:5—because it has God for its author; it is “the gospel of God” (Rom. 1:1). The communication of the gospel to Gentiles was undertaken reluctantly by the first believers, who could scarcely entertain the thought that the fulfilment of God’s promises to Israel should embrace outsiders within its saving scope. Apart from Peter, who required a special revelation from heaven before he could bring himself to accept Cornelius’s invitation to visit him and tell him and his household the way of salvation,91 Gentile evangelization began as the result of private enterprise, when unnamed Hellenists of Cyprus and Cyrene came to Antioch and told the story of Jesus to Gentiles as well as Jews.92 From then on, throughout the provinces of the eastern Roman Empire, many more Gentiles than Jews believed the gospel, and the terms on which they might be admitted became a matter of serious concern in the mother church at Jerusalem. When, as Luke records, “the apostles and the elders” at Jerusalem “were gathered together to consider this matter,” Peter argued that it would be wise to follow the example of God, who gave proof of his acceptance of Gentile believers by “giving them the Holy Spirit just as he did to us; and he made no distinction between us and them, but cleansed their hearts by faith” (Acts 15:6–9).

91 Acts 10:9–20; 11:5–17.

92 Acts 11:19–21.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264–265.

 

(고후 1:22, 개정)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여기서의 논리적인 순서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이를 믿으면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셔서 최종적으로 그것을 획득할 때까지 보증을 해주시는 것이다. 마치 보증금을 지불하시고 이후에 잔금이 완납될때까지 이를 보증해주시는 것이다. 

 

The seal of the Spirit was received by the Gentiles here addressed as it had been received earlier by Jewish Christians—when they believed. The verbal form used here is identical with that found in Acts 19:2, where Paul at Ephesus asks a group of “disciples” if they received the Holy Spirit when they believed; it is a participial form meaning “having believed” or “on believing.”94 By giving believers the Spirit, God “seals” or stamps them as his own possession. The Spirit is variously called “the Spirit of God” or “the Spirit of Christ”; “if anyone has not the Spirit of Christ, he does not belong to him” (Rom. 8:9). Here he is called “the Holy Spirit of promise.”95 This might mean “the promised Holy Spirit” (cf. Acts 2:33, “the promise of the Holy Spirit”);96 but more probably it indicates that the Holy Spirit brings with him when he is received the promise of glory yet to come. So, in Eph. 4:30, believers are said to have been sealed with the Spirit “for the day of redemption”—a statement which summarizes the words that follow in our present context.

94 Gk. πιστεύσαντες, to be construed in both places as the “coincident” aorist participle (MHT I, p. 131, n. 1). Here πιστεύω has the same sense as ἐλπίζω in the compound προελπίζω in v. 12. The phrase ἐν ᾧ before καὶ πιστεύσαντες ἐσφραγίσθητε, resumed from the beginning of v. 13, relates to ἐσφραγίσθητε rather than to πιστεύσαντες.

95 Gk. τῷ πνεύματι τῆς ἐπαγγελίας τῷ ἁγίῳ.

96 Gk. τήν … ἐπαγγελίαν τοῦ πνεύματος τοῦ ἁγίου, where πνεύματος is a genitive of definition. In Acts 1:4 the same promise is called τὴν ἐπαγγελίαν τοῦ πατρός where πατρός is subjective genitive.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265.

 

14절) 성령은 우리가 그 소유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기업을 보증하시는 분이다. 이는 그의 영광은 찬양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우리 기업,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분이시다. 보증금을 내야 계약이 이루어져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의 구원의 기업에 대해 보증금을 지불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소유할 때까지 말이다. 

성령은 구원을 보증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올 영광스러운 삶을 미리 경험하게 하신다. 

