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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end of forty days Noah opened the window of the ark that he had made and sent forth a raven. It went to and fro until the waters were dried up from the earth. Then he sent forth a dove from him, to see if the waters had subsided from the face of the ground. But the dove found no place to set her foot, and she returned to him to the ark, for the waters were still on the face of the whole earth. So he put out his hand and took her and brought her into the ark with him. 10 He waited another seven days, and again he sent forth the dove out of the ark. 11 And the dove came back to him in the evening, and behold, in her mouth was a freshly plucked olive leaf. So Noah knew that the waters had subsided from the earth. 12 Then he waited another seven days and sent forth the dove, and she did not return to him anymore.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Ge 8:6–12.

 

 

6-12절)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한지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들을 날려 보내 땅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려고 했다. 먼저 까마귀를 내 놓았는데 까마귀는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이 까마귀가 아무것도 없이 돌아왔는지 아니면 돌아오지 않았는지 본문은 침묵하고 있다. 이어서 비둘기를 세번에 걸쳐서 날려 보낸다. 첫번째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 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알려고 했으나 온 지면에 물이 아직 있어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는데 이때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안으로 받아들였다. 이어 7일후에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았는데 저녁때에 비둘기가 노아에게로 돌아올 때 그 입에 감람나무 새잎사귀를 물고 돌아왔다. 이에 노아는 땅에 물이 줄어든줄 알았다. 하지만 신중한 노아는 바로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이후 7일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고 그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본문의 모습속에 노아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인다. 배안의 가족들과 모든 동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땅의 상태가 어떠한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는 성급하게 내리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서 땅의 상태가 어떠한지, 내리기에 적합한지를 확인하고 자 한 것이다. 

One gets a strong impression that Noah does not wish to leave the ark precipitately. He wants to make sure that all is safe before he disembarks. Thus it is not the side door that he opens (6:16), but a hatch (ḥallôn), presumably on the ark’s roof or side. It is Noah’s responsibility to ascertain whether the land is sufficiently dry so that he and the others may leave the ark. But the actual moment of departure awaits God’s command (8:15–17). The forty days can refer only to the period of time that Noah waited from the time the peaks of the mountains became visible (v. 5) until he sent out the birds. Perhaps Noah thought that such a period would give even more time for more of the submerged earth to reappear.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02–303.

 

과거 교부들은 까마귀는 자신을 찾는 악한 자이고 비둘기는 그리스도의 것을 찾는 악한 자라고 영해했다. 유대인들에게 비둘기는 희고 정결한 새로 상징되고 까마귀는 부패한 시체를 먹는 검고 부정한 새로 상징된다. 하지만 본문속에서 까마귀는 그 임무에 실패했고 비둘기는 성공했다라고 보기는 어렵다. 7절 본문은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했다고 말하고 있다.

 

7-12절에 내놓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살라’가 5번 사용된다. 7, 8, 10, 12절에서는 Qal형으로 내놓다(to send)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9절에서는 Piel형으로 손을 내밀다(to stretch)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Qal형은 단순 능동, Piel형은 강조 능동의 패턴이다. 히브리어 ‘살라’가 9절에서 Qal형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사명을 위해 내보내지는 것으로 돌아올것을 기대하고 내보내는 것을 의미할때 사용된다.(민 13:3, 수 2:1) 하지만 Piel형은 돌아올 것을 전제로하지 않고 내보내지는 것을 의미한다.(창 3:23) 

지금까지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 것이나 누구와 어떤 동물을 방주 안으로 들여보낼지, 언제 방주에 들어가고 홍수가 임하는지를 알려주셨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언제 다시 땅에 거주 가능한지를 말씀하시지 않고 있다. 8:15에 가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서 땅을 정탐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장인인 이드로로부터 재판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지를 듣는다.(출 18) 여호수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약속을 받았지만 그는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내어 보고를 받는다. 이러한 행동이 믿음없는 행동인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약속과 계시를 받으면서도 인간적인 충고와 노력을 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노아의 방주는 항해에 적합한 배가 아니라 안정성을 목적으로 한 배였다. 따라서 그 배안에는 천정의 창과 옆으로 난 몇개의 문밖에 없었다. 엄청난 홍수 속에서 방향을 확인할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만약 이 홍수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의 가족들은 전문적인 항해사들이 아니었고 날씨를 분간할 능력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이 방주에 탑승한 이들의 안전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In order to determine how suitable the ground was for habitation, Noah sent out first a raven, and then a dove (the latter 3 times, vv. 8, 10, 12). released. Every time Noah sends forth one of these two birds the Hebrew uses the Piel of šālaḥ (e.g., v. 7, wayyešallaḥ). This use contrasts with the Qal of šālaḥ used in v. 9 to refer to Noah’s “stretching out” his hand to retrieve the dove. Now, at many places in the OT the Qal and Piel of this verb seem to be interchangeable. But sometimes the Qal means to send forth on a mission, with the expectation that those sent will return. Thus Moses (Num. 13:3) and Joshua (Josh. 2:1) “sent” (šālaḥ, Qal) the spies who will return with the needed information. The Piel of šālaḥ may mean to send away, to banish with no possibility of returning, as in Gen. 3:23: “Yahweh sent him forth [wayyešalleḥēhû] from the garden of Eden.” Applied to 7:7–12 the meaning would be that Noah does not send these birds forth on a trial run. He does not expect them to return to their nest in the ark.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Noah sends forth birds in order to determine the conditions on the earth. Up until this point Noah has received all his information from God. God informed him about the corruption in the earth. God told him to build an ark and what to take into that ark. God briefed him about the impending storm.

