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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pAristarchus my fellow prisoner greets you, and Mark qthe cousin of Barnabas (concerning whom you have received instructions—rif he comes to you, welcome him), 11 and Jesus who is called sJustus. tThese are the only men of the circumcision among my fellow workers for the kingdom of God, and uthey have been a comfort to me. 12 vEpaphras, who is one of you, a servant of Christ Jesus, greets you, always wstruggling on your behalf in his prayers, that you may stand xmature and fully assured in all the will of God. 13 For I bear him witness that he has worked hard for you and for those in Laodicea and in Hierapolis. 14 yLuke the beloved physician greets you, as does zDemas. 15 Give my greetings to the brothers3at Laodicea, and to Nympha and athe church in her house. 16 And when bthis letter has been read among you, have it also read in the church of the Laodiceans; and see that you also read the letter from Laodicea. 17 And say to cArchippus, “See that you fulfill dthe ministry that you have received in the Lord.” 
18 I, Paul, ewrite this greeting with my own hand. fRemember gmy chains. hGrace be with you. 
pActs 19:29; 20:4; 27:2; Philem. 24; [Rom. 16:7]
qSee Acts 15:37, 39
r[2 Tim. 4:11]
s[Acts 1:23; 18:7]
tSee Acts 11:2
u[Philem. 7]
vch. 1:7; Philem. 23
wSee Rom. 15:30
xSee Matt. 5:48
y2 Tim. 4:11; See Acts 16:10
z2 Tim. 4:10; Philem. 24
3Or brothers and sisters
aSee Rom. 16:5
b1 Thess. 5:27
cPhilem. 2
d2 Tim. 4:5
eSee 1 Cor. 16:21
f[Heb. 13:3]
gver. 3; See Phil. 1:7
h1 Tim. 6:21; 2 Tim. 4:22; [Titus 3: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4:10–18.

10-11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유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한다. 이 세명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들로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에서 온 마게도냐 사람으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과 로마로 함께 여행했다. 요한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 바울의 첫번째 선교여행시에 선교팀에서 떠나게 되어서(행 13:13) 바울과 바나바가 이것으로 다투어 결국 갈라서게 된다.(행 15:39) 그런데 이제 마가가 변했고 이로 인해 바울의 견해가 달라졌다. 이제 마가는 바울과 화해했고 그의 사역에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 Paul’s co-workers offer him assistance and hearten his spirits during the dark days of his confinement as he awaits the final decision about his case. Aristarchus.A Macedonian from Thessalonica who traveled with Paul to Jerusalem and then to Rome (Acts 19:29; 20:4; 27:2; Phlm 24). Mark.Presumably John, also called Mark (Acts 12:12, 25; 13:5, 13; 15:36–41; see 2 Tim 4:11; Phlm 24; 1 Pet 5:13), whose stature is bolstered when identified as “the cousin of Barnabas” (Acts 11:25–26; 14:3, 14; 15:12; Gal 2:9).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4.

12-13절) 골로새 교회에서 온 그리스도 예수의 종 에바브라를 위해서 문안하라. 그가 항상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한다.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많이 수고했음을 바울이 증언하고 있다.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는 골로새 인근의 도시들이다. 히에라볼리는 미네랄 온천으로 바울당시 유명했다. 그러나 현대 많은 방문객들이 보는 것은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 새롭게 지은 것들과 확장한 것들이다. 히에라볼리는 아폴로, 레토, 프루토 등을 경배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고대 무덤에 유대인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비문이 남아있다. 
- in Laodicea and in Hierapolis. These were neighboring towns to Colossae in the Lycus Valley (on Laodicea, see 2:1; Rev. 3:14). Hierapolis (modern Pamukkale) boasts a large mineral spring, famous also in Paul’s day. However, much of what visitors see today dates from the rebuilding and expansion that occurred under Domitian (a.d. 81–96) and later. Hierapolis was known for the worship of Apollo, Leto, and Pluto; yet inscriptions in the ancient cemetery also point to a Jewish presenc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0.

본문에 애쓰다라는 단어는 ‘아고니조마이’라는 단어로 씨름하다, 투쟁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주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눅 22:44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애써서 기도하실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 wrestling.Greek agōnizomai. Paul uses this Greek word in 1:29 (“strenuously contend”) to refer to the struggle of his missionary labor. See also 1 Cor 9:25 (“competes in the games”); 1 Tim 6:12 (“fight”); 2 Tim 4:7 (“fought”). A noun form of this Greek word in Luke 22:44 (“anguish”) describes how Christ prayed in Gethseman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5.

- 골로새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하고 거기에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고 전해 준 사람은 에바브라였다(1:7–8). 오네시모처럼 그도 너희 중의 한 사람, 즉 골로새 출신이고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문안 인사를 전한다. 바울은 여기에 덧붙여 에바브라가 자신처럼 항상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견고하고, 온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고 있다고 전한다. NIV는 ‘온전하고 확신 있게’라는 말을 문장의 끝에 둠으로써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 번역한다(‘that you may stand firm in all the will of God, mature and fully assured’). 그러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 말이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직접 연결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은 골로새 교인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골로새서 1:24–2:5과 특히 에베소서 1:5–12에 나오는 것처럼 훨씬 더 큰 실체이다. 즉,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가리킨다. 에바브라는 (바울처럼) 골로새 교회라는 신생 교회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고, 그에 따라 그들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는지 이해하고, 보다 더 기초가 확실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인간)으로 성장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36–237.

'완전하고 확신 있게’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에바브라의 기도의 핵심이다. 본문에서 완전하게라고 기록한 내용은 ‘텔레이오스’로 영적으로 성숙한을 의미하고 확신 있게 라는 말은 ‘플레로포레오’로 전적으로 확신한이라는 표현이다. 이 둘 모두 골로새 교회안에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돌이켜 성숙하고 흔들리지 말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 Further, Paul’s phrase mature and fully assuredextends his commentary on the importance of Epaphras’s prayer for the Colossians. This phrase captures two themes in Paul’s letter and therefore functions here to connect his concern for Epaphras with the content of what he has just written. According to O’Brien, the word mature (teleios)“touches on one of the key issues at Colosse in which members of the congregation were encouraged by false teachers to seek maturity or perfection through their philosophy (2:8) with its ascetic practices, visionary experiences and special revelations, rather than through Christ” (1982:253). Paul also uses this word to summarize his and God’s purpose for mission: “so that we may present everyone perfect [teleios]in Christ” (1:28). The second term, fully assured (plērophoreō),belongs to the plēroōword-family, which Paul has used in confessing the core convictions of Colossian Christianity (1:9, 19; see also 4:17), in introducing his own mission (1:25; 2:2) and in arguing against the false teaching in Colosse (2:9–10). Paul’s use of these two catchwords in describing the aim of Epaphras’s prayer for the Colossians ties Epaphras with Paul in both the Colossian crisis and its resolution (see Lohse 1972:173–74).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4:12.

14절)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
여기서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이다. 그는 앞선 할례파에 속하지 않은것으로 보아 이방인인 것으로 보이고 바울의 여정과 특히 옥중에 있는 동안 함께 했다. 누가의 경우 바울이 겪고 있는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서 그의 여정에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갈 4:13-14) 데마는 본문에서는 문안을 받는 인물이지만 딤후 4:10에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데마처럼 주님을 따르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인물들이 있다. 
- Luke the beloved physicianis the same Luke who authored Luke’s Gospel and Acts (see also 2 Tim. 4:11; Philem. 24). He accompanied Paul on some of his journeys (see Introduction to Acts: Author and Title) and was apparently with Paul throughout his two-year imprisonment in Caesarea and then in his two-year Roman imprisonment. Since Luke is not identified among “the only men of the circumcision” (Col. 4:9–11), he was probably a Gentile. Lamentably, Demaslater followed worldly pursuits and deserted Paul (2 Tim. 4:1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0.

15-17절) 라오디게아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인사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함, 눔바는 부유한 여성으로 자신의 집을 예배의 공간으로 내어주었다. 
바울은 골로새에 보낸 편지를 라오디게아의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읽게하고 또한 라오디게아에 보낸 편지도 골로새 성도들에게 읽을 것을 요청한다. 
아킵보는 빌레몬과 압비아의 아들이다.(몬 2)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직무를 다할 것을 요청한것 처럼(딤후 4:5) 아킵보에게 주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기 위해서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 직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본문에서 눔바가 여자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를 남성으로 기록한 번역본도 있고 여성으로 기록한 번역본도 있다. 하지만 여성으로 본다면 초대교회내에서 여성 리더십이 상당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브리스길라 롬 16:5, 고전 16:19 / 루디아 행 16:15-40)

본문의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에베소서가 그러한 회람서신이라는 주장도 있고 이 서신은 없어졌다라고도 한다. 
- 전체로서 바울의 사역은 전 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기 위한 토대를 세우는 것이었고(고전 3:10–11; 엡 2:20), 그의 서신들은 그 임무를 수행하도록 기획되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기능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것을 보증한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좋은 실례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서신들이 지닌 고유한 가치는 차치하고라도) 바울서신이 보존된 이유라면 이 구절은 또한 바울서신들을 수집하는 과정이 어느 정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골로새에 보내진 이 서신(혹은 이 서신의 필사본)은 라오디게아 교회로도 보내질 예정이다. 또한 서신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아마도 그들이 받은 다른 서신을 골로새 교회에 보내야 할 것이다(이 서신은 두기고가 골로새로 가는 길에 라오디게아에 들려 전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서신은 어떤 서신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말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의해 (바울에게? 또는 골로새 교인에게?) 쓰여 진 서신이 아니라, 오히려 라오디게아에 보내지고, 지금 라오디게아로부터 골로새로 보내질 서신을 가리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 서신이 바울 자신에 의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5)그러나 그 서신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라이트풋(Lightfoot)의 논의6)가 표준안으로 여겨진다. 그는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가 우리가 아는 에베소서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에베소서에는 어떤 특정한 인사말이나 특정한 상황을 반영한 권면이 없고, (많은 사본에) 수신지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일반적이고 폭넓은 어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회람서신이다. 이 견해는 학자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Caird는 예외).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해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만한 주된 반론이 없으므로, 몇몇 사건을 가설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그 함의를 좀 더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에베소 감옥에 투옥된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물론이고 주변 지역에 있는 신생 교회들에게 보낸 공동서신으로서 ‘에베소서’를 기록했다. 두기고(엡 6:21)는 라오디게아 다음에 골로새를 방문할 목적으로 리쿠스 계곡의 지역교회들을 위해 필사본을 전달했다(본서 서두에 있는 지도를 보면 이 경로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바울이 골로새서 2장의 보다 더 특수한 경고들을-그것이 아무리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적절하였을지라도-그 장엄하고 시적인 ‘회람서신’ 안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골로새 교회가 회람서신의 또 하나의 수령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기고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가지고 가고, 오네시모는 자기의 이전 주인 빌레몬에게 보낼 짧은 서신을 가지고 간다.
물론 이 가설은 입증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이 가설은 자료를 잘 다루고 있고, 특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잘 설명해준다. ‘에베소서’는 말하자면 저자가 골로새서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그가 강조한 위대한 진리를 예배 속에서 찬찬히 생각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물론 반대로 골로새서는 ‘에베소서’ 안에 있는 몇몇 주제들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춘 버전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세한 재구성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부분의 학자들처럼)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서신’을 잃어버려진 서신으로 고려한다면, 이 구절의 근본적인 요점은 분명하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여한 권위는 라오디게아와 골로새에서 읽혀지도록 리쿠스 계곡에 보낸 두 개의 서신으로 말미암아 행사될 수 있다.
5)그러나 C. P. Anderson(‘Who Wrote “The Epistle from Laodicea”?’, JBL85, 1966, 436–440)은 이 서신이 에바브라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계속되는 논의를 통해 내가 왜 그의 견해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지 설명할 것이다.
6)Lightfoot, 274–300. 그는 여기서 교부 시대와 그 이후 시대에 잘 알려진 위조문서인 ‘라오디게아 서신’에 대한 논의도 포함시킨다. 또한 Lightfoot, ‘The Destination of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in his Biblical Essays(Macmillan, 1893), 375–396도 참조.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39–241.

18절) 끝 인사,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내가 매인 것을 기억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이 친필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앞서 1:1에서 지금까지 디모데가 바울이 불러주는 편지의 내용을 대필했다면 이제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은 본인이 직접 펜을 들어 편지에 서명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는 것이다. 
- Letter Closing.Paul ends his letter by asking the Colossian Christians to remember him before the Lord. I, Paul, write this greeting with my own hand. If Timothy has so far been functioning as Paul’s secretary to whom he dictates the letter (see 1:1), Paul now takes the stylus and signs the letter personally (cf. 1 Cor. 16:21; 2 Thess. 3:1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0.

바울은 자신의 매임을 기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본 서신은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을 맺고 있다. 
- Remember my chains.Paul is glad to suffer for Christ (1:24), but he depends on their prayer support (cf. Phil 1:19). The letter begins (Col 1:2) and ends with “grace.”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5.

- 또한 이 서신에서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사역에 대해 재치 있게 소개하는 바울의 매력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고 계신 일에 대한 놀라운 그의 비전은 그가 서신을 쓰고 있는 상황과 묘하고 희한하게 대조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교회와 사도바울을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좀 더 알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하는 지혜요 지혜로운 구원의 계획이 지금 새 아담이 되셔서, 모든 종족의 남녀, 어린아이들이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새 시대로 안내한다는 사실이다. 바울의 사역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모든 점에서 그리스도를 반영한다. 골로새 교회는 그 분 안에서 생명의 충만에 이르렀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말한 모든 내용은 결국 예배, 감사, 사랑에 대한 왕의 초대가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과 화해를 이루셨고, 이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화해를 누리고 계속 성장하여 온전하고 풍성한 새 시대의 인간의 삶을 살면서 그 분을 누리도록 초대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들은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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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chicus will tell you mall about my activities. He is a beloved brother and faithful minister and fellow servant2in the Lord. I have sent him to you for this very purpose, that you may know how we are and that he may encourage your hearts, and with him nOnesimus, our faithful and obeloved brother, who is one of you. They will tell you of everything that has taken place here. 
mFor ver. 7–9, see Eph. 6:21, 22
2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sundoulos; see Preface
nPhilem. 10
oPhilem. 16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4:7–9.

