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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if there is any encouragement in Christ, any comfort from flove, any gparticipation in the Spirit, any haffection and sympathy, icomplete my joy by being jof the same mind, having the same love, being in full accord and of one mind. Do nothing from kselfish ambition or lconceit, but in mhumility count others more significant than yourselves. Let each of you nlook not only to his own interests, but also to the interests of others.
f[Rom. 15:30; 2 Thess. 2:16]
g2 Cor. 13:14
hCol. 3:12
iJohn 3:29; 15:11
jSee Rom. 12:16
kch. 1:17
lGal. 5:26
m[Eph. 5:21]; See Rom. 12:10; Eph. 4:2
nSee Rom. 15: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2:1–4.


1-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으로 부터 오는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기쁨을 충만케 하라.
본문 1절에서 바울은 ‘있거든’이라는 조건문을 사용하는데 이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런 성품, 특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의심이라기 보다는 도리어 이런 특성(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들이 그들의 삶의 실재로 드러나도록 촉구하는 의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1절의 특성을 기반으로 이후 2-4절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결국 이런 특성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때 우리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한 성령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 간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같은 사랑가운데 마음을 하나로 모아가게 되는 것이다. 

본문 1절에 그리스도의 권면,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제가 모두 등장한다. 1절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되는데 이는 앞서 1:27-30절의 내용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도전받는 친구들을 독려하여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게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적인 관계에 어필하는 것인데 바울이 지금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So how does one entreat friends to get back on track? By appealing to relationships, both divine and human. It may not always work, but this is certainly the primary way. Paul begins by appealing to the encouragementor “comfort” that beingin (NIV united with) Christcan bring, as a direct response to their common experience of suffering for Christ in the preceding clause (1:29–30). But right at that point, before dictating a “then” clause, he adds three more "if“ clauses, whose studied accumulation is part of the rhetorical effect.*
*2:1The fourfold repetition of ifis almost certainly for rhetorical effect, in a situation where the letter will not be read privately but publicly. Although ifordinarily forms the protasis of a conditional sentence, in this case the protases do not so much express supposition as presupposition. Hence “if this be the case, as it certainly is.”
Paraklēsis(NIV encouragement) in the first clause is a thoroughly ambiguous word in Greek whose meaning ranges from “exhortation” through “encouragement” to “comfort.” Although the word in the next clause (paramythion) clearly and only means comfortor “solace,” the close tie of the first clause to the preceding sentence suggests that the encouragementintended leans equally toward “comfort.”
For a thorough and helpful discussion of the options and their ramifications for understanding the if-clauses—although I differ a bit with his conclusion and reason for it—see O’Brien 1991:167–76, who also includes data on the various scholars who take each option. Part of our difficulty here is probably related to the nature of dictation, in that what is written by way of dictation sometimes still carries the rhetorical effect of oral speech. In this kind of rhetoric, precision is a lesser concern than is the persuasive effect created by the accumulation of phrases. It is possible therefore (probable, I think) that the emphasis shifts as Paul warms up to his rhetoric.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84.

긍휼을 의미하는 단어는 ‘스플랑크나’로 창자,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비의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위로에 기초한 성령안에 하나됨은 복음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고 이는 바울의 기쁨을 가져 오게 될 것이다. 본문에 ‘프로네오’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같은 일을 마음에 놓는다, 한가지 일에 너의 마음을 놓음’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뜻을 합하여라고 표현된 단어는 ‘심사이코스’로 영을 함께 한다라는 의미로 3절의 본문에서는 영과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Their unity in the Spirit, based on Christ’s comfort, will bring Paul’s joy over the advance of the gospel, already noted in 1:18, to full fruition. What is probably in view is his eschatological joy at their being together with him at the day of Christ (2:16).
The key word in the appeal, and indeed a key word in the letter, is the verb phroneō(see on 1:7), which is repeated in the first and third instances and has to do with the set of one’s mind, how one is overall disposed toward something (cf. Rom 8:5–7)—thus (literally) “set your minds on the same thing”/“setting your minds on the one thing.” This is the word that is picked up again in Philippians 2:5 (“have this same mindset, as Christ did”) and in 4:2, where he reproduces the identical language of this first phrase in urging Euodia and Syntyche to the same mindset. The second occurrence (third phrase) is accompanied by the adjective sympsychos(= “together in soul”), thus joining mind and soul together, while picking up the phrase “one soul” from 1:27.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86.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을 받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의 위로를 받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의 교제를 나누고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비와 긍휼을 받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같은 마음을 품어서 나의 기쁨을 완성하시오…” 개역 성경은 이것을 되풀이 하여 “… 가 있거든”이라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 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있다면…” 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가 그런 것들을 가졌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3.

“긍휼과 자비”로 번역된 헬라어 ‘스플랑크나’는 위(胃)를 말하고, ‘오이크티르모이’는 내장을 말합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동정심, 자비심이 위 또는 내장에서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말이나 서양 언어들에서 심장을 사랑의 샘터로 여기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참고로 인도네시아어에서는 간을 사랑의 샘터로 여깁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4.

2장 1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의 긴 문장입니다. 그 문장의 주절은 “나의 기쁨을 완성하시오”입니다(원문에는 2절 머리에 나오나, 개역 성경에는 우리말의 어순상 4절 끝에 위치합니다). 1절에서 빌립보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그리고 “긍휼과 자비”가 있음을 상기시키고는, 그러한 사람들이니 “나의 기쁨을 완성하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그의 기쁨을 완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1절에서 언급한 조건들을 갖춘 자들로서 해야 할 4가지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3가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4가지 해야 할 일을 “같은 생각을 갖는 것”, “같은 사랑을 베푸는 것,” “한 혼이 되는 것,” “한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마음을 품고 서로 사랑하여 온전히 한 덩어리가 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법이지,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구분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사실 첫째와 넷째는 아예 구분이 불가능하고, 셋째 역시 앞의 둘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이런 표현을 통해 결국 빌립보인들에게 “여러분 모두가 첫째도 한마음, 둘째도 한마음, 셋째도 한마음, 오로지 한마음을 품어 일심동체가 되시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4–75.

3-4절) 한 마음을 품은 우리들은 아무 일에든지 이기적인 야망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나아가 각각 그 자신의 유익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아보아서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해야 한다. 
우리의 사람을 추동하는 중요한 동인중에 하나가 성공의 욕구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인정받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욕구들이 모두에게 있는데 바울은 그러한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요구하는 삶,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돌보는 삶은 어쩌면 이 시대에서는 보기 희귀한, 이 시대 정신을 거스르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이다. 이런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결국 우리들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안에서 한 마음을 품어야만 가능하다. 

본문의 겸손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런데 이 겸손이라는 덕목은 당시 그레고 로만시대에는 하찮게 여겨지는, 노예 근성 정도로 여겨졌다. 우리가 온전한 겸손을 깨닫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를 지으신 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창조의 회복이 필요한데 이는 창조주 안에 피조물로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을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면서 그분의 영광을 소유한 존재이기에 진정한 겸손은 자기 중심성을 극복할 때에 가능하다. 
Humility is thus not to be confused with false modesty (“I’m no good”) or with “milquetoast,” that kind of abject servility that only repulses. Rather it has to do with a proper estimation of oneself, the stance of the creature before the Creator, utterly dependent and trusting. Here one is well aware both of one’s weaknesses and of one’s glory (we are in God’s image, after all) but makes neither too much nor too little of either. True humility is therefore not self-focused at all but rather, as further defined by Paul, considers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
As with humility, this last phrase does not mean that one should falsely consider others better.As Philippians 2:4 will clarify, we are so to consider others not in our estimation of them—which would only lead to the very vices Paul has just spoken against—but in our caring for them, putting them and their needs ahead of our own. Others in the community are not necessarily “better” than I am, but their needs and concerns “surpass” my own. After all, this is precisely how Christ’s humility expressed itself, as Paul narrates in verse 8. This is how he elsewhere describes those whose behavior is genuinely Christian; they do not seek their own good, but the good of others (1 Cor 10:24). Here is the sure cure for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not to mention “complaining or arguing” (Phil 2:14).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88–89.

