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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emon’s Love and Faith
gI thank my God always when I remember you in my prayers, because I hhear of your love and iof the faith that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for all the saints, and I pray that the sharing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for the full j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that is in us for the sake of Christ.1For I have derived much joy and kcomfort from your love, my brother,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l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gSee Rom. 1:8, 9
hCol. 1:4
iEph. 1:15
jPhil. 1:9; Col. 1:9
1Or for Christ’s service
k[2 Cor. 7:4, 13; Col. 4:11]
lver. 20; 2 Tim. 1:16; [Rom. 15:32; 2 Cor. 7: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몬 4–7.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요청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빌레몬에 대한 그의 감사를 정중하고 재치있게 표현하고(4-5절) 자신이 얼마나 그를 향해 기도하는지를 서술한다(6-7절).

일반적으로 바울의 편지에서 이러한 감사와 기원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바울과 그의 편지를 읽는 청자들과의 좋은 관계(라포)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서 그들은 이어지는 충고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감사의 문맥속에서 제시되는 종교적인 이상 혹은 도덕적인 선을 향해서 청중들이 감화되고 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번째 그러한 기원을 통해서 독자들의 영적 진보를 위협하는 영적인 위기에 대해서 알리기 위함이다. 
이처럼 바울 서신의 감사의 기능은 뒤따르는 편지 본문의 비판적 서론 역할을 한다. 특별한 목적과 뒤따르는 사도적 충고의 모디브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목표를 저해할 수 있는 위기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울이 그의 편지의 이 부분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다가오는 본문의 충고를 구성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 Generally speaking, such expressions of thanksgiving and petition serve three purposes: (1) to establish good rapport between Paul and his first readers, so that they will respond positively to the advice that follows, (2) to set forth in the context of thanksgiving the religious ideals or moral virtues toward which the congregation should aspire, and (3) in the petitions offered, to introduce the spiritual crisis that threatens the readership’s spiritual advance. Paul’s epistolary thanksgiving functions, then, as a critical preface to what follows in the letter’s main body (see also commentary on Col 1:3–12). Not only are specific goals established and a motive given for following the apostolic advice, but the crisis that might undermine these goals is sometimes suggested. We should take particular care to explore the meaning of the special vocabulary that Paul uses in this part of his letters, since it will often form the basis for the advice that follows in the main body.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4.

4-5절) 바울은 항상 자신이 기도할때 빌레몬을 기억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왜냐하면 주 예수와 모든 성도들을 향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바울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빌레몬의 소식을 듣고 있다고 현재시제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사랑과 믿음이 들려오기에 기도할 때 마다 그를 기억하고 그로 인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항상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지표로 믿음과 사랑을 이야기했다.(골 1:4-5) 

5절의 본문은 분사절로 그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첫번째는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과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
두번째는 빌레몬의 믿음(그의 사랑이 아닌)이 예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타나낸다라고 보는 견해
세번째는 두개의 다른 전치사를 통해서 역전된 병행절(AB:B’A’)로 보는 견해로 이 경우에 "네 사랑에 대한 들음”은 “성도들에 대한”으로 “네가 가진 믿음”은 “주 예수를 향한”과 평행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세번째의 견해가 좋아 보인다. 

  • The Greek syntax of verse 5 is difficult and remains contested among commentators. Literally, the verse is a participial phrase that expresses the cause of Paul’s thanksgiving: “hearing of your love and the faith that you have for [pros]the Lord Jesus and for [eis]all the saints.” In untangling this verse’s grammatical knot, Harris (1991:249–50) discusses its three possible meanings: (1) Philemon’s loveand faithmay characterize his relationships with both the Lord Jesus and the saints (so NEB, JB, NASB); (2) Philemon’s faith(but not his love) may characterize his relationships with both Jesus and the saints (so RSV); or (3) the verse may be an inverted parallelism (AB:B’A’), keyed by the two different prepositions for for.In this case, the “hearing of your love” is parallel to “for [eis]all the saints” and “the faith that you have” is parallel to “for [pros]the Lord Jesus.” This third possibility is preferable (so Harris). Unfortunately, I think, the NIV obscures this parallelism by reversing its order. Paul actually mentions Philemon’s lovefor the saintsfirst and again last for emphasis, since his appeal to Philemon on behalf of Onesimus will require his love most of all.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4.