7절) 두기고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안에서 함께 종된 자로 그가 나 바울의 사정을 다 너희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두기고는 소아시아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울 사역팀의 일원이 되었다. 바울은 두기고를 통해서 이 편지(에베소서와 빌레몬서를 포함)들을 전달하게 했고 그들에게 바울의 근황과 그의 상황을 전했다. 
- Tychicuswas a native of Asia Minor who became a Christian and a member of Paul’s ministry team (Acts 20:4). He will carry this letter (as well as Ephesians and Philemon; see Eph. 6:21–22; and Introduction to Philemon: Date) and bring them news about Paul and his situat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300.

바울은 두기고를 사랑받는 형제, 신실한 일꾼, 주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칭하고 있다. 형제(아델포스), 일꾼(디아코노스), 종(신둘로스)
- The titles Paul gives Tychicus, dear brother, a faithful minister and fellow servant,suggest a role more important than that of a messenger. He was, in O’Brien’s words, “a particularly valued colleague” (1982:247). In fact, the title faithful minister (diakonos,literally “servant,” from which we derive “deacon”) is used earlier to describe the ministry of both Epaphras (1:7) and Paul himself (1:23). Moreover, the title fellow servant (syndoulos)is used earlier (1:7) to describe Epaphras as one who participates equally with Paul in the Gentile mission. In effect, Tychicus is Paul’s own designate to continue the ministry, at least at Colosse, during his imprisonment. Epaphras would have been the natural person for this ministry, since he first brought the gospel to Colosse; however, apparently his relationship with the Colossians is troubled and requires Paul’s intervention (4:12–13).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4:7.

8절) 바울이 두기고를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보낸 것은 골로새교회로 하여금 바울의 사정을 알게 하고 너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다. 
두기고는 바울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복음이 바울이 옥에 갇혀있는 상황에서도 힘있게 전파되고 있는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이러한 간증은 골로새 교회로 하여금 격려와 위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전파 사역을 하면서 여러가지 방해와 반대를 직면했다.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래서 여러 이방의 교회 공동체를 방문하기 원했지만 방문하지 못했다. 로마서에서도 ‘너희를 간절히 보기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기 원한다(롬 1:11)'라고 고백했다. 이처럼 바울은 기회있는대로 이방의 교회들에게 나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기를 원했다. 바울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직접 방문하기를 원했지만 그럴수 없는 경우에는 대리인을 보내어 자신의 그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었다. 두기고나 디모데가 그런 대리인들이다. 지금 자신이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골로새 교인들이 거짓 가르침에 의해서 그들의 신앙이 위협을 받는 다는 소식을 들으며 바울은 두기고를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 Because of the various interruptions during his ministry (including imprisonment), Paul was unable to visit many Gentile congregations in person even though this was his desire. In Romans, for example, Paul repeats his desire to visit the Christian congregations in the world’s most important city in order to “impart to you some spiritual gift to make you strong” (Rom 1:11; compare 15:23–4). Like the Colossian believers, those in Rome had never profited from the apostle’s personal visit, a time when Paul could minister to them directly and they could benefit from his apostolic persona and gifts.
Paul’s constant references in his letters to past and future visits are expressions of his apostolic authority. The gifts that Christ had given him (see Rom 1:5) have transformed him into a conduit of eschatological power, capable of empowering others to resist evil and grow in holiness, thereby preparing for the Lord’s return. When he was unable to visit congregations in person, Paul sent substitutes (both people and letters) through which his apostolic ministry could continue to have its powerful effect (Funk 1967:249–68). Tychicus is one such substitute, Timothy is another (Phil 2:19; 1 Thess 3:6), and this very letter is a third. In this case, the apostle is “in chains” and unable to convey the gift of his apostleship to the Colossian believers in person. Because their faith is threatened by false teaching, he sends Tychicus as ministerand servant to encourage [their] hearts—the very purpose Paul has assigned to himself (2:2).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4:7.

9절) 이 여정중에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고 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출신으로 그들이 여기의 일을 다 너희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로 소개하고 있다. 빌레몬서는 골로새서와 거의 비슷한 시점에 보내졌다. 오네시모를 두기고와 함께 보낸 이유는 오네시모의 회심과 그의 도덕성을 입증해주고 필요한 경우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오네시모가 자신들과 함께 있던 이인 것을 알았고 그의 변화를 보고 노예의 신분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누구의 추천을 받느냐가 중요한데 오네시모와 두기고는 모두 바울의 추천을 받고 있다. 게다가 오네시모 홀로가 아니라 두기고와 동행하게 함으로 그가 얼마나 신실하고 주안에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었는지를 증거해주고 있다. 이들이 전한 ‘여기 일’, 이곳에서 발생한 모든 일은 과연 무엇일까?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된 이야기, 이 과정속에서 어떻게 복음이 증거되었는지, 어떻게 오네시모가 회심을 해서 지금 이렇게 신실한 형제가 되었는지, 이 복음을 위해서 골로새 교인들은 어떤 일에 동참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이러한 구체적인 나눔과 도전은 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본문 7-9절은 교차대구법의 형식을 따른다. 교차대구법은 단어나 생각을 두개의 평행 혹은 역전된 형태로 배치하는 문학적 장치이다. 본문은 ABCDC’B’A’의 형태를 띠는데 중앙의 D에 중심 사상을 위치시키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이 가장 강조하는 생각은 바로 ‘너희 마음을 위로하려 함’이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두기고를 통해서 그의 사역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 This point is highlighted by the chiastic pattern of the text itself. Recall that a chiasmus is a literary device that arranges words and ideas into two parallel and inverted passages, with an odd member placed at the vertex, where the two passages intersect (ABCDC´B´A´). The odd phrase found at the vertex (D) helps the reader locate the passage’s principal idea. Consider verses 7–9 in this light:
A Tychicus will tell you all the news about me (v. 7a).
B He is a dear brother, a faithful minister and fellow servant in the Lord (v. 7b).
C I am sending him to you for the express purpose that you may know about our circumstances (v. 8a)
D and that he may encourage your hearts (v. 8b).
He is coming with Onesimus (v. 9a),
our faithful and dear brother, who is one of you (v. 9b).
They will tell you everything that is happening here (9c).
The chiastic shape helps us to identify the most important ingredient in the instructions Paul sends to the Colossians: that [Tychicus] may encourage your hearts.Paul’s chief interest is that his ministry continue through Tychicus during his imprisonment (see Lohse 1971:171). The chiasmus also subordinates Onesimus to Tychicus, for it is the latter who is central to Paul’s plans and additionally is called faithful minister.The credential added to Onesimus, who is one of you(4:9), suggests that his task is to help Tychicus gain entry into this Colossian community.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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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ontinue steadfastly in prayer, being watchful in it dwith thanksgiving. At the same time, pray also for us, that God may eopen to us a door for the word, fto declare the mystery of Christ, gon account of which I am in prison— that I may make it clear, which is how I ought to speak. 
hWalk in wisdom toward ioutsiders, making the best use of the time. Let your speech always jbe gracious, kseasoned with salt, lso that you may know how you ought to answer each person. 
cFor ver. 2–4, see Eph. 6:18–20
dch. 2:7
eSee Acts 14:27
fSee Rom. 16:25
gver. 18; Eph. 6:20; See Phil. 1:7
hSee Eph. 5:15–17
iSee Mark 4:11
jch. 3:16
kSee Mark 9:50
l1 Pet. 3:15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4:2–6.

바울은 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와 선포를 요청하고 있다. 이 내용은 서신의 서두에서 강조된 바와 같다.
- Paul’s opening exhortation is framed by two imperatives, both of which convey his deep concern to evangelize the lost. The community that God has called out of the world for salvation by the gospel (see Rom 10:8) is called in turn to preach that gospel; evangelism is the church’s vocation. The work of evangelism includes prayer (4:2–4) as well as proclamation (4:5–6)—a point already highlighted in the letter’s opening words (1:5–9). In fact, this concluding passage connects well with Paul’s opening thanksgiving (1:3–12). So Paul’s exhortations to pray for the church’s mission (4:2–4) and to be wise toward outsiders (4:5) form a sort of bookend, paired with its opening thanksgiving, bringing into even clearer focus the purpose of the letter’s main body. That is, Paul’s interest in correcting the errant philosophy concerns the church’s vocation; the Christless teaching and ascetic morality of the “hollow and deceptive philosophy” (2:8) threaten the church’s evangelistic mission to outsiders.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4:2.

2-4절) 기도의 사역. 바울은 2절에서 효과적인 기도 사역의 세가지 특성을 본문을 통해 말한다. 첫번째는 기도를 계속하고(기도에 힘쓰고), 두번째는 깨어서 기도하고 세번째는 김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 The Ministry of Prayer (4:2–4)*  Paul is first of all concerned with his readers’ prayer life, and he commends three characteristics of effective prayer to them. The opening imperative, devote yourselves (proskartereite),is frequently used regarding prayer in the New Testament (especially in Acts: 1:14; 2:42, 46, etc.) and suggests a gritty determination not to give up until God’s response comes (compare Lk 18:1–8). The second phrase, being watchful,may imply a perspective toward the future, when Christ returns and God will answer every prayer fully. Most commentators are inclined not to find a futuristic meaning in this phrase because of Paul’s emphasis in Colossians on a realized eschatology; but I disagree. Paul’s opening thanksgiving is grounded in the congregation’s future hope (1:5) and restated as the aim of his Gentile mission (1:22, 28). The congregation is called to pray in the confident expectation that it will be made acceptable before God at Christ’s return (Schweizer 1982:172). In addition, the word for watchful (gregōreō)modifies and intensifies Paul’s exhortation to pray, calling for vigilance or alertness to petition God for all that agrees with God’s eschatological plans. In the immediate context, persistent and vigilant prayer is an ingredient of the church’s evangelistic mission: believers must pray that those in need of God’s salvation be converted before Christ returns.
The third characteristic of prayer, thankful,suggests two possible meanings. A thankful prayer expects God’s answers (see 1:12; Wright 1987:152). Since this exhortation concerns the church’s evangelistic mission, a thankful prayer also acknowledges that salvation finally belongs to the Lord and is the work of God’s grace.
*4:4The Greek particle deiis better translated “it is necessary” rather than the NIV’s as I should.The NIV softens the force of Paul’s probable intent to recall his earlier apologia in 1:24–2:3, which is tied to this exhortation by proclaim (phaneroo;translated “disclose” in 1:26). Paul’s earlier use of this verb is coupled with “mystery” to express the particular purpose of Paul’s ministry: to make the full word of God known among the Gentiles (1:25–27). Paul preaches that God has chosen Gentiles out of their darkness for salvation in Christ (3:11). Against this backdrop, then, Paul’s mission is made “necessary” by God’s “commission” (1:25), since he has become an agent of God’s redemptive plan for the Gentiles. Yet Paul’s imprisonment makes it impossible to do what is “necessary”: his work of evangelism.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4:2.

2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깨어 있다라는 표현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시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열 처녀의 비유) 또한 마 26:4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정신 차리고 깨어 있다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또한 본문에서는 이말이 감사와 연결되어 있기에 기도 응답에 대한 주시, 응답에 대한 감사를 의미한다. 

3절) 바울의 중보기도 요청,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위한 문(전도의 문)을 열어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선포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내가 이일로 감옥에 있다. 
바울은 전도자로서 무엇보다 말씀의 문을 열어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문을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 일로인하여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기에 자신의 매임에 복음이 갇히지 않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 이 기도에는 바울의 중보 기도(1:9이하)에 대한 응답으로써 바울을 위한 골로새 교인의 중보 기도도 포함된다.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개정개역에는 ‘전도’의 문으로 번역되었다-역주)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이 ‘문’은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문이거나 아니면 바울과 그의 메시지를 세상으로 퍼지게 할 감옥 문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가능성이 있는 바울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말씀의 문’은 문자 그대로는 ‘말씀을 위한 문’이다)을 개개인과 공동체의 마음과 삶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을 언급한다(행 14:27; 고전 16:9; 고후 2:12 참조). 여기에 언급된 ‘말씀’은 1:5–6에 나오는 복음(좀 더 자세히 표현하면 ‘복음 진리의 말씀’)의 경우처럼 의인화되어 있다. 거기에서처럼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사도들의 선포를 통하여 활동하시며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은 그의 백성의 중보 기도라는 적절한 무기로 지원되고 보강되어야 한다. 이 서신의 앞 부분(1:26–27; 2:2)과 일치하는 이 ‘말씀’의 내용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이라는 바울의 말을 통해 보다 더 분명해 진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획으로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통해 나타났다. 그 비밀의 핵심 내용은 그리스도인데, 단지 개인으로서의 그 분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그 분의 인격과 그 분이 이루신 업적을 포함한다. 그러나 현 시대의 강력한 구조에 도전하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은 늘 위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일 때문에 내가 매임을 당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난과 현재의 투옥은 1:24에 지적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비밀과 연관되고 새 시대를 안내하는 그의 사도적 소명의 일부이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26–227.