그러고 나서 바울은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어 자신에게 기쁨을 선사해 주기 위해서 빌립보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3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이기심에 근거한 분파주의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둘째는 허영심, 즉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생각하는 과대망상이나 그렇게 보이려고 하는 헛된 생각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대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남들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셋째는 “각자 자신의 것들만 돌아보지 말고 남의 것들도 돌아볼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것들”은 자신의 이익, 장점, 주장 등을 두루 칭하는 말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만 보면 교만해지거나 허영심에 빠지고, 이기적으로 변하며,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것이야말로 공동체의 하나 됨을 죽이는 독소입니다. 남의 이익을 생각해 주고, 남의 관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고, 남의 주장에도 귀 기울일 줄 알아야 공동체의 단결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빌립보인들이 해야 할 4가지 일들을 앞에 언급한 바울은 이제 여기 그것을 저해하는 3가지 독소를 배격하고, 그것들 대신에 겸손과 남을 고려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 행동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공동체의 삶을 꾸려 가는 것”이고, 그것은 곧 교회의 하나 됨을 가져와서 내적으로는 화평과 기쁨을 확보하고, 외적으로는 적대자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바울이 제시하는 행동 지침의 모든 요소가 우리에게 다 적합하지만, 특히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으로 행동하라는 말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절실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은 사랑과 더불어 우리 기독교에서 최고의 덕목입니다. 그 반대는 교만(hybris)인데, 성경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교만, 즉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창 3:5). 헬라적 휴머니즘의 전통은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요 만물의 척도로 여기면서 인간의 자기 주장도 미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그것을 피조물인 인간이 교만해져서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라고 규정하고, 바로 그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서 분리되고 자신의 제한된 자원에 갇혀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 담겨 있는 아담의 타락입니다.
 김세윤, 빌립보서 강해(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95번지: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2002), 75–77.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4가지 해야할 일과 3가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시한다. 
해야할일 4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마음을 같이 하는것(같은 생각을 하는 것), 둘째로 같은 사랑을 가질 것, 셋째로 뜻을 합할 것(한 영혼이 될 것), 네번째로 한 마음이 되는 것을 제시한다. 
하지 말아야할 일 3가지는 첫째로 이기심에 근거한 분파주의에 따라 행동하지 말 것, 둘째로 허영심, 즉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높게 생각하는 과대망상이나 그렇게 보이려는 태도를 보이지 말 것, 셋째로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결국 이러한 요청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이들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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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Only vlet your manner of life be wworthy8of the gospel of Christ, so that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am absent, I may hear of you xthat you are standing firm in one spirit, with yone mind zstriving side by side for the faith of the gospel, 28 and not frightened in anything by your opponents. This is aa clear sign to them of their destruction, but bof your salvation, and that from God. 29 For cit has been granted to you that for the sake of Christ you should not only believe in him but also bsuffer for his sake, 30 engaged in the same dconflict that eyou saw I had and now hear that I still have. 
v[ch. 3:20]
wSee Eph. 4:1
8Greek Only behave as citizens worthy
xSee 1 Cor. 16:13
y[ch. 2:2; 1 Cor. 1:10]
zJude 3
a[2 Thess. 1:5]
bSee Acts 14:22
cSee Matt. 5:12
b[See ver. 28 above]
dCol. 1:29; 2:1; 1 Tim. 6:12; 2 Tim. 4:7; [Heb. 10:32]
eActs 16:19–40; 1 Thess. 2:2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1:27–30.

27-28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에 맞는 시민으로 생활하라.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성령안에 굳건히 서 있고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함께 투쟁하는 것과 너희의 대적자들로인해 무슨일이든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듣고자 한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먕의 명백한 증거요 너희들에게는 구원의 증거인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개역개정에서 생활하라라고 번역한 단어는 ‘폴리테우오마이’로 살다, 생활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폴리스’는 도시, ‘폴리테스’는 시민으로 이 원 의미는 시민이 되다, 시민으로 행동하다의 의미이다. 폴리스는 신약에서 160번 사용되었고 폴리테스는 4번 사용되었는데 폴리테우오마이는 행 23:1과 빌 1:27에 두번 등장한다. 
(행 23:1, 개정)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빌 1:27, 개정)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이 단어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삶을 나타낸다. 이후에 빌 3:20의 언급을 통해서 볼때 로마의 시민권이 주는 권한과 책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에게 하늘의 시민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NT 1The noun πόλιςoccurs over 160× in the NT, with the Lukan writings accounting for about half of the occurrences (Luke 39×, Acts 43×); the word is freq. also in Matthew and Revelation (27× each; Mark and John use it 8× each). It never means “state,” but always “city, town,” in the sense of an enclosed settlement or its inhabitants (Matt 8:34; 21:10; Mark 1:33); indeed, the distinction between it and κώμηG3267, “village,” is sometimes neutralized (cf. Luke 2:4 with John 7:42). (For the view that, under the influence of Aram., πόλιςmeans “region, province,” in several passages [Matt 10:5; Luke 1:39; Acts 8:5], see J. Jeremias in TDNT7:92 and n. 29.)
It is in keeping with OT and Jewish usage that Jerusalem is called “the holy city” (Matt 4:5; 27:53; Rev 11:2). But because this city kills the prophets, incl. Jesus (cf. Matt 23:37; Luke 13:33; Rev 11:8), its downfall is certain (Matt 24:2–25 par). Over against the present Jerusalem there stands the Jerusalem above, the free Jerusalem, the mother of Christians (Gal 4:25–26). The letter to the Hebrews in partic. contrasts the present and the future Jerusalem: even the patriarchs knew of and set their hopes on this new city, compared with which all earthly cities are mere temporary tent-camps, and for the sake of this coming city they regarded themselves as strangers and sojourners (see ξένοςG3828). This city is Mt. Zion and “the city of the living God” (Heb 12:22; cf. 11:10, 16). It awaits the Christians who have here no continuing city (13:14; cf. Rev 3:12; 22:14). The earthly Jerusalem is only a copy and a shadow (Heb 8:5; 10:1) or a symbol (9:9) of the city that is to come. In this new city those who conquer in times of persecution have citizens’ rights (Rev 3:12; cf. 21:2, 10–27; see ἸερουσαλήμG2647).
2The term πολίτης“citizen,” occurs only 4× in the NT (Luke 15:15; 19:14; Acts 21:39; Heb 8:11 [quoting Jer 31:34, LXX 38:34]). It has political significance only in the Acts passage, where Paul says that he is a citizen of Tarsus. Later, when the commander tells him that he had to buy his “citizenship [πολιτεία],” Paul responds that he received it from birth (Acts 22:28). Some think that Paul and his parents were taken to Tarsus as prisoners of war from Gischala in Galilee (so Jerome Vir. ill.5); others suggest that, while his parents may have come from Gischala, Paul himself was born in Tarsus, where his father, liberated, became a Roman citizen (cf. E. Haenchen, The Acts of the Apostles[1971], 620).
The only other occurrence of πολιτείαis found in Eph 2:12, where the Gentile readers are reminded that formerly they were “separate from Christ, excluded from citizenship in Israel and foreigners to the covenants of the promise, without hope and without God in the world.” The compound συμπολίτης, rare prior to the NT, occurs only in this same passage (2:19), indicating that Gentile Christians now share in the calling of Israel as “citizens with the saints” and thus as being part of “the household of God” (NRSV).
3The vb. πολιτεύομαιclearly has the general sense “to lead one’s life, conduct oneself” in Acts 23:1, which records Paul’s words to the Sanhedrin, “Brothers, up to this day I have lived my life with a clear conscience before God [πεπολίτευμαι  V 4, p 96  τῷ θεῷ]” (NRSV; NIV, “I have fulfilled my duty to God in all good conscience to this day”). In the only other use of this vb., Phil 1:27, godly living is also in view: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ἀξίως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τοῦ Χριστοῦ πολιτεύεσθε]” (NIV, both 1984 and 2011 eds.). The TNIV, however, has a different rendering: “as citizens of heaven live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is expansive transl. reflects the view of many commentators that here πολιτεύομαιalludes to the civic duties of citizenship, suggesting: “You know the pride and responsibility attached to living in a Roman colony: remember that you have a higher allegiance calling you to faithful conduct” (so M. Silva, Philippians, 2nd ed. [2005], 80).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95–9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삶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성은 자신이 속한 나라의 주권에 속해있기에 그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당연히 백성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다. 과거 많은 한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가 그것의 시민권을 얻고 국적을 취득했다. 단적인 예로 여권 파워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여권 파워도 굉장히 신장되어 있는 편이지만 얼마전 만난 후배가 미국 여권을 소유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인도 비자가 10년이나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서 매번 비자를 받아야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하지만 또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의무를 다해야한다. 교육, 납세, 국방, 근로의 의무가 있다. 국가의 백성으로서 이 의무를 다해야할 책임이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가운데 확장되도록 노력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빌립보 교회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로마 시민으로서의 득권을 누렸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로부터 한마음과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노력하고 대적자들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기를 원했다. 그는 이것이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이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거라는 사실을 밝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여러 성도들의 간증의 삶을 듣는 이유가 이것이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위해서 진력하고 있다는 사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꺽이지 않고 증거되고 진전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격려가 되는 것이다. 

