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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pAristarchus my fellow prisoner greets you, and Mark qthe cousin of Barnabas (concerning whom you have received instructions—rif he comes to you, welcome him), 11 and Jesus who is called sJustus. tThese are the only men of the circumcision among my fellow workers for the kingdom of God, and uthey have been a comfort to me. 12 vEpaphras, who is one of you, a servant of Christ Jesus, greets you, always wstruggling on your behalf in his prayers, that you may stand xmature and fully assured in all the will of God. 13 For I bear him witness that he has worked hard for you and for those in Laodicea and in Hierapolis. 14 yLuke the beloved physician greets you, as does zDemas. 15 Give my greetings to the brothers3at Laodicea, and to Nympha and athe church in her house. 16 And when bthis letter has been read among you, have it also read in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and see that you also read the letter from Laodicea. 17 And say to cArchippus, “See that you fulfill dthe ministry that you have received in the Lord.” 
18 I, Paul, ewrite this greeting with my own hand. fRemember gmy chains. hGrace be with you. 
pActs 19:29; 20:4; 27:2; Philem. 24; [Rom. 16:7]
qSee Acts 15:37, 39
r[2 Tim. 4:11]
s[Acts 1:23; 18:7]
tSee Acts 11:2
u[Philem. 7]
vch. 1:7; Philem. 23
wSee Rom. 15:30
xSee Matt. 5:48
y2 Tim. 4:11; See Acts 16:10
z2 Tim. 4:10; Philem. 24
3Or brothers and sisters
aSee Rom. 16:5
b1 Thess. 5:27
cPhilem. 2
d2 Tim. 4:5
eSee 1 Cor. 16:21
f[Heb. 13:3]
gver. 3; See Phil. 1:7
h1 Tim. 6:21; 2 Tim. 4:22; [Titus 3: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4:10–18.

10-11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유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한다. 이 세명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들로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에서 온 마게도냐 사람으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과 로마로 함께 여행했다. 요한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 바울의 첫번째 선교여행시에 선교팀에서 떠나게 되어서(행 13:13) 바울과 바나바가 이것으로 다투어 결국 갈라서게 된다.(행 15:39) 그런데 이제 마가가 변했고 이로 인해 바울의 견해가 달라졌다. 이제 마가는 바울과 화해했고 그의 사역에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 Paul’s co-workers offer him assistance and hearten his spirits during the dark days of his confinement as he awaits the final decision about his case. Aristarchus.A Macedonian from Thessalonica who traveled with Paul to Jerusalem and then to Rome (Acts 19:29; 20:4; 27:2; Phlm 24). Mark.Presumably John, also called Mark (Acts 12:12, 25; 13:5, 13; 15:36–41; see 2 Tim 4:11; Phlm 24; 1 Pet 5:13), whose stature is bolstered when identified as “the cousin of Barnabas” (Acts 11:25–26; 14:3, 14; 15:12; Gal 2:9).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4.

12-13절) 골로새 교회에서 온 그리스도 예수의 종 에바브라를 위해서 문안하라. 그가 항상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한다.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많이 수고했음을 바울이 증언하고 있다.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는 골로새 인근의 도시들이다. 히에라볼리는 미네랄 온천으로 바울당시 유명했다. 그러나 현대 많은 방문객들이 보는 것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 새롭게 지은 것들과 확장한 것들이다. 히에라볼리는 아폴로, 레토, 프루토 등을 경배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고대 무덤에 유대인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비문이 남아있다. 
- in Laodicea and in Hierapolis. These were neighboring towns to Colossae in the Lycus Valley (on Laodicea, see 2:1; Rev. 3:14). Hierapolis (modern Pamukkale) boasts a large mineral spring, famous also in Paul’s day. However, much of what visitors see today dates from the rebuilding and expansion that occurred under Domitian (a.d. 81–96) and later. Hierapolis was known for the worship of Apollo, Leto, and Pluto; yet inscriptions in the ancient cemetery also point to a Jewish presenc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0.

본문에 애쓰다라는 단어는 ‘아고니조마이’라는 단어로 씨름하다, 투쟁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주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눅 22:44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애써서 기도하실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 wrestling.Greek agōnizomai. Paul uses this Greek word in 1:29 (“strenuously contend”) to refer to the struggle of his missionary labor. See also 1 Cor 9:25 (“competes in the games”); 1 Tim 6:12 (“fight”); 2 Tim 4:7 (“fought”). A noun form of this Greek word in Luke 22:44 (“anguish”) describes how Christ prayed in Gethseman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5.

