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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ower of Babel

11 Now the whole earth had one language and the same words. And as people migrated from the east, they found a plain in zthe land of Shinar and settled there. And they said to one another, “Come, let us make bricks, and burn them thoroughly.” And they had brick for stone, aand bitumen for mortar. Then they said, “Come, let us build ourselves a city and a tower bwith its top in the heavens, and let us make a name for ourselves, lest we be dispersed over the face of the whole earth.” And cthe Lord came down to see the city and the tower, which the children of man had built. And the Lord said, “Behold, they are one people, and they have all one language, and this is only the beginning of what they will do. And nothing that they propose to do will now be impossible for them. Come, dlet us go down and there confuse their language, so that they may not understand one another’s speech.” So ethe Lord dispersed them from there over the face of all the earth, and they left off building the city. Therefore its name was called fBabel, because there the Lord confused1 the language of all the earth. And from there the Lord dispersed them over the face of all the earth.

z ch. 10:10; 14:1, 9; Isa. 11:11; Dan. 1:2; Zech. 5:11

a ch. 14:10; Ex. 2:3

b Deut. 1:28

c ch. 18:21

d ch. 1:26; [Ps. 2:4]

e ch. 10:25, 32; Luke 1:51

f ch. 10:10

1 Babel sounds like the Hebrew for confused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창 11:1–9.

 

지구라트(Ziggurat)

 

 

본문의 바벨 사건을 소개하는 1-9절에 온 땅(온 지면)이라는 표현이 5번이나 반복된다. 

 

1절) 11장은 바벨탑의 사건을 시작하면서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앞서 10장의  5, 20, 31절의 내용을 통해서 이미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들의 구분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본문은 언어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당시 언어가 하나였다라고 본다면 창세기의 바벨탑과 관련된 기록이 연대기적인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약 바벨이라는 명칭이 앞선 10:25절의 벨렉(나뉨)이라는 이름에서 나온것이라고 한다면 바벨의 사건은 창 10장의 어느 중간에 위치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벨탑 사건 이전에는 아직 민족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인류가 존재했다. 

 

2-4절) 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서 함께 모여 공동체, 도시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구운 벽돌을 가지고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라고 했다. 이는 탑을 높게 쌓아서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을때 에덴 동편에 나 있는 에덴의 출입구를 그룹 천사와 화염검으로 막으셨다(3:24). 또한 이후 가인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추방되어 간 곳이 에덴 동쪽(4:16)이었다. 이제 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이 옮겨 간 곳도 역시 동방의 시날평지였다. 본문의 시날 평지는 에덴 동산의 발원으로 알려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비옥한 이 땅에서 사람들은 함께 모여 정착하게 되었고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성읍과 탑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흩어짐을 면하고자 다시 말하면 도시를 이루어 살기 위해서 건축물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내면에 하나님과 같아 지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을 읽을 수 있다. 도시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좁은 지역에 함께 모여 살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원이 부족해지고 이로 인해 범죄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고 새로운 기술, 벽돌 제작과 건축 기술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탑을 쌓음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이다. 본 바벨탑 사건과 앞선 창 1-10장의 주제를 비교해볼 수 있다. 

 

 

바벨론 성은 건축한 것은 가인과 니므롯의 중요한 업적이었다. 가인의 성 건축과 바벨론 성 건축은 중요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11) 바벨 성과 탑을 쌓은 목적은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직후 피조물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재창조의 축복을 주었다. 땅에 충만하려면 당연히 곳곳으로 흩어져야만 된다. 그렇다면 홍수 이후 사람들은 왜 흩어지지 않으려 했을까? 홍수 이후 사람들은 이 재창조의 축복을 재앙으로 이해했을까? 그래서 이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였을까? 축복을 저주로 오해했다기 보다는, 이들은 가인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성을 쌓는 목적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성을 쌓는 것과 아주 흡사하다. 창세기 4:12에서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는 저주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4:17에서 가인은 에덴 동편 즉 메소포타미아 또는 시날 지역에 성을 쌓고 그 성에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바벨 성을 쌓은 사람들의 대의와 아주 유사하다.

홍수 이후의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은 벌이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축복에 따른 결과이다. 하지만, 이들은 가인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흩어져 땅에 충만하라는 재창조 명령을 거부하고 니므롯의 이름의 의미처럼 하나님께 반역하려 한 것이다.