5절)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 안에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기회를 사라)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지고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지혜 안에서 행하는 삶이다. 외인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믿는 자들의 삶으로 인해서 험담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게 하는 삶이 아니라 구별된 삶을 살아낼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을 아낄때 이는 전도의 문을 여는 매우 중요한 기회가 된다. 
- 골로새 교인들은 반드시 그들의 삶과 언어가 그 동일한 비밀, 즉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를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지혜로 행하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는 ‘지혜 안에서 걸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온전하고 참된 인간 삶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삶은 외인에게 대해서는 이러한 지혜를 반영해야 한다.67)바울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비판하거나 험담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고전 10:32). 그리스도인이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때(개역개정에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로 번역되었다-역주) 흠이 없는 삶은 은혜로운 복음 증거의 토대가 된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문자적으로 ‘다 사들이다’ 또는 ‘매수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이 단어는 (엡 5:16에 나오는 것처럼) 때가 왠지 악하므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바겐세일 때처럼, 모든 기회를 덥석 잡아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O’Brien). ‘기회’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표현은 시간을 복음 증거를 위한 기회로 간주하여 그것을 열심히 사용하라는 교훈일 것이다.
67)‘외인’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외부에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것에 대해서는 막 4:11; 고전 5:12–13; 살전 4:12 참조.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28.

외인은 일반적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데 랍비들은 이를 올바른 가르침 밖에 서 있는 신자들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둘 모두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거짓 선생들의 거짓 가르침으로 인해 미혹된 사람들말이다. 
지혜로 행하는 것의 중요성, 얼마나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자들의 위선을 그들의 불신앙의 이유로 말하고 있다. 우리의 미성숙한 행동을 보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부인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이땅을 떠나시고 이땅에 교회를 허락하셨다. 이땅의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는 통로로서 말하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악가운데 행하고 위선의 말과 행동을 한다면 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지혜가운데 행하는 공동체는 깨어서 기도하는 공동체임으로 외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이다. 또한 세월을 아낌으로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선용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공동체 이다. 

6절)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네가 어떻게 각 사람에게 대답해야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내는 삶을 어떤 삶일까? 소금을 치지 않은 음식은 심심하다. 소금을 넣으면 음식이 맛깔나진다. 은혜를 전하지만 무미건조하거나 지루하게 하지 말고 복음을 흥미롭고 생생하게 전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세상은 지혜로 세월을 아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다. 그러할 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복음 증거를 위한 이러한 열정은 경솔한 교만이나 지루한 현실 안주(마치 모든 대답이 포함된 자신만의 공식이 있는 양)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로 충만하게 하고(‘은혜’라는 말은 영어에서처럼 헬라어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애로움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권면한다. 말이 ‘소금 끼 있다’는 표현은 고대 세계에서 흔한 은유였다. 바울은 지루한 독백이 복음을 전하는데 백해무익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흥미롭고, 생생하며, 다채롭게 증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도록 믿음의 기본 원리를 철저하게 익혔음을 보증해야 한다. 여기에서 ‘대답’은 외부인이 그리스도인에게 새 생명에 대해 물을 것을 전제한다. 실제로 5절의 권면이 그대로 순종된다면 그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들은 많은 경우 예측할 수 있지만, 각각의 질문하는 개인은 그 자체로 존중되고 사랑받아야 한다. 만일 ‘대답’이 신탁의 선언이나 무지에 대한 비난처럼 들려지거나 느껴진다면, 논쟁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그 사람은 잃고 말 것이다.
바울의 사고는 완전히 한 바퀴 돌아 처음으로 돌아왔다.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감사 기도(1:3이하)와 복음을 위한 그의 사역(1:24–2:5)으로 시작한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기도하는 대로 기도하고 자신이 일하는 대로 일하라는 요청으로 끝맺고 있다. 그들의 기도와 삶은-그의 기도와 삶과 같이-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지혜의 표현이어야 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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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uWives, submit to your husbands, as vis fitting in the Lord. 19 Husbands, love your wives, and wdo not be harsh with them. 20 Children, obey your parents xin everything, for this pleases the Lord. 21 Fathers, do not provoke your children, lest they become discouraged. 22 Bondservants, obey xin everything those who are your earthly masters,7not by way of eye-service, as people-pleasers, but with sincerity of heart, fearing the Lord. 23 yWhatever you do, work heartily, zas for the Lord and not for men, 24 knowing that from the Lord ayou will receive the inheritance as your reward. bYou are serving the Lord Christ. 25 For the wrongdoer will be paid back for the wrong he has done, and there is no partiality. 
Masters, treat your bondservants1justly and fairly,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uFor ch. 3:18–4:1, see Eph. 5:22–6:9
vEph. 5:4; Philem. 8
wEph. 4:31
x[Eph. 5:24; Titus 2:9]
x[See ver. 20 above]
7Or your masters according to the flesh
yver. 17
z[Philem. 16]
a[Eph. 6:8]
b[1 Cor. 7:22]
1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 see Preface; likewise for servantin verse 1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3:18–4:1.

바울은 3장 전반부에서 제시한 새사람으로서의 가치관을 이제 실제적인 삶의 영역에서 명확하게 제시하고 적용하고 있다. 3:15-17에서 평강을 위해서 한몸으로 부름받았고 감사하는 자가 될 것을 명령했는데 이 평강을 삶의 실제속에서 적용할때 우리에게 어떤 삶이 요구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일반 영역에서 스토아학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의 토대를 자연법칙에 두었다면 바울은 그리스도가 너희를 해방시켜 참된 인간이 되게 하셨기에 이제 참된 자아를 하나님의 모범에 따라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 이 당시 이교도와 유대인들이 일면 이와 유사한 가정 규례를 편찬한 것은 사실이다.65)그러나 이는 바울이 널리 퍼져있는 당대의 윤리 기준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기독교 윤리와 세속적 기준은 거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감각을 타고 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롬 1:32; 2:1–16), 그 형상을 마땅히 얻어야 할 영광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3:10) 삶의 규례를 위해 모든 비기독교적 가치를 배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례 역시 교회 바깥 세상에 있는 최상의 윤리 위에 그 토대를 둘 수 있고, 또 그것을 통해 윤리적으로 성숙해질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예를 들면, 로마서 12:9과 13:1–7의 내용을 볼 때 분명한 것은 바울이 비그리스도인 사회에서 불필요한 불법행위를 자행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선’과 ‘악’의 일반적 기준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울과 당대 이방인들 사이의 차이점은 그 유사점만큼이나 명백하다. 바울은 단지 ‘주 안에서’라는 표현을 첨가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가족 구성원의 의무와 책임의 균형을 세심하게 유지함으로써 그 규례들을 철저하게 기독교화 했다. 그 결과, 보다 강한 측이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가지고 있으며, 복종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의무와 함께 권리도 지닌 책임 있는 인간으로 대우 받게 된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3:5–14에 제시한 기준들을 실제적 삶의 한 영역에서 보다 더 선명하게 적용시킨다.
사실상 앞에서 갓 그리스도인이 된 골로새 교인들에게 현 세대를 따라 살지 말라고 경고한 바울이 여기서 바로 그것을 요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에 언급된 가정규례 목록과 가장 가까운 목록을 제공하는) 스토아 학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의 토대를 자연 법칙에 두었다. 그들은 이것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고, 따라서 이것이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야 할 방식이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바울은 권면의 근거를 새로운 자연 법칙에 둔다. 즉, 그리스도가 너희를 해방시켜 참된 인간이 되게 하셨음으로 너희는 이제 너희의 참된 자아를 하나님의 모범에 따라, 즉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65)이 점에 대해 상세한 내용과 참고 문헌은 Lohse, Schweizer 또는 O’Brien의 주석에서 찾을 수 있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18–220.

본 9절에서 바울은 7번에 걸쳐서 “주(the Lord)”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빛과 그분의 가르침안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관계속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주께 하듯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시절 주어진 이 명령을 좀더 면밀히 겈노해보면 세속사회와 신자들 사이에 가족 규범데 대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바울은 기독론적으로 주안에서 마땅하기에(18절) 또한 종말론적으로(기업의 상을 주로부터 받을 것이기에, 24절) 순종해야한다고 요청한다. 그의 이유는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백성의 평등주의는 유대주의나 로마사회의 위계나 가부장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곳에 사람들은 그들의 위치나 역할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라고 평가되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으며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새로운 존재 감각과 새로운 행함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복종하거나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비신자들보가 신자들에게 더 다른 것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공동체 안에서 뚜렷하게 고결한 삶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가르치는 바울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가정의 규칙과 같은 의도로 동참하지 않으면 그들은 악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부패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 With closer scrutiny, however, we should find critical differences between the secular and Christian worlds and between their codes for family conduct. For example, Paul calls his readers to observe his code for reasons that are both christological (3:18: as is fitting in the Lord)and eschatological (3:24: you will receive an inheritance from the Lord).That is, his reasons are religious and not societal. Further, the egalitarian sociology of God’s people (see 3:11) is radically different from the hierarchy and patriarchy of the Jewish and Roman worlds. Where the new age has dawned in Christ, people are valued as equals regardless of their station or role. The believer’s way of seeing has been transformed by divine grace, and this renewal of the mind has resulted in a new sense of being and a new capacity for doing. In this sense, then, calls to submit to or love another mean something very different for the believer than for the nonbeliever. In fact, Paul, who teaches that God’s grace works within the community to produce a distinctively virtuous life (3:12–17), would no doubt argue that without our participation with Christ in God’s saving work the intent of such household rules is corrupted so that they produce only vice (see 3:5–9).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8.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면을 통해 기술한 것들
첫번째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은 그리스도가 왕좌에 계신 위의 것에 대한 생각에 적절히 동기부여된다. 
두번재 기독교의 도덕성은 새창조 안에 자리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 안애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은 감추어진 믿음의 공동체가 규정하는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증언한다. 
- Paul’s general concern stems from the deeper logic of his gospel, introduced in the opening thanksgiving: ideas about God are embodied in action toward others, and only the truth about God’s grace can produce holiness and peace in human lives. In this light, Paul has made three critical points in his description of the Christian life.
First, Christian morality is properly motivated by mindfulness of the “things above,” where the enthroned Christ is found (3:1–4). When people confess Christ’s lordship over all creation (1:15–20), they will resist the separation of morality into compartments, one spiritual and the other material. The values of God and the norms of God’s reign, which Jesus incarnated during his messianic mission, inform all spheres of the church’s conduct. In this sense, the believer’s public conduct, whether in word or deed, will be at odds with the values of the secular order, whether at work or at home.
Second, Christian morality is set within the new creation (3:9–10), an egalitarian community (3:11), which has “put to death” by God’s grace all vices that result in death rather than life and therefore undermine God’s purposes for creation.
Third, the new life that characterizes the faith community now hidden with Christ in God (3:1–4) bears witness to God through Christ by word and deed (3:12–17).
The Christian family is the proving ground for life in Christ. If the gospel about Christ has been accepted and the truth about God’s grace affirmed, relationships within the home will be transformed. There, where intimacy is sought and goodness expected behind doors closed to the pressures of the secular order, our truthfulness in public confession will be found out. Paul no doubt realizes that what happens in the home validates what has happened in the heart.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8.

18절) 아내들을 향한 명령 :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그리스도인 아내들은 남편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것을 명령받는다. 이 복종은 마치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의 부분으로 드리는 복종과 같다. 문화적 관습은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하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배우자의 필요를 준중한다고 가정한다.(고전 7:2-5)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대해 복종하는 예배와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에 참여할 것이 기대된다.
- Christian wives are voluntarily to put themselves under the authority of their husbands by treating their submission as part of the service they owe to Christ. Cultural conventions must be examined through the prism of Christ to determine if they are “fitting” or unfitting for a Christian. Elsewhere, Paul assumes that Christian marriage entails deference to the needs of the spouse in different situations (1 Cor 7:2–5). All Christians are expected to engage in submissive service to God (Jas 4:7) and to others (1 Pet 4:10).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3.

본문의 남편에게 복종하라에서 복종이라는 단어가 많은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가부장적인 이들모두 이에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안에서 마땅한 바가 무엇인지 알고 이것에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께 복종하셨는지를 아는 그리스도인들, 제자도를 따르는 삶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종과 사랑을 알지 못한체 아내나 남편에게 이를 요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여성이나 남성 모두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승리가 선포되었다. 이 하나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땅 가운데서 악에서 선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혁을 경험하는 경험하는 것이다. 본절들에서 구체적으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어떻게 실현되고 경험되어져야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절) 남편들을 향한 명령 :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절) 자녀들을 향한 명령 :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 

21절) 아비들을 향한 명령 :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낙심할까 하노라. 
무엇이 자녀를 노엽게 할까? 일관되지 않은 훈육방법, 지속적인 잔소리, 자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고 경시하는 태도이다. 요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는 도구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시험을 못보면 학대를 하는 부모들도 있다. 자신의 자녀를 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 이러한 태도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태도이다. 부모들은 자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야만한다. 자녀의 순종의 부모의 사랑의 조건이어서는 안된다. 자녀가 순종하지 않더라도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만 한다. 

22-25절) 종들을 향한 명령 
22절)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 일할 때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이 보고 있을때만 일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성실하게 일 해야만 한다.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어떤 일들은 시시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허락된 모든 일이 주님께 대한 예배의 행위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한다. 그 일에 대한 보상이 이땅에서이 성공이나 인정이 아니라 주께서 허락하실 기업의 상인 것을 주목하라. 이 기업은 단지 이땅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다. 

24절) 하늘의 주인이 우리들에게 상을 주실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하듯 하는 이 태도로 우리는 이땅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기업의 상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본문의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를 명령문으로 해석해서 “너희는 참된 주인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하라”라고 해석 할 수 있다. 