- 골로새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하고 거기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고 전해 준 사람은 에바브라였다(1:7–8). 오네시모처럼 그도 너희 중의 한 사람, 즉 골로새 출신이고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문안 인사를 전한다. 바울은 여기에 덧붙여 에바브라가 자신처럼 항상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견고하고, 온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고 있다고 전한다. NIV는 ‘온전하고 확신 있게’라는 말을 문장의 끝에 둠으로써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 번역한다(‘that you may stand firm in all the will of God, mature and fully assured’).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 말이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직접 연결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은 골로새 교인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골로새서 1:24–2:5과 특히 에베소서 1:5–12에 나오는 것처럼 훨씬 더 큰 실체이다. 즉,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가리킨다. 에바브라는 (바울처럼) 골로새 교회라는 신생 교회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고, 그에 따라 그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는지 이해하고, 보다 더 기초가 확실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인간)으로 성장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36–237.

'완전하고 확신 있게’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에바브라의 기도의 핵심이다. 본문에서 완전하게라고 기록한 내용은 ‘텔레이오스’로 영적으로 성숙한을 의미하고 확신 있게 라는 말은 ‘플레로포레오’로 전적으로 확신한이라는 표현이다. 이 둘 모두 골로새 교회안에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돌이켜 성숙하고 흔들리지 말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 Further, Paul’s phrase mature and fully assuredextends his commentary on the importance of Epaphras’s prayer for the Colossians. This phrase captures two themes in Paul’s letter and therefore functions here to connect his concern for Epaphras with the content of what he has just written. According to O’Brien, the word mature (teleios)“touches on one of the key issues at Colosse in which members of the congregation were encouraged by false teachers to seek maturity or perfection through their philosophy (2:8) with its ascetic practices, visionary experiences and special revelations, rather than through Christ” (1982:253). Paul also uses this word to summarize his and God’s purpose for mission: “so that we may present everyone perfect [teleios]in Christ” (1:28). The second term, fully assured (plērophoreō),belongs to the plēroōword-family, which Paul has used in confessing the core convictions of Colossian Christianity (1:9, 19; see also 4:17), in introducing his own mission (1:25; 2:2) and in arguing against the false teaching in Colosse (2:9–10). Paul’s use of these two catchwords in describing the aim of Epaphras’s prayer for the Colossians ties Epaphras with Paul in both the Colossian crisis and its resolution (see Lohse 1972:173–74).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4:12.

14절)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
여기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이다. 그는 앞선 할례파에 속하지 않은것으로 보아 이방인인 것으로 보이고 바울의 여정과 특히 옥중에 있는 동안 함께 했다. 누가의 경우 바울이 겪고 있는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서 그의 여정에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갈 4:13-14) 데마는 본문에서는 문안을 받는 인물이지만 딤후 4:10에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데마처럼 주님을 따르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인물들이 있다. 
- Luke the beloved physicianis the same Luke who authored Luke’s Gospel and Acts (see also 2 Tim. 4:11; Philem. 24). He accompanied Paul on some of his journeys (see Introduction to Acts: Author and Title) and was apparently with Paul throughout his two-year imprisonment in Caesarea and then in his two-year Roman imprisonment. Since Luke is not identified among “the only men of the circumcision” (Col. 4:9–11), he was probably a Gentile. Lamentably, Demaslater followed worldly pursuits and deserted Paul (2 Tim. 4:1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0.

15-17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인사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함, 눔바는 부유한 여성으로 자신의 집을 예배의 공간으로 내어주었다. 
바울은 골로새에 보낸 편지를 라오디게아의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읽게하고 또한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도 골로새 성도들에게 읽을 것을 요청한다. 
아킵보는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이다.(몬 2)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직무를 다할 것을 요청한것 처럼(딤후 4:5) 아킵보에게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기 위해서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직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본문에서 눔바가 여자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를 남성으로 기록한 번역본도 있고 여성으로 기록한 번역본도 있다. 하지만 여성으로 본다면 초대교회내에서 여성 리더십이 상당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브리스길라 롬 16:5, 고전 16:19 / 루디아 행 16:15-40)