바벨 성과 탑을 쌓은 사람들이 이름을 내려 한 것은 노아 홍수 이전의 가인과 네피림의 행위와 비교할 수 있다. 노아 홍수를 초래한 네피림들이 추구했던 것 중에 하나도 이름이었다. 창세기 6:4은 그들은 가리켜 고대의 유명한 자, 또는 고대로부터 이름의 사람들(메올람 안세이 하셈, מֵעוֹלָ֖ם אַנְשֵׁ֥י הַשֵּֽׁם׃)이라고 했다. 가인과 네피림처럼 홍수 이후 사람들은 탑을 쌓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 하였다. 이들이 굳이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도록 쌓으려 했던 것은 단순히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뱀의 유혹을 받아 엘로힘처럼 선악을 아는 위치에 오르려는 욕심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이들은 바벨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12) 그래서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과 나란히 세우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이런 행동은 창세기 4:26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셋과 그의 후손들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였다. 이처럼 바벨 성과 탑을 쌓는 사람들은 에덴의 뱀과 가인과 네피림과 그리고 니므롯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고 이들과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즉 이들은 가인의 길을 걷는 뱀의 후손들이었다.

11) Mathews, Genesis 1–11:26, 478–479.

12) Gordon Wenham, Genesis 1–15, 239–240. Mathews, Genesis 1–11:26, 481–482. 고대 지구랏은 신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상징 적인역할은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발견된지구랏의이름들에서도확인할수있다. ‘Temple of the Foundation of Heaven and Earth’ (Babylon), ‘Temple of the Wielder of the 7 Decrees of Heaven and Earth’ (Borsippa), ‘Temple of the Stairway to Pure Heaven’ (Sippar), ‘Temple of the Foundation of Heaven and Earth’ (Dilbat), ‘Temple which Links Heaven and Earth’ (Larsa). John H. Walton, “The Mesopotamian Background of the Tower of Babel Account and its Implications,”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5 (1995): 155–17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37–339.

 

5-9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아들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기 위해서 내려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가 한 족속이고 언어도 하나이기에 이같은 일을 시작하였고 이대로 두면 이후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들은 온 지몉에서 흩으셨기에 그들이 그 도시 건설하는 것을 멈췄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온땅의 언어를 혼란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5절의 ‘사람들’은 원래 ‘베네 하아담’ 사람의 아들들이다. 앞서 ‘베네 엘로힘’ 하나님의 아들들(6:2), ‘베노트 하아담’ 사람의 딸들(6:2)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이제 아담이 자손들이 성읍과 탑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성읍과 탑을 쌓는 행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언어가 같아서였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들이 짓고자 했던 성읍과 탑은 실제로 어떤 형태였을까? 역사적으로 기원전 4000년경 말에 가마에 구운 벽돌을 사용해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또한 역청을 주성분으로 하는 회반죽을 이용해서 벽돌을 쌓았고 이는 내구성과 방수 기능을 제공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도시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화 초기 단계에 사람들은 성읍에 살지 않았고 신전이나 공공시설들이 성읍에 위치했다. 이러한 건축물은 신전 복합체(temple complex)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바로 지구라트(ziggurat)로 피라미드 구조의 건축물로 중앙에 신들의 거처가 존재하는 구조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도시화나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시도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인 단회적인 시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그냥 두었을 때 이러한 불순종의 행위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 때문에 이들을 흩으신 것이다. 인간의 악한 경향성은 성경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창 6:5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게획

창 8:21 사람의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창 11:6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

 

창세기 11:5–9은 창세기 11:1–4에 사용된 표현들을 교차대구법과 반복법을 통해 강조한다. 매튜가 분류한 표는 이를 아주 잘 보여 준다.14)

A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1절)

   B 거기(2절)

      C 서로(3절)

         D 자! 벽돌을 만들자(3절)

              E 자! 우리를 위해 쌓자(4절)

                      F 성과 대를 쌓아(4절)

                             G 여호와께서 강림하셨더라(5절)

                      F’ 성과 대를(5절)

              E’ 인생들의 쌓는(5절)

          D’ 자! 우리가 혼잡케 하자(7절)

    C’ 서로(7절)