29-30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 이다. 너희에게 이와 같은 싸움이 있는데 너희가 내안에서 보았고 여전히 지금도 듣고 있는 바와 같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는 그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다는 것은 현실이기에 고난은 올 것이다. 바울은 고난과 믿음이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신자들에게 큰 특권이다. 바울은 자신도 그와 같은 싸움을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기쁨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Troubles will come, because the reality is that believers in Christ will suffer for his sake. Paul teaches that both suffering and faith are gifts of God; for both, Paul says, have been granted to you. Suffering for the sake of Jesus is a great privilege (see Matt. 5:10–12; Acts 5:41). Paul again holds himself out as an example of one who has maintained his joy while experiencing the same conflic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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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for I know that fthrough your prayers and gthe help of hthe Spirit of Jesus Christ this will turn out for my deliverance, 20 as it is my eager expectation and hope ithat I will not be at all ashamed, but that with full jcourage now as always Christ kwill be honored in my body, lwhether by life or by death. 21 For to me m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22 If I am to live in the flesh, that means fruitful labor for me. Yet which I shall choose I cannot tell. 23 nI am hard pressed between the two. My desire is oto depart and pbe with Christ, for that is far better. 24 But to remain in the flesh is more necessary on your account. 25 qConvinced of this, rI know that I will remain and continue with you all, for your sprogress and tjoy in the faith, 26 so that in me uyou may have ample cause to glory in Christ Jesus, because of my coming to you again. 
fSee 2 Cor. 1:11
gGal. 3:5
hSee Acts 16:7
iRom. 5:5; [Joel 2:27; 2 Tim. 2:15]
jSee Acts 4:13
k[1 Cor. 6:20]
lRom. 14:8
m[Gal. 2:20]
n[2 Cor. 5:8]
o2 Tim. 4:6
pSee John 12:26
q[ch. 2:24]
r[Acts 20:25]
sver. 12
tRom. 15:13
uSee 2 Cor. 1: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1:19–26.

19절)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알고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먼저는 앞서 계속해서 이야기한 매임에 대한 부분에서의 구원이다. 이는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에서 자유케 되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영적인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후의 구절을 통해서 바울은 23절에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은 일임을 말하며 영원한 구원, 영생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서는 일시적인 구원과 영원한 구원의 긴장을 담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사나 죽으나 자신의 가장 큰 관심은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바울은 그가 풀려나기를 원하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사형을 당하게 되더라도 빌립보 성도들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더 좋은 곳에 있음을 알게하였다. 
Paul, who has prayed for the Philippians, now solicits their prayersfor deliverance(Gk. sōtēria), a term that could mean deliverance from prison (as some commentators understand it) or that could mean deliverance in the ultimate sense of eternal salvation (as others understand it). It seems likely that Paul intentionally left some ambiguity here, in light of the mention of his imprisonment in the preceding verses (see vv. 12–14) and in light of the eternal focus in the verses that follow (e.g., Paul’s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which is far better”; v. 23). The tension between temporal deliverance and eternal salvation is, in fact, evident throughout this passage (vv. 19–26), as evidenced by Paul’s words: “whether by life or by death” (in v. 20) and “I am hard pressed between the two” (in v. 23). Although Paul seems to have alluded to his temporal deliverance, clearly his longing for eternal salvation is “far better” (v. 23). In this regard, Paul alludes to Job 13:13–18 in this passage, where Job clearly speaks of his final destiny; and Paul speaks of his hope of not being ashamed, which is elsewhere related to the final judgment (cf. Rom. 5:4–5). Either way, Paul wants the Philippians to know that even if his expected deliverance from prison fails to materialize, and he is executed, he will still be “saved” to eternal life by Go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1.

바울은 이후의 25-26절을 통해서 볼때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할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갇혀 있지만 다시 너희들과 함께 있음을 통해서 풍성함을 누리기 원했다. 

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내가 아무일에든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이며 또한 온전히 담대해져서 이전과 같이 이제도, 살던지 죽던지 그리스도가 내 몸안에서 존귀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고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삶은 이세상의 가치, 물질적인 안전과 성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의 성취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그가 사는 것은 명백하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었다. 그에게 죽는 것도 유익한 이유는 바울이 이 땅의 고통많은 삶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임재안에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온전한 복음안에서의 정의를 하게 될때 이땅에서의 삶을 재정의 할 수 있게 된다. 
Paul’s life is not a matter of seeking his own comfort or advancement. It is all about seeking the advancement of Christ’s kingdom: to liveis tantamount to serving Christ. In fact, to dieshould be seen as gain, because it would mean that Paul would be freed from his trouble-filled life on earth to rejoice in Christ’s presenc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1.