본문의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에베소서가 그러한 회람서신이라는 주장도 있고 이 서신은 없어졌다라고도 한다. 
- 전체로서 바울의 사역은 전 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기 위한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고(고전 3:10–11; 엡 2:20), 그의 서신들은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기획되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기능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것을 보증한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좋은 실례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서신들이 지닌 고유한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바울서신이 보존된 이유라면 이 구절은 또한 바울서신들을 수집하는 과정이 어느 정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골로새에 보내진 이 서신(혹은 이 서신의 필사본)은 라오디게아 교회로도 보내질 예정이다. 또한 서신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아마도 그들이 받은 다른 서신을 골로새 교회에 보내야 할 것이다(이 서신은 두기고가 골로새로 가는 길에 라오디게아에 들려 전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서신은 어떤 서신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말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의해 (바울에게? 또는 골로새 교인에게?) 쓰여 진 서신이 아니라, 오히려 라오디게아에 보내지고, 지금 라오디게아로부터 골로새로 보내질 서신을 가리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서신이 바울 자신에 의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5)그러나 그 서신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라이트풋(Lightfoot)의 논의6)가 표준안으로 여겨진다. 그는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가 우리가 아는 에베소서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에베소서에는 어떤 특정한 인사말이나 특정한 상황을 반영한 권면이 없고, (많은 사본에) 수신지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반적이고 폭넓은 어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회람서신이다. 이 견해는 학자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Caird는 예외).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만한 주된 반론이 없으므로, 몇몇 사건을 가설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그 함의를 좀 더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에베소 감옥에 투옥된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물론이고 주변 지역에 있는 신생 교회들에게 보낸 공동서신으로서 ‘에베소서’를 기록했다. 두기고(엡 6:21)는 라오디게아 다음에 골로새를 방문할 목적으로 리쿠스 계곡의 지역교회들을 위해 필사본을 전달했다(본서 서두에 있는 지도를 보면 이 경로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바울이 골로새서 2장의 보다 더 특수한 경고들을-그것이 아무리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적절하였을지라도-그 장엄하고 시적인 ‘회람서신’ 안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골로새 교회가 회람서신의 또 하나의 수령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기고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가지고 가고, 오네시모는 자기의 이전 주인 빌레몬에게 보낼 짧은 서신을 가지고 간다.
물론 이 가설은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이 가설은 자료를 잘 다루고 있고, 특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에베소서’는 말하자면 저자가 골로새서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그가 강조한 위대한 진리를 예배 속에서 찬찬히 생각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물론 반대로 골로새서는 ‘에베소서’ 안에 있는 몇몇 주제들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춘 버전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세한 재구성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부분의 학자들처럼)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서신’을 잃어버려진 서신으로 고려한다면, 이 구절의 근본적인 요점은 분명하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여한 권위는 라오디게아와 골로새에서 읽혀지도록 리쿠스 계곡에 보낸 두 개의 서신으로 말미암아 행사될 수 있다.
5)그러나 C. P. Anderson(‘Who Wrote “The Epistle from Laodicea”?’, JBL85, 1966, 436–440)은 이 서신이 에바브라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논의를 통해 내가 왜 그의 견해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지 설명할 것이다.
6)Lightfoot, 274–300. 그는 여기서 교부 시대와 그 이후 시대에 잘 알려진 위조문서인 ‘라오디게아 서신’에 대한 논의도 포함시킨다. 또한 Lightfoot, ‘The Destination of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in his Biblical Essays(Macmillan, 1893), 375–396도 참조.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39–241.

18절) 끝 인사,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기억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이 친필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앞서 1:1에서 지금까지 디모데가 바울이 불러주는 편지의 내용을 대필했다면 이제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은 본인이 직접 펜을 들어 편지에 서명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는 것이다. 
- Letter Closing.Paul ends his letter by asking the Colossian Christians to remember him before the Lord. I, Paul, write this greeting with my own hand. If Timothy has so far been functioning as Paul’s secretary to whom he dictates the letter (see 1:1), Paul now takes the stylus and signs the letter personally (cf. 1 Cor. 16:21; 2 Thess. 3: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0.

바울은 자신의 매임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본 서신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을 맺고 있다. 
- Remember my chains.Paul is glad to suffer for Christ (1:24), but he depends on their prayer support (cf. Phil 1:19). The letter begins (Col 1:2) and ends with “grace.”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5.

- 또한 이 서신에서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사역에 대해 재치 있게 소개하는 바울의 매력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한 놀라운 그의 비전은 그가 서신을 쓰고 있는 상황과 묘하고 희한하게 대조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교회와 사도바울을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좀 더 알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하는 지혜요 지혜로운 구원의 계획이 지금 새 아담이 되셔서, 모든 종족의 남녀, 어린아이들이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새 시대로 안내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를 반영한다. 골로새 교회는 그 분 안에서 생명의 충만에 이르렀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말한 모든 내용은 결국 예배, 감사, 사랑에 대한 왕의 초대가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과 화해를 이루셨고, 이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화해를 누리고 계속 성장하여 온전하고 풍성한 새 시대의 인간의 삶을 살면서 그 분을 누리도록 초대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들은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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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e always thank God,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en we pray for you, since we heard of gyour faith in Christ Jesus and of gthe love that you have for all the saints, because of hthe hope ilaid up for you in heaven. Of this you have heard before in jthe word of the truth, the gospel, which has come to you, as indeed kin the whole world it is lbearing fruit and increasing—as it also does among you, since the day you mheard it and understood nthe grace of God in truth, just as you learned it from oEpaphras our beloved pfellow servant.2He is pa faithful minister of Christ on your3behalf and has made known to us your qlove in the Spirit. 
fEph. 1:15, 16; Philem. 4
gSee 1 Thess. 1:3
gSee 1 Thess. 1:3
hver. 23; See Acts 23:6; Titus 1:2; Heb. 3:6
i2 Tim. 4:8; 1 Pet. 1:4
jSee Eph. 1:13
k[ver. 23; Ps. 98:3]; See Matt. 24:14
lJohn 15:5, 16; [Phil. 1:11]
m[Rom. 16:26; Eph. 4:21]
nSee Acts 11:23
och. 4:12; Philem. 23
pch. 4:7
2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sundoulossee Preface
pch. 4:7
3Some manuscripts our
q[Rom. 15:3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골 1:3–8.