 

The word translated “possession”104 occurs in the same sense in 1 Peter 2:9, where believers (again, as it happens, Gentile believers) are called “a chosen rac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for [God’s] possession.” Language is there deliberately applied to Gentile believers which in the OT is used of God’s people Israel—notably in Exod. 19:5, where Yahweh calls Israel “my own possession105 among all peoples.” The verb corresponding to the noun “possession” is used in a similar sense in Acts 20:28, where Paul directs the elders of the church of Ephesus to “feed the church of God, of which he obtained possession106 through the blood of his own [Son].” These words also echo an OT passage—Ps. 74:2, where God is entreated: “Remember thy congregation, of which thou hast obtained possession long since.”107 That such language should now be applied to Gentile believers is a token of the security of their new standing within the community of God’s own people, fully sharing present blessing and future hope with their fellow-believers of Jewish stock.

104 Gk. περιποίησις (in 1 Pet. 2:9, λαὸς 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

105 Heb. (ʿam) seg̱ullāh, LXX λαὸς περιούσιος (cf. Exod. 23:22 LXX; Deut. 7:6; 14:2; 26:18; Tit. 2:14). In Mal. 3:17 seg̱ullāh is rendered εἰς περιποίησιν.

106 Gk. τὴν ἐκκλησίαν τοῦ θεοῦ, ἣν περιεποιήσατο.

107 Ps. 73:2 LXX, τῆς συναγωγῆς σου, ἧς ἐκτήσω.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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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In him we have rredemption sthrough his blood, tthe forgiveness of our trespasses, u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race, which he lavished upon us, in all wisdom and insight vmaking known3 to us the mystery of his will, naccording to his purpose, which he wset forth in Christ 10 as a plan for xthe fullness of time, yto unite all things in him, things in heaven and things on earth.

q Col. 1:14

r Rom. 3:24; 1 Cor. 1:30; [ch. 4:30]

s See Acts 20:28

t See Acts 2:38

u [ch. 3:8, 16; Col. 1:27]; See Rom. 2:4

v See Rom. 16:25

3 Or he lavished upon us in all wisdom and insight, making known …

n [See ver. 5 above]

w [ver. 11; Rom. 8:28; 9:11]

x See Mark 1:15

y Col. 1:16, 20; [ch. 3:15; Phil. 2:9, 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7–10.

 

7절) 그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곳 죄사함을 받았다. 

속량, 구속이란 누군가를 포로 혹은 노예의 상태로부터 값을 치르고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최고의 예시는 바로 출애굽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의 상태로부터 구속하셨다.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는 구속의 특성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죄책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과이며, 보혈은 속죄의 희생으로서 그분의 죽음을 의미한다. 

Redemption denotes ransoming someone from captivity or from slavery. The supreme OT example was the exodus, where God redeemed Israel from slavery in Egypt (see Ex. 15:13; Deut. 7:8; 2 Sam. 7:23; Mic. 6:4). Forgiveness of our trespasses explains the nature of redemption: Christians are freed from slavery to sin and guilt. This was effected by Christ’s blood, which means his death as an atoning sacrifice (see also Rom. 3:24; Eph. 1:14; 2:13; 4:30; Heb. 9:1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2.

 

8절) 그분의 은혜는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넘치게 하셨다. 

 

9절) 그분의 기뻐하심, 목적을 따라서 그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는데 이는 때가 찬 경륜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비밀은 ‘미스테리온’으로 전에는 감추어졌거나 단지 애매하게 알려진 것이지만 이제 분명하게 알려진 어떤 것에 대한 계시를 의미한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은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Mystery as used in Scripture (Gk. mystērion) refers to the revelation of something that was previously hidden or known only vaguely but now is more fully made known (see note on Col. 1:26–27). The mystery of God’s will, now revealed in Christ, is “to unite all things in him” (Eph. 1:10; see also 3:3–1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3.

본문의 때가 찬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무르익은 때를 의미한다. 

 

10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그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다. 