이런 성도가 있다면, 또한 이렇게 기도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참으로 감사하고 기쁠 것이다. 이 땅의 교회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 목회자들 또한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을 지향해야 한다. 바로 그 완전, 우리가 지향해야할 신앙의 지점이 바로 이렇게 항상 기도할 때 성도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고 또한 성도들은 그러한 감사가 있도록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에서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데 자라가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이 서로 더 깊이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러한 소식이야말로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도제목이 되는 것이다. 

6-7절) 바울은 먼저 그의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이어서 그의 사랑에 대해서 간구하고 있다.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더욱 깊어져서 우리 안에 모든 선한 일을 빌레몬이 깨달음으로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기를 기도했다. 나는 너의 사랑을로 인해 큰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 너를 통해서 생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본문속에서 바울은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매우 중요한단어인데 정확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고대 세계에 이 코이노니아는 무언가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함께 나뉘어지는 인격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이 단어를 다루는데 있어서 그 공동체는 믿음과 선교 사역의 실천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코이노니아이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상호 입증, 확인을 하게 된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코이노니아가 다른 신자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필수적이다라는 것을 자각하는 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빌레몬의 개인적 신앙이 오네시모를 비롯한 다른 신자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영적인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말하자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품는 것이 빌레몬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O’Brien contends that Paul’s intercessory prayer for Philemon is that he may acquire sufficient faith and love from God to respond favorably to the request to reconcile himself with Onesimus (1983:279). Most commentators, however, link the opening clause that you may be active in sharing your faith with my prayers(v. 4) rather than with as I re- member you(v. 4) as O’Brien would have it (see Harris 1991:250–51). Paul’s prayer is not for Philemon’s character, for which Paul has just given thanks, but for the koinōniaor sharingof Philemon’s faith. In this case, Paul has in mind “the mutuality of Christian life which springs from a common participation in the body of Christ” (Wright 1986:175). He is mainly interested in the kind of fruit that God harvests in the relations between believers (see commentary on Col 1:5–12). Paul’s implied prayer, then, is that Philemon welcome Onesimus gladly as an equal koinōnos(translated “partner” in v. 17) in the faith.
  • We should not underestimate the strategic importance of Paul’s use of koinōniato focus this petition for Philemon. Unfortunately, koinōniais difficult to define with any precision (see Koch 1963:183–87; Wall 1992:1003–10; also Wright 1986:176; O’Brien 1983:279–81). In the ancient world, it defined a whole community of persons in which something is shared in common and as essential for life. In Paul’s handling of this word, the community is a koinōniain the sense of sharing a faith and missionary praxis. Wright adds that “Christians not only belong to one another but actually become mutually identified” (1986:176); that is, koinōniatakes place where believers recognize that other believers are essential for their well-being. Paul is therefore praying that Philemon’s personal faith in Christ be worked out in appreciation of the important roles that other believers, including Onesimus, have in his spiritual formation in Christ.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6.