25절) 앞이 명령처럼 누군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면 아무리 일해도 보상을 받지 못할까봐 혹은 눈가림만하는 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에, 불의를 행한자는 보응을 받고 선을 행한 자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22-25절의 종들에 대한 명령은 앞선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들에 대한 명령과 약간 결을 달리한다. 위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시로부터 부여하신 관계인데 반해서 노예제도는 창조로부터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죄악된 인간의 행동이다. 하지만 당시 로마시대 모든 도시에 노예제도는 일반적이었고 골로새에도 많은 노예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노예들에 대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당하여 주께하듯 할 것을 명하면서 또한 그들을 존중하며 대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빌레몬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노예와 주인과의 관계는 없기에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적용해 볼 수 있다. 
- Slaves, obey in everything those who are your earthly masters. The relationships between husbands and wives and parents and children are ordained by God from creation. Hence, Paul’s instructions on marriage represent the perfect will of God. Slavery, on the other hand, is something created by human beings and does not represent God’s will from creation; the Scriptures regulate the institution without commending it (see notes on 1 Cor. 7:21; Eph. 6:5; 1 Tim. 1:10), and the evil of trafficking in human beings is condemned in the NT (1 Tim. 1:10; cf. Rev. 18:11–13). As in any other city or village in the Roman world, there would have been many slaves at Colossae; Paul treats them with dignity and appeals to them directly to honor Christ in their hearts, work, and behavior. Philemon (see the book of Philemon) was one of the slaveholders who lived in Colossae. Slaves should work heartily, not primarily to please their earthly masters but as if they were working for the Lord. The principles of Col. 3:22–4:1 apply to employers and employees toda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9.

우리는 노예제도에 대한 바울의 권고를 들으면서 바울이 노예제도를 눈감아 준것 아닌가하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바울은 이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믿는 주인과 노예들로 하여금 주안에서 서로간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땅에서의 여러가지 구조의 문제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부분들은 그 시기에 허용된 것들이 있을때 우리 믿는 자들은 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시대의 구조적인 문제들, 빈부의 격차나 부동산의 문제등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질서속에서 허용된 것이라면 소극적으로는 그 구조 안에서 믿는자로서의 대안적 질서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좀더 적극적으로 근본적인 구조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폭력이 아닌 변화의 노력이 요구되어 진다. 


1절) 상전들을 향한 명령 :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라.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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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dPut on then, as eGod’s chosen ones, holy and beloved, fcompassionate hearts, gkindness, hhumility, meekness, and patience, 13 hbearing with one another and, iif one has a complaint against another, gforgiving each other; gas the Lord has forgiven you, so you also must forgive. 14 And above all these put on jlove, which kbinds everything together in lperfect harmony. 15 And let mthe peace of Christ rule in your hearts, to which indeed you were called nin one body. And obe thankful. 16 Let p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teaching and admonishing one another in all wisdom, qsinging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rwith thankfulness in your hearts to God. 17 And swhatever you do, in word or deed, do everything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t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dver. 10
eRom. 8:33
fPhil. 2:1
gEph. 4:32
hSee Eph. 4:2
h[See ver. 12 above]
iMark 11:25
g[See ver. 12 above]
g[See ver. 12 above]
j[1 Thess. 5:8]; See Eph. 5:2
kEph. 4:3
lHeb. 6:1; [John 17:23]
mSee Phil. 4:7
nEph. 2:16
over. 17
pJohn 15:3
qSee Eph. 5:19
rch. 4:6
sver. 23; 1 Cor. 10:31
tch. 1:12; 4:2; See Eph. 5:20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3:12–17.

여기에서부터 분위기가 부정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바뀐다. 마치 뽀얀 안개를 뚫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도 같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옛 생활방식을 포기하라고 촉구한 동일한 동기가 이번에는 그들에게 새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하는 동기가 된다. 이런 연유로 바울은 그의 전형적인 표현인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권면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새 사람(3:10)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이다. 이전에 육을 따라 이스라엘에게 붙여졌던 명칭이 이제는 교회로 이전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기 위해 ‘구별하여’(이것이 ‘거룩한’의 기본 의미이다) 자신의 백성 삼으신 것이 그들의 선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은혜 때문이고, 그들이 사랑받기에 합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의 사랑 때문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단언하셨다. 여기에 언급된 여러 명칭들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 그 분은 ‘택하심을 받은’ 분(벧전 2:4, 6)이요, 거룩한 분(요 6:69; 행 4:27, 30 등)이시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분(마 3:17; 엡 1:6 등)이시다. 그 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12–17절에는 앞에서 언급된 기독론 부분이 반영되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여기에서 적용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10–211.

12-14절) 앞부분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릴 것을 강조했다면 이네 거룩 한 새사람으로서 어떤 옷을 입어야할 지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이 택하심으로 거룩하고 사랑을 받는 자들은 어떤 성품과 가치를 따르고 행해야 할 것인가. 
  • 긍휼(스플랑크나 오이크티르모우, compassionate hearts) : 스플링크나는 사람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나타낸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와 타인에 대한 공감을 나타내는 단어가 조합된 것이다. 
  • 자비(크레스토테스, kindness)는 선함, 너그러움이라는 의미로 친절, 자비로 번역되었다. 이 친절은 타인을 향한 그리스도적인 태도이다. 
  • 겸손(타페이노프로시네, humility)는 자기 자신을 향한 그리도적인 태도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포기하시고 성육신 하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보이신 그 덕목이다.(빌 2:5-11)
  • 온유(프라우테스, meekness) : 그저 힘이 없는 유약함이 아니라 통제된 힘이라는 의미로 본문에서는 타인에게 접근할 때 필요한 부드러운 겸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인내(마크로티미아, patience)는 타인의 반응에 대처하는 겸허한 친절, 자비의 산물이다. 

- The virtues listed in Colossians include words that carry a profound emotional content referring to how one feels when responding to another in need. Luke uses the word compassion (splanchna)to characterize the good Samaritan’s sympathetic response to his needy neighbor (Lk 10:33) and again for the forgiving father’s happy reaction to his prodigal son’s return home (Lk 15:20). Holiness is not exclusively defined by acts of private devotion; rather, it pertains to public occasions when the community can express its status as God’s chosen people through concrete responses to those who are last, least, lost and lame among us. For Paul, our personal salvation is always embodied in our public relationships (see Eph 2:11–22).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2.

12절의 다섯가지 덕목을 웨슬리는 “사회적 거룩함”이라고 불렀다. 
- Paul himself seems to have specific situations in mind for practical application. First, how does a congregation of believers, made holy by God’s grace, respond to a troubled relationship in which each tends to revert to “vice,” maintaining grudges and fueling old rivalries? To bear with each othermeans to “put up with” persons who rub us the wrong way. This does not suggest that we are simply cordial towards difficult neighbors in a detached way; rather, Paul calls us to be vulnerable to grace in order to achieve newfound intimacy where hostility once existed. Indeed, the measure of divine grace is what Wesley called “social holiness.”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nd patienceare the very characteristics of the congregation’s life.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2.

바울은 13절에서 타인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고 용서할 것을 요청한다. 그것의 기준과 근거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용서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자 행동이다. 먼저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용서를 받은 경험이 있는 자들로 그 기쁨을 아는 이가 그 기쁨을 나누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행위일 뿐만 아니라 내가 용서해야할 대상에 대해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이 내가 용서해야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불만이 있는 관계에 있는 그 사람까지도 용서하셨다. 

14절에서 우리가 입어야할 여러가지 덕목, 옷중에 가장 위에 입어야할, 마지막 입어야할 옷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기독교의 여러 덕목중에 최고의 위치에 있다. NIV와 ESV는 본문을 이렇게 번역한다. 
“이 모든 것(덕목) 위에 사랑을 입으라. 이는 모든 것을 완벽한 연합(조화)되게 묶어준다."
(Col 3:14, NIV11) 『And over all these virtues put on love, which binds them all together in perfect unity.』
(Col 3:14, ESV) 『And above all these put on love, which binds everything together in perfect harmony.』
사랑은 모든 것을 묶어주고 조화를 이루게 하는 덕목이라는 것이다.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노래한 것처럼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것이다. 

바울의 완전함에 대한 생각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함은 도덕률 형성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회의 연합은 도덕적 성숙의 결과이다. 이처럼 온전한 연합은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한다. 
- Lohse interprets this summary phrase to mean that love produces a moral perfection that distinguishes those who endure to the end and receive salvation at Christ’s return (1971:148–49). Yet Paul’s idea of perfection is not ethical (as it is perhaps for Matthew—see Mt 5:48) but eschatological. That is, perfection is not so much the goal of moral formation, so that the church’s unity with God is the result of moral maturity. Rather, perfect unityis a property of God’s grace, which perfectly unites the church “with Christ in God” (3:3) and prepares it for Christ’s return (1:22, 28). Of course, Paul’s Jewish opponents at Colosse challenge this definition; they see Christianity, like Judaism, as an ethical monotheism, and they believe that moral perfection is required by God. Against them, then, Paul’s exhortation to put on lovepresumes a different moral calculus: loveis the fruit of faith in Christ (3:1–4) rather than compliance with codes constructed by human tradition (2:20–23; compare 2:8).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4.

15절)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몸으로 부름을 받았다.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본문에서의 평강(에이레네)는 내적, 외적 평안의 상태를 모두 말한다. 앞선 평강이 구원받은 자로서 누리는 평화의 상태라면 평강을 위하여 한몸으로 부름을 받았다라고 말할때의 평강은 공동체의 특징으로서의 평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사랑이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효력을 발휘할 때 평강(평화)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왜냐하면)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의 지체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에 나오는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RSV는 좀 더 문자적으로 이 부분을 ‘평강’을 선행사로 하는 관계대명사절로 이해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름 받은…평강’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여기에 언급된 ‘평강’이 하나님의 사랑을 겸허하고 확고하게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내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몸’으로서의 공동체의 특징인 그 평화임을 지적해준다. 여기에서 ‘한 몸’이란 교회를 그의 ‘지체들’(members, 이런 이유로 NIV는 이 단어를 보충하고 있다)이 조화롭게 행동해야 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이해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바울이 1:18; 2:19의 경우처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는 사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교회의 특징인 평강은 단순히 외적 적대감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너희 마음’의 결정적 요인(‘지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아마 심판이나 중재자로 활동하는 누군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이 되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의견충돌이나 상호 간의 의심이 있든지 간에 모든 문제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즉 모든 당사자들이 진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바울 당시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가 전 세계에 퍼져 제국의 주민들이 전쟁의 위협 없이 각자의 소명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 같이, 팍스 크리스티아나(Pax Christiana, 그리스도의 평화)가 교회 안에 널리 퍼져야 한다. 이러한 교회 생활에 대한 비전 때문에 바울은 다시 한 번 또한 감사하라는 말을 덧붙인다(1:3, 12 등을 참조). 사랑, 평화 그리고 감사는 서로를 보강해주고, 다음 절에 나오는 권면들에 순종해야 할 배경을 형성한다.
RSV The Revised Standard Version: Old Testament, 1952; New Testament, 21971.
NIV The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Old Testament, 1978; New Testament. 21978.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14–215.

- As love between people must reign in the faith community, so also must the peace of Christ rule in your hearts.According to Jewish psychology, the heart is the location of volition; one’s entire life is guided by what takes place in the heart. If the peace of Christrules the heart, then every decision made and every action taken will have the quality of peace. Yet Paul expresses this prayer for peace as a corporate prospect: as members of one body you were called to peace.So love characterizes the community’s public life, and peace characterizes its internal life. This being so, every collective decision and action that comes from the community will have the character of peace.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5.

- But what does Paul mean by peace?First, peace comes from the Lord Christ and conforms to the results of his death and resurrection. Paul uses the same root verb for rule (brabeuō)that he earlier used of the spiritual umpire who has threatened to “disqualify” (katabrabeuō)any convert who fails to observe ascetic religious practices (2:18). The result in this case is moral and spiritual frustration (2:22–23). In sharp contrast to Paul’s opponent, Christ’s spiritual umpiring promotes peace within the community. Second, the meaning of peacecomes from its Old Testament use. While Paul elsewhere speaks of the spiritual and interior dimensions of shalom(Rom 5:1–11), the biblical prophets used it as a comprehensive word for God’s full transformation of the covenant community’s situation. God chooses Israel for salvation (v. 12) and calls Israel to peace. Thus, when Jeremiah, with whom Paul closely identified, denounced the false prophets of Israel, he claimed that their teaching could not produce peace and should be viewed as “deceptive words” or “lies” (Jer 7:4–8; 23:14). Truth produces peace, while lies produce spiritual and moral frustration.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5.