통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나케팔라이오’로 이 문맥에서 세가지 강조점을 지닌다. 1)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통치자이다. 2) 그리스도는 매듭을 짓거나 일관되고 의미있는 전체를 가져온다. 3) 그리스도는 죄때문에 혼란에 이른 우주를 조화롭게 회복한다. 본질적으로 앞절, 9절에서 말하는 신비의 내용은 살아있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모든 창조물을 요약하고 통일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bring unity. Greek anakephalaioō. A significant term that conveys three emphases in this context: (1) Christ is the head or ruler (v. 22), (2) Christ “sums up” or brings things into a coherent and meaningful whole, and (3) Christ restores harmony to a universe that has come into chaos because of sin (Col 1:20). In essence, the content of the “mystery” (Eph 1:9) is God’s will to sum up and unify all creation, both the animate and inanimate, under Christ’s headship.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0.

 

통일이라는 단어는 이 문맥의 핵심 주제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적인 화해를 가져오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은 하늘과 땅위에 있는 모든 피조세계의 역사에 대한 중심축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백성을 구속하셨고 모든 적대적인 세력을 잠잠케 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때가 찬 경륜은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을 통일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계획 ‘오이코노미아’는 때가 되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있는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으로 우리가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뜻의 비밀이다. 그 비밀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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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lessed be f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in Christ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gin the heavenly places, heven as he ichose us in him j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hat we should be kholy and blameless before him. In love lhe predestined us2 for madoption to himself as sons through Jesus Christ, naccording to the purpose of his will, oto the praise of his glorious grace, with which he has blessed us in pthe Beloved.

e 2 Cor. 1:3; 1 Pet. 1:3

f See Rom. 15:6

g ver. 20; ch. 2:6; 3:10; 6:12

h [ch. 2:10; 2 Thess. 2:13; 1 Pet. 1:2]

i James 2:5; [Deut. 7:6; 26:18]

j [2 Tim. 1:9]; See Matt. 13:35

k ch. 5:27; Col. 1:22; 1 Thess. 4:7

l ver. 11; Rom. 8:29, 30

2 Or before him in love,5 having predestined us

m See Rom. 8:15

n ver. 9; [Luke 2:14; Heb. 2:4]; See Luke 12:32

o ver. 12, 14

p [John 3:35; 10:17; Col. 1:13]; See Matt. 3: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3–6.

 

3절)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그분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신령한 복은 이후 4-14절에 언급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전 과정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선택, 양자됨, 구속, 용서와 인침이 포함된다. 이러한 복들은 영적인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에서, 그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every spiritual blessing. Verses 4–14 specify the contents of these blessings, which cover the whole scope of God’s saving work in Christ. This includes our election, adoption to sonship, redemption, forgiveness, and sealing. These blessings are spiritual not so much in the sense that they are non-physical but in the sense that the Spirit of God graciously gives them. in Christ. Paul highlights Christ’s centrality in vv. 3–14 by repeatedly noting that God’s plan of reconciliation is accomplished and its blessings made available “in Christ” (vv. 3, 9, 12, 13), “in him” (vv. 4, 7, 11, 13), and “in the One he loves” (v. 6).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399.

 

4절)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그것은 우리로사랑안에서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지속적으로 3-14절에서 신자들로 하여금 아래의 방식에 따라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을 강조합니다. 그가 우리를 택하심(4절), 그가 우리를 예정하심(5절), 예정을 입어 또한 우리가 선택됨(11절). 이러한 신자에 대한 신적인 선택이 창세전에 일어났다. 이는 인간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에 의한 것이다. 

he chose us. In vv. 3–14 Paul emphasizes God’s eternal decision to grant salvation to believers in the following ways: “he chose us” (v. 4), “he predestined us” (v. 5), and “we were also chosen, having been predestined” (v. 11). Since this divine election of believers occurred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v. 4), it is based solely on God’s gracious decision and not on any human merit (cf. God’s choosing Israel to be his treasured possession in Deut 7:6–8, or God’s choosing of Jacob over Esau before they “were born or had done anything good or bad” in Rom 9:11). See also John 5:21; 6:37, 39, 44; 15:16; 17:6; Rom 8:29–30; 9:6–26; 11:5, 7, 28; Col 3:12; 1 Thess 1:4; 2 Thess 2:13; Titus 1:1; 1 Pet 1:1; 2:9; Rev 17:8.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399.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일체로서 동일한 위격을 가지시지만 성부가 삼위일체 세 위격 가운데 이끄시고 지휘하시는 역할을 맡고 계심을 보여준다. 신자를 죄와 사망에서 구속하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은 자의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결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계획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그분의 사랑안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공로도 취할 수 없다.(어떤 공도 내세울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그분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선택의 목적 자체이다. 거룩함이 도덕적 순결을 표현한 것이라면 흠이 없음은 그리스도인이 이전에 행했던 허물과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한다. 