그러므로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연합된 삶에 있어서 특별한 이해를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신자들을 회중으로 부르시고 각각에게 특별한 은사와 다른 신자들에게 사역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그래서 모두는 그리스도안에서 함께 성숙함을 누리게 된다. 이 파트너십의 의미는 회중의 코이노니아가 사람들이 서로를 동등하게 가치있고 중요하다고 보는데서 발견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파트너십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그와 함께 우리는 우리가 사역하고 사랑하고 서로를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로 보는데  필요한 자원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보고 생각하는 방식의 변혁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안에서 동등하게 삶과 신앙을 나누는 이들로 보기 시작할 때 오만과 편협을 종식된다. 
나아가 빌레몬의 믿음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개인적 신앙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적 신앙을 더 염두에 두고 있다. 빌레몬의 믿음의 즉각적인 겨로가는 코이노니아인데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나다. 코이노니아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알다라는 ‘에피그노시스’는 이론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을 통한 앎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이 경험한 모든 선한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발견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Koinōnia,then, requires a particular understanding of the church’s corporate life. God calls each believer into a congregation and provides each with certain gifts and opportunities to minister to other believers, so that all may be brought to maturity together in Christ Jesus (1 Cor 12; Eph 4:1–16). This sense of partnership marks out a congregation’s koinōniaand is found where persons view one another as equals in worth and importance. It aims at partnership with Christ in God’s salvation, so that with him we are able to find those resources necessary to enable us to minister, to love, to view one another as important and valuable. Christianity is about a transformation of the way we see and think about other people. When we begin to view others as those with whom life and faith are shared equally in Christ, arrogance and bigotry are finished.
  • Further, in referring to Philemon’s faithPaul probably has in mind his public demonstration of Christian faith rather than his personal faith in Jesus Christ. While the immediate result of Philemon’s faith is koinōnia,the ripple effect is extraordinary: out of the experience of koinōniacomes a full understanding of every good thing we have in Christ.Critically, the word translated “understanding” (epignōsis)refers not to theoretical knowledge but to knowledge acquired by experience. Paul is speaking about every good thingPhilemon experiences while in Christ,where God’s grace is found.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6.

7절) 성도들의 마음, 본문에서 마음(hearts)는 ‘스플랑크논’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심장을 뜻하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카르디아’인데 스플랑크논은 장기, 위나 창자를 뜻하는 말로 우리의 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 깊은 애정, 친밀감, 연민, 사랑을 의미한다.(몬 7, 20절; 빌 2:1; 골 3:12; 시 7:9) 
  • 시 7:9  Denotes the innermost being of a person, the seat of one’s moral character (26:2; Jer 11:20; 17:10; 20:12). David is characteristically transparent as he asks God to examine him (see 139:23–24).
  •  D. A. Carson, ed.,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985. 