16-17절) 앞서 1:28절에서 바울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치는” 역할을 말한 바 있다. 본문에서는 피차 가르치며 권면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첫째로 가르치며 권면하는 사역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경으로 조금 협소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 복음서의 이야기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행하고 선포하신 말씀이다. 
둘째로 이러한 가르침과 권면의 사역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이루어져야한다. 
이 시대는 감각적인 시대이다. 보기에 좋은 것에 끌린다. 힘겨운 제자훈련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고 예배는 엔터네인먼트가 되었다. 이 시대의 이러한 분위기,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 아래 위치해야 한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분의 승인하에, 그분을 권한을 위임받아 그분을 대표하여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행할 때 그분의 대리인으로 위임받은 권한과 능력으로 행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독재를 행할때 우리는 그것이 옳지 않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그들을 뽑아준 국민의 의견을 대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해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명을 주셔서 사명을 맡겨주셨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무언가를 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되고 그분의 이름과 권위, 명성에 해가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해 있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에게 돌아가기에 우리들은 무엇을 하던지 그것이 학업이던, 가정에서의 부모나 자녀로서의 역할이던, 직업 현장에서 노동을 하던 상업활동을 하던, 책을 읽던, 운동을 하던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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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ut to death therefore kwhat is earthly in you:2lsexual immorality, impurity, mpassion, evil desire, and covetousness, nwhich is idolatry. oOn account of these the wrath of God is coming.3pIn these you too once walked, when you were living in them. But now qyou must put them all away: ranger, wrath, malice, sslander, and obscene talk from your mouth. tDo not lie to one another, seeing that uyou have put off vthe old self4with its practices 10 and whave put on xthe new self, ywhich is being renewed in knowledge zafter the image of aits creator. 11 bHere there is not Greek and Jew, circumcised and uncircumcised, barbarian, Scythian, slave,5free; but Christ is call, and in all. 
jRom. 8:13; [Gal. 5:24]
kRom. 6:13
2Greek therefore your members that are on the earth
lSee Eph. 5:3, 5
mRom. 1:26
n[Job 31:25, 26]
oSee Eph. 5:6
3Some manuscripts add upon the sons of disobedience
pSee Eph. 2:2, 11
qSee Eph. 4:22
rEph. 4:31
sSee Eph. 4:29
tLev. 19:11; See Eph. 4:25
uch. 2:11
vRom. 6:6; Eph. 4:22
4Greek man; also as supplied in verse 10
wEph. 4:24
xSee Rom. 6:4
ySee Rom. 12:2
zSee Rom. 8:29
a[Eph. 2:10]
b[Rom. 10:12]; See 1 Cor. 12:13; Gal. 5:6
5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 see Preface; likewise for Bondservantsin verse 22
cEph. 1:2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3:5–11.

차가 오래되어서 고장나서 움직이지 않을 때 단지 겉에 페인트칠을 다시 한다고 해서 차가 작동하지 않는다. 녹슬어서 작동하지 않는 주요 부품들을 바꿔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고장난 옛 것을 제거하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그를 위해서 죽고 벗어버려야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서 새사람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다. 
- When someone restores an old car, it is not enough to simply paint over the rust. Even if the paint is of highest quality, the rust will soon reappear and if not quickly treated will destroy the car’s body. The rust must be removed and rusted parts replaced before the car is painted.
God’s grace is similar in that it enables us to get rid of “the old self” before restoring our capacity to live in accord with the Creator’s intentions. This is the logic of conversion; and that logic is envisioned by this passage, which casts its first ethical exhortation in negative terms: put to deathimmorality and rid yourselvesof it. Sin is where God’s grace begins its work by rescuing sinners from the “dominion of darkness” and its destructive ethos. And those who have died and risen with Christ to a new life (3:1–4) have already put to death those things that are opposed to that life (compare Rom 6:4–11). The moral imperative, then, is to become what one has already become in and with Christ. In negative terms, if vice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then vice must be crucified by those in him.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5.

5절) 땅에 있는 지체, 우리의 몸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죄악된 행동들을 제거할 수 있고 제거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말은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심각한 수단들을 동원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먼저는 이러한 죄를 주의하고 기도해야할 것이고 나아가 자기 훈련이 따라야 한다. 
본문의 음란함은 ‘포르네이아’로 결혼 관계 밖에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성적인 행위들을 의미한다. 
- Put to death. Because believers have died with Christ (2:20; 3:3), they can get rid of sinful practices (Rom. 6:11; 8:13). The language of putting to death indicates that Christians have to take severe measures to conquer sin. Watchfulness and prayerfulness against it will be the first steps (see Matt. 26:41), with self-discipline following (Matt. 5:29–30). Sexual immorality(Gk. porneia) refers to every kind of sexual activity outside of marriage. Five of the items that Paul lists have to do with sexual purity, stressing the importance of bringing this area of life under the control and lordship of Christ. which is idolatry. Greed, sexual sin, and other vices can intrude into one’s relationship with God, taking his place as a focus of devotion.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8.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로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위의 것을 찾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땅에 지체를 죽일 것을 명령한다 이는 죄 안에 거하는 우리의 지체를 혹은 죄에 대해서 죽을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땅에 있는 지체, 옛 것은 다시 새로와지거나 변혁될 수 없고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반드시 우리의 옛 삶의 흔적, 예를 들면 가치나 관습, 행위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도말시켜야 한다. 혹시 내안에 죽여야할 것들을 죽이지 않고 몰래 쌓아 놓고 있는 것들은 없는지?? 
- It means that they are to unite with the transforming divine power working within them. One is either dead insin (2:13) or dead tosin (Rom 6:11). The old nature is not renewed or reformed; it is “put to death.” Believers are to eradicate any persisting marks of the old life: its values, customs, and practices. These are summarized as “idolatry,” putting something else before God (e.g., sex, money, power) and wanting more and more of these things.
e.g. for example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2.

- 바울은 이 ‘지체’라는 말을 마태복음 5:29–30; 18:8–9의 경우처럼 생생한 은유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 열거한 행위들은 외과의사의 눈에는 괴저에 걸린(gangrenous) 지체와 같아서, 사람의 온 몸을 오염시키기 전에 제거해야만 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0–201.

탐심은 우상숭배이다. 
 죄는 유혹으로 마음에 떠오른 불법적인 성적 만족감(gratification)이 즉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때 시작된다.56)이 단계 뒤에 탐심(greed)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단어는 또 하나의 일반 용어로서 여기서는 억제할 수 없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망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좀 더 특정한 악한 정욕의 온상이다. 바울은 이러한 탐심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밝힌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우상숭배가 상당 부분 여기에 나열된 악덕의 배경이 되었지만, 그것은 다만 근본 요점에 대한 실례일 뿐이다. 그러한 모든 탐심은 인간의 관심과 헌신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두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다른 길을 따르는 자들은 6절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실제로 죽음을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롬 1:21이하, 32; 6:21).
56)AV의 ‘무절제한 정서’(inordinate affection)이란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애정’이란 말이 17세기에서처럼 내적 욕망 보다는 우정과 사랑 또는 우정과 사랑의 외적 표현을 언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NEB의 ‘더러운 열망’(foul cravings)이란 번역도 너무 강하고, 따라서 그 의미를 너무 좁게 제한시킨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1–202.

6절) 땅의 지체를 죽이지 않을때, 위의 죄악된 행위들을 여전히 유지할때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의적이고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다. 도리어 모든 악에 대한 참된 공의와 거룩, 그리고 선의 필연적인 반응이다. 
- 사실상 파멸은 그 경고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결과로 주어질 것이다.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57)하나님이 그러한 행동들을 괜히 싫어하시고, 그래서 말하자면 기분 내키는 대로 벌주고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결코 악의적이고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다.58)오히려 그것은 온갖 종류의 부정과 착취, 그리고 모든 악에 대한 참된 성결과 공의, 그리고 선의 필연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진노는 죄 자체의 추잡하고 더러운 결과로 말미암아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한다(롬 1:18–32). 그러나 그 과정은 진노의 전부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까지 이어진다(롬 1:32; 2:1–16을 참조). ‘임하고 있다’는 말이 미래적 측면을 강조할지라도, 골로새서 3:6의 현재시제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지니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두 측면을 표현한다. 계속해서 하나님 대신에 죄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자신의 선택으로-어떤 가망이나 연민의 여지없이-완전히 말살시키고 있는 현상 자체가 미래에 겪을 지옥 공포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57)대다수의 사본에는 엡 5:6의 경우처럼 ‘불순종하는 아들들에게’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말을 붙이게 되면 7절에 나오는 ‘in them’과 ‘in these one’s(엔 호이스[en hois]와 엔 투토이스[toutois])가 각각 다른 선행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 말을 생략하여 이 둘 모두 6절의 ‘이것들 때문에’(디 하, di’ ha)를 받는 것으로 보는 것 보다 더 낫다(O’Brien, 173에 반대하여 Metzger, 624이하를 보라). 그렇다면 6–7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들 가운데(엔 호이스, en hois) 살 때에는 이런 식으로(엔 투토이스, en toutois) 살았다.’
58)‘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드는 행위이다’로 번역한 JB 참조.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2–203.

7-8절) 전에 그 가운데 살때는 그 가운데 행했으나 이제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본문에 그 가운데서 행하다라는 단어는 ‘페리파테오’라는 단어로 걷다라는 의미를 갖지만 일반적으로 행하다라는 단어로 번역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살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걸음으로 어디에 서있고 걸어가는지가 우리의 존재,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혐오감을 주는 죄를 의식적으로 선택하기보다 부지중에 알지 못하는 죄에 빠지기가 훨씬 쉽다. 3:8에 열거된 것은 또 하나의 추악한 악덕 목록이다. 분함(anger)은 미움이 계속해서 꺼지지 않고 끓어오르는 상태를 말하고, 노여움(rage)은 이러한 상태가 실제적으로 분노의 행동이나 말로 터져 나올 때 생겨난다. 악의(malice)는 헬라어로 단순히 ‘악’(evil)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한 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비방(slander)은 그 악의를 실행에 옮긴 말을 의미하고(헬라어 블라스페미아[blasphēmia]는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말을 의미하지만,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욕설을 퍼붓는 말로도 확장된다), 부끄러운(더러운) 말(filthy language)은 불결한 생각이나, 모욕적인 의도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동시에 더럽히는 말을 가리킨다. 이 모든 것들을 너희 입술에서 벗어버려야 한다. 분노와 미움의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항상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생각들이 말로 튀어나오기 전에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 간혹 제안되는 것처럼, 그러한 생각들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건전한 태도’가 아니다. 정말로 건전한 태도는 자신의 분노나 좌절을 인정하고 직면하여 그것을 창의적이고 적절하게 다루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말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거나 울분을 발산시키는 통로가 아니다. 말은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치유하기도 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야생식물처럼 미움의 말은 그 씨를 멀리 또 넓게 흐트러뜨려, 그것이 떨어지는 곳 마다 더 많은 분노를 싹트게 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5–206.

9-11절) 서로 거짓말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 마다 거짓말의 유혹을 받는다. 왜냐하면 때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편하거나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악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덜 거북한 관계를 위해서 거짓말의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하지 않은 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사람을 입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이 행동은 헬라어의 과거 분사의 형태로 기록되어있다. 이는 이미 이루어진 일로 반복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 바울은 여기서 헌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는 친숙한 세례의 표상을 통해 소속의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헬라어 본문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다’는 말은 헬라어로 과거 분사로 되어 있어 반복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행동을 가리킨다). 옛 사람은 아담의 후예들과 결속되어 있다(롬 5:12–21과 6:1–7:6을 참조). 새 사람은 참된 인간이신 메시아 안으로 편입되어 그 분을 본받는 사람들과 결속되어 있다(다시 한 번 롬 5:12–21; 6:1–7:6을 참조). 그러므로 이러한 새 사람은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졌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신 그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1:15–20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창조의 목적은 구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면 구원은 새 창조로 이해된다. 바울이 1:9이하의 기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새로움은 외적인 행위뿐만 아니라-그 전에 필요한-지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지식에까지’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지식 안으로’(into)를 의미하며, 앞에서 언급한 새로움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아마도 선과 악에 대한 지식도-(그 결과로) 생겨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천적 기독교의 토대는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진리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 진리가 토대이기 때문에 진리는 또한 전체 구조로도 입증된다. 바울이 권하고 있는 윤리는 개인과 공동체의 안정과 통합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 자체로 정당성이 입증된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7–208.

11절) 거기에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하심을 믿은 자들안에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만유시요 만유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헬라인 vs 유대인
할례파 vs 무할례파
야만인 vs 스구디아인
종 vs 자유인
바울은 지금 이러한 차별이 일상화 되어 있는 고대 사회속에 커다란 폭탄을 던지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바로 만유시기에 또한 모든 존재들안에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만유이시고 만유안에 계신다라는 고백은 앞선 골 1:15-20을 상기시킨다. 

복음은 인종, 종족, 국가, 계급과 같은 모든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무너뜨려야만 한다. 

- Here there is not Greek and Jew. There are no status distinctions among the new covenant people of God (cf. Gal. 3:28). No one has a special claim on God or is treated with less dignity than any other. Scythian. This was a people group located along the northern coast of the Black Sea. To the Greeks, the Scythians were a violent, uneducated, uncivilized, and altogether inferior people. In contrast to such discrimination and prejudice against other   p 2299  races and cultures, Paul shows that Jesus, who is all, and in all, binds all Christians together in equality, irrespective of such differences.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8–2299.

