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가치 혹은 복음 전도에 얼마나 유용한가에 입각해 예술, 과학, 예능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압력은 결국 창조가 주는 선물과 복음이 주는 선물을 모두 손상하고 만다.(12)
-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확실히 ‘기독교적인’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런 중압감은 창조에 본질적으로 잘못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창조를 불완전하게 보는 전제는 기독교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인 사고방식을 형성하는데 흔히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1장.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므로 악은 결코 결정권이 없다고 확신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24)
* 종교개혁자들의 사례
가정생활 / 미술분야 / 음악분야 / 문학분야 / 과학분야 / 교육분야
- 복음이 어떻게 전혀 다른 별개의 두 세계관을 만들어 낼수 있는가? (중세 미술과 바로크 미술) (호튼, 30p) / 중세의 종교 인물화 - 렘브란트의 인물화(종교개혁 시대의 세계관은 미술이 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현세적인 작업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
- 종교개혁가들의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태도 : 예배 안에서 말씀을 해방하고 창조 질서를 방해하는 예술을 금하고 싶어했을 뿐이다.(32) / 루터는 “나는 지나치게 영적인 일부 사람들의 항의처럼 예술을 폐지해야 하고 복음의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는 모든 에술과 특히 음윽을 예술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주신 분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본다.”(33)
2장. 기독교와 문화 : 영역 주권에 대한 바른 이해
- 교회는 말씀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고 가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친교뿐 아니라 양질의 여가시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으며 국가는 자신에게 맡겨진 현세적 사명을 회복함으로써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55)
* 그리스도와 문화
1) 문화에 맞서는 그리스도 : 터툴리안, 재세례파, 퀘이커교도, 톨스토이
2)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 :
3) 문화를 초월하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다루려 함,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
4)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르도 : 이원론, 루터주의자
5) 문화를 변혁시키는 그리스도 : 하나님의 주권은 문화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 개혁주의 전통
3장. 기독교와 학문 : 일반 은혜의 가치와 한계
- 바울 사도가 공격한 대상은 철학 자체가 아니라,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 세상의 지혜가 신학을 지배하는 일반적 동향이었다.(92)
- 바울 사도는 땅의일을 하늘의 일과 혼동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자연 계시를 사용해 땅에서 하늘로 이르는 사다리를 놓은 다음, 특별 계시로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계에 돌어서자마자 사다리를 내버림으로써 합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 바울 사도는 현세적 세계관에 담긴 진리를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근거로 삼아 잘못하고 있는 생각을 비판했다.(95)
- 자신이 가진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든 알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두가지 요소가 있는데,두 요소는 우리 생각을 형성하는 세상의 힘과, 우리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성경의 진리다.(96)
-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은혜로운 섭리에 따라 유지하시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금하신 일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현세적인 활동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다니엘과 요셉의 예, 101)
- 기독교인은 일반 은혜의 분야에 반드시 종사해야 하지만, 되찾거나 회복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세상을 충만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종사해야 한다.(102)
4장. 기독교와 예술1 : 기독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 보수적인 기독교인은 풍부한 다양성을 환원주의에 따라 단편화해서 성경을 교재로 이해하는 관점을 경계해야 한다.