This indicates that for all eternity the Father has had the role of leading and directing among the persons of the Trinity, even though Father, Son, and Holy Spirit are equal in deity and attributes. God’s initiative in redeeming the believer from sin and death was not an arbitrary or whimsical decision but something God had planned all along “in Christ.” Since God chose his people in his love, they can take no credit for their salvation. God was determined to have them as his own (see note on 2:8). holy. God chose them with the goal that they be holy and blameless before him. This goal is not optional for Christians—it is the purpose of election. Holiness here expresses moral purity, while blamelessness expresses freedom from the guilt of trespasses and sins in which the Christian formerly walked (1:7; 2:1, 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2.

 

5절) 그의 뜻의 선한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로마제국 시절에 가족의 성을 이어가고 주인의 재산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로 입양되었다. 입양된 아들은 더이상 그의 친아버에게 책임이 없고 그의 새로운 양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모든 신자들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양자됨의 영을 받은 자는(롬 8:15, 23) 그에 걸맞는 특권과 책임을 가진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옛 아저비인 악마에게 책임이 없다.(요 8:38, 44) 

In the Roman world, sons were adopted to carry on the family name and maintain property ownership. The adopted son was no longer responsible to his natural father but was only responsible to his new adoptive father. Similarly, all believers, male and female, who receive the Spirit that brings about adoption (Rom 8:15, 23) acquire a new status with its accompanying privileges and responsibilities. We are no longer obligated to our old father, the devil (John 8:38, 44).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 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00.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으로 우리를 예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시는데에 있어서 어떤 외부적인 외압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분의 확고한 뜻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정하시고 자기의 아들 삼으신 것이다. 

본문에서 그분의 기쁘신 뜻이라는 표현은 원래 그의 뜻의 그 목적(호의)라는 의미인데 여기의 목적에 해당하는 단어가 ‘유도키아’로 신약에 명사형태로 9번 등장하는데 복음서에서 3번(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음) 등장하고 바울서신에 6번 등장한다. 에베소서에는 1:5, 9에 사용된다.  

In all other passages it is God’s purpose, resolve, choice that is spoken of. (a)   V 2, p 315  God has decided tha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should dwell in Christ (Col 1:19). It is God’s purpose to give the kingdom to the little flock (Luke 12:32). He was pleased to reveal Jesus Christ to Paul (Gal 1:15) and to save believers by the folly of the preaching of the cross (1 Cor 1:21). We also read, however, that God was not pleased with the majority of the Israelites in the wilderness period, and thus he repudiated them (1 Cor 10:5). Nor is he pleased with those who shrink back (Heb 10:38, citing Hab 2:4). God takes no pleasure in sacrifice (Heb 10:6, 8, citing Ps 40:6–8 [39:7–9]; here εὐδοκέω is used in par. with θέλω G2527); but Christ does the will of God by offering himself as a sacrifice; he thus gains God’s good pleasure.

(b) At the baptism of Jesus, God’s voice sounded out from heaven: “This is my Son, whom I love; with him I am well pleased [εὐδόκησα]” (Matt 3:17 par. Mark 1:11 and Luke 3:22; cf. Gen 22:2; Ps 2:7; Isa 42:1; 2 Pet 1:17). According to Matt 17:5, this voice resounded with the same words at Jesus’ transfiguration (cf. 12:18). Here, too, it is a case of God’s choice and determination, by which he has installed Jesus as Messiah. In 11:26 εὐδοκία describes the transcendent purpose of God.