   B’ 거기서(8절)

A’ 온 땅의 언어를(9절)

대구 구조를 통하여 두 가지 효과를 가져 온다. 첫째는 유사한 단어와 표현을 통해 인간의 바벨론 건축과 하나님의 흩음을 극적으로 연결시킨다. 둘째는 유사한 단어와 표현을 대칭시킴으로 인간들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의 뜻하는 바가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5절의 여호와의 강림은 바벨론 건축에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5절에서 하나님은 바벨 성과 탑을 쌓는 것을 보기 위해 강림하였고, 7절에서는 그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자,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한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보좌인 하늘까지 탑을 쌓아 올리려 했지만, 그 탑은 하나님이 보기 위해 내려와서 봐야 할 정도로 연약한 인간의 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의 강림과 함께 인간들이 바벨론 건축을 통해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 한 시도는 좌절된다.

14) Mathews, Genesis 1–11:26, 468. J. P. Fokkelman, Narrative Art in Genesis: Specimens of Stylistic and Structural Analysis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Publishers, 1994), 22–2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41–342.

 

11장의 하나님의 강림은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의 강림을 생각나게 한다. 에덴이 강림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징벌하셨던 것처럼 이제 창 11:5-9에서 강림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성과 탑을 쌓으려는 인간들에 대한 징벌을 행하신다. 하지만 에덴에서는 가죽옷의 은혜를 베푸셨지만 바벨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본문 7절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혼자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으로 논의하고 행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위 하나님은 지금 인간의 범죄를 함께 보시고 이를 어떻게 할지를 함께 고민하시고 함께 내려오셔서 이들의 언어를 흩으심으로 하나님께 대적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도시화는 흩어짐을 막고 있는데 당시의 산업적인 특성속에서 볼때 하나님이 문화 명령을 탁월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흩어지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서로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됨으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탑, 지구라트는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위한 공간으로 이용되었는데 바벨탑을 건설한 이들은 어쩌면 이 바벨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뭔가를 요구하시는 분으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을 금지하신다. 

 

창세기 3–11장은 에덴 추방, 가인의 살인, 노아 홍수, 바벨 성과 탑이라는 네 개의 큰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사건들에서 인간은 범죄하고 그에 대해 하나님은 징벌을 내린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은 추방을 당하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된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를 통해 멸망 당하고 수명이 짧아지는 벌을 받는다. 바벨 사건에서 사람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고 인간은 온 지면에 흩어지는 벌을 받게 된다. 이런 징벌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시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과 가죽 옷을 지어 입히는 은혜를 베풀었고, 동생을 살해한 가인이 죽음을 두려워할 때 표를 주어 죽임을 면하게 해 준다. 노아 홍수에서는 피조 세계가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할 뿐만 아니라 다시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언약의 약속을 준다. 그러나 바벨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바벨 사건 때문에 온 땅에 흩어진 인류에게 왜 은혜를 베풀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벨론 건축자들에게 내린 징벌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온 지면에 흩어 성 쌓기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바벨론 건축자들은 탑을 쌓아 이름을 내려고 하였지만, 9절에서 그 이름은 바벨이라고 불리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바벨을 ‘신들의 문들’이란 의미로 불렀다. 하지만 창세기 11:9은 바벨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 이유를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혼잡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바랄’(בָּלַ֥ל)이다. ‘바랄’(בָּלַ֥ל)과 ‘바벨’(בָּבֶל)은 유사한 발음을 가지며, 이를 통해 바벨탑 시도를 조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바벨론 건축자들을 지면에 흩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축복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에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벨론 건축자들에게 이것은 큰 좌절감을 가져다 준 재앙이었다.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43–344.

 

The Tower of Babel. This episode is significantly more important than its length suggests. It presents a unified humanity using all its resources to establish a city that is the antithesis of what God intended when he created the world. The tower is a symbol of human autonomy, and the city builders see themselves as determining and establishing their own destiny without any reference to the Lord. (The tower story may also be a polemic against Mesopotamian mythology. Eridu Genesis, a fragmentary text found at Ur, Nippur, and Nineveh, describes the goddess Nintur’s calling for humanity to build cities and to congregate in one place. Her desire, according to this text, is that humans be sedentary and not nomadic. Yahweh demands just the opposite, so that the earth would become populate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69.