- 예수님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실 때도 마찬가지로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 예술가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교육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예술적 흥취를 돋우는 것이다.(118)
- 예술을 은혜의 수단과 혼동할 때, 우리는 예술과 은혜를 모두 손상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122)
- 종교개혁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 나타난 특징은 기독교가 자기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예술로 하여금 주어진 소명에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성경에 입각한 종교를 예술적 노력과 가장 상응하게 만든다는 점이다.(125)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속보다는 창조가 예술 활동에 어울리는 신학적 근거임을 인정하면서 문화에 참여하는 태도가 기독교인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135)
6장. 기독교와 과학 : 서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
- 현대 문명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마련된 처소에 과학을 봉인하려고 애써왔다.(174)
- 카이저는 과학이 꽃피우는데 필수적인 네가지 신학적 기초가 있다고 주장한다. : 1) 세계의 이해가능성, 2) 하늘과 땅의 일체성, 3) 자연의 상대적 자율성, 4) 치유와 회복의 사역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므로, 우주에는 일정한 질서가 존재한다. 따라서 양식이나 법칙을 알아내려고 탐구하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179)
-루터, 칼빈 그리고 여러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영역과 과학의 영역이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지는 않지만 과학은 교회의 권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권위로부터 자율성을 갖는다고 생각했다.(182)
- 자연과 은혜는 하나님이 실제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두 개의 분리된 나라, 혹은 영역이다. 자연이라는 나라는 인간의 이성과 관찰에 바탕을 둔 기술과 과학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죄 용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결국 두 나라를 하나님 안에서 융화할 수 있는데, 자연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의 활동을 기반으로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다.(183)
- 신앙이 비합리적, 비경험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과학의 주장이 제기되면서부터 두 영역을 통합하는 작업은 지적인 방법으로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결국 칸트는 신앙이 본체계(정신계)에 속하며 과학적 탐구는 현상계와 연관된다고 주장했다.(185) / 칸트는 신앙을 본체계로 안전하게 옮겨 지적, 과학적 비평의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종교가 무의미 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는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 상식실재론, 증거주의
7장. 기독교와 직업 : 일과 휴식
- 우리는 자신의 일터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참석하지 못하거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자진해서 함께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는 안된다.(209)
- 기독교인이 월요일 아침에 일허라 가는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정해 놓으신 자신의 소명에 종사하기 위함이다.(210)
-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인이 결국 자기 일에 관심이 제일 적은 사람으로 드러날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인상은 사람을 고용하거나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의 마음에 대체로 남아 있다.(211)
- 성경적 관점은 현세적인 활동에 성실하라고 요청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한다.(218)
8장. 기독교와 현대 세계 : 미쳐 버린 세계
- 결국 진보에 대한 급진적 생각때문에 영향력있는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미신과 신앙의 교의에서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 헤겔의 등장으로 급진적 진보사상이 더욱 구체화되었다.(243)
- 기술은 진보의 정신에 외형을 부여했고 철학자와 상인은 모두 미래를 지향하는 공통된 성향을 보였다.
- 현대성은 도시와 영향력있는 행정 중심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248)
- 신학자와 목회자는 현대성이 제공하는 온갖 바알에 굴복해 인종차별주의, 환경착취, 노예제도, 성차별주의, 과학 기술, 권력 숭배를 은폐하는 수단으로 기독교를 사용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시인하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으로 자신을 알리신 역사의 유일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의지해야 한다.(253)
결론 :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성경의 창조 교리 : 세상 안에 있다. / 세상이 사탄이나 악한 세력에 속하는 것으로 무조건 주장하려는 모든 사람과 반대로 하나님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이라고 친히 공표하신다.(시 50:12)
* 성경의 구속 교리 : 하지만 세상의 소유는 아니다. / 영지주의자는 육신, 물질적 존재, 시간, 역사,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속을 바라보지만, 신구약 성경의 저자들은 시간, 역사, 이세상 안에서 육체와 영혼 모두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구원을 묘사한다.(262)
-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펩 도나휴의 격려 연설이 설교를 대신하고, 예배가 시장 중심의 소비주의로 변모되고, 교회 안에서 확고한 성경적 핵심이 치유주의적 범주나 정치적 범주에 밀려나기 시작할 때다. 우리가 세속화되는 것은 실용적인 쟁점이 잘 훈련된 제자도를 대신하고, 가시적인 인기와 숫자적인 성공을 목회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다.(263)
- 승리의 직설법(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는 선포)뒤에는 명령법(거룩하다는 사실에 모순하지 않는 태도로 생활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지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이는 거룩함의 진보에 따라 결코 좌우되지 않지만, 참된 신자라면 누구나 이 두가지를 모두 지녀야 한다.(264)
* 창조와 구속 :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 범속한 것과 거룩한 것의 분리를 비롯해 평범한 인가느이 삶에 닥친 이 모든 저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절망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끔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하셨다.(270)
-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유가 아닌 상태’로 있으려면, 우리는 현세적인 정의, 태도, 사고방식, 양식이 자신의 신념과 표현을 형성하도록 묵인할 때가 언제인지를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을 충분히 잘 알 필요가 있다.(275)
- 모든 삶은 거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평범한 것이 가치있고 훌륭한 까듥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것의 주인이듯이 범속한 것의 주인이기도 하시다.(282)
- 우리에게는 자동차 정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나 심장 절개수술을 위한 성경적 원칙이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기독교 음악, 기독교 서적, 기독교 미술, 기독교 사업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286)
- 많은 신자는 자기 일이 구체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창조가 창조 자체의 정당한 권리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점을 상기함으로써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신의 소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288)
- 현대성은 종교 개혁의 신학적 기초를 부인함으로써 신학이 주는 풍성한 복을 현대 사회의 재앙과 우상으로 만들었다. / 민일 우리가 거룩성에 대한 의식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거룩성의 회복은 은혜를 입으려고 우상들을 의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상들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93)
한국에서 세계관 운동은 1980년대 학생 선교단체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주로 개혁주의 전통의 기독교 세계관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당시 이 운동은 일부 지식층의 전유물로 지식 차원에만 머무르고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고 주춤해졌다. 하지만 일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포스트모던 환경속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의 영향으로 다양한 가치들이 혼재된 상황 속에서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먼저 세계관 훈련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생각해보자.
