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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As for you, brothers, edo not grow weary in doing good. 14 If anyone does not obey what we say in this letter, take note of that person, and fhave nothing to do with him, that he may be ashamed. 15 gDo not regard him as an enemy, but hwarn him as a brother.
e Gal. 6:9; [1 Cor. 15:58]
f See ver. 6
g See Lev. 19:17; Matt. 18:15
h 1 Thess. 5:12, 14; [Titus 3:1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후 3:13–15.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후 3:13–15.
 
10-12절에서 일하지 않고 일을 만드는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이제 선을 행하는 공동체의 형제들을 향하여 언급을 하고 있다. 12절 한글 번역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원문은 ‘데’라는 역접의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다. 
 
13절) 원래대로 번역하자면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너희는 이후에 언급된 공동체 안에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한 이들을 이야기한다. 종말을 강조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안에는 공동체 안에 부유한 지체들의 자비심을 악용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들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게 된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선을 행하다가’로 번역된 ‘칼로포이운테스’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온 단어이다. 원형인 ‘칼로포이에오’는 ‘건전한, 잘, 좋은’이라는 의미를 지닌 ‘칼로스’와 ‘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포이에오’의 합성어로 ‘건전하게 행하다, 좋게 행하다, 선하게 행하다’라는 의미인데 본문에서는 완료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문맥의 흐름속에서 볼 때 규모 없이 행하는 이들과 대조하여 자기 일을 하며 규모있게 행하는 삶을 의미한다. 규모 없이 행하는 이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공동체에 분란을 만들어 냈다. 종말을 이야기하며 일상의 삶을 저버리고 흥청망청 지내는 이들도 있고 신비주의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생계를 내팽겨치고 신비주의에 열광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이 소비되고 있다고 낙심하는 이들이 생겨났기에 이들을 향해서 낙심치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낙심하다’로 번역된 ‘엥카케세테’의 원형 ‘엥카케오’는 문자적으로 ‘완전히 정신을 잃다, 녹초가 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온당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 지쳐서 모든 의욕과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 6:9–10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The initial words of v. 13, ὑμεῖς δέ, ἀδελφοί (“but you, brothers [and sisters]”), are taken by some (e.g., Trilling, 153f.; Marxsen, 102) as introducing a new section. Trilling, however, sees only a very loose connection between v. 13 and vv. 14f. He maintains that vv. 14f. refer to the whole of the epistle rather than to the immediate context of vv. 6–12. Trilling’s view is unconvincing. The only issue addressed in the letter that could be construed as serious enough to warrant the disciplinary action described in vv. 14f. is the problem discussed in vv. 6–12, and in fact vv. 14f. are probably intended as a clarification of v. 6.
Even the seemingly general direction of v. 13 is best understood against the backdrop of vv. 6–12. The reason for the direct address of the readers in v. 13 is that in vv. 11f. Paul was speaking to the indolent members of the community indirectly, but in v. 13 he turns again to the 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with further directions.
He exhorts them μὴ ἐγκακήσητε καλοποιοῦντες (“do not grow weary of doing good”). How specific we should understand this exhortation to be is difficult to determine. A virtually identical direction in Gal. 6:9 (τὸ δὲ καλὸν ποιοῦντες μὴ ἐγκακῶμεν [“let us not grow tired of doing good”]) is very general in scope. But here the situation is somewhat different. The aorist subjunctive ἐγκακήσητε would appear to allude to a specific situation in which the readers are not to grow weary. As vv. 6–12 and 14f. concern the problem of the indolent, it seems likely that the direction in v. 13 relates to this.
Commentators have suggested two possible meaning for the rare compound καλοποιοῦντες. It may mean either “to do the right” (cf. Frame, 308; Morris, 257) or “to confer benefits” (cf. von Dobschütz, 315; Best, 342). Most commentators, whichever translation they accept, assume that Paul was trying to ensure charitable behavior on the part of the 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either toward the needy in the community except for the idle or toward all including the idle. Although Paul may have feared that his instruction regarding the idle might be construed as grounds for withholding charity from the truly needy, he does not specify this. As the text stands, it is much more probable that the apostle is exhorting his readers not to behave like the irresponsible members of the community.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8.
 