(c) Of partic. interest is Luke 2:14, where the orig. reading is surely εἰρήνη ἐν ἀνθρώποις εὐδοκίας (over against the TR, which reads the nominative εὐδοκία, yielding the sense, “peace, good will to men” [so KJV]). But the meaning of the clause is not “peace among people who manifest goodwill.” The angelic song hardly has in view people who somehow approved of this event or who contributed to it or who were well-intentioned. Rather, the expression corresponds with the phrases adduced above from the DSS (see JL 3). The word εὐδοκία refers to the good pleasure of God, and thus the people in view are those who are recipients of the divine favor, i.e., those he has chosen (see ἐκλέγομαι G1721). The song proclaims a divine event and activity: God has sent the Christ to earth. Because of this saving act he is glorified in heaven; the effect on earth is peace, i.e., eschat. fulfillment. (See E. Vogt, “ ‘Peace among Men of God’s Good Pleasure’ Lk 2,14,” in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ed. K. Stendahl [1958], 114–17; P.-R. Berger, “Lk 2,14: ἄνθρωποι εὐδοκίας: Die auf Gottes Weisung mit Wohlgefallen beschenkten Menschen,” ZNW 74 [1983]: 129–44.)

(d) Several Pauline passages require comment. In Phil 2:13–14 Paul summons the congregation to work out their salvation on the grounds that God himself is enabling them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ὑπὲρ τῆς εὐδοκίας]” (NRSV; NIV, “in order to fulfill his good purpose”). The passage brings together in striking fashion divine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God’s working in us is not suspended because we work, nor our working suspended because God works. Neither is the relation strictly one of cooperation as if God did his part and we did ours.… [Rather,] the relation is that because God works we work.… The more persistently active we are in working, the more persuaded we may be that all the energizing grace and power is of God” (J.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1961], 148–49).

In Eph 1:5, 9, 11 εὐδοκία is roughly synonymous with such terms as θέλημα G2525 (“will, intention”), βουλή G1087 (“will, resolve”; see βούλομαι G1089),   V 2, p 316  and πρόθεσις G4606 (“design, plan, purpose”; see προτίθημι G4729). Believers have a place in God’s eternal will and election; salvation is the goal, and God’s free grace is the central point of the statements.

The concise formulation in the prayer of 2 Thess 1:11, πληρώσῃ πᾶσαν εὐδοκίαν ἀγαθωσύνης (lit., “[that God] may fulfill all goodwill for goodness”) prob. also means God’s elective purpose directed toward the conduct of Christians. Paul therefore prays at the same time that God’s will may be done and reach its goal. But it is also poss. to understand it as referring to the human will (cf. NRSV, “every good resolve”).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314–316.

 

6절) 그분이 우리를 예정하신 이유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복주신)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속 그 자체가 아니라 구속을 통해 자신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12, 14절)  

God’s ultimate purpose is not redemption as such but the praise of his glorious name through redemption. This theme is repeated at key junctures in the argument (see vv. 12, 14).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6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신령한 복은 바로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시고 예정하심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들 삼아주신 것이다. 바로 그 이유는 우리로 거룩하게 흠이 없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구속이 가장 큰 은혜이고 목적이 되겠지만 하나님께는 구속을 통해서 그분을 찬송하게 하시는것이 더 큰 목적이다. 그 신령한 복을 알고 깨닫고 누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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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ting

Paul, aan apostle of Christ Jesus bby the will of God,

To the saints who are in Ephesus, and care faithful1 in Christ Jesus:

d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a See 2 Cor. 1:1

b See 1 Cor. 1:1

c Col. 1:2

1 Some manuscripts saints who are also faithful (omitting in Ephesus)

d See Rom. 1: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엡 1:1–2.