바울의 두번째 간구는 빌레몬의 사랑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6절과 7절은 그로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한다. 이 사랑은 앞선 코이노니아로 확증된다. 마음은 내장이라는 의미이다. 한 영혼에 대한 깊은 연민, 사랑을 표현할때 이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눅 10:33이나 눅 15:20을 통해 그 의미를 옅볼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이웃을 보며 느낀 감정, 탕자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이다. 동정심은 누군가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향해 끌려 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빌레몬을 탕자의 아버지로, 오네시모를 탕자로 비유할 수도 있다. 여기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연민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사랑받는 경험 모두이다. 그의 빌레몬을 향한 간구는 더 큰 사랑의 능력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민은 또한 그가 새롭게 한 성도들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믿음을 나누는 코이노니아의 증표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의 기도는 그의 서신의 본문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그것은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문제로 위협받고 있는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 갈 것인지를 보여준다. 
  • Paul’s second petition is for Philemon’s love.Unfortunately, the NIV omits a connecting “for” (gar)that links verses 6 and 7 together: “… we have in Christ. Foryour love has given me …” The impression left by the NIV is that verses 5 and 7 rather than verses 6 and 7 are bound together as complementary notes of Paul’s thanksgiving for Philemon’s spirituality. Paul’s point, however, is to join verses 6 and 7 by a connecting “for” (gar),integrating them as a single petition (see Harris 1991:253). In this sense, verse 7 complements the central idea of verse 6, koinōnia,and reveals Paul’s incentive for prayer: the essential characteristic of and incentive for koinōniais love. Since Philemon’s capacity to love is confirmed, Paul remains confident that his prayer will be answered by Philemon’s positive response to his request. Yet in another more implicit sense verse 7 extends Paul’s petition for Philemon’s faith to include the prospect of a future demonstration of his previous love.
  • To further develop the connection of loveand koinōnia,Paul introduces another catchword into the petition—hearts (splanchna).Like koinōnia, splanchnais a difficult word to translate. Literally it refers to human entrails. According to Greek psychology, however, one’s splanchnaor “guts” is where the visceral feelings of compassion are produced; compassion is a “gut feeling.” The image created is that compassion is not a detached emotion; rather, it is an experience of lovers who are moved by and toward someone else. For example, Luke uses the verbal form of this same word in two of Jesus’ most beloved parables to illustrate true discipleship: how the good Samaritan is disposed toward the rejected, hurt man (Lk 10:33) and how the father is disposed toward his prodigal son (Lk 15:20). Each had compassion on and was moved toward the needy other. Compassion is not to pity someone but to be drawn toward another in order to love and care for that person. One might draw intriguing parallels between Onesimus and the prodigal son and between Philemon and the son’s father. The restoration of Philemon’s relationship with Onesimus—receiving his troubled slave back into his home (see commentary on verse 17)—requires from him the very same compassion that was required from the father to welcome his prodigal son back home.
  • For Paul, compassion is both the capacity to love and the experience of being loved. His prayer for Philemon is for a greater capacity to love; but such compassion is also the experience of those saintshe has refreshed.In this way, the compassionate heart is the mark of the koinōniaof shared faith. More important, Paul’s prayer introduces in a positive way what the main body of his letter develops: that the compassion and so koinōniaof the congregation are now threatened by the problem between Onesimus and Philemon. Given Paul’s twofold petition, then, the reader realizes that Philemon’s response to Paul’s appeal will largely determine whether the congregation’s witness to the gospel in Colosse will survive.
  •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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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So I find it to be a law that when I want to do right, evil lies close at hand. 22 For dI delight in the law of God, ein my inner being, 23 but I see in my members fanother law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captive to the law of sin that dwells in my members. 24 Wretched man that I am! Who will deliver me from gthis body of death? 25 Thanks be to God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I myself serve the law of God with my mind, but with my flesh I serve the law of sin.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롬 7:21–25.

본문 21-25절은 바울안에서 선과 악의 싸움을 묘사하면서 결론을 내고 있다. 본문에서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또 내 지체 속의 또 다른 법이 있는데 그 법은 내 마음의 법, 하나님의 법 혹은 율법과 싸워서 나를 죄의 법으로 사로 잡는다. 바울은 다시 한번 구원받은 자신의 마음이 여전히 선과 악의 전장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선한 일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하기 원하지만 여전히 내 속에 죄의 법이 힘을 발휘하여서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라고 할때 이 의미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언약으로서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속사람은 바울이 고전 4:16, 엡 3:16에 언급한 내용으로 우리 존재의 정신적 영적인 측면을 언급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과 그것의 목적을 묵상하면 우리는 그 법이 신령하고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The war within is clarified further by the antithesis in verses 22–23, summarizing his emphasis throughout this chapter but especially the battle between good and evil in verse 21. On the positive side, Paul delights in God’s lawin his inner being.* The verb means to “rejoice in” something and reflects the basic Jewish (and Christian) devotion to God’s law. Once again, Christians rejoice in the law as divine covenant and as fulfilled in Christ (Mt 5:17–20). While God’s lawcould refer to the whole Old Testament as divine revelation, the Mosaic law was often called “the Torah of God,” and it is likely that God’swas added partly to distinguish it from the lawof verses 21, 23. The sphere within which this delight occurs is the inner being,used elsewhere in Paul of a Christian (2 Cor 4:16; Eph 3:16) and referring to the mental and spiritual aspect of our being. This idea of mental activity controls the rest of the chapter (the law of my mind,v. 23; I myself in my mind,v. 25). As we meditate on the law and its purpose, we are filled with joy at what God has done. Mentally, we joyfully know that the law is spiritual, holy, righteous and good (vv. 12, 14, 16) and desire to live by its precepts (vv. 15, 18, 19, 21).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87–188.