14절) 앞서 바울은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는 명령(살후 2:15)과 자기들이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는 명령(살후 3:6)을 했고 본문은 다시 그 문제를 다룬다. 
‘이 편지에 한 우리 말’,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분명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는 규모 없이 행하고, 손으로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이들을 향해서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권면한 내용이다. 이렇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주님의 명령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람의 말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행위가 될 것이고 이에 대해서 사귀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지목하여’로 번역된 ‘세메이우스데’는 ‘세메이오오’의 명령법 현재형이다. ‘세메이오오’는 ‘표시, 표적’을 의미하는 명사 ‘세메이온’에서 유래한 동사로 ‘표시하여 구별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지목하여 알게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과 사귀지 말라고 명하낟. 
‘사귀지 말라’는  표현에서 사귀다라는 의미의 ‘쉬나나미그뉘미’는 문자적으로 ‘함께 섞다, 혼합하다’라는 의미인데 비유적으로 함께 교제하다라는 뜻을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3번 사용되었다.(고전 5:9, 11)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음행하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 술취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부정명령에 사용되었다. 즉 바울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를 사용하며 그리스도인이 그런 이들과 섞여서는 안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 사도의 편지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과도 섞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에 물감이 섞일때 물이 변하듯이 죄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하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는 앞서 함께 사귀지 말라고한 목적을 의미한다. 본문에 '부끄럽게 하다’는 ‘엔트라페’인데 이것의 원형 ‘엔트레포’는 본래 ‘빙 돌다, 방향을 바꾸다, 자신에게로 돌리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것의 의미는 ‘제 모습으로 돌아서게 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일으킨 이들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라고 한 이유는 그들을 공동체 안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공개적인 부끄러움을 당함으로 자신이 외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따돌림을 당했는지를 인식하고 이를 깨달아 반성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결국 교회의 훈계와 권징의 목적은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의 부끄러움으로 인도하여 그들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마 18장 공동체안에서 죄를 지은자들에 대한 교회의 징계) 당시 사해 사본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징계를 다루고 있는데 예를 들어 믿음을 저버린 배교자를 공동체에서 2년 동안 징계처분한다. 첫해에는 성직자들의 거룩한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며, 이듬해에는 성직자들의 음료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징계 역시 회개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In this verse Paul returns to the question of how to go about disciplining the refractory members of the community, a problem first addressed in v. 6. The initial statement, εἰ δέ τις οὐχ ὑπακούει τῷ λόγῳ ἡμῶν διὰ τῆς ἐπιστολῆς (“but if anyone does not obey our instruction through this letter”), suggests that Paul hoped for a change of behavior as a result of the letter. If a voluntary transformation did not occur, however, then the community must act decisively. λόγος is used here in the sense of a rule of conduct, a usage rooted both in classical Greek and in Paul’s understanding of the Torah, as Rom. 13:9 and Gal. 5:14 indicate. The singular form of the term shows that Paul is thinking specifically of the theme found in vv. 6–12, and in particular the regulation given in v. 12. Hence his reference to the rule of conduct διὰ τῆς ἐπιστολῆς (“through this letter”). The use of “our” with “rule of conduct” interjects a note of apostolic authority into the passage (cf. Bruce, 209), making noncompliance with the regulation regarding work a rejection of God’s messenger.
Paul directs the obedient members of the community, τοῦτον σημειοῦσθε (“take special notice of this one”), referring to anyone who fails to comply with his injunction regarding work. Having taken note of such a person, the community is then μὴ συναναμίγνυσθαι αὐτῷ (“not to associate with the person”). συναναμίγνυσθαι occurs elsewhere in Paul’s letters (and for that matter the NT) only in 1 Cor. 5:9–11, where it is found twice. In that text Paul directs the church at Corinth to dissociate itself from anyone who claims to be a fellow Christian but is guilty of immorality. H. Greeven (TDNT VII, 855) argues that the words “not even to eat with such a person” found in 1 Cor. 5:11 are intended to exclude the person involved from the Lord’s Supper because it was central to the life of the community. Paul does not specify this in 2 Thes. 3:14, but he undoubtedly meant for the exclusion to include any form of participation in the common meals of the community where the Lord’s Supper took place.
But the command was wider than this. As it stands it “restrains members of the community from dealings with the person concerned” (Greeven, 855); that is, Paul calls for their excommunication. He indicates in v. 14 that the primary purpose of the debarment was ἵνα ἐντραπῇ (“in order that the person may be ashamed”). The apostle hoped that exclusion would have a salutary effect on the individual, leading ultimately to his or her reintegration into the community as a chastened brother or sister (cf. v. 15). But quite apart from this explicit intention, the act of debarring refractory members also served to purge the community of corrupting influences (cf. Meeks, First Urban Christians, 130) that might affect other members and lead to opprobrium from outsiders.
TDNT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Geoffrey W. Bromiley. Ten volumes; Grand Rapids: Eerdmans, 1964–76.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8–289.
 
