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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mnow that Timothy has come to us from you, and has brought us the good news of nyour faith and love and reported othat you always remember us kindly and plong to see us, as we long to see you— for this reason, brothers,2 in all our distress and affliction qwe have been comforted about you through your faith. For now we live, if you rare standing fast in the Lord.
m Acts 18:5; [2 Cor. 7:6, 9]
n See ch. 1:3
o [1 Cor. 11:2]
p See Phil. 1:8
2 Or brothers and sisters
q 2 Cor. 1:4
r See 1 Cor. 16: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살전 3:6–8.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7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살전 3:6–8.
 
 
6절) 개역은 ‘지금은’으로 시작하지만 원문은 ‘그러나 지금은’으로 시작된다. 여기서는 이전에 보냈던 디모데가 돌아온 것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염려가 기쁨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이동한 후에 이루어졌다.(행 18:1-8)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마게도냐에서 실라를 만나서 함께 바울에게로 온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18:5
5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본문의 ‘지금은’이라고 변역된 ‘아르티’는 ‘지금, 바로, 즉시’에 해당되는 의미인데 바울은 디모데가 도착하자마자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바울에게 전하였다. 본문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는 ‘유앙겔리사메누’로 ‘유앙겔리조’의 부정과거 중간태 분사이다. 이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로 흔히 사용된 것인데 바울이 디모데로부터 들은 소식이 얼마나 그에게 큰 기쁨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디모데가 전해 준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처럼 바울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앞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1:3)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었는데 믿음은 환난 중에서도 변치 않고 견고히 서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며, 사랑은 그 믿음에 기초하여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수고와 희생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6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이 표현은 직역하면 ‘너는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이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바울 일행이 가져다준 복음으로 인해 외적으로 핍박에 직면하고, 또한 악의에 찬 적대자들로부터 바울 일행에 대한 비방과 모함을 줄곧 들어왔지만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굳게 서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 일행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바울 일행은 그들을 간절히 보고자 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자 하고 성도들도 목회자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 이러한 관계는 바로 온전한 복음 위에서 가능하다. 
 