마음은 영적인 성장이 일어나는 자리이고 또한 전투가 일어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싸움은 그 의식적인 영역 안에서 다른 법/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내 마음의 법이 서로 대항하여 싸운다. 신자들은 바로 공격자인 죄와 수비자인 하나님의 법의 전장이 된다. 게다가 죄는 여기서 내안에서 역사함으로 나를 죄의 법에 사로잡힌 죄수로 만든다. 여기서 내 지체는 육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하고 전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시 헬라의 이원론의 영향때문에 죄으 영향력이 육체에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으로 묘사되었을 수 있다. 실제의 전투를 상상해 보면 적이 쳐들어와서 전투에 승리하여서 우리 각 사람을 노예화 해서 붙잡은 것이다. 
  •  
However, the problem is that there is another law at work in the members of my body.This other principle or power (the law of sinbelow) is dynamically active in the person. Sin was first conceived as a power or realm (6:2–14), then as an enslaving master (6:16–22), and now as a law or controlling force at work in us. Paul then switches metaphors and looks at sin as an invading army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see also vv. 8, 11). The law of my mindparallels God’s lawin verse 22 and is the sphere within which God is at work, in the thinking process as well as the volition. The mind is the place where spiritual growth occurs (see 12:2 on “the renewing of your mind”) and where the battle takes place. The warfare is carried out in the conscious realm, and entails another law/law of sinbattling against both God’s law(the work of the Spirit within; see 7:6) and the law of my mind(the “new self,” cf. Rom 6:6). The believer has become a battleground with sin as the aggressor and God’s lawplaced on the defensive. More than that, sin is the victor here and makes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 at work within my members.There is a difference of opinion whether my membersrefers to the physical body (because of parallels with mind) or to the whole person (the thrust it had in 6:13, 19; 7:5). While a good argument can be made for this referring to the physical body as controlled by sin, it is still better to see it more broadly of every aspect of our being attacked by the power of sin (including the mind and the body). Imagine that the enemy (sin) has made war against, triumphed over, captured and then enslaved the individual—a very serious portrait indeed! In this sense there is a dualism, with two opposing forces at work in us and the side of evil winning. But the extreme pessimism once again must be understood in light of Paul’s purpose. This section describes a Christian trusting in the flesh, and chapter 8 shows that victory only comes in the Spirit. Origen writes (Bray 1998:198), “It appears that in this passage Paul is teaching us that the mortification of the flesh … is not something which happens overnight but rather is a gradual process, because the force of habit is such and the attraction of sin is so great that, even though our mind may want to do what is right and has decided to serve the law of God, yet the lusts of the flesh continue to urge him to serve sin and obey its laws instead.”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88–189.

21절)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한 법을 깨달았다고 선포한다. 바로 그 법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법이 모세율법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원칙인지 논쟁이 많은 부분이다.  
23-22절)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속의 다른 법이 내 마암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는다. 
- Yet at the same time that other principle (v. 23) was at work throughout his body. It was at war against his desire to obey the law of God.107 This basic conflict is nowhere better expressed than in Gal 5:17–18: “For the sinful nature desires what is contrary to the Spirit, and the Spirit what is contrary to the sinful nature. They are in conflict with each other, so that you do not do what you want” (cf. Jas 4:1; 1 Pet 2:11). Paul went on to say that this alien power took him captive to the law of sin at work in his members. Romans 7:23 speaks of three laws.108 By the “law of [his] mind” Paul referred to the principle of rational thought. Goodspeed calls it the “law of [his] reason.” It corresponds to that which Paul knew to be the right thing to do. The relationship between “another109 law” and “the law of sin” is quite clear; they are undoubtedly to be taken as one and the same. This “law” (read “principle”) is the propensity toward sin that arises from a person’s lower nature. So what I am by nature is in constant conflict with what I aspire to be as a child of God in whom the Spirit of God dwells.110 That conflict will never be settled until, seeing   p 171  God, we shall be like him (1 John 3:2).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70–171.
 