3절)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한다. 
골로새서는 기독론,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가 특징이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분리되시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의 대리자이심을 먼저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기도사역에 자신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이 일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도는 이처럼 어떤 상태에서도 매이지 않는다. 이 기도를 통해서 다른 이들의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이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은 명확하게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와 예배는 하나님외에 다른 어떤것에 드려져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바울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계를 비유한다. 감사는 이처럼 상호 충실함에 기초한 언약적 관계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인식 뿐만 아니라 언약의 의무에 대한 순종을 포함하는 것이다. 마치 아이가 자신의 부모에게 존경을 돌릴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 Paul always gives thanks for God’s work in the lives of others. Here he uses the plural pronoun—we always thank God … when we pray for you—in order to emphasize the corporate nature of his ministry. The prayers he regularly shares with others, such as Timothy (1:1) and Epaphras (1:7–8; see also 4:12), seek to benefit others spiritually without assuming any special status for himself. Further, Paul’s prayer is centered on God,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Worship never congratulates people or focuses on their material needs; rather, Christian worship is rooted in our singular devotion to God, from whom and to whom our salvation is directed.
  • Paul’s frequent use of Fatheralludes to an important Old Testament metaphor for God’s covenantal relationship with Israel. Thanksgiving is given to God, then, within the framework of a covenant of mutual fidelity. Thus, to express thanks to God as our Father not only acknowledges God’s faithfulness to us but also assumes our covenantal obligation to obey God in return, even as the child is responsible to bring honor to his or her father. So thanksgiving anticipates our own faithfulness to a faithful God, which is made possible by God’s grace through faith in Christ (see Eph 2:8–10).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1:3.


4-5절) 바울의 감사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게 베푼 그들의 사랑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이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본문속에서 바울이 항상 강조하는 기독교의 주요 가치인 믿음, 소망,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믿음과 사랑이 소망에 기초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 소망은 단순히 소망하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객관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 객관적인 것은 바로 복음, 진리의 말씀으로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고 마음에 둘때 그것은 마치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면 접속하여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소망은 지상의 어떤 통치자나 어둠의 권세들이 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 Paul spoke frequently of the importance of these three Christian virtues (see Rom. 5:1–5; 1 Cor. 13:13; Gal. 5:5–6; Eph. 4:2–5; 1 Thess. 1:3; 5:8), which were seen as foundational to the Christian life (see also Heb. 6:10–12; 1 Pet. 1:3–8, 21–22). In this passage, faith and love are based on hope, which is presented not as the action of hoping but as something objective—in the sense of “the thing hoped for”—that Christians can anticipate with confidence (see Col. 3:4). Because it is laid up for you in heaven, no earthly ruler or demonic power can rob believers of the reality of this hope.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3.
거짓된 소망은 사랑과 믿음을 위협한다. 

사랑은 행동하는 믿음이다. 그런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큰 사랑이다.