1. 세계관의 변화 없는 신앙은 혼합주의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서구 기독교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를 보고 두가지에 놀란다고 한다. 첫째는 단기간에 유례없는 성장을 한 것이고, 둘째는 인구의 20%이상이 기독교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교회가 외형적인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교회 구성원들의 균형잡힌 성숙은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겉으로 보여지는 종교적인 행동, 행동 양식의 변화에는 성공했지만(예를 들면 주일성수, 십일조, 금주, 금연등), 그들의 가치체계나 더 본질적인 세계관은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은 신앙은 반드시 혼합주의의 모습을 띠게 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샤머니즘의 기반위에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러한 문화적 토양, 타당성 구조위에 기독교가 전해졌기에 더더욱 근본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추구해야할 필요가 있다.
2. 세계관 운동은 체질 변화 운동이며 성숙 운동이다.
삶의 질은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성경적인 세계관은 하나님, 나 자신, 타인, 자연, 사회, 역사를 잘못 인식하게 만든다. 반면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과 나 자신,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의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해준다.
세계관 운동은 지적 성향이 강한데 사실 세계관은 단순히 지적 차원이 아니라 지정의 모든 영역에 걸쳐 무의식적이고 무의도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존재방식이자 체질이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변화란 지식이나 인식의 전환을 넘어 삶의 존재방식과 체질이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 세계관을 체질화 하기 위해서는 인식적 차원에서 세계관을 정립해야 하고 나아가서 올바른 감정과 결정을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야하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3. 세계관 운동은 영적 전쟁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비성경적 세계관을 전파한다. 사탄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결론으로 인간을 매료한다.
기독교 학문 운동은 성경적 세계관을 인식적 차원에서 정립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절실하고 중요하다. 학문 또는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문가 집단이 비성경적 세계관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배포할 때,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우리는 이미 계몽주의와 진화론, 마르크시즘의 영향력을 체험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배포된 비성경적 세계관 못지 않게 심각한 것은 바로 비조직적이고 비체계적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 안에 침투한 비성경적 세계관(물신주의와 기복신앙)이다. 이러한 비성경적 세계관은 교회 바깥에 있는 명백한 적이 아니라 내부로 교묘하게 침투한 적이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4. 한국 교회 안의 바알적 신앙을 뿌리 뽑아야 한다.
한국 교회안에 두드러진 비성경적 세계관은 권위주의와 성공주의이다.
1장.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 세계관은 실재를 보는 안경이다. 무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무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고, 범신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세계는 범신론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 세계관은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되는 체질. 세계관은 특정한 문화속에 전제된 관념이나 가치를 포함함으로 그것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의도적으로 의식화하고 외현화하여 조직적으로 서술하면 철학이나 사상이 된다. 그러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내면화되고 체질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세계관을 통해서(through) 또는 특정한 세계관을 가지고(with)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따라서 세계관은 전 과학적 단계이자 전 철학적 단계다.
- 세계관은 전제로서 받아들여지는 관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을 통해서 생겨난다.(롬 10:17) 결국 성경이 제시하는 개념과 범주, 논리를 반복적으로 듣고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물론 성경적 믿음이 형성되려면 결정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전도란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과 범주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비록 그 자리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전도 받은 사람은 기독교적 개념과 범주를 인식하고 기독교적 관념을 서서히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 세계관으로는 더이상 설명할 수 없는 경험으로 세계관에 균열이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관을 찾게 된다.