바울이 자신의 몸에 대한 관점은 분명했다. 몸 자체가 그의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도구로, 복음 사역의 수단으로 이를 이해 했다.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에게 몸, 건강이 우상이 되어 있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성전된 몸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지만 이것이 우상이 되어서 마땅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섬겨야할 기회들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골 1:24, 개정)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3절) 바울은 삶과 죽음,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사이의 갈등을 토로하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선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육신으로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더욱 유익함을 알고 있었다. 
본문속에서 바울의 부활관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는 신자는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고 멀지 않아 그들의 몸이 그 죽은자들로부터 부활될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처한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고난을 곱씹으며 불평과 불만을 하지 않고 빌립보 성도들에게 섬김을 추구하는 삶의 모델,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살아가는 신앙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분명하게 신자들의 삶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종교들은 환생하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복음은  오히려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을 말한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은 절대적으로 죄와 고통에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신자들은 마지막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이며 타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교제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to depart and be with Christ.Paul here refers to what will happen to him when he dies. Before the final “day of Christ Jesus” (v. 6), those who die go to joyful fellowship with Christ (cf. Luke 23:43). Believers do not cease to exist at death in order to be re-created again from scratch later; rather, they go to be with Christ spiritually, which is “better by far” than being beset by sin and suffering. But that is still not God’s final purpose: ultimately, at the final resurrection of all believers, God will restore fellowship between believers and Christ that is both physical and undisturbed by the effects of the fall.
v. verse in the chapter being commented on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6.

24-26절) 바울이 육신으로 있는것,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더 유익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거하는 것)과 너희 무리와 함께 계속해서 있는 것이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시 가는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한 자랑이 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빌 1:24-26, 새번역) 『[24]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25] 나는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26]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가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랑거리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알기에 오는 자신감을 의미한다. 이것에 반대되는 자랑은 부끄러움이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그분을 신뢰하는 이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또한 이 자랑은 내적인 자신감 뿐만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외치는 것이다. 
boasting.Not negative, which it usually is in English; it goes back to Jer 9:23–24. First, it means having confidence that Jesus has saved us and will save us from judgment. The opposite of boasting is shame, and God promises that “the 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1 Pet 2:6; see Isa 28:16 [in the Septuagint, the pre-Christian Greek translation of the OT]; Rom 9:33; 10:11). Second, in common with our English usage, it is vocal: it is not only an inner confidence but also an eagerness to preach the good news (cf. Gal 6:14).
OT Old Testament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6–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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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I want you to know, brothers,5that what has happened to me has really xserved to advance the gospel, 13 so that it has become known throughout the whole imperial guard6and yto all the rest that zmy imprisonment is for Christ. 14 And most of the brothers, having become confident in the Lord by my imprisonment, are much more bold ato speak the word7without fear. 
15 bSome indeed preach Christ from envy and rivalry, but others from good will. 16 The latter do it out of love, cknowing that I am put here for dthe defense of the gospel. 17 The former proclaim Christ eout of selfish ambition, not sincerely but thinking to afflict me in my imprisonment. 18 What then? Only that in every way, whether in pretense or in truth, Christ is proclaimed, and in that I rejoice. 
5Or brothers and sisters. In New Testament usage, depending on the context, the plural Greek word adelphoi(translated “brothers”) may refer either to brothersor to brothersand sisters; also verse 14
xver. 25; 1 Tim. 4:15
6Greek in the whole praetorium
y[Acts 28:30, 31; 2 Tim. 2:9]
z[Luke 21:13]; See ver. 7
a[Acts 4:31]
7Some manuscripts add of God
bSee 2 Cor. 11:13
c[1 Cor. 9:17]
dver. 7
ech. 2:3; See James 3: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1:12–18.

12절) 바울은 빌립보 형제들을 향해서 자신이 당한 일, 바로 옥에 갇혀 매임을 당한 것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원했다. 
본문에 진전이라고 사용된 단어는 ‘프로코페’라는 단어로 발전, 진전, 진행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빌 1:12, 25; 딤전 4:15에 사용된다. 대부분 영적인 성장을 의미하는데 12절에서는 복음의 진보, 25절에서는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 딤전 4:15에서는 사역자로서의 디모데의 성숙함의 진보를 의미한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성도들로 하여금 과거 혹은 현재의 문제에 안주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전진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12절은 전형적인 서신의 구조이다. 먼저는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라는 표현, ‘내가 당한 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친근한 서신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The opening clause (v. 12) offers all kinds of clues as to the nature and structure of the letter. First, Paul begins with the exact words found in scores and scores of ancient letters, especially so-called family letters: I want you to know, brothers [and sisters].Second, what has happened to me(“my circumstances/affairs”), which also occurs frequently in these letters, serves as a key to the macro structure of Philippians, at least the first half (see 1:27 [“about you” = your affairs], 2:19 [your affairs] and 23 [my affairs]).*This is exactly the stuff of letters of friendship in the Greco-Roman world.
*1:12Although a splendid idiomatic rendering of the Greek, the NIV’s what has happened to meobscures a very important structural point for this letter. The Greek phrase ta katʿ eme(see also Col 4:7; cf. Eph 6:21), whose equivalent occurs frequently in letters of friendship, means literally “my circumstances/affairs.” It is responded to at the beginning of the next section in verse 27 with “your circumstances/affairs” (NIV about you) and appears again twice at the beginning of the next section (2:19, “your affairs”; 2:23, “my affairs”). Not only is this the stuff of friendship letters, but in this case it seems clearly to be the structural key to chapters 1, 2.
 Gordon D. Fee, Philippians, vol. 11, The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58.

13절) 그러므로 모든 시위대와 그 밖의 다른 모든이들에게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이 알려졌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이 편지를 썼다고 믿는 이들은  본문의 시위대를 총독의 거처와 그 거처에서 사는 이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다른 의미로 해석했고 또한 이를 로마에 있는 황제의 특별 경비대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본 서신의 기록 연대가 달라질 수 있다. 
바울은 매임을 당했을때 그곳에서도 예수가 주이심을 선포했다. 가이사가 주라고 고백하는 그 중심에서 그는 예수가 주이심을 선포했을때 그의 매임을 통해 그리스도가 주이심이 그들에게 증거된 것이다. 
대제사장 안나스의 고소로 바울은 펠릭스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베스도에게. 이후 바울은 로마로 압송되어 갇히게 된다. 
Accusations by the high priest Ananias led to Paul’s imprisonment first under Felix (Acts 24) and then under Festus (Acts 25), after which he was taken and placed under house arrest in Rome (Acts 28:16).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6.

14절) 형제들 다수가 바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안에서 더욱 담대하게 되어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그 말씀을 전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담대함을 형제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형제들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할 수 있게 하였고 이를 통해서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울은 13절에서 복음이 전해짐으로 인해서, 14절에서는 자신의 매임으로 형제들이 담대해 짐으로 인해서 기뻐했다. 또한 18절 에서는 그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복음이 전해진다면 기뻐했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의 목표가 뚜렸한 인생을 살았다. 그렇기에 지엽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12-14절) 복음은 감옥 내부와 외부에서 전파되었다. 바울과 또한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그의 동료들은 천하를 어지럽히던 이들(행 17:6)이었다. 이들은 감옥 안에서는 가이사의 심복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감옥 밖에서는 이들의 담대함을 통해서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게 했다. 