  • The Fruit of Colossian Faith (1:4–5)*  Paul next characterizes the congregation’s life by the familiar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1 Thess 1:3; 1 Cor 13:13).
  • I work best under the pressure of a deadline. Having a particular goal in mind for a task helps me to accomplish it more quickly and effectively. And Paul here lays a goal before his readers. While he uses the triad of faith, love and hope to commend the Colossians, it also serves to set out the objectives of Christian life. Every task that we perform, every calling we hear, every burden we respond to, every act of worship and every opportunity to witness should aim to strengthen our faith, love and hope.
  • Paul mentions faithfirst; faith for him occupies the place of prominence in the Christian life. (More than one-half of all the New Testament references to “faith” are found in Pauline writings!) Unlike John, who emphasizes the act of believing, Paul’s phrase your faith in Christ Jesusprobably does not refer to personal decisions for Christ as the object of faith (but see Schweizer 1982:33). Rather, Paul’s idea of faith emphasizes a relationship with Christ which nurtures a distinctive religious identity. Typically, Paul distinguishes the church’s relationship with Christ from other religious traditions (especially Judaism) whose identity in the world is fashioned by different practices (such as observance of the law). Further, in continuity with the Old Testament writers, the content of faith for Paul is a narrative of God’s salvation. The believer trusts in the God whose promised salvation is fulfilled in the life of God’s people through a sequence of historic events, climaxing with the dying and rising of the Messiah. Often, as in the confessions of Colossians 1:13–23, Paul provides his readers with a recital of the redemptive events which are to be trusted as true and effective for salvation (see also Rom 10:9).
  • Also note that Paul often uses various prepositions with faithto express different aspects of the church’s vital relationship with Christ. For example, through (dia)is combined with faithto express the means by which reconciliation with God is achieved during the new dispensation (as in Col 2:12 and Rom 3:25). Or when Paul wishes to specify the precise object of human trust, he will use on (epi):a relationship with Christ requires trusting onGod’s gracious action in Christ (Rom 4:5). In the triadic formula of Colossians 1:4–5, Paul uses the preposition in (en)to indicate a place or even a community where people live. A community of faith has been cleansed of sin; it is a place, created by divine grace through human faith, where the Spirit reigns and where believers are liberated from the power and consequences of sin. In this sense, faith in God is the way into Christ, where spiritual resources are found that empower faithful living.
  • Paul sees salvation as something Christians experience together. To enter the living Christ by faith is to experience intimate fellowship with him and also with other believers (1 Cor 12; Gal 5:6–11). Christianity is not the private religion of a particular believer. Rather, every believer is baptized with other believers into Christ, where they worship God together and where God’s grace forms them into a community to love one another.
  • Appropriately, love (agapē)comes next in Paul’s triad. He uses an article with love (literally, “thelove”) to make more definitive and concrete his idea of love. Paul resists abstractions; for him love is a transforming act, not a moral principle or an empathetic feeling. Love is faith in motion (Gal 5:6), so that even divine love is understood by specific acts, such as Christ’s death. Further, the phrase for all the saintssuggests love’s unconditional and inclusive character: it embraces the entire congregation. Here too the preposition for (eis)is crucial, because it points love in the direction of another person; love is always for someone else.
  • Finally, the community’s shared faith and mutual love result in their common hopefor God’s coming salvation. The NIV’s loose translation of the difficult phrase dia tēn elpida,“for the sake of hope,” correctly indicates that faith and love are the effective yield of hope: faith and love … spring from hope.This should not seem remarkable to us (cf. Moule 1968:49), even though we might expect Paul to view faith or love as the ground of hope. He does speak elsewhere about the impossibility of a hopeless faith (1 Cor 15:12–19) or a hopeless love (1 Thess 3:12–13), and in 1 Thessalonians he combines faith and love to make hope their common foundation (1 Thess 1:3; cf. 5:8). The curious phrase which speaks of hope as stored up in heaven(see also 1:23, 27) may point to the tension between a salvation already realized in heaven but not yet fully realized on earth (3:1–4). Paul recognizes that our experience of God’s salvation is partial, our love still imperfect and our faith yet incomplete (1 Cor 13:10–12). Hope projects the completion of love and perfection of faith into a certain future, when the Risen Christ returns to earth and God triumphs over sin and death “on earth as it is in heaven.”
  • Hope may also point to a crisis of faith and love. Biblical writers, especially Paul, are quite clear about the logical relationship between eschatology and present life. For example, if we believe that a restored creation awaits the end of history when Christ returns, then we are likely to view the present order in pessimistic, world-denying ways. We are less likely to work for changes within the cultural order if our hope for change rests only in Christ’s future return. We are likely to view salvation as personal rather than public and as spiritual rather than social. Paul’s concern is for a balanced perspective. On the one hand, he agrees that Christ’s work will have its perfect result in the restoration of all things at his future return. On the other hand, Christ’s work already is transforming believers into the community of faith and love, and the presence of that transformed community does make a positive difference in the surrounding social order.
  • Illustrations of this abound. Even now, evil cannot triumph over grace! Paul never promotes a world-denying discipleship; he underscores how life within the world is transformed by God’s grace. Believers who trust Christ for their salvation belong to him and not to the world; they are “in him” and under his lordship (1:15–20), where all things spiritual and material are made new by grace (3:9–10).
  • In the case of the Thessalonians, both faith in Christ and love for one another were threatened by a faulty hope. Apparently, new Christians had become confused about the status of those who had died before Christ’s return. They supposed that the “dead in Christ” could not now participate fully in God’s final triumph over sin, discouraging those still “alive in Christ.” Paul wrote 1 Thessalonians to correct a faulty futuristic eschatology (see 1 Thess 4:13–5:11), in order to comfort believers (1 Thess 4:18; 5:11) and encourage a more mature faith (1 Thess 3:2–10; 4:14; 5:8) and active love (1 Thess 3:11–13; 4:9–10; 5:8).
  • Perhaps Paul introduces his letter to the Colossians with the faith-love-hope triad to correct another faulty hope that threatened the faith and love of early Christians. Paul’s emphasis in Colossians, however, is on a “realized” rather than “futuristic” eschatology (see introduction; also see R. Martin 1991:48 for a different view). Indeed, there is some evidence that Paul’s Colossian opponents promote a futuristic view of salvation, resulting in a retreat from society (2:16–23; O’Brien 1982:12). While I do not think eschatology is a primary feature of the false teaching at Colosse, Paul clearly writes this letter to find a proper balance between what portion of God’s salvation is already possessed and what portion will be possessed at Christ’s return (3:1–4). Moreover, Paul opposes any retreat from society that neglects the church’s responsibility to confront and convert the lost. I suspect Paul’s stress on hope may even carry evangelistic freight: only when the lost are made to see the hope of their salvation will faith and love spring forth from them.
  • *Notes:1:4–5The apocalypticism of earliest Christianity interpreted the effect of Christ’s death in spatial and temporal terms. Spatially, God’s salvation is already realized in heaven but not yet realized on earth. According to Revelation, for instance, God’s triumph over evil, the essential result of Christ’s death, has already had its full effect in heaven (Rev 5:9–10; 11:19; 12:1–12). God’s triumph over evil on earth,however, has not yet been realized, for Christ must return before evil and death are purged from the created order (Rev 14:6–20:15). Temporally, what has already taken place because of a past event (the death of Jesus) awaits a future event (the Second Coming of Jesus) to complete God’s salvation as a “new creation.” According to Revelation, then, Christ’s death and exaltation have triggered a new age of God’s salvation that will ultimately fulfill in human experience what has taken place in heavenly existence. See my Revelation(Wall 1991:12–25) for a discussion of the spatial and temporal ingredients of Christian apocalypticism.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1:4.