골로새 교인들이 편입되어 있는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는(‘거기에는’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가족이라는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이 여기에서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할례를 받은 자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없다. 이러한 다채로운 인종과 선조의 종교, 계급과 계층의 구별은 3:8에 열거된 악덕들의 씨앗인 상호 의심과 불신이 조성되는 가장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고대 세계에서 이러한 구별은 매우 중요했다.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 후 헬라 문명의 보급으로 ‘헬라인’은 그리스 본토 출신은 물론이고, 이집트, 소아시아 또는 그 밖의 어떤 지역의 출신이든 자신을 문명 그룹의 멤버로 간주할 수 있었다. 이는 현대의 많은 지역에서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다소간 유사성이 있다. 헬라인은 옛 문화를 보존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유대인의 할례 민족주의를 무시했을 것이고, 유대인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민사상과 헬라 다신교의 얄팍함과 도덕적 타락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터라 헬라인을 경멸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유대인 남성의 신체적 표시에 의해 강조되었다. 즉, 할례는 이스라엘 내에서는 칭송받았지만, 그 적대자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야만인’(barbarians)은 헬라인이 자기 말을 사용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경멸의 표현이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북쪽 지역 출신의 ‘스구디아인’은 미개인(savages)과 별로 나을 것이 없는 야만인의 극단적인 예였다. 물론 종과 자유인의 구별은 오늘날에도 (공식적으로 승인되든 안 되든) 흑인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여 인간관계와 자존감에 해를 끼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세계 속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현대 세계와 마찬가지로 고대 세계 역시 편견과 의심, 교만이-자연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인 양-깊이 뿌리내린 정교한 네트워크의 세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울은 이러한 구별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고 선언한다. ‘이 세상의 세력들’이 사실상 인류를 장악하고 있어서 인류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의제(agenda)로서 교회 앞에 내세운 바울의 반론은 이러한 장벽과 생활방식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뜻에 전혀 부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구별은 전혀 정상적인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 창조를 부인하는 태도이다. 물론 이 말은 (갈 3:28에 나오는 목록에서 남녀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차이 자체가 소멸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개인이든 공동체든 간에 배경과 국적, 피부색, 언어, 사회적 지위 등의 차이로 인해 어떤 불이익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all)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이 말은 1:15–20을 반영하는 또 하나의 진술인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는 차별이 없다는 교훈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우주적 의미 안에서 찾는다.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것’(또는 ‘전체’[the totality])60)이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분은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문명인이든 야만인이든, 고귀한 자든 비천한 자든) 인간 본성의 모든 범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바울의 꽉 찬 기독론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사이에 어떤 장벽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이 교훈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 계시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 안에’ 계시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이는 헬라어 엔 파신[en pasin]을 남성으로 보는 경우이다. 이 말을 중성으로 해석하면 앞의 것과 중복되는 느낌이 들므로 문맥상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사람을 어느 면에서 보든 그리스도를 본다. 나이 든 사람을 무시하면,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다. 사랑스런 십대가 모욕을 당하면 그리스도가 모욕당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유색인(반대로 부자나 백인)이 경멸당하면, 그 경멸은 그리스도에게 떨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내에는 상호간의 환영과 존중이 있어야만 한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지녔던 편견을 가지고 하나님이 새 사람(New Man)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신 새 사람(new humanity)을 왜곡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빌레몬서가 이러한 신학의 좋은 실례를 다시 한 번 제공해 줄 것이다.
60)한편으로는 좋은 사본 상의 증거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미는 분명하지만 필사자가 생략하는 것이 더 쉬운 읽기이므로 헬라어 정관사 타(ta)를 붙이는 것이 더 낫다.
 N. T. 라이트, 골로새서·빌레몬서, ed. 박상민 and 진규선, trans. 이승호, 초판., vol. 12,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서울시 서초구 방배로 68: 기독교문서선교회, 2014), 20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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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 then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seek cthe things that are above, where Christ is, d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eSet your minds on things that are above, not on things that are on earth. For fyou have died, and your life is hidden with Christ in God. When Christ gwho is your1life happears, then you also will appear with him iin glory. 
bch. 2:12
c[Phil. 3:14]
dSee Eph. 1:20
eSee Matt. 16:23
fch. 2:20; See Rom. 6:2
gSee John 11:25
1Some manuscripts our
h[Phil. 3:21; 1 Pet. 1:1, 7, 13; 1 John 2:28; 3:2]
i1 Cor. 15:4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3:1–4.

앞선 2장의 내용과 연결해보면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삶,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삶을 버리고 위의 것을 생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1-2절)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의 것을 찾으라.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나는 경험을 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위의 것을 추구할때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중보하시는 주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다. 위의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그분을 위해서 사는 것에 속한 모든 것과 그리스도 그분을 알아가는 더 깊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기본적으로 이땅을 살면서 천국을,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받는다. 
- raised with Christ. See 2:13–14. Set your minds on things that are abovecontrasts with the things that are on earthand refers to pursuing a deeper knowledge of Christ himself (Phil. 3:10) and all that belongs to living with and for him. This would include seeking first his kingdom (Matt. 6:33) and living a life worthy of his name (Col. 1:10; 2:6). Christ is presently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Ps. 110:1; Eph. 1:20) in a position of authority where he can make intercession with the Father. The false teacher may have claimed to have heavenly secrets, but Paul dismisses his theology as earthly.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8.

그리스도와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힘의 원천을 제공한다. 

하나님 우편이라는 표현은 시 110:1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권능의 상징이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포든 피조물보다 높으신 그리스도의 승귀의 상태를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귀에 그분과 함께 교회가 참여해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들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함께 나눈다. 
- The opening statement claims that the faith community has been resurrected with Christ, even as it has already died with him (compare 2:20); the believers have been raised with Christ,who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The latter phrase alludes to the Davidic Psalm 110:1, where the king of Israel is promised victory over his enemies. In this new setting, where Messiah has replaced David as King over kings, the exaltation of Christ is interpreted as his triumph over God’s archenemies—sin and ultimately death (see Rev 20:11–15). Not only does Paul reclaim the importance of Christ’s exalted status as Lord over all creation (1:15–20), but he reclaims the significance of the church’s participation with him in his exaltation: we share in Christ’s triumph over sin and death.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위의 것과 땅의 것을 가른다. 그래서 쉽게 위의 것은 거룩하고 땅의 것은 악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쉽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이 땅에 대한 관심을 희생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우리의 영적인 헌신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골로새 교회의 문제중에 천사를 숭배하거나 자신을 높이는 등의 태도들이 문제가 되었다. 땅의 것을 찾는 것도 문제이지만 위의 것을 찾는데 그 위의 것이 무엇인가가 또한 더욱 중요하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위의 것이라고 여기고 따르는 것은 더욱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 관점에서 좀더 명확하게 땅의 것의 가치와 역할을 볼 필요가 있다. 
- The apostle’s opening statement introduces the aim of discipleship: the pursuit of things above, not … earthly thingsby the proper set of our hearts and minds. This exhortation draws from Paul’s prior polemic against the confusion in Colosse about the “things above.” The Colossian philosophy’s attention is indeed set on heavenly things, but on angels rather than on Christ, supposing that they rather than he are the conduit to God. The moral result is a distorted concern for earthly things(see 2:16–23). Actually, to focus attention on Christ rather than on “basic principles” results in a truer discernment about earthly things.Paul is not asking us to forsake any interest in earthly things;to do so would result in a different version of the asceticism he has just condemned in 2:20–23. He is rather saying that when our spiritual devotion is properly focused on the Lord Christ and his unique relationship to God (as the Son who sits at the right hand of Godin heaven), we will be able to see the value and role of earthly thingsmore clearly from God’s perspective.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

바울의 가르침은 도덕적인 규칙보다 도덕적인 비전에서 나온다. 바울은 규칙을 행하는 것보다(그것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것에 더 관심이 있다. 유대교의 가르침은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매우 자세하게 묘사했다.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 기독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도덕적인 능력 없이 올바른 행동의 규범을 아는 것은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도덕적이라는 문제는 어떤 규정된 코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이다. 만약 사람이 도덕적인 성품을 가졌다면 도덕적으로 행할 것이다. 
- In my view, Paul’s ethical teaching flows from a moral vision rather than moral rules. He is less interested in “doing” codes of rules, although he provides them, than he is in “being” Christian. To be a Christian is to be able to do God’s will (see Rom 12:1–2; Eph 2:8–10). Paul was raised in an ethical monotheism, Judaism, which prescribed in great detail how to please God through one’s behavior. But his Gentile mission roots Christianity in the indicatives of God’s salvation, not its imperatives; it is a religion of divine grace, not human merit. Paul realizes that to know codes of right conduct without having the moral capacity to act on them gets us nowhere. The moral issue, then, is not whether one complies with some prescribed code but whether one is the sort of person who is able to be moral. If one has moral character, then one will act morally.
For Paul, morality is first of all being in Christ, which nurtures the capacity to see the things above. If “to seek” (zēteō)after the exalted Lord Christ envisions the “practical pursuit of spiritual goals” (Harris 1991:138), then “to set the mind” (phroneō)emphasizes the seeker’s spiritual capacity to accomplish those spiritual goals. Without being in Christ, the faith community has neither the right goals nor the transformed character sufficient to pursue God’s goals in any case.
I would contend that the genius of Paul’s ethical teaching is not the various codes he provides to describe the moral life. They contain nothing new; in fact, Paul’s Judaism offered a much more comprehensive morality than did his Christianity. Indeed, Torah had already codified God’s will. For Paul the problem is practical; it has to do with the sorts of persons we are and whether we are actually able to do God’s will. Thus, Paul’s moral innovation stems from his christological monotheism. His claim is that in Christ we not only are forgiven and redeemed by God but are also transformed into new persons, capable of knowing and doing the will of God. Nothing less than a moral revolution was triggered by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

3절) 왜냐하면 너희가 죽었고 너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 절에서 이사야와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신뢰할 때 안전함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 Paul uses the language of Isaiah and the Psalms to express the security of the people of God as they trust in him (Isa. 49:2; Ps. 27:5–6; 31:19–20).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8.
우리가 세상의 초등학문, 죄의 요구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힘은 우리를 강제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임을 받았다.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가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더 높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 혹은 이 세상의 권세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 근본 없는 복종을 할 필요가 없다. 
- you died.A reminder of what Paul said in 2:20; they died to the elemental spirits, so those forces have no power over them (cf. Rom 6:2; 7:5–6; Gal 2:19–20). hidden with Christ.A believer’s true status remains concealed to others who do not have Christian insight. Believers already belong to the higher world where Christ reigns, and they do not need to resort to baseless observances to access that sphere or to seek safety from the powers of this world. hidden.May also refer to their security; they are hidden in a safe place (Pss 27:5; 31:20; Isa 49:2).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2.

4절)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이 재림하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이미와 아직) 그리스도께서 이땅 가운데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는 시작되었다.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땅을 살지만 새로운 세상에 속한 자들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주님이 이땅가운데 다시 오시기까지 새생명은 감추어진 진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생명은 감추어짐으로 신비의 일부가 된 것이다. 

3절과 4절은 대칭 구조를 보여주는데 생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중심성을잘 보여준다. 
- The second emphasis of Pauline ethics is discerned from the literary structure of this opening passage. The christological foundation for ethics is made clear by the four explicit references to Christ in 3:1–4, all of which are located at the center of the passage. Especially important in my view is the coupling of an article with each of Paul’s four references to Christ. This grammatical strategy is quite unusual and may well stress the decisive importance of Christ for what follows (see Harris 1991:136).
The last two references to Christ in verses 3 and 4 form the center of an inverted parallelism and thereby give readers a visual aid to confirm Christ’s central importance for life:
3: (A) Your life (hē zōē hymōn)… (B) with Christ (syn tō Christō);
4: (B´) When Christ (hotan ho Christos),(A´) who is your life (hē zōē hymōn).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1.

바울은 “감추어진-드러난”의 모티브를 사용했는데 유대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성경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약속하신 우주적인 평화의 시작이 계시되는 바로 그때, 메시야의 시대가 오기까지 신비로서 감추어졌다. 
영광은 또다른 종말론적인 모티브로 위의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정한 종말(계시)를 구성한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은 인간의 죄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 이미 이루어졌다. 미래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땅가운데 하나님의 승리를 이룬 것입니다. 미래 영광의 나타남은 역사와 변혁된 삶 안에서 지구상의 그 언약의 공동체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완전한 실현입니다. 
- Paul uses the verb “to hide” (kryptō)in connection with “the mystery of God’s salvation” which God revealed to him and commissioned him to preach among the Gentiles (see 1:25–26; 2:2–3). As I said earlier regarding his use of this “hidden-revealed” motif, Paul seeks to draw attention to certain claims previously made by his Scripture. According to Jewish teaching, the plan of God’s salvation was to be kept hidden as a mystery until the messianic age, when its revelation would announce the beginning of universal peace, promised by God through the biblical prophets.
Paul’s use of hiddenhere recalls this same motif, with its implications for his Gentile mission, and vests it with moral content. Implied in what he says is that believing Gentiles are now hidden with Christ in God,further exposing the error of claiming that to become Christian the Gentile believer must also become Jewish. From other New Testament writings (especially Acts 15 and 21) we know that Jewish believers were generally concerned that Gentile converts not carry their old moral baggage into their midst, where it might corrupt their lifestyle and disqualify them from God’s blessing at Christ’s return. The Colossian error distorted this Jewish concern. Paul’s response in Colossians is that Gentile believers are with Christ in Godand therefore reside in a place other than Judaism, a place where divine grace will transform them into a new creation, capable of doing God’s will.
Paul also links his realized Christology with his futuristic eschatology. The result of participating with Christ in his death and resurrection is also [to] appear with him in glory. Glory (doxē)is another apocalyptic motif that is closely associated with heavenly existence. In Paul’s modification of Jewish apocalypticism,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constitute the true apocalypse of God’s salvation; Christ’s faithfulness has already resulted in God’s triumph over humanity’s sin and death. Christ’s future return, then, marks the inbreaking of God’s heavenly triumph upon earth; the future manifestation of glory will be the full realization of what God has promised the covenanted community on earth, within history and within its transformed life. Paul may well be offering a tacit commentary on those who are overly concerned with earthly things:the perfection of creation (earthly things) at Christ’s coming will be enjoyed by those who are vitally concerned about “heavenly things.” God’s new creation, the church, will then enjoy the best of both worlds!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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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If with Christ tyou died to the uelemental spirits of the world, vwhy, as if you were still alive in the world, do you submit to regulations— 21 w“Do not handle, Do not taste, Do not touch” 22 (xreferring to things that all perish as they are used)—according to yhuman precepts and teachings? 23 These have indeed an appearance of wisdom in zpromoting self-made religion and asceticism and severity to the body, but they are aof no value in stopping the indulgence of the flesh. 
tSee Rom. 6:2
uver. 8
v[Gal. 4:9]
wver. 16; 1 Tim. 4:3
x1 Cor. 6:13
yIsa. 29:13; Matt. 15:9; [Titus 1:14]
zver. 18
a[1 Tim. 4:8]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2:20–23.