2장. 문화와 세계관
세계관은 문화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어떤 문화 속에서 태어나며 그 문화의 영향 아래 있는 가정,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사회화되고 문화화된다.
세계관이 바뀌지 않고 가치체계나 행동양식만 바뀌는 경우가 혼합주의이다.
선교 사역은 진공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문화가 있는 곳에 들어가 이미 존재하는 행동양식과 가치체계, 세계관의 토양 안에서 복음을 전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계관의 충돌을 불러온다. 이러한 세계관 대결은 영적 대결의 본질이다.
- 타락한 이 세상의 원리는 힘과 물질이다. 권력과 재물, 즉 기득권 때문에 분쟁과 분열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연합하려면 힘과 물질, 즉 기득권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실현하려고 해야 한다. 연합은 자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원리를 거슬러 힘써야(엡 4:3) 가능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국가의 권력과 종교의 권력은 손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성경과 달리 가난한자의 편에 서지 않게 되었다. 50
- 새 예루살렘 문화, 즉 천국 문화와 타락 이후 발생한 세상 문화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일반은총의 산물은 연속적일 것이지만, 이 세상 문화 안에 나타나는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의 산물은 불연속적일 것이다. 53
3장. 종교와 문화
전통 사회일수록 종교와 문화가 거의 같이 간다.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컨대 종교는 우주의 기원과 목적, 인간의 기원과 본질, 인생의 목적등을 제시한다. 또 종교는 세상에 있는 죽음과 고통과 악의 기원과 본질, 이런 것들의 극복 가능성 등을 제시한다.
- 공식종교(고등종교)와 민간종교(하등종교) : 민간 종교는 형통함(where, what)에 관심이 많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식능력이 전락하였고 왜곡된 인식 능력이 인간에게 내재된 선천적 종교성과 결부되어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호모 렐리기오수스-종교적 인간). 63
-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이해하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이 자기가 놓인 상황(context), 즉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상황에 따라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선호(favor)과 편견(bias)이 있을 수 있다. 신학이란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해석을 체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가 없어도 신학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67
- 종교는 일반 계시에 대한 반응, 인간의 죄성과 반역성, 사탄의 역사와 영향력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섞여 있다.(크리스토퍼 라이트, 해롤드 네틀랜드) 69
- 진리에는 능력이 있지만, 능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 진리는 아니다. 73
- 진리, 즉 옳음의 기본은 ‘관계적 옳음’이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관계적 옳음에서 시작된다. 관계적 옳음은 인식의 옳음을 가져오고 인식의 옳음은 행위의 옳음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옳음, 즉 관계적 옳음이 인식론적 옳음과 윤리학적 옳음에 선행한다. 존재는 항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관계적 옳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내 존재 상태는 옳게 된다. 사랑은 내가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음을 나타내며 올바른 존재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으로써 진리를 알고 진리를 행하게 된다. 76
4장 궁극자, 절대자
* 세계관 유형을 결정하는 중요 3요소 : 궁극자, 인간, 자연
유신론 : 인격적이고 초월적이며 유일한 신을 궁극자 또는 절대자로 간주하는 관점
범신론 : 우주를 초월한 궁그가 또는 절대자는 없으며 만물 속에 궁극성, 절대성, 신성이 내재한다는 관점
유물론 : 눈에 보이는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세계가 전부이며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물질에서 우연히 파생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관점
사회 규범이나 도덕 규범에 대한 관점(예 : 살인하지 말라)
유신론 : 신의 명령
범신론 : 우주의 질서 또는 자연의 질서
유물론 : 인간의 경험이 규범의 기초
5장 인간
- 각 세계관에 따라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
공산주의는 계몽주의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계몽주의의 정신은 합리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이다.
인간성에 대한 낙관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자본주의-공산주의)은 공산주의 세계관을 떠받치는 두개의 큰 기둥이었다. 이슬람, 유교도 기본적으로 낙관적인 인간성과 이상 사회론을 따른다. 그런데 이 세계관들이 역사적으로는 모두 실패했다.
공산주의는 잉여 생산물을 획득하기 위한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힘과 재물을 추구하는 타락한 인간 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잘 간파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바로 이 타락한 문화의 원리를 그대로 좇아서 계급투쟁(힘)을 통한 잉여 생산물(재물)의 평등 분배를 추구했다.(91)
정교 일치를 추구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율법주의가 가지는 경직성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6장. 자연
기독교 :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불연속성,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다.