소망없는 믿음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소망없는 사랑도 불가능하다. 

6절) 이 복음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르매 이들이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들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갔다. 
당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한 세대, 30여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분이 지상명령으로 제자들에게 맡기신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탈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페르시아등으로 전해졌고 이 과정에 골로새에 있는 이들에게도 들려져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본문 5절과 6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중요한 단어는 들음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을 들었고 그로 인해서 삶이 변화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여기서 복음 선포와 변화는 들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듣는 이들이 있어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듣지 않은 것이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으라고 외쳤다.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소리 높여 선포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들었지만 듣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그 외침을 들었겠지만 그들의 삶으로는,, 순종의 자리로는 듣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도 여전히 많은 메시지들을 듣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삶으로 그것을 듣고 있는가? 바울의 경우에 그는 확신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한 길을 가고 있던 도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뒤바뀌게 된다. 이처럼 듣는자는 열매를 맺게 되고 듣지 않는 자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 Paul shifts from thanking God for what we have heardabout the Colossians to what you have already heard about … the gospel.The common verb hearlogically relates Paul’s favorable report of the Colossians’ life with the Colossians’ reception of the gospel, so that the one results from the other: because the Colossians have already heardthe Christian gospel (and presumably believed it to be true), their lives have been transformed. This connection of proclamation and transformation makes perfect sense to Paul, whose missionary experience is of the gospel … bearing fruit and growing(see Luke 8:1–15). Moreover his personal experience is validated by Scripture, whose stories of Old Testament prophets heralded the good news of God’s salvation as the final solution to Israel’s spiritual and sociological woes. We should not be surprised, then, that Luke’s narratives of Paul’s calling on the Damascus Road (cf. Acts 9:1–19; 22:6–21; 26:9–23) and Paul’s own allusions to the same event reverberate with echoes of the prophets called by God to their evangelistic tasks (compare Gal 1:11–17 and Jer 1:4–19). Like the prophets of old, Paul is called to preach the gospel; and as with the Israel of old, the church’s believing response results in restoration by God’s powerful grace.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1:5.