3:6 The words ἄρτι δὲ ἐλθόντος Τιμοθέου πρὸς ἡμᾶς ἀφʼ ὑμῶν (“and now that Timothy has returned to us from you”) suggest that 1 Thessalonians was composed almost immediately after Timothy had returned to Paul. Certainly Paul wished to communicate this impression to the Thessalonians as a demonstration both of his concern and the warm affection that he felt for them. Whether Silvanus was with Paul when Timothy came back is uncertain. πρὸς ἡμᾶς (“to us”) implies that he was, but as on several other occasions the first person plural may be no more than a so-called epistolary plural. Acts 18:5 seems to suggest that Timothy, as well as Silvanus, had been in Macedonia and that they rejoined Paul together in Corinth, but Paul neither indicates where he was at the time nor where Silvanus was, unless the plural is a genuine plural.
From Paul’s perspective the important thing was that when Timothy returned he was able to report that the Thessalonians were coping and even progressing in their faith. Curiously Paul employs the participle εὐαγγελισαμένου (“proclaiming good news”) to describe Timothy’s report. While the verb originally denoted any announcement of good news and may have no more than this meaning here, the very choice of the word probably was intended by Paul as a play on the word used by himself and other early Christians as the word par excellence for communication of the Christian message (1 Cor. 15:1f.; Gal. 1:8, 11, 16). Marshall (94), who follows Masson (41) and Best (139f.), reads too much into the word when he claims that it may denote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in the normal technical sense here. He has succumbed to the ever present temptation to “over-theologize” a word.
The good news Timothy announced to Paul concerned at least two facts. First, the Thessalonians had not wavered in their new beliefs and behavior patterns. This seems to be the idea conveyed by the report concerning τὴν πίστιν καὶ τὴν ἀγάπην (“the faith and love”) of the Thessalonians. πίστις should probably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ir confidence in God, which was severely tested by their suffering. Paul was relieved to hear that their new beliefs had not been shaken with a concomitant turning away from the Christian religion. At the same time Paul was undoubtedly pleased to learn that their Christian conduct, which he characterizes as “love,” had endured. In Paul’s understanding, love was not a mere human emotion but revealed itself in action (Rom. 13:9–10). As he says elsewhere, “What has power or meaning in Christ Jesus is faith working through love” (Gal. 5:6). For Paul belief in God and his saving purposes should lead to a response of active love manifested particularly in the way Christians behave toward one another (see 1 Thes. 4:9). It is this understanding of faith and love that probably lies behind what Paul says in 3:6.
Second, the Thessalonians held Paul in high regard and longed to see him, as the words ἔχετε μνείαν ἡμῶν ἀγαθὴν πάντοτε (“you always think of us affectionately”) reveal. The apostle gives the impression that he was especially pleased to learn the Thessalonians had a “kind or affectionate remembrance” (μνείαν ἀγαθήν) of him and his colleagues. This perhaps implies that he was concerned about how the Thessalonians viewed him after his departure. Several possibilities exist for the basis of his concern. It might have resulted from the manner in which he left, especially if he had been forced to leave unexpectedly. Acts 17:5–10 portrays his and Silvanus’s departure as so hasty that they were unable to prepare the community properly for it. Another possibility is that the Thessalonians might have resented the situation of oppression in which they found themselves when they discovered that the supposed good news Paul had announced to them was in reality “bad news” in that it led directly to their suffering (Bruce, 66). A third possibility is that Paul feared the Thessalonians would be disappointed in him and perhaps even reject him for not having himself returned to them already. 2:17f. provides strong support for this understanding since in those verses, as we have seen, Paul insists that he had longed to see them and had even planned to visit them on several occasions, only to be prevented from doing so by the arch-enemy, Satan. This looks like an apology for his failure to return and may imply apprehension over the reaction of the Thessalonians in this matter. For this reason Paul was pleased to learn of their continuing affection and their desire to see him again. Paul responded to their desire to see him (ἐπιποθοῦντες ἡμᾶς ἰδεῖν) by indicating through the elliptical expression καθάπερ καὶ ἡμεῖς ὑμᾶς (“just as we also you”) that his readers’ desire was reciprocated by his own desire to see them. Such reciprocity in affection was intended to demonstrate Paul’s true friendship with his readers. In effect Paul here reiterates what he said in 2:17. Along with the verses that follow it prepares for Paul’s exhortation in chaps. 4–5 through its philophronetic impact.
 Charles A. Wanamaker, The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W.B. Eerdmans, 1990), 133–134.
 
7절) 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핍박과 시험 가운데서도 믿음에 굳게 섰다. 목휘자로서, 영적 부모로서 이러한 모습만큼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로를 받았노라’에 해당하는 ‘파라클레데멘’은 ‘파라칼레오’의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 표현이다. 이는 ‘옆으로 부르다’라는 의미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믿음에 굳게 선 그들의 모습이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던 바울 일행에게 위로가 된 것이다. 위로의 말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더욱 의미있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내는 모습이야말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위로를 주고, 받고 있는가? 
 
본문의 ‘궁핍’은 ‘아낭케’로 ‘재난, 압박’을 의미하는데 허리띠를 꽉 졸라매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제적 결핍을 의미한다. ‘환난’으로 번역된 ‘들립세이’는 ‘들립시스’로 포도즙틀로 포도를 짜듯이 ‘부서질 정도의 압박’을 의미한다. 바울의 전도 사역은 이러한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고린도후서 6:4–5
4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린도후서 11:23–27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8절) 바울은 그들이 주안에 굳게 서있다라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리라’로 번역된 ‘조멘’은 ‘자오’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구원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염려와 불안 가운데서 기쁨과 안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정서적 의미이다. 
‘굳게 선’에 해당하는 ‘스테케테’는 ‘스테코’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는 서서 그 위치를, 마음을 유지함으로 중심을 지킨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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