νόμος occurs four times in vv. 22–23. I understand “the law of my mind” and “the law of sin” as more specific ways of representing “God’s law” and “another law.”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24-25절) 오호통재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오직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라. 그런데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본문의 마음은 '노우스'이고 육신은 '사륵스'이다. 여기서 노우스는 인간의 마음, 속사람을 의미하고 사륵스는 죄 많은 인류를 의미한다. 
- Caught up in this spiritual warfare,111 Paul cried out: What a wretched man am I! Who is able to free me from the “clutches of my own sinful nature?” (Phillips).112 The “body of death” was like a corpse that hung on him and from which he was unable to free himself.113 It constantly interfered with his desire to obey the higher impulses of his new nature. Who is able to rescue the believer crying out for deliverance? The answer is, Thanks be to God, there is deliveranc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v. 25).114 Through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God has provided the power to live in the freedom of the Spirit (cf. 8:2).115
Verse 25b (a separate paragraph in the NIV) summarizes the entire discussion of vv. 13–24.116 Paul said that he himself (who he really was in Christ) had committed himself to serving the law of God (it was the rational thing to do) but that his lower nature was still a slave to the principle of sin. No modern translation captures the meaning better than the NEB: “In a word then, I myself, subject to God’s law as a rational being, am yet, in my sinful nature, a slave to the law of sin.” Although the chapter ends on this realistic observation, the positive declaration in the   p 172  first part of v. 25 has prepared us for the exciting truths about to be set forth in the chapter that follows.
Robert H. Mounce, Romans, vol. 27,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5), 171–172.

갤럽이나 바나 연구소와 같은 곳에서 21세기 초 교회에 대한 조사에 의하면 세속성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신자와 불신자의 삶의 양식, 도덕성이나 우선순위에 있어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이전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향해 덜 헌신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불신자들에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잠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것이다. 바로 본 구절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묘사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만 한다. 
- All the studies (Gallup, Barna and others) of the church at the dawn of the twenty-first century have reported the growing secularity that dominates. On the whole, you cannot tell a Christian from a non-Christian in terms of lifestyle, morals or priorities. This means that more Christians than ever are only partially committed to Christ. One of the important tasks of the church today is not just reaching the unchurched but waking up the dormant Christians who come but do nothing for the Lord. This passage describes those people. We must help them change their priorities and make Jesus Christ their Lord.This brief note of victory is in a sense a preview of coming attractions, for it points forward to chapter 8, where the means for accomplishing this is more fully explained.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90.

칼빈은 25절 본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신자들은 육체 안에 그들이 거하는 한 의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몸을 벗을 때까지 그들은 그들의 결주를 해나가야 한다." 칼빈의 말 처럼 우리의 내면에서의 싸움, 죄의 법과 하나님의 싸움의 법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행해 거룩하게 헌신되어 있는 순간 나는 역시 곤고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나를 온전케 하나님의 법을 따르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Yet the problem still persists, for Paul concludes his argument by recapitulating (so then)his teaching regarding the two natures of every person. There is no triumphal end to this chapter. Rather, the war continues, and the believer has to choose between surrendering to the lordship of Christ and thus gaining victory (v. 25)* or choosing to obey the law of sinand thus facing spiritual defeat (v. 25). Again, the battle takes place in the mind,where Paul is consciously a slave to God’s law,meaning he wants (note the emphasis on volition seven times in vv. 15–21) to serve God’s law (cf. v. 22) with all his heart. But the mindis opposed by the flesh,and he becomes a slave to the law of sin. Here we have the paradox on slavery reversed from that in 6:22, where we have been set free from slavery to sin in order to become slaves to God. Now we try to serve God but end up serving sin. The spiritual self is defeated by the carnal self. At first glance this seems to end on a note of absolute defeat, as if there is no hope in the spiritual battle (and so many conclude that this cannot describe a Christian). But that is not so. The two options are presented in v. 25—choose to follow Christ or allow sin to dominate. Dunn (1988a:398–99) calls this the battle of two epochs, the old Adamic epoch in which sin dominates and the new epoch of Christ. While we in one sense have died to the old realm (6:1–7), we still live in this world and so are still subject to its power through the flesh. Paul wants us to know that the conflict is real, and we cannot escape it. The answer is hinted at in verse 25a and then explicated fully in chapter 8, namely life in Christ and the Spirit. Calvin summarizes the teaching here (1979:274): “the faithful never reach the goal of righteousness so long as they dwell in the flesh, but that they are running their course, until they put off the body.”
Grant R. Osborne, Romans,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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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Defiles a Person
14 And he called the people to him again and said to them, e“Hear me, all of you, and understand: 15 fThere is nothing outside a person that by going into him can defile him, but the things that come out of a person are what defile him.”5 17 And when he had entered gthe house and left the people, hhis disciples asked him about the parable. 18 And he said to them, “Then iare you also without understanding? Do you not see that whatever goes into a person from outside cannot defile him, 19 since it enters not his heart jbut his stomach, and is expelled?”6 (kThus he declared all foods clean.) 20 And he said, l“What comes out of a person is what defiles him. 21 For from within, out of the heart of man, come evil thoughts, sexual immorality, theft, mmurder, adultery, 22 coveting, wickedness, deceit, nsensuality, oenvy, pslander, qpride, rfoolishness. 23 sAll these evil things come from within, and they defile a person.”