바울의 복음의 내용은 바로 진리의 말씀이다. 구약에서 진리의 말씀이라는 구절은 토라로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혜로 우리를 이끄는 가이드이다. 골로새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에 어려움을 받는 상황에서 이 진리의 말씀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 The content of Paul’s gospel is the word of truth. Even as the prophets of God proclaimed “the word of the Lord,” so does Paul. The subject matter of Paul’s gospel is theological because its source is God; its claims can be trusted as true because God is Truth. Significantly, the phrase word of truth translates a Hebraism more naturally rendered “God’s true word” (as in Ps 119:43). In the Old Testament the phrase refers to the content of God’s revelation given in Torah (literally, Law), which is a reliable guide to God’s promised blessing. This intimate union of revealed truth and experienced life is noted elsewhere in Paul’s writings, where the reconciling “word” (2 Cor 5:19) comes from God (1 Cor 14:36), the Lord (1 Thess 1:8) or Christ (Col 3:16) in order to shape the life of the faith community (Phil 2:16). This equation of divine revelation and human experience anticipates Paul’s argument against the Colossian “philosopher,” whose teaching is a “word of falsehood” and results in spiritual and eschatological death rather than in life (see O’Brien 1982:12). The “deceptive philosophy” of Colosse, which fashioned a private and mystical religion, would also diminish interest in the work of evangelism and thereby undermine the prospect of changed lives.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1:5.


7-8절) 또한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에바브라에 의해서 세워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에바브라는 너희를 위한(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고 성령안에서 너희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한 자이다. 
본문의 배웠다라는 단어는 ‘만타노’라는 단어로 제자(마테테스)라는 단어의 어근과 관련이 있다. 이는 단순히 복음의 내용을 듣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본문에서 에바브라가 가르친, 골로새 교인들이 배운 그 복음의 말씀은 믿음안에서 조직신학적인 가르침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것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훈련, 혹은 성경공부를 대할때 이것을 그저 단계를 마치고 어떤 내용을 숙지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는 바른 배움은 삶을 통해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에바브라는 에베소에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이후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 3개의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바울은 그를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라고 호칭했다. 
  • Probably one of the residents of Asia who heard Paul’s preaching in Ephesus and became a Christian (Acts 19:10). He became the founding evangelist of all three churches in the Lycus Valley: Colossae, Laodicea, and Hierapolis (Col 4:13). As Paul’s beloved fellow servant of Christ, he was a reliable source of the gospel.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28.

바울은 에바브라를 신앙의 본으로 삼을 것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그는 에바브라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배우라는 것이다. 이처럼 에바브라는 모범을 보여주며 바울의 메시지의 중재자, 실천가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이 능력있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공허한 외침, 가르침보다 삶으로 생생하게 살아내는 구체적인 표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에바브라가 필요하고 우리가 에바브라가 되어야 한다. 
  • A third “just as” clause (omitted by the NIV) issues in the prayer’s vertex, where Paul’s pivotal point is made (see the discussion of chiasmus, above): the fruitproper to the hearing and understanding of the gospel is exemplified by the evangelist Epaphras (see “The Crisis at Colosse” in the introduction). In another sense, Paul’s pastoral concern provides his readers with a personal illustration of his earlier triad: Epaphras is faith, love and hope in action. Thus, his faith in Christ Jesus(1:4) is embodied in his work as a faithful minister of Christ; his love for all the saints (1:4) is embodied in his support of Paul and ministry to the Colossians (Lohse 1976:23; compare Rom 5:5; 15:30; Gal 5:22); finally, his ministry, through which the Colossians learnedthe good news of God’s grace, has grounded them in their hope that is stored up … in heaven(1:5). Epaphras, then, is the exemplary mediator of the message. He illustrates what Paul insists upon: that the good news about God’s salvation in Christ must be proclaimed.
  • I am not at all convinced of the value of “church growth” strategies that encourage church planting without evangelism; nor am I convinced of the value of expository preaching that fails to call the congregation to conversion and spiritual renewal by the simple preaching of the gospel. Even mature believers must be reminded with some regularity of the truth that calls people to Christ. Central to Paul’s definition of the church is its missionary activity: we must be a people of the gospel. Paul contends that the preaching of the gospel yields a healthy harvest in the congregation’s spiritual life. The ministry of evangelism is prudent not only because it illumines the truth about Christ and leads people into Christ, but also because there, in Christ, lives and relationships are transformed. The example of Epaphras reminds believers that the ministry of evangelism can revitalize the whole church, making it stronger and even more productive for the Lord.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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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gEpaphras, my hfellow prisoner in Christ Jesus, sends greetings to you, 24 and so do iMark, iAristarchus, jDemas, and jLuke, my fellow workers. 
25 k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r spirit. 
gSee Col. 1:7
hRom. 16:7
iSee Col. 4:10
iSee Col. 4:10
jSee Col. 4:14; 2 Tim. 4:10, 11
jSee Col. 4:14; 2 Tim. 4:10, 11
kSee Gal. 6:1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몬 23–25.