15-18절)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또 다른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후자는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그 일을 했고, 전자는 개인적인 야망으로 진실함이 아니라 바울의 매임에 고통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그렇다면 겉치레로 하던지 진리로 하던지 무슨 방식으로 하던지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다면 나는 기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분명히 바울에 대해서 적대적인 이들로 3장에 언급된 유대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이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바울을 질투하여 그의 연약함, 예를 들면 말주변이 안 좋다거나 그의 육체의 연약함등의 문제로 바울을 괴롭힌 이들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복음을 증거한다면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The identity of those here who preach Christ from envy and rivalryis difficult to determine. They are clearly antagonistic to Paul, and thus one could imagine they are the same “Judaizing” people mentioned in ch. 3. But it is hard to see how Paul could rejoicein the proclamation of something (namely, a return to the old covenant) which he saw as a betrayal of the good news (see esp. the letter to the Galatians). It seems more likely that these were other Christians who preached a generally sound gospel but were personally at odds with Paul. They may have dismissed him because of his poor speaking abilities (see 1 Corinthians 1–2) or his constant suffering and weakness (see 2 Corinthians); whatever their rationale, they were not motivated by lovebut only by a desire to harm Paul in some way. But Paul, like Jesus, is not concerned for his own interests (cf. Phil. 2:4), and he will “rejoice” as long as the gospel is progressing.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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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 thankmy God fin all my remembrance of you, always in every prayer of mine for you all makingmy prayer with joy, gbecause of your partnership in the gospel from the first day until now. And I am sureof this, that he who beganha good work in you iwill bring it to completionat jthe day of Jesus Christ. Itis right for me tofeel this way about you all, because I holdyou kin my heart, for you areall lpartakers with me of grace,4both min my imprisonment and in nthe defense and confirmation of the gospel. For oGod is my witness, phow I yearnfor you all 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 And it is my prayerthat qyour love may aboundmore and more, rwith knowledge and all discernment, 10 so that you may approvewhat is excellent, sand so bepure and blameless tfor the day of Christ, 11 filleduwith the fruit of righteousness that comes vthrough Jesus Christ, wto the glory and praise of God. 
eSee Rom. 1:8
fRom. 1:9; Eph. 1:16; 2 Tim. 1:3
g[ch. 2:12; 4:15; Acts 16:12–40]
h[1 Thess. 1:3]
iPs. 57:2 (Heb.); 138:8; [1 Thess. 5:24]
jSee 1 Cor. 1:8
k2 Cor. 7:3
l[ch. 4:14]
4Or you all have fellowship with me in grace
mActs 20:23; 26:29; Col. 4:18; 2 Tim. 2:9; Philem. 10, 13; See Eph. 3:1
nver. 16
oSee Rom. 1:9; 9:1
p[ch. 4:1; Rom. 1:11; 15:23; 1 Thess. 3:6; 2 Tim. 1:4]
q1 Thess. 3:12; 2 Thess. 1:3
rCol. 1:9; 3:10; Philem. 6
sActs 24:16; 1 Thess. 3:13; 5:23
tver. 6
u[Col. 1:6, 10]; See James 3:18
v[John 15:4, 5]
wSee Eph. 1:12, 14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1:3–11.




3-11절)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사와 기도, 특별히 감사는 3-8절에서 드러나는데 4절은 기쁨, 6절은 확신, 8절은 사모로 드러난다. 
3-8절은 바울의 감사, 9-11절은 간구의 내용이다. 

3-5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했는데 그 이유는 첫날부터 복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빌립보서의 중요한 주제인 이 기쁨은 복음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인데 이 참여는 사도에 대한 재정적인 후원뿐만 아니라 그의 안녕을 위한 개인적인 깊은 관심을 포함한다. 

5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재정적인 지원을 포함한다. 
 Paul rejoices that the Philippians join in the work of the gospel, which includes financially supporting him (4:15). from the first day.When they first accepted the gospel (cf. 4:15).
cf. compare, conf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5.

빌립보서의 기쁨과 기뻐함



6절) 영적 성장의 기초는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이를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하나님이 이루셨고 이루고 계시고 이룰 것이라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Paul is sureabout God’s commitment to the Philippians. The foundation for spiritual growth is recognizing that it is God who began a good work in youand will bring it to completion. Genuine spiritual progress is rooted in what God has done, is doing, and will do. His faithfulness ensures that he will be with believers until Jesus returns (the day of Jesus Christ; cf. 2:16; 1 Thess. 5:2–11; 2 Pet. 3:10–13; Rev. 20:11–21:8). They can have confidence that the God who has saved them will never let them go, and that they will inherit their eternal rewar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0.

6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가지는 확신에 대해서 말해준다. 이 확신은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 착한 일을 이루실 것에 대한 확신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말한다. 이 주권사상이 강조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약화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이 간과되기 쉽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속에서 바울의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확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에 대한 기도로 이끌고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 속에서 그분이 이를 능히 이루고 성취하실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7절)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 여기서 변명함은 불신자들의 도전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라면 확정함이란 진리안에 있는 신자들로 하여금 좀더 깊은 차원의 복음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빌립보 교인들이 갇힌 자된 바울을 돌보았고 복음을 변증하고 선포하는 일에 함께 했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복음은 변증되어야 하고 또한 확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가운데 복음이 복음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복음되기 위해서 그 복음이 일차적으로 선포되어야 하고 그 복음이 확증되어야 한다. 변증을 위해서는 선포하고 가르치고 설득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확증되기 위해서는 삶을 통해서 복음이 능력있게 구현되고 이루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또한 본인이 직접 그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서 전하는 자는 복음의 확신을 경험할 수 있다. 

8절)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글 표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를 사모한다라고 표현한다.  본문에 심장으로 표현된 단어는 ‘스플랑크논’이라는 단어로 애타는 마음, 감정의 자리, 창자, 내부기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동사로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라는 의미이다. 

NT 1The noun σπλάγχνον(always pl.) occurs 11× in the NT, but eight of the occurrences are found in Paul (incl. 3× in the brief letter to Philemon), and   V 4, p 353  only once in the Gospels (Luke 1:78; it is used in its lit. sense only in Acts 1:18). By contrast, all twelve occurrences of σπλαγχνίζομαιare found in the Synoptic Gospels. In addition, two compounds occur in the NT: εὔσπλαγχνος, “good-hearted, compassionate” (Eph 4:32; 1 Pet 3:8; cf. T. Zeb.9.7), and the previously unattested term πολύσπλαγχνος, “[very] compassionate”] (Jas 5:11, with οἰκτίρμωνG3881).
2The vb. σπλαγχνίζομαιis used with ref. to the attitude of Jesus, but also when describing the actions of key persons at the turning points of some parables. (a)In the former case the meaning goes beyond ordinary feelings of sympathy; rather, it points to the messianic compassion of Jesus (cf. H. Köster in TDNT7:554–55). Thus we read that when Jesus saw the crowds following him, “he had compassion on [περίG4309, lit., ‘about’] them, because they were haras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Matt 9:36; in the par. Mark 6:34 and in every other instance the prep. used is ἐπίG2093, “on”). In Matt 14:14 Jesus’ compassion is associated with the healing of the sick (here too Mark 6:34 may be regarded as the par.), and the same is true in Matt 20:34 and in Mark 1:41 (in the latter passage cod. D [supported by some Lat. mss.] has ὀργισθείς, “he became angry,” a reading accepted by NIV 2011 ed. [“was indignant”] in agreement with some commentators). The father of a demon-possessed boy asked Jesus to have compassion (Mark 9:22). In connection with the feeding of the four thousand—a distinctively messianic act reminiscent of the giving of manna (see μάνναG3445 and cf. John 6)—Jesus himself said, “I have compassion for these people; they have already been with me three days and have nothing to eat” (Matt 15:32 par. Mark 8:2). And Luke 7:13 reports that when Jesus saw the widow who had just lost her son, “he had compassion for her and said to her, ‘Do not weep’ ” (NRSV; NIV, “his heart went out to her”).
(b)In the parables of the unforgiving servant (Matt 18:23–35) and the prodigal son (Luke 15:11–32) σπλαγχνίζομαιforms the turning point of each story by expressing the strongest feeling of a merciful (Matt 18:27) or loving (Luke 15:20) reaction over against acts of rejection (Matt 18:34; Luke 15:28; cf. TDNT7:554). In both parables this vb. makes the unbounded mercy of God visible; in the former we see also his deadly and decisive anger against the one who, having experienced mercy, denies the divine act by being unmerciful himself. Then in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Luke 10:30–37) σπλαγχνίζομαι(10:33) expresses the attitude of complete willingness to use all available means for saving at the crucial moment. It contrasts with the actions of those who merely passed by on the other side (10:31–32). The Samaritan’s behavior reflects the mercy (ἔλεοςG1799) that Jesus expects of us (10:37). Humanity and neighborliness (10:36) are not abstract qualities; they involve concrete action. Note in this connection the expression “to shut one’s σπλάγχνα,” used of refusing help to those in need (1 John 3:17).
3In Luke 1:58 (as in T. Zeb.7.3; 8.2; see above, JL 2), the noun σπλάγχναis used with the gen. of ἔλεοςto denote the depth of God’s love (Eng. versions   V 4, p 354  usually render the phrase “tender mercy”). Paul speaks of the σπλάγχναof Christ in Phil 1:8, though here the allusion is to his own affection: “I long for all of you with the compassion of Christ Jesus” (NRSV); the point is that Christ is the source of the love that embraces and lays claim to the apostle’s whole personality (cf. also Phlm 20, “refresh my heart [μου τὰ σπλάγχνα] in Christ”).
Elsewhere Paul uses the term more directly with ref. to the center of a person’s loving action, thus roughly equivalent to heart. In 2 Cor 6:12 he accuses his readers of restricting their love for him, while in 7:15 he says of Titus, “his heart goes out all the more to you” (NRSV; NIV, “his affection for you is all the greater”). The term is used in combination with οἰκτιρμόςG3880 in Phil 2:1 and Col 3:12 to underscore the need for wholehearted compassion among believers.
In Phlm 7 and 20 the refreshing of the σπλάγχναof believers means the refreshing of the whole person; there would be no significant change in meaning if a pers. pronoun had been used instead, but the expression certainly adds pathos to the statements. And when Paul refers to Onesimus as τὰ ἐμὰ σπλάγχνα(v. 12), he emphasizes the strong bond between them (NIV, “who is my very heart”). That the word is used three times in this short letter shows Paul’s inner participation and personal concern.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352–354.