20-21절) 세상의 초등학문은 우리로 하여금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요구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어찌 세상에 속한 것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우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들이기에 이 세상의 규례를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앞선 2:8절의 내용을 주목하라. 
(골 2:8, 개정)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바울은 다시금 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과 함께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선포한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의에 대하여 살아났기에 더이상 세상의 초등학문의 굴레와 요구는 무력화 되었다. 
세상의 초등학문은 우리로 하여금 고행과 규정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당시 골로새에서는 영적인 성숙은 변화된 관계보다는 신자의 자기중심적 고행에 의해서 더 많이 반영된다고 가르쳐왔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어떤 음식을 먹지 않고 만지지도 않으며 어떤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아갔다. 바울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고행을 행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종교적인 동기가 무엇인가였다. 바울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이웃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바울이 이러한 행동, 규례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하는 이유는 이러한 규례에 순종하는 것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약화시키고 신자들간에 위화감이 양산되기 때문이었다. 
- Colosse’s spiritual umpire has been teaching that spiritual maturity is reflected more by the believer’s self-centered asceticism than by transformed relationships. Logically, Christians who place greatest priority on otherworldly experiences will tend to deny the value of this world, even (ironically) to emphasize its denial. In Colosse, where some equate spiritual maturity with otherworldly visions of angels, certain religious behaviors give concrete expression to their world-denying orientation. Thus, it is claimed, the mature believer will abstain from certain foods (2:16) or activities (compare 3:5–11): Do not handle! Do not taste! Do not touch!Such are those who are not yet liberated from the basic principlesby affirming in practice the lordship of Christ over earth and its elements.
Paul may well be mocking actual prohibitions used at Colosse, probably to express religious (do not tastecertain foods) and social (do not touchcertain people) commitments. While the background of these prohibitions is not known, it is not difficult to find similar sayings in both Jewish and pagan literature of Paul’s day (for these see O’Brien 1983:149–50). Again, the problem for Paul is not really the idea of religious asceticism; he even encourages certain ascetic practices on occasion (compare 1 Cor 7). Rather, his primary concern is what religious motivation prompts this lifestyle and whether it ultimately enhances the believer’s relationship with Christ and neighbor. Clearly, he believes that submission to these moral codes tends to denigrate Christ’s redemptive work and promote enmity between believers. They simply do not have much spiritual cash value.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20.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강조하며(갈 2:19) 세례를 통해서 우리를 붙잡고 있던 죄와 단절이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The idea of the believer’s dying with Christ appears in earlier Pauline letters. Paul puts it most emphatically when he says of himself,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Gal. 2:19).150In Rom. 6:1–14 the proposal that believers should continue in sin, to give God’s grace further opportunity of displaying itself in its superabundance, is refuted by the argument that those who have died to sin can no longer live in sin. Baptism proclaims the believer’s death with Christ: “all of us who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Rom. 6:3). The finality of that death-with-Christ has been confirmed by their burial-with-Christ—a burial from which they are now risen-with-Christ to begin a new life-in-Christ.151As death severs the bond which binds a slave to his master, so their death-with-Christ has severed the bond which bound them to sin.152As death severs the bond which binds a wife to her husband, so their death-with-Christ has severed the bond which bound them to legal ordinances.153Here the argument presented to the Colossian Christians is that, as death severs the bond which binds a subject to his ruler, so their death-with-Christ has severed the bond which bound them to the service of the principalities and powers. Why then should they go on submitting to the rules154imposed by these powers? All these rules and regulations belong to the sphere of the “flesh”155—the old, pre-Christian life—and only in that sphere do they have any binding validity. Those who live “not according to the flesh, but according to the Spirit” (Rom. 8:4) are under no further obligation to obey them.
150Cf. also 2 Cor. 4:10–12; 2 Tim. 2:11.
151Cf. Col. 2:11–12.
152Rom. 6:16–23.
153Rom. 7:1–6; cf. Gal. 2:19.
154Gk. τί … δογματίζεσθε? Similarly the calendrical rules to which the Galatian churches were disposed to submit were part of the domain of the στοιχεῖα according to Gal. 4:8–10, where those forces are described as τοῖς φύσει μὴ οὖσιν θεοῖς (so-called gods that are really no gods at all).
155For this use of σάρξ see Rom. 7:5, 14–25; 8:3–4; Gal. 3:3; Eph. 2:11; cf. E. Schweizer, TDNT7, pp. 125–38 (s.v.σάρξ); A. Sand, Der Begriff “Fleisch” in den paulinischen Hauptbriefen(Regensburg, 1967). See further on v. 23 below (pp. 128–29).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125–126.

우리는 어렸을때 아이들에게 “— 하지 마”라고 이야기한다. 아직 아이들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위험한지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 더이상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라가면서 마땅히 이러한 금지 명령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위험으로 부터 지킬 수는 있지만 이것이 우리를 성숙하고 자라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자람에 따라서 처음에는 무언가를 행하지 않는 신앙에서 이제 나아가 무언가를 행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 What sort of regulations are these which the elemental forces impose? Completely negative ones: “Don’t, don’t, don’t.” There may be a stage in children’s development when they must be told not to do this and not to touch that, before they can understand the reasons for such prohibitions. But when they come to years of discretion and can appreciate their parents’ point of view, they are able to look at life from a responsible angle and do what is proper without having to conform to a list of prohibitions such as are suitable and necessary for the years of infancy. These would-be guides were trying to keep the Colossian Christians in leading strings; Paul encourages them to enjoy the liberty with which Christ has set them free.156The imposition of prohibitions from without can do nothing to create or develop new life within. “Merely negative rules do not avail for the maintenance and growth of Christian life, for life is not offered merely to our acceptance, it is offered to our acquisition.
156Compare Paul’s argument in Gal. 3:23–4:7.
 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4), 126.

22-23절)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는 지혜있는 모양이지만 오직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 
무엇보다 21절에 언급된 것과 같은 금지에 근거한 믿음의 법은 그것들이 썩어 없어질 것들에 근거하기에 효과적이지 않다. 일시적인 것이 어찌 영원한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겠는가? 우상도 마찬가지다. 창조된 것이 어찌 창조주를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이와 같은 고행의 규칙들은 인간의 명령과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썩어 없어질 것들이며 인간들이 규정한 것이기에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없는 어떤 인간적인 노력도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기에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 Paul further justifies his criticism of Christian asceticism through a twofold appeal to common sense. First of all, he says, any rule of faith that is based on prohibitions such as those listed in verse 21 could not possibly be effective, because they are based on things (such as food) that perish.Why determine the eternal by the temporal? This seems as foolish as idolatry, which substitutes what is created for its Creator. Further, perishable items lack eschatological value, since they belong to the world order that will perish at Christ’s return. Second, this same ascetic rule of faith is based on human commands and teachings.Not only are the prohibited commodities perishable, but their disposition is determined by human patterns (“dogma”) of consumption (such as etiquette), whether ascetic or hedonistic.
To conclude his polemic against the champions of Colossian philosophy, Paul returns to his initial concern (2:4) over any purportedly wise teaching in a cultural environment that responds favorably to “fine-sounding arguments.” When one scratches the surface of such teaching and finds that it fails to insist on the Lord Christ’s singular importance, Paul asserts, the church must condemn it as “hollow and deceptive” (2:8). Any Christless version of truth has no redemptive value. Likewise, the regulationsof ascetic piety have no redemptive value because they too are based on human commands and teachings(2:21–22; compare 2:8) rather than on Christ. They too have an appearance of wisdom(compare 2:4) in a religious environment where self-denial is honored, but in reality they lack any value in restraining sensual indulgence.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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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Therefore let no one gpass judgment on you hin questions of food and drink, or with regard to ia festival or ja new moon or a Sabbath. 17 kThese are a shadow of the things to come, but lthe substance belongs to Christ. 18 Let no one mdisqualify you, ninsisting on asceticism and worship of angels, ogoing on in detail about visions,4ppuffed up without reason by qhis sensuous mind, 19 and rnot sholding fast to the Head, from whom the whole body, nourished and knit together through its joints and ligaments, grows with a growth that is from God. 
gRom. 14:3, 10, 13
hRom. 14:17; Heb. 9:10; See Lev. 11:2
iLev. 23:2; Rom. 14:5
j[Mark 2:28]; See Num. 28:11
kHeb. 8:5; 10:1
l[ver. 2]
m1 Cor. 9:24
nver. 23
o[Ezek. 13:7; 1 Tim. 1:7]
4Or about the things he has seen
p[Eph. 4:17]
q[Rom. 8:7]
rSee Eph. 4:15, 16
sRev. 2:13; 3:11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골 2:16–19.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믿음의 고백과 올바른 행동의 규범을 세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특정한 음식이나 행위를 삼가고 영적으로 무해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금욕적이고 완고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은 세속적 질서의 가치와 신념에 대한 대안으로 유용하다. 바울도 초반부에 복음이 성품을 변화시키는 열매를 내는것, 무엇일 옳은지 앓고 이것에 따라 살아가는 변화된 사람에 대해서 감사했다. 믿음은 도덕적인 결과를 기대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규제에 대한 법적인 복종이 그리스도에 대한 회중의 헌신을 대체하는데 있다.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종교의 표지는 자기부인의 규칭에 대한 엄격한 준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과 그의 성령안에서의 삶이다. 진정한 기독교의 경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마침내 정의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을 대안적인 신앙 공동체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자기 변혁을 자기 부인의 규제로 대체하는 기독교의 정의는 힘이 없고 마침내 쓸모가 없다. 
- Sociologist James Davison Hunter, in his recent book on evangelicalism, characterized historic evangelicalism as “world-denying.” In order to draw more sharply the social borders that distinguish the orthodox from all others, evangelical believers tend to draft creeds of right belief and codes of right conduct that oblige them to abstain from certain foods (such as alcohol) and practices (such as dancing or extravagant dress) that mainstream believers consider spiritually harmless. Ascetic and austere expressions of one’s devotion to Christ are thought by evangelicals to be useful in bearing witness to Christianity as an alternative to the values and convictions of the surrounding secular order. And to a certain extent this is a correct perception. Paul has already stressed in his opening thanksgiving prayer (1:3–12) that the gospel produces the fruit of transformed character, a changed people who know what is true and live according to it. Faith should expect moral results.
The problem Paul addresses in this passage, however, is the legalistic submission to such regulations, such that observing them can even replace a congregation’s devotion to Christ. What results is often called “self-righteousness”: one’s devotion is measured by how drab and dreary one’s Christianity is! The arrogant sloganeering that asserts that the simpler the lifestyle, the greater the holiness, does not wash with Paul. For him, the mark of true religion is not a rigorous compliance to rules of self-denial, but faith in Christ and a life in his Spirit (see Rom 14:13–18). What finally defines the borders of true Christianity is “being in Christ,” where God’s grace transforms a people into an alternative faith community. Any definition of Christianity that substitutes regulations of self-denial for self-transformation by the grace of God is spiritually impoverished and finally useless.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16.



16-17절) 먹고 마시는 것, 절기나 초하루,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이유로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러한 것들을 준수하고 지키는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본래의 의미를 망각한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강제하는 상황이 생길 경우 그것은 올무가 된다. 

바울은 누구도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명령한다. 본문의 비판하다라는 단어는 ‘크리노’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표현할때 자주 사용되었다. 
당시의 유대주의자들은 절기나 초하루,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그러한 요구가 해결되었기에 더이상 그러한 법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절기와 관계되어 있고 이러한 태도는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나뉘어져 있다는 이원론적 신앙으로 귀결된다. 한국 교회의 경우에 이러한 태도가 매우 일반적이다. 여전히 교회안의 신앙으로 사람들을 가두고 신앙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과 거룩을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도리어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장래 일의 그림자 일뿐이다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과 허상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림자가 허상이라면 몸은 실재이다. 유대의 제사나 예배 예식은 하나님의 구원을 고대하며 드려진 것인데 이제 그리스도가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구원의 실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경험한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메시야가 미래가 아니라 이미 현재 실제로 오심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반 유대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 확신들을 대체하고 유대 관습으로 그 믿음을 측정할 것은 요청하는 이들에 반대한다. 

- Accusation Without Foundation (2:16–17) The second section of Paul’s theological polemic envisions a particular person who apparently is acting as a spiritual umpire, watching to see whether the community observes certain holy days and complies with certain dietary regulations and using these things to determine the quality of their devotion to God. In response, Paul issues here the first of two negative commands (imperative + ): Do not let anyone judge you. The verb for judge (krinō)is often used of God’s final judgment, and it may be that the community’s fitness for the new age (even the church’s hope for participation in it) is determined in their minds by food and celebrations. The list of these celebrations, which includes a religious festival, a New Moon celebration or a Sabbath day,is fairly typical (compare Hos 2:13; Ezek 45:17; Jubilees 1:14). Since the list encompasses annual festivals (such as Passover or Yom Kippur), monthly meetings (such as the New Moon celebration) and the weekly observance of sabbath, it is evident that Paul’s opponents required a rather comprehensive obligation. Moreover, within Judaism most of these celebrations were intended to help the community look forward to Messiah’s deliverance of Israel from its suffering and to its entrance into God’s promised shalom. Thus, for the Christian to participate in these Jewish celebrations was tantamount to a denial of Jesus’ messiahship. In addition, the dietary rules that accompanied the holy days had a social (as much as a religious) role: to publicize the community’s distinctiveness as a separate people. To eat particular foods and not others symbolized their particularity within the world order. This function also detracted from Christianity’s single social marker—its faith that Jesus is Lord Christ.
I should emphasize again that Paul’s objection is not to religious celebration per se, and probably not even to a congregation’s public expression of worship that borrows from the traditions of Judaism. Rather, Paul’s primary concern here is any observance that does not concentrate the celebrants’ attention upon Christ’s importance for salvation. To observe a Jewish calendar of worship seems foolish to Paul when it does not celebrate Jesus as Lord Christ (compare Lohse 1971:115–16). He argues that it elevates an eschatological shadow(that is, Jewish worship’s anticipation of God’s salvation) over its reality(that is, the future blessings of God’s salvation already experienced by those in Christ). Paul does not employ this shadow-reality dualism—a motif of Hellenistic Judaism—to deny the truth about God’s promised salvation that is expressed by Judaism’s worship on holy days or in eating patterns; rather, his purpose is to assert that the Messiah has already fulfilled the promise so that the reality is present, not future. Paul is not anti-Jewish; but he is opposed to those who appeal to Jewish practice to measure and even replace the core convictions of the Christian faith.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16.