But God does not tell Noah when the ground is habitable again. Indeed, all revelation from God to Noah is halted once Noah is locked inside the ark—until the announcement in 8:15. He who had received direct revelation from God must now resort to ornithology (or augury) for further data. The Creator speaks to Noah, but so does the creature. Moses receives direct revelations from God, but it is his father-in-law who gives him the information about the best and most efficient way to administer juridical matters (Exod. 18). Joshua receives a direct promise from God that he will be given all the land (Josh. 1), yet he still sends spies to reconnoiter Jericho and then to report back to him (Josh. 2).

Earlier we noted that Noah takes no navigational equipment or sailors aboard as did his counterparts in the mythical flood stories of Mesopotamia. The reason for this omission is deliberate. It allows the biblical record to testify to the effect that if Noah is saved from drowning it will be only because of the grace of God. He has no professional crew with him who, when they put their skills together, will be able to weather this storm.

Still, there is an implicit reference to navigational equipment on the ark—the window (for reading the stars) and the birds (homing pigeons who help find directions). Thus Noah’s releasing of the birds should be seen as a reflection of actual navigational practice, rather than as a bit of folkloristic coloring.4

4 “If the ancients sailed the seven seas before the age of literacy, they must have had a science and technology that gave them their capabilities. And if they lacked modern methods of science and instrumentation, they had other methods that enabled them to score their successes. A cage full of homing pigeons is not a bad method of direction finding. If it sounds quaint, it is only because we have devised methods more to our liking, but not necessarily better in all circumstances even today” (C. H. Gordon, Before Columbus [New York: Crown, 1971], p. 77).

 Victor P.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0), 303–304.

 

비둘기는 쉴 장소(마노아)를 찾지 못해 노아(쉼이라는 의미)에게로 돌아온다. 쉴 곳을 찾지 못한 비둘기가 노아에게 돌아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다. 

두번째 비둘기가 돌아올 때 그 잎에 감람나무 잎을 물고 돌아왔다. 원문에는 감탄사 ‘힌네’(보라)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감람나무는 생명이 기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징조이다. 감람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잎으로 미와 풍요를 상징했으며 실제로 기름을 생산했고 이 기름은 선정의 등대를 밝히고 성직에 임명할때 사용되기도 했다. 

홍수로 모든 것이 쓸려간 이 땅에 ‘루아흐’ 하나님의 영, 바람이 임하고(8:1) 이제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를 문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와 새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스팀은 갈대 배가 물 위에 떠 다니는 동안 배의 문을 열고 땅을 뒤덮고 있는 물을 바라보며 통곡한다. 이에 반해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연 것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땅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노아가 멸망 당한 세상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그들을 위해 울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노아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방주를 떠나지 않는다. 땅의 형편을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보내는 아주 신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노아는 자신과 가족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생명이 달려있는 만큼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있다.15)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내어 보냈다. 방주를 떠난 까마귀는 물이 마를 때까지 반복적으로 왕래하였지만 노아와 방주에 탄 모든 피조물들이 기다리던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16) 결국 노아는 까마귀를 통해서는 물의 감소 여부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둘기를 세 번 내어 보낸다. 첫 외출에서 비둘기는 접족하여 쉴 장소를 발견하지 못하고 되돌아 온다. 이를 묘사하기 위해 히브리어 성경은 신소리(wordplay)를 도입하고 있다. 비둘기는 쉴 장소 ‘마노아’(מָנוֹחַ)를 찾지 못해 이름에 쉼의 뜻을 가진 노아(נֹחַ)에게 돌아 온다. 비둘기는 방주의 창을 통해 스스로 날아 들어 올 수 있었을 것인데, 노아가 내민 손에 앉아 방주 안으로 들어 온다. 쉴 자리를 찾지 못한 비둘기를 맞아 들이는 노아의 모습은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있어야 할 아름답고 이상적인 그림이다.17) 희고 정결한 새인 비둘기와는 달리 검고 부정한 새인 까마귀는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였지만 방주에 들어 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창세기 8:6–12은 까마귀와 비둘기를 서로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18)