9-11절) 바울의 기도에서 그의 첫번째 간구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미덕중 가장 중요한 사랑이 점점 더 더해지고 이에 지식과 모든 총명이 함께 할 것을,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지혜로운 행동으로 표현되기를 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아갈 수록 점점더 위대한 것을 행하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기쁨의 순종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순수하고 흠이 없이 발결된 것이라는 확신을 줄 것이다. 이는 일순간의 영적인 완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자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의의 열매는 신자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다. 
The first petition in Paul’s prayer is that God would cause the cardinal Christian virtue of loveto abound more and more, and that it would be accompanied by knowledgeand all discernment, so that the Philippians’ love would find expression in wise actions that would truly benefit others and glorify God. As Christians grow in their understanding of what it means to follow Jesus, they will increasingly be able to affirm and practice what is excellent. Such joyful obedience to God will give them the confidence of being found pure and blamelesswhen Jesus returns. This does not imply instantaneous spiritual perfection but rather an increasing likeness to Christ. But fruit of righteousnessis not produced in the believer’s own power. Because that fruit comes through Jesus Christ, it will result in the glory and praise of God.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0.

9절) 바울은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할 것을 기도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단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식과 모든 총명을 구비한 사랑의 풍성함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아가페’, 지식은 ‘에피그노시스’, 총명은 ‘아이스테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식은 ‘기노스코’ 알게 하다, 깨닫다, ‘그노시스’ 지식, 앎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여기에서 나아가 '에피+그노시스’ 완전한 앎, 인식을 의미한다. 또한 총명은 지식, 재능, 분별력, 전문적인 기술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 3번 등장하는데 눅 9:45, 빌 1:9, 히 5:14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총명이라는 단어는 감각기관을 통한 구체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연습을 통해서 성장해야하는 영적인 은사로서의 도덕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NTThree terms from this word group occur in the NT, each only once. The vb. αἰσθάνομαιis used by Luke in a clear mental sense to describe the disciples’ failure to comprehend Jesus’ prediction of his suffering: “But they did not understand [ἀγνοέωG51] what this meant. It was hidden from them, so that they did not grasp it [ἵνα μὴ αἴσθωνται αὐτό]” (Luke 9:45). In Phil 1:9 Paul places discernment (αἴσθησις) and knowledge (ἐπίγνωσιςG2106) side by side as two of love’s expressions and functions. Here knowledge is perhaps directed primarily to God; true discernment is necessary for human relationships, where it must distinguish between good and evil and judge accordingly (cf. esp. 1:10, which uses the vb. δοκιμάζωG1507, “to examine, approve”). Finally, Heb 5:14 says of “the mature” that their “faculties [αἰσθητήρια] have been trained by practice to   V 1, p 180  distinguish good from evil” (NRSV). As in the LXX, the term here refers not to the concrete organ of sense but to a moral ability—a spiritual gift that must be developed through habitual practice.
 Moisés Silva, e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Grand Rapids, MI: Zondervan, 2014), 179–180.

10절) 선한 것이 무엇인지, 우수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를(인정하기를) 원하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기를 원한다. 
이처럼 진실하여 허물 없음, 거룩하고 순결하고 흠이 없음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으로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드렸다. 기도를 통해서 바울은 이 일이 마지막 날까지 이루어질 것을 구하며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기도제목
  1.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2. 이를 통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3. 나아가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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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and Timothy, servants1of Christ Jesus, 
To all the asaints in Christ Jesus who are at Philippi, with the boverseers2and cdeacons:3
d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1For the contextual rendering of the Greek word doulos,see Preface
a2 Cor. 1:1; Col. 1:2
bSee Acts 20:28
2Or bishops; Greek episkopoi
c1 Tim. 3:8, 12
3Or servants, or ministers; Greek diakonoi
dRom. 1:7; 1 Cor. 1:3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빌 1:1–2.

이 편지를 바울과 디모데가 쓴다라고 서문은 밝힌다. 물론 바울이 직접 썼을 수도 있고 바울의 말을 디모데가 받아 적는 형태였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디모데 자신이 빌립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빌 2:19-22)

1-2절) 바울과 디모데의 인사말
본문은 바울 서신의 전형적인 인사말에 해당한다. 수신자들(빌립보에 사는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을 밝히고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구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특징중에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밝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살전, 후, 빌, 몬 이 4서신에서는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서언에 밝히지 않는다. 다른 서신서들에서는 대부분 자신이 사도임을 힘주어 강조하는데 반해서 본문에서는 자신과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임을 밝힌다. 이는 그가 처음 개척한 이 빌립보 교회에서는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도전이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서신들의 경우와 달리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바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돕고 후원했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강조하고 이를 설득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섬김을 이야기한다. 
감독은 장로들로 회중을 영적으로 돌보는 책임을 맡은 이들을 말하고 집사들은 실제적인 섬김의 일을 맡은 이들을 의미한다. 
Paul, along with Timothy, gives the standard early Christian greeting of graceand peace. Paul does not identify himself as an apostle but designates Timothy and himself as servants. The emphasis on service anticipates the rest of the letter, and this emphasis is seen especially in what is said of the humiliation of Christ Jesus (2:5–11). It is uncertain what level of formal church governance is implied by overseers and deacons. The former are presumably elders, who would be charged with spiritual oversight of the congregation (cf. Acts 14:23 [with note]; 20:17, 28; 1 Tim. 3:1–7; Titus 1:5–9; James 5:14; 1 Pet. 5:1–4), while the latter would be entrusted with matters of practical service (cf. Acts 6:1–7; 1 Tim. 3:8–1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80.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성도(saint, God’s holy people)라고 부른다. 이런 호칭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명칭이었는데 지금 바울이 이방의 회중들을 향해서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God’s holy people.As people who belong to God and are incorporated into his service, they are set apart from the world for him. The OT uses the phrase “holy people” of Israel (e.g., Exod 22:31), so it is striking that Paul can freely apply it to what was probably a predominantly Gentile congregation in Philippi. As Paul emphasizes in ch. 3, those who believe in Christ and are incorporated into him now share in the privileges God bestowed on Israel in the OT. holy.Christ’s death has made Christians holy (Eph 5:25–26).
OT Old Testament
e.g. for example
ch. chapter
OT Old Testament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5.