e Matt. 13:51
f See Acts 10:14, 15
5 Some manuscripts add verse 16: If anyone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g ch. 9:28
h [Matt. 13:36; 15:15]
i ch. 8:17, 18
j [1 Cor. 6:13]
6 Greek goes out into the latrine
k [Luke 11:41; Acts 10:15; 11:9]
l Matt. 12:34; James 3:6
m Matt. 5:22, 28; See Ex. 20:13, 14, 17
n 2 Cor. 12:21; Gal. 5:19; Eph. 4:19; 2 Pet. 2:7; Jude 4
o See Matt. 6:23 (Gk.)
p Eph. 4:31; Col. 3:8; 1 Tim. 6:4
q See Luke 1:51
r [Eph. 5:17]
s 1 Cor. 6:9, 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Standard Bible Society, 2016), Mk 7:14–23.

14절) 고르반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시고 나서 다시 무리들을 부르셔서 정결 음식(Kosher food)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신다. 
The main passages that treat Jewish food laws are Lev 11 and Deut 14:1–21. The early church had difficulty deciding what to do with these laws and other questions about food (Acts 10:1–11:18; 15:1–29; Rom 14; 1 Cor 8:1–11:1; Gal 2:11–14; Col 2:20–23). Mark found in the material available to him some teaching of Jesus about the matter. It is not as clear as the modern reader might think, or it would have settled the question, which obviously it did not. Although the statement in v. 15 is called a parable (parabolē) in v. 17, a better translation in context is “riddle.”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17.

15-16절)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 즉 사람이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안에서 나오는 것,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 can defile him. The problem of the defiled human heart is much deeper than one might assume (see Isa. 29:13–16; Jer. 17:9–10) and significantly more serious than mere ceremonial impurity (see Mark 7:19b). The core problem of defilement is what resides in the heart (things that come out), not things going into a person. Throughout Scripture, the heart refers to the center of one’s being, including the mind, emotions, and will.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07.

한글 개역개정에서는 15-16절이 분리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 두절이 15절로 되어 있고 일부의 본문에 16절이 들어가 있다. 그 내용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이다. 
“If anyone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is not found in the earliest and best manuscripts of Mark and is properly omitted by the NIV, RSV, NRSV, NEB, REB, and GNB.62 The statement is probably a scribal addition from 4:9, 23 under the influence of 7:14.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62 The NASB prints the verse in brackets and in the introduction states, “Brackets in the text are around words probably not in the original writing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18.