범신론 : 궁극자, 인간, 자연의 삼자를 수평적 관계로 이해
기독교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일원론적이다. 하지만 헬라적 범주개념(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데아와 현실)이 기독교 신학으로 들어오면서 이원론적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후 16-7세기 과학혁명을 지나면서 뉴턴과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이신론적 사고방식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세속화의 문제가 발생했다.
초자연은 종교영역으로서 주관적이고 사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자연은 과학 영역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적인 사실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세속화로 정부, 공공 교육기관 등의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이 사라지게 되었다.
애니미즘(정령숭배)-기독교 세계관-세속주의
애니미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신적 이상을 귀신들림으로 간주하고, 세속주의에 물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정신적 이상을 정신질환으로 간주해 버린다.
세속주의 세계관은 이신론과 무신론을 포함한다. 초자연이 있지만 자연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신론이고, 초자연과 같은 것은 아예 없으며 가시적으로 보이는 자연계, 즉 물질 세계만이 궁극적 실재라는 주장이 무신론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 세계관의 특징은 인격적인 신이 자연법칙이든 도덕법칙이든 법칙 위에 있어서 인격적으로 법칙을 운용한다는 것이다. 초월의 의미(하나님은 비과학이 아니라 초과학)
구원은 곧 회복이라고 할 때 자연계의 회복도 구원의 내용 안에 들어 있다.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는 힘의 원리에 따른 굴복이 아니라 영적 원리에 따른 순복이다.
7장 죽음
-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런데 기독교는 죽음을 비자연적인 것으로 여긴다. 타락의 결과로 사망이 들어왔고 언젠가는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110)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진심으로 눈물 흘리시는 주님(요 11:35) 사망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타락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공감하시는 예수님 / 예수님은 자신을 철학자로 계시하시지 않는다. 생명의 부여자이자 창조자이심을 계시하신다.(112) / 예수님과 석가모니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112)
- 영생 불사를 위한 인간의 노력, 탄트리즘 : 성적 합일과 종교적 합일, 성적 엑스터시와 종교적 엑스터시는 일맥상통한다고 봄, 바알 신앙의 경우 풍요와 다산이라는 현세기복주의와 성적 합일을 통한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신비주의 vs 과학 : 불사를 위한 노력, 인과율을 다른 방식으로 추구
-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죄로 보고 영생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 : 연속, 불연속, 윤회
8장 고통
- 약함은 고통의 문제와 악함은 죄의 문제와 연관된다.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이 더욱 필요하다.
- 세계관이 일단 형성되고 나면 폐쇄성을 띠고 굳어지므로 세계관이 바뀌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폐쇄성과 경직성이 바로 고집과 강퍅함으로 나타난다. 이집트에서 형성된 물질주의 세계관의 뿌리가 너무 깊었기 때문에 생존과 안전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원망했다.(출 16:2-3; 민 11:4-5)(126)
- 타락한 인간에게 생존과 안전은 체감적 필요(felt need)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진정한 필요(real need)이다.(통전적 사역-주님의 사역)
- 인간의 문제가 무지의 문제인가?(불교) 반역의 문제인가?(기독교)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기독교는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고통에 대한 설명체계 : 소경으로 난 사람에 대한 질문,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144-7)
1) 인과업보 : “이사람의 죄 때문이다” 전생의 죄라고 여김
2) 애니미즘적 설명 “ “가계에 흐르는 저주” / 초자연적 영에게 저주의 실효적 능력이 있다고 봄, 기계적 공식, 모든 불행을 악한 영들의 소행으로 여김
3) 성경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받는 고난, 자신이 잘못해서 받는 고난, 애매한 고난(벧전 2:19-21)
- 기독교 세계관의 탁월성은 바로 열매에 있다.
- 그리스도인은 고통이 있지만 죄를 짖지 않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생존 문제가 심각하지만 생존에 급급히 매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도록 부름받은 자이다.(151) /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하늘 소망의 개념으로 탈바꿈한 이유(각주)-데이비드 보쉬는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나라가 이 땅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나라라고 변호하기에 급급했다. 또한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 대신 불변하는 영원한 나라의 관념이 강해졌으며, 그 결과 저세상적이고 내세적인 장소로서의 '하늘나라'의 관념이 더 우세해졌다는 것이다.