15절)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앞서 말한대로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한 징계의 목적이 그들을 교회나 공동체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하여 그들을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을 시작하면서 ‘카이’라는 접속사가 사용되는데 이를 한글은 ‘그러나’로 번역했지만 ‘그리고’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즉 14절과 15절은 대조, 역접의 관계가 아니라 순접의 관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목하여 사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 회개케 하는 것과 원수처럼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사귀는 것은 서로 연결되는 조화로운 사상이다. 
본문에서 ‘생각하다’는 ‘헤게이스데’인데 이것의 원형은 ‘헤게오마이’로 ‘~로 여기다, 간주하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앞서 14절의 명령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것 같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을 행한자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적대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자기 의가 지나치게 되면 그 잘못을 행한 자를 미워하고 원수로 여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과정속에서 생길 수 있는 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이렇게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나는 저들과는 다른 선한 존재이다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부끄러움속에서 다시금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차단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바울은 원수같이 여기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같이 권면하라’, ‘권면하라’에 해당하는 ‘누데테이테’의 원형 ‘누데테오’는 ‘마음, 정신’을 뜻하는 명사 ‘누스’와 ‘놓다, 두다’를 의미하는 동사 ‘티데미’의 합성어로 ‘마음 속에 놓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듣는 자가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각성할 수 있도록 심도있게 훈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속에서 살펴보자면 공동체 안에 불순종한 이가 있다고 할 때 그의 문제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과정에서 그를 원수같이 대한다면 그를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를 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우리의 태도가 그를 형제와 같이 여긴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돌이키게 하기 위한 사랑어린 태도로 임하게 될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책망, 훈계, 호소, 징계’를 겸하여 사용하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 오줌싸개 아이의 잘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키를 쓰고 소금을 얻어오게 했다. 이 과정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아이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잘못을 고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면하라는 것이다. 
 
Although Paul calls for excommunication of anyone who refuses to heed his instructions regarding work, at the same time he hastens to define more clearly what attitude the members of the community should have toward someone whom they have banned from their fellowship. First he exhorts them, καὶ μὴ ὡς ἐχθρὸν ἡγεῖσθε (“and do not consider [such a person] as an enemy”). Paul recognized that if someone were debarred from the church community, then in many people’s minds this would be tantamount to having declared that person an enemy of the community. This in turn would lead to behavior predicated upon this assumption. This was not Paul’s intention; rather, he appears to have hoped that if the people concerned were shunned by the community it would bring them to their senses. For this reason such people should not be treated as enemies. This would more than likely result in their complete alienation from the community.
Instead Paul urges, ἀλλὰ νουθετεῖτε ὡς ἀδελφόν (“but admonish [the person] as a brother [or sister]”). Exactly how this was to take place poses a difficulty. Best (343f.) believes that it can only refer to action to be taken while the community was assembled. If this were the case then the direction to dissociate from the individual involved was limited only to the Lord’s Supper and the common meal associated with it. Nothing in the context, however, suggests such a limited significance for the command in v. 14 (cf. v. 6 as well). There is no reason to think that admonishing someone excluded from the community could not take place outside the communal meeting. The point Paul wishes to make does not include precise details about how to deal with a recalcitrant individual or where admonition should take place. Instead Paul attempts to moderate the attitudes of the community toward the person and give the community a positive action to carry out in an effort to restore the individual to fellowship. Thus Paul implies that exclusion from the community should not be understood as irrevocable.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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