17-18절)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향해서 비유로 말씀하셨을때 제자들은 그 비유의 내용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떠나 집으로 들어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있을때 제자들은 그 비유를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그 비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셨다. 주님과 가까이 있는다고 모든 것을 다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과 붙어 있을때 제자들은 주님을 아는 지식에 점점 자라가게 되었다. 
Alone with his disciples, Jesus gives further instruction on the importance of a pure heart (cf. note on v. 15). The disciples lack understanding (cf. 4:10–13, 40; 6:52; 8:14–21, 32–33), but they remain with Jesus, and they are gradually learning.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07.

마가는 여러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을 이야기한다. 이 집은 계시의 상징이 된다. 이 집은 당시의 회당과는 대조되는 장소로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Several times Mark pictured Jesus as instructing his disciples in a house (also 9:28, 33; 10:10) so that the house becomes a symbol of revelation. Mark and his readers/hearers doubtless thought of their own house churches. Perhaps the significance of “house” can be seen by contrasting it with the synagogue, which Mark earlier identified as a place of rejection.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18.
 
19절)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들어가는 것, 사람이 섭취하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유대인들은 정결 예법에 의해서 부정한 음식과 정한 음식이 나뉘어져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장애물이 되는 죄의 실제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본질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기에 더이상 이 요구가 우리에게 미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배로 들어가는 음식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결국 모두 배설되어 밖으로 나가기에 이것은 우리들을 부정하게 할 수 없고 도리어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Mark notes that Jesus’ teaching, in essence, declared all foods clean. The Mosaic ceremonial laws distinguished between “clean” and “unclean” foods (see Lev. 11:1–47). Their purpose was to instill an awareness of God’s holiness and of the reality of sin as a barrier to fellowship with God. But once defilement of the heart is thoroughly removed and full fellowship with God becomes a reality (through the atoning death of Jesus; see Mark 10:45; Rom. 14:14; Heb. 8:6–13; 9:10, 14), the ceremonial laws have fulfilled their purpose and are no longer required—though as seen in Acts 10–11, it took several years for the disciples to understand this. (On Christian freedom from ceremonial laws, see notes on Acts 15:1; 15:19–21; Gal. 2:11–12; 4:10; 5:1; on food laws in particular, see 1 Tim. 4:3–5.)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907.

마음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성경에서 이정적인, 지적인 의사 결정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카디아’라는 이 헬라어 단어는 사람의 신체 기관중 심장을 나타내는데 이는 영적인 성품으로서의 행동을 나타낸다. 이는 도덕적, 종교적 삶의 요소로 간주되는 단어이다. 

20-23절)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들 더럽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악한 생각 곧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인데 이것이 바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리스트중 처음 7가지는 복수이고 나머지는 단수이다. 복수의 7가지는 반복적인 행위를 의미하고 나머지 단수로 사용된 6가지는 그들의 태도와 나쁜 버릇들을 의미한다. 
Verses 21–22 explain what Jesus had in mind when referring to what comes out of a person making that person unclean. Evil that comes out of a person’s heart, mind, or will makes the person unclean. In the Greek text the first seven items (those in v. 21 and the first three in v. 22) are plural, implying they are repeated acts; and the last six are singular, implying they are attitudes or vices. In English translation it is difficult to maintai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lural and singular, although the NASB and NEB do. Except for the parallel in Matt 15:19, this is the only list of vices in the Synoptics, but similar lists are in a variety of Hellenistic literature, including pagan, Jewish, and Christian sources (Rom 1:29–31; Gal 5:19–21; Col 3:5, 8–9; 1 Tim 1:9–10; 2 Tim 3:2–4; 1 Pet 4:3). In fact, some have argued that the vocabulary of the list is that of Paul and the early church rather than Jesus and that Jesus could not have given the list. The list may well be a summary rather than a verbatim report of what Jesus said, but doubtless Jesus set forth a list of similar vices.
 James A. Brooks, Mark, vol. 23,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1), 118.

우리는 외부의 음식이나 부정한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할 것이라고 여기고 이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부정한 음식이라든지 더러운 물건이나 동물, 곤충, 벌레를 볼때 매우 심각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것들을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지 못한다. 도리어 우리의 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 우리를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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