9장 세계관과 영적 전쟁
- 비성경적 세계관은 반드시 비성경적 가치체계와 비성경적 행동양식을 유발하는데, 바로 비성경적 가치체계와 행동양식은 다름 아닌 죄이다.(155) / 죽지않음, 눈이 밝아짐, 하나님과 같이 됨, 선악을 알게 됨, 이 네가지 거짓말은 비성경적 세계관의 기본 유형이다.
- 사탄의 거짓말에 속으면 미성숙하고 비생산적이며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히틀러는 신비주의와 진화론(그리고 멜더스의 인구론)에 따른 형질인류학적 견지에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확신함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157)
- 목적론적 세계관의 회복 : 풍성한 삶이란 아무런 고통이 없는 삶, 질병이나 사고, 실패가 없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알적 신앙은 이런 고통없는 삶을 풍성한 삶이라고 하지만 야훼 신앙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풍성한 삶이라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획한 삶을 살아가는 것, 즉 합목적적 삶을 사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세계 내에 던져진(피투성, Geworfenheit)” 존재가 되었다.
-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영광이 걸린 싸움인 동시에 인간에게는 평화, 즉 샬롬이 걸린 싸움이다.(160)
-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 즉 샬롬이 실현되는 곳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샬롬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나 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고, 나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은 타인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며, 나아가서 다른 피조물과도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된다.(165)
10장 문화의 토양과 한국인의 의식구조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
- 한국의 문화 토양은 샤머니즘, 불교, 유교, 세속주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공영방송에서 노자의 도덕경, 불교의 금강경, 논어등을 강의했다면 크게 반발심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영방송에서 기독교의 성경을 강의한다면 많은 이들이 반발하고 시청자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용비어천가를 배우고 수학여행동안 많은 불교와 유교의 문화재를 방문한다. 사찰을 배경으로한 사극을 통해 군사부일체의 유교적 가르침을 흡수한다. 우리는 이처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불교적, 유교적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이러한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한국 문화로 흡수하고 내면화한다.(170-1)
- 한국 그리스도인은 유교적 그리스도인이고 샤머니즘적 그리스도인이다.
- 한국인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껴 가까이 잘 지내고 싶어도 위아래 서열이 결정되지 않으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묘한 긴장을 형성할때가 많다. / 사람을 처음 만나면 나이를 먼저 묻는 문화(172)
- 유교적 서열의식은 권위주의로 나타난다. / 성경적 가치체계에서 교회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미성숙한 사람을 섬기는 곳이다. / 한국의 유교적 토양에서 성장한 한국 그리스도인은 위계와 질서, 신분과 직분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174-5) / 177표
- 한국처럼 약점 은폐형 문화에서는 약점 노출형 문화보다 훨씬 위선적이 되기 쉽다.
- 샤머니즘적 권위주의가 능력지향적이라면 유교적 권위주의는 권력지향적이다.(180)
- 샤머니즘의 특징은 진리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능력은 성공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 성공주의는 결과주의와 외형주의를 가져오고 이는 적당주의와 과시주의로 나타난다.(188)
- 참된 믿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라면 무데뽀는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않은 것을 자기 확신으로 믿는 것이다. 무데뽀와 믿음 사이에는 혼동할 만한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둘 다 인간적인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된 믿음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있는 반면, 무데뽀는 하나님의 약속도 없이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194)
-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적 풍토(나와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는 잘못된 태도)
- 정(관계윤리는 발달 but 대중윤리는 미약)과 체면문화
- 귄위주의의 오류 : 권위의 남용, 권위의 포기, 권위에 대한 도전, 한국은 권력거리가 큰 문화이다.