본문에서 성도들을 묘사하면서 이중적인 신자의 장소를 사용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며 동시에 빌립보에 사는 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느냐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서울에 산다. 동시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면 우리들도 성도가 되는 것이다. 당시 빌립보의 지리적인 위치나 배경과 비교해볼때 로마의 식민지에서 바로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표현은 큰 의미가 있다. 

종의 의미
Second, the identification itself, “ ‘slaves’ [douloi]20of Christ Jesus,” anticipates a significant motif of the letter. While “servant,” found in most English translations,21is an acceptable rendering, it also causes the English reader to lose something of its force. For the (basically Gentile) readers of this letter, this word would have only meant “slave.” Indeed, douloiwere so common in Greco-Roman society that no one would have thought it to refer other than to those owned by, and subservient to, the master of a household.22To be sure, the institution of slavery in antiquity23was a far cry from the racial slavery that blighted American society—and the English society that made it possible by the slave trade. Even so, the slave in the Roman Empire was not a free person, but “belonged to” another. Thus, whatever else, the word carries connotations of humility and servitude.
20Altogether this word group appears 59 times in the Pauline corpus: δοῦλος, “slave” (30x); συνδοῦλος, “fellow-slave” (2x); δουλέυω, “to perform the duties of a slave, to serve” (17x); δουλεία, “slavery” (4x); δουλόω, “to enslave” (6x). On the meaning of this word in Paul see, inter alia, K. H. Rengstorf, TDNT2.261–80; H.-G. Link and R. Tuente, NIDNTT, 3.589–98; A. Weiser, EDNT, 1.349–52; Sass, “Bedeutung.”
21Cf. KJV, AV, RSV, NRSV, NIV, GNB, NEB, NAB, JB. Weymouth and the NASB have “bondservants”; Confraternity has “bondsmen.” The latter are attempts to find a middle way between the rather totally negative connotations of “slave,” conditioned as it is by slavery in American history, and the less than servitude connotations in the word “servant.” The latter, to be distinguished from a slave, was designated by the word διάκονος, which appears in the next phrase where it is translated “deacons.” But because the word “slave” often carries the connotation of “servility,” which δοῦλος never does in Paul (so also Vincent, 2), it fares little better than “servant” as an adequate translation into English. Cf. Michael, 2–3.
22Cf. Bruce, 26, who dismisses altogether the possibility of a second connotation (as suggested below).
23Their slavery, which originated with captives from war, became primarily a socioeconomic phenomenon. For overviews of Greco-Roman slavery, see S. S. Bartchy, ABD, 6.65–73, and E. Ferguson, Backgrounds, 56–59; see their bibliographies for more detailed studies.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62–63.

감독들과 집사들
Overseers.49The origin of the word episkoposas a title for one form of leadership in the NT church is shrouded in mystery, and therefore an object of scholarly debate; but there can be little question that in Pauline usage, as with all his designations of church leaders, it first of all denotes a “function,” rather than an “office.”50The first clue to understanding lies with the verb from which it is derived, whose primary meaning is to “visit” in the sense of “looking after” or “caring for” someone.51Thus in the speech in Acts 20:28 Paul is reported to urge the Ephesian elders to “give heed to … the flock, among whom[not ‘over whom’] the Holy Spirit has placed you as episkopoi, so as to shepherd God’s church.”52While one need not doubt the titular implications of this usage, the accent is on function. And in 1 Timothy 3 and Titus 1, although the concern is with character qualifications, even there they are described as those who “care for God’s church” (1 Tim 3:5). The nature of this designation, together with the fact that it occurs in first position,53makes it reasonably certain that those who bore this title held the primary leadership roles in the local church. They were probably responsible for “caring for the people” in most senses of that term, including administration, hospitality, and pastoral care.
Deacons. This is the more difficult term, because Paul uses it in so many different ways. The word itself (diakonos)means “servant,” and this is its most common usage in Paul. He uses it of Christ (Rom 15:8), of government officials (Rom 13:4), of himself (1 Cor 3:5; 2 Cor 3:6), and of his co-workers (1 Thess 3:2; Col 1:7). In each of these cases, as with “overseer,” it is primarily a “functional” term, designating someone who serves others. But in Rom 16:1 Paul uses diakonosto refer to Phoebe in a way that seems very close to a title as well, which is certainly the case here—and in 1 Tim 3:8. From our distance it is nearly impossible to know either what their function was or how they are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overseers,” although it is almost certain that they are. If the functional sense of these terms is also the clue to their titular use, then the “overseers” are probably those who give general oversight to the congregation, while the “deacons” are distinguished by their actual deeds of service.54
49Gk. ἐπίσκοποι, found here and in 1 Tim 3:2 and Tit 1:7 in Paul; cf. Luke’s version of Paul’s “speech” in Acts 20:28. Because of the inherent interest both in the term itself and in early church leadership in general, there is a considerable literature on this term. Among many other items, one should note H. W. Beyer, TDNT, 2.606–22; L. Coenen, NIDNTT, 1.188–92 (further bibliography, 200–201); Lohse, “Entstehung”; J. Rohde, EDNT, 2.35–36; Porter, “ἐπίσκοπος”; Stalder, “Episkopos,” plus the items noted above (n. 43). For an earlier view, still worth reading, see the excursus in Lightfoot, 181–269.
50So esp. in the LXX, where it is altogether a “functional” term. See, e.g., Num 4:16 (ἐπίσκοπος; Eleazar, who was “in charge of” the oil); Num 31:14 (those in charge of the army are called “the ἐπίσκοποι of the forces”); Jdgs 9:28 (Zebul, Abimelech’s “deputy” [v. 28], is the ἐπίσκοπος of the city). In some more recent literature a septuagintal background has been called into question, finding it instead in Greek usage for governmental supervisors or officials in societies; see Reumann, “Contributions,” 449–50 (following E. Dassmann, “Hausgemeinde,” and G. Schöllgen, “Hausgemeinden”). This may well be so, especially since it would have been a convenient term to adopt; but the emphasis is all the more on function rather than on title as such.
51In Greek literature the noun and verb are frequently used to refer to a “god,” whose primary function would be to “care for” people. This usage occurs of Christ in 1 Pet 2:25; cf. 1 Clem 59:3 (of God).
52Lightfoot, 95–99, followed by many others, argued that πρεσβύτεροι (“elders”) and ἐπίσκοποι (“overseers”) are interchangeable terms. While that is true to a degree—they are almost certainly not coterminous—more likely, on the basis of the evidence in the Pastoral Epistles, “elder” is the broader term that included all people in leadership, including “deacons” (see Fee, 1 Timothy, 78).
53Both here and in 1 Timothy. This is further confirmed by the fact that by the second c. it had become the primary title for local, apparently area-wide, leaders. The translation “bishop” derives from this latter usage and should never be used, since it has altogether misleading implications for this plural, which refers to local leaders of some sort.
54All of this acutely raises the question of translation, so as not to mislead. Do we use “titles” (such as “deacon” has become in English) or “functional” equivalents, such as “helpers” (as GNB)? The latter would seem preferable, although it is also bland, considering the “servant” implications of the word.
 Gordon D. Fee, Paul’s Letter to the Philipp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B. Eerdmans Publishing Co., 1995), 68–69.