23절)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빌레몬의 친구중의 하나로 그 도시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는데 사용한 인물이다(골 1:7; 4:12). 그는 지금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24절) 바울은 이어 동역자인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와 누가의 이름을 들면서 이들이 함께 문안 하고 있다. 
  • Mark, Aristarchus, Demas, and Lukeare also named in Col. 4:10, 14. For Mark, see Acts 12:12. For Aristarchus, see Acts 19:29. Luke is almost certainly the one who authored the Gospel of Luke as well as Acts (see also Col. 4:14; 2 Tim. 4:11). Luke was apparently with Paul throughout his two-year imprisonment in Caesarea and then in his two-year Roman imprisonment. Lamentably, Demas later followed worldly pursuits and deserted Paul (2 Tim. 4:10).
  •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56.

25절) 바울은 마지막 인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라고 기도한다. 은혜는 이 서신의 괄호와 같다. 바울은 빌레몬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오니세모에게 끼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아가 바울은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부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 grace.Brackets this letter. Paul expects Philemon to extend the same grace to Onesimus that the “Lord Jesus Christ” extended to him (v. 3). your spirit.Plural; Paul expects the spirit of the whole church to be infused with divine graciousness.
  •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88.


  • Typically, Paul’s last word to his readers reminds them of the availability of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living within Christ’s lordship will enable his disciples, especially Philemon, to respond to the apostle’s advice (see commentary on Col 4:23). Martin adds that this prayer is a “liturgical grace that situates the letter in the house congregation at worship” (1991:145), reminding current readers that all Paul’s writings are for nurturing the worshiping community.
  • Paul often adds the phrase with your spiritto his benediction (compare Gal 6:18; Phil 4:23; also 2 Tim 4:22). Not just a fuller but equivalent expression of “with you,” this concluding phrase suggests the collaboration of Christ’s Spirit, who mediates his grace, with Philemon’s human spirit, which receives it and applies it to life (Wall 1979:128–44). Such an image lies at the very core of Paul’s participatory Christology: God’s salvation-creating grace transforms the believer who actively collaborates with Christ in the ongoing work of God.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25.


오네시모의 실수는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기회가 되었다. 일시적인 손실이 영원한 이득, 구원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보게 된다. 우리는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구약의 요셉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이 그를 배신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아 넘겼을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하심의 섭리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고백한다.(창 45:7; 50:20)
(창 45:7, 개정)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창 50:20, 개정)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우리는 여기 오네시모의 이야기속에서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서 그의 도망이 선한 역사를 이루게 했는지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여기서 신적 수동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15절) 바울은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 도망간 것이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다고 믿은 것이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서 도망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후 그는 하나님의 섭리, 그분의 시선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굴곡을 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깨어진 삶과 관계를 회복시키실 수 있다. 당시의 문화속에서 오네시모는 죽어 마땅한 종에 불과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더 나은 다른 것을 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생 역전의 드라마를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셨다. 주인을 통해 도망간 오네시모, 그는 바울을 만나 구원을 받고 다시 옛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진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이제 더이상 그를 종이 아니라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요 동역자로 여길 것을 요청한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재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때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된다. 이 편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의 가장 어두운 순간, 깊은 절망, 가장 두려운 불순종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큰 그림 속의 일부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우리 개인의 영역만을 바라보는 것이 문제이다. 
  • In the story of Onesimus we can see the mysterious providence of God at work. We will never know how Onesimus eventually met Paul after making good his escape. We can only know from the use of the passive voice, “he was separated from you” (v. 16), that Paul believed that God’s hand was in what had happened. The escapade turned out differently than any might have expected, in that Onesimus ultimately escaped into the arms of God’s grace. He could not escape God’s eye on him. We cannot straighten the lines of our crooked paths in life, but God can. God can take our worst intentions and turn them around for good, healing broken lives and broken relationships. In Onesimus’s culture, others could only see a slave, a useless slave, and worse a runaway slave. God saw more and purposed greater things for him.
  • Everything turns out differently from what was foreseen by either master or slave. God was using this escape to bring Onesimus to Paul.175Paul sends him back to his master as a brother who, he trusts, will send him forth as a coworker in the gospel. We usually can only see the traces of God’s hand in our lives in retrospect. The story behind the letter can help us see that even our darkest moments, deepest despair, and most dreadful disobedience can have some meaning in God’s purposes. We are all part of some great tapestry, but usually we can only make out the individual threads.
  • 175The “perhaps” in verse 15 reveals the input of human freedom in this process. God’s purposes are accomplished through the agency of humans. Paul could have spurned this runaway slave; instead, he “begot” him in the faith (v. 11; niv, “who became my son”). Philemon is free to balk at Paul’s request, but Paul trusts that God’s purposes for both will prevail.
  •  David E. Garland, Colossians and Philemon,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98),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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