당시의 신화속에서는 여신 닌투르가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지역에 정착할 것을 요구하였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반대로 흩어짐으로 이 땅에 사람들이 가득하게 될 것을 바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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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To Shem also, the father of all the children of Eber, the elder brother of Japheth, children were born. 22 The usons of Shem: Elam, Asshur, Arpachshad, Lud, and Aram. 23 The sons of Aram: Uz, Hul, Gether, and Mash. 24 Arpachshad fathered vShelah; and Shelah fathered Eber. 25 wTo Eber were born two sons: the name of the one was Peleg,3 for in his days the earth was divided, and his brother’s name was Joktan. 26 Joktan fathered Almodad, Sheleph, Hazarmaveth, Jerah, 27 Hadoram, Uzal, Diklah, 28 Obal, Abimael, Sheba, 29 xOphir, Havilah, and Jobab; all these were the sons of Joktan. 30 The territory in which they lived extended from Mesha in the direction of Sephar to the hill country of the east. 31 These are the sons of Shem, by their clans, their languages, their lands, and their nations.

32 These are the clans of the sons of Noah, according to their genealogies, in their nations, yand from these the nations spread abroad on the earth after the flood.

u For ver. 22–29, see 1 Chr. 1:17–25

v ch. 11:12; Luke 3:35, 36

w 1 Chr. 1:19

3 Peleg means division

x 1 Kgs. 9:28; 10:11

y ver. 1; ch. 9:19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10:21–32.

 

셈의 후손들

21-31절) 본문은 셈으로부터 시작된 6대손의 이름을 기록한다. 셈의 족보의 특징으로는 첫번째 앞선 야벳(2세대), 함(3세대)와는 다르게 가장 길게 6세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셈의 후손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이 더욱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번째 21절의 셈의 정체를 밝히면서 야벳의 형이라고 말하지만 함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앞선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염두에 두고 축복의 라인으로 가나안과의 단절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벳의 형이라는 언급보다 이후 손자인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 셈을 설명한다. 이는 셈의 축복이 에벨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이어졌음을 또한 에벨과 그의 후손들이 셈을 닮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벨은 셈의 아들들보다 먼저 소개되었다. ‘히브리’(14:13)라는 명칭은 에벨(에베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셈은 히브리 백성의 조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후 아브라함이 셈의 후손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된다. 세번째는 에벨의 두 자녀 벨렉과 욕단을 언급하는데 벨릭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나눔’의 뜻을 가진다. 이는 세상이 나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지리적으로 대륙이 나뉘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창 10장의 목적이 이후에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흩어지게 한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들의 이름을 벨렉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네번째는 에벨의 아들 욕단은 13명이나 기록되었는데 이후 11장의 족보는 벡렉으로 이어진다. 욕단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서 자손의 축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아의 축복을 이어받은 이는 벨렉임을 알 수 있다.(창 11:10이후)

 

 

21–31절에는 셈의 후손들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셈의 족보가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지만, 구약 성경의 특징인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이나 민족 먼저, 선택 받은 사람이나 민족 나중이란 규칙을 따르고 있다.19) 셈의 족보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야벳과 함의 족보에는 2세대(야벳) 그리고 3세대(함)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셈의 족보는 6세대가 기록되어 있다. 셈의 후손에 대한 관심이 야벳과 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는 21절에 있는 셈의 정체를 밝히는 두 가지 내용이다. 우선 21절은 셈을 야벳의 형이라고 밝히면서도 함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틀림없이 노아의 축복과 저주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셈의 계보를 노아의 축복과 연결 짓고 있다.20) 그리고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먼저 밝히고 이어서 야벳의 형이라고 했는데, 이는 노아의 축복을 에벨의 후손에게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22절에 의하면 셈에게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다: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그리고 아람. 에벨은 이들 다섯 아들 중에 한 명이 아니라 아르박삿의 아들이고 셈의 손자이다. 셈이 자신의 아들들의 조상이라고 불리지 않고 3대 손자인 에벨의 조상이라고 불렸다. 창세기 9:22에서 함을 가나안의 아비라고 불렸던 것은 함의 저주가 가나안에게로 이어졌던지, 아니면 가나안의 행실이 아비 함의 행실과 너무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유사한 의도가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란 말 속에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셈은 단순히 에벨의 조상이 아니라 에벨의 모든 후손들의 조상이라고 한다.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불렀던 것은 (히브리인) 셈의 축복이 에벨과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어졌든지 아니면, 에벨과 그의 후손들의 행동과 성품이 셈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에벨과 그의 후손들이 둘 다, 즉 축복과 신앙의 성품과 행동 모두를 셈으로부터 이어받아 가고 있었을 것이다.