11장 문화의 토양과 영성
- 선교는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충돌을 일으키며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세계관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문화 바깥층인 가치체계와 행동양식만 변화시킨다면 혼합주의가 나타나고 명목적인 신자만 양산하게 된다.(212)
- 성경적 관점에서 볼때 영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기능의 측면이라고 정의한다면 타락한 인간의 영은 죽었다. 영이 죽었다는 것은 실체적 죽음이라기 보다는 관계적 죽음이자 기능적 죽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과 관계하는 기능을 잃어버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이다. 혼과 육의 측면은 죄성에 지배당하고, 전적 부패와 무기력 상태로 전락하였다.(219)
-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지킴은 단지 내 생각과 감정을 조종하는 차원이 아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이 세계의 질서와 원리에 대한 거짓말, 즉 비성경적 세계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정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보고, 하나님, 인간,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종교의 영성 수련법이 마음공부라면 기독교 영성수련법은 하나님 공부다. 기독교는 마음을 탐구하여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골 1:10)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228)
- 온전한 영성은 약 1:27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다. 수직적 경건은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거룩이고, 수평적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아보는 사랑이다. 거룩이 하나님의 본체적 속성이라면(사 6:3; 계 4:8) 사랑은 피조물과의 관계적 속성이다.(요일 4:16) / 순결이 수직적 차원의 영성이라면 지혜는 수평적 차원의 영성이다.(마 10:16)(229)
-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믿음, 순종, 거룩함 등으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사회적 영성은 자기의나 휴머니즘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범신론적 신비주의는 초월성만 강조할 뿐 역사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 영적인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 아래 지정의를 의탁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서(롬 12:2) 세상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자연, 사회, 세계, 역사, 개인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즉 영적인 사람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감각적 실재, 즉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넘어(요일 2:16) 영적 실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나아가서 영적인 사람은 이러한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다. / 기독교의 영적 훈련이 타종교 수행법과 구분되는 가장 명확한 특징은 성경적 계시로 체험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한편 동양의 체험주의는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도 체험의 종교지만 동시에 계시의 종교이며 정경에 기초한 교의의 종교이다. 체험과 계시가 충돌하면 체험을 포기해야 한다. 체험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시를 자의적으로 자신의 체험에 짜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면 이단이 된다. (234)
- 성경적 예언의 목적은 회개를 촉구하고 현재, 바로 지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지, 사사롭게 미래를 미리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다.(240)
- 설교자는 성경말씀뿐 아니라 상황도 깊이 묵상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고 초월적 원리를 이끌어내는 통찰력은 물론 상황을 해석하고 성경말씀을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력도 필요하다.(241)
- 잡신의 방법이 강압적 소유(possession)라면 하나님의 방식은 인격적 감화(inspiration)이다.(244)
- 성경적인 관점에서 영적인 사람은 대속사역의 기초위에서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한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외감과 친밀감을, 자기 자신안에서 평안과 기쁨, 내적 고요함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랑과 관용의 성숙함을, 사회에 대해서 정의로움과 공평무사함을, 자연에 대해서 긍휼함을 가지고 관계를 맺을 것이다. 영적인 사람은 안으로는 평강을 실현하고 밖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248)
- 정체성의 기반을 타인에게 두는 사람은 타인의 평가에 따라 늘 정체성이 흔들린다. 이런 사람은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게 정체성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속칭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다. 남이 뭐라고 해도 끄덕이지 않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본인은 행복할지 몰라도 독불장군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께 정체성의 기반을 두는 사람은 건전한 자존감을 가진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기만 잘난 것처럼 남의 평가를 무시하지도 않는다.(253)
- 복음은 칭의로서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을뿐 아니라 성화로서의 구원도 관련되어 있다.(261)
- 우리의 자아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체험으로 실제화한 사람은 낮은 자존감이나 우월감,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상처받은 자아, 부끄러운 자아, 두려운 자아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다. 죽었기 때문에 치유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목표는 자아의 치유가 아니라 자아의 죽음이다. 자아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자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주재권을 자리바꿈하는 것이다.(273)
- 회개는 불순종을 인식하고 그것을 후회하고 슬퍼하며 의지적으로 돌아키는 것이다.(지정의, 274)
- 상황화 : exegesis vs eisegesis, 주해와 자기해석
- 세계관 차원에서의 상황화(279) : 세계관 차원의 상황화는 세계관의 본질을 파고들어 하나님을 선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경적 영성, 즉 성령의 열매와 성령 충만이 필요하다.(282)
- 한국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는 순결함을 상실했다.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사회에서 증인이 될 만한 지혜로움을 상실했다. / 서구적 시각에서 진리주장을 검증하는 기준은 논리적 정합성과 실재와의 부합성이라면 동양에서는 이론과 실천, 지와 행, 앎과 삶의 일치를 더 중요한 진리주장의 검증 기준으로 본다.(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