 

1절)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자신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매우 강조했다. 자신의 사역에로의 부름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오직 신적인 부르심에 의하였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전 9:16-17, 개정)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바울은 위의 본문처럼 자신의 의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사도라는 표현은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주님의 부활을 본 사람, 교회에서 선교 사역으로 보냄을 받은 자, 좀더 넓은 의미에서 대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도는 자신의 사도성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더 강력하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뜻(the will of God)’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른 어떤 서신에서보다 많이 등장한다. 그 관심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들을 향한 그의 사역들이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가 사도가 되기를 원하셔서 바울이 사도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An apostle of Christ. Paul’s identification of himself as an apostle appointed by God is his customary way of beginning his letters. (Cf. the exact parallels in 2 Cor. 1:1; Col. 1:1; 2 Tim. 1:1.) Often Paul had to defend his legitimacy as an apostle, but here the tone is merely descriptive. The term apostle carried several connotations in the early church, all of which were true of Paul. It referred to someone who had seen the risen Christ (1 Cor. 9:1), to those sent out by the church with a missionary task, or more broadly to anyone who functioned as an agent or representative. This self-description emphasizes the authority with which Paul wrote. If he was an apostle because of the will of God, what he wrote must be seen as communication from God.

The will of God is an important theme in Ephesians, appearing more frequently here than in any other letter. The concern is not about Christians finding the will of God; rather, the emphasis is on God’s purpose with his actions for humanity. The point here is that Paul was an apostle because God wanted him to be.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7.

 

어떤 이들은 이 서신이 회람서신으로 원문에는 에베소라는 명칭이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도시에 가느냐에 따라서 그 부분에 그 도시의 이름을 넣어서 읽었다고 한다.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본문에서 성도라고 표현된 단어는 ‘하기오스’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사람, 거룩한 자, 구별된 자라는 의미이다. 본문의 의미는 특별히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로 지명받은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되어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The identification of the recipients as “saints” (lit., “the holy ones”) is Paul’s usual description of Christians. “Saints” is not a helpful translation, for this English word usually refers to extraordinarily pious people. Paul’s first intent was not that these people lived especially holy lives—he described the Corinthian Christians the same way (1 Cor. 1:2), and yet he had no illusions about the sanctity of their lives. Rather, his primary concern was to emphasize that just as he had been appointed by God to be an apostle, they too had been separated to God (separation is the key idea in the word “holy”). Paul’s addressees were holy because God had set them apart to be his people. The focus is entirely on God’s action and the reference is to God’s saving work.1

1 See 1 Corinthians 6:11, where “sanctified” is the verb form of the word “holy.” In the Old Testament both Israelites and angels were sometimes called “holy ones.” Such language was adapted to describe God’s people in the New Testament.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38.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에베소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이다. 성도로서의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문화속에, 사회속에서 살아내는 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이것에 대한 답을 갖출 필요가 있다. 

This sense of “geography” is important.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fact that Christians live in two places at the same time? Paul’s readers lived both in the region of Ephesus and in Christ. What was the significance for this locale that they were in Christ and what was the significance for Christ that they were in this locale? Each Christian must personalize that question in deciding how to live. We can neither avoid the place where we live nor betray the Christ in whom we live. The rest of Ephesians does not focus on the responsibility of the readers to their locale except in the most general way. Most of the attention will be on the significance of being in Christ for salvation and for life in the Christian community. Both are important, but in applying the text we need to extend the theology. We must also put into practice the significance of being in Christ for relations outside the Christian community.

 Klyne Snodgrass, Ephesian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6), 42.

 

2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임하는 것이다. 