은혜와 평강(카리스와 에이레네)를 비는 것은 바울의 전형적인 인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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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제목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이다.(1:1)

소개
빌립보는 바울이 그의 두번째 선교여행중에 처음 방문한 로마의 식민지로 이때는 AD50년 경이다. 첫 회심자는 루디아와 그녀의 가족들이며, 간수장과 그 가족들, 또한 다른 이들이 회심했다.  
Paul first visited the Roman colony of Philippi on his second missionary journey (Acts 16:12) in the early 50s. The first converts were Lydia and her household (Acts 16:14–15), the jailer and his household (Acts 16:33–34), and others (Acts 16:40). The letter also names Epaphroditus (2:25) and Euodia and Syntyche (4:2). There were probably many more, though it is impossible to know how many.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2.

저작 연대와 장소
빌립보서가 언제, 어디에서 바울에 의해서 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본문의 1:13의 바울의 매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바울은 에베소 감옥에 AD55년 경에, 가이사랴의 감옥에 AD57-59에, 로마의 감옥에 AD60-62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 4:22절의 가이사의 집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아마도 로마의 감옥에 있던 당시(60-62년경)로 볼때 네로가 황제였던 때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지 10년정도 되었던 때에 이 편지가 작성된 것으로 본다.  
We do not know for certain when or where Paul wrote the letter to the Philippians. Conclusions depend largely upon which imprisonment 1:13 refers to and upon what “palace guard” (1:13) and “Caesar’s household” (4:22) mean. Paul might have been in prison in Ephesus about AD 55, though this is not based on strong evidence; he certainly was in prison in Caesarea about AD 57–59 (Acts 24:22–27) and in prison in Rome about AD 60–62 (Acts 28:15–31). The reference to “Caesar’s household” does not rule out Caesarea, but Rome is more likely. Paul, therefore, probably wrote Philippians from Rome about AD 60–62, while Nero was emperor, and so the church was about ten years old when he composed this letter.
 Douglas J. Moo, “The Letters and Revelation,”in NIV Zondervan Study Bible: Built on the Truth of Scripture and Centered on the Gospel Message, ed. D. A. Carson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5), 2412.

빌립보 도시
42년 빌립보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에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는 이 마케도니아 지방의 도시를 참전 용사들과 함께 재건했다. 이 도시는 세금을 면제 받았고 추가적인 토지 소유 특권을 인정받았다. 빌립보 도시는 좋은 농토를 가졌고 2세기 경에 세워진 로마의 상업 도로인 에그나티아 도로에 있었다. 




목적, 계기, 배경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교회이다. 왜냐하면 이곳은 유럽에서 그가 세운 처음 새운 교회이기 때문이다.(행 16:6-40)
바울을 통해 자주장사 루디아가 처음 회심했고  바울과 실라는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구출해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빌립보 간수에게 복음이 전해졌다. 
바울은 편지를 통해서 자신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지만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이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교회안에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빌립보 교인들은 문제 많은 고린도나 갈라디아교회와는 달리 건강한 공동체로 보인다. 바울은 과거의 청취에 만족하기에는 복음이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세상은 너무나도 위험하기에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할 것을 말했다. 
바울은 영적인 짐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어떤 특별한 신비한 통찰력을 통해서 소수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라는 익숙한 덕목에 해한 꾸준한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The church at Philippi had a special significance for Paul, since it was the first church he founded in Europe (see Acts 16:6–40). The first convert was Lydia, a seller of purple goods, and women continued to have a prominent role in the Philippian church (e.g., Phil. 4:2). Paul and Silas were imprisoned there for exorcising a demon from a fortune-telling slave girl, but God miraculously delivered them, and they proclaimed the gospel to the Philippian jailer. Paul likely visited the Philippians a few times after his initial departure, and they maintained active support for his ministry (4:15–16).
Paul wrote to the Philippians from prison (see above), prompted in part by his reception of their latest gift, sent with Epaphroditus (himself a member of the Philippian congregation). But the letter is far more than an extended thank-you note. Paul wanted to pass along the important news that Epaphroditus had recovered from a serious illness (2:25–30), and that he was sending him along to them with the hope that soon he might also send Timothy for a visit (2:19). Timothy and Epaphroditus were also mentioned because they exemplified the Christ-centered, gospel-focused life Paul wanted the Philippians to live.
Paul himself also wanted to encourage the Philippians in their faith, and his imprisonment meant he could do that only through a letter. Even a house imprisonment (assuming Paul was in Rome, Acts 28:16) could have been a source of great anguish, particularly with the possibility of execution looming, and so Paul wanted to assure the church that he was still in good spirits through his faith in Christ (Phil. 1:12–18). He was also eager to thank them for their continued support: imprisonment carried with it a social stigma,   p 2276  and it would have been easy for the Philippians to turn their back on Paul at this point. But they had remained faithful to him.
Yet Paul’s purpose in writing goes even further. He is above all concerned that the Philippians continue to make progress in their faith (1:25). While there were no doubt conflicts within the congregation (notably that of Euodia and Syntyche, 4:2), the Philippians appear to be a healthy congregation, in contrast to the troubled groups in Corinth and Galatia. Can they then relax and rest? Paul’s answer is an emphatic no. The world is too perilous, and the gospel too glorious, for them to be content with past achievements (3:12–16). They must follow Paul’s example and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3:14).
Paul explains what spiritual progress will look like. Christian maturity does not come through special mystical insights available to only a few, but rather through the patient practice of the familiar virtues of love and service to others. Paul presents himself as one model for such a lifestyle (1:12–18; 3:17; 4:9), and he commends Timothy and Epaphroditus in similar terms (2:19–30). But the supreme model for progress in faith is Jesus himself, and the centerpiece of Philippians is the magnificent “hymn of Christ” in 2:5–11. Jesus willingly let go of the privileges of divine glory to take up the form of a servant, and even embraced the ultimate humiliation of the cross, in order to liberate the world from sin. He is thus accorded the highest glory, receiving universal worship as God’s Messiah.
Those who follow Christ’s example have the hope that God will also vindicate them on the day of Christ, and thus they can rejoice (1:18; 3:1; 4:4). They can also be confident that God will not leave them alone to make their way through the world as best they can. Spiritual progress involves effort: they are encouraged to “work out [thei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2:12). But they can do so knowing that “it is God who works in [them], both to will and to work for his good pleasure” (2:13).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2275–2276.


연대표



핵심 주제

  1.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삶속에서 지속적인 진보를 이루어갈 필요가 있다. 
  2. 올바른 영적인 관점은 신앙의 진보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3.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성실한 섬김의 최고의 예이며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역할 모델로 섬길 수 있다. 
  4. 고난은 올 것이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서 기쁨으로 고난을 맞을 수 있다. 
  5. 기도는 기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6. 복음은 개인주의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서로 풍성한 교제를 나누어야 하며 복음을 증진하기 위해서 섬김을 통해 하나되어야 한다. 
  7. 구약과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지위를 제공할 수 없다. 신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의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8.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 십자가위에서의 그분의 고난 때문에 그는 지금 구주와 그리스도로 높임을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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