18-19절) 두번째 명령은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다. 본문의 정죄하다라는 단어는 ‘카타브라베우오’로 황제의 부정적인 결정을 의미한다. 본문의 꾸며낸 겸손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헌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자의 본성으로 자신의 열심을 드러내려는데서 나오는 행동, 예를 들면 금식이나 구제, 기도의 모습들을 들 수 있다. 겸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자랑하는 것이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습속에는 이처럼 겸손을 가장한 교만의 모습이 많이 있는데 바울은 지금 이것을 꾸며낸 겸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천사 숭배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의견들이 있는데 첫번째로 실제로 이방의 천사 숭배의 전통을 따랐다는 견해이다. 두번째는 어떤 신자들이 천사들에 관해서 묵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그분이 너무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자신들이 직접 예배할 수 없어서 천사들을 통해서 대신 예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 서 자신들의 예배가 천사들의 중재를 통해서만 드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어 등장하는 본것에 의지한다라는 표현이 바로 천사를 통해서 드려지는 예배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The other item, the worship of angels,has prompted much scholarly discussion (Francis 1975). Wright outlines three possible interpretations (1987:121–22). First, Paul may have in mind actual liturgies of angel worship, borrowed from either pagan or Jewish religious practices. Apparently these liturgies were followed by some Colossian believers for their spiritual formation. If so, Paul would have surely considered such worship idolatrous. Few scholars, however, subscribe to this interpretation; there is simply too little evidence from the ancient world that angels were worshiped either by pagans or Jewish believers. The second possibility is a variation of the first: Paul uses the phrase ironically. Some believers spend so much of their time speculating about angels (as though they worshiped them!) that they have little time left to serve Christ in more practical ways. I doubt that Paul denied that angels exist; rather, in this view, his concern is with a highly speculative and mystical doctrine of angels (angelology), one of the “human traditions” that make up the Colossian “philosophy” of religion (see 2:8). Third and most likely is that Paul has in mind a teaching that focuses on the angelic worship of God. J. B. Lightfoot, for example, contended that humility and worship of angelsbelong together, so that the sort of humilityexpected of the spiritually mature believer presumed that God was too holy to be worshiped directly. Only the angels that populated God’s throne room had direct access to God; thus the community’s worship of God must be mediated through them (1876:222).
Following Lightfoot’s lead, I suppose the spiritual umpire could have thought that Christian worship of God is mediated through angelic beings and that worshipers are required to have visionary experiences of angels occupying the heavenly throne room—visions rather like those in the book of Revelation and in ancient apocalyptic literature generally. Thus, according to this view, an extra special visionary experience, which is then verified by its description in great detail,complements religious observance to create an esoteric Christianity composed of idle notions.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18.

이렇게 환상을 통해서 헛된 과장을 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종교적인 엘리트들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으며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만은 회중의 영적인 행복을 멘토하는데 있어서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나 심지어 그리스도의 영의 필요성을 없앤다. 오직 자신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영적인 멘토로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육신의 생각을 헛되이 과장하는 이들은 머리를 붙들지 않은 자들이다. 말하자면 온전히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온전히 힘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없으므로 온전히 성숙하고 자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천사 숭배의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경험을 쌓아 가는 것이다. 그러할 때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연결되어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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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rin him the whole fullness of deity dwells sbodily, 10 and tyou have been filled in him, who is uthe head of all rule and authority. 11 In him also vyou were circumcised with a circumcision made without hands, by wputting off the body of the flesh, by the circumcision of Christ, 12 xhaving been buried with him in baptism, in which yyou were also raised with him through faith in zthe powerful working of God, zwho raised him from the dead. 13 aAnd you, who were dead in your trespasses and the uncircumcision of your flesh, God bmade alive together with him, having forgiven us all our trespasses, 14 by ccanceling dthe record of debt that stood against us with its legal demands. This he set aside, nailing it to the cross. 15 wHe disarmed the rulers and authorities2and eput them to open shame, by ftriumphing over them in him.3
rch. 1:19; John 1:14
s[ver. 17]
tEph. 3:19
uSee Eph. 1:21, 22
v[Eph. 2:11]; See Rom. 2:29
wver. 15; ch. 3:9
xRom. 6:4
ych. 3:1; [Rom. 6:5]
z[1 Cor. 6:14]; See Acts 2:24; Eph. 1:19
z[1 Cor. 6:14]; See Acts 2:24; Eph. 1:19
aSee Eph. 2:1
bSee Eph. 2:5
cSee Acts 3:19
dSee Rom. 7:4
w[See ver. 11 above]
2Probably demonic rulers and authorities
e[Gen. 3:15; Ps. 68:18; Isa. 53:12; Matt. 12:29; Luke 10:18; John 12:31; 16:11; Eph. 4:8; Heb. 2:14]
fEph. 2:16
3Or in it(that is, the cross)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Col 2:9–15.

기독론이 결여된 철학과 진리체계에 대한 응답으로 바울은 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첫 고백에서 발견된 두가지 핵심적인 확신으로 돌아간다. 첫번째는 그리스도가 역사속에 하나님의 개인적이고도 완전한 계시라는 것이다. 두번째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 모든 다른 권세들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두가지 기독론적인 확신을 품을 때,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한 충만함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라고 말한다. 
In responding to a philosophy or system of truth devoid of any Christology, Paul returns to two core convictions found in his opening confession of the Lord Christ (1:15–20). The first claim is that Christ is the personal and complete revelation of God within history (2:9–10; compare 1:19). The second claim is that Christ rules over every other power within God’s created order (2:10–15; compare 1:18). When we embrace these two christological convictions, Paul says, we participate with Christ in the abundant fullness of God’s salvation.
 Robert W. Wall, Colossians & Philemon,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3), 골 2:9.


9절)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육체로 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전, 건물에 거하시지 않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몸안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만약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면 우리는 충만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그분께 속한 것이다. 


11절) 바울은 여기서 할례를 영적인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할례를 육체의 몸을 벗는 것으로 표현한다. 믿는 자들은 더이상 육체와 이것의 영향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져 그분의 주권아래서 그분을 통해, 그분안에 거한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할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죄와 그들의 아담과의 연대책임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제 이전에는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분의 의안에서 그분을 위해서 살수 있게 되었다. 
- In him also you were circumcised. Paul here uses circumcision metaphorically for a spiritual (made without hands) action, which he describes as putting off the body of the flesh. Believers no longer live in the sphere of the flesh and its influence (Gal. 5:24) but have been transferred to the kingdom of Christ and live through and in him, under his lordship (Col. 1:13). In this “circumcision” performed by Christ, Christians have been removed from their solidarity with Adam and his sin (see Rom. 6:6) and are now in solidarity with Christ and his righteousness and can live for him, as they before could no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7.

바울은 이 유대 전통의 생생한 비유로 할례와 세례를 사용한다. 이는 신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을 성취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은 영적인 성형수술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벗어야할 육의 몸은 죄된 인간의 본성으로 이는 부패했고 성령에 반대하는 힘의 세력에 노예가 되었다. 이 육의 몸을 벗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지배하에 있는, 옛 아담과 연대해 있는 우리의 육신에 영적인 수술을 행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분께 항복할 때 신자들의 죄된 본성을 잘라내신다. 
- circumcision … baptism.Paul uses these vivid metaphors from Jewish initiation rites to underscore what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chieved for believers. Christian conversion requires more than spiritual cosmetic surgery. flesh.Human nature that sin has corrupted and enslaved; a power sphere opposed to the Spirit (Gal 5:17). circumcised by Christ.Pictures a major spiritual “operation” in which Christ cuts off “the body ruled by sin” (Rom 6:6) and our solidarity with the old Adam (Rom 5:12–14; 1 Cor 15:22). Christ cuts off believers’ sinful compulsions when they submit to him.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12-13절) 본절은 세례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으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일어남은 바로 죄와 사탄의 힘에 대해서 죽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부르셔서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힘을 부여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 buried with him in baptism … also raised with him … made alive together with him. In a second metaphor drawn from Christ’s work on the cross, Paul says that the Christian rite of baptism represents an identification with Christ in his death (cf. Rom. 6:4–6) along with an identification with Christ in his resurrection (cf. Eph. 2:6). Dying and rising with Christ signifies death to the power of sin and Satan plus empowerment to live the new life that Jesus calls believers to live in imitation of him (see Rom. 6:3–1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7.

세례는 신자들이 교회로 들어가는 징표가 되는 가장 단순한 의식이다. 이것은 물로된 무덤으로 이를 통과함으로 죄된 육신이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나는 장소, 의식이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또한 회심의 온전한 경험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죽음,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항복,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묻히고 그분과 함께 살아나는 것을 나타낸다. 
- baptism.More than simply a rite marking the believer’s entry into the church, it is the watery grave for the flesh that is dead in its trespasses (Rom 6:4) and the birthplace of the new creation in Christ. It symbolically reenacts Christ’s death and resurrection and represents the whole experience of conversion. It marks the Christian’s death to sin, total surrender to God, and solidarity with Christ by being buried and raised with him. faith in the working of God.Trust that God indeed raised Christ from the dead and inaugurated the new age that dismantles the reign of sin and death.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13절) 우리들은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14절) 이것의 법적인 요구들로 우리에 반대에 서있던 빚의 기록을 무효화하시고 이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치워 버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The Holy Bible: New Korean Standar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골 2:14.
바울은 여기서 법정 증서, 보증서의 비유를 사용한다. 이 증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것을 순종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것에 순종하는 것에 실패할 때 우리의 죽음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빚을 도저히 청산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빚의 목록들을 완전히 지워버리셨고 그리스도깨서 우리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때 우리에게 불리한 모든 유죄의 증거들을 파괴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짐을 가져가셨다. 신자들은 그분의 의의 평결을 받았다. 
- the charge of our legal indebtedness.Paul uses the metaphor of a legal bond or certificate of debt (an IOU) in which humans promise to obey what they know to be God’s will (cf. Rom 1:32). It becomes our death warrant when we fail to obey (cf. Rom 3:23) because we cannot possibly repay the debt. But God blotted out the list of debts and destroyed all the incriminating evidence against us when Christ was nailed on the cross in our place. Christ took away the burden of our guilt. Believers receive the verdict of his righteousness.
cf. compare, confer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15절)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다는 이 말은 ‘데이그마티조’라는 표현으로 마 1:19절에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그녀를 부끄럽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구절에 사용된 표현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노력이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수치의 십자가가 바로 승리의 십자가가 된것이다.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을 실패로 몰고가려고 그를 십자가에 죽였지만 도리어 그 죽음을 통한 부활로 말미암아 사탄의 아들의 머리가 상하게 된  것이다. 
- put them to open shame. This is the same term (Gk. deigmatizō) used in Matt. 1:19 to refer to Joseph’s unwillingness to expose Mary’s pregnancy and bring public shame on her. The cross publicly reveals the failure of the demonic powers to thwart God’s plan of salvation through Christ (see 1 Cor. 2:6–8). triumphing over them. The image is of a triumphal Roman military procession. The defeated king with all of his surviving warriors and the spoils of war were paraded through the streets of Rome, as a public spectacle for all to se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97.

본문의 무력화하다라는 단어는 ‘아펙됴마이’라는 단어로 무장을 해제하다. 폐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그분을 예루살렘을 통해 끌고왔을때, 그분을 알몸으로 벗겼을 때, 모욕적으로 그분을 대했을 때 그리고 십자가위에서 그분을 대항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때 그것을 행한 그 능력들에 대해 그들을 무력화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힘의 정사와 권세들을 벗기시고 그들의 약점을 드러내셨다. 십자가위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이러한 외세의 힘의 폭압으로부터 자유를 가져온다. 
로마의 장군들은 전쟁의 전리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포로들을 행진시키며 로마의 거리를 행진함으로 그들의 승리를 경축했다.  바울은 지금 승리의 퍼레이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는 십자가를 승리한 장군이신 그리스도께서 타신 전차로 상징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정복된 대적들이 굴욕적인 패배로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을 상상하고 있다. 
- disarmed.In the crucifixion God paradoxically did to the powers what they did to Christ when they dragged him through Jerusalem, stripped him naked, treated him with contempt, and nailed the charges against him on the cross. God stripped the “powers and authorities” of their power and exposed their weakness. Christ’s victory on the cross brings freedom from the tyranny of these alien forces. triumphing over them by the cross.Roman generals celebrated their victories by marching through the streets of Rome exhibiting the spoils of war and parading their captives. Paul’s metaphor of the victory parade (2 Cor 2:14; Eph 4:8) imagines the cross as the chariot in which Christ rode as a triumphant general. Paul may envision Christ’s vanquished foes trailing behind him in humiliating defea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31.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심으로 모든 충만이 그분안에 거하고 우리들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다. 또한 우리가 육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 이 육의 몸을 벗는 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을 의미하는데 이 할례가 바로 세례로 이어진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부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의 증서를 무효화하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제거해버리셨다. 이로 통치자와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본문의 그리스도의 승리는 바로 창 3:15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의 성취를 보여준다. 그 보장된 승리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되었고 그 승리의 행진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통치자와 권세들이 도리어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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