셋째 특징은 셈의 족보에는 함의 족보에 니므롯의 삶과 행동이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에벨에 관한 내용이 매우 간단하지만 기록되어 있다.

에벨에게 두 아들이 낳으니 하나의 이름은 벨렉이니 이는 그의 시대에 땅이 나뉘어 졌음이며 그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었더라

에벨은 첫 아들을 낳고 이름을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진 벨렉이라고 지었다. 그 이유는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땅이 나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지구의 대륙이 나뉘어 진 것을 말할까? 아니면 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나뉘어 흩어지게 된 것을 말할까? 창세기 10장의 기록 목적이 3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어졌음을 밝히는 것이다. 에벨이 아들에게 벨렉이라고 이름 지어준 것도 이와 관련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창세기 11:1–9에 의하면 인류의 나뉘어지고 흩어진 것은 바벨탑 사건 때문에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그렇다면 에벨이 아들을 벨렉이라 부른 것은 바벨탑 사건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하나님께서 인류를 흩어지게 한 일을 증거하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벨렉이라고 지었을 것이다. 벨렉이란 이름은 에벨의 신앙의 증거이다. 이 신앙을 이어간 모든 사람들을 에벨(עֵ֥בֶר)의 후손 또는 히브리(עִבְרִי)사람이라고 불렀을 것이다.21) 결국 셈은 에벨 모든 자손들 또는 히브리 사람의 조상인 셈이다.

셈의 후손의 네째 특징은 이 족보의 마지막 세대가 에벨의 아들 욕단의 자식들이지만, 이들은 노아의 약속을 기업으로 잇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에벨은 벨렉을 낳고 세상이 나뉘었음을 증거하였다. 나뉜 것은 세상만이 아니고 에벨의 두 아들도 나뉘게 된다. 창세기 10:21–31의 셈의 족보에서는 에벨의 두 아들 중에 욕단의 자식들을 기록하는 것으로 종결되고, 벨렉의 아들들의 족보는 창세기 11:10–26에서 나온다. 셈(שֵׁם)과 에벨의 두 자식의 족보가 나뉘어진 것이다. 욕단의 자식들의 계보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이름(שֵׁם)을 내려고 쌓은 바벨 성과 탑 사건으로 이어지고, 벨렉의 자식들의 족보가 끝나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그 이름(셈, שֵׁם)을 창대케 해 줄 아브라함의 강화로 이어진다.22)

에벨의 아들 욕단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축복을 받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욕단의 자식들은 13명이나 되며, 창세기 10장에 기록된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은 자식을 낳았다. 창세기 9장의 축복이 넘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노아의 약속과 축복을 이어가는 후손은 벨렉이며, 그의 계보는 창세기 11:10 이하에 이어지고 있다. 에벨의 아들 벨렉이 약속을 이어가는 후손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벨렉의 후손들은 셈에서 시작하면서 창세기 5장의 아담과 셋의 후손들의 족보와 흡사한 방법으로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창세기 11:10–26의 주석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19) Mathews, Genesis 1–11:26, 459.

20) U. Cassuto, Genesis II, 217. John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133.

21) U. Cassuto, Genesis II, 217–218. Sarna, Genesis, 78. Derek Kidner, Genesis, 109. Wenham, Genesis 1–15, 228. Mathews, Genesis 1–11:26, 460. ‘히브리’ 를 ‘건너다’ 의의 미를 가진 아발(עבר)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고, 또 ‘히브리’ 를 고대 메소포타미아 의소외계층을일컫는표현으로생각하는학자들도있다.

22) John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133.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326–328.

 

창 10장은 이후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암시, 준비하고 있다. 홍수 후에 인류가 땅위에서 번성하여 나가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여호와의 신앙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언적인 이름은 벨렉처럼 이땅은 나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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