 

본문의 인사말을 서신의 전형을 모두 담고 있다.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인사말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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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저자 

저자는 바울이다. 하지만 최근 여러 학자들은 본 서신이 바울의 주종자나 바울인 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라고 주장을 한다. 그 이유로 첫번째는 그 편지의 스타일이나 사상이 바울 서신의 특성과 맞지 않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에베소서의 저자가 그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과 친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서에 오랜 기간 거주한 것으로볼때 이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했다라는데는 여러 정당한 주장들이 있다. 첫번째로 서신 자체에서 바울이 저자임을 명백히 주장한다.(1:1; 3:1) 특별히 이를 반증할 증거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초대교회에서 다른 가짜 펴지들은 거부했지만 에베소에서 보내진 이 편지는 바울이 쓴것으로 만장일치로 받아들였고 이 도시 에베소는 거짓 사도의 주장에 대한 분별로 정평이 나있었다. 게다가 고대의 편지들은 일반적으로 저자와 수신자를 모두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었는데 그 사람은 원본이 진짜임을 보증했고 그 세부사항을 말했을 것이다. 두번째 저자의 스타일(문체)ㅇ 대한 분석은 종종 주관적으로 불완전한 증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최근 좀더 정교한 컴퓨터를 이용한 분석을 통해서 에베소서가 이전에 알려진것 보다 더 바울의 문체와의 유사점이 많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바울이 외관상 그의 독자들과 친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고대의 고고학적인 증거로 에베소가 도시에서 48km 떨어진 주변의 마을들과 시골 지역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이 편지를 쓰기 몇년 전에 이 도시에 머문 이후에 에베소 주변에 새롭게 생겨난 새로운 신자들의 집단을 개인적으로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기만적으로 위조한 편지 내용에 ‘참된 것을 말하고’, ‘거짓을 버리라’고 강력하게 썼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서를 기록했다라고 자신있게 확언할 수 있다. 

 

저작 연대

바울은 자신의 투옥 사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서신은 바울이 로마에 갇여 있었던 AD 62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해야 한다. 

 

주제 

에베소서의 두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세계를 자신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 2) 그리스도는 모든 열방과 그 자신 그리고 그분의 교회안에서 서로를 하나되게 하셨다. 이 위대한 역사는 삼위 하나님의 강력하고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역사에 의해서 성취되었고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인식되고 받는 것이다. 이 위대한 진리의 빛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위대하신 주님께 적합한 감사를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목적, 계기, 배경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우주적인 구속 사역의 진리, 다양 민족들 사이에서의 교회의 통일성, 교회, 가정, 세상 속에서의 올바 행동 등에 있어서 일반적인 교훈을 설명한다. 평안의 매는 줄로 연합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속에서 구주의 값없는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반응일 뿐만 아니라 구주의 사역의 특징을 이룬다.

고대 에베소는 마술과 주술에 사로잡힌 도시였기 때문에 이 점은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하늘 아래의 권세들을 지배하며 그리스도의 승리의 승천을 현세와 내세에 교회와 모든 만물의 머리로 강조한 이유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들의 충성을 세상과 그들의 삶속에서 가장 최고의 권세이신 그리스도께 맹세하기 위해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고대 도시 에베소

아시아 서부 해안의 중요한 항구도시인 에베소는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유명하다. 바울 이전 몇십년 전 스트라보는 에베소를 소아시아 식민지들중 가장 큰 시장으로 불렀다. 하지만 항구의 토사 퇴적과 지진 피해로 인해서 몇세기 후 그 ㅎ아구 도시는 버려졌다. 시민들이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친 거대한 극장은 바울이 이도시에 있던 즈음 글라우디오의 통치 시절 확장되었다. 이 극장은 20,000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했다. 주전 4세기 에베소 사람들은 화재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원조를 거절하개며 자신들의 자금으로 이 거대한 신전을 자랑스럽게 재건했다. 이 신전 주변 지역은 피난처 역할을 했고 은행 역할을 하며 이 도시의 경제적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전에서는 거세된 제사장이 처녀들의 도움을 받아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겼다. 

 

주요 주제들

 

문예적 특징

에베소서는 서신으로서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인사, 감사, 설명, 권면과 맺음말로 구성된다. 에베소서의 핵심적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분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속에서 발견된다. 서론의 강력한 찬양의 표현과 신학적 논쟁의 부재는 에베소서를 매우 긍정적인 톤으로 만든다. 이 서신은 1-3장은 교리적이 부분, 4-6장은 실제적인 부분으로 명확하게 나뉘어진다. 

 

에베소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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