칠일 후 둘째 외출에서 비둘기는 저녁 때에 돌아 온다. 이것은 비둘기가 쉴만한 장소를 발견했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방주로부터 제법 멀리까지 날아 다녔음을 보여준다.19) 그리고 비둘기는 돌아 올 때 감람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온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스팀은 니무쉬 산에서 7일을 지낸 후 비둘기, 참새 그리고 까마귀 순으로 배 밖으로 내어 보내어 땅의 형편을 확인한다. 비둘기와 참새는 갈대 배로 돌아 왔지만, 마지막으로 내어 보낸 까마귀는 물이 감해지는 것을 보고 먹이를 먹으며 배회하다가 우트나피스팀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에 우트나피스팀은 배에 있는 모든 짐승들을 사방으로 내어 보낸다.20)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우트나피스팀이 보낸 새들이 지구에 생명체가 다시 나타났다는 희소식을 가져 오지 않는다. 반면에 노아 홍수에서 비둘기는 감람 새 잎사귀를 입에 물고 온다. 감람나무 새 잎사귀는 그 자체로 새로운 시작의 징조였다. 뿐만 아니라 감람나무는 사시사철 크고 푸른 잎 때문에 미와 풍요를 상징하였다.21) 이에 더해 감람나무에서 감람 기름을 생산하였고, 이 기름은 성전의 일곱 등대를 밝혔으며, 성직을 임명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감람 나무 새 잎사귀를 비둘기가 물고 온 것은 방주에 탄 모든 사람과 동물들에게 새 시대 새 창조에 대한 밝은 희망을 품게 만들고, 기쁨의 함성으로 방주를 가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8:11은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는 표현 앞에 감탄사 ‘힌네’(הִנֵּה, 보라)를 두었다. 홍수로 완전히 파괴된 땅에 하나님의 ‘루아흐’(영, 바람)가 다시 임하고(8:1), 부정한 새의 범주에 속하는 까마귀는 떠나고(8:7),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문 비둘기가 방주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은 새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희망찬 그림이다.

다시 칠일 후에 비둘기를 내어 보내자 비둘기는 돌아 오지 않았다. 이것은 땅 위의 물이 다 걷혀 비둘기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스팀이 까마귀가 떠나가자 즉시 모든 짐승들을 떠나 보내고 자신도 갈대 배에서 나온다. 하지만 노아는 까마귀를 한 차례 그리고 비둘기를 세 차례나 내어 보내 땅의 상태를 신중하게 확인하였지만 방주에서 즉시 나오지 않았다. 오랜 방주 생활에 땅이 그리웠겠지만 노아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 후 225일을 더 방주 안에 계속 머물며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다.

15) Victor P. Hamilton, Genesis 1–17, 302–303.

16) 까마귀가돌아오지않은이유에대해초대교부들과랍비들은다양한의견을제시하였다. Philo 는 노아가 까마귀의 마음에 있는 어둠의 찌꺼기를 보고 쫓아 냈다고 말한다. C. D. Yonge, The Works of Philo (Peabody, Mass: Hendrickson, 1993), 825. Augustin은 까마귀와 비둘기를 영해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까마귀는 자신의 것을 찾는 자이고 비둘기는 그리스도의 것을 찾는 자이다. Philip Schaf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vol. 7 (Grand Rapids: Eerdmans, 1991), 40.

17) 잠언12:10 “의인은그육축의생명을돌아보나악인의긍휼은잔인이니라.”

18) Gordon J. Wenham, Genesis 1–15, 186. Cf. 레위기11:15, 신명기14:14.

19) Sarna, Genesis, 58.

20) Stephanie Dalley, Myths From Mesopotamia, 114.

21) Sarna, Genesis, 58. John H. Walton, Genesis, 314–315.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창세기1–11장 주석, 초판. (06593 서울특별시 서초구 고무래로 10–5 (반포동): 생명의 양식